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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만은방랑자 Jun 13. 2017

[밑줄긋는독서]종의 기원-정유정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 첫 문장부터(프롤로그 제외하고) 강렬했다. 읽을 소설을 고를 때, 첫 문장 혹은 첫 단락이 좌우하곤 한다. 나는 특히나 참을성이 뛰어난 편은 아니어서 더 그렇다. 그런 면에서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은 피 냄새가 주인공의 잠을 깨움과 동시에 읽고 있는 내 관심도 깨웠기에 꼭 붙들고 읽어내려갔다. 비릿한 피 냄새에 이끌려 모여드는 상어처럼 책을 계속 붙잡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유정 작가는 요 몇 년간 가장 인기 있는 작가들 중 한 명이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였는데, 그만큼 흡인력이 강한 소설을 쓴다. 한국의 대표적인 페이지터너이다. 그녀를 실제로 본 것은 작년에 코엑스에서 열린 북페어에서였다. 독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였는데, 그 자리 덕분에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그녀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간호사 출신이었다는 사실 등을 말이다. 어쩐지, 그녀의 작품에는 병원이나 병이 많이 등장한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도 정신병원이 배경이고, <28>에서는 전염병이 소재이다. 


 <종의 기원>의 소재는 사이코패스이다. 사이코패스가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소설인데,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해서 주인공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에 몰입도가 높아진다. 또, 주인공의 눈과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초반부에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독자도 제한적인 상황 이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인공이 점점 기억을 되찾아가고 사건을 정리하면서 독자도 함께 사건을 이해하게 된다. 


 사이코패스는 근 몇 년간 방송에서 언급되는 횟수가 많이 늘어난 단어이다. 사이코패스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놓고 이견이 생기는데, 작가는 사이코패스가 후천적인 경우보다 선천적이라고 보는 쪽이다.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기 힘들었는데, 왜냐하면 주인공의 시선에서 읽었을 때, 사이코패스가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을 뒤집는 결론을 내리지만, 결론이야 어쨌든 사이코패스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작품이다.


 정유정 작가의 특유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위트에 의해 무거운 주제도 그렇게 무겁지 않게 느껴지곤 하는데, <종의 기원>에서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이 분위기를 다소 희석시킨다. 무엇보다도 정유정 작가의 심리묘사는 대단하다. 참신한 비유 또한 그녀 작품의 매력 포인트이다. 이런 점들이 그녀 작품에 빠지게 하는 요소들이다. 



내가 뽑은 문장

여자의 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눈이었다. 머릿속과 교신이 끊겨버린 눈이었다. 나는 머리채를 틀어쥔 채 지켜봤다. 여자의 머릿속, 인간 뇌에서 가장 오래된 위험 감지기라는 '파충류뇌'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너무도 격렬해서 통증마저 느껴지는 생명의 절박한 긴장을.


머릿속 어딘가에선 쿵.하는 소리가 울렸다. 실낱같이 열려 있던 이쪽 세상과의 통로가 닫히는 소리였다. 나는 내가 다른 세상의 국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파당한 스물 여섯 해 내 삶에 대해, 문 밖에 들이닥친 생의 12월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그 많은 생각 중에 나를 구원해줄 기도문 같은 건 없었다. 희망은 미끄덩거리는 비누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수압처럼 무겁고 서풍처럼 싸늘한 두려움이 몸을 조여왔다.


방수포를 걷기 전에 나를 한 번만 돌아봤더라면 중대한 조언을 해줬을 텐데. 항아리들을 먼저 꺼내세요. 그쪽이 발이거든요.


유진이는 여전히 내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우주에서 날아든 운석처럼, 낯설고 정체 모를 존재였다.


침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거대한 물벽 같은 침묵이었다. 덮쳐누르는 압박에 몸이 짜부라드는 듯한 침묵, 냉엄하고, 가차없고, 무시무시한 침묵.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침묵.


의식은 쇄빙선처럼 시간과 공간을 뚫고 과거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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