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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Dec 01. 2021

머리를 빠는 남자와 3층 서기실의 암호

꿈에도 소원은 통일

데미안 좋아하시죠.

'알'로 표현된 자신과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깨고 스스로 나오는 서사, 좋아하시잖아요.

헤르만 헤세, 니체 등 한국 와서 다들 고생이 많으시죠.


1980년대에 태어나 반공교육의 끝자락으로 정규 교육과정을 시작하여 지금 2021년도에 대한민국 중년이 되어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서사 중에 가장 재미있는 서사는 무엇일까요.  

국민학교 시절 우리는 저학년과 고학년용의 수위가 나뉜 반공 도서의 독후감을 방학숙제로 제출해야 했습니다. 각종 인쇄물에서 북한 괴뢰군의 얼굴은 보통 늑대나 이리 같은 짐승으로 표현되어 정말 북한 사람은 얼굴이 짐승인 줄 알고 자라다가, 어느 순간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내일처럼 여기고..(중략). 우리는 한겨레다 다안군의 자아손이다아'를 통일노래인 줄도 모른 채 합창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교과서에 실려 있을 무렵 제가 특히나 좋아했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머리를 빠는 남자 - 북한 총각 김용이 겪은 남과 북

김용, 자작나무(1992)


실제 이 분은 당시 TV에도 많이 출연했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에서 귀순한 가수 김용 씨가 귀순 후 느낀 남과 북의 생활 비교와 함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아주 글 재간 넘치게 담은 책입니다. 머리를 감는다고 말하지 않고 북에서는 머리를 빤다고 표현한다던가. 다이어트는 '살 까기' 그리고 부유한 당원처럼 살찌기를 원하는 북한 주민들의 '몸 나기'등의 북한 어휘 표현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나이 애들이 읽을만한 책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소대장 마다라스, 처제와 함께 사는 부부 이야기, 미니스커트 등 성인 대상의 유머도 꽤 많았으나 읽기에 그다지 괴로운 정도는 아니었어요.

북에서 귀순하신 이 분이 한국에 대해 느끼는 여러 충격이 유독 '경박한 여자들 행색'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다시 읽을 일 없을 테니 확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예를 들면 남조선 TV의 브라 광고를 본 충격을  '올려준다느니, 모두어준다느니. 이 것을 정숙한 북한 여성들이 본다면 망측하다며 내뺄 것이다'처럼 애꿎은 북한 여성을 기준으로 잡고 남한의 여성을 돌려 꾸짖는 내용들이 여럿 떠오릅니다. 혼자 대로변에 서서 세상을 나무라고 있는 노인같긴 하지만, 당시에는 잘 먹혔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 아주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서양술이 들어있는 초콜릿. 은박지로 낱개 포장된 그 초콜릿이 너무 먹어보고 싶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후 술 들어간 초콜릿을 여러 가지 먹어보았지만 그토록 맛있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상상하던 그 초콜릿 맛은 아직도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빠는 남자를 읽으며 자라나 제가 지금 2021년 대한민국의 중년이 될 때까지.

97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황장엽 망명부터 시작하여 총격을 뚫고 귀순하여 유명한 외과교수님께 수시간의 수술을 받고 생존한 군인까지, 자신의 세계와 나고 자란 체제를 보란 듯이 깨고 부정하며 귀순한 서사의 주인공들도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그 중에 이 분이 있습니다.


3층 서기실의 암호 -태영호 증언

 -태영호, 기바랑(2018)


(이 근엄한 얼굴이 그 사쿠란보 그 태영호라니)


대한민국 가장 비싼 땅의 제1야당 국회의원임을 잠시 내려놓고 책의 내용에만 집중하여 보면 이 책 또한 하나의 수완일 뿐일 것이라 정말로 망명의 이유가 무엇일지가 궁금해집니다.

'여러 과정을 통해 둘째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밝힐 수 없다' 등으로 명확하게 기술하지 않는 부분들은 역설적이게도 북한의 실태가 가장 실감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반공 교육의 끝자락에 탑승하여 방학숙제로 반공서적의 독후감을 적어야 했고. '얘들아. 고학년들 책에는 고문장면이 더 잔인하대! 입을 귀까지 찢는대!'이런 국민학교 시절의 가십도 잠시, 갑자기 우리는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자라난 대한민국 중년만큼 이 서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없겠습니다. 다만 몰입하여 읽다 덮고 나면 과연 이 탈북한 북한외교전문가의 증언은 단순히 책을 읽은 소감 정도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p.s 1

가끔 너무 근사한 문장을 보았을 때 이 문장은 원문이 뭘까. 이 언어권의 사람은 이 문장과 이 작품 전체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많은데 대북 선전 문구를 한 눈에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현재의 Spoken Korean과의 괴리감까지 단박에 깨달아질 때의 그 즐거움을 외국인이 느낄 수 있을까요


p.s 2  저자가 말하는 북한 행정체계의 의사소통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이  근처의 한 회사와 너무 닮아있어 소름과 짜증이 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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