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ia Apr 24. 2022

다름을 보러, 치앙마이

목적 없이 떠난 여행

주말여행


불분명한 목적의 여행이었다. 1분기를 막 마무리했으니 휴가를 내고 일에서 72시간이라도 차단되어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고, 공휴일이 더해진 긴 주말인데 평소처럼 싱가포르에서 보내기는 싫었다. 싱가포르에서 3시간 이내의 도시 중 치앙마이는 아직 항공권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 비용, 타이밍이 적절해서 떠나게 된 치앙마이였다. 


여행자의 내공. 

너무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어떤 여행이 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자의 내공으로 어떤 여행이 되더라도, 지금 여행을 떠날 수 있음에, 내 건강과 경제력과 일상이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음에, 조용하면 조용한대로 사건사고가 생기면 생기는대로 새로운 경험이 되리란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치앙마이는 여행이 얼마나 신선한 자극이고 내 에너지의 원천인지 깨닫는 소중한 선택이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받아들이는지, 어떤 현상에 유독 관심을 기울이는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나에게 여행은 '결심, 항공권 결제, 구글 맵 표시, 호텔 결제, 짐 싸기, 일 정리, 비행기 이륙'의 단계를 거친다. 이 중에서 피크는 비행기를 타는 그 전날 새벽에 주로 마무리되는 '짐 싸기와 일 정리'다. 


왜 항상 여행 직전의 난 바쁜 걸까.

회사 일을 전날 밤까지 몰아서 마무리하고, 짐도 아직 반이나 싸야 하고, 여행 전 가족들과 여유로운 저녁 같은 건 쉽지 않다. 그리고 비행하는 날 아침, 아슬아슬하게 카운터가 닫히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공항에 향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좀 더 일찍 나서서 준비하나 그만큼 이른 준비에 에너지를 더 쓰고 만다. 

시간은 여유를 갖고 흘러 보내야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 내가 시간 속에 기계처럼 박히는 건 좋지 않다. "계획적이다"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는 건 내가 너무 강하게 계획적인 까닭일까. 

여행 전날의 기록,


계획에서 조금은 멀어지는 사흘을 만들어보자고, 아주 조금 더 즉흥적인, 못하는 건 못하는 대로 안 하는 건 안 하는 대로, 여유를 갖자고 말하며 떠나기에 치앙마이는 작고 조용한 평화로운 도시여서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치앙마이에서 발견한, '가능한' 일상.

새로운 나라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그걸 기어이 자기 자신으로 끌고 와 여행이 끝난 후 삶의 변화로 만들고 싶어 한다. 



치앙마이 덕분에 내가 그려본 건, 매일 아침 신선한 생과일을 갈아 쥬스를 만들어 마시고 (좋아하는 과일: 그린 애플, 샐러리, 키위, 오렌지, 당근, 딸기, 패션후르츠), 고즈넉한 오후에 원목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창가로 들어오는 빛과 초록 나무를 쳐다보며 다양한 원두의 커피를 즐겨 보는 것. 치앙마이의 원두에는 다양한 자연의 향이 난다. 이런 순간이 일상이 된다면, 삶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간 것 맞지 않을까. 아침에 커피가 아닌 생과일 쥬스를 마시는 시작 해봐야겠다. 커피도 좀 더 다양한 아시아 각국의 원두를 마셔보고 내 커피 취향을 모아봐야겠다.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일상에도 여행자의 태도를 가져와본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질 때쯤 또 여행을 떠나겠지!


여행의 묘미

사건과 사람, 항상 둘은 세트다. 당황스러운 사건의 끝에는 대개 사람이라는 해결책이 있다.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 날이 그랬다. 일상 밖이니까 생기는 일들, 불편하고 급박한 일과 함께 귀인이 나타난다.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며 도와주는 사람들. 나도 친절해지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조금 더 웃고 여유로워지자, 웃어넘길 줄 알자고 말하게 된다. 


외국에서는 같은 문제를 두 번에 걸쳐 풀거나, 떠올리지 못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없다. 오히려 왜 일이 그르쳐졌냐고 성내면 스트레스받는 사람이 손해다. 엄격한 얼굴로 일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오히려 웃으며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난처한 얼굴을 하며 인정에 호소하는 게 여기서 더 강력한 방법이다. 


출국 전 원격 신속항원검사(Tele-ART),

출국 전일, 미리 예약해 둔 싱가포르의 병원의 원격 신속항원검사 화상 진료가 예약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작하지 않았다. 검증된 신속항원검사를 병원에 방문하거나 원격으로 진행하고 공식 음성 확인서를 받아야 비행기에 탈 수 있다. 기술적 결함이 있어 30분 후 재접속해달라는 안내가 왔지만 30분, 1시간이 지나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다. 1시간을 호텔 로비에서 통화를 기다리며 날리고, 더 급하게 내일 오전 출국 전까지 다른 병원의 원격 진료를 찾아 예약해야 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당일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싱가포르 공휴일 및 주말에 해외 출국자가 급격히 늘음), 30분째 리스트 내 거의 모든 병원에 연락을 하고 겨우 한 곳을 찾았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신청을 하고도 불안해 Whatsapp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다행히 이미 예약된 검사에도 묵묵부답인 병원과 달리 이 클리닉은 바로 Whatsapp 답장을 보냈고, 내일 출국인 상황을 듣고는 가장 빠른 시간을 잡아 바로 검사 진행을 도와주었다. 30분을 예상했다가 3시간이 넘게 걸린 원격 검사였지만 더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에, 두 번째 병원의 서비스에 크게 감동했다. 너무 감사해 자발적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구글 맵에 리뷰를 남겼다. 나도 주변에 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빠르게 도와줄 거다. 시간이 촉박할 때 건네는 도움은 힘이 굉장히 크다. 급할 수록 작은 도움이 큰 힘을 발휘한다. 


숲 속 리조트로의 여정,

내륙 지방인 치앙마이에서 하루는 숲 속 리조트에서 경치를 보며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에 도심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매림 지역의 리조트를 잡았다. (사실 이렇게 먼 줄 몰랐다. 호텔비보다 시내에서 산속까지 들어오는 왕복 그랩비가 더 많이 들었다.) 시내 밖으로 나가는 그랩비가 생각보다 비싸 볼트(Bolt)라는 새로운 카 헤일링앱을 시도해봤는데 굉장히 새로운 경험을 했다. 카 헤일링 앱과 태국의 흥정 문화의 만남이랄까. 볼트 앱에는 낮은 가격이 뜨고, 차가 도착해서는 기사가 새로운 가격을 흥정한다. 앱에 등록된 차와 다른 차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태국어로 말하며 숫자만 손으로 표시하는 경우도 많아 제대로 가격을 이해한 건지 모르겠고 산속으로 들어가니 앱과는 다른 차를 타는 게 무서워 거절하며 30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귀인은 나타난다. 지켜보던 호텔 직원(딱 봐도 20대 초반)이 언니 포스를 풍기며 다가왔다. 자신의 그랩 앱을 켜더니 할인 쿠폰을 더해 낮은 가격을 만들고, 바로 운전사에게 태국어로 '매림까지 가고 가격 흥정을 안 할 경우에만 픽업하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도착한 차는 오히려 좋은 차에 운전사도 영어를 하며 친절했다. 마지막까지 언니 포스의 직원은 "Be careful Madam, you shouldn't pay more than this price." 라며 운전사가 들으라는 듯 외쳐줬다. 이 젊은 여성의 당당하고 친절한 도움에 감동했다. 내가 당연하게 가진 것들로 건넬 수 있는 도움이 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님에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건네는 도움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특별하다. 


치앙마이의 그랩/볼트와 교통수단

이동 그 자체보다 여행객들의 시간을 돈으로 바꿔주는 서비스. 사람마다 재화에 대한 탄력성과 지불 용의 금액이 상이하다. 이 간극을 메워서 외국인에게 맞춘 서비스를 차별화된 가격을 설정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서비스가 무엇일까. 시간을 아끼는 것에, 또는 다른 니즈에 일반인들보다 더 큰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누굴까. 고소득 외국인 관광객들은 누구며,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서비스가 어떤 가격에 이루어지고 있을까. 싱가포르에서는 무엇일까. 

만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보다, 이런 틈새 서비스에 차별화된 가격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발견해보고 싶다. 가격이 압도적으로 높으면 그만큼 수량이 줄어도 되니까, 내가 가능한 능력과 연결해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치앙마이에서도 내가 탄 그랩 차들은 유독 깨끗했고, 운전사들은 영어를 거리낌 없이 했다. 차를 이용한 운전이 그들의 주 직업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들이 활용한 능력은 기술(그랩/볼트에 빠르게 등록 및 높은 금액의 콜 신청에만 반응), 약간의 영어, 신뢰 가는 이미지 (무리한 가격 네고를 하지 않음) 아닐까. 그리고 현지 물가의 3배인 싱가포르 물가에 달하는 교통비를 받았다. 


다른 걸 한다. 다르게 한다. 다르게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앙마이 여행의 마지막에 든 생각이다. 


오랜만에 재개한 여행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해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여행, 별다른 목적 없이 주말여행을 재개한 스스로를 칭찬한다.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다음에 시간 낼 계획 세우지 말고, 바로바로 느끼고 행동하자. 다행이다. 내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여행에서 자유로워지는지, 밝은 에너지를 충전해 일상으로 돌아오는지 깨달았다.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기기 전에 다시 하늘이 열린 지금, 세상을 충분히 여행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