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이 닿는 곳곳이 아름다웠다.
9일 동안 파리에 머물며 바라본 장면에는 언제나 사람, 공간, 문화가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파리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제각각 다른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파리의 가장 큰 매력은 이를 일상의 예술로 승화시켜, 파리를 떠나도 파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단편 소설들이 한 권의 책으로 모여 그 책을 소장하고 떠오를 때마다 펼쳐 보듯이.
단 하루가 주어져도, 일주일이 주어져도 한 달이 주어져도 여행자는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파리에서 만나게 되는 소설 같은 순간은 무한하기에 시간은 그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자원이 된다. 파리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장면 하나, 파리에서는 매일 책을 보는 사람과 서점을 만난다.
전자기기를 손에 든 바쁜 현대인의 일상. 싱가포르에서 당연한 모습이 파리에서는 아니었다. 파리지앵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거리에 참 많은 서점에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서적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파리의 어떤 구역을 가든 머물게 되는 공간에는 책이 있었다.
파리는 생각보다 친절하고, 시민들의 일상이 소박하고, 노인들이 행복해 보이는 도시였다. 노인들이 중절모와 스웨터와 운동화를 차려입고 신문과 책을 들고 나와서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둘둘씩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홀로 벤치에 앉아 고즈넉한 시간을 갖는다. 카페에서 신문을 읽던 스위스와 달리 햇빛을 쐬며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스위스만큼 고상하거나 우아하진 않지만, 파리지앵에게서는 소소하고 낭만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묻어 나왔다.
장면 둘, 파리는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리는 도시다.
지금까지 방문한 전 세계의 도시들 중 가장 로맨틱했다. 더 여유롭고, 더 깔끔하고, 더 밝은 유럽의 도시는 있어도 이처럼 낭만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낮에는 파란 하늘과 사람들의 생동감이 고풍스러운 건물의 분위기와 어우러졌고, 밤에는 주홍 불빛이 길가 카페의 테라스와 어우러져 낭만을 자아냈다. 연인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보였다. 유독 두 사람의 소중한 관계가 길을 걷다가도 특정 공간에 머물다가도 눈에 들어왔다.
파리에서는 외로움도 아름다운 감정이 된다.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일 수 없고 또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홀로 선 인간은 파리에서 그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이 외로움이 파리에 머무른 많은 예술가들의 창조성의 원천이 되었다. 몽마르트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는 파리에서 새로 만난 예술가였다. 그의 그림에서 흐르는 회의로움과 약하지만 간절한 바람은 위로가 되었다. 그의 회색은 어둡지 않고, 기운 도로는 가파르지 않았다.
장면 셋, 파리의 발코니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하루의 어떤 시간, 발코니 문을 열고 나와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커피 한 잔을 하고, 하루의 상념에 잠겨,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발코니에 머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삶의 여유와 고뇌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가질 하루의 순간이다. 발코니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연령도 다양했다. 발코니 밖으로 위험하게 걸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청소년부터, 어떤 불안과 걱정을 담배 한 개비로 태워버리는 남자, 홀로 조금은 외로운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노인까지, 그저 길을 걸으며 쳐다본 파리의 발코니에서 다양한 삶의 군상들을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평가와 판단이 일상인 한국과 싱가포르에서와 달리, 그저 어떤 소설 속 장면처럼 그들의 삶과 순간을 상상하고 웃음 짓곤 했다. 누군가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 집과 방에서의 창밖에 유독 눈이 자주 가고, 멍 때리며 쳐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장면 넷, 건물과 거리의 다양한 색감이 파리를 싱그럽게 만든다.
길을 걷다 만나는 빨간 집, 빨간 간판, 파란 대문, 노란 간판, 하얀 벽, 예술 작품처럼 앞에 놓인 사람까지 예뻐 보이는 골목과 건물들. 건물마다 다른 원색의 대문과,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포착하는 재미가 있다. 앞에 선 이를 모델로 만드는 이 도시는 거리에서도 예술 감각이 흐른다.
파리는 햇살까지 아름다운 도시였다. 거리를 걷다 보면 눈썹과 이마 사이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햇빛이 좋다. 눈이 부셔서 고개를 살짝 들면 새로운 발코니가 보인다. 라틴 지구를 걷다 보면 카페보다 더 많이 보이는 고서점들, 초록빛 가득한 공원에서 글과 책을 읽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얼굴과 몸으로 햇빛을 받는다. 공원, 이게 진짜 공원이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앉아있게 누워있게 기대 있게 만드는 이 공간이 진정한 쉼터였다.
장면 다섯, 위대한 인물은 침대에서 죽지 않는다.
파리는 그저 그림으로 아름답기만 한 도시가 아니다. 예술의 다른 한 축으로 철학과 정치가 강렬한 목소리를 냈다. 판테온에 묻힌 사람들의 조건을 두고 정치적인 충돌에서 나왔다는 문장 '위대한 인물은 침대에서 죽지 않는다'. 정치적인 판테온에서 느껴지는 이념의 격동과 문학가들, 장 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의 삶이 녹아있는 도시. '앙시앵 레짐'. 판테온 지역의 건축과 공간에서 만나는 프랑스어 한 문장 한 문장이 철학이었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잊고 있었던 인문학과 철학을 파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파리 앞에서의 첫 성당을 지날 때, 성당 앞 공원의 역동과 자연스러움에 놀랐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파리라는 도시는 살아있다. 공원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20대,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축구하는 어린이들, 아이들과 함께 나와 운동을 하는 가족, 커플, 학생, 관광객까지 제각각의 즐거운 활동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다. 타인은 없다. 나와 순간의 즐거움만이 이 공간의 일부에 머문다. 내 존재 또한 이 공원 안에 어우러진다.
파리로 떠나기 전, 급하게 여행을 계획하며 편리함과 편함, 안전함을 우선순위로 두고 일상을 살아가는 대학생, 회사원, 시민, 외국인 파리지앵들의 삶을 잠시 잊은 순간이 있었다. 이때,
유일한 파리스러움은 없어.
다양성을 경험하는 게 진짜 파리야.
파리에서 파리지앵스러움만을 찾지 말고, 다양성을 경험해보라는 프랑스인의 조언을 듣고 여행의 목적을 다시 찾았다. 로컬의 삶과 예술을 느끼고 싶었지만 여행을 준비하면 할수록, 나도 모르게 관광객이 되어가던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말이었다. 파리에서 유독 일본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발견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모네, 마네, 고흐, 피카소 같은 화가들이 동시에 빠졌던 아시아 예술,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 아이러니하게 파리에서 일본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토록 감각이 뛰어난 예술가들에게 무엇이 그토록 새롭고 아름다워 보였을까.
아시아라는 미지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고, 호기심 가득히 세상을 바라보고, 다름과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이를 도시의 문화와 융합한 그 다양성 자체가 바로 파리였다. 파리는 로맨틱하고 세련된 활기찬 도시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 닿지 못한 무언가, 새로운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예술가, 철학자, 시민, 학생들이 살아갔던 곳이다.
파리에서 오랑주리, 오르세, 로댕, 피카소 미술관을 들리며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18-19세기의 프랑스 문화의 번성이 아름답고 부럽고 놀라웠다. 그렇게 파리에서 아시아 미술관을 꼭 들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욤 미술관과 께 브랑리 미술관에서 놀란 점 중 하나는 프랑스인이 아름다워 수집한 아시아 미술과 유물들이 아시아인인 나와 보는 눈이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는 점이었다. 사실 한국관은 그 퀄리티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예술의 신비로운 점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보자마자 어떤 점수가 매겨지는 게 아니라, 비슷한 유형의 예술을 많이 보다 보면 비슷하면서 다른 여러 작품을 비교하고 창조성을 발견하며 비로소 옥석을 가리는 눈이 생긴다는 점이다. 뛰어난 예술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한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경쟁하며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스타일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결국 천재성이 탄생한다. 기욤 미술관과 께 브랑리 미술관의 한국 예술은 그들에게는 어떤 새로움이지 경지의 작품 수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술이 그 나라에 머무는 것이 맞는지, 세계에 퍼져 그 나라의 문화를 더 널리 알리는 게 맞는지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고민도 들었다. 동시에 파리에는 다양한 미술이 있고, 다른 선호가 있음을, 그렇기에 예술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향유하는 주체가 함께 만들어간다는 걸 실감했다. 예술이 철학으로 연결되는 사유를 하게 만드는 도시, 이게 파리가 가진 예술의 힘이 아닐까.
파리에 머무는 동안, 관찰의 예리함을 놓지 않기 위해 한 공간에 조금 더 길게 머물곤 했다. 관찰과 감상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렵다. 문화와 예술의 감상이 고귀하고 고상한 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바삐 보내지 않고 새로운 도시와 미술과 삶을 감상하는 순간이 좋다. 한 템포 느리게 걸으며 늦게 가는 법의 현명함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많은 걸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담고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상하며 관찰하고,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다른 여행객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도시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 의도하지 않아도 현지인의 삶에 호기심이 생긴다는 점,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단편 소설처럼 느껴진 장면들 속에서 판테온 앞 소르본 대학생들의 자유로움이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본 노인들의 평온한 순간들이 찬란했다. 특히 공원에 불규칙적으로 흩어진 등받이가 뒤로 기울어진 의자는 사랑스러웠다. 더 편하게 더 여유롭게 편한 (하지만 바르지 않은)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둔 장치가 파리스러웠다.
Real impression,
alive scene of every day life is here and everywhere.
인상주의 예술이 꽃필 수밖에 없었던 낭만적인 도시
나의 삶도 조금 더 낭만적이어라. 공원에 나와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햇빛을 미간 사이로 느끼고, 외국에 사는 자유로움과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나와 타인의 무모한 꿈에 조금 더 친절하자.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낭만을 조금 더 자주 건네며 살자. 파리라는 도시는 오늘도 경쟁하고 바쁘게 사는 아시안에게 젊음의 고삐를 풀어 젊음만이 갈 수 있는 무모함과 용기와 걸음을 응원해주라고 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