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공무도하가>
公無渡河(공무도하)
公竟渡河(공경도하)
墮河而死(타하이사)
當奈公何(당내공하)
문학 시간에 가장 하품 나오는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나의 학생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꼽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의 어딘가에 자꾸 시선을 뺏기고, 조금 더 재미있게 가르쳐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작품이 뒤집어쓴 세월의 먼지가 너무 두껍다. 학생들은 좀체 먼지를 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도 혼잣말처럼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그러다 문득, 신형철이 이 작품을 읽었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25414.html)
그의 말처럼 이 시에는 등장하는 인물이 넷이다. 나는 신형철이 적은 1행과 2행의 대구에 주목하다가도, 이내 집중력을 잃어버린다.
문학은 다른 인생의 교과서라고 했던가. 그러니까 문학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삶과 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의 삶이라면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야겠지만, 문학은 그것이 허구의 삶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 허구의 빈 틈에 놓인 다른 생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다시 집중력을 가지고 1행과 2행의 대구를 들여다본다.
신형철은 이 시의 無와 竟의 차이를 짚는다. 앞으로 벌어져서는 안 될 일과 이미 벌어진 일 사이의 간극에서 그는 네 사람의 마음을 짚는다. 슬픔과 탄식의 평론가 답니다. 아니 나는 그를 슬픔과 탄식의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어떤 맥락이든 그 다운 글이 아닐 수 없어서 기쁘다.(아니 슬프다.) 우리는 이 시에서 네 사람의 마음을 (신형철 선생에 따르면)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역시 두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것은 竟과 何. 눈뜨고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술이나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아니 노래로도 구원받지 못할 삶이 있다. 그러니 그 삶은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노래로도 달랠 길 없는 슬픔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기어이竟 선택하고야 만다. '기어이'. 어떤 죽음에 이 '기어이'란 부사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 기어이는 바닥 바닥 기고 기면서 택한 죽음일 것이다. 설화에서 전해지는 것과 같은 한 미친 자의 발광이라기엔 이 죽음이 너무나도 참혹한 것을 어쩌란 것인가. 그저 한 순간의 객기가 아님을 우리는 이 '기어이'를 통해서 통렬하게 통감한다.
그리고 확인하듯 담담하게 화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죽었다. 而死
잠시 후 그 참담한 비극 앞에서 화자는 묻는다. 여보세요(公), 어떻게 해야 합니까(何) 묻고 또 묻는다. 그래도 답이 올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향해 묻고 또 묻는다. 정말, 대관절,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當奈公何 이 어찌할 바 모름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뚝 끝이 난 노래. 이를 두고 '한국 문학은 이렇듯 처연한 비극 앞에서 그 비극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이는 여성 화자를 최초로 만나게 된다.'라고 가르쳐야 옳은 것인가. 이 기약 없는 죽음. 그 '기어이'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옳은 일이 아닌가. 문학이란 모름지기, 타인의 삶을 통해 생을 공부하는 것이라면, 기어이 그 길을 간 사람의 흔적을 좇아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 '기어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앞에서 말갛게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망연자실을 함께 떠올려야 옳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경계'河를 앞에 둔 두 사람의 극명한 태도는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긴장에서 비롯된다. 삶의 이 쪽 편을 지탱하려던 사람과 그 삶을 기어이 떨친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이 작품은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이제 우리는 이 작품을 둘러싼 배경 설화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시가 보이는 경지를 생각해야 한다. 무지막지하게도 설화는 노래를 부른 백수광부의 아내를 함께 수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고민했을 '남겨진 사람'이 했을 일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삶에 대해 생각하며, 남겨진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문득 교실에 남은 학생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