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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짓는 사람 Jan 12. 2017

흔들리며 피는 청춘, 커뮤니티 디렉터 M


M은 대학을 졸업한 뒤 총 6번의 직장생활을 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반까지 일했다.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30대가 되면 나아질 수 있을 거란 믿음은 갈수록 심각한 구직난, 불균형한 일자리라는 사회적 구조에 짓눌려 버렸다. 그래서 M은 자신처럼 불안정한 회사와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모임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앞으로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견디며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M의 이야기.   



현재, 마을지기의 이야기 


J: 무슨 일을 하시나요?


M: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마을만들기 사업으로 경기도와 수원시의 문화사업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지금 ‘벌터마을’이라는 곳에서 경기문화재단 위탁 사업으로 3명이 함께 일해요. 명함에는 ‘커뮤니티 디렉터’라고 적혀 있지만, 마을지기, 공간지기라고 불러 주세요. 수원 역 뒤 벌터마을의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반상회와 학교들이 할 수 있는 행사, 축제 등의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데, 올해 6월부터 시작해서 2018년에 끝나는 3년 사업이에요.

벌터마을은 논과 밭이 많아서 생긴 별칭이고, 원래 지명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이에요. 과거에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이하 서울대 농대)과 농진청이 있을 때만해도 괜찮은 동네였는데, 동수원이 발달하면서 점점 쇠퇴했어요. 수원역을 기준으로 앞쪽은 도시고 뒤쪽은 개발이 덜 된 곳이에요.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낙후된 곳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생긴 사업이죠. 문화마을 사업 중 유명한 게 부산의 감천마을이 있고요.


J: 그렇게 마을을 살려 놓으면 나중에는 상업화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문래예술창작촌만 해도 홍대에서 비싼 세에 쫓겨 온 예술인들이 만든 곳인데, 방문객들이 많아지고, 유명해지면서 그 주변에 집값이 오르고 있잖아요.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려는 없나요?


M: 상인한테 집값이 오르거나 관광객 유치 등을 하지 않기 위해 상생을 권고하고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자발적으로 생기는 시장에 대해 민간 차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정말 고민이에요. 역 하나를 두고 삼성 단지 등으로 많이 개발된 동수원, 낙후된 서수원이 엄청 차이나요. 저희가 하는 일은 낙후된 도시에 문화의 숨결을 불어넣고 싶은 거에요. 서수원 근처에 공군기지 훈련소가 있어서 5분에 한 번씩 굉음이 나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공간을 그냥 인정하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마을 문화 부흥 프로젝트에 기대가 없죠. 우선 이곳이 상업화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마을을 문화로 부흥시켜,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한 지역의 평등화를 위해서 이런 움직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벌터마을 드로잉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815791982023580.1073741837.1464030297199752&type=3


 

J: 어떻게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나요?


M: 이곳에 오기 전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사리문화기획학교(이하 다사리학교)를 하면서 선생님이었던 지금의 대표님이 전화를 했어요. 함께 마을 재생 프로젝트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 제안이 의미 있게 다가와 지금의 수원으로 오게 되었죠.



J: 계속 문화재단 쪽에서 일해오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쭉 이 일을 하실 건가요?


M: 요즘에 1인 제작자가 뜨고 있어요. 아트디렉터 같은. 지금 일하는 곳에 마을학교 강사로 직조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35살에 직조를 처음 독학으로 익히기 시작해서 지금은 직조 전문가로 활동 중이세요. 지금은 정말 인기 있는 강사죠. 학교나 하자센터, 대기업 등에 강의나 협업을 하면서 일을 하고 계세요. 직조 선생님처럼 제가 가진 기술을 발견해서 프리랜서로 멋있게 살고 싶어요.



J: 어떤 기술로요?


M: 지금 현재는 실크스크린에 관심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 미술을 전공했어요. 판화 수업을 좋아했는데 그때 실크스크린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죠. 실크스크린 찍는 기계가 많이 비싸진 않은데, 그 기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례로 강화도에서 작은 아빠가 순무 농사를 지어서 장터에 파시는데, 예쁜 앞치마에 순무 실크스크린을 찍어 도시형 농촌시장 마르쉐처럼 감각 있는 판매를 하시도록 하면 어떨까 싶어요. 음식, 농사품에 관련된 사업은 소비자들한테는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 좋으니까요. 처음은 이렇게 주변에 필요해 보이는 물품을 찾아서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해보고 싶어요.



J: 미대를 다닐 때, 실크스크린으로 꽤 인상적인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커서 M이 작가가 될 줄 알았어요.


M: 이제부터 시작이죠. 직조 선생님이 35살에 작업을 시작하신 것처럼, 저도 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분의 삶의 결이 저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미대를 졸업한 것도 그렇고요.



대학 졸업 이후의 길


J: 졸업한 후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M: 미대를 졸업하고 나서 한두 달을 집에서 멍하니 보내고 있었어요. 전공이 순수 예술이다 보니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죠. 기회가 되어 조그마한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가 3개월 만에 뛰쳐나왔어요. 그때 부모님이 다시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4년제 대학 입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수능을 보기 위해 수학, 영어, 미술 등 모든 것을 공부하면서,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특강수업을 할 때는 한 달에 3~400만 원이었죠. 빤한 입시 미술을 위해 데생하고 답이 정해진 그림을 그리는 데 그 비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해, 수능이 아닌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죠. 그때 학원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요. 그 사람들을 만나 함께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고, 정말 그림 그리는 데만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목표하던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모든 것이 재미없었어요. 그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지, 졸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거든요. '그까짓 명문대 나도 가보자' 하는 오기와,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하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입학하고 나선 ‘내가 살고 싶은 데로 살자’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그때도 역시 부모님이 반대에 거스르지 못했어요. 용기가 없었나 봐요.

꾸역꾸역 학교를 졸업하고, 아름다운가게에서 운영하던 에코파티메아리에서 인턴을 했어요. 에코파티메아리는 버려진 물건을 재디자인해서 판매하는 곳이에요. 거기서 판매하는 일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작은 축제를 기획했어요. 인턴이 끝나고 에코파티메아리라는 가게를 만든 작가가 어시스트를 구한다고 해서 그 분의 전시장에서 잠깐 일했어요. 그때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끌리는 일들, 삶이 흐르는 데로 쭉 따라 갔어요. 거의 돈은 포기하고.





J: 지금도 돈보다 꿈을 따라 사는 것처럼 보여요.


M: 돈을 안 본다기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역량, 분야에서는 이 정도의 월급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는 거예요. 불안정한 계약직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포기해야 했어요. 남들만큼 받으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어떻게 다르게 살았어야 했겠죠. 사실 돈 욕심보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이 더 크기도 해요.



J: 아까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어시스트를 하고 나서 어떻게 되었나요?


M: 에코파티메이리를 만든 작가 분의 전시장 운영을 돕는 일을 했는데, 일한 지 2개월 만에 폐업을 했어요. 폐업하는 일까지 돕고 나서, 경기도 산본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일했어요. 이 미술학원이 특이했던 게 ‘꿈다락토요학교’라는 사업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토요일에 무료 교육을 했어요. 학교 수업이 주 6일에서 주 5일 수업으로 줄면서, 갑자기 토요일에 학생들이 할 게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토요일 행사를 많이 만들었죠. 서울문화재단이 토요일 문화행사를 각 기관이나 단체에 위탁했는데, 그중 한 기관이었어요. 거기서 일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문화예술, 문화를 생산하는 대안 예술공간에 관련된 일에 관심사가 넓어졌고, 자연스레 그 분야에 발을 넣게 된 거죠.



J: 그러고 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M: 아니에요. 바로 일한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 서울문화재단에 있었고, 또 그 앞전에 제 분야와는 동떨어진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어요. 원예 연구원 같은 곳이었죠. 그 당시 정말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다 떨어지고 거기 한 군데만 붙었어요. 거기에서 일할 때 정말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칼퇴가 가능한 곳이라, 경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무료 청년지역문화기획학교인 다사리학교에 갈 수 있었던 거죠. 그 기관이 대전으로 사무실을 이전한다고 해서 6개월 정도를 다녔어요. 거기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는 다사리학교를 1년 동안 다녔죠. 다사리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기획과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었어요. 제 앞날을 재정비하게 된 시간이었죠.


J: 거기서 나온 프로젝트가 ‘백수남 실수녀’였나요?


M: 네. 다사리학교에서 6개월은 이론, 6개월은 현장실습을 했는데, 현장실습에서 어떤 사람들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어요. 그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다사리학교에서 우리의 프로젝트가 나름 인정받고, 경향신문에도 실리게 되면서 주목을 받았었어요. 그때, 우리를 도와준 중식이 밴드의 중식씨도 한몫했죠. 그때는 슈퍼스타K에 나와 유명해지기 전이었어요.


J: 어떤 프로젝트였나요?


처음 기획은 “문화는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제 모토에서 시작되었어요. 다사리학교의 가르침에도 있었기도 했고요. 저는 어릴 때부터 작업을 할 때, 제 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워낙 솔직한 편이기도 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기도 하고.

당시에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처럼 불안정한 회사와, 낮은 임금, 실업급여를 받고 다시 또 계약직을 전전하며 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오래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 계약직으로 일하는 상황들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었어요. 이 기획을 냈을 때, 다사리학교 팀장님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셨어요. 일본 사토리세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는데, 이런 저임금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 사회현상이고, 청년의 문제를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거 같아요. 그러다 이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게 되었죠.


*사토리세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태어나, 2013년 현재 10대~20대 중반 나이대로 돈벌이는 물론 출세에도 관심 없는 젊은이들을 이르는 말



J: 어떤 식으로요?


가짜 회사를 만들어서 채용공고를 써서 이력서를 받았어요. 원한 사람들 모두 합격시켜서 함께 서울대 농대에서 하루 동안 가짜 회사를 출근하여 회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어요. 면접을 보고 근로계약서도 쓰고 사원증을 배부 받고 업무를 처리하는 식의 퍼포먼스를 했죠. 


(백수남실수녀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경향신문에서 자세히 취재했다.)


원문 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22152505&code=940702#csidx11505ad2a6c


많은 도전에서 비롯된 확실한 발걸음


J: 그 일을 계기로 기획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 건가요?


M: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에요.(웃음) 백수남 실수녀 컴퍼니 대표로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자신감이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고, 모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경기문화재단에 면접을 봤는데,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이제 백수가 되는 건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백수남 실수녀 컴퍼니는 그걸 꼬집는 퍼포먼스였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사회에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사회에 대한 퍼포먼스를 했던 제가 다음날 면접관 앞에서 구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면접관이 “그래서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인가요?”라고 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그 순간은 감당하기 좀 벅찼어요. 아무튼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일도 역시 오래 하진 못했어요. 이것 역시 개인적인 사유가 아니었어요. 늘 제가 원하는 자리는 비정규직이에요. 다시 이력서를 쓰고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어요.



J: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많이 고달팠을 것 같아요.


M: 고달프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랬기 때문에 제가 더 사회에 관심을 많이 갖고, 이러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게 된 거죠.



J: 최근에 관련해서 무슨 일을 했어요?


M: 얼마 전에 ‘페미니즘’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끝냈어요.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일할 때 차별 받는 것들, 여성이 여성과 조직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얼마나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 등을 조사하고 글로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J: 20대를 거쳐 30대가 되면서 영향을 받았던 특별한 사람이 있나요?


M: 20대 초중반에 저의 삶과 같이한 멘토가 있었어요. 시각을 잃어가지만, 문학도를 꿈꾸며 도서관에서 일하셨던 분이었어요. 글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있던 분이셨죠. 제가 20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때 친오빠의 지인으로 이 분이 찾아왔었어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질주하던 차에 사고를 당했거든요. 저는 당시에 ‘어. 불빛이네’ 하는 눈 깜짝할 새에 사고를 당했어요.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꾸준히 방문해서 저에게 힘에 되는 말을 해주었죠. 그 후로 2년 정도 꾸준히 만나며, 저의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어요. 그 분은 저에게 “너의 고민들이나 상처들이 어깨 위에 먼지처럼 쌓여 있는데, 하나씩 훌훌 털어 내라”고 말해주셨어요. 

그분과 만나면서 또 '다른 시선'을 배웠어요. 그 분은 앞이 보이지 않으시니까 같이 다닐 때면 그 분의 시선에서 이야기해줘야 했거든요. “전방에 전봇대가 있고요. 왼쪽에 사람이 있고요. 오른쪽에 뭐가 있고요.” 이런 것들을 다 설명해드리면서, 그 분이 걸을 수 있도록 시각을 바꾸었어요.


그분과 만난 이후로 평범한 사람의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 남들이 안 보는 그늘, 어두운 것, 소외된 것에 눈이 가기 시작했어요. 꾸준히 사회에서 약자나 불편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어요. 그분이 제 인생의 관점을 바꿔놓았어요. 앞으로 하는 일도 이 세계관에서 벗어나진 않을 거에요. 

또 한 분은 앞에서 말했던 직조 선생님이에요. 저도 언젠가 저만의 기술로 브랜드를 가지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일본의 무인양품 같이 소박하고, 실용적인 물품들을 저만의 개성을 담아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인터뷰 장소: 해방촌 ㅊ 카페

인터뷰 날짜: 2016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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