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수습기간 중 5주간의 현장실습이 있었다. 당시 지점에 있던 A선배는 어차피 본사로 갈 사람이라며 일을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A선배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잠깐 거쳐가는 수습에게 차근차근 무엇인가를 알려줄만큼 일이 한가하지 않고, 신입사원 육성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회사의 몫이다. 그때는 꼭 저 선배의 마음에 들어 뭐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했고, 거의 매일 저녁마다 삼삼오오 모인 술자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어느 날인가 A선배와 진한 술자리를 가졌다. 2시간 동안 3명이서 소주를 정확히 16병을 마셨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주당인 선배들이 6병 정도씩 마셨다고 치면, 나도 거진 3병에서 4병은 마신 것 같았다. 신입사원의 열정(투혼)을 발휘해서 선배들을 택시 태워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겨우 출근은 했지만 탈의실에서 거의 기절하다시피 했다. A선배는 '오늘은 쉬고, 내일 출근해'라며 나를 자취방에 데려다 주었다. 숙취에 생사를 오가면서도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A선배는 그 다음날부터 내게 일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5년간의 본사 근무 후에 다시 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A선배는 내가 배치될 지점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던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술의 은혜2
나의 첫 사수는 사회성이 매우 결여된 사람이었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50대의 미혼 여자 부장이었고, 히스테리적인 분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함부로 '노처녀 프레임'을 허락하고 싶지 않지만, 하필 이 분은 꼭 그런 분이었다. (사바사예요. 좋으신 분들도 많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B차장님이 나에게 보고서의 일부 슬라이드를 만드는 것을 부탁했다. OECD 경제성장률 같은 아주 간단한 데이터를 도표화 하는 것이었는데, 사수는 B차장님에게 A4용지를 던졌다. '내 허락없이 일 시키지 마세욧!' 사수와 나는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딱히 퇴근하고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조금은 전략적으로, 선배들의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팀에 이런저런 일이 돌아가는 것도 듣고 기회가 되면 나를 어필했다. 사수의 평판이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사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야 했다. 사수의 험담에는 절대 가담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그 분은 왜 그런다냐, 너도 힘들겠다'하고 위로반, 진담반 말을 건네는 선배들이 있으면 그냥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렇게 입사 후, 1년 반 기회가 찾아왔다. 나와 함께 술자리 고정멤버였던 팀의 모 선배가 다른 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임원에게 본인이 있던 자리의 후임으로 나를 추천했다. 당시 그 직무는 전통적으로 '남자'가 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나조차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직무를 지금 횟수로 7년째 쭉 하고 있다.
주종에 관계없이 상대에게 맞춰줄 수 있는 '알콜력'은 직장생활에서 꽤 유용한 재능이었다고 생각한다. 체질적, 태생적으로 술을 잘 마시기도 했지만, 술을 강요하는 문화가 아니라서 좀더 거부감 없이 술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술에 관대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술의 은혜라고 적어놓고는,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금주 선언이다.
술 잘 마시는 사람으로 포지셔닝이 되다 보니 술자리에 불려다니는 일이 잦아지고, 굳이 원치 않은 자리에 들러리 서는 일도 생겼다. 타 팀에서 파트너사를 만날 일이 있는데 팀원 중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다며 대신 머릿수를 채워달라는 부탁을 받는다던지... 자승자박이구나. 현타가 왔다.
지금까지 내가 술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다음 날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동료들과 수고와 격려를 주고 받는 일은 일상의 활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숙취없이 깔끔하게 멀쩡히 출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느꼈고, 전에 없이 술자리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거나 급기야 필름이 끊기는 주사도 몇번 경험했다. (쏴리, 박대리)
또 팀워크의 핵심은 술자리가 아니라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직장이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자의 직급과 역할에 따라 배분한 일을 잘 해내면 그것으로 팀워크는 완성이다. 프리라이더가 팀의 주류가 되지 않도록 하고, 라이더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 그것이 팀워크의 핵심이다. 적절한 리더십이 따르지 않으면 회식은 그저 '성토대회'일 뿐이다. (누가누가 더 힘드나)
그동안 술을 잘 마시는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꼰대적 발상'을 뜯어 고치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절주가 아닌 금주를 선택하는 것이다. (성격상 다이어트할 때도 간헐적 단식이나 원푸드는 해도, 1일 5식이라던지 소식은 못한다.) 나는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새해에 금연을 결심하는 흡연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냈다.
타고난 '알콜력'을 이용하는 것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때까지고, 이젠 득보다 실이 많으니 이별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