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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an 23. 2024

라면을 끓여 먹다가

얼마 전, 아줌마 넷이 한 집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었어. 수다를 떨다가 집에 출몰하는 벌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쎄 그중 한 명이 바퀴벌레를 터트려 죽일 때 나는 냄새가 싫어 바퀴벌레를 죽이지 않는다는 거야. 그냥 수채 구멍으로 밀어 넣고 락스를 뿌린대.  


그러자 또 한 명이 말했어. ‘나는 개미가 나타나면 냄새가 나더라. 개미가 눈에 보이기 전에 냄새부터 나.’ 개미 냄새라니! 혹시 개미 냄새 맡아봤어? 후각이 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바퀴벌레 내장 냄새나 개미 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니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 참 다른 것 같더라고. 남들은 못 맡지만 나만 맡는 냄새, 당신도 혹시 있어? 


나는 냄새는 잘 못 맡지만 듣는 건 잘 듣는 편이야. 오래전 하숙을 할 때, 화장실 바로 옆에 있던 방에서 자려고 불을 끄고 바닥에 누우면 다다다닥, 발소리가 들렸어. 어둠의 세상이 되자 숨어 있던 바퀴벌레가 마침내 외출을 감행하는 소리였던 거지. 화들짝 놀라 불을 켜면 바선생도 화들짝 놀라 얼른 구석으로 숨었어.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후로는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불을 켜놓고 잘 수밖에 없었어. 아니면 새벽이 될 때까지 지뢰찾기를 하거나. (추억의 게임 지뢰찾기 모르는 사람 없기를!) 


어우, 그뿐일까. 발리 우붓에 살 때는 자려고 누우면 풀이 무성한 마당에서 뭔가 스스스슥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어. 두두둑 지나가는 쥐도 아니고 소리 없이 왔다 가는 옆집 고양이도 아닌, 저 스스스슥 소리의 정체는 뭘까. 알고 보니 뱀 지나가는 소리였어. 마침 그즈음 동네에서 뱀을 봤다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친구가, 소리가 났다고 느꼈던 우리 집 마당 구석에서 실제로 뱀을 보기도 했고. 꺅! 돌이켜보니 그런 집에서도 살았네 내가. 나 냄새는 못 맡아도 소리는 잘 듣는 사람 맞지?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어렸을 때 엄마가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셨거든. 그 차가운 걸 꺼내 입에 딱 물었는데 얼마나 세게 얼었던지 아이스크림이 혓바닥에 딱 붙어버린 거야. 그걸 억지로 떼어냈더니 피가 철철 났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어. 그때 피가 나면서 혓바닥에 있는 미각 돌기가 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내 이론이야. (물론 나중에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엉터리 이론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맛을 잘 몰라.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던 장금이의 심정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거지. 심지어 싱거운지 짠지도 잘 몰라. 간이 하나도 안 되어 나온 설렁탕 국물을 떠먹으며 ‘아, 맛있다.’고 말해.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 친구가 ‘간 안 해도 괜찮아?’ 하고 소금을 쳐주면 그걸 떠먹고 또 ‘아, 맛있다.’고 해. 소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음식은 소금 맛이 아니라 재료의 맛으로 먹어야지, 막 이러면서. 된장찌개를 끓일 때도 된장 색이 나니 된장 맛이 나겠지 생각하며 그냥 야채 끓인 것 같은 뜨거운 물을 내놓았다는 거 아니야. 결혼 초에 말이야. 


커피도 처음에는 얼마나 싱겁게 마셨는지, 커피맛은 하나도 안 나는 까만 뜨거운 물을 마시며 ‘아, 이제 정신이 좀 든다.’ 했고. 커피에 신맛, 쓴맛, 달콤한 맛 같은 게 있다고? 그럴 리가!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질문은 이거야. ‘김치 익었어?’ ‘몰라! 몰라! 나는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모른다고! 김치는 그냥 다 김치야. 막 김장해서 먹는 새 김치만 빼면 그냥 다 김치야!’라고 지치지도 않고 말하지만, 우리 집에 또 지치지도 않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거든. 청각은 좋아도 미각은 안 좋을 수 있지. 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된장 맛, 커피 맛, 김치 맛 이런 거 잘 몰라. 물론 지금은 그보다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감각도 연마하다 보면 예민해지니까.  


또 뭐가 있나. 시각이 있네. 시각은 노안이 오고 있다는 것만 빼면 뭐 특별할 게 없어. 제품 포장지 뒤의 깨알 같은 글씨를 눈앞에 들이밀었다가 멀리 밀어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찡그렸다 하면서 최적의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만 빼고. 뭐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루테인을 챙겨 먹고 있지. 


팔뚝에 큼지막한 타투를 할 때도 별로 아프지 않았으니 촉각도 둔한 편이고. 중학교 때 어항을 씻다가 유리에 엄지손가락 아랫부분 살 껍질이 벗겨져 급히 병원에 가서 마취도 없이 꿰매는데, 그러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으니 아주 많이 둔한 듯 해. 우리 집에는 면 100퍼센트가 아닌 옷은 못 입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에 비하면 몸에 닿는 것 역시 뭐래도 상관없는 편이고.


자, 그렇다면 다섯 가지 감각을 다 이야기했나? 하지만 우리에겐 또 ‘육감’이 있지. 직관이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gut feeling 이라고도 하는 육감. 그것도 제법 잘 맞는 편이야. 이유 없이 뭔가 찜찜하면 꼭 이유가 있어. 집을 나서는데 뭔가 찜찜하다 그럼 꼭 놓고 온 게 있고. 


그런데 나한테는 오감, 육감을 넘어 일곱 번째 감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심각’이야. 마음 심, 깨달을 각의 ‘심각’ ‘사람이 왜 이리 심각해?’ 할 때의 그 심각 말고, 내가 말하는 심각은 바로 ‘마음의 감각’이야. 무엇보다 예민한 감각이지. 


다다다닥 바퀴벌레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잘 들어. 지금 나에게 잠이 필요한지 술이 필요한지도 잘 듣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마찬가지야. 지금 내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지 추앙이 필요한지도 잘 알아. 짜증이 나는 이유도 잘 알고 괜히 기분이 좋은 이유도 잘 알아.


더 넓고 깊게 보자면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뭔지도 마찬가지야. 내가 원하는 내 모습, 내가 원하는 삶 이런 것들에 민감해. 그게 충족되지 않을 때 면 백 퍼센트가 아닌 옷을 입고 껄끄러워하는 남편처럼 삶이 몹시 삐걱거린다고 느껴.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삶이 불편해. 남들이 다 하니까,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니까, 이런 마음보다는 늘 내 마음의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 소리를 따라 살아온 것 같아. 스무 살 이후부터는 말이야. 벌써 이십 년이 훌쩍 넘었네. 그렇게 마음의 소리를 잘 들으며 살다 보니 뭔가 인생이 썩 잘 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또 지금 사는 모습이 내가 원하지 않았던 모습은 아닌 것 같아.


물론 마음의 소리를 매번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듣지 못하고 사는 삶과, 적어도 내 마음이 뭘 원하는지 아는 삶은 참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아. 어떻게 다르냐고? 사실 괴로울 때가 더 많지.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는 게 안 되거든. 나의 호불호를 미세하게 느끼지만 삶이 나의 불호보다 호에 맞춰 펼쳐질 리는 만무하니까. 어떻게 보면 그 예민한 ‘심각’ 덕분에 삶이 더 심각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 같아. 


그렇다면 지금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는 뭘까?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 배꼽티 입고 싶다 / 발리에 가고 싶다, 정도가 되겠네. 하지만 커피는 이미 한 잔 마셨으니 물을 마셔. 배꼽티는 안 입고 보기만 하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째려봐. 절대 버리지는 않아. 그리고 발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지.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못 갔는데 코로나가 끝나가니 아이가 수험생이 되었네. 그래서 도통 어디든 가려하지 않아. 등하교와 도시락 때문에 혼자 훌쩍 가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뭐 조금 기다려야지. 이럴 땐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도 무시할 수 있어야 해. 물론 계속 무시당한 마음이 결국에는 소리를 꽥 지를 날이 오기도 하겠지. 그럼 그땐 어쩔 수 없는 척, 짐을 쌀지도 모르고. 


어쩌면 선명하게 느끼던 감각들이 점점 무뎌지면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의 자세로 점점 변해가는 게 우리 삶 같아. 아이들만 봐도 그래. 조그만 것에도 까르르 웃고 조금만 무서워도 세상 끝난 듯 울던 아이가 대부분 무표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조금만 신기해도 똥그래지던 눈이 세상을 차단하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도 활짝 피던 얼굴이 신상 핸드폰 긁어주는 카드 명세서가 드르륵 올라오는 소리 정도는 나야 겨우 미소 짓는 얼굴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무뎌져서 삶이 편해지는 건지, 삶이 힘들다 보니 무뎌질 수밖에 없는 건지는 모르겠어. 그러다 또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 점점 없어지고 텔레비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끝없이 음량을 키우고 뜨거운 냄비도 척척 들게 되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누리고 싶어. 여전히 궁금해하는 삶을 살고 싶어. 맡을 수 있다면 개미 냄새도 맡아보고, 다양한 커피 맛, 된장 맛 정도는 구별하고, 바퀴벌레 달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지만 옆집 고양이 발걸음 소리, 인조 잔디를 뚫고 기어이 올라와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란 나무에서 꽃봉오리가 탁, 터지는 소리 같은 건 오래오래 들으며 살고 싶어. 가족들과 더 찐하게 살 비비며 살고 싶어. 오래 눈으로 읽고 또 손으로 쓰면서 살고 싶어. 그러면서 오늘치 루테인을 또 까먹고 나왔네.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피부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오늘도 부지런히 내가 서 있는 곳의 세상을 느끼고 바라보고 또 탐험하는 게 어쩌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그런 순간들이 시시각각 모여 우리 삶이 되고, 또 매 순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며 삶이 흘러가는 것 같아. 지금도 그렇게 흘러가는 삶 속에 가만히 앉아 있네. 


카페 창밖에서 고양이 세 마리가 아까부터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고 있어. 에어컨 실외기 소리 때문에 발소리는 안 들리지만, 빵 굽는 냄새와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진 카페에 앉아 아침부터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의 감각을 느끼며 오늘 내 마음이 하는 말을 들어봐. 오늘은 마음이 무엇을 원할지, 무엇에 대해 불평할지, 그리고 그 소리들에 얼마나 맞장구 쳐줄 수 있는지 가늠하며 다 식은 커피 맛을 느껴.


여러분의 오감도 안녕하신지? 육감은 깨어 있는지? 그렇다면 마음의 소리는?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봐. 오늘 내 마음이 내게 하는 소리를. 그리고 그 소리에 친절히 답해주는 하루를 보내길!  




사진: UnsplashEdanur Ağa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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