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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Jul 19. 2024

칩워(Chip War) (3)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지음

파트 5 집적회로에 갇힌 세계


29장 우리는 대만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1985년 대만의 실세 장관 리궈딩은 모리스 창을 본인의 타이페이 집무실로 불렀다. 리궈딩의 도움을 받아 TI가 대만에 첫 번째 반도체 설비를 세운 지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리궈딩은 TI 의사결정권자들과 탄탄한 관계를 맺고 다른 전자 회사들에게도 TI의 뒤를 따라 대만에 공장을 세우라고 권유해왔다. 리궈딩은 모리스 창에게 말했다. “우리는 대만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말해 보시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출처 구글 이미지]

1985년 대만은 전자 분야에 특화된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모리스 창에게 그 기관을 이끌도록 했다. 당시 대만은 해외에서 만든 칩을 가져와서 테스트하고 플라스틱이나 세라믹 패키지에 부착하는 등 반도체 조립에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RCA로부터 반도체 제조 라이센스를 받아 1980년 UMC라는 반도체 제조 업체를 설립해서 반도체 제조 업계에 뛰어들었지만, UMC는 첨단 기술에서 경쟁할 역량이 되지 못했다.

[UMC 본사 출처 구글 이미지]

대만은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만이 가져가는 이윤은 적었다. 가장 큰 몫은 칩을 설계하거나 제조하는 기업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곳에서 설계하고 생산한 칩을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했다. 리궈딩 장관을 비롯해 대만 관료들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모리스 창이 대만을 처음 방문했던 1968년, 대만은 홍콩,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경쟁 중이었다. 이제 삼성과 한국의 다른 거대 재벌이 최신 메모리 칩 생산을 위해 돈을 쏟아부으려던 참이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한국이 반도체 조립에서 생산으로 나아간 경로를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큰 위협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있었다. 중국이 가하는 경제적 위협은 여전했다. 중국이 전자 조립 분야에 끼어들면 대만은 일자리를 잃어버릴 위험에 놓였다. 중국과 가격 경쟁을 해서 이길 수는 없었다. 대만은 첨단 반도체를 스스로 생산하는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모리스 창이 TI에서 본인 희망대로 CEO가 되었다면 그는 밥 노이스나 고든 무어의 반열의 명실상부한 반도체 업계 최상층에 올랐을 것이다. 54세의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해 주는 반도체 회사를 만드는 것. '파운드리(foundry) 기업. 모리스 창이 머릿속에서 굴려오던 아이디어였다.


1976년 당시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자체 제조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팹리스(fabless)” 기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창은 파운드리라는 개념을 절대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무르익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콘웨이와 미드가 이룬 혁명이 칩 설계가 제조와 훨씬 더 쉽게 분리하도록 만들었다.


리궈딩은 모리스 창이 그려 온 비즈니스 모델을 위한 자금을 끌어왔다. TSMC를 세우는데 필요한 자금의 48퍼센트는 대만 정부가 제공했다. 모리스 창은 필립스를 설득해 5,800만 달러의 투자금과 함께 기술 이전과 지식재산권 라이센스를 제공받았다. 그 대가로 필립스는 TSMC 지분 중 27.5% 를 차지했다.


나머지 설립 자본은 정부로부터 투자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권유”받은 부유한 대만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정부는 또 TSMC에 광범위한 세제 혜택을 제공했다. 설립 첫날부터 TSMC는 일개 민간기업이 아니었다. 바로 대만의 국가 프로젝트였다.

[TSMC 첫 번째 Fab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 반도체 산업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TSMC의 초기 성공을 가능케 한 필수 요소였다. TSMC의 고객 대부분은 미국의 반도체 설계자들이었고, 최고위급 직원 다수가 실리콘밸리 출신이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대만과 실리콘밸리 서로에게 이로웠다.


자가제조 설비를 갖추지 않은 것은 초기 비용을 극적으로 낮춰 주었지만 동시에 경쟁자에게 의존해 칩을 만들어야 했으니 이 비즈니스 모델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TSMC는 절대 칩을 설계하지 않고 그저 만들기만 하겠노라 모리스 창은 약속했다.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출처 구글 이미지]

반도체 산업에서 모리스 창의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은 새로운 “저자”, 즉 팹리스 칩 설계 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그로 인해 모든 종류의 기기에 칩이 탑재되고 연산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디지털 시대의 인쇄 기술은 인쇄업의 독점과 맞물려 있었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수율을 끌어올리며 더 많은 고객과 자본을 끌어들였다. 모리스 창과 TSMC 그리고 대만은 세계 최신 반도체 생산을 독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30장 모든 인민은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


1987년 모리스 창이 TSMC를 세웠던 바로 그해, 대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당시만 해도 무명 인사였던 런정페이(任正非)라는 엔지니어가 화웨이(Huawei)라는 이름의 전자 제품 무역 회사를 차렸다.

[화웨이 회장 런정페이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대만에 비해 중국은 엄청나게 가난했으며 기술적으로도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경제 개방 정책으로 인해 홍콩을 통해 수입 호은 밀수되는 교역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화웨이가 설립된 선전(深圳)은 바로 그 홍콩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선전의 런정페이는 홍콩에서 저렴한 통신 장비를 구입한 후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와서 비싼 값에 파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집적회로가 들어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칩을 만든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중국은 기술의 첨단에서 10년가량 뒤처져 있었다.


공산당의 지배가 아니었다면 중국은 아마 반도체 산업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적회로가 발명되었을 당시 중국은 방대한 규모의 저임금 노동력과 잘 교육받은 이공계 출신 인재 등 일본, 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반도체 제조 업체들 눈에 들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한 후 외국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일이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모리스 창 같은 사람이 스탠퍼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가난에 시달릴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었고, 어쩌면 구금되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공산혁명 이전에 중국에서 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재들은 대만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렇게 숙적의 전자기술 역량을 키워 주고 만 것이다.


한편 중국의 공산정권은 소련과 같은 종류의 실수를 저질렀다. 단, 이번에는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로 그 실수를 반복했다. 1950년대 초 베이징은 반도체 소자를 과학 연구 우선순위로 확정 지었다.


곧 그들은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해 공산혁명 이전에 버클리, MIT, 하버드, 퍼듀 등의 대학교에서 연구했던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중국은 1960년에 최초의 반도체 연구 기관을 설립했다.


중국이 단순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첫 생산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1965년 중국 엔지니어들은 스스로 중국산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밥 노이스와 잭 킬비가 그 일을 해낸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극단주의로 인해 해외 투자뿐 아니라 진지한 과학 연구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중국이 최초의 집적회로를 생산한 그해 마오쩌둥은 온 나라를 문화혁명의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화대혁명 당시 출처 구글 이미지]

전문 지식은 특권의 원천이며 사회주의적 평등을 침해한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주장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 나라 교육 체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전문가가 지정된 마을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냥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마오 주석이 내린 "1968년 7월 21일 교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교육 기간을 줄이고, 교육을 혁명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학생들은 실제적인 경험이 있는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선발해야 하며, 몇 년의 학습을 마치고 생산 현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교육 수준이 낮은 직원들로 첨단 산업을 이루자는 발상은 어처구니없었다. 게다가 그는 완전히 자족적 체제를 원했다. 또 정치적 맞수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외국의 부품으로 어지럽히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때때로 모든 전자 제품이 본질적으로 반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닌지 근심했다.


마오쩌둥의 건강이 악화되던 1970년대 초부터 문화혁명은 기세를 잃기 시작했고, 1975년 9월 2일 미국의 사절단으로 존 바딘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바딘과 동료들은 중국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으며 중국을 떠났지만 반도체 생산국이 되겠다는 중국의 야심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덩샤오핑이 들어선 후 그는 '4대 근대화'를 통해 중국을 바꿔 놓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정부는 '과학과 기술'이 '4대 근대화의 요체'라고 선언했다. 중국의 과학자들은 온 세상이 기술 혁명으로 인해 달라지고 있었고 그 핵심에 반도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78년 3월 전국과학대회가 개최되었다.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앞서 나감으로써 새로운 무기 체계와 소비자 가전, 컴퓨터를 개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대회의 정치적 목표는 "중국은 스스로 반도체를 만들 필요가 있고 외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국 전국과학대회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정부가 반도체를 전략적 중요 물자로 언급하고 나니 중국의 관료들은 반도체 생산을 틀어쥐고 반도체를 관료제의 통제하에 두려 했다. 화웨이의 런정페이처럼 떠오르는 기업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외국 칩을 수입하는 것밖에 없었다.


31장 주님의 사랑을 중국인과 함께 나누며


리처드 창(Richard Chang, 張汝京)은 "주님의 사랑을 중국인과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선교사와 같은 같은 열정을 지닌 창은 중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전파하고자 했다.


이 신실한 기독교인 반도체 엔지니어는 난징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자랐고 텍사스에서 교육받은 인물로, 2000년 베이징을 설득해 상하이에 반도체 파운드리 SMIC를 건설하면서 막대한 보조금을 받아냈다. 심지어 그 안에는 교회도 있었다.


그렇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특히 대만의 TSMC를 마주할 때면, 창은 여전히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오쩌둥의 극단주의에 의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고약한 운명을 겪고 난 후 10여 년이 흘렀고 1990년대가 되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고 상하이와 선전 같은 도시는 전자 제품 조립의 중심지로 거듭났지만 중국의 지도자들은 진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에 반도체를 제공하는 것, 그것은 리처드 창이 생각하는 인생의 소명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TI에 취직하여 잭 킬비 밑에서 일했고 팹 운영의 전문가가 되어 전 세계의 TI 설비를 관리했다. 누군가 중국에 반도체 산업을 이룩해 낼 수 있다면 그 장본인은 리처드 창이었다.


골드만삭스, 모토로라, 도시바 같은 국제 투자자들로부터 끌어온 15억 달러를 밑천 삼아. 창은 2000년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을 창업했다. 창은 그 돈으로 수백여 명의 외국인을 고용해 SMIC의 팹을 운영했는데 그중 적어도 400명은 대만 사람이었다.

[SMIC 공장 출처 구글 이미지]

창의 전략은 단순명료했다. 바로 TSMC가 한 대로 하는 것이었다. 대만에서 TSMC는 눈에 띄는 족족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고용했다. 특히 미국이나 다른 첨단 반도체 기업에서 일한 사람이 우선이었다. TSMC는 동원 가능한 최선의 장비를 갖추었다. 반도체 산업의 최고가 되기 위해 TSMC는 직원 교육에 혼신을 다한다. 그러면서 대만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세제 혜택 및 보조금을 누렸다.


SMIC에게 TSMC의 행보는 종교 경전과도 같았다. SMIC는 해외 반도체 기업, 특히 대만 기업의 인재들을 경쟁적으로 데리고 갔다. 설립 후 첫 10년간 SMIC 직원 중 3분의 1이 해외에서 채용된 사람들이었다. 반도체 산업 분석가 더그 풀러(Doug Fuller)에 따르면 2001년 SMIC는 중국에서 650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한 반면에 주로 대만이나 미국 같은 해외에서는 393명을 채용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나니 SMIC의 직원 중 3분의 1이 해외에서 영입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채용과 관련한 구호까지 있었다. "옛 직원 한 명이 새 직원 둘을 데려온다." 경험이 풍부한 해외 출신 직원을 데려와 현지 엔지니어를 교육시키겠다는 방침을 요약한 것이다.


SMIC가 중국에서 고용한 엔지니어들은 빠르게 기술을 습득해 나갔고, 곧 해외 칩 제조사들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기 시작할 정도로 성장했다. 반도체 기술을 현지화하겠다는 SMIC의 목표는 해외에서 교육받은 인력을 통해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의 여타 반도체 스타트업이 그랬듯이 SMIC 역시 수많은 정부 보조의 혜택을 누렸다. 5년간 법인세를 면제받았고 중국 내에서 판매되는 반도체는 매출세 또한 면세였다.


제품의 질보다 정치인 자녀 채용에 초점을 맞추었던 경쟁자들과 달리 창은 제조 역량을 끌어올리고 기술을 첨단 수준으로 갖추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2000년대 말이 되자 SMIC와 세계 최고 기업의 격차는 고작 몇 년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SMIC는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기업이 되는 궤도에 오른 듯했다. 어쩌면 TSMC를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리처드 창은 그의 전 직장이었던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반도체 업계의 리더로부터 주문을 받아 칩을 만들 수 있었다. SMIC는 2004년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2019년에 상장을 철회하고 홍콩과 상하이증권거래소로 이전하였다).


TSMC가 경쟁해야 할 파운드리 기업이 동아시아에 여러 곳 세워졌다. SMIC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의 차터드반도체, 대만의 UMC, 뱅가드반도체, 2005년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든 한국의 삼성전자까지. 이들 기업 대부분은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반도체 가격은 낮아질 수 있었고, 결국 그 기업에 설계도를 보내는 미국의 펩리스 업체들 대부분이 혜택을 보았다.

[차터드 반도체를 인수한 글로벌파운드리, 대만 UMC 출처 구글 이미지]

32장 리소그래피 전쟁


1992년,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인텔 본사 회의실에 앉아 있던 존 카루더스(John Carruthers)는 인텔의 CEO 앤디 그로브에게 2억 달러를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카루더스는 현존하는 리소그래피 방법론이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며, 차세대 반도체 제작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루더스는 기존의 248 혹은 193 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심자외선광(deep ultraviolet light)이 아닌 13.5 나노미터 파장을 지닌 극자외선(extreme ultraviolet light, EUV)을 원했다. 파장이 짧으면 짧을수록 칩에 새겨 넣을 수 있는 기능과 부품 또한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브는 카루더스에게 2억 달러를 제공하여 EUV를 개발하게 했다.


제이 라스롭이 현미경을 뒤집은 이래, 1990년대처럼 리소그래피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적은 없었다. 리소그래피 업계는 과학, 비즈니스, 지정학이라는 세 가지 실존적 고민에 짓눌려 있었다. 트랜지스터의 크기가 워낙 줄어들고 복잡해지다 보니 어떤 리소그래피 기술이 승리를 거둘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리소그래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어떤 회사가 차세대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미국의 경우 GCA는 매각되었고 퍼킨앨머에서 갈라져 나온 리소그래피 회사 실리콘밸리그룹(SVG)은 시장 선도 기업인 캐논이나 니콘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었다.


캐논과 니콘의 유일한 실질적 경쟁자는 ASML이었다. 작지만 성장하는 이 네덜란드 회사는 1984년 필립스 내부에 있던 리소그래피 분과가 떨어져 나와 설립된 회사였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GCA의 사업이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기 위해 사내에 막대한 제조 공정을 갖추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대신 ASML은 전 세계 각지에서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해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일본 경쟁사들은 모든 것을 자체 제작하고 있었다.


ASML은 극자외선 장비 개발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다양한 부품을 종합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능력은 ASML의 가장 큰 강점으로 거듭났다.

[펠트호번의 ASML 본사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의 D램 스타트업 마이크론은 리소그래피 장비를 필요로 할 때 일본의 두 거대 회사보다 ASML 것을 선호했다. 니콘과 캐논은 일본 기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스는 TSMC 창업 단계에서 투자했던 회사로 신생 파운드리 기업의 반도체 제 조 노하우와 지식 재산권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결국 ASML은 판매시장을 안고 출발한 셈이 되었다. TSMC의 팝이 필립스 반도체 제조공정을 따라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극자외선 장비를 상업화하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회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결국 리소그래피 회사로 ASML을 선택했다.


외국 기업에 미국의 국립연구소가 만든 최신 기술을 제공한다는 발상을 접한 워싱턴이 의문을 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지 지정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 국립연구소들의 연구에서 차단된 니콘과 캐논은 자체 극자외선 장비 제조를 포기하기로 했고, 결국 ASML이 세계 유일의 극 자외선 장비 제작자로 남았다.


한편 2001년, ASML은 미국의 마지막 주요 리소그래피 회사인 SVG를 인수했다. SVG는 이미 업계 선두 주자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지만 이 거래가 미국의 안보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었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는 그저 가장 효율적인 반도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ASML은 미 정부의 극자외선 기술을 모두 빨아들였다. 극자외선 장비를 생산하는 과학 네트워크는 전 세계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극자외선 장비 제조는 세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독점이 강화되었다.

[NXE 3100 장비와 ASML EUV 장비 발전 출처 ASML]

33장 혁신가의 딜레마


2006년 맥월드 컨퍼런스. 스티브 잡스가 어두운 연단에 서 있고 방진복을 입은 사람이 무대로 올라와 잡스에게 실리콘 웨이퍼를 건네며 말했다. "스티브, 인텔은 준비를 마쳤습니다."

[출처 구글 이미지]

2006년 인텔은 이미 대부분의 PC에 프로세서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칩이 계산하는 방식을 설정하는 규칙의 모임인 아키텍처에서, 인텔이 만드는 x86은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이 되었다. x86 기반 칩을 사용하지 않는 주요 컴퓨터 업체는 애플이 유일했다. 그런데 이제 맥마저 '인텔 인사이드'가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실리콘밸리의 아이콘이었다. 2001년 애플은 아이팟을 출시했다. 디지털 기술이 어떤 소비자 기기도 변모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언과도 같은 제품이었다. 인텔의 CEO 오텔리니는 잡스와는 달라도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라 고용된 관리자였다. 그의 전공은 인텔의 전임 CEO들과 달리 경제학이었다. PhD가 아니라 MBA 출신이었다. x86의 사실상 독점 상태를 지속함으로써 높은 이윤율을 지속하는 것을 자신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폴 오텔리니 출처 구글 이미지]

인텔이 최초로 x86 아키텍처를 적용한 그해, 버클리대학교의 컴퓨터 과학자들이 더 새롭고 단순한 칩 아키텍처를 개발한다. 이름하여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라 불리던 그것은 더 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효율적인 계산을 할 수 있었다.

[1981년 버클리의 데이비드 패터슨(좌)과 칩에 탑재된 RISC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인텔은 RISC로 전환을 고민했지만 전환 비용이 너무 높았고 인텔의 사실상 독점 체제가 위험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후 인텔의 x86 명령어 집합 구조(ISA)는 데이터센터의 서버 비즈니스도 지배하고 있었다.


몇몇 기업이 PC 시장의 표준이 되어 버린 x86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0년, 애플은 두 회사와의 협력 하에 영국 케임브리지에 기반을 둔 암(Arm)이라는 합작 벤처를 설립했다. 인텔이 고려했지만 결국 거절했던 RISC 규칙에 따라 보다 단순한 명령어 집합 구조를 지닌 프로세서 칩을 설계하는 것이 그 회사의 목적이었다.


스타트업인 암은 기존 업무나 고객이 없었으므로 x86을 포기하는 비용이 따로 들지도 않았다. 대신에 암은 컴퓨터 생태계에서 x86이 차지하는 자리를 대체하고자 했다. 암의 첫 CEO였던 로빈 색스비(Robin Saxby)는 고작 열두 명으로 꾸려진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그 야심만은 엄청났다. 그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 표준이 될 겁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로빈 색스비와 영국 캠브리지의 암 본사 출처 구글 이미지]

색스비는 모토로라의 유럽 반도체 분야를 담당하는 자리까지 올라갔었고, 그 후에는 유럽의 한 반도체 스타트업에서 일했지만 제조 공정의 실적이 저조한 탓에 스타트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니 그는 칩을 자체 제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암의 전략에 대해 초창기에 벌였던 논쟁에서 주장했다. "실리콘은 강철과 같습니다. 그건 상품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직접 반도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암은 아키텍처 사용권 라이센스를 판매하여 그 아키텍처에 따라 다른 회사들이 칩을 설계하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파편화된 반도체 산업의 속성을 반영한 새로운 전략이었다. 그리고 제조는 TSMC 같은 파운드리에 외주를 주면 되는 것이었다.


색스비의 꿈인 인텔의 경쟁사를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인텔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암은 PC 시장에서 인텔의 점유율을 빼앗아 오지 못했다. 인텔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와 맺고 있는 협력 관계가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의 단순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아키텍처는 머잖아 대중적 사랑을 받게 되었다. 배터리 사용을 고려해야 하는 작고 휴대할 수 있는 기기가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령 닌텐도는 휴대용 비디오게임기에 암 아키텍처를 도입했는데, 인텔은 이런 작은 시장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인텔은 컴퓨터 프로세서 시장을 과점하면서 엄청난 이윤을 누리고 있던 터라 틈새시장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텔이 스스로의 패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저 또 다른 휴대용 컴퓨팅 기기일 뿐이고 틈새시장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모바일 폰 시장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모바일 기기가 컴퓨터 시장을 뒤흔들 것이라는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칼텍의 선지자였던 카버 미드가 이미 1970년대 초에 예견한 일이었다. 인텔 역시 PC가 컴퓨터의 최종 진화형이 아닐 것임은 알고 있었다.


인텔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무려 20년을 앞서 나온 줌(Zoom) 같은 화상 회의 시스템을 포함하여 여러 신제품들을 개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신제품 중 자리 잡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술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텔의 핵심 사업인 PC용 칩 제조와 비교할 때 너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바일 기기는 1990년대 초 앤디 그로브가 아직 CEO이던 시절부터 인텔 내에서 주기적으로 논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지만 PC용 프로세서를 만들어서 벌 수 있는 돈이 엄청났던 당시, 모바일 기기에 돈을 퍼붓는다는 것은 과격한 도박으로 보여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맥 컴퓨터에 인텔 칩을 도입하기로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는 오텔리니를 찾아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애플이 신제품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을 결합하려 하는데, 인텔이 그 목적의 칩을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애플은 새로운 전화기가 컴퓨터처럼 작동하기를 원했고 강력한 칩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텔리니는 비용 예측도 잘못하고 소비된 칩의 물량도 모든 사람의 생각보다 100배나 더 늘어날 정도로 판단을 잘못하였고 결국 인텔은 아이폰용 칩 공급 계약을 거절했다. 애플은 다른 업체를 물색했고 암의 아키텍처에 주목했다.


인텔은 단기간에 높은 이윤을 내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다 보니, 장기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일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사내 권력이 엔지니어로부터 경영자로 넘어간 것 또한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한마디로, 인텔 경영자들은 트랜지스터가 아니라 재무제표를 갈고닦는 일에 더 관심이 쏠려 있던 것이다.


34장 더 빨리 달려라?


2010년 팰로알토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이던 앤디 그로브는 실리콘밸리 견학을 온 세 명의 중국인 벤처 투자자를 소개받았다. 그는 이미 2005년 인텔 회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상황이었고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실리콘밸리의 실업률이 9퍼센트 넘게 치솟는 상황에서도 인텔은 계속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팰로알토에 투자할 곳을 알아보고 다니는 모습을 본 그로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량 실업이 발생한 시기에 해외로 생산을 위탁하는 실리콘밸리는 과연 똑똑한 걸까?" 그는 첨단 제조업 일자리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근심하고 있었다.


고작 3년 전에 출시된 아이폰이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폰의 구성품 중 일부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일자리 해외 이전은 저숙련 일자리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로브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반도체나 다른 산업에까지 밀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해법은 다음과 같았다. "해외 노동으로 만들어진 제품에 대해 추가적인 관세 부과. 만약 무역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다른 전쟁과 똑같이 다를 것. 싸워서 이긴다."


많은 이들은 그로브를 지나간 시대의 전형으로 취급했다. 그가 만든 인텔은 모바일 폰의 흐름을 놓쳤고, 다른 사업 모델을 채택한 테크 기업들로 인해 인텔의 비즈니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인텔 칩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모바일 생태계를 꾸린 애플에 의해 기업가치가 따라잡혔고, 인터넷이 경제의 축으로 떠오르는 것도 놓쳤다.


심지어 반도체 업계에서조차 그로브의 멸망과 파국의 예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TSMC 같은 새로운 파운드리 업체들이 대부분 외국 기업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칩의 상당수는 미국의 팹리스 업체가 설계한 것이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는 것은 앤디 그로브의 첫 직장이었던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홍콩에 최초의 해외 생산 거점을 만든 이후 반도체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 핵심 중 하나였다.


또한 최첨단 리소그래피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외국의 반도체 생산 시설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나 램리서치(Lam Research), KLA 등 미국에서 만든 제조 장비로 가득 차 있고, 반도체 설계에서도 2010년대 초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곳은 케이던스(Cadence), 시놉시스(Synopsys), 멘토(Mentor) 세 곳이었으며 그들이 거의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케이던스 출처 구글 이미지]

더 어려운 문제는, 반도체의 국제적인 공급망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반도체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정부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당시는 세계화 담론이 유행하던 무렵이었다. 산업의 해외 이전을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경쟁자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고방식이 워싱턴에 퍼졌고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갔고 한 전문가는 "특히 반도체의 경우 한국을 비롯해 어느 한 나라에 더 크게 의존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심지어 중국의 SMIC에 "검증된 최종사용자(validated end-user)" 인증을 해주기에 이르렀다. 그 회사가 중국의 군대에 미국 반도체 기술을 재판매하지 않을 것을 보증하고, 민감한 수출규제품목도 넘길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2007년, 국방부는 전직 펜타곤 장교였던 리처드 반 아타(Richard Van Atta)와 몇몇 동료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반도체 산업의 “세계화”가 군의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반 아타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부가 첨단 칩을 얻기 위해서는 머지않아 외국에 의존할 것이라고 보았다. 너무나 많은 고도화된 제조 시설이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오만에 빠져 있던 단극 시대에서 이런 주장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관계를 알아볼 생각조차 없이 미국이 "더 빨리 달린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볼 때 미국의 우위가 늘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2007년 반 아타가 남긴 경고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선두 자리는 이후 10년간 심각하게 침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지 않았다.


파트 6 해외 이전은 혁신인가?


35장 진짜 남자라면 팹이 있어야지


AMD의 창업자 싸움꾼 제리 샌더스는 반도체 생산 설비 팹을 보유하는 것을 수영장에 애완용 상어를 풀어놓는 일에 즐겨 비유하곤 했다. 돈도 많이 들고 관리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며, 어쩌면 나를 잡아먹는 결말이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그가 팹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AMD 초창기의 제리 샌더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술발전으로 인해 장비와 칩의 세대가 바뀔수록 판을 개선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한없이 높아진다. 모리스 창은 수십 년 전에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TSMC의 비즈니스 모델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TSMC 같은 파운드리 대량 생산과정에서 다른 기업이 모방하기 어려운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2000년대가 되자 반도체 산업을 세 영역으로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첫 번째 "로직(Logic)"은 스마트폰, 컴퓨터, 서버를 운영하는 프로세서를 뜻한다. 두 번째 "메모리(Memory)"는 컴퓨터가 작동하고 있을 때 필요한 단기 메모리인 D램과 장기간에 걸쳐 데이터를 저장하는 플래시 메모리, 혹은 낸드 메모리로 나누어졌다.


세 번째 영역은 다소 난삽한 것으로, 시각이나 음성 신호를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해 주는 아날로그 칩, 휴대전화가 무선 네트워크와 접속하고 통신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선 주파수 칩, 장비의 전기 사용을 관리하는 반도체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 번째 영역은 본디 무어의 법칙과 동떨어져 있었다. 매년 지수함수적으로 성능이 개선되는 분야가 아니었다. 이 영역은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는 '설계를 얼마나 독창적으로 잘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따라서 로직이나 메모리 칩을 만들기 위해 평균적으로 첨단 팹에 쏟아붓는 자본 투자의 4분의 1 정도면 충분할 만큼 훨씬 저렴하다. 아날로그 칩 분야에서는 TI, Onsemi, Skyworks, Analog Device 같은 미국 기업들이 유럽 및 일본의 회사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가장 큰 아날로그 칩 제조 업체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로, 이 회사는 인텔처럼 PC나 데이터센터 시장을 독점하지 못했고 스마트폰 생태계(ecosystem)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아날로그 칩과 센서를 생산하는 덕분에 중간 정도 크기에 높은 이익률을 자랑한다.


이에 비해 '메모리' 분야에서는 거침없는 해외 생산의 길을 밀어붙였고, 결국 대부분 동아시아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생산 업체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D램은 최신 팹을 갖추려면 200억 달러 상당이 든다.


한때는 열 곳이 넘었던 D램 제조사가 이제는 한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 아이다호의 마이크론만이 남았다. 낸드 메모리는 삼성, SK하이닉스, 일본의 키옥시아(Kioxia), 미국의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이 시장을 나눠 갖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로직 칩'의 경우 역시 최신 팹을 건설하려면 200억 달러 이상이 소요된다. 인텔이라는 독보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미국의 핵심적인 로직 칩 제조사들은 자체 팹을 포기하고 위탁 생산에 들어갔다. 생산은 TSMC나 아시아의 다른 파운드리에 위탁하고 반도체 설계라는 스스로의 강점에만 집중하고 있다.

[출처 파이낸셜뉴스]

샌더스가 CEO로 남아 있는 한 AMD는 PC용 프로세서 같은 로직 칩 생산을 그만두지 않을 터였다. 실리콘밸리의 구세대 CEO들은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면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비즈니스 논리에 따른 판단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반도체 업계의 한 회의장에서 샌더스는 다시 한번 선언했다. “진짜 남자라면 팹이 있어야 해.”


36장 팹리스 혁명


“진짜 남자”들은 팹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실리콘밸리의 신세대 반도체 기업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 말부터 팹리스 반도체 회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팹리스 비즈니스 모델의 등장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작 몇 백만 달러를 가지고도 새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엔비디아(Nvidia)


컴퓨터 그래픽 분야는 반도체 산업의 스타트업에게 매력적인 틈새시장으로 남아 있었다. 훗날 그래픽 칩 시장을 지배하게 되는 회사 엔비디아(Nvidia) 역시 팰로알토의 세련된 카페가 아니라 산호세의 허름한 동네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의 한 지점에서 초라하게 시작했다.

[엔비디아 본사 출처 구글 이미지]

엔비디아는 1993년 크리스 말라초프스키(Chris Malachowsky), 커티스 프림(Curtis Priem), 젠슨 황(Jensen Huang)이 뜻을 모아 차린 회사로, 젠슨 황은 오늘날까지도 CEO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만 출신으로 어린 시절 켄터키주로 이주한 황은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회사 중 하나인 LSI에서 일하고 있었다.

[엔비디아 창업자들 출처 구글 이미지]

3차원 이미지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연산력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엔비디아는 3차원 그래픽을 다루는 데 필요한 그래픽 처리장치 GPU라 불리는 프로세서 개발에 멈추지 않고 3차원 그래픽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2006년, 엔비디아는 고속 병렬 계산이 컴퓨터 그래픽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놓은 소프트웨어가 “CUDA”였다. 표준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그래픽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GPU를 활용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CUDA 소개자료 출처 구글 이미지]

엔비디아가 최고 성능의 그래픽 칩을 찍어 내고 있는 와중에 황은 "CUDA"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2017년 한 회사의 추산에 따르면 그때 투입된 돈은 최소 100억 달러였다.


이렇게 만든 프로그램은 그래픽 전문가뿐 아니라 엔비디아의 칩을 보유한 어떤 프로그래머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엔비디아 칩에서만 작동했다.


그래픽 업계 밖에서도 쓸 수 있는 칩을 만드는 것은 엔비디아에게 엄 청나게 큰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다. 계산화학(computational chemistry)부터 기상 예측에 이르기까지 병렬 처리를 원하는 수요를 발굴해 낸 것이다.

[병렬처리 수요 출처 구글 이미지]

그 무렵 황은 어렴풋하게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병렬 처리의 가장 큰 수요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l)이었다.


오늘날 엔비디아의 칩은 최신 데이터센터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그 칩은 대부분 TSMC에서 만든다. 만약 엔비디아가 스스로 제조 공정까지 다루어야 했다면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갖추기 위해 투입한 자원과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퀄컴(Qualcomm)


특화된 로직 칩의 새로운 용도를 개척하고 나선 팹리스 회사는 엔비디아뿐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 학회장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들고 “이것이 미래입니다!”라고 외쳤던 통신 이론 교수 어윈 제이콥스도 이제 그가 기다리던 미래에 이르렀다.


제이콥스는 무선 통신에서 기존의 “시분할다중접속(time-division multiple access)” 방식이 아니라 주파수를 바꿔 가며 통신하는 시스템(*코드분할다중접속, CDMA, code-division multiple access)이 낫다고 보았다.


주파수를 바꿔 가며 통화 데이터를 보내고 받으며 해석하려면 실로 막대한 연산력이 필요했는데, 퀄컴은 그에 특화된 칩을 개발하여 판매했다. 퀄컴의 기술 없이 무선전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그 후 퀄컴은 스마트폰의 중앙 처리 장치라 할 수 있는 AP(application processors)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퀄컴의 반도체 설계는 대단한 엔지니어링의 결과물로 칩 하나의 설계에 수천만 줄 이상의 소프트웨어 코드가 동원된다. 퀄컴은 반도체 판매 및 지식재산권 사용 허가를 통해 수천억 달러를 벌어 들이고 있다.

[퀄컴 스냅드래곤과 AP 점유율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퀄컴은 지금까지 단 한 장의 칩도 스스로 만들어 본 적은 없다. 모든 설계는 직접 하지만 제작은 삼성이나 TSMC 같은 곳에 외주를 주고 있다.


반도체 기업이 매년 수십억 달러를 들여가며 팹을 짓고 운영해야 했다면 퀄컴 같은 벤처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퀄컴은 핵심역량인 주파수 스펙트럼 관리와 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FPGA 등


팹리스 모델 덕분에 혜택을 본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엔비디아와 퀄컴 외에도 많다. 수십억 달러를 써 가며 자체 제조 시설을 갖추는 대신에 새로운 반도체 설계에만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유형의 반도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런 칩은 팹리스 설계 회사가 실제로 만들 수 없는 것들이었다. TSMC와 일부 파운드리의 힘을 빌어야만 했던 것이다.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s)는 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최적화해 사용할 수 있는 적응형 칩으로, 이 분야의 선구자 격인 회사는 자일링스(Xilinx, *2022년 AMD가 인수)와 알테라(Altera, *2015년 인텔이 인수)인데, 두 회사 모두 설립 초기부터 반도체 제작을 외주로 맡기고 있다.

[자일링스와 알테라의 FPGA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단지 새로운 유형의 칩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함께 고급 그래픽, 병렬 처리를 가능케 함으로써 팹리스 회사들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컴퓨터 세계를 만들었다.


37장 모리스 창의 연합군


2005년, 75세의 나이로 모리스 창은 TSMC의 CEO직을 내려놓았다. 단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했다. 잭 킬비와 같은 연구실에서 일했던 사람, 밥 노이스와 맥주를 마시던 그런 나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현업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반도체 산업의 최고위층을 이루던 이들이 물러나면서 반도체 설계와 제조의 분리는 한층 더 가속화되었고, 반도체 제조는 점점 더 해외로 밀려나게 되었다. 샌더스가 AMD에서 은퇴한 지 5년 후 AMD는 반도체 설계와 제조 사업부를 분리한다고 발표했다. AMD는 제조 설비를 떼어 내서 새로운 회사로 분사했다.


아부다비 정부의 투자 부문인 무바달라(Mubadala)가 새로운 파운드리 기업의 주요 투자자가 됐는데 미국 정부는 이 투자에 안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매각을 강행했다.


AMD의 팹을 이어받은 이 새로운 회사 글로벌파운드리즈(GlobalFoundries)는 전에 없이 살벌하고 자비 따위 없는 환경 속에서 파운드리 업계에 뛰어들었다.


2010년대 초반, 2차원적으로 거리를 좁혀 더 조밀하게 트랜지스터를 욱여넣는 것은 더는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1960년대 이래 사용되어 온 2차원 설계와 달리 22나노 노드부터는 3차원의 새로운 트랜지스터가 도입되었다.


이른바 핀펫(FinFET)이라고 하는 그 구조는 회로의 양 끝과 그것으로 고래 등에서 튀어나온 지느러미처럼 보이는 블록 위에서 연결하는 반도체 물질의 채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작업을 해내는 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고 주요 칩 제조업체들도 아무 문제 없이 핀펫 구조로 넘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출처 조세일보]

글로벌파운드리즈가 별도의 기업으로 독립하던 2009년, 반도체 산업의 분석가들은 3차원 트랜지스터 경쟁을 뚫고 글로벌파운드리즈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수월할 것으로 보았다.


글로벌파운드리즈는 IBM 및 삼성과 손을 잡았고, 게다가 팹리스 반도체 설계 회사들은 TSMC의 경쟁자 중 신뢰도 높은 회사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Common Platform 출처 구글 이미지]

삼성의 파운드리 기술력은 TSMC와 어느 정도 견주어볼 만한 수준이었지만, 생산량에서는 TSMC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삼성의 사업영역 중에는 반도체 설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쟁사들은 삼성전자에 설계도를 보내면 그것이 결국 삼성 제품에 반영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창은 TSMC가 경쟁자들을 기술적으로 따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회사는 스스로 반도체를 설계하는 반면에 TSMC는 중립적 입장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TSMC의 "연합군” 파트너십이라 불렀다.

[출처 구글 이미지]

반도체를 설계하고, 지식재산 사용권 판매로 돈을 벌고, 소재를 생산하고, 장비를 만드는 십여 개의 회사와 일종의 동맹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회사 중 상당수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지만 이들 중 웨이퍼에 칩을 새겨 넣는 일을 하는 곳은 없으며, 설령 시도한다 해도 TSMC를 이길 곳은 없었다.


팹리스 회사들에게 있어서 TSMC는 제작 공정의 경쟁력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믿음직한 선택지가 되었다. 도구, 장비, 소재 공급사에게 TSMC는 가장 중요한 고객이 되었다. 스마트폰 판매가 날개를 달고 솟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실리콘 칩의 수요 역시 함께 치솟았고, 모리스 창은 그 중심에서 선언했다.


"TSMC는 모든 이의 혁신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혁신, 우리에게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의 혁신, 우리 고객의 혁신, 지식재산권 제공자의 혁신, 이것이 바로 연합군의 힘입니다." 이는 막대한 재정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모리스 창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과시했다.


TSMC가 반도체 업계의 우주에서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었다. 대형 고객이 요구하는 물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었다. 그건 결코 적은 비용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금융 위기를 겪는 동안 모리스 창이 직접 임명했던 후계자 릭 차이(Rich Tsai)는 다른 CEO가 다들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직원을 해고해서 손실을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창은 40나노 공정을 되살리고 그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 투자를 늘렸다. 창은 스마트폰 사업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은퇴하는 모리스 창과 새로 CEO로 선임된 닉 차이 출처 구글 이미지]

특히 2007년 처음 출시되어 TSMC의 최대 숙적 삼성으로부터 핵심 칩을 처음 공급받고 있던 애플 아이폰에 칩을 공급하려면 그에 걸맞은 막대한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갖추어야 했고 투자가 필요했다.


창이 볼 때 손실을 줄이기 위한 차이의 방향은 패배주의자의 것이었다. 훗날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너무, 너무도 투자가 부족했어요. 우리 회사는 그보다 더 해낼 역량이 있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그러지 못했죠. 정체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창은 후계자를 해임하고 TSMC의 조종간을 직접 잡았다. 투자자들은 모리스 창의 복귀와 투자 확대가 불안하다고 느꼈고 당일 TSMC의 주가는 하락했다. 하지만 창이 볼 때 현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이었다.


무려 반세기 동안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며 1950년대 중반부터 명성을 쌓아 왔던 그였다. 그리하여 금융 위기의 가장 깊은 수렁 속에서 그는 전임 CEO가 해고했던 이들을 다시 고용하고 생산 역량 확충을 위해 투자와 연구개발 비용을 두 배로 늘렸다.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2009년과 2010년 자본 지출을 수백 억 달러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파운드리 업계에 끼어들고 싶은 경쟁자가 있다면 우선 전력으로 맞서는 TSMC의 방어선을 뚫어야 할 터였다.


TSMC는 막 피어나기 시작한 스마트폰 칩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반도체 산업 정상에 오른 60년을 맞이하며 모리스 창이 선언했다. "우리는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38장 애플 실리콘


TSMC 같은 파운드리 업체가 부상하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기업은 따로 있었다. 대부분은 그 회사를 반도체 설계 회사로 생각하지도 않는 곳, 바로 애플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애플은 언제나 하드웨어에 특화된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들이 만드는 기기에 탑재되는 실리콘 칩까지 통제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세대 아이폰을 출시할 때만 해도 잡스는 하드웨어에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를 구현할 시간이 없었던지, 애플의 독자적인 iOS 운영 체제를 사용하긴 했지만 칩의 설계와 생산은 삼성전자에 위탁했다.


폰의 새로운 혁명에는 다른 많은 칩도 들어가 있었다. 인텔 메모리 칩, 울프슨에서 설계한 오디오 프로세서, 인피니온 무선 네트워크 접속용 모뎀 칩, CSR이 설계한 블루투스 칩, 스타이웍스에서 제공한 신호 증폭기 등이 실려 있었다.

[아이폰 1세대 출처 구글 이미지]

그 후 1년 후 애플은 'PA 세미'라는 작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프로세서 설계에 특화된 회사였다. 그러고 나서 업계 최고의 반도체 설계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2년 후 애플은 자체 설계한 A4라는 AP를 발표했다. 이렇게 특화된 반도체에 투자하고 있기에 애플 제품은 아주 원활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애플은 단 하나의 칩도 스스로 제작하지는 않았다.

[A4칩과 아이폰 4 발표회 출처 구글 이미지]

생산 라인 노동자와 달리 스마트폰 속의 칩은 대체하기 매우 까다롭다. 트랜지스터 크기가 줄어들면서 칩 제조는 한층 더 어려워졌다. 첨단 칩을 제작할 수 있는 반도체 회사 수는 한 줌으로 줄어든 지 오래다.


2010년, 애플이 첫 번째 칩을 발표했을 때 최첨단 파운드리 업체는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았다.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 그리고 어쩌면 시장 점유율을 회복한다는 전제하에 글로벌파운드리즈 정도가 전부였다.


스마트폰에는 (애플 스스로 설계하는) 메인 프로세서뿐 아니라 온갖 칩이 가득했다. 무선 통신망과 연결해 주는 모뎀과 무선 주파수 칩,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연결을 담당하는 칩,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적어도 두 개는 탑재되는 메모리 칩, (사용자가 핸드폰을 가로로 돌릴 때 그런 동작을 인식하는) 동작 감지 칩, 배터리, 오디오, 무선 충전 관리 칩 등 다양했다. 이 모든 칩이 모여야 스마트폰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제작 역량이 대만과 한국에 쏠리면서 이들 칩 중 다수의 제작 역량 역시 두 나라에 집중되었다. 스마트폰의 전자두뇌라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거의 대부분 대만과 한국에서 제조해 중국으로 보낸 다음 스마트폰의 플라스틱 케이스 속에 담겨 유리로 된 스크린을 덮는다. 애플 아이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오직 대만에서만 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애플이 요구하는 제작 역량과 기술을 가진 회사는 TSMC뿐이다. 그러니 모든 아이폰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애플 설계. 중국에서 조립"은 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아이폰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되고 중국에서 조립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대만뿐이다.


39장 극자외선 장비 EUV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한 공급망과 씨름하는 반도체 관련 회사는 애플뿐만이 아니었다. 2010년대 말, 네덜란드의 리소그래피 회사 ASML은 극자외선 리소그래피의 상용화라는 과제를 붙들고 거의 20년을 씨름하고 있었다.


제이 라스롭이 사용한 빛은 평범한 가시광선이었다. 코닥에서 생산했고 기성품으로 된 포토레지스트를 사용했다. 그 후 점점 복잡한 렌즈와 화학 물질을 사용해 실리콘 웨이퍼에 수백나노미터만큼 작은 모양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시광선의 파장은 색깔마다 다르지만 그 자체가 수백 나노미터이기 때문에 트랜지스터가 훨씬 작아지면서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더 작은 트랜지스터를 만들려면 가시광선이 아닌 다른 유형의 자외선을 이용해야 했다. 248, 193나노미터의 자외선을 거쳐 이제 13.5나노미터인 극자외선에 희망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EUV 노광장비의 변천 출처 ASML, 하나금융투자]

극자외선을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그 문제는 거의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극자외선 발생기 자체가 특수한 장비다. 충분한 극자외선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주석 방울을 레이저로 쏴서 진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출신의 레이저 과학자 두 명이 만든 회사 사이머(Cymer)는 1980년대 이래 리소그래피용 광원 제조 분야의 핵심 업체로 자리 잡았다.

[사이머 설립자 Bob Akins and Richard Sandstrom, 2012년 ASML이 인수 출처 구글 이미지]

그들이 찾아낸 가장 효율적인 극자외선 생성 방식은 다음과 같다. 진공에서 시속 321.8km로 날아다니는 직경 0.003mm의 주석 방울을 레이더를 두 번 맞힌다. 첫 번째 펄스는 주석 방울을 달구고, 두 번째 펄스는 주석 방울을 폭발시켜 태양보다 몇 배 더 뜨거운 섭씨 50만도의 플라즈마 상태로 만든다.


이 과정을 초당 5만 번 반복하면 반도체 제작하기 충분한 양의 극자외선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력한 이산화탄소 기반 레이저가 필요했다. 2005년 사이머 엔지니어는 독일 정밀기계업체인 트럼프(Trumpf)를 방문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산화탄소 레이저 기계는 제공되는 에너지의 20%를 빛으로 만들고, 나머지 80%는 열로 배출한다. 그러니 기계가 과열되지 않도록 열을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트럼프는 초당 1천 바퀴 이상 돌아가는 팬 대신 자석을 이용해 팬의 날개가 허공에 떠 있도록 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모든 단계마다 새로운 혁신이 필요했다. 이 모든 도전을 넘어 충분한 에너지와 신뢰성을 갖춘 레이저를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각 레이저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은 정확히 45만6329개였다.


이제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충분한 극자외선 광선을 모아서 실리콘 칩에 쏴줄 수 있게끔 해 주는 거울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광학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는 독일의 자이스(ZEISS)이다.


리소그래피용 렌즈를 제공해 온 독일의 자이스가 맞닥뜨린 문제는 극자외선을 굴절시키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몰리브덴과 실리콘 층을 번갈아 나노미터 단위로 100개 층으로 쌓아 거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이스를 방문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자이스 장비 출처 구글 이미지]

결국 자이스는 인류가 만든 그 어떤 물질보다 매끄러운 표면의 거울을 만들어 냈다. 그 거울을 독일 정도 크기로 키우더라도 그 속에 포함된 불순물은 0.1밀리미터 정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부터 ASML의 EUV 장비 사업을 이끌고 있는 프리츠 반 하우트는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천여 회사가 ASML의 정확한 요구사항에 맞는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극자외선 장비 가격은 대당 1억 달러가 넘는다.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양산된 공작기계 중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싼 것이다. ASML의 극자외선 장비는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조립되고 있다 한들 핵심 부품은 캘리포니아 사이머, 독일 자이스, 트럼프에서 나온 것이며, 여러 나라가 참여한 지적 노력의 산물이다.


ASML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너무도 복잡한 나머지 전문적으로 훈련된 ASML 직원이 없다면 작동하지 않고, ASML 직원은 기계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장비를 관리한다.

[출처 구글 이미지]

모든 극자외선 스캐너에는 ASML 로고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ASML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그 기업의 진정한 역량은 광학 전문가, 소프트웨어 설계자, 레이저 회사, 그 밖에 극자외선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지닌 수많은 관계자가 얽혀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조율해 내는 것에서 나온다.


"이게 될까?" 앤디 그로브가 최초의 2억 달러를 극자외선에 투자하기 전 존 카루더스에게 했던 질문이다. 30년, 수십억 달러, 수많은 기술 혁신,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공급망을 통해, 2010년대 중반 ASML의 극자외선 장비는 드디어 현실이 될 수 있었다.


40장 플랜B는 없다


2015년 토니 옌(Tony Yen)이 질문을 받았다. ASML이 개발 중인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옌은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 개발에 25년을 바쳐 온 사람이었고, TI를 거쳐 1990년대 말 TSMC에 합류하였다.

[토니 옌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무어의 법칙을 유지하려면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1990년대 초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한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과연 그것이 상용화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옌이 아는 바에 따르면 "플랜 B는 없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업계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극자외선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TSMC의 연구개발을 이끄는 엔지니어인 장상이는 리소그래피 개발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TSMC의 열정과 노동 윤리에 관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겠다'는 모리스 창의 이상이 회사 전체에 스며들어 "대만 사람은 훨씬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TSMC의 장상이 출처 구글 이미지]

제조 장비는 최신 팹의 비용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장비 가동을 유지하는 것은 수익성 확보와 직결된 일이다. 장의 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새벽 1시에 뭔가 고장나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수리하지만 TSMC에서는 새벽 2시에 수리가 완료된다.


장이 2006년 은퇴하려다가 모리스 창의 부탁으로 2009년 다시 연구개발 책임자로 돌아오면서 TSMC는 극자외선 분야에서 한 발 앞서 나갔다. 밤새도록 일할 수 있는 직원을 아무런 문제 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TSMC와 마찬가지고 삼성과 인텔, 글로벌파운드리즈 역시 7나노 노드를 준비하면서 극자외선 채택을 고려하고 있었다. AMD의 팹을 물려받은 글로벌파운드리즈는 2010년 싱가포르의 차터드반도체를 인수하고 2014년에는 팹리스로 전환한 IBM의 반도체 분야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워갔다.


당시 IBM 임원들이 제시한 이미지에는, 컴퓨터 생태계는 뒤집힌 피라미드 형태로, 뾰족한 밑바닥에는 반도체가 있으며 모든 연산력은 반도체에 의존한다고 그려져 있었다. IBM은 수십억 달러를 들여 최신 팹을 짓는 것보다 높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글로벌파운드리즈는 TSMC에 비하면 피라미였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고, UMC와 글로벌파운드리즈가 각 10%씩 나누고 있었다. 삼성은 5%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스마트폰 프로세서와 메모리칩 등 자체 칩 수요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웨이퍼를 만드는 회사이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는 매달 몇 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느냐를 기준으로 생산량을 평가 TSMC는 월별 생산량이 130억 장, 삼성은 250억 장인 반면에 글로벌파운드리즈는 70억 장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은 각기 달랐지만 TSMC, 인텔, 삼성 모두 극자외선 장비를 도입해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28나노미터 공정에서도 수율을 끌어올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생산 지연으로 인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글로벌파운드리즈는 14나노 공정을 자체 개발하는 대신 삼성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다. 자체 연구개발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자사의 최신 설비인 팹 8에 구매하고 설치했던 여러 대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의 작동을 중단했다. 2018년의 일이었다. 글로벌파운드리즈는 그 싸움에서 빠지기로 했다.

[반도체 파운드리 로드맵 출처 구글 이미지]

첨단 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은 세계 최대의 칩 제조사가 아니면 낄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용이 드는 일이 되어 버렸다. 글로벌파운드리즈의 실소유주인 페르시아만 석유 부자들의 주머니도 그 돈을 메울 수 있을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 첨단 로직 칩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회사의 수는 이제 넷에서 셋으로 줄어들었다.

[출처 ZDNET, 구글 이미지]

41장 혁신을 망각한 인텔


그래도 미국에는 인텔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인텔은 비교 불가능한 위상을 가지고 있던 회사다. 물론 반도체 업계의 리더십은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앤디 그로브는 2016년 세상을 떠났고, 이제 90대에 접어든 고든 무어는 하와이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


PC시장은 정체기에 빠졌지만 여전히 인텔은 x86 기반의 칩을 바탕으로 꾸준히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내면 100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썼는데 이는 TSMC의 네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반도체 산업이 극자외선 시대에 돌입하면서 인텔은 다시 한번 우위를 차지하는 듯했다. 1990년대 초 최초의 2억 달러를 투입했을 때 인텔은 극자외선 기술의 출현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그 기술이 현실화할 날이 다가왔고 인텔에 상당한 몫의 지분이 생겼다.


하지만 인텔은 주도권을 낭비해 버렸고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 아키텍처의 거대한 변화를 놓쳤으며, 그 후 제조 공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무어의 법칙을 지켜 나가는 것도 실패했다.


2010년대의 실리콘밸리에서 이제 인텔만이 반도체 설계와 제작을 한 회사에서 완료하는 통합 모델을 완고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인텔 경영진은 그것이 최선이 방법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통합 모델에도 일부 장점이 있을 테니 인텔의 판단이 어느 정도 옳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합 모델에는 분명한 단점이 존재했다. 다양한 여러 회사의 칩을 제작하고 있던 TSMC는 인텔에 비해 매년 거의 세 배 많은 실리콘 웨이퍼를 찍어 내고 있었는데, 그 말은 제조 공정을 갈고닦을 기회가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인텔은 신생 반도체 설계 업체를 위협으로 보고 있었던 반면에 TSMC는 제조 서비스를 위한 잠재 고객으로 인식했다. TSMC의 기업 가치는 단 하나의 분야 즉 효율적인 반도체 제조에서 나왔기에 TSMC 경영진은 낮은 가격으로 더 많은 최신 반도체를 생산해 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텔 지도부는 반도체 설계와 반도체 제조 양쪽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둘 다 죽을 쑤고 말았다.


인텔의 첫 번째 난관은 인공지능이었다. 2010년대 초, 인텔의 핵심 사업 영역인 PC용 프로세서 시장은 성장이 정체되었다. 오늘날은 게이머들을 제외하고 나면 새로운 모델의 CPU가 나왔다고 해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는 수요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컴퓨터 안에 어떤 프로세서가 내장되어 있는지도 잘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에 인텔의 다른 주요 시장인 데이터센터 서버용 프로세서 판매가 201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마존 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그 외 많은 회사가 거대한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가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연산력을 인텔 칩이 제공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온라인에서 주고받는 데이터의 대부분이 이런 회사들 중 한 곳의 데이터센터에서 처리되고 있으며, 그 데이터센터는 인텔 칩으로 가득 차 있다.

[데이터센터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2010년대 초 인텔이 데이터센터 시장을 정복했을 그 무렵, 컴퓨터의 연산력에 대한 수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것은 인공지능이었다. 하지만 인텔의 주요 칩은 구조적으로 인공지능을 위한 계산에 잘 대응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었다.


AI 알고리즘을 범용 CPU에서 작동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AI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연산력을 CPU로 제공하려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비용이 든다. 단일 AI 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칩과 소비하는 전력의 비용은 수백만 달러에 달할 수 있다."


AI는 매번 다른 데이터를 받아서 같은 계산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AI 알고리즘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계산을 경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칩을 특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빅 클라우드 컴퓨팅 회사들은 칩과 서버를 구입하는 데 연간 수백억 달러를 소비한다. 또 전력 역시 어마어마하게 소비한다. 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기업들에게 "클라우드" 공간을 파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AI 작업에 최적화된 칩은 더 빨리 작동하면서 데이터센터 공간을 더 적게 차지하고, 그러면서도 인텔의 범용 CPU보다 더 적은 전력을 소비해야 한다.


2010년대 초, 엔비디아의 귀에 흥미로운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탠퍼드의 박사후과정 학생들이 엔비디아의 GPU를 그래픽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텔이나 AMD의 CPU는 무한히 많은 용도로 사용가능하지만, 하나의 계산이 끝난 다음에야 다른 계산을 할 수 있다. 반면에 GPU는 많은 계산을 동시에 처리하도록 설계된다.


이런 구조를 '병렬처리(parallel processing)'라고 하는데, 컴퓨터게임의 이미지픽셀 처리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양이 이미지를 학습한다면 CPU는 픽셀 하나하나를 처리하는 데 비해 GPU는 많은 픽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후 엔비디아는 인공지능에 미래를 걸었다. 창업 초기부터 엔비디아는 칩 제작을 TSMC에 위탁했고 대신에 차세대 GPU를 개발하고 CUDA를 개선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투자자들이 데이터센터에 힘을 실어주면서 더 많은 GPU가 필요해졌고 이제 엔비디아 역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회사로 떠올랐다.

[AI 전용 엔비디아 H100 출시 출처 구글 이미지]

엔비디아의 성공은 보장된 미래라고 볼 수 없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텐센트, 알리바바 등 대형 클라우드 기업은 엔비디아 칩을 구입하면서 동시에 인공지능부터 머신러닝까지 그들 각자의 수요에 맞춰 스스로 자체 칩을 설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령 구글은 구글의 텐서플로우(TensorFlow) 소프트웨어 라이 브러리에 최적화된 텐서 처리 장치(Tensor processing units, TPU)라는 자체 칩을 설계했다. TPU는 아이오와에 소재한 구글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되고 있다.

[구글 TPU v5p 발표 행사 출처 구글 이미지]

사용자는 매달 3000달러만 내면 가장 낮은 사양의 TPU를 사용할 수 있지만, 더 강력한 TPU를 쓰고 싶다면 매달 10만 달러까지 사용료가 높아진다. 클라우드는 마치 천상의 무언가처럼 들리지만 우리의 모든 데이터는 지상의 실리콘 위에 있으며 그 위에는 현실적이고도 값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는 셈이다.


엔비디아가 됐건 클라우드 센터를 운영하는 대형 IT 기업이 됐건, 그들로 인해 인텔의 데이터센터 시장용 프로세서의 준準독점 판매 시절도 막을 내렸다.


인텔은 2010년대 초 TSMC와 맞대결을 벌이기 위해 파운드리 시장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큰 코를 다치고 있었다. 인텔은 자사의 제조 공장을 타사에 개방해 반도체 제조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는데, 이는 통합 모델이 인텔 경영진의 주장처럼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텔은 앞서가는 기술력과 막대한 생산 역량 등 주요 파운드리 기업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다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파운드리 기업이 되는 것은 엄청난 문화적 변화가 필요한 일이었다. 


TSMC는 지식재산권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 반면에 인텔은 폐쇄적이었고 비밀에 집착했다. TSMC는 서비스 중심 기업이었던 반면에 인텔은 고객이 인텔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TSMC는 스스로 칩을 설계하지 않았으므로 고객과 경쟁할 일이 없었다. 그에 비해 인텔은 거의 모든 기업을 경쟁 상대로 바라보는 반도체 업계의 거인이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인텔 CEO였던 브라이언 크르자니크(Brian Krzanich)가 공개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을 자신이 운영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객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사업 운영에 실망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은 충분한 사내 지원을 받지 못한 채 2010년대 내내 단 한 건의 대형 고객을 유치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문을 닫았다.


2015년 이래 인텔은 10나노와 7나노 제조 공정의 지연을 발표한 반면에, TSMC와 삼성은 앞서가고 있었다. 많은 반도체 종사자들은 인텔의 문제가 극자외선 장비의 도입이 늦은 것부터 시작한 것으로 여긴다.


2020년 세상에 존재하는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 중 절반은 TSMC에 설치되어 있다. 반면에 같은 시기 인텔은 겨우 극자외선 장비를 제조 공정에 도입하기 시작한 수준이다.


2020년대 말 최첨단 프로세서를 제조할 수 있는 회사는 단 둘, TSMC와 삼성뿐이다. 여기서 미국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같은 지역에 있고 같은 이유로 위험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최종편에 계속> Miller)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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