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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규 Sep 05. 2024

[단편] 삼세판

 “그러면 선생님께서 저희 대표로 참가하시는 겁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알겠다고 했다. 대표로 나간다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자는 감투를 상당히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급 반장, 대학교 때는 과대표, 군대에서는 오락부장, 회사에 다닐 때는 영업부장을 거쳐 임원까지 올랐다. 어디를 가도 남자는 항상 주목받고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은퇴하자마자 3년 동안 와이프와 함께 실컷 여행을 다녔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까지 쉼 없이 여행만 다녔다. 중국 장가계와 홍콩 여행은 특히나 기억에서 생생하다. 첫날 저녁부터 여행 멤버들과 말을 튼 것도 간단했고, 다 같이 숙소에서 한잔하면서 여행 끝날 때까지 형님, 아우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그때 여행 멤버는 성격이 다들 적극적이었고 술을 좋아했다. 마치 하나의 가족, 모임 같았달까. 나중에는 가이드도 모임에 합류해서 “회장님, 이리 와서 한잔하시죠.” “회장님, 저희 순서 어떻게 정할까요?” “회장님, 회장님.”하고 불러댔다. 남자에게는 여행보다도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은 코로나가 물러난 후, 첫 여행이었다. 어쩐지 전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남자는 지금 함께하고 있는 여행 멤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말이 없었고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녔다. 식사하러 가서도 자기들끼리 먹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는데 바빴다. “같이 한잔하시죠?” 며칠 전 남자는 저녁 식사 시간에 옆 테이블의 청년에게 웃으며 술 한 잔을 권했다. “괘, 괜찮습니다.” 청년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남자의 권유를 거부했다. 남자는 무안해져서 혼자 허허, 억지웃음을 지었다. 다른 여행객들도 그 청년처럼 조용한 사람들뿐이었다. 노모를 모시고 여행 중인 아들, 딸 팀. 젊은 여자들만 4명 모인 팀. 차분한 성격의 학부모들끼리 온 팀. 시부모를 모시고 온 아들 가족 팀. 등등. 이상하게 이번 홋카이도 여행은 중년 부부끼리 온 팀이 없었다.  

 “당신이 그동안 너무 술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서 그래. 이번 멤버들은 조용해서 좋구먼. 뭘.” 

 남자의 푸념에 와이프가 한 소리했다. 이번 여행 상품은 와이프가 정했다. 남자는 이번 여행이 영 못마땅했다. 모처럼 해외여행인데 재미도 없는 홋카이도라니. 와이프가 말하길, 자기만 빼고 다들 홋카이도를 갔다 와서 자기도 이번에 꼭 가야 한단다. 한국에서도 겨울을 실컷 보는데 일본까지 가서 무슨 겨울을 또 봐, 그런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남자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홋카이도 땅을 밟은 첫날부터 시작했다. 공항을 나서자, 빙수처럼 입자가 얇고 고운 눈이 심하게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눈발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여행객들은 신기해하며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이드는 “제가 여태까지 가이드를 하면서 가장 많은 눈이 내리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눈의 입자 때문인지 생각보다 추위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눈의 양만큼은 어마어마해서인지, 도로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게 3박 4일 중에 이틀 동안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여전히 길은 좋지 않아서 목적지에 제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고, 그로 인해 원래 예정된 스케줄만 가까스로 소화할 뿐이었다. 삿포로의 시계탑은 게 눈 감추듯 지나갔고, 오타루의 오르골당과 유리공방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도야호 유람선은 한국의 소양호 유람선과 크게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묵었던 호텔에 온천 목욕탕이 잘 되어 있었던 점 하나가 이번 여행에서 겨우 건질만한 것이었다. 남자는 지루하고 따분했다.

 3일째 날이 되었다. 눈발이 그나마 잦아들었다. 이날은 에도 막부 시대의 시내를 재현한 ‘시대촌’에 가는 코스였다. 가이드는 버스에서 반쯤 졸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곧 가게 될 시대촌이 지어진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뒤에 덧붙이길, 시대촌 관광의 하이라이트로 ‘오이란 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이란은 일본 기생 중의 최상급 기생에게 불리는 이름인데,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거나 재물이 많은 남자만이 오이란과 대면할 수 있다고 한다. 오이란 쇼는 그것을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하이라이트냐 하면, 즉흥적으로 그날 모인 남자 관람객 중 한 명을 주인공 쇼군으로 뽑아서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희는 가장 앞줄로 예약해 두었어요. 혹시 대표로 자원하실 분 계신가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졸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멍하니 핸드폰이나 보며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의 눈이 가이드의 눈과 마주친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저희 대표로 참가하시는 겁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료하던 참에 잘 됐다. 남자는 알겠다고 말하면서 마시던 맥주를 마셨다.




 공연장은 500석 규모로 제법 컸다. 남자의 일행을 비롯해, 여러 단체 관람객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정시에 오이란 쇼의 진행자이자 바람잡이 역할인 잇파치가 무대에 올랐다. 작은 키에 머리가 벗겨진 우스꽝스러운 얼굴의 잇파치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모습과는 반대로 잇파치는 매우 정중하게 일본어가 아닌,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관객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 극단 공연에 와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와주신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굉장히 다양한 나라에서 와주신 것 같군요. 앞에 계신 분은 혹시 어느 나라에서 와주셨을까요? (앞줄에 앉은 남자의 일행 중 하나가 코리아라고 말했다) 코리아, 아, 코리아에서 와주셨군요. 안녕하세요! 이쪽은? 아, 차이나, 니 하오 마! 저쪽은 태국, 싸왓디카! 여기는 인도네시아, 그리고 말레이시아. 아, 네, 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관객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먼저 저희 쇼가 시작되기 전에 아름다운 오이란과 함께 연기를 펼칠 멋지고 용감한 쇼군 역할을 해주실 남성분을 모집하려고 합니다. 혹시, 희망하고 싶으신 분이 계신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시길 바랍니다!”

 잇파치의 능숙한 진행에 다들 박수를 보냈다. 멍하니 잇파치를 보고 있던 남자는 가이드가 “지금이에요” 하면서 어깨를 툭 치자 깜짝 놀라면서 손을 번쩍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관객들이 환호했다. 남자는 벌써 자신이 쇼군이 된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잇파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모두가 크게 웃었다. 이미 쇼가 시작된 것 같았다. 쉽게 보기 힘든 유형의 관객이 자기를 끌어안자, 잇파치는 짐짓 놀랐지만 그는 프로답게 다음 순서로 얼른 넘어갔다. 

 “또 지원하실 분 없습니까?” 

 가이드가 남자에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실 쇼군 역할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잇파치가 지원자 여럿을 모집하면 그들끼리 정정당당하게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자만이 쇼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강한 자만이 미녀를 차지하는 법이라고 했다. 사무라이 시대처럼 진검승부를 할 수 없지만 대신 가위, 바위, 보라도 해서 승부를 내야 한다. 그것이 오이란 쇼의 시작인 것이다.

 남자 다음에 두 명의 자원자가 나왔다. 잇파치는 그들에게 각각 어디 사람이냐고 질문했다. 

 “재패니즈입니다.” 

 “차이니즈입니다.” 

 공교롭게도 지원자 3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 사람이었다. 아까 버스에서 마친 맥주의 취기가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며 외쳤다. 

 “아임 코리안! 하하하하! 마침, 한, 중, 일이라니, 잘 되었구먼! 3국 중에 한국이 제일이라는 것을 내 톡톡히 보여주지!”

 객석의 한국 사람들(남자의 여행 멤버를 비롯한, 다른 한국인 여행객들)은 남자가 무대에 올라갔을 때부터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깊은 한숨을 쉬며 소곤댔다. “저거 누구신지는 몰라도 한국 망신 다 시키겠네.”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개그맨처럼 보여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구는 벌써 핸드폰으로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기왕 무대 위로 올라온 이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기고 싶었다. 이겨서 쇼군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에 쇼군이 되어서 이 재미없는 여행에 유종의 미를 찍고, 절대 군주처럼 대접받고 싶다! 

 “자, 그럼 세 분. 시작합니다. 락, 페이퍼, 시저스!”

세 명은 동시에 손을 위로 뻗어 자기가 내고 싶어 하는 모양의 손동작을 내밀었다. 남자는 자기가 낸 것을 보고 다른 두 명의 손을 보았다. 나머지 둘은 보자기를 냈고 자기 혼자만 바위를 내고 있었다. 이런 망할! 첫판부터 졌다. 잇파치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무대 바깥으로 내려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노, 노, 노! 안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삼세판! 삼세판! 쓰리 타임! 더도 덜도 말고 한국인은 꼭 세 판이라고!”

 장내의 한국 사람들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우, 저 양반. 저기서 지금 왜 저래.” “대박, 저거 완전 꼰대네.” 숫자 3이 대체 무슨 의미길래, 저러는 걸까? 다른 국가의 여행객들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 이렇게 승부욕이 넘치는 관객이 있지.’ 잇파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남자를 다시 무대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쓰리 타임! 쓰리 타임!” 

 남자는 계속 숫자 3을 외쳤다. 몸집이 작은 잇파치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어떻게든 남자를 무대 밖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낑낑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그런 실랑이가 5분 넘게 지속되었다.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명장면이 연출되자 관객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남자는 어떻게든 다시 승부를 걸고 싶었지만, 장내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뒤늦게 느끼고 자기 와이프를 쳐다보았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남자의 와이프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와이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남자는 그제서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잇파치는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이제 남은 두 명이 다시 가위, 바위, 보를 이어갔다. 2번 정도 서로 같은 것을 내다가 드디어 승부가 났다. 쇼군 당첨은 일본인이었다. 젊은 사람이라 눈치가 빨라 보였다. 잇파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본인이 쇼군이라면 편하게 진행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이나 중국인 중에서 쇼군이 나왔더라면, 눈치코치 알려주는 수고를 해야 할 판이었다. 

 어쨌거나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마침내 쇼가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의 유명 유곽을 배경으로 유녀들이 등장하자마자 관객이 집중했다. 잠시 뒤 쇼군 분장을 마친 일본인 관람객이 등장하자 관객은 박수를 쳤다. 다른 나라 사람이 어색하게 연기를 하느니, 차라리 진짜 일본 사람이 연기를 하는 것이 훨씬 보기 좋았다. 대미는 오이란의 첫 등장 씬이었다. 우아하게 등장한 오이란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쇼군을 유혹했고, 쇼군은 질세라 능구렁이처럼 오이란의 유혹을 흘려 받았다. 두 사람의 연기는 흡사 일본 고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관객 모두는 저 사람이 쇼군을 맡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흥, 저런 어린놈이 무슨 쇼군이라고, 내가 더 잘 어울리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소리가 들리든 말든 쇼는 계속되었다. 모든 쇼가 마무리되었고 커튼콜까지 마쳤다. 공연을 마치면서 잇파치는 관객을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공연이 좋으셨다면 큰 박수와 함께 작은 팁을 던져 주시면 무척이나 고맙겠습니다!”

 관객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꼬깃꼬깃 접은 지폐와 동전을 무대 위로 던졌다. 일본 전통 공연의 전형적인 마무리였다. 관객 모두가 흡족한 얼굴로 공연장을 나갔다. 




(끝)





소설문장실습 합평작. 기한보다 하루 늦게 제출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써보는 단편소설이라 대충 초안 정도로 완성도가 낮다. 일단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사실 전에 초단편소설로 써보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에 과제로 쓰면서 억지로 양을 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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