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조직개편과 동시에 기존 업무와는 별개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팀장은 팀원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면서 팀원들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변화가 필요했던 시점이어서, 우리 팀이 새로운 일을 맡게 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팀장을 제외하고 팀원 5명 중, 3명은 기존 업무를 백업하고 A차장과 내가 새로운 일을 맡기로 했다.
변화가 필요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중간에 1년 정도 현장 근무를 하긴 했지만, 2013년부터 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횟수로 6년이다. 처음 직무를 맡았을 때 과장님이던 사수는 현재 팀장이 되었고, 입사 1년차이던 나는 과장 진급을 앞두고 있다.
현장에서 본사로 리턴한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후회가 시작됐다. 수시로 찾아와 밥을 사주시던 옛 사수팀(현 팀장님)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다른 팀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원래 원 소속으로 복귀하는게 아니라는 말을 듣긴 했다. 이 기회가 아니면 다양한 직무를 경험해보기가 어렵고, 다시 원 소속으로 갔을 때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와 닿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만약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미미하다. 아시다시피.
안정을 택한 댓가로 극심한 매너리즘에 빠졌고,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일단위, 주단위, 월단위로 마감을 하느라 분주한 현장에서는 실적에 대한 압박이 있었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본사에서 겹겹이 쌓인 결재라인을 밟다보면, 처음에 '빵'을 만들자고 했는데 '가방'을 만들자고 하는 기획안을 짜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같이 고생하는 것이 비효율적일지언정, 얼마나 일할 맛 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일이라도 다르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나만 그러면 뭐하나. 내 위에 계신 과장, 차장, 부장, 팀장은 변할 생각이 없는 것을. (아, 우리 팀원5명은 직급별 1명씩이다.) 회식 때 '정녕 지루하지 않으신가요?'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사 20년차가 되면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돌려서 말했다. (이거슨 입사 9년차 막내의 바이브)
그러던 중에 새로운 일을, 그것도 회사에서 꽤 중요한 일을 맡았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하는 것도 '눈치껏' 해야 된다는 아주 깊은 깨달음을 얻게된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약 4주에 걸친 프로젝트였고, A차장과 나는 아예 회의실에 노트북을 추가로 설치해서 작업실을 꾸려놓고 일을 시작했다. 약 4,000개가 넘는 기존 자료가 있었고, 이 프로젝트 오너인 임원은 하루에 서너시간씩 작업실에 들어와 훈수를 두었다. 그러니까 근무시간 중 반은 염불외는 시간이었고, 실질적으로 작업이 가능한 시간은 하루에 4시간~6시간 사이였다. 이 염불의 대부분은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하고, 긴급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임원의 말에 따르면 '스피릿 빌딩(Spirit Building)'- 시간이었다. 이른바 '정신개조'.
내가 제대로 세뇌를 당했는지, 본래 결과지향적인 타입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달리기 시작했다. 점심도 간단히 해결하거나 거르고, 집에도 노트북을 가져와서 진도를 뺐다. 이 기간 크리스마스 연휴와 신정 연휴가 있었는데 이때도 온통 일 생각 뿐이었다. '몰입(flow)'의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A차장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뚜벅뚜벅 걷고 있더라. 초반에는 작업실에서 함께 의논하며 일을 했는데, 마지막 열흘 정도 남겨두고는 A차장은 거의 작업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임원이 들어오라고 할 때만 들어와서 기웃기웃하고, 사무실 공간 재배치 위한 설계도를 그리느라 바빴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날에 있었다. 오전내 회의 끝에 임원이 작업실을 나가면서 점심을 먹고 2시에 다시 올테니 수정을 해두라고 했다. CEO 보고가 4시였으니, 점심을 거르는 것 쯤은 각오한 일이었다. 그런데 A차장이 점심을 먹으러 쏙 가버리더니 정확하게 1시 40분까지 작업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 밥을 먹고 하자고 하거나, 미안하지만 이 부분 수정을 좀 맡아달라고 하거나 그런 말도 없었다. 그래, 밥 먹으러 가는 건 좋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1시까지인데 그 이후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회사를 다니면서 이 날 처럼 화가 났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일이 잘 끝났고 좋은 성과를 내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시작은 함께 했지만, 끝에서는 나 혼자만 남겨놓았다는 억울함과 서운함, 분노가 밀려왔다. A차장은 (후배를 위해) 자잘한 일을 본인이 하고, 박대리가 힘들어도 중요한 일을 맡길 바랐다고 했다. 헐. 이게 무슨 말인가요? 월급 차이는 어쩌실거예요?
이 상황을 지켜보던 과장님은 내가 너무 앞서나갔다고 했다. 근무시간에만 일하는 A차장과 집에서 복습에, 예습까지 해오는 박대리와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고, 의도했든 안했든 A차장은 뒷짐을 지고 있는 편이 편했을거라고. A차장이 조직장이었다면 가끔 밭일을 하는 소에게 와서 부채질이라도 해주었겠지만, 그도 그저 조직원일 뿐이어서 옆에서 잡초라도 벨 수 밖에 없었던거라고.
아, '열심히'하는 것도 '정도껏'해야 '독박'쓰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씁쓸했다. A차장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너무 비겁한 행동이었다.
친구들이 가끔 '야, 니 월급을 생각해'라고 얘기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니까. 그런데 열심히 한 댓가가 이런 상황이고 보니, 헛웃음과 함께 그렇게 본전 생각이 났다. 이번에도 친구들은 '야, 그 차장 월급을 생각해'라고 말했다. 아, 이래서 받은만큼 일한다고 하는거구나. 직장에서 뒷통수 맞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이제서야 이런 깊은 진리를 깨닫다니... 회사를 좀더 다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