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군자동에 있는 독립 서점 파란 책방
안녕하세요. 파란 책방지기 잉지입니다.
오늘은 '물결 파'에 '물결 난'을 써서 ‘물결과 파란을 일으키는 책방’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책방 파란이 독립서점으로서 하나의 물결을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고 있거든요.
사실 이곳은 저의 개인 작업실이었어요. 그림도 그리고 전시도 열 수 있는 공간을 구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간이 너무 허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곳을 어떤 걸로 채우면 좋을지 고민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봤고, 그중 하나가 바로 책이었어요.
제 어릴 적 방 안에는 책장이 가득했고, 그 안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어요. 저는 할 게 없을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독서가 취미를 넘어 생활이 되었죠.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자라온 거예요. 그래서 좋아하는 걸 떠올렸을 때 곧바로 책이 떠올랐어요.
책은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제가 머무는 공간에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다 보면 누군가 관심을 갖고 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저의 취향에 공감하고 함께 좋아해 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그렇게 책 10권, 20권뿐이었던 공간이 어느새 300권이 넘는 책방다운 책방이 됐네요.
쉽게 말하자면 ‘유통자본이나 베스트셀러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큐레이션 하는 곳’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사실 서점이라는 곳이 시장 원리가 고스란히 적용되는 곳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대형 서점의 매대는 경제 논리에 근거해 잘 팔릴 것 같은 책들이 비치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에 반해 독립서점은 그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책방지기의 개인 취향이 담긴 책들을 더 많이 비치하고 큐레이션 하는 공간이라고 보시면 돼요. 저는 독립 서점의 '독립'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어요. 물론 그 '무언가'는 각자 정의 내리기 나름이겠지만, 모두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매일 책에 맞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책들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게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죠. 어찌 보면 기다림의 연속이에요. 정해진 시간에 책방을 열고,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책이 들어오면 알맞은 위치에 비치하고, 새로 입고된 책들이 제가 생각한 내용과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책장 먼지를 털거나 바닥 청소를 하면서 책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시기마다 새로 출간되는 책을 살펴보기도 하고, 출판사나 작가님께 직접 연락해 고객분들이 원하는 책들을 최대한 구할 수 있도록 길을 뚫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새로운 책을 입고함과 동시에 책방의 결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책들과는 작별 인사를 하기도 하죠.
결국 책들이 이곳에서 나갈 타이밍을 맞춰주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누군가의 노트에 쓰인 글이 인쇄소를 지나 다시 손님의 집으로 가기까지. 그 수많은 과정 속에서 저는 아주 사소한 역할을 맡고 있어요.
미래에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가치가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러기 전에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도 그림으로 표현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죠. 지금까지 30점 정도 그렸어요. 잘 그리는 편은 아니지만 책방에 전시도 해놓고 주변 지인분들께 선물도 해주고 있어요.
인디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인위적인 노래가 아닌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노래니까요. 인디 음악을 들을 땐 꼭 가사를 함께 보면서 듣게 되는데요. ‘이 감정을 어떻게 이런 식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하며 매번 감탄하게 돼요.
글이 아닌 노래 가사로 쓰여야 매력적인 문장들이 있어요. 책의 한 문장으로 쓰이면 설명이 부족한 글이 되어버리지만, 노래 가사로 쓰이면 감정적으로 곧바로 이해되고 공감되거든요. 어찌 보면 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이 공간에 제가 좋아하는 걸 다 채운 다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정말 마음 맞는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이나,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독립 영화를 상영하며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기도 해요.
우선 '이래야 돼’는 제가 손님으로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을 때, 책을 사서 나가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재밌어야 돼요. 예를 들어, 파란 책방은 낮과 밤의 분위기가 정말 달라요. 밤엔 바깥에서 안이 훤히 다 보이는데, 낮에는 불을 아무리 밝게 켜놔도 서점이 열렸는지 안 열렸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어둡거든요. 그래서 책방을 방문해 주는 손님들에게 동굴 같이 어두운 공간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설렘'과, 동굴 탐험 끝에 자신이 원하는 책 한 권을 발견하는 '희열', 다시 눈부시게 밝은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행복'의 감정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끔 여행 가서 사 온 책들을 보면 그때의 여행과 장소가 기억날 때가 있어요. 책은 글에 담긴 메시지도 가치 있지만, 책 자체가 여행을 기억나게 해주는 하나의 오브제의 역할을 하기도 하거든요. 책방 파란은 방문해 주시는 고객분들이 책을 사서 나가는 모든 과정이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이래야 돼’인 것 같아요.
‘이러면 안 돼’는 손님에게 규칙을 강요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 카페에 가면 ‘1인 1 음료 주문’이라던지, ‘궁금한 점은 DM으로 문의’ 해야 한다던지 복잡한 규칙이 많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의 방식과 규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책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실제로 책방 짐백에 누워 핸드폰 게임만 하다 가시는 분들이나, 소파에 앉아 3시간 동안 친구를 기다리다 가시거나, 심지어 갑자기 와서 울고 가시는 분도 있어요. 저는 그럴 때마다 그냥 이곳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된다고 해요. 그저 모두가 규칙에 얽매이거나 강요받지 않고 편안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80% 이상은 읽은 책들을 진열해 놔요. 나머지 20%는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진열해 놓고요. 가운데 테이블에 있는 큐레이션 책들은 표지가 파란색이거나, 적당한 우울감을 다룬 책, 혹은 고양이와 관련된 책을 소개하고 있어요.
아이러니한 게, 보통 책방을 운영하다 보면 제가 '덜 좋아하는' 책들과 함께 있을 때가 많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들은 고객분들도 좋다고 느끼는지 책방에서 정말 빨리 나 가거든요. 책을 다시 주문한다 하더라도 책방으로 오기까지 시간이 걸려, 한동안 제가 상대적으로 덜 좋아하는 책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아직까지 제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 차 있네요. (웃음)
색감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최대한 모든 가구들을 블랙으로 맞췄거든요. 책방에서 빛나야 되는 건 사실 책의 하얀색 페이지와 검은 활자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전부 어두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요. 그리고 책방 이름처럼 여기저기 파란색 책들과 오브제들을 비치해 둔 것도 신경 썼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벽과 천장을 새하얀 스케치북이라 생각하고, 시멘트와 퍼티를 물감이라 생각해 그림 그린다는 생각으로 도배를 했어요. 파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벽에 물결무늬를 새기고 싶어 손에 장갑을 끼고 직접 펴 바르기도 했고요. 자세히 보면 다양한 디테일이 숨겨져 있지만 고객들이 직접 알아차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따로 설명은 드리지 않고 있어요. 사람마다 공간에서 느끼는 분위기와 해석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프랜차이즈 카페와 개인 카페의 차이인 것 같아요. 프랜차이즈 카페에 갈 땐 맛이 균일할 거라는 기대가 있잖아요. 책방으로 비유하자면 대형서점 입구에는 늘 베스트셀러와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반영한 트렌드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고, 시, 소설, 에세이, 유아도서, 참고서 등 분야별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정확히 분류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공간을 방문하기 전 기댓값이 정해져 있거나 어느 정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개인 카페나 독립 서점은 정해진 기댓값이 없어요. 어떤 메뉴를 팔지도 모르고, 맛이 있을지 없을지도 먹어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죠. 가보고 실망할 수도 있는 거고, 내 취향과 맞는 공간을 운명적으로 발견할 수도 있는 거예요. 결국 독립서점을 방문하는 이유는 책방의 분위기, 큐레이션 도서, 흘러나오는 음악 등 공간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향유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싶네요.
제주도 동쪽 종달리에 있는 ‘책약방’이라는 곳이 기억에 남아요. 책약방은 한적한 시골 마을 초등학교 앞에 있는 무인서점인데요. 무너질 것 같은 단칸방에 벽은 낙서로 가득 차있고 책도 많지 않은 허름한 책방이에요. 그런데 무인서점이다 보니 누구나 와서 편히 쉬다 갈 수 있고, 벽에 자유롭게 포스트잇도 붙일 수 있어요. 깔끔하게 정돈되고 책방지기의 의도가 가득 담긴 곳만 보다가, 어느 것 하나에도 얽매이지 않은 날것의 분위기로 운영되고 있는 책방을 보니 더 인상 깊었던 것 같아요. 제 책방도 누구나 제약 없이 편히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책방이었어요.
계속해서 새로운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책방이 될 것 같아요. 그게 책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대화일 수도 있고, 앞서 말한 그림 전시, 독립 영화 상영이 될 수도 있겠죠.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결국 파란도 언젠가 수명을 다해 사라지게 되겠지만, 나중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이곳을 떠올렸을 때 이곳에 방문했었다는 경험이 대단한 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 거기 가봤는데 정말 좋은 곳이었어’ 하는 것처럼요.
예전부터 좋아했던 로컬 매장들이 사라지고, 그곳에 새로운 매장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서운하면서 울컥할 때가 있어요. 그런 모습을 자주 지켜보다 보니 이곳도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더 오래 제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걸까요. 제가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들은 전부 다 저를 쉽게 떠나가는 것 같아요. 파란은 제가 좋아하는 걸 잔뜩 모아놓은 공간이에요. 그러니 이곳도 언젠가 저를 떠나겠죠. 그 마지막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래서 이곳의 수명을, 사라질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독립서점은 디지털로 대체될 수 있는 영역에 서 있어요. 책은 책방이 아닌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있고, 무겁게 종이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간편하게 전자책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계속해서 독립서점이 생기고 있고, 종이책이 발행되고 있어요. 서점이 그래요. 시대를 역행하며 과거의 것을 이어 오려는 힘이 센 거죠. 다들 책방 문을 열고 종이 책을 펼쳐야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동네에 책방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곳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킬 수도 있어요.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서점일지라도 집 가까이에 책방이 있다는 건 언제든 방황을 멈추고 책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으러 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니까요. 파란은 언제나 낮에는 어둡게, 밤에는 밝게 빛나며 묵묵히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가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