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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18. 2024

로마인 이야기 3권 (2)

승자의 혼미 - 술라와 폼페이우스

술라의 오리엔트 정벌


기원전 87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건너간 이후 1년 동안, 로마에서 일어난 사정을 술라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 제압에는 아테네의 동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로 건너가자 우선 아테네 공략전에 착수했다.

[술라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술라는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특히 해군이 없는 것은 큰 약점이었다. 아테네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외항 피레우스를 손에 넣지 않는 한 아테네를 함락시킬 수는 없다. 그는 막료인 루쿨루스에게 로마 동맹국인 로도스섬과 이집트에 가서 해군 지원을 요청하도록 했다.

[피레우스항과 로도스섬, 이집트 지도 출처 구글 지도]

술라의 아테네 공략


군비를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술라는 그리스 각지의 유명한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을 몰수하도록 했다. 이를 보고 근엄한 플루타르코스는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나 플라미니누스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같은 로마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하고 개탄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 문화에 깊이 심취했고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플루타르코스와 영웅전 출처 구글 이미지]

아테네 공략전은 기원전 86년 3월 1일에 끝날 수 있었다. 술라는 항복한 아테네 시민에 대해서는 "소수의 뛰어난 자들을 보아 다수를 용서하고, 뛰어난 죽은 자들을 보아 살아있는 자들을 용서한다"고 말하여, 패배자 아테네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술라 역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후세에 태어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술라 덕분이기도 하다. 묻혀있던 저작집을 발견하여 로마로 가지고 돌아온 사람이 술라였기 때문이다.


미트라다테스 격파


이즈음 총병력 12만 명인 폰투스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들어왔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술라는 아테네 방위에 5천 명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전력은 3만 명밖에 안 된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에 대해서는 방어보다 공격이 더 효과적이었다.

[헬로스폰토스 해협 출처 구글 지도]

기원전 86년 봄, 양군은 테베에서 북서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호숫가에 펼쳐져 있는 카이로네이아 평원에서 맞섰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전쟁터는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재빨리 주도권을 장악한 술라의 독무대가 되었다.


폰투스군의 전차가 거대한 낫을 회전시키면서 돌진해 왔지만, 로마군은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피했듯이 슬쩍 비켜서서 전차를 통과시킨 다음, 허둥대는 전차들을 포위했다. 이리하여 폰투스군의 전차들은 대부분 전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에도 3열 종대에 10열 횡대의 중대를 배치하는 로마 군단의 전통적인 진형은 바뀌지 않았다. 이 진형은 전황에 따라 임기웅변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어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폰투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투스 쪽의 전사자와 포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

[카이로네이아 평원 출처 구글 지도]

몇 달도 지나기 전에 폰투스군 8만 명이 다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하지만 카이로네이아 전투 이후에도 계속 북상하고 있던 술라의 로마군과 대결한 결과는 또다시 술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 두 번째 전투의 전사자는 1만 5천 명이었다. 전사자가 적은 것은 로마군이 적병을 노예로 팔기 위해 사로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미트라다테스와의 강화


한편 킨나가 파견한 플라쿠스 군단은 소아시아에 상륙한 후 총사령관 플라쿠스와 부장(副將) 핌브리아 사이에 전략상의 의견 대립이 벌어지는 바람에 병사들까지 합세하여 소동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플라쿠스가 살해되었다. 하지만 핌브리아가 이끄는 로마군은 그들을 맞아 싸우러 나온 폰투스군과 싸워서 이겼다.


미트라다테스는 양쪽의 적을 저울질한 끝에, 강하다고 여겨지는 적과 강화를 맺기로 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패장 아르켈라오스가 교섭 임무를 띠고 술라에게 파견되었다. 이 사이 애타게 기다리던 루쿨루스가 드디어 로도스섬에서 제공한 함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미트라다테스는 해군력까지 갖춘 술라와 강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조인을 끝낸 미트라다테스는 그 길로 폰투스로 돌아갔다.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의 로마 속주에서 폰투스군이 전면 철수하라는 조건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미트라다테스에게 쫓겨났던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의 왕도 각자 왕위에 복귀했다. 폰투스의 군선 70척도 술라에게 양도되어 루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 해군에 편입되었다.


로마 정규군과의 전투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제압한 술라는 아시아로 갈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제 해군도 손에 넣은 그는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너 동쪽의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폰투스군이 철수한 뒤의 소아시아를 재편하기 위해서였지만, 그전에 우선 이 땅에 상륙하여 폰투스군을 서전에서 이긴 핌브리아의 로마 ‘정규군’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술라군이 핌브리아 군대의 진영 바로 옆에 진지를 구축하자 핌브리아 군대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술라 진영으로 집단 탈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핌브리아는 성품이 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존심도 그만큼 강했다. 그는 술라가 제공하는 배를 거절하고,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에 가서 자결하고 말았다.


술라는 소아시아를 평정하고 핌브리아 휘하에 있던 2개 군단을 루쿨루스 휘하에 편입시켜 해군과 함께 소아시아에 남겨두기로 했다. 54세가 된 술라는 그의 막료들 중에서 해군편성을 맡은 32세의 루쿨루스를 가장 신임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소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긴 것이다.


술라의 로마 귀환


이후 술라는 거의 1년간 아테네에 머물면서 킨나를 무언으로 압박하면서 동시에 "민회와 킨나의 부당한 조치를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함께 바로잡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해외에 원정한 로마 장군이 귀국한 뒤에는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는 법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킨나를 실력으로 뒤엎을 생각인 것도 분명해졌다.


술라가 이탈리아를 떠난 것이 기원전 87년. 그때부터 3년 동안 킨나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낸 것은 아니다. 술라와 같은 코르넬리우스 일족 출신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원한에 사로잡힌 마리우스의 복수전을 방관했지만, 마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뜻밖일 만큼 온당한 정치를 폈다.


또한 킨나는 딸을 성년식을 갓 마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 훗날의 영웅 카이사르도 당시에는 아직 16세였다.  킨나가 이 젊은이를 사위로 삼은 것은 평민 영웅 마리우스와 자신의 인연을 강화하는 동시에, 원로원 양식파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당시 로마의 상류층에서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다.


킨나의 죽음


킨나는 술라에 대항하기 위해 집정관의 정당한 권리인 군단 편성을 개시했다. 그해에 동료 집정관은 마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이 두 집정관이 ‘무법자’ 술라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술라가 가하는 무언의 압력과 유언의 압력에 흔들린 킨나는 몸소 그리스에 가서 술라와 맞붙기로 작정했다.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병력 집결지는 아드리아해에 면한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합류한 이탈리아의 지원병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이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킨나는 50세도 되기 전에 안코나에서의 시시한 사고로 일생을 마감했다. 기원전 84년 말의 일이었다.


킨나가 사망한 이듬해 기원전 83년 이른 봄, 아테네를 떠난 술라는 강행군으로 그리스를 가로지른 다음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브린디시 주민들은 역적으로 규정된 술라에게 기꺼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술라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안코나와 브린디시 출처 구글 지도]

54세를 맞이한 술라는 그를 따르는 고참병(베테랑) 3만 5천 명과 그리스에서 참가한 5천 명을 합한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마치 주변을 권위로 제압하려는 듯 느린 속도로 아피아 가도를 북상하기 시작했다. 킨나가 독재를 휘두르던 4년 동안 숨을 죽이고 살았던 자들이 속속 술라에게 달려왔다.


한편 술라를 맞아 싸울 로마 정규군은 12만 명이다. 이 정규군을 지휘하는 것은 그해의 집정관인 노르바누스와 카르보네스,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지휘를 맡은 스키피오 나시카와 마리우스의 아들, 그리고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던 세르토리우스 등 다섯 명이다.


스키피오 나시카는 일찌감치 항복했지만 다른 장군들은 술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싸웠다. 2년에 걸쳐 이탈리아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이 전쟁도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벌어진 로마 성벽 바로 옆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드디어 막을 내렸다.


술라의 ‘민중파’ 제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번만은 후환의 우려가 없는 상태에서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다. 56세의 술라는 반대파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술라는 1만 명의 건장한 노예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일족 이름인 코르넬리우스를 주어, 반대파 소탕의 행동대로 이용했다.


이들 ‘코르넬리우스 일당’(코르넬리)은 마리우스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테베레강에 던지고,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및 게르만족과 싸워서 이긴 것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비를 파괴하고, 마리우스의 양손자를 살해했다.


‘민중파’에 대한 소탕작전은 로마의 저명인사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각 지방에도 미쳤다. 유력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소유지를 몰수당하거나 엄벌에 처해졌다. 술라는 ‘민중파’의 기반도 철저히 파괴할 생각이었다.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한 젊은이의 이름도 실려 있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도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라는 점에서 마땅히 처단해야 할 ‘민중파’의 일원이었지만, 술라의 측근들이 그를 살려줄 것을 부탁했다. 아버지도 없는 아직 18세 청년이고, 정치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그 대신 술라는 젊은이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과 이혼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가문의 젊은이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싫소”였다. 술라는 격분했다. 18세의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달아났을 뿐 아니라, 먼 소아시아까지 도망쳐 술라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게 된다.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


57세의 술라는 마리우스와는 달리 반대파를 소탕한 뒤에도 죽지 않았다. 술라에게는 국정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국정을 개혁하려면 법적으로 정당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집정관이 둘 다 전사하여 공석으로 남아 있는 자리를 술라가 욕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관리 내각의 수반격인 '인테렉스'의 지위에서 민회를 소집하려는 명문 귀족 발레리우스에게 술라의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재 상황이 국가에 대단히 위험한 상태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상, 이를 타개하려면 비상 대책만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오. 즉 비상시의 독재관이 필요하고, 그것도 임기가 6개월이 아니라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무기한 재임이 허용되는 독재관이 필요할 것이오. 시민이 원한다면, 나는 그 중책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소.”


민회에 술라의 의견이 반영된 ‘발레리우스 법안’이 제출되었다. 민회는 이 법안을 가결하고, 술라를 독재관에 선출했다. 이리하여 술라는 법에 따라 민주적으로 로마 역사상 최초인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였다. 민회는 이어서 기원전 81년의 집정관 두 명을 선출했다. 물론 둘 다 술라 지지파였다.


술라의 국정 개혁


기원전 81년 1월 27일과 28일에 거행된 개선 행사가 끝나자마자 술라의 국정 개혁이 시작되었다. 독재관이 제출하는 법안은 집정관이나 재무관이나 호민관의 경우와는 달리 민회에서 의결할 필요가 없다. 술라의 발의는 당장 정책이 되었다. 그것들을 항목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시민권 및 선거제도 관계


술라는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전역의 주민에게 개방한 ‘율리우스 시민권법’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또한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성립시키고 킨나가 확립한 ‘술피키우스법’, 즉 ‘신시민’은 35개 선거구의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도 확인했다. 이것은 술라가 단순한 수구파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복지 문제


40년 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작한 이후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 가격이 꾸준히 하락했기 때문에, ‘곡물법’은 이제 일종의 사회복지제도로 정착해 있었다. 술라는 이 ‘곡물법’을 완전히 폐지해버렸다. 보수파인 술라는 시민 복지보다 국가 재정의 건전화를 우선한 것이다.


실업자 대책


술라의 집권을 계기로 식민시 건설 사업이 오랜만에 활발해졌다. 다만 술라는 이 사업을 실업자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자기 휘하에서 종군했던 고참병들에 대한 ‘퇴직’ 대책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11개나 되는 신도시에 이주한 사람은 대부분 술라의 퇴역병들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날의 피렌체*는 술라가 건설한 식민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피렌체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 피렌체는 기원전 8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아르노 강가에 자신의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를 세울 때 "두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플루엔티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명칭이 후에 "플로렌티아"로 바뀌었다. 그러나 술라의 퇴역병들은 곧 도시를 방기하여 이때의 식민지 건설은 실패했고,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로 퇴역병을 이주시켜 건설한 것이 현재 피렌체의 시작이다. [출처: 나무위키]


원로원 개혁


술라는 우선 이 빈자리를 채운 다음, 300명 정원인 원로원을 600명 규모로 확대했다. 술라 덕분에 새로 원로원 의석을 얻은 사람들은 대부분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도 아니고, 집정관을 배출했기 때문에 새로 귀족 반열에 올라선 평민 귀족도 아니고, 처음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기사계급’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사법 개혁


술라는 그것을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원로원 의원이 배심원을 독점하게 했다. 원로원에 ‘기사계급’이 대거 들어왔으니까, 실질적으로는 배심원도 귀족 2분의 1과 기사 2분의 1로 구성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가 가장 중요시한 원로원 강화 문제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행정 개혁


술라는 통치력도 강대국이 된 로마의 실정에 맞게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 즉 로마 특유의 소수 지도 체제인 공화정에는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 술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의 행정 개혁은 연공서열을 재정비하는 형태가 되었다. 소수 지도 체제는 그 ‘소수’가 균등하게 ‘지도’할 기회를 부여받아야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라의 개혁에서는 연령 제한과 서열 순위가 엄격하게 정해졌다.


술라는 또한 속주 통치를 엄격히 체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법무관을 8명으로 증원한 것도 당시 10개였던 속주에 각각 1년 임기로 파견할 총독의 수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직 법무관 8명과 전직 집정관 2명을 합하면 10명이 되기 때문이다.


군사 개혁


술라는 로마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력과 군사력의 분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집정관 2명만 군단을 거느릴 자격을 갖고, 국내에는 4개 군단 이상의 상비군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규모를 넘는 병력의 지휘권은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는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한테만 인정되었다. 다만 그들도 군단을 움직일 경우에는 반드시 원로원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고, 로마 직할령인 루비콘강에서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반도에는 절대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못박았다.


지방 개혁


‘로마 연합’이 일종의 연방제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이 된 지금은 동맹시들의 독립적 지위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졌다. 과거의 동맹시들은 그대로 로마 국가의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술라의 개혁 후에는 로마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에 ‘프라이펙투스’를 파견하게 된다. 의역하면 ‘관선 지사’라고 할 수 있다.


호민관 제도 문제


호민관 제도의 개혁만큼 술라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없다. 술라는 그라쿠스 형제가 노출시킨 로마의 혼미가 통치력이 쇠퇴한 원로원과 지나치게 강대해진 호민관 권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호민관의 약체화를 노린 술라는 호민관 제도도 그대로 두고, 호민관 경력자가 원로원에 들어갈 권리도 그대로 인정하면서, 호민관 경력자는 다른 관직에 선출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안을 성립시켰다.


술라는 그라쿠스 형제처럼 호민관직을 정계 진출의 등용문으로 생각지 않는 자에 대한 대책도 잊지 않았다. 독재관 술라는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호민관도 재선되려면 10년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술라는 이 모든 제도 개혁을 기원전 81년부터 이듬해 말까지 해냈다. 그는 ‘원로원 체제’라 해도 좋은 로마 특유의 공화정이라는 ‘가죽부대’를 열심히 수선하려고 애썼다.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은 단지 ‘가죽부대’가 낡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튼튼한 가죽조각을 덧대어 보강한 가죽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아직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술라의 은퇴


기원전 80년 말,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에서는 관례에 따라 이듬해의 집정관을 선출하는 민회가 열리고 있었다. 집정관 두 사람이 선출된 뒤, 독재관 술라가 연단에 올라섰다. 58세의 술라는 다짜고짜 연단 위에서 독재관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시민들에게 통고했다.


독재관을 사임한 술라는 정계에서도 은퇴했다. 원로원 의원이기는 했지만, 원로원이 열리는 로마를 떠나 나폴리 서쪽 바닷가에 있는 쿠마이에 은거했다. 술라는 재물을 모으는 일에는 평생 무관심했다. 쿠마이에 세운 별장도 지나치게 검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화롭지도 않았다.

[쿠마이 출처 구글 지도, 구글 이미지]

이 별장에서 그는 낚시와 산책을 즐기고, 특히 회고록을 쓰면서 나날을 보냈다. 술라의 회고록은 중세에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기가 ‘행운아’(펠릭스)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이런 은둔생활을 1년 남짓 보낸 뒤, 술라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이틀 전에 많은 피를 토하고, 집필을 계속하고 있던 회고록도 22장까지 쓴 단계에서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술라의 죽음이 알려지자, 장례식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놓고 로마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는 동안, 술라 휘하에서 종군했던 퇴역병들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쿠마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선식에라도 참가하는 것처럼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무언의 압력에 로마 원로원은 술라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술라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그를 존경했던 사람도 그를 증오했던 사람도 이때만은 똑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 살아생전에도 그랬듯이, 죽어서도 술라는 역시 행운의 사나이였다고. 묘비에는 술라가 생전에 생각해두었다는 비문이 새겨졌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폼페이우스 시대
기원전 78년~기원 전 63년


술라의 죽음과 함께, 그가 그토록 열심히 수선한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로마라는 ‘가죽부대’에는 구멍이 다시 뚫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가죽부대에 구멍을 뚫은 것은 술라의 독재치하에서도 살아남은 반술라파(민중파)가 아니라, 친술라파(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반술라파는 술라의 탄압으로 거의 제거되거나 국내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피두스의 반란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알프스 서쪽의 갈리아, 즉 남프랑스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레피두스는 집정관이었던 지난해에 제출했다가 민회에서 부결된 법안을 군사력으로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내용은 술라에 숙청된 희생자들을 불러들이고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며 '곡물법'을 부활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반술라파에 서서 술라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죄로 술라에게 토지와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이 레피두스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또다시 이탈리아 안에서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당장 ‘공화국 방위를 위한 원로원 권고’를 가결했다.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지방(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벌어진 양군의 충돌은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끝났다. 집정관 카툴루스한테서 실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의 속공전법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패배한 레피두스는 사르데냐섬으로 도망쳤지만, 얼마 후 그곳에서 병사했다. 레피두스의 잔당들은 에스파냐로 가서 세르토리우스에게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절대 지휘권’


레피두스의 잔당이 합류하여 에스파냐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된 원로원은 술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메텔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세르토리우스가 구사하는 게릴라 전법에 휘둘려, 에스파냐에서의 전황은 방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원로원도 증원군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자격 연령이 39세인 법무관 이상의 관직 경험자들 중에서 ‘절대 지휘권’을 주어 내보낼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을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때 29세인 폼페이우스가 자진해서 나섰다. 원로원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술라 체제’를 계속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상례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특례를 인정할 것인가. 연공서열이냐 실력주의냐의 선택이기도 했다. 대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은 촉박했다.


술라가 살아 있을 때는 얌전했던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가 다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원로원으로서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여유가 없어 폼페이우스에게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 직책과 함께 ‘절대 지휘권’을 주어 세르토리우스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술라 체제’ 붕괴의 첫걸음인 셈이다.

[폼페이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세르토리우스 전쟁


속주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란은 ‘세르토리우스 전쟁’이라고 불렸는데, 기원전 80년부터 기원전 72년까지 8년 동안 에스파냐 땅에 로마군을 붙잡아둔 이 전쟁은, 말하자면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사이의 항쟁이 장소를 에스파냐로 옮겨 벌어진 연장전이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평민 출신이다. 출생지는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 지방이다. 기원전 83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는 당연히 ‘민중파’를 기치로 내건 반술라파 쪽에서 싸웠다. 하지만 술라의 승리와 함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 이탈리아에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그곳에 잠시 몸을 숨긴 뒤,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오늘날의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로 갔다. 그러고는 당장에 4,7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조직했다. 이 병력을 이끌고 ‘먼 에스파냐’(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라고 불린 에스파냐 서부의 속주 총독과 싸워서 이겼다.


이 승리 덕분에, 그해 말에는 그를 따르는 병사가 8천 명으로 늘어났다. 세르토리우스가 43세 되던 해 가을이다.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한쪽 눈마저 잃어버린 세르토리우스를 에스파냐인들은 ‘제2의 한니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르토리우스와 말꼬리 출처 본문]
세르토리우스의 유명한 일화로, 군대를 조직하는 동안 세르토리우스의 지휘 하에 있는 원주민들은 로마 군단과 정면으로 맞서고 싶어했는데, 그는 두 마리의 말을 앞으로 데려와서 노인에게 강한 말의 꼬리에서 털을 하나하나 뽑으라고 명령했고, 강한 청년에게 약한 말의 꼬리를 한꺼번에 잡아당기라고 명령했다. 노인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지만 청년은 실패했다. 그러자 세르토리우스는 로마 군대가 말 꼬리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조각조각 공격하면 패배할 수 있지만 한꺼번에 모두 잡히면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술라는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를 파견했다. 기원전 79년, 반란군과 토벌군 사이에 벌어진 첫 전투는 세르토리우스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세르토리우스는 전술을 바꾸었다. 그 후로는 철저한 게릴라 전법이 그의 전술이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진군


30세의 총사령관은 만사 제쳐놓고 전선으로 달려가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보급로를 확보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이탈리아에서 남프랑스를 거쳐 에스파냐에 이르는 가도는 기원전 188년에 도미티아 가도가 이미 개통되어 있었지만 이 길은 거의 내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산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제안한 새 길의 경로는, 오늘날의 토리노에서 수사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알프스를 넘고, 갈리아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오늘날의 리옹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론강과 만나는 길이다.


여기서 론강을 따라 남하하여 마르세유만에 이르면 도미티아 가도와 만난다. 이 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나르본까지 가면, 거기서 피레네산맥까지는 10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만 남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보통이라면 두 달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이 거리를 1년이나 걸려서 돌파했다. 길을 뚫고, 그것을 포장하고, 알프스 산중에도 경비를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피레네산맥 남쪽에서 세르토리우스가 기세를 올리는 것을 보고 동요하기 시작한 남프랑스의 갈리아인을 로마의 속주민으로 재편성하면서 갔기 때문이다.

[도미티아 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에스파냐 전선 참전


이런 이유로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 전선에 참가한 것은 실질적으로는 기원전 75년 봄이었다. 이때까지 에스파냐 전선을 맡고 있던 메텔루스 피우스는 ‘피우스’(자비로운 사람)라는 존칭이 붙을 만큼 인격자였기 때문에, 새로 투입된 젊은 장군과의 사이에 이런 경우 흔히 일어나기 쉬운 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노장과 젊은 장군은 양쪽으로 나뉘어 세르토리우스를 포위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그래도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세르토리우스는 끈질겼다. 게다가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난민들은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래서 첫해는 로마 쪽이 과감하게 공세를 폈는데도 불구하고 조기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전쟁은 궁지에 몰린 세르토리우스 군대가 내분을 일으켜 주색에 빠진 총사령관 세르토리우스를 부장인 페르페르나(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가 암살함으로써 마침내 종결되었다.


원로원은 그 소식을 받고 기뻐했다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1년 전인 기원전 73년부터 로마의 안마당인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상 ‘스파르타쿠스 반란’으로 유명한 검투사들의 봉기가 바로 그것이다.


스파르타쿠스 반란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가 교차하는 도시 카푸아는 민영 검투사 양성소가 집중해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여기서는 노예를 투사로 양성한 다음, 로마나 그밖의 도시에서 검투시합이 열릴 때마다 빌려주었다. 키케로의 친구이며 역시 당대에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던 아티쿠스도 카푸아에서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 출처 구글 지도]

카푸아에 있던 한 양성소에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의 검투사가 있었다. 그는 남쪽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에 접해 있고 동쪽은 흑해와 면해 있는 트라키아 출신 노예였다. 이 사나이를 지도자로 한 검투사 74명기원전 73년 양성소에서 집단 탈주한 것이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시작이다.


그들은 양성소에 있던 무기를 가지고 나와, 폼페이 배후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도망쳤다. 베수비오산중에 틀어박힌 검투사들의 우두머리는 트라키아 출신인 스파르타쿠스였지만, 부두목은 갈리아 출신인 크릭수스였다. 탈주에 가담한 검투사들 중에는 게르만족 출신이 많았다.


로마 정부는 이들의 반란을 처음에는 가볍게 보았다. 3천 명도 안되는 토벌대를 보냈지만,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검투사들은 이들을 간단히 무찔러버렸다. 이 소식은 주변 일대에 퍼졌다. 베수비오산 남쪽의 캄파니아 지방에는 대농장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던 노예들이 베수비오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수비오산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정부도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처하여 법무관 휘하의 2개 군단을 토벌대로 보냈다. 그런데 이 토벌대도 스파르타쿠스 일당에게 패하고 말았다. 로마군에 대한 두 차례 승리로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에게 가세한 자들 중에는 농장에서 탈주한 노예들만이 아니라,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나날의 양식을 얻을 수밖에 없는 빈민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세력은 날로 불어나, 이듬해인 기원전 72년 봄에는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가 양분하여 지휘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어 있었다. 총병력은 무려 7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생각은 로마와 싸워서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알프스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지만, 크릭수스는 물산이 풍부한 이탈리아 남부를 약탈하는 데 만족하고 있었던 점이 문제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졌다.


기원전 72년의 집정관이 둘 다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두 집정관은 각각 2개 군단 1만 5천 명씩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및 크릭수스와 개별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크릭수스에 대해서는 가르가노산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막다른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 크릭수스는 전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추격을 교묘히 따돌리면서, 동지 4만 명을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이탈리아반도를 북상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집정관 두 명이 이끄는 4개 군단을 상대하면서 북상을 계속하여, 루비콘강 근처에서 갈리아 총독의 지휘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고 있는 군대와 만나자 이것도 격파해버렸다. 로마로서는 망신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스파르타쿠스로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을 의미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 전투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갑자기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이 변했다. 얼마든지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는데, 느닷없이 발길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물산이 풍부한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는 게 낫다는 부하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4만 명에 달하는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쪽 끝에 도착했으나 결국 메시나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가 이끄는 8개 군단 5만 병력이 배수진을 치고 노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특기할 만한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여덟 살 아래인 폼페이우스에게 강한 경쟁심과 초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스파르타쿠스가 4만 명에 달하는 병력에 자신감을 가졌는지, 아니면 로마군을 얕잡아보았는지, 제 발로 험한 산악지대에서 평지로 내려왔다. 일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과 협정을 맺고, 그들이 브린디시에 보내주기로 약속된 선단을 이용하여 소아시아로 달아날 작정이었다고 한다.


노예군과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은 스파르타쿠스의 완패로 끝났다. 대부분이 전사했고, 산을 이룬 시체들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끝내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6천여 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오랜 고통을 겪은 끝에 죽었다.


당시 십자가형은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했을 때 가해지는 가장 엄한 처벌이었다. 크라수스의 명령에 따라 아피아 가도 연변에 줄지어 세워진 십자가는 수십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크라수스가 8개 군단을 맡은 뒤 6개월 만에 이룩한 전과였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반란군들 출처 구글 이미지]

술라 체제의 문제점


술라가 회복하려고 애쓴 '원로원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면, 한 개인의 힘을 돌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선에 나가 있는 총사령관을 1년마다 교체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외부 상황은 전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구르타 전쟁', 게르만족의 대거 침입, '세르토리우스 전쟁', 폰투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 모두 총사령관을 1년마다 교체하기에는 너무 피해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그로 인해 원로원이 주도하는 로마 고유의 공화정 체제를 지켜내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지배층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령관들이 외지에 발목이 잡히게 되면 휘하 병사들도 거기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장병이 한 덩어리가 되지 않으면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수족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또한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강화하고 싶은 나머지, 그 반대세력이 되기 쉬운 민회와 그 민회의 권력을 상징하는 호민관의 약체화를 강행한 '술라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평민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술라가 호민관의 질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마련한 법률, 즉 호민관 경력자는 다른 관직에 출마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률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시민들의 불만을 결집할 만한 힘이 있는 유능한 호민관이 이 시기에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개혁


에스파냐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향방이 여전히 불투명한 기원전 75년, 이해의 집정관에는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Gaius Aurelius Cotta)가 선출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일족은 여자들까지도 그리스어를 해독할 줄 아는 학자 집안으로 유명했다. 로마 사회에서 학자라면 곧 법률가를 의미한다.


이 학자 출신의 집정관은 우선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한 뒤, 민회에 호민관 경력자한테도 다른 관직에 출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는 법안을 제출했고, 물론 민회는 이것을 가결했다. 바로 뒤이어 코타는 술라가 폐기한 '곡물법'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그는 온건파라서 곡물법의 혜택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코타는 또한 술라의 숙청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에 팽배해 있는 원한을 해소하기로 마음먹고 그 정책화를 실현했다. 먼저 추방자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경매에 부칠 때 구입 대금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술라의 법안을 폐기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수입을 에스파냐에서 진행 중인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또한 코타는 술라가 역적으로 규정한 자들의 명예 회복을 결정한 법안을 제출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명예 회복은 그들이 공직에 취임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법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당시 25세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술라 체제'는 이리하여 술라가 죽은 지 3년도 지나기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너지고 있는 '술라 체제'에 마지막 철퇴를 가한 것은 바로 술라파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술라의 막료들 가운데 가장 젊고 가장 재능있는 폼페이우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기원전 72년에 끝난 '세르토리우스 전쟁' 후 귀국길에 오른 폼페이우스는 루비콘강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군단을 해산하는 대신, 휘하 병력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수도 로마의 교외까지 와서 숙영하면서, 원로원에 다음과 같은 통첩을 보냈다.

1. 내 휘하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토지를 줄 것
2. 나에게 개선식 거행을 허가할 것
3. 내가 내년도(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출마하는 것을 인정할 것


기원전 71년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는 35세였다. 술라의 개혁에 따르면, 여러 경력을 거쳐야 42세에 비로소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에 출마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원로원 체제' 복구에 집념을 불태운 술라가 추진한 개혁의 알맹이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특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개선식을 거행할 만한 전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집정관이 될 자격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실력주의를 인정하면, 연공서열을 지켜야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로원 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원로원은 군대를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의 요구에 대해 처음 얼마 동안은 저항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술라파의 유력자로 간주되고 있던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를 설득하여 요구를 철회하도록 노력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전부터 폼페이우스의 화려한 활동을 시기하고 있던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를 설득하기는커녕, 자기도 집정관이 되고 싶다고 나섰다. 게다가 그 역시 해산해야 마땅한 8개 군단을 해산하기는커녕,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수도 근처까지 그의 8개 군단을 진군시켰다.


집정관 취임에 약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협정이 맺어졌다.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대한 물밑 교섭을 퍼서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 병사들로부터 신망이 높은 폼페이우스는 병사들의 표를 크라수스에게도 나누어 주기로 한 것이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출처 구글 이미지]

협정이 성립되자마자 두 사람은 군대를 해산했다. 군대의 압력이 사라졌는데도 원로원은 여전히 무력했다. 기원전 71년 말에 열린 민회에서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른 후보자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이듬해인 기원전 70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술라 체제'는 또다시 그 한 모퉁이가 허물어진 것이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법안


두 사람의 지지층은 좀 더 부유해지기를 원했고 정치적인 발언권도 좀더 늘리고 싶어했다.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도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 지지층을 붙잡아두어야 했다. 기원전 70년 이들 집정관 두 사람이 제안하여 성립시킨 법의 내용은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호민관의 권위와 권력의 완전한 부활

기원전 287년에 '호르텐시우스법'이 제정된 이후, 평민집회가 의결한 사항은 원로원의 승인이 없어도 정책화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술라는 이것을 고쳐서 원로원이 승인하지 않는 경우에는 평민집회의 의결이 있어도 정책화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 법을 폐기하자고 제안했고, 개정법은 가결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이 부활한 것이다.


배심원 제도의 개혁


기원전 70년,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동생이 다듬은 법안이 두 집정관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법률로 성립되었다. 이 법률은 배심원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 및 평민의 세 계급에 각각 3분의 1씩 배분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기원전 70년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각자 자기 지지층의 이익 대표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군인으로 대표되는 일반 시민의 이익 대표이고 크라수스는 눈부시게 부상하고 있는 경제계의 이익 대표라는 형태였다.


술라는 좋은 면에서든 나쁜 면에서든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때문에 미움은 받았지만 경멸은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원로원 체제'의 재활성화라는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다. '표'에 신경을 쓰면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편 시책도, 비록 그들에게는 표를 모으기 원한 인기 전략이었다 해도, 그 결과는 좋게 나타났다.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을 부활시킨 것은 술라 체제하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에게 긍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배심원 제도의 개혁은 속주민에게 로마법이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가이우스 베레스 재판


속주민들에게는 로마에서 파견되는 총독의 통치에 불만이 있으면 고발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다. 그해 봄, 총독 임기를 마친 가이우스 베레스가 임지인 시칠리아에서 귀국했다. 총독 시절에 그의 악정은 수도 로마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시칠리아 속주민들은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베레스를 고발했다.


피고 측 변호인은 이듬해인 기원전 69년의 집정관에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던 호르텐시우스가 맡았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는 당시 로마에서는 최고의 변호사로 평판이 높았다. 원고 측 변호인을 맡은 사람은 그해 36세인 키케로였다.

[호르텐시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70년의 법정 배심원석은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과 평민층이 각각 3분의 1씩 차지하고 있었다. 결과는 속주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소식은 로마의 모든 속주에 긴급 뉴스로 전해졌다. 피고 베레스는 총독 시절에 모은 재산을 모두 반환했을 뿐 아니라, 자진 망명함으로써 겨우 감옥생활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원전 70년은 '술라 체제'의 막이 닫히는 해가 되었다. 술라가 죽은 지 불과 8년 만에 그가 쌓아올린 체제는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외에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라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선견지명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루쿨루스의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폼페이우스는 ‘술라 체제’를 붕괴시키면서까지 집정관이 되었지만, 1년의 임기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눌러앉을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술라의 결정에 충실했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제일인자라고 자타가 인정했다. 그런 인물에게 걸맞은 속주는 기원전 69년 시점에서는 소아시아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리엔트에는 폼페이우스의 선배격인 루쿨루스가 이미 기원전 73년부터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술라가 정한 법을 충실히 지켜서 집정관의 자격 연령인 42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정관에 출마했다. 기원전 74년에야 비로소 루쿨루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73년, 그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속주 킬리키아(소아시아 남동부) 총독에 취임한다. 그리고 그대로 7년 동안이나 로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루쿨루스는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기원전 73년이라는 해도 로마에는 힘든 해였다. 에스파냐에서는 메텔루스 피우스만으로는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아서 폼페이우스까지 파견했지만,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향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안마당인 이탈리아에서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미트라다테스가 아니었다. 보병 12만 명과 기병 1만 6천 명, 말 네 필이 끌고 두 바퀴에 커다란 낫을 장착한 전차 100대를 이끌고 이웃 나라 비티니아로 쳐들어갔다. 비티니아 총독으로 나와 있던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지휘한 첫 전투는 폰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에도 루쿨루스가 도착한 뒤에는 전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루쿨루스는 폰투스군을 혼자 떠맡게 되었지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은 보병 3만 명과 기병 2,500명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이겼으니까, 장군으로서 루쿨루스의 뛰어난 능력이 증명된 셈이다. 게다가 군대를 재편성하여 다시금 공세로 나온 미트라다테스에게 또다시 이겼다.


두 번이나 루쿨루스에게 패한 미트라다테스는 기원전 70년이 되자 전략을 바꾸었다.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와 공동전선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쳐들어가자, 총병력 12만 5천 명인 아르메니아군에게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3천 명밖에 없는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싸웠다 하면 이기는 상승(常勝) 장군 루쿨루스는 소아시아에서 더욱 동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피해까지 이르렀다. 군대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유럽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로마의 공인으로서는 물론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루쿨루스는 미트라다테스의 숨통을 끊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더 이상의 종군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까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루쿨루스에게는 불운의 시작이었다. 7년이나 걸린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도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끝나려 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 작전


한편 로마에서는 39세가 된 폼페이우스가 편안하고 화려한 수도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다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는 소아시아 동남부의 킬리키아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지중해의 해적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미트라다테스왕이었다. 로마가 오리엔트로 보내는 병력이나 무기를 실은 배가 잇따라 해적선의 습격을 받으면 로마의 움직임이 둔해질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였던 코라카이시움(터키 코라케시온) 해안 /위키피디아]

로마 선박만이 아니라 우방국 선박도 습격당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해적들은 이탈리아반도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제 속주에 사람이나 무기를 보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지중해의 물자 유통은 정체되고, 해외 속주로부터 로마로 수입되는 곡물 수송도 큰 타격을 받았다.


기원전 67년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민회에서 그해의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해적 소탕작전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출했다.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제안은 압도적인 다수로 민회에서 가결되었다.


1. 중무장 보병 12만 명과 기병 5천 명으로 구성된 20개 군단을 오로지 이 작전에만 투입한다.
2. 군선 500척을 투입한다.
3. 총사령관은 폼페이우수를 선임하고 임무 수행 기간으로 3년을 주며 그동안 지중해 전역과 해안에서 80킬로미터 들어간 내륙까지 '절대 지휘권'을 가진다.
4. 이 작전에 필요한 자금으로 1억 4,400만 세르텔티아를 지출한다.(*당시 로마 국가예산은 2억 세르텔티아 정도)


그러자 로마의 식량 시장에서는 급등하고 있던 곡물 가격이 폭락했다.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작전은 후세의 전략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전략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걸작이었다.


먼저 지중해 서부의 해적을 장악하는데 40일, 전선을 지중해 동부로 옮기고 나서 해적들의 본거지인 킬리키아를 함락할 때까지 49일이 걸렸다. 폼페이우스는 3년의 기간을 부여받고 지중해 전역에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는 데 불과 89일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기원전 67년인 그해 여름에는 벌써 지중해 항해가 완전히 안전해졌고, 이탈리아로 수입되는 곡물도 종래의 양으로 되돌아갔다.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명성이 크게 높아진 것은 당연하지만, 해적에게 신전을 습격당하고 도시까지 약탈당해 절망해 있던 그리스인들은 폼페이우스를 신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찬양했다.


루쿨루스의 귀국


로마에서는 가비니우스가 또다시 민회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오리엔트 전선의 최고 책임자인 루쿨루스를 해임하고, 그 대신 폼페이우스를 그 자리에 선출한다. 선출될 경우,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절대 지휘권’을 필요한 시기까지 연장하고, 오리엔트 분쟁의 원인인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토벌을 그에게 일임한다.


찬성한 것은 이번에도 역시 키케로와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민회는 35개 선거구가 모두 찬성표를 던지는 형태로 가비니우스의 제안을 가결했다. 원로원은 이제 고립되었고 무력했다.


폼페이우스에게 계속 당하기만 하던 원로원은 루쿨루스의 귀국을 기꺼이 환영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에 대한 권력 집중을 걱정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원로원파’라고 불러도 좋은 당파가 결성되고 있었다. 그해 40세였던 키케로와 29세인 카토(소(小)카토)가 이 당파의 적극적인 일원이었다.


하지만 루쿨루스는 국정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그와 반비례하여 사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리엔트에서 가지고 돌아온 그리스의 공예품을 진열하기 위해 각지에 호화저택을 세웠다. 로마에, 나폴리 근교의 바닷가에, 이탈리아 내륙의 숲으로 둘러싸인 산야에도.

[루쿨루스의 호화저택 출처 구글 이미지]

루쿨루스의 이름이 후세에도 쓰이는 대명사가 된 것은 그가 실천한 미식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서구에서는 호화로운 미식을 ‘루쿨루스식(式)’이라고 부른다. 철저히 사생활을 즐기면서 10년을 보낸 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로마는 이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시대가 되어 있었다.


루쿨루스한테서 오리엔트 전선의 총지휘권을 넘겨받았을 당시, 폼페이우스가 갖고 있던 전력은 10개 군단 6만여 명의 육상 병력과 270척의 함대로 이루어진 해군이었다. 루쿨루스가 활용할 수 있었던 전력과 비교하면 두 배가 된다.


폼페이우스의 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기원전 66년 여름, 40세를 맞이한 폼페이우스의 오리엔트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폰투스 왕국에는 아르메니아에 망명해 있던 미트라다테스 왕이 다시 돌아와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빨리 공세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트라다테스가 병력 3만 3천 명을 급히 편성하여 맞섰지만, 폼페이우스는 폰투스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말았다.


미트라다테스가 로마군에 연패를 당하고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자신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와 공동전선을 확립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폰투스 왕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왕 아르사케스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파르티아·아르메니아·폰투스라는 오리엔트의 3대 강국이 단결하면, 로마도 지중해를 ‘우리 바다’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이제 방어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는 미트라다테스를 버리고, 공세로 나오기 시작한 로마와 동맹을 맺는 쪽을 택했다.


궁지에 몰린 것은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였다. 미트라다테스가 로마에 반항하는 이유는 로마의 패권에 맞서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세력 확장에 있었다. 티그라네스는 강화 및 동맹 체결을 위해 자신이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폼페이우스에게 전해왔다.


그리고 왕은 폼페이우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미트라다테스를 사로잡거나 죽인 자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온 나라에 공포했다. 아르메니아에도 파르티아에도 망명할 수 없게 된 미트라다테스는 66세의 몸으로 얼마 안 남은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카프카스산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와 티그라네스 연합군에게 쫓겨난 카파도키아 왕을 왕위에 복귀시킨 뒤에도, 북쪽의 카프카스산맥으로 도망친 미트라다테스는 추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 미트라다테스 따위는 문제삼지 않는다는 듯 휘하 병력을 동쪽과 남쪽의 두 방향으로 출동시켰다.


시리아와 예루살렘 평정


한편, 남쪽으로 출동한 폼페이우스의 별동대는 아르메니아군의 침략을 받아 황폐해진 시리아로 들어갔다. 거기서 파르티아에 대한 시위를 끝내고 합류할 예정인 폼페이우스를 기다렸다. 물론 그냥 기다린 것은 아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도 이제는 이름뿐,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 시리아를 군사적으로 제패하면서 기다린 것이다.

[멸망 직전 시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폼페이우스는 비로소 전체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로 갔다. 안티오키아를 지나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그는 이제 이름뿐인 셀레우코스 왕조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이런 지방과 유프라테스강의 중간지대에 사는 베두인족을 공격하여 쳐부순 뒤,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파르티아 왕국과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셀레우코스 제국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군의 다음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곧 성문을 열었지만, 신전 지역에 틀어박혀 저항하는 자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석 달의 공방전이 필요했다. 이 와중에 로마인과 일신교를 믿는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 후 유대는 시리아 총독의 통치를 받는 로마의 반(半)속주가 되었다.


이리하여 지중해의 파도가 밀려오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방은 키프로스섬을 포함하여 로마의 패권하에 통합되었다. 이 무렵 고립무원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선택한 미트라다테스의 유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져 왔다. 그것을 보낸 사람은 아들 파르케나스였다.


기원전 63년에 오리엔트를 평정했을 당시 폼페이우스는 아직 43세에 불과했다. 나이로 보아도 충분히 다음 위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정치력도, 군사력도, 대중의 지지도 모두 갖추고 있었다.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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