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전기
기원전 219년~기원전 216년
아직 로마가 북부 전선의 방어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기원전 221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는 에스파냐에서는 하밀카르의 사위이자 후임 총독이 된 하스드루발이 살해되었다. 하인으로 부리고 있던 갈리아인이 하스드루발에게 모욕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주인을 죽였다고 한다.
이 다리 역할이 퇴장한 해에 한니발은 26세가 되어 있었다. 에스파냐의 카르타고인은 그의 총독 취임을 만장일치로 인정했고, 본국 카르타고 정부도 그것을 승인했다. 전권을 장악한 한니발은 1년을 꼬박 소비하여 에브로강 이남의 영역을 제패하려고 애썼다.
한니발의 사군토 공격
그 이듬해 기원전 219년, 28세가 된 한니발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을 드디어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해에 한니발은 에스파냐 동해안의 항구도시 사군토를 공격했다. 사군토는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이 정착하여 세운 도시이고, 역시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한니발의 공격을 받은 사군토 주민들은 급히 동맹국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는 원로원 의원 두 명을 사군토에 사절로 보냈다. 하지만 28세의 젊은이는 모호한 소리만 할 뿐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고 카르타고 본국도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해달라는 로마의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사실 사군토 공격은 기존에 기원전 226년에 로마와 하스두루발간에 맺은 협정에 위반되지도 않았다. 로마는 한 번 더 사절을 보냈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기원전 219년 가을 사군토는 함락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로마 민회는 카르타고에 대한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에스파냐 카르타고 세력의 거점 신(新)카르타고로 불린 카르타헤나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한니발에게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로마인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출정하는 한니발
기원전 218년 5월, 29세의 한니발은 준비를 끝낸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헤나를 떠났다.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에브로강을 건너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땅에 들어가 론강을 건너 프랑스를 횡단한 다음,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였다. 한니발이 대군을 이끌고 코끼리 부대까지 데리고 알프스를 넘은 것은 그 후 2,200년 동안 역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은 적이 있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한니발이 카르타헤나를 떠날 때 이끌고 있던 병력은 보병 9만 명에 기병 1만 2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였다. 그밖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국을 수비하기 위해 2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에스파냐를 수비하기 위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3천 명, 코끼리 21마리를 남겨놓았다.
보병 9만 명에 기병 1만 2천 명이라면 엄청난 규모다. 기병은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출신이 중심이었고, 보병은 아프리카의 리비아 출신과 에스파냐인이 2 대 1의 비율로 섞인 혼성군이었다. 카르타고군의 전통을 충실히 따라서, 장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병이었다.
에브로강을 건넜을 때, 그는 피레네산맥에서 에브로강까지를 방위하기 위해 보병 1만 명과 기병 1천 명을 남겨놓았다. 그와 동시에, 한니발은 먼 곳으로 끌려갈 것 같은 낌새를 채고 동요하기 시작한 에스파냐 병사들에게는 선선히 귀가를 허락했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병력은 보병 5만 명에 기병 9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가 되어 있었다.
로마군의 에스파냐와 시칠리아 파병
한니발이 에브로강을 건넜을 때, 변고를 알리는 전령이 급히 로마로 떠났다. 소식을 받은 로마에서는 처음에는 피레네산맥 이남의 에스파냐 전역을 정복하는 것이 한니발의 목적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카르타고 본국도 시칠리아로 쳐들어올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한 전쟁터는 이번에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 두 곳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것은 귀족 출신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아누스의 아버지)와 평민 출신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였다. 당장에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임지는 에스파냐로,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임지는 시칠리아로 변경되었다. 에스파냐에서 들어온 급보를 받은 로마는 편성이 끝난 4개 군단 외에 2개 군단을 더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반도를 무방비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집정관 두 사람이 한 명은 서쪽으로, 또 한 명은 남쪽으로 떠나자마자, 로마에 두 번째 소식이 들어왔다. ‘한니발이 피레네산맥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는 29세 젊은이의 속셈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해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고 있던 코르넬리우스는 우방 마르세유에 들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카르타고 젊은이의 참뜻도 분명해질 터였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의 군단을 태운 함대는 무사히 마르세유에 입항했다. 그러나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적이 피레네산맥을 넘었다는 소식과 한니발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보고였다. 한니발과 5만 명이 넘는 군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니발의 론강 도강
한니발은 로마군과 마주치지 않고, 마르세유와 그 부근의 그리스인한테도 눈치채이지 않고 론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오늘날의 발랑스 근처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세유에서 론강 상류로 150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간 지점이기 때문에, 로마군과 마주칠 위험도 거의 없었다.
론강을 건넌 뒤 한니발에게 남은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 4만 6천 명이었다고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 때의 병력이 5만 9천 명이었으니까, 갈리아에 들어온 뒤부터 론강을 건널 때까지 1만 3천 명을 잃은 셈이다. 하지만 도강 후 정찰 기병대가 로마군과 마주치게 되었고 싸움이 벌어져 결국 로마군에 한니발 군대가 노출되게 되었다.
한니발의 의도가 비로소 분명해졌다. 알프스를 넘어 북쪽에서 이탈리아를 침공할 작정인 것이다. 실제로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론강을 건넌 뒤에는 골짜기를 따라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현재의 그르노블로 향하고 있었다. 그르노블에서 갈 곳은 알프스밖에 없다.
이에 코르넬리우스는 절충이라고 볼 수도 있는 방식을 택했다. 동행한 동생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남은 병력을 전부 주어 에스파냐로 보내고, 그 자신은 직속 장교만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이미 편성된 2개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에서 내려올 한니발을 맞아 싸우기로 했다.
알프스를 넘어
한니발의 군대가 어느 경로를 거쳐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그 후 2,2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리고 많은 연구자가 필사적으로 탐구했지만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알프스를 넘는 모험을 감행한 한니발이 마주친 진정한 어려움은 코끼리떼를 데리고 산을 넘는 일이었을 거라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계절은 9월. 산속에서는 첫눈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시기다. 모든 병사가 편히 쉴 수 있는 숙영지 건설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아흐레째에 고갯마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사람도 말도 코끼리도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갯마루 근처에 군대 전체가 쉴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29세의 총사령관은 병사들을 전부 집합시키고, 동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쪽으로는 저 멀리 이탈리아가 푸른 하늘 밑에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내리막길뿐이다. 알프스를 다 넘은 뒤에 한두 번만 전투를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산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 더 어려웠다. 갈리아인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통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알프스 산속의 계절은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다. 추위는 날이 갈수록 혹독해지고, 살을 찌르는 바람의 고통은 화살에 맞은 고통과 맞먹을 정도였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데 들인 날수는 전부 합하여 보름이었다고 한다. 뒷날 한니발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에 내려선 시점에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 합계 2만 6천 명이었다. 알프스를 넘으면서 치른 희생이 무려 2만 명이나 된 셈이다. 한니발의 군대가 카르타헤나를 떠난 뒤 이탈리아 땅에 들어갈 때까지 넉 달이 걸렸다.
갈리아인을 끌어들이는 한니발
‘알프스의 이쪽’이라는 의미에서 ‘키살피나’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인은 지난 200년 동안 줄곧 로마에 억눌리기만 했다. 그런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카르타고인이 도래한 것이다. 함께 힘을 합쳐 로마와 싸우자고 한다. 당장 갈리아의 몇몇 부족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말로 설득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무자비하게 힘으로 해결했다. 갈리아인의 본거지 가운데 하나인 토리노는 한니발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단 하루 만에 함락된다. 갈리아 민족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한니발은 그들을 휘하로 끌어들이려면 로마군과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한니발은 갈리아인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다는 ‘수단’이 있었다. 모든 면을 검토해보아도, 29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결코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탈리아에 사는 갈리아인을 회유하려고 애쓴 것은 비주력 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속셈은 모르지만 로마인을 증오하는 갈리아인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한니발의 깃발 아래 모여들게 되었다.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한니발 밑에 모여든 갈리아인 병력은 1만 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당시 갈리아는 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와 더불어 기병의 산지이기도 했다.
마르세유에서 되돌아온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피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제는 최전선 기지가 된 피아첸차로 직행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시기에 자기 군대만 가지고 한니발과 싸움을 시작할 마음은 없었다. 이미 동료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당초에 파견되었던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티치노 - 제1회전
계절도 11월에 들어서 있었다. 겨울철인데도 셈프로니우스의 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전투를 원한 한니발은 로마의 2개 군단이 피아첸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군대 전체를 이끌고 숙영지를 떠났다. 행군 방향은 물론 피아첸차가 있는 동쪽이다. 피아첸차에서 포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티치노(오늘날의 파비아)를 등지면, 포강 유역에서도 가장 평탄한 지대가 펼쳐져 있다.
로마 기병은 티치노강에 다리를 놓고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고 시찰을 나온 한니발의 기병과 마주쳤다. 로마군과 한니발 사이에 치러진 첫 전투는 기병전이었다. 한니발은 접근하면서 진형을 정비했다. 기병으로는 가장 우수한 누미디아 출신 기병을 양쪽 날개에 배치한 진형이다. 중앙에는 카르타고와 에스파냐 출신 기병을 배치하고, 그 자신이 몸소 지휘를 맡았다.
반대로 로마 쪽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로마와 동맹국 기병이 본대를 구성하고, 그 전위에 로마와 강화를 맺은 부족 가운데서 참전한 갈리아인 기병을 배치했다. 처음 얼마간은 호각지세였지만 누마디아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해서 갈리아인 기병은 순식간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다.
로마군의 전위를 격파한 누미디아 기병은 선전하고 있는 로마 본대에 육박했다. 겁을 먹은 로마 기병들이 달아나자 카르타고 기병들이 로마 집정관을 둘러쌌다. 상처를 입고 적병에게 포위된 집정관을 구해낸 것은 그날 처음 출전한 젊은 기사, 바로 나중에 한니발과 숙적이 되는 17세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6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한니발에게 귀중한 정보원이 되었다.
트레비아 - 제2회전
피아첸차까지 도망쳐 온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카르타고 기병의 전력이 월등한 것으로 판명된 이상, 평원에서 숙영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근처 트레비아강 주변의 높고 넓은 언덕 위에 견고한 요새를 세웠다.
이 사이에 한니발은 가까운 카스테조 마을이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로마군의 군량 저장소라는 것을 알아내 이곳을 덥쳐 군량을 충분히 확보하였다. 이제 주변의 갈리아인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한니발이 갈리아인 회유작전을 펴기가 더 쉬워졌다.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이탈리아를 남쪽에서 북쪽까지 행군하여, 드디어 코르넬리우스가 기다리는 숙영지에 도착했다. 병사들이 피아첸차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숙영지에서 피로를 풀고 있는 동안에도 두 집정관은 토의를 거듭했는데 콜르넬리우스와 달리 평민 출신 셈프로니우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한니발은 이 정보를 수집했던 모양이다.
기원전 218년 양력으로 12월 22일이 되는 그날 아침은 여느 때보다 더한층 추위가 혹독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로마 병사들은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진영 밖에서 들리는 때아닌 소음에 놀라 일어났다. 적군 기병이 습격해온 것이다.
그런데 로마 보병들이 목격한 것은 아군 기병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적군 누미디아 기병이었다. 적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그날 총지휘를 맡고 있는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만은 아니었다. 중무장 보병들도 분발했다.
기병을 선두로 한 로마군은 퇴각하는 적을 쫓아 눈사태처럼 우르르 강을 건넜다. 하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진형을 갖춘 카르타고군의 전체 병력이었다. 보병전만 보면, 전황은 로마군의 우세 속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양군의 기병끼리 격돌한 구역에서는 전황이 거꾸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숲속에 숨어 있던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의 2천 병력이 로마군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4만의 로마군은 포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포위망은 조금씩 좁혀졌다. 로마 병사들은 칼을 휘두를 여지마저 잃어버리고 있었다. 바깥쪽에 있던 별사들부터 제물로 바쳐지기 시작했다.
티치노에서 당한 패배는 기병전이었다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마도 보병과 기병을 모두 투입한 본격적인 트레비아 회전에서의 패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트레비아 전투의 결과는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력이 아니라 전술의 승리였다.
패배한 로마 쪽의 전사자는 2만 명.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를 비롯하여 1만 명이 겨우 중앙 돌파에 성공하여 피아첸차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진영에 남아 있었던 코르넬리우스도 아들과 함께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피아첸차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알려지면서 포강 주변의 갈리아인들이 대거 한니발쪽으로 달려가 한니발의 군대는 바로 5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두 집정관은 패잔병을 모아서 리미니로 떠났다. 로마는 몇 달 전에 제패를 끝낸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한니발은 포로한테서 정보를 알아낸 뒤에는 포로 전원을 로마 시민과 동맹국 시민으로 양분하여 완전한 차별대우를 했다. 로마 시민병에게는 식사조차 충분히 주지 않고, 가혹한 사역을 시키면서 괴롭혔다. 반대로 동맹국 병사들한테는 충분한 음식을 주고, 손발을 묶지도 않고, 모닥불 곁에서 몸을 녹이는 것까지 허락했다.
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최대 요인인 ‘로마 연합’의 굳은 결속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로마 연합’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성공하면, 더 이상 75만(로마 연합이 동원 가능한 병력) 대 2만 6천(한니발의 병력)의 싸움이 아니다. 알프스를 넘으면서까지 이탈리아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데 집착한 것은 동맹국의 로마 이반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트레시메노 - 제3회전
한니발에게는 원정 2년째가 되는 기원전 217년, 로마는 그해에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귀족인 세르빌리우스와 평민인 플라미니우스를 선출했다. 강경하고 대담한 성격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을 상대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충만해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고, 동료보다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해 4월, 30세가 된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겨울 숙영지를 떠났다. 겨울을 난 볼로냐에서 리미니로 간 다음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남하하는 평이한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길은 볼로냐에서 곧장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거리는 짧지만 어려운 길이었다.
다음 전쟁터를 에트루리아인이 사는 토스카나 지방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 도시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면 ‘로마 연합’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게 된다. 주도권은 완전히 30세의 젊은이가 쥐고 있었다. 로마인은 리미니와 아레초 양쪽에 군대를 배치했지만, 그가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펜니노를 넘어 아르노강 유역으로 내려왔을 때, 기원전 217년 봄은 예년에 비해도 비가 많아 온통 늪지대로 변해버린 평지를 돌파하는 데에는 꼬박 3박 4일이 걸렸다. 게다가 한니발은 어려운 행군보다 눈병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결국 이 눈병으로 그는 한쪽 시력을 잃게 된다. 희대의 전술가는 이때부터 애꾸가 되었다.
피렌체에 도착한 한니발은 휴식을 취한 뒤 플라미니우스가 주둔하고 있는 아레초를 동쪽으로 보며 남하하면서 주변 일대를 약탈하고 불태우며 행군하였다. 이 일대는 구릉이 겹쳐진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드물게 평지가 펼쳐져 있어 에트루리아인이 세운 도시인 아레초에서도 불길과 연기가 손에 잡힐듯 보였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적군을 포착하자마자 당장 리미니에 있는 동료에게 전령을 보내 적군의 움직임을 알리고, 리미니에 있는 2개 군단의 남하를 요청했다. 리미니에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내려오는 동료 세르빌리우스와 자기가 한니발을 협공한다는 것이 플라미니우스의 생각이었다.
한니발은 서둘러 아레초와 페루자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트라시메노호수에 도착했고, 언덕 기슭에는 기병대, 기병대 바로 동쪽에는 갈리아인 병사들, 그 동쪽에는 리비아와 에스파냐의 보병대을 배치하였다. 모두 언덕 기슭을 가득 메운 숲속에 숨어서 아침을 기다렸다. 모닥불도 피우지 않았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의 2개 군단은 밤이 된 뒤 호반에 도착했다. 한니발 군대가 어디서 야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척후를 내보내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로마 병사들은 한니발 군대가 트라시메노호반을 통과하여 페루자 쪽으로 갔을 거라고 믿었다.
기원전 217년 4월 19일은 트라시메노호반을 두껍게 덮은 아침 안개 속에서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적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침 일찍 진을 거둔 로마군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좁은 호반지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시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안개속에서 한니발 군대의 기습을 받은 로마군은 속절없이 살육되었고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도 지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개 기병으로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2만 5천의 로마군 병력 가운데 1만 7천이 전사했다. 도망친 전위부대 6천명도 모두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사흘 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먼저 보낸 로마 기병 4천 기가 이 상황을 모르고 폴리뇨 근처까지 왔다가 누미디아 기병을 만나 포위 당해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제 리미니에서 남하 중인 2개 군단은 기병 전력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트레비아 패전으로 키살피나(알프스 남쪽의 갈리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로마는 트라시메노 패전으로 토스카나 지방까지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트라시메노 패전 후에도 한니발 쪽으로 돌아선 에트루리아의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 에트루리아인의 ‘로마화’는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제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하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5만 명의 적군을 맞이한 셈이 된다. 누구나 한니발이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로마를 공격할 거라고 예상했다. 계절은 이제 막 5월에 접어들어 있었다.
30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그러나 누구나 예측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로 직행하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버리고, 아드리아해로 가는 길을 택했다.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 남부로 가려는 것이다. 그는 로마라는 아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 해자'를 메울 생각이었다. 즉 ‘로마 연합’이 해체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 지방에서 제멋대로 분탕질을 한 뒤,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토스카나 지방과 더불어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많이 있는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 지방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캄파니아 지방의 그리스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였다.
로마는 독재관을 옹립하기로 결정했고 독재관에는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가 취임했다. 리미니에서 달려온 2개 군단과 새로 편성한 2개 군단을 합하여 4개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을 쫓아간 파비우스의 전략은 단 하나, 한니발과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해놓고 적군의 소모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58세의 파비우스는 자기라면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의 장군 가운데 한니발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상태로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파비우스에게는 ‘지구전주의자(쿵크타토르)’라는 별명이 붙었다. ‘굼뜬 사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전략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니발에게 또 다시 당한 사건이 그 불만을 폭발시켰다.
소떼 사건
트라시메노 전투로 시작된 기원전 217년도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풍요로운 캄파니아 지방을 로마군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실컷 약탈한 한니발 군대는 충분히 겨울을 날 만큼 많은 군량을 가지고 풀리아 지방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독재관 파비우스는 기다리고 있던 좋은 기회가 비로소 찾아왔다고 느꼈다. 캄파니아에서 풀리아로 빠지려면, 이탈리아반도를 등뼈처럼 달리고 있는 아펜니노산맥을 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는 골짜기 사잇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파비우스는 이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
하지만 30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여전히 뛰어난 정보력으로 로마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골짜기 사잇길로 접어드는 지점까지 왔을 때,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게 했다. 그러고는 짐수레를 끄는 소들 가운데 2천 마리를 뽑아서 소뿔에 마른 나뭇가지를 묶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의 장막이 내릴 무렵,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소떼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한테로 달려갔다. 소뿔에 묶여 있는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병사들이 쫓아내자, 소떼는 불똥을 흩날리며 로마군이 기다리고 있는 쪽과는 반대방향에 있는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중한 파비우스는 소떼를 카르타고군으로 착각하고 야간전투를 피하고 싶어 이튿날 아침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한니발 군대는 로마 군단의 눈 아래를 지나는 골짜기 사잇길을 그날 밤 무사히 통과했다. 병사 한 명도 잃지 않고 약탈품 한 개도 흘리지 않았다. 이 일로 파비우스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사실상 면직된 것이다.
칸나이 - 제4회전
결국 이듬해인 기원전 216년의 전선을 담당할 집정관으로는 적극전파와 소극전파에서 한 명씩 뽑아, 귀족 출신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평민 출신인 테렌티우스 바로가 선출되었다. 파울루스는 파비우스와 같은 생각이었고, 바로는 적극전파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었다.
민회를 뒤덮고 있는 분위기는 적극전파 일색이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기원전 218년에는 6개 군단, 그 이듬해인 기원전 217년에는 11개 군단이었던 로마의 병력이 기원전 216년에는 다시 13개 군단으로 증강되었다.
보병 전력을 비교하면 8만 대 4만으로 로마가 우세하지만, 기병 전력은 로마가 7,200이고 한니발이 1만이니까 한니발이 우세하다. 로마는 지난해의 트라시메노 전투 직후에 4천의 기병을 잃은 구멍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8만 7천의 대군을 하루씩 교대로 총지휘할 집정관은 둘 다 한니발과 싸워본 경험이 없었다.
두 집정관을 선두로 한 8만 7천의 로마군은 그 한니발을 쫓아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 지방으로 들어갔다. 추격하는 로마군한테서 달아나듯 남하를 계속하고 있던 한니발 군대는 오판토강이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근처에 펼쳐진 평원까지 와서 행군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이 강 근처에 있는 칸나이 마을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전투욕에 불탄 로마군은 진영을 오판토강 왼쪽 연안까지 전진시켰다. 한니발도 당장 같은 쪽으로 진영을 이동시켰다. 양군 사이의 거리는 이제 2킬로미터도 채 안 되었다. 한니발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땅에서 자기가 원할 때 전투를 했다. 트레비아도 그렇고, 트라시메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땅으로 적을 유인했다는 점에서는 칸나이도 다를 게 없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전투는 우선 양군이 정석대로 각자의 정면에 있는 적과 맞서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양군에서 처음 접촉한 것은 활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있던 한니발 군대의 갈리아 용병과 로마군의 경무장 보병이었다.
이 싸움에서 양군의 격돌은 처음부터 로마의 우세 속에 전개된다. 이것을 본 바로는 보병대 지휘를 맡고 있던 전직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중무장 보병대를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로마 보병대의 중앙 돌파에 되도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시키기 위해 만든 활 모양의 진형이 효과를 발휘하여, 갈리아 병사들은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견디고 있었다.
보병전에 이어, 좌우 양쪽에서는 기병들끼리의 전투도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세 배 가까운 전력을 가진 한니발 군대의 좌익이 로마 집정관 아이밀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기병에 대해 처음부터 우세를 보였다.
집정관 아이밀리우스가 이끄는 2,400명의 기병은 강을 등지고 고립된 상태에서 6천 명에 이르는 적군 기병에게 포위되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집정관 바로가 지휘하고 있던 동맹국 기병 4,800명도 초기에는 선전했지만, 승마술이 뛰어난 누미디아인에게는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
7만 명의 로마 보병은 5만 명의 한니발 병사들에게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멋지게 사방을 포위당해버렸다. 하지만 ‘로마 연합’의 핵심을 이루는 시민병들이다. 쉽사리 항복할 병사들이 아니다. 한니발의 로마군 포위작전은 곧 섬멸작전이었다.
중무장 보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지난해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전사했다. 말을 잃고도 부하들과 함께 싸우는 쪽을 선택했던 집정관 아이밀리우스도 전사했다. 독재관 파비우스의 부관을 지낸 미누티우스도 전사했다. 기병이나 중무장 보병으로 참전한 80명의 원로원 의원도 거의 다 전사했다.
이날의 총사령관인 집정관 바로는 기병 50기만 이끌고, 칸나이에서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킬로미터나 들어간 곳에 있는 로마의 식민도시 베누시아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들 중에는 19세가 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끼어 있었다. 트레비아 전투가 끝난 뒤 에스파냐로 파견된 아버지가 아이밀리우스에게 아들을 맡겼기 때문이다. 젊은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을 접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옛사람들의 기록을 믿는다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쪽의 희생자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렀다. 승리한 한니발 쪽의 전사자는 불과 5,500명. 그 가운데 3분의 2는 갈리아 병력이었다. 그 역사 전체를 조감해보아도, 로마가 이런 참패를 맛본 것은 이 칸나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집정관 바로가 패잔병을 모아서 수도로 돌아가자, 원로원 의원을 비롯한 모든 시민이 성문까지 마중나와서 노고를 위로했다. 전사자의 유가족이 상을 입는 기간은 평소의 1년에서 30일로 제한되었다. 바로의 조기결전론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것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나쁜 소식은 잇따라 날아드는 법인 모양이다. 칸나이에서 전사한 이들에 대한 애도기간도 아직 끝나지 않은 로마에 갈리아 땅에서 2개 군단이 궤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한니발의 활약에 용기를 얻어 반기를 든 갈리아인을 진압하기 위해 보냈던 군단이었다.
믿음이 깊은 로마 시민들의 심경을 고려한 원로원은 신탁을 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신탁을 받기 위해 그리스의 델포이로 간 것은 나중에 제2차 포에니 전쟁사를 쓰게 된 원로원 의원 파비우스 픽토르였다. 잇따른 흉보에 로마인이 얼마나 동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사례다.
로마 연합의 붕괴
카르타고의 장교들은 저마다 한니발에게 때를 놓치지 말고 로마를 공략하러 가자고 진언했다. 하지만 31세의 승자는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 연합’의 붕괴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은 한니발은 지금 시점에서 수도를 공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대답했다.
'로마 연합'의 붕괴는 이탈리아 반도 맨 아랫쪽의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레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로마에 더 뼈아픈 타격은 카푸아의 이반이었을 것이다.
카푸아는 이탈리아 중남부의 캄파니아 지방에서는 나폴리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중요한 도시였다. 카푸아는 시민 대표를 한니발 진영에 보내 단독 강화를 제의했다. 이어 근처의 4개 도시가 재빨리 로마에 등을 돌렸다. ‘로마 연합’은 이탈리아 중남부에서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216년을 칸나이의 완승으로 장식한 한니발 군대는 에스파냐를 떠난 지 3년째 되는 해 겨울에 처음으로 천막만 둘러친 땅바닥이 아니라, 지붕과 벽으로 둘러싸인 집 안의 침대 위에서 쾌적한 수면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부터 기원전 215년에 걸친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기
기원전 215년~기원전 211년
로마의 강화 제안 거부
카푸아에 있던 한니발은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8천 명의 로마 포로들을 석방하는 대신 몸값을 받는 거래를 로마에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의 강화 제의였는데 원로원 의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한니발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니발은 로마 포로들을 모두 그리스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전쟁 수행의 의지를 천명한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제외한 전 재산을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전시 국채가 발행되어, 무산자 계급을 제외한 모든 시민에게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국채가 할당되었다.
한니발의 시라쿠사와 마케도니아 동맹
기원전 215년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로마를 둘러싼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전되기는커녕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그해 봄, 오랫동안 로마의 믿음직한 친구였던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것은 15세밖에 안 된 손자였다.
당장 내분이 일어났고 한니발은 군대가 아니라 공작원을 파견했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소년 군주는 살해되었다. 시라쿠사는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이때 뜻밖의 낭보가 한니발 진영에 들어왔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에게 동맹을 제의해온 것이다. 필리포스 5세는 로마가 칸나이 전투에서 참패당한 것을 알고, 승자인 한니발과 함께 로마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215년부터 로마는 동서남북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동쪽은 마케도니아, 남쪽은 시라쿠사, 서쪽은 에스파냐, 북쪽은 갈리아인. 그리고 이탈리아 안에는 가장 막강한 한니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의 전략 변경
한니발의 배후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카르타고보다 오히려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 전선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의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여, 로마군이 에브로강을 건너 남쪽까지 진격할 만큼 전황이 로마 쪽에 우세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에 로마가 취한 전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서남북의 모든 방면에서 한니발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를 이탈리아 안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 한 지구전 작전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 원로원은 칸나이 패전 이듬해인 기원전 215년의 집정관으로 파비우스를 선출했지만, 이해부터 시작되는 로마의 지구전법은 파비우스가 독재관 시절에 택한 전술과 똑같은 것이라도 그 내용이 달랐다. 한니발과의 회전(會戰)은 가급적 피하되,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카르타고군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않고 공격한다.
한니발은 칸나이에서 승리하여 이탈리아 남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가 지켜야 할 도시와 지방이 늘어났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한니발이라도, 이탈리아 남부는 넓다. 그 넓은 지역에서 혼자 신출귀몰해야 한다면.
기원전 215년부터 기원전 211년까지 4년 동안, 즉 로마가 방어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4년 동안, 후방의 원로원과 일사불란하게 협력하면서 최전방에서 한니발과 맞선 장군이 네 명 있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귀족),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평민), 셈프라니오스 그라쿠스(평민), 발레리우스 레비누스(평민)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이것은 로마의 진정한 강점으로 남아 있었다. 로마의 다른 동맹국과 식민지도 ‘로마 연합’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것도 역시 로마가 가지고 있던 강점이다. 속주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한니발의 문제
한편, 한니발한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이탈리아 안에서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정비된 항구를 필요로 했다. 카르타고 본국에서 온 보급선단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 카푸아는 중요한 도시지만, 바다에 면해 있지 않다. 타란토는 아직 로마 편이었다.
기원전 215년에 한니발의 군사행동은 캄파니아 지방의 항구도시 획득에 집중되었다.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는 캄파니아 지방에 세 명의 장군을 투입했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와 그라쿠스가 그들이다. 한니발은 깊은 만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나폴리와 포추올리라는 좋은 항구를 노리고 있었다.
로마의 세 장군은 카푸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한니발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카푸아에서 출동한 한니발은 삼면을 포위한 로마군에 대해 모두 싸움을 걸었지만, 싸움에 응한 로마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에 로마군은 한니발에게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 한니발로서도 카푸아가 아무리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해도, 거기서 겨울을 나는 것은 위험해졌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에서는 단 한 번 겨울을 났을 뿐, 그 후로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야영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이듬해인 기원전 214년, 공화정 로마에서는 이례적으로 파비우스가 집정관에 연이어 재선되었다. 동료 집정관으로는 마르켈루스가 취임했다. 한니발과 맞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캄파니아 지방에는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4개 군단이 배치되었다.
봄이 되자마자 한니발이 북상해왔다. 이해도 그는 캄파니아 지방의 항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카르타고 제2군이 그라쿠스의 노예 군단에게 크게 패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라쿠스는 노예들에게 이 싸움에서 이기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들은 놀라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캄파니아 지방을 방치한 채 타란토로 남하했다. 타란토도 천연의 좋은 항구였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민이 된 그라쿠스의 노예 군단이 한니발을 추격했다. 한니발의 타란토 공략은 그를 추격한 그라쿠스와 풀리아 지방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파비우스의 아들이 각각 2개 군단을 이끌고 방해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로마의 마케도니아 전선 봉쇄
마케도니아 전선에서는 군사와 외교의 양면 작전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전선을 담당한 레비누스는 1개 군단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브린디시를 기지로 하는 50척의 군선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싸웠다. 그리스 서부에 있는 로마군 기지인 아폴로니아를 공격한 마케도니아 왕은 격퇴당하여 자기 나라로 도망쳤다.
그리고 레비누스는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마케도니아 왕국과 접경하고 있는 아이톨리아인을 부추겨 마케도니아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도록 공작했다. 또한 마케도니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마케도니아 동쪽의 페르가몬 왕국을 궐기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1개 군단밖에 안 되는 전력으로 마케도니아 봉쇄 작전에 성공하게 되었다.
한니발의 타란토 공략
기원전 213년 한니발은 무력이 아니라 책략을 사용하여 타란토를 공략하기로 했다. 타란토도 카푸아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굴복한 뒤 ‘로마 연합’의 일원이 된 동맹 도시국가(소키)였다. 그런데 여기는 완전한 국내 자치가 허용되지 않고 해마다 로마 총독이 파견되어 군사 부문을 통치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인의 식민으로 건설되어, 로마와 거의 맞먹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남부 제일의 도시국가였던 타란토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를 참고 있던 타란토에 한니발이 몸값도 요구하지 않고 석방한 병사들이 돌아왔다. 타란토에서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한니발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한니발을 찾아갔다. 한니발은 그들에게 행동 계획을 건네 주고 돌려 보냈다. 그후 한니발은 정예부대만 거느리고 은밀히 타란토로 갔다. 작전은 완벽하게 실행되었다. 밤중에 안에서 열어준 성문으로 몰래 들어간 카르타고군이 미리 알아둔 시내 요소를 점거하는 데에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타란토를 얻은 한니발은 전처럼 활발한 군사행동을 재개했다.
로마의 시라쿠사 공격
기원전 213년 로마 원로원은 적극적이고 과감한 전술 때문에 ‘이탈리아의 칼’이라는 별명을 얻은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로 보냈다. 마르켈루스의 임무는 카르타고 쪽으로 돌아선 시라쿠사를 공략하는 동시에, 이곳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카르타고 본국의 군사행동과 대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노리고 남하했지만, 투항 권고를 거부한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시작한 뒤로는 완전히 기력을 잃어버렸다. 시라쿠사에는 아르키메데스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인은 이때 한 사람의 두뇌가 4개 군단과 맞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포위가 끝나고,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의 총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시라쿠사는 병력으로 맞서지 않고 제각기 용도가 다른 기계를 투입하여 방어하기 시작했다. 육지 쪽에서 공격하는 로마 병사들은 성벽 위로 목을 내밀고 돌멩이를 쏘아대는 신병기에 골치를 앓았다. 이런 병기는 사정거리도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데다 이동도 자유자재인 듯, 로마 병사들이 위치를 바꾸어도 정확히 겨냥하여 돌멩이를 쏘아댔다.
게다가 바다에서는 로마 선단이 벼랑에 접근하자마자 성벽 위로 얼굴을 드러낸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묘하게 생긴 기계뿐이었다. 그 기계는 성벽을 넘어 벼랑 위에까지 뻗어와, 이제 막 거기에 내려진 공격용 사다리를 쳐서 바다로 내던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이 기계는 바다 쪽 성벽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공격용 사다리와 그것을 타고 벼랑 위로 내려서려던 로마 병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바다 쪽에서도 사정거리와 이동이 자유자재인 투석기가 활용되었다. 커다란 돌멩이에 맞아 균형을 잃고 벼랑에 충돌하여 부서지는 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신무기의 공세를 피해 성벽에 달라붙은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도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울에 반사된 햇빛을 받고 눈이 부셔서, 성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질 뿐이었다.
결국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는 마치 물잔을 내던지듯 배를 내던지고 있군. 삼부카(로마의 공격용 사다리)는 꼭 잔치에서 쫓겨난 악사 같아.”라고 말하며 시라쿠사 공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기원전 212년에 마르켈루스는 포로들 가운데 시라쿠사 출신을 찾아 데려오게 한 다음, 심문을 시작했다. 포로들의 대답 가운데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제가 며칠 뒤로 다가왔다는 것이 마르켈루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축제일은 그리스 민족인 시라쿠사인에게는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마르켈루스도 알고 있었다. 포로들의 말에 따르면, 아르테미스 축제일에는 술에 취해서 곤드라지는 것이 시라쿠사인의 습관이라고 했다.
1천 명의 정예가 선발되었다. 수많은 공격용 사다리도 성벽 근처의 숲속에 숨겨졌다. 그밖에 1만 명의 병사가 육지 쪽의 성문 근처에 은신했다. 한밤중이 지났을 때, 소리도 없이 성벽으로 다가간 1천 명의 병사가 몰래 성벽에 사다리를 세우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있던 감시병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성문을 안쪽에서 차례로 열었다. 1만 명의 로마 병사가 어둠을 뚫고 시라쿠사 시내로 잠입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았을 때, 시가지의 절반은 로마군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시민들은 도심의 섬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로마의 봉쇄 작전에 시라쿠사는 다음 해 봄에 완전히 함락되고 말았다.
시라쿠사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은 그때까지 로마인이 알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미술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시라쿠사의 500년 역사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500년과 달랐다. 전성기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그리고 카르타고도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될 500년이었다. 기원전 211년, 이 시라쿠사는 독립을 잃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한 해가 넘도록 로마군을 괴롭힌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함락의 혼란 속에서도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열중해 있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마르켈루스는 몹시 애석해했다고 한다.
로마의 타란토 탈환 작전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카푸아 탈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남부를 수비하고 있던 한 카르타고군 장군이 그 지역의 전투를 맡고 있는 전직 집정관 그라쿠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의 뜻을 전하고, 항복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에 나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라쿠스는 이 말을 믿고 소규모 부대만 거느린 채 지정된 곳으로 갔다.
그리고 사방에서 습격해온 카르타고 병사들에게 그라쿠스와 부하 기병 전원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라쿠스의 노예 군단 병사들은 진영에 내던져진 총사령관의 목을 보고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4년 동안 철석 같은 결속을 자랑해온 노예 군단은 총사령관을 잃은 순간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로마에서 2개 군단이나 되는 병사가 사라져버린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마는 지난해에 이어 기원전 211년에도 모든 전선에 25개 군단을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고, 카푸아에서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세 명의 사령관이 이끄는 6개 군단이 확고부동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한니발의 로마 접근과 로마의 카푸아 탈환
시라쿠사가 다시 로마 쪽으로 넘어가버린 지금 카푸아의 중요성은 전보다 더욱 커졌다. 한니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마군의 철벽 같은 포위망에서 카푸아를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로마군의 포위망이 너무 두터워 포위망을 공격함으로써 로마군을 싸움에 끌어낸다는 전략을 실행할 수 없게 된 한니발은 아군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대담한 승부로 나왔다.
최소한의 병력만 이끌고 적에게 들키지 않고 카푸아 포위망의 배후를 우회하는 데 성공한 한니발은 이제 로마군과 만날 위험이 없는 라티나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달려갔다. 부하들이 로마 성벽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숙영지를 만드는 동안, 그 자신은 기병대만 이끌고 라티나 가도를 따라 더욱 북상하여 로마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다. 성벽 근처에 이르자, 그는 로마를 둘러싼 성벽을 따라 ‘산책’을 감행했다.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인이 침입한 이후 179년 동안 로마의 수도에까지 적이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니발의 이 대담한 시위에는 로마인들도 심장이 멎어버릴 만큼 놀랐다. 성벽 위로 몰려나온 로마인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백마를 탄 36세의 장군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거리에서 산책을 멈추지 않았다.
수도 로마의 방위군을 전투에 끌어내어 쳐부수고, 거기에 경악한 카푸아 포위군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달려오면 그 군대도 쳐부순다는 것이 한니발의 속셈이었지만, 이 생각은 전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기원전 211년의 이 ‘로마행’은 그토록 강렬하게 로마를 무찌르고 싶어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온 한니발이 로마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이탈리아 남부로 회군해버렸다. 도중까지 와 있던 그의 본대도 총사령관을 따라 장화 발부리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되돌아갔다. 한니발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카푸아는 그 후 얼마 동안 장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 중에 로마군 사령관의 한 명인 전직 집정관 풀케르가 전사했다. 함락된 카푸아는 국내 자치권도 잃어버리고,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다.
로마의 에스파냐 전선의 궤멸
기원전 211년 에스파냐 전선이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식이 로마로 날아 들어왔다. 기원전 212년 가을에 자연 휴전기가 닥쳐왔을 무렵, 코르넬리우스 형제는 카르타고 세력하에 있던 에스파냐의 3분의 1을 평정한 상태였다. 사령관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귀국도 하지 않고 계속 싸워서 얻은 성과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기원전 211년, 금화의 힘으로 증강된 카르타고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제1군은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이끌고, 제2군은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가 이끌고, 제3군은 카르타고 본국에서 파견된 시스코네가 이끌었다. 2개 군단으로 3개 군단과 대결하게 된 로마군에서는 멈추지 않는 출혈처럼 현지 병력의 탈주가 계속되었다.
기원전 211년 초여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이끌고 있던 군단에서 한꺼번에 7,500명이나 되는 에스파냐 병사가 탈주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푸블리우스는 밤중인데도 당장 그들을 추격하기로 결심했다. 탈주병이 카르타고군과 합류하기 전에 처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동이 틀 무렵, 로마군 앞을 가로막은 것은 탈주병을 맞으러 와 있던 누미디아 기병대였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카르타고에 고용된 누미디아의 왕자 마시니사였다. 로마군이 여기에 응전하고 있는 동안 마고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까지 싸움에 가담했다. 때마침 가까이에 있던 하스드루발도 싸움터에 도착했다.
수적으로 완전히 열세인 로마군은 퇴로까지 차단당한 채 궤멸하고 말았다. 사령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로마군을 쳐부순 카르타고 제2군은 조금 떨어진 곳을 행군하고 있던 그나이우스의 1개 군단을 습격했다. 이 로마군도 세 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받고 아군과 운명을 같이했다. 기원전 222년에 집정관을 지낸 바 있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전사했다.
카푸아 함락으로 조금은 여유가 생긴 원로원은 예비 사령관 가운데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어 에스파냐로 급파했다.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하여 협곡에 가두었지만 그의 강화 속임수에 넘어가 놓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로마 원로원은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을 상대하는 총사령관으로서 네로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그해 겨울조차도 에스파냐에서 보내지 못하고 로마로 소환되었다. 이제 이 에스파냐 전선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 원로원도 총사령관 인선에 고심하고 있었다.
스키피오의 등장
나이도 차지 않은 한 젊은이가 원로원 안으로 들어왔다. 64세의 파비우스나 59세인 마르켈루스의 눈에는 풋내기처럼 보였지만, 24세의 이 젊은이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고 자기 이름을 댔다. 그러고는 에스파냐에서 전사한 선친의 뒤를 이어 자기를 그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에스파냐로 파견해달라고 부탁했다.
원로원은 본인이 원하고 있으니까 한번 맡겨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구나 아버지와 숙부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소원을 차마 뿌리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그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 감찰관을 에스파냐로 가는 젊은이한테 딸려 보내기로 했다.
감찰관은 실전 경험도 많고 나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레누스였다. 젊은 총사령관이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당장에 실레누스가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원로원의 결정은 시민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한니발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로마인에게 스키피오의 젊음과 패기와 대담한 행동력은 구원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에 또 한 사람의 천재적인 장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