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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빛 Dec 01. 2017

빛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 <빛나는> 리뷰

출처: Daum 영화

*이 글에는 영화 <빛나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다. 숨 하나도 나를 대신해 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번역도 어찌 보면 그렇다. ‘직역이냐’, ‘의역이냐’로 양분할 수 없는 건,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적절한 선을 스스로 그려가야 한다는 건, 원문을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하는 번역이라는 게 실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원서 저자의 뜻과 구조를 완벽하게 우리말의 뜻과 구조로 살려낼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번역가가 저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들 가장 흡사하게 표현할 뿐이지 정말 저자가 쉬던 숨까지 대신 쉴 수는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 화면을 음성으로 해설하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어 대사를 자막으로 띄우는 영화를 배리어프리 영화라고 한다. 영화 <빛나는>에서 미사코는 영화의 화면 해설을 쓰는 초보 작가다. 영화의 전반부는 초보 작가라는 설정을 통해 해설을 완성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다. 영화 개봉 전 시각장애인들과 모여 해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해설이 너무 자세해 몰입을 방해한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섞인 것이 아니냐고 한다.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은 영화를 듣고 있노라면 큰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듣는 말로 머릿속 시야에 그림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데 상상을 펼칠 공간을 주지 않으면 해설을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말했듯 그 큰 세계가 작게 줄어들어 버린다.

출처: Daum 영화

미사코는 다분히 솔직한 캐릭터다. 자신이 쓴 해설에 비판적인 의견이 쇄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군다. 웬만하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던 검토자들이지만, 꽤 유명한 사진가였다는 나카모리는 거침없이 직설적인 의견을 낸다. 심지어는 미사코의 해설이 방해만 된다고 하자, 미사코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냐며 심정을 그대로 입 밖으로 표현하고 맞선다. 가장 뜨겁게 논의가 오가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해설을 듣고 난 나카모리가 말한다. “마지막 장면 아무런 해설이 없던데 회피인가요?” 해설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에 화내다가 울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던 미사코가 숙제처럼 공백으로 남겨둔 결말을 여지없이 또 짚어낸다.

출처: Daum 영화

시각을 잃어가며 아내도, 동료도, 사진가라는 직업도 잃은 나카모리는 빛을 찾아 더듬는다. 자신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어떻게든 피사체를 담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는 시야를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심장 같은 카메라를 들고 “멎어버리긴 했어도 내 심장”이라며 손을 놓지 않고, 예전 동료가 훔쳐간 카메라를 어떻게든 찾아온다. 그럼에도 그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다며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고 직시한다. 절망하고 괴로워하지만, 야키소바를 만들며 삶의 줄기를 부여잡고 또 오늘을 살아낸다. 

출처: Daum 영화

미사코의 감정이 급격하게 나카모리에게 향하는 건 아마도 그 의지 때문일 것이다. 눈앞을 가리는 부연 장벽이 있지만 삶을 붙잡는 나카모리의 악력에 모든 걸 잃은 듯 흔들흔들거리던 자신의 영혼까지 단단히 붙잡힌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나카모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조금씩 익숙해지던 미사코는 영화 해설의 마지막 장면을 완성한다. 그들 대신 숨을 쉴 수는 없지만, 옆에서 함께 숨 쉬어줄 수는 있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이 만나 빛을 넘어 그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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