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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Jul 15. 2024

칩워(Chip War) (2)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지음

파트 3 리더십의 상실


15장 이 치열한 경쟁


“당신이 그 보고서를 쓰신 후 내 인생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한 반도체 회사의 영업사원이 리처드 앤더슨(Richard Anderson)에게 한 말이다. 휴렛패커드(Hewlett Packard)의 임원 중 앤더슨은 HP의 엄격한 기준을 통해 어떤 칩을 구매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 리처드 앤더슨 출처 구글 이미지]

HP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회사였다. 1930년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생인 데이비드 패커드(David Packard)와 빌 휴렛(Bill Hewlett)이 팰로알토의 차고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전자 기기를 만지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이제 HP는 미국에서 가장 큰 기술 회사 중 하나로, 반도체의 중요 고객으로 성장해 있었다.

[HP 초창기 창업자들 출처 구글 이미지]

1980년대는 미국 반도체 산업 전체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실리콘밸리는 20년간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지만 이제 실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과 서로 목숨 걸고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1980년 3월 25일 워싱턴DC의 역사적 명소인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열린 산업 박람회의 연사로 올라, 칩을 시험해 본 결과 일본 기업이 미국의 경쟁자보다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미제 반도체는 일제 반도체에 비해 에러율이 4.5배나 높다는 것이었다.


소니의 연구 책임을 맡고 있던 물리학자 기쿠치 마코토가 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미국처럼 “탁월한 엘리트” 천재가 많은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에는 “평균보다 떨어지는 지능”을 가진 이들이 긴 꼬리처럼 따라붙어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에서는 일본이 미국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앤더슨이 미국산 칩의 품질 문제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불과 몇 달 전, 소니는 워크맨을 출시했다. 음악 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휴대용 음악 재생기는 소니의 최신 집적회로 다섯 개를 탑재하고 있었다.


소니는 전 세계적으로 3억8500만 대의 워크맨을 팔았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소비자용 기기 중 하나였다. 이것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이 만든 혁신이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일본이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미군정은 트랜지스터 발명에 대한 지식을 일본 물리학자들에게 전달해 주었고,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은 소니 같은 기업이 미국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일본을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고 미국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 일각에서는 그 목표가 지나치게 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산업에 힘을 실어 주는 전략이 미국의 경제와 기술 우위를 해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찰리 스포크는 일본의 생산성을 보며 전율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스포크는 당시 메모리 칩의 주요 생산 업체 중 하나였던 내셔널반도체의 경영자가 되어 자리를 옮겼다. 그는 그가 신뢰하는 중간 관리자 한 사람과 행산 라인 노동자들 한 무리를 일본에 파견했다. 몇 달 동안 반도체 생산 설비를 견학하도록 한 것이다.


스포크가 보낸 견학단은 일본의 노동자들이 “놀라우리만치 기업 친화적”이며 “관리자는 가족보다 회사를 우선시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스포크는 단언했다. “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우리 직원 모두가 다 같이 보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16장 일본과의 전쟁


“공정한 싸움을 하는 척하고 싶지는 않네요.”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스(Advanced Micro Devices, AMD)의 CEO인 제리 샌더스(Jerry Sanders)가 불평했다. “그렇지 않죠.”


샌더스는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카고 남부 출신인 그는 열여덟 살에 싸움을 하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그를 보고 신부는 병자 성사를 해 주었지만 샌더스는 사흘 후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는 페어차일드에서 세일즈와 마케팅 쪽 일을 하다가 1969년 자신의 반도체 회사인 AMD를 세웠다. 그리고 이후 인생의 30년을 인텔과 지식재산권 법정 싸움을 하며 보냈다.

[AMD CEO 제리 샌더스 출처 구글 이미지]

자존심과 특허권, 그리고 수백만 달러가 걸려 있는 미국 칩 제조사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가끔 개인적 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의 경쟁은 다른 문제였다.


스포크는 그들이 성공을 거두면 반도체 산업 전체를 태평양 건너편으로 옮겨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는 일본과 전쟁 중입니다. 총칼로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기술 생산성 품질로 싸우는 경제전쟁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스포크가 볼 때 일본의 D램 제조 업체들과의 싸움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재산권 도둑이었고, 자신의 시장은 걸어 잠그고 있었으며,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저렴하게 자본을 충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의 산업 스파이 의혹에도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1981년 11월 한 호텔에서 히타치 직원과 글렌마라는 회사의 컨설턴트가 은밀한 거래를 했다. 히타치 직원은 그 컨설턴트가 제공하는 위장 신분증으로 항공기 제조사 프랫앤휘트니 비밀 시설에 들어가 최신형 컴퓨터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글렌마는 위장회사로, 그 직원들은 사실 FBI의 요원이었다. 함정수사로 히타치 직원이 체포되었고, 미쯔비시전자도 유사한 건으로 기소되었다.


1980년대 중반 도시바가 소련이 더 조용한 잠수함을 건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비를 판매했다는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일본은 미국 기업이 자국 내에 판매할 수 있는 반도체 개수에 쿼터제를 도입하고 자국 칩 제조사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며, 시장 반독점법을 통해 반도체회사들의 협력을 막고 있던 미국정부와 달리, 일본정부는 기업을 향해 같이 일하라고 밀어붙였다.


제리 샌더스가 볼 때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약점은 자본조달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일본 기업은 6-7% 이자를 내지만 실리콘 밸리는 18% 면 좋은 금리라고 샌더스는 불평했다.


1980년대 초 일본 기업은 미국 경쟁사에 비해 생산설비에 60퍼센트 이상을 더 투자하고 있었는데, 해당 업계 모두 피말리는 경쟁에 직면해 있었던 것을 놓고 본다면 그 누구도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 칩 제조사들은 그저 판돈을 키우고 많은 양을 생산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더 늘려가고 있을 따름이다.


실리콘밸리가 밀려남에 따라 일본 기업은 D램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기업이 반도체 생산 설비와 장비에 투자하는 금액은 전 세계 투자액의 절반에 달했다. 미국의 칩 제조사들이 그 어떤 저주의 예언을 퍼붓건 일본 반도체는 승승장구했고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17장 쓰레기를 판다


1981년 GCA코퍼레이션은 무어의 법칙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장비들을 판매하면서 고속 성장을 했고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고급 기술 회사”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GCA는 1980년대 초 포토리소그래피 장비 산업의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빌 토비와 GCA의 The Mann 3600 Photo Repeater 출처 구글 이미지]

마스크와 렌즈를 통과해 비춰진 빛이 포토레지스트 화학물질로 덮인 실리콘 웨이퍼에 내리쬔다. 빛이 닿은 곳에선 화학물질이 빛과 반응하여 깎여나가 극히 미세하게 새겨진다. 새로운 물질이 이 홈들에 추가되면서 실리콘 위에 회로가 만들어진다. 특수한 화학 물질이 포토레지스트를 식각하여 완벽한 모양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집적회로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스무 번 이상을 리소그래피(lithography), 증착(deposition), 식각(etching), 연마(polishing) 등을 반복하고 나면 기하학적인 웨딩 케이크를 연상시키는 겹겹이 쌓인 층이 만들어진다.

[출처 구글 이미지]

1970년대 한 산업 콘퍼런스에서 TI의 모리스 창이 웨이퍼 전체를 빛으로 주사하는 대신 GCA 장비가 단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실리콘 웨이퍼 위 개별 칩에 빛으로 노출시킬 수 있는가를 물었다. 몇 년이 지난 1978년 GCA는 최초의 '스테퍼'를 출시했고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독점 공급자로서 매출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주가도 치솟았다.

[GCA - Mann 4800 Direct Step on Wafer System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부상하면서 GCA는 우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반도체 붐이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에 대규모 신규 생산 시설을 착공하는 모험을 강행했고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비용이 치솟았다.


GCA의 방만한 경영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몇 년 후 반도체 불황기를 맞아 리소그래피 장비의 글로벌 매출이 40퍼센트 추락했고 GCA의 매출은 3분의 2 넘게 주저앉았다. 한 직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우리 중에 괜찮은 경제학 전문가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예상할 수 있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장에는 불황이 닥쳤고, 때마침 GCA는 스테퍼의 독점 생산자라는 지위를 잃어버렸다. 바로 일본의 (렌즈 생산업체로 GCA에게 스테퍼용 렌즈를 납품하던) 니콘(Nikon) 때문이었다. 니콘은 GCA가 직접 렌즈 제작사를 인수해서 자체 공급하기로 하면서 자신들을 잘라내자 GCA 기계를 구입해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기계를 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GCA보다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GCA의 실패는 고품질의 렌즈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정밀제조 공정이 필수적이었다. 리소그래피 정밀도가 엄청나게 높아져 제작공정에서 천둥이 치면 기압이 변경되고, 그로 인해 빛이 굴절되는 각도가 바뀌어 칩에 새겨진 이미지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의 칩 제조업체가 맞닥뜨린 D램 점유율 폭락이라는 재앙은 GCA의 시장 점유율 붕괴와 어느 정도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GCA가 겪고 있던 문제 대부분은 장비의 신뢰도가 낮고 고객을 함부로 대해서 생긴 것으로, 결국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니콘이 고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GCA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콘의 설비를 이용하면 확연히 더 나은 수율을 낼 수 있었고 고장도 훨씬 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CA의 CEO 그린버그는 자신의 회사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는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사내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직원들은 그린버그가 회사에 없으면 ‘그린버그 라이트’를 꺼서 알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회사가 몰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장 1980년대의 원유


팰로알토의 어느 쌀쌀한 봄날 저녁, 밥 노이스, 제리 샌더스, 찰리 스포크'밍스' 차이니즈 레스토랑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일본의 시장 점유율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들은 다시 뭉쳐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팰로알토 밍스 레스토랑 출처 구글 이미지]

그들은 미국 반도체 산업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고안해 냈다. 제리 샌더스가 선언했다. 반도체는 “1980년대의 원유와 같은 것이며, 그 원유를 통제하는 자가 전자산업을 통제하게 된다.” 그들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 달라고 워싱턴에 로비하기 위해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를 결성했다.

[출처 미국 반도체산업협회]

국방부 관료들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반도체가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방위 산업체는 새로운 비행기, 탱크, 로켓을 만들 때 가능한 한 많은 칩을 탑재하여 더 나은 유도, 통신, 명령과 제어가 가능케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 전략에는 단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페리는 노이스를 비롯한 그의 실리콘밸리 이웃들이 반도체 산업의 꼭대기에 남아 있으리라고 전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6년이 되자 일본이 반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을 추월해 버렸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 리소그래피 장비 공급량의 70퍼센트를 차지했는데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의 군사 연구소에서 제이 라스롭이 발명해 낸 리소그래피 장비 산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한 국방부 관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소그래피는 한마디로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가장 민감한 안보 요소를 생산하기 위해 해외의 제조업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을 때,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불가능하게 하는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1951년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은 조심스럽게 일본의 재무장을 독려했다. 소련과 맞서기 위한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일상호방위조약 출처 구글 이미지]

일본 정부가 이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1퍼센트로 국방비를 제한했다. 이런 조심스러운 행보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 확장과 전쟁을 본능 적으로 기억하는 주변국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기에 큰돈을 쓰려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른 곳에 투자할 여력이 넘쳐났다.


미국은 경제 규모를 놓고 볼 때 일본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었다. 일본은 경제 성장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일본을 지켜줘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한때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이라고 조롱당하던 나라 일본이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 군사력의 사활이 걸린 미국의 산업 분야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권을 상대로 경제 봉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대외교역을 늘리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업은 미국 쪽에서 더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경제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도쿄의 첨단 제조업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앞서가는 일본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TV나 카메라 산업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반도체에서도 벌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으실 겁니다." 스포크는 국방부를 상대로 말했다. "반도체가 없다면 군사력의 미래는 오리무중입니다."


19장 죽음의 나선


“우리는 죽음의 나선에 빠져 있습니다.” 1986년 밥 노이스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미국이 뒤처져 있지 않은 분야를 단 하나라도 댈 수 있나요?” 실리콘밸리가 정부와 맺고 있는 관계는 늘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둬’하고 외치면서도 언제나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양극성 장애를 떠올리게 했다.

[워싱턴에 청원하는 밥 노이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1980년대에는 기업과 소비자가 반도체의 90퍼센트 이상을 구매했고 국방부가 실리콘밸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 아니었다. 게다가 워싱턴에서는 실리콘밸리가 정부의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 지를 두고 그리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다. 일본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산업 영역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과 국방부는 반도체가 “전략적” 자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해 반발하는 경제학자도 많았고 “감자 칩과 컴퓨터 칩이 뭐가 다르죠?”라고 레이건 정부의 한 경제학자가 던진 이 질문은 널리 회자되었다. “이 업종의 100달러나 저 업종의 100달러나 모두 100달러일 뿐입니다”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지원은 결국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로비를 통해 결정되었다. 재리 샌더스는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보조금과 산업 육성, 시장을 특정하여 보호하는 방식”을 공격했고, 펜타곤과 로비하는 반도체 산업에 못 이겨 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86년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레이건행정부와 도쿄는 결국 협의에 도달했다. 일본 정부는 D램 칩 수출쿼터를 설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공급을 줄이는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D램 칩 가격은 일본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부분의 미국 생산자들은 이미 D램 시장에서 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협정 체결돼도 결국 미국 메모리 칩 제조 업체 대부분은 구해 내지 못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에 의회는 마지막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일본 정부가 기업의 연구개발에 재정 지원을 해 준다는 실리콘밸리의 불만에 따라, 1987년 주요 반도체 기업과 국방부는 서로 절반씩 자금을 제공하여 ‘세마테크(Sematech)’라는 컨소시엄을 결성했다.

[세마테크 출처 구글 이미지]

세마테크는 미국 반도체 산업을 만들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밥 노이스가 이끌었는데, 그는 우선 GCA 같은 제조 설비 회사에 도움을 주는 것부터 시작했다. 노이스의 중점 과제는 미국의 리소그래피 산업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세마테크 확보 자금 중 51%가 미국 리소그래피 기업들로 향했다.


하지만 GCA는 25년간 잘못된 경영과 불운으로 일본의 니콘과 캐논, 네덜란드의 ASML에 한참 뒤처져 버렸다. 고객은 이미 경쟁사에 길들여져 있었고, 친숙하지 않은 새로운 장비를 쓰는 모험을 감행할 의향이 없었다. 심지어 노이스가 나서도 자신이 만든 인텔 조차 니콘 대신 GCA의 장비를 쓰도록 설득해 낼 수 없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유튜브]

1990년 GCA의 최대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세마테크의 노이스가 아침 수영 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1993년 GCA는 결국 문을 닫고 설비를 매각함으로써 일본과의 경쟁에 밀려 사라진 회사들의 긴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20장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1950년대 미국은 세계의 기술을 선도하는 나라였다. 그 후로 미국은 연거푸 위기를 맞았다. 그 사이에 소니는 글로벌 브랜드가 되어 있었고 모리타는 일본의 세계적 이미지를 새롭게 정의했다. 일본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하이테크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모리타는 미국의 경제와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미국은 열심히 변호사를 길러내고 있다. 일본이 더 열심히 엔지니어를 가르치고 있는 동안.“ 모리타가 이런 가르침을 주었으나 미국의 경영자들은 듣지 않았다.


일본의 경영이 “장기간의 안목”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그들은 “올해 수익”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미국의 노사관계 역시 여전히 위계적이며 “구식”이었다.


모리타는 소중한 미국인 친구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때였다. 그저 일본의 시스템이 더 작동할 뿐이라는 것을. 1989년 모리타는 이런 시각이 담긴 에세이 모음집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왜 일본이 앞서갈 수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와 공저로 내놓았다.


모리타가 주로 미국의 비즈니스 관행 중 잘못된 부분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담은 반면, 이시하라는 자신이 집필한 부분에서 “미국의 폭주에 넘어가지 말자!” “미국을 억눌러라?”라는 제목으로 일본 극우의 불만을 과격하게 표출했고, 이 책은 워싱턴 정가를 경악시켰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과 공저자인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출처 구글 이미지]

워싱턴 정가가 경악한 실질적인 이유는 이시하라가 일본 칩을 사용하는 컴퓨터는 군사력의 핵심이며 따라서 일본이 힘의 중심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이었다. 이시하라의 예상에 따르면 일본이 고도의 반도체를 소련에 공급할 경우 냉전의 군사 균형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1977년 빌 페리를 고용하여 반도체와 연산력을 새로운 무기 체계의 근간으로 삼고 군사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만든 펜타곤의 리더인 브라운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상황이었다.


기술력으로 세계 1등이 된 일본이 과연 군사력에서 2등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을까? D램 칩에서 거둔 성공을 모델로 삼아 미국이 차지한 거의 모든 유의미한 산업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수도 있지 않은가? 일본이 그렇게 나온다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1987년, CIA는 분석가들을 모아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예측해 보았다. 분석가들은 일본의 D램 시장 지배를 "팍스 니포니카"가 시작되는 증거로 보았다. 일본이 주도하는 동 아시아 경제 정치 블록이 출현하리라는 것이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이 아시아에서 행사하는 지배적 영향력은 기술 우위, 군사력, 무역과 투자 등을 통해 일본, 홍콩,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묶어 놓은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홍콩 구룡만에 페어차일드가 최초의 반도체 조립 공장을 세운 후 집적회로는 아시아 내 미국의 위치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미국의 칩 제조사들은 대만, 한국, 싱가포르 등에 설비를 건설해 왔다. 이 지역을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막아 내는 힘은 군사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을 전자 산업이 흡수함으로 써 가난에 시달리는 농촌 지역이 흔히 그렇듯 게릴라 반군의 기반이 되는 것을 막고, 아시아의 전직 농민은 전자 제품을 조립하는 좋은 일자리를 얻고 미국의 소비자도 혜택을 보는 구조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자 이런 미국의 공급망 구조에서 가장 혜택을 보는 건 일본으로 드러났고, 만약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다면, 그들이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빼앗고자 할 때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파트 4 되살아난 미국


21장 감자칩의 왕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는 "이 세상에서 가장 죽여주는 것"을 만든다"잭 심플롯(Jack Simplot)은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중학교 2학년도 채 마치지 않았고, 맥도널드에 감자를 납품하는 아이다호주 출신의 '감자왕'이었다.

[잭 심플롯과 제품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똑똑한 과학자들이 모르는 것, 바로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 반도체 산업이 일본의 도전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 심플롯 같은 카우보이 경영자들이 밥 노이스가 말한 "죽음의 나선"을 막아내면서 놀라운 반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부활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스타트업과 방만한 조직을 쥐어짜는 구조조정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미국은 일본의 D램 거대기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일본을 뛰어넘었다. 국제 경쟁에 직면한 실리콘밸리는 무역을 중단하는 대신에 대만과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오프쇼어링(Offshoring)을 하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모스텍, AMD, TI, 인텔 등 미국의 모든 D랩 제조업체들이 일본의 공세에 밀려 문을 닫는 상황에서, 쌍둥이 형제 조 파킨슨과 워드 파킨슨(Joe and Ward Parkinson)은 아이다호주 주도인 보이시(Boise)의 한 치과 진료소 지하실에 1978년에 마이크론을 설립하였다. 마이크론의 출발은 실패를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킨슨 형제 출처 구글 이미지]

일본 기업이 시장을 틀어쥐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반도체 회사 CEO들은 의회와 펜타곤을 오가며 로비하느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워싱턴에서 보냈다. 그들은 일본과의 경쟁이 심화되자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은 잠시 접어둔 채 경쟁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컴퓨터 칩이나 포테이토 칩이나 뭐가 다르냐는 주장에 실리콘밸리는 격렬하게 반응했고 반도체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반면에 감자는 그렇지 않으니 자신들이 만드는 칩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만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잭 심플롯이 볼 때 감자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파킨슨 형제가 자금이 어려워져 투자를 요청했을 때 감자 농부였던 그는 가격이 하락해 있고 다른 모든 경쟁자가 청산하고 있을 때야말로 상품 시장에 진입할 최고의 시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과감하게 마이크론에게 1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수백만 달러를 더 쏟아부었다.

[잭 심플롯과 마이크론 기공식 출처 구글 이미지]

마이크론의 비즈니스 모델은 미국의 가장 큰 칩 제조사들이 버리고 떠난 시장을 쓸어 담는 것이었고, 일본에 맞서 정부의 협력만 확보하려는 실리콘밸리의 전략을 우습게 여기며 미국반도체산업협회 가입도 거절했다.


하지만 당시 마이크론은 공격적인 비용 절감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경쟁업체들이 개별 칩의 트랜지스터와 콘덴서의 크기를 줄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워드 파킨슨은 칩 자체의 크기를 줄였고, 제조 공정을 최대한 단순화했다. 그들은 퍼킨엘머와 ASML에서 구입해 온 리소그래피 장비를 뜯어고쳐서 제조사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수준까지 장비의 정밀도를 끌어올렸다.


또한 수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 덕분에 보이시의 전기와 토지가 캘리포니아나 일본보다 저렴하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육체노동자의 근로윤리, 공돌이 정신"까지 더해져 결국 마이크론은 살아남았고 번창했다. 심플롯이 처음 투자한 100만 달러는 결국 수십억 달러가 넘게 커졌다.

[마이크론 보이시 공장 출처 구글 이미지]

마이크론은 태평양 건너 라이벌을 창의성과 비용 절감이라는 두 측면에서 모두 능가했고, 고통스러운 10년이 지난 후 미국 반도체 산업은 결국 1승을 거두었다. 그 승리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감자 농부가 지니고 있던 상인의 지혜 없이는 불가능했다.


22장 혼란에 빠진 인텔


"이봐, 클레이턴, 나는 바쁜 사람이고 학자들의 헛소리나 읽을 시간이 없네." 앤디 그로브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가장 유명한 교수이자 "기술 발전이 기존 기업을 몰아낸다"는 "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유명한 클레이턴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파산 위기의 인텔을 구해내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좋으면서도 막강한 기업으로 자리잡게 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의 집념이었다.


그로브는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경쟁의 공포, 부도의 공포, 뭔가 잘못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손실의 공포 등은 모두 강력한 행동 동기를 제공한다."

[포브스지의 크리스텐센과 앤디 그로브,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D램 칩을 판매하는 인텔의 비즈니스 모델이 끝났다는 것을 그로브는 직감했다. 인텔은 일본 생산자들에 의해 "파괴"당한 것이다. 하지만 인텔은 메모리 칩의 개척자였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한 직원은 인텔이 D램을 안 만드는 건 포드가 자동차를 안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텔은 아직 일본 기업이 뒤처져 있는 작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는 선두주자였고 그 분야에서 나온 하나의 발전은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80년 인텔은 미국 컴퓨터 업계의 강자 IBM과 소규모 계약을 맺었다. 이른바 개인용 컴퓨터라고 하는  신제품을 위한 칩을 만들어 달리는 것이었다. IBM은 빌 게이츠라는 젊은 프로그래머와 컴퓨터 운영 체제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계약을 맺었다.


1981년 8월 2일, 화려한 벽지와 짙은 커튼이 배경으로 드리워진 뉴욕의 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 그랜드볼륨에서 IBM은 개인용 컴퓨터의 출시를 발표했다.

[IBM 개인용 컴퓨터 발표 행사, 빌게이츠와 폴 앨런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칩 판매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D램의 판매를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넘을 수 있다는 주장은 허황된 소리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로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무어도 마지못해 인정했다. D램 대신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편집증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실리콘밸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해졌다. 하지만 인텔에는 군기반장이 필요했다.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언제나 기술의 첨단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


인텔 정상화의 첫 단계는 직원 25퍼센트를 해고하고 여러 곳에 있는 설비를 폐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제조 방법론을 서슴없이 모방했다. 그들은 공장 관리자들을 일본애 보내 견학하도록 했다.


인텔의 새로운 제조 기법은 "정확히 베끼자"로 통했다. 어떤 제조 공정 묶음이 가장 잘 작동하는 것으로 판명되면 인텔은 그것을 모든 설비에서 복제했다. 그전까지는 엔지니어들에게 인텔의 공정에 대해 미세 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엔지니어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하지 말고 모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건 엄청난 문화적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일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실리콘밸리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공장식 생산 라인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크레이그 배럿도 인정했다. "저는 독재자처럼 여겨졌죠."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정확히 베껴라" 전략은 먹혀들었다. 인텔의 수율은 확연히 향상되었다. 제조 설비는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되었고 비용이 절감되었다. 인텔의 공장은 이제 연구소보다는 미세하게 조정된 기계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로브와 인텔에는 운도 따랐다. 1980년대 초 일본 생산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구조적 상황이 일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미국 달러 대비 엔화의 가치가 두 배 올랐고 미국의 수출가가 저렴해졌다. 1980년대를 지나며 미국의 금리도 가파르게 내려왔고 인텔의 자본 비용이 낮아졌다.


게다가 텍사스에 본사를 둔 컴팩컴퓨터(Compaq Computer)가 IBM의 PC 시장에 뛰어들었다. 컴팩은 운영 체제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직접 만들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PC 부품을 플라스틱 상자에 조립하는 상대적으로 쉬운 방향을 잡았다. 컴팩은 인텔 칩과 마이크로소프트 운영 체제를 사용한 자체 PC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IBM보다 훨씬 저렴했다.

[컴팩의 인기 모델들 출처 구글 이미지]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컴팩과 다른 회사들이 만드는 IBM PC "복제품"이 IBM의 오리지널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었다. 컴퓨터가 모든 사무실과 많은 가정에 설치되면서 가격이 급격히 내려갔다. 애플 컴퓨터를 제외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의 PC 가 인텔 칩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탑재했고, 이 둘은 서로 궁합이 잘 맞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인텔이 PC용 칩 판매를 사실상 독점한 상태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그로브의 인텔 재건은 실리콘밸리 자본주의의 교과서적 사례가 되었다. 그는 인텔의 비즈니스 모델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 닫고, 인텔의 창업 아이템이었던 D램을 포기함으로써 인텔을 스스로 "파괴"했다. 대신에 인텔은 PC용 칩 시장의 목줄을 움켜잡았다. 인텔을 구해 낸 것은 혁신도 전문성도 아닌 그의 편집증이었다.


23장 적의 적은 친구다: 떠오르는 한국


이병철은 무슨 일을 해도 이익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1910년, 잭 심플롯보다 1년 뒤에 태어난 이병철은 1938년 3월 사업가로서 첫출발을 했다. 그는 해방 후와 전쟁 중에도 항상 날렵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젊은 시절의 이병철 출처 구글 이미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이병철은 도시바나 후지쓰 같은 기업이 D램 시장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국은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만든 칩의 조립과 패키징을 아웃소싱하는 중요 장소였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원(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창립에 도움을 주었고, 미국의 최고 수준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수에게 훈련받는 한국인 역시 늘어났다.

[KIST 준공식과 한미대통령 공동성명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렇게 숙련된 인력이 있다 해도 기본적인 조립에서 첨단 반도체 제조로 뛰어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성은 이전에 단순한 반도체 작업에 손을 댔다가(*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반도체 주식회사) 수익을 내지 못하고 더 나은 기술을 확보하지도 못하며 고전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반도체를 설립한 강기동 박사 저서와 삼성이 실패한 한국반도체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1980년대 초 이병철은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실리콘밸리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처절한 D램 경쟁이 그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한국 정부는 반도체를 우선 사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삼성의 미래를 숙고하던 이병철은 1982년 봄 캘리포니아 여행을 하면서 휴렛패커드와 IBM을 둘러보고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정확히 모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 이상의 자본 확충이 필요한 데다 아직 제대로 될지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흔쾌히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에 4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은행은 정부 방침을 따라 더 많은 돈을 빌려줄 것이었다. 그러니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하이테크 기업은 차고에서 태어난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1983년 2월, 신경이 곤두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이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삼성전자 사업부를 총괄하던 수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포했다. “삼성은 반도체를 만들 걸세." 삼성은 적어도 1억 달러를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과 함께 그는 회사의 미래를 건 반도체 도박을 시작했다.

[1984년 5월 기흥 반도체 공장 준공식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삼성의 도박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의 국제적 경쟁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에서 훨씬 더 저렴한 공급원을 찾아내는 동시에 미국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발상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텔은 떠오르는 한국의 D램 생산자들을 환영했다. 인텔은 1980년대에 삼성과 함께 합작 투자에 합의한 여러 실리콘밸리 기업 중 하나다. 삼성이 제조한 칩을 인텔의 브랜드로 판매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도움을 받아 실리콘밸리를 향한 일본의 위협에 대응한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생산 비용과 임금은 일본에 비해 확연히 낮았다. 삼성 같은 한국 기업들의 제조 공정은 일본처럼 완벽에 가깝지도 극도로 효율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오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 갈등 역시 한국 기업들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워싱턴은 일본이 미국 시장에 D램 칩을 저가로 풀어놓는 행위, 이른바 "덤핑"을 중단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결국 1986년 도쿄는 D램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며 낮은 가격에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D램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총리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이 일본과의 협상으로 한국에 이익을 주자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칩을 생산하는 것이 일본을 제외한 다른 누구여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D램 시장과 함께 기술도 제공했다. 실리콘밸리의 D램 생산은 거의 파탄 나 있었기에, 최고 수준의 기술을 한국에 전수하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이병철은 현금이 부족한 메모리 칩 스타트업인 마이크론에 64K D램용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제안했고, 그 과정에서 창업자인 워드 파킨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는 삼성이 제공했던 "결정적 수준까지는 아니었어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돈을 받아 마이크론을 살려 놓아야 했던 것이다.

[64K D램 출시 개발성공 발표 행사 출처 구글 이미지]

24장 이것은 미래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부활을 온전히 영웅적인 기업가와 창조적 파괴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여전히 새로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칩 제조의 도약을 준비하고 처리 능력(processing power)을 이용한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술 발전 중 많은 부분이 정부와 협력 아래 이루어졌는데,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같은 작고 기민한 조직이 미래를 향한 큰 도박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았다. 또 정부는 그에 필요한 교육과 연구개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새로운 세대의 칩이 나올 때마다 그 위에 올라가는 트랜지스터 숫자가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칩 하나에 이제는 100만 개도 넘는 트랜지스터를 장착하는 경우 색연필과 핀셋으로 칩을 디자인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해졌다. 이 딜레마를 붙들고 씨름한 사람이 바로 고든 무어의 친구인 물리학자 카버 미드(Carver Mead)였다.


미드가 이 문제를 고민할 때 누군가 그에게 린 콘웨이(Lynn Conway)를 소개해 주었다. 콘웨이는 제록스 PARK의 컴퓨터 설계자였는데, 그는 1968년 성전환 수술을 한 후 IBM에서 해고당하고 그곳에 "스텔스 모드"로 입사했다.

 

그들은 토론을 거쳐 칩 설계를 위한 일련의 수학적 "설계 규칙(design rule)"을 만들어 냈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칩 설계를 자동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반도체 설계의 구텐베르크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미드는 스스로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견주어 생각하며 흐뭇해하곤 했다.

[카버 미드와 린 콘웨이 출처 구글 이미지]

"미드-콘웨이 혁명"으로 알려진 것에 대해 펜타곤은 큰 관심을 보였고, DARPA는 최신 설비가 갖추어진 팹으로 보내 설계된 칩을 제작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재정 지원을 했다. 미국이 풍부한 칩 설계자 풀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반도체 업계 역시 반도체연구협회를 만들어 카네기멜론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 연구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후 이 두 대학 출신들이 스타트업을 세워 반도체 설계를 위한 소프트웨어 도구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냈다.


DARPA는 또한 칩의 연산력을 사용할 방안을 찾는 연구에도 후원을 했다. 그중에는 무선통신 연구가인 어윈 제이컵스(Irwin Mark Jacobs)가 칩을 통해 공기를 통해 정보를 주고 주고받겠다는 기획으로 앤드류 비터비(Andrew Viterbi) 등과 함께 무선통신회사를 차렸다. 품질 좋은 통신(quality communication)이라는 이름의 뜻의 퀄컴이었다.


그들은 더욱 강력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하여 머지않아 같은 주파수 스펙트럼 안에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부호화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승부를 건 것이다.


제이컵스는 우선 DARPA와 나사의 계약을 따내 우주 통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80년대 말 퀄컴은 민간 시장으로 다각화하여 트럭 산업을 위한 인공위성 통신 시스템을 발족했다. 하지만 반도체를 이용해 대량의 데이터를 보내는 것은 1990년대 초까지도 틈새 사업처럼 보이는 분위기였다.

[퀄컴의 공동 창업자 어윈 제이콥스와 비터비 출처 구글 이미지

정부의 노력은 망해가는 회사를 되살리려고 할 때가 아니라, 연구원들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했을 때 효율적 성과를 보여주었다.


의회 입장에서 보자면, 외형상 국방조직인 DARPA가 세금으로 컴퓨터공학과 교수들에게 값비싼 식사와 와인을 제공하고, 교수들은 칩 설계에 대한 이론적 대화를 나누는 모습 앞에 격분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트랜지스터는 작아질 수 있었고, 반도체의 새로운 사용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여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고, 더 작은 차세대 트랜지스터를 향한 자금 투입이 가능했다.


25장 KGB의 T국장


블라디미르 베트로프는 KGB 스파이였다. 1965년 그는 처음 파리로 파견되었다가 1980년대 초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의 경력은 제자리걸음이었고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러 있었으며 인생 전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1963년 소련이 젤레노그라드를 세운 그 해 KGB는 T국(Directorate T)을 편성했는데, T는 기술을 뜻하는 러시아어 teknologia의 앞 글자를 따온 것이고, 그들의 임무는 “서구의 장비와 기술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집적회로 생산능력을 향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최신 칩 설계를 들여와도 반도체를 자국에서 제대로 생산하려면 모든 장비를 다 갖춰야 하며 기계가 고장 날 때를 대비한 여벌의 부품도 필요하다. 훔치고 모방하는 식으로는 품질 좋은 반도체를 꾸준히 생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자 기술과 컴퓨터를 이용해 군사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일은 축소되었다.


베트로프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공작원에게 T국에 대한 서류 십여 건을 넘겨주었을 때(코드명 “Farewell”) 소련이 훔쳐 간 게 얼마나 많은지 확인한 서구의 스파이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베트로프와 그의 아내 출처 구글 이미지]

프랑스는 신속하게 베트로프에 대한 정보를 미국을 비롯한 다른 동맹국의 정보기관과 공유했고, 레이건 정부는 첨단 기술의 세관 통과 검사를 강화하는 ‘엑소더스 작전(Operation Exodus)’을 개시하여 응수했다. 1985년 엑소더스 작전은 6억 달러 상당의 물품 압류와 1000명 이상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소련의 베끼시오 전략은 결국 미국의 이익이었다. 소련이 늘 미국에 비해 뒤처진 기술을 갖게끔 했으니 말이다. 1985년 CIA에서 소련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소련 생산자들은 인텔과 모토로라 칩을 정확한 시간 간격으로 베끼고 있었다. 소련은 늘 5년 뒤처지고 말았다.


26장 대량살상무기 : 오프셋 충격


“장거리, 높은 정확도, 치명적 유도 전투 시스템, 무인 비행 기체, 높은 품질의 새로운 전자 통제 시스템” 같은 것들이 통상적인 폭발물을 “대량 살상 무기”로 바꿔놓을 것이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군 참모총장 직을 역임했던 소련군의 원수 니콜라이 오가르코프(Nikolai Ogarkov)의 예측이었다.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출처 구글 이미지]

소련은 냉전기 초반에 핵심적인 기술 경쟁에서 미국을 바싹 뒤쫓았다. 강력한 로켓을 만들었고 핵탄두를 잔뜩 쌓아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근육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두뇌로 싸우는 시대였다. 1980년대의 유명한 소련 농담 중 하나. 크렘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동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크로프로세스를 만들어냈소!”


빌 페리의 “상쇄 전략(offset startegy)”는 먹혀들었고, 소련은 그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이크로 전자기술에 앞서 나간 미국을 따라잡을 의지조차 사라진 소련의 무기체계는 점점 멍청한 상태로 남아 있었던 데 반해, 미국의 무기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미국이 미니트맨 2 미사일을 유도하기 위해 T의 칩을 장착했던 것은 1960년대 초였지 만, 소련은 1971년까지도 집적회로를 이용한 유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니트맨2와 미니트맨3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1980년대 초 공식 발표된 바에 따르면 미국은 잠수함의 센서를 당시 가장 강력한 슈퍼 컴퓨터이며 최초로 반도체 메모리 칩을 탑재한 컴퓨터였던 일리악4와 연결해 소련 잠수함 추적이 가능했다. 이로써 소련이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두 가지, 즉 장거리 폭격과 잠수함 발사 미사일 중의 하나인 소련 잠수함은 미국의 탐지 앞에 극도로 취약해지고 말았다.


크렘린은 자국의 마이크로 전자 기술 산업을 되살리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1987년,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젤레노그라드를 방문해 그 도시에는 “더 많은 규율”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규율만으로는 소련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문제는 정치적 간섭이었다. 1980년대 말, 유리 오소킨은 리가의 반도체 공장에서 해직되었다. KGB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민간 반도체 시장 없이 군사 수요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였다. 마지막 문제는 소련이 국제 공급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자국 반도체 제조 업체를 되살려 보려는 소련의 노력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크렘린이 허둥대고 있을 때, 세계는 미래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 모습을 슬쩍 엿보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 무대는 페르시아만이었다.


27장 전쟁 영웅


1991년 1월 17일 이른 아침. 사우디아라비아 미 공군 기지에서 F-117 스텔스 폭격기 편대의 선봉대가 출격했다. 목표는 바그다드 라시드가에 있는 12층 높이 전화교환국이었다. 이라크의 통신 기반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두 대의 전투기는 900킬로그램이 넘는 페이브웨이 레이저 유도 미사일을 투하해 이라크의 전화교환국을 명중했다. 걸프 전쟁의 시작이었다.


걸프전이 시작될 무렵, 군대의 무기체계 속에서 정밀유도미사일 페이브웨이는 마치 컴퓨터 산업의 인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차지하는 것과 유사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다들 잘 알고 있고, 사용하기 쉬우며 가성비까지 좋은 그런 물건이 된 것이다.


미군의 공군력은 걸프전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이라크 공군을 무력화하면서 미군의 희생은 최소화했다. 페이브웨이 미사일 시스템을 발명하고 전자 장비를 개량하여 자신의 약속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미사일을 쏠 수 있게 공헌한 웰든 워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1차 걸프전 양상과 페이브웨이 출처 구글 이미지]

소련의 군산 복합제가 만든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이라크 군대는 미국의 공격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강철을 이긴 실리콘” 뉴욕타임스⟫의 헤드라인 문구다. “컴퓨터 칩이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도”라는 또 다른 헤드라인도 신문에 실렸다.


걸프전의 결과는 이라크가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오르가코프의 예측 그대로였다. 소련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는 걸프전이 소련의 방공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왔다고 인정했다. 미군의 폭탄이 이라크 하늘을 뚫고 스스로의 항로를 찾아 이라크의 건물 벽을 부수는 영상이 CNN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28장 냉전은 끝났고 당신들이 이겼어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는 1980년대 내내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면서 “일등 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 같은 말을 쉽게 수긍했는데 그 이유는 모리타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니의 워크맨과 그 밖의 소비자 가전에 힘입어 일본은 번영했고 모리타는 부자가 되었다.


그다음 1990년의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의 금융시장이 폭락했고 경제는 깊은 불황에 빠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1등 국가 일본”이라는 말이 더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일본이 침체하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산업의 강자로 떠오르게 한 일본의 대표적 산업이 보였다. 바로 반도체였다.


일본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정부가 지원하는 과잉 투자라는 불안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일본 언론도 반도체 분야의 과잉 투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조사들은 모두 같은 시장에 투자를 쏟아부었고, 돈을 버는 회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큰 D램 생산자들 대부분은 1980년대에 가진 영향력을 바탕으로 혁신을 주도하며 우위를 지키는데 실패했다. D램 시장 강자 도시바에는 '마스오카 후지오'라는 중간급 공장 관리자가 있었다. 그는 1981년 D램과 달리 전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데이터를 기억할 수 있는 메모리 칩을 개발했지만 도시바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를 개발해 처음 내놓은 것은 인텔이었다. “플래시(flash)” 메모리 혹은 낸드(NAND) 메모리가 탄생한 것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차이 출처 구글 이미지]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PC 시대가 오는 것을 놓쳤다는 데 있다. 일본의 반도체 공룡 중 인텔이 메모리 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환하고 PC 생태계의 지배자가 된 경로를 따라간 회사는 없었다. NEC 단 한 곳만 유의미한 시도를 했으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가져갔을 뿐이다. 앤디 그로브와 인텔에게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였다.


반면에 일본의 D램 기업들은 이미 높은 시장 점유율을 누리고 있었고 금융 비용마저 낮았던 탓에,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무시했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PC 혁명의 혜택은 대부분 미국 기업에게 돌아갔다. 일본의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 그들의 반도체 지배력은 이미 잠식되고 있었다.


1993년부터 미국은 반도체를 다시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0년대 말 90퍼센트에 달하던 일본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이 되자 20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세계 무대에서 당당한 일본이 되자는 야심은 그들이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제 그 토대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이시하라와 모리타는 일본이 반도체 지배력을 갖춤으로써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쟁이 터지고 보니, 걸프전이라는 예상 밖의 전장에서 미군이 보여준 활약은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릴 정도였다.


반면에 디지털 시대 첫 번째 전쟁에서 일본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파견된 28개국 다국적군에 합류하기를 거절했다. 그 대신에 일본은 이라크 주변국과 다국적군을 지원하기 위해 돈을 보내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미국의 페이브웨이 레이저 유도탄이 이라크의 탱크들을 날려 버리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 외교는 초라해 보였다.


미국의 진정한 단 하나뿐인 경쟁자 역시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90년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실리콘밸리를 공식적으로 견학했다. 상명하복의 “베끼시오” 전략으로는 더 이상 기술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가르코프 원수가 무려 10년도 더 전에 했던 경고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철수함으로써 냉전을 끝내겠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그는 미국의 기술을 넘겨받고 싶어 했다. 스탠퍼드대학교 청중들에게 소련의 지도자가 말했다. “이제 냉전은 과거의 일입니다. 누가 이겼는지 입씨름하지 맙시다.”

[스탠퍼드대학교를 방문한 고르바초프 출처 구글 이미지]

1983년 초, 오가르코프는 미국 언론인 레스 겔브를 만나 비공개를 전제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냉전은 끝났고 당신들이 이겼소.“ 소련의 로켓은 여전히 강력했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에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고, 컴퓨터 산업은 뒤쳐졌고, 통신과 감청기술 또한 밀려났다. 그에 따른 군사적 결과는 재앙일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러시아 반도체 산업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몰락했다. 러시아의 반도체 생산설비는 맥도널드의 해피밀 장난감에 들어갈 작은 칩을 만들고 있었다. 냉전은 끝났고 실리콘밸리가 이겼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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