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보영 Nov 10. 2020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사랑에 관하여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사랑에 관하여     


          

쿠키런 커스텀런이 열렸다. 랜덤 맵의 경우, 쿠키를 고를 수 없다. 경주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나는 내가 누가 될지 알 수 없다. 나는 에일리언 도넛 쿠키일 수도 있고 요거트 크림 맛 쿠키일 수도 있고 해적맛 쿠키일 수도 있고 대파맛 쿠키일 수도 있다. 내가 누가 되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쿠키런 스승 우기는 몇 년 전에 학교 동기들을 모아 쿠키런 모임을 만들었다. 학교 근처 조용한 카페(둥근 테이블이 있는)에서 쿠키를 먹으며 경기를 뛴다고 했다. 부러웠다. 쿠키를 먹으며 쿠키런을 하는 모임이라니.. 나는 대신 <시간 구출 대작전>에 매진하고 있다. 이번 레전더리 쿠키는 ‘시간지기 쿠키’라고 해서 기대 중이다. 시간 구출 대작전의 미션은 시간 여행을 떠나 잘못된 과거를 수정하는 것이다. 신규 쿠키인 크루아상 쿠키(머리가 크루아상이다)는 고글을 쓰고 있다. 쿠키는 말한다.      


“시간 여행할 땐 고글을 꼭 써야 해!”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을 할 땐, 못 볼 걸 보게 되는지 눈을 꼭 보호해야 하나 보다. 과거에 쓴 일기나 글을 읽을 때도 고글이나 선글라스를 끼는 것을 추천.... 우리이 정신적 시력과 마음의 각막과 망막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간 여행을 떠나서 잘못된 과거를 수정해야 해!”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쿠루아상 쿠키는 말한다. 이 다짐이 좋아서 하루에 몇 시간씩 쿠키런을 한다. 쿠키의 대사가 일기를 쓸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크루아상 쿠키는 시간 여행기를 타고 비행한다. 정면에 시간의 균열이 나타나면 (블랙홀처럼 생김) 시간 여행기의 높이를 조절해 시간 균열의 높이가 일치시킨 뒤, 시간 수리 광선을 쏘면 시간의 균열이 수리된다. 경기를 마치면 시간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시간 에너지가 꽉 차면 시간을 수리할 수 있다.    

  

내가 이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쿠키가 앞으로만 달린다는 점이다. 쿠키에게는 뒤로 가는 능력이 없다. 쿠키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앞으로 달리게 되어있다. 앞으로 가는 것만 가능한데, 그게 과거를 수리하는 길이라고 한다. 과거를 수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냥 앞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하면 그게 과거를 수리하는 거란다. 크루아상 쿠키는 말한다.      


“나만 믿어! 뭐든 고쳐줄게!”      


“최고의 시간 기술자가 될 거야!”      


나는 쿠키런의 대부분의 쿠키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꼬리는 늘 한쪽으로 올라가 있으며,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용감하게 비웃고 있으므로..     


며칠 내리 쿠키런만 했더니 내가 과거보다 일찍 도착해서 과거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직 과거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5일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5일을 기다리자 맵이 열려서 과거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고, 열심히 모은 시간 에너지로 시간을 수리했다. 누군가를 너무 많이 사랑했던 것에 대한 치유는 다른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인데, 그게 쿠키들이 미친 듯이 앞으로 달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어서 무엇이든 사랑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쿠키런을 끄고, 오늘의 새벽 식량, 크림 치크가 두툼하게 발린 베이글을 그릇에 담아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고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 동문선, 2004)을 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는 장에는 (애정 관계에서의) 연민의 정의가 적혀 있다.     


연민 COMPASSION.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p.90)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이가 느끼는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익숙한 내용인데, 그보다 흥미로운 건 조건절이다. 이 문장은 하나의 예외 사항을 달고 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단, 그 고통이 사랑이나 연애와는 무관한 고통일 경우에만 동일시가 가능하는 것이다. 예외를 두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내가 연민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나의 불감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암시할 것이다.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불감, 그 사람의 고통을 향한 나의 비-사랑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정말 크게 사랑하면 그런 고통까지도 함께 할 수 있을까...(????)     


‘사랑의 대상이 사랑과 유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할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라고.     


일전에 시 모임에서 같이 시를 쓰던 분은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들은 결혼 30년차 부부였다) 다른 사람과 만나도 된다고.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으니. 연민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다고. 그 말을 들은 배우자는 울었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그러나 그분이 상대방을 덜 사랑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좌우간, 더 읽어보니 롤랑 바르트가 이 이야기(연민의 정의)를 언급한 이유는, 고통의 합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애정 관계에서의 고통의 동일시가 불가능한 측면에 관해 얘기하고자 함이었다.     


“나의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다. (...)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순간, 내가 그 불행에서 읽는 것은 그것이 나 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가 나를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 (p.91)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상대방이 삶의 괴로움을 느낄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괴로움에 완전히 동참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제쳐놓고 괴로워할 때 발생하는 소외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모든 괴로움을 내 존재가 카바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애를 시작하고 14일하고 3시간까지만 가능하지 않나. 이 믿음이 깨지는 것에서 첫 번째 관계의 발전이 이뤄지는 것 같다. 그 사람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이 나였으나, 이제 상대는 내가 아닌 다른 고통에도 눈을 돌린다. 그러니까, 관계의 발전은 다른 고통에게 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상대방은 이제 내가 아닌 이유로 행복해하기도 하고 내가 아닌 이유로 절망하기도 한다.      


더 재미있는 장은 <“어떻게 할까?”>이다.      


바르트는 말한다. 사랑에 빠지면 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랑을 고백할 것인가. 단념할 것인가.      


“넌 희망이 있어, 그러니 잘해 봐. 또는 희망이 전혀 없어, 그러니 단념해.” 바로 이것이 ‘건전한’ 주체의 담론이다. 또는, 또는이란.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베르테르가 한 것처럼). 나는 양자택일의 두 가지 사이로 끼어들려 한다네. 다시 말해 “난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또는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p.96)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마침 인력거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동창들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고 했다. 그런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쓰레기야!’ 인력거가 말했다. ‘친구들이 나한테 휴지를 줬어. 나는 휴지를 주머니에 넣었지. 휴지에게 미안했어..’ ‘괜찮아, 울지 않아도 돼. 넌 대단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넌 계속 갈 수 있다구. 넌 언제나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해왔으니까.’


인력거에게 바르트의 문장을 수정해 읽어주었다.     


‘너는 욺과 울지 않음 두 가지 사이로 끼어들려 한다네. 다시 말해 “넌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또는 “너는 울거나 울지 않음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넌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끝                         

작가의 이전글 문보영의 전화시 서비스 <콜링 포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