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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04. 2024

로마인 이야기 5권 (2)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 국가 개조와 카이사르 암살,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국가 개조


원로원 공화정에 대한 술라, 키케로와 카이사르 비교


로마의 혼미는 개별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정도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그라쿠스 형제 이후 몇 사람은 깨닫게 된다. 이들은 로마가 오래전에 채택한 공화정 자체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 혼미상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술라와 키케로와 카이사르 세 사람이었다.

[술라, 키케로, 카이사르 출처 구글 이미지, 본문]

술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체제 내 개혁을 단행했다. 술라보다 한 세대 아래인 키케로는 술라가 단행한 반대파 숙청과 이를 통한 통치자 계급의 강화에 반대했다. 그러나 체제 자체를 뜯어고치자는 카이사르의 생각에도 동시대인인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키케로는 그것을 언론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키케로는 출세의 정점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그러나 현실의 로마에서는 술라가 단행한 체제 내 개혁도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고, 공인의 덕을 향상시키자는 키케로의 주창도 결과적으로는 전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54세를 맞이한 카이사르는 우선 그가 수립하고자 하는 새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를 내걸었다. 개선식 때 배포된 기념 은화의 한쪽 면에는 ‘클레멘티아’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카이사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술라와는 다르다”고 공언했다.

[개선식 기념 은화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인의 반응은 한마디로 안도감이었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데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토처럼 로마인이 같은 로마인을 관용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공화정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소수나마 있었다.


달력 개정


로마인이 사용하던 달력은 기원전 7세기에 제2대 왕 누마가 정비한 태음력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1년은 달이 차고 이우는 데 따라 열두 달로 나뉘고, 1년의 날수는 355일이 된다. 남는 날수는 몇 년마다 한 달을 늘리는 방법으로 조정해왔지만 그 차이는 계속 커져갔다.


카이사르는 정확한 달력만 만들면 ‘로마 세계’의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질 테고, 그에 따라 생활 리듬도 어디서나 같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로마 세계는 로마의 군사적 패권이 미칠 뿐 아니라, 문화는 다양해도 문명은 공통이어야 한다. 나날의 생활을 재는 기구인 달력을 공유하는 것은 문명 통합의 첫걸음이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알게 된 이집트인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들이 카이사르의 달력을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카이사르의 초빙을 받고 로마에서 그 작업에 착수한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했다. 따라서 365일이 1년이고, 이것은 다시 열두 달로 나뉜다.


1년마다 생겨나는 6시간의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2월에 하루를 끼워넣어 청산하므로 그해의 2월은 29일이 된다. 이리하여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달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렀고, 3월부터 시작하던 월을 1월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이듬해인 기원전 45년부터 시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율리우스력’은 서기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다시 개량할 때까지 1,627년 동안 지중해 세계와 유럽 및 중근동에서 사용되었다. 개량한 이유는 16세기 후반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일 6시간이 아니라 365일 5시간 48분 46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이민족에게 ‘율리우스력’을 채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율리우스력’을 이른바 ‘국제 달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은 나름대로 익숙한 옛 달력을 계속 사용했다. 갈리아인들은 ‘율리우스력’이 제정된 뒤에도 오랫동안 자신들의 태음력을 사용했지만 ‘율리우스력’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통화 개혁


당시 화폐도 병용되었지만 기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 화폐니까, 로마 세계 전체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개정된 화폐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국립조폐소를 신설하여 지금까지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권을 넘겨주고, 금화와 은화 및 동화를 주조하는 업무를 체계화했다.


로마에서 기념 화폐만이 아니라 보통 화폐에도 생존인물─요컨대 카이사르 자신─의 옆얼굴을 새기게 한 것은 카이사르가 처음이다. 몇몇 속주와 아테네 같은 자치도시를 비롯하여 조폐권을 인정받고 있는 지방에서는 그곳에서 주조한 화폐가 계속 통용되었다. 따라서 환전상이 번창했을 게 분명하다.


[카이사르 화폐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어와 라틴어 병용


병용은 언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광범위하게 채택된 언어가 두 개 있었는데, 언어로서 완성도가 높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였다. 카이사르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에 그리스어 책과 라틴어 책을 함께 갖추어놓으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리스어권에서는 로마 중앙정부에서 나온 공고도 그리스어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통치체제와 법률과 군사, 도로와 상하수도 및 항만설비로 대표되는 사회간접자본 분야에서는 로마식을 관철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확실한 중앙집권주의자였다. 지방분권과 중앙집권이 균형있게 병용되는 사회야말로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제국이었다. 카이사르는 코스모폴리스, 즉 세계국가 창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대한 사업도 잠시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을 등에 업은 반카이사르파 세력이 에스파냐 땅에서 다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다 회전


폼페이우스의 맏아들 그나이우스와 둘째 아들 섹스투스, 그리고 타프수스 회전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라비에누스와 바로 등의 봉기가 성공한 것은 에스파냐 원주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군은 8만 병력을 갖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직접 나서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6년 11월 5일, 카이사르는 8개 군단과 8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로마를 출발하여 에스파냐로 진격했다. 8개 군단 중에는 갈리아 전쟁 때부터 그를 따른 베테랑 군단인 5군단, 6군단, 10군단이 있었고, 나머지는 신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단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45년 3월 17일에 벌어진 문다 회전으로 폼페이우스파의 마지막 저항은 분쇄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병사만으로 이루어진 제5군단과 파르살로스 회전 이후 이집트에까지 데려간 제6군단, 그리고 이제 카이사르가 가는 곳은 어디나 따라다닌다는 말까지 듣게 된 제10군단을 에스파냐로 데려갔다.


대격전이 된 이 싸움에서 카이사르 쪽은 1천 명, 폼페이우스 쪽은 3만 3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상처를 입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폼페이우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만이 멀리 대서양 연안에 있는 산지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문다 회전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46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에도 독재관 자리에 있으면서 집정관까지 겸임했다. 기원전 46년도 동료 집정관은 레피두스였고, 기원전 45년도 동료 집정관은 파비우스였다.


'제국'으로 가는 길


이 무렵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최후의 전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 목적은 파르티아 왕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유프라테스강의 방어선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파르티아 원정 계획에는 파르티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나우강 남쪽 연안 일대를 평정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앞으로의 로마에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보다 제정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광대한 영토를 기능적으로 통치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효율성이 요구된다. 원로원 의원이 600명이나 되면, 의견을 통일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고 정책을 일체화하기도 어려웠다.


로마인은 로마식 도로망을 건설하는 따위의 하드웨어 면에서는 그 필요성을 당장 이해했다. 이익을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국가체제를 개조하는 소프트웨어 면에서도 그것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 목적은 물론 ‘육체’에 맞게 ‘내장’을 충실하게 하는 데 있었다.


시민권 문제


카이사르는 루비콘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북이탈리아 속주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리하여 ‘키살피나’(알프스 이쪽)에 이주한 지 오래인 갈리아인도 로마 시민이 되었다.


갈리아인 집단촌에 불과했던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이나 타우리노룸(오늘날의 토리노)에도 로마인 도시와 같은 도시 계획이 시작되었다. 루비콘강이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강도 이제 더 이상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은 아니었다.

[AD 3세기경 메디올라눔과 성 로렌초 성당 앞 로마 기둥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시칠리아에는 ‘라틴 시민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라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선거로 국정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뿐, 그밖의 점에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라틴 시민’은 ‘로마 시민’의 예비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추가로 라틴 시민권을 부여한 지방은 남프랑스 속주이다. 남프랑스 속주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한 것도 카이사르를 후방에서 지원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러나 같은 갈리아인인데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주민에게 격이 다른 시민권을 부여한 것은 두 속주가 ‘로마화’한 정도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제대한 부하 병사들의 정착지를 종래와는 달리 본국이 아니라 속주에 분산하고,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인이나 에스파냐인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어 개방노선을 확립했다. 이리하여 속주에 사는 로마 시민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정치 개혁


원로원 :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리면서 대부분 속주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와 그의 군단의 백인대장에게 의석을 새로 주었다. 특히 카이사르는 얼마 전에 정복한 중북부 갈리아의 부족장들한테도 원로원 의석을 제공했는데, 이런 조치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로마인조차도 놀라게 했다.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원로원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기관이고,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형태의 계엄령을 선포할 권한 따위는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될 기관이었다. 원로원은 행정관들을 모아두는 조직이고, 독재관인 카이사르의 정치를 보조하는 기관이다.


그래도 원로원 의원의 사회적 지위는 예전과 다름없이 높았고, 카이사르가 선정한 인물을 승인하는 형태로나마 속주 총독 임명권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행정관은 대부분 원로원 의원이었다.


민회 : 이 무렵 로마 시민권 소유자, 즉 유권자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서 있었다. 수도 로마에 유권자들을 모아놓고 민회를 개최하는 의의는 이탈리아반도에 사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기원전 91년에, 즉 반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형식적 기관으로 떨어진 민회일망정 폐지하지는 않았다. 민회는 공화정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상징’은 독재관 카이사르가 결정한 일을 추인하는 기관으로 남게 된다. 민회에서 선출하는 정부 요직도 카이사르가 선정한 인물을 추인하는 데 불과했지만, 선거로 추인하는 제도만은 남았다.


호민관 :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유명무실해진 것은 호민관이다. 그는 원로원 계급을 대표하여 통치자 계급의 정점에 서는 ‘프린켑스’(원로원의 제일인자)는 피통치자 계급의 권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책무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카이사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새 질서는 원로원에 기반을 둔 ‘체제’와 호민관을 기수로 하는 ‘반체제’로 나뉘지 않고, 이 두 파벌의 통합에서 생겨나는 ‘새 질서’였다. 카이사르는 귀족 출신이라 호민관이 될 수 없었지만 황제와 호민관을 겸임한 옥타비아누스, 나중의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이런 생각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종신 독재관 : 카이사르가 ‘독재관’(딕타토르)이 된 것은 이 관직만이 로마 국법에 유일하게 인정되어 있는 단독 행정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민관이 가진 최대의 무기인 ‘거부권’도 독재관한테만은 행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위기관리체제였기 때문이지만, 카이사르는 이 특례제도를 상설제도로 바꾸려 했다.


카이사르에게 ‘정치’는 새 질서를 수립하여 통치능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4년 2월, 원로원과 민회는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딕타토르 페르페투아)에 임명했다. 제정으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로마 화폐가 로마 제국 전체의 기축 통화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금화와 은화의 환산가치를 고정했다. 금화 한 닢의 가치는 은화 열두 닢의 가치에 해당한다는 고정가치제가 시행된 것이다. 금과 은의 함유량을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은 국립조폐소 운영을 맡은 ‘조폐 3인 위원회’의 역할이었다.


빚더미 위에 앉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카이사르는 빚을 나쁘게 생각지는 않았다. 나쁘게 생각하기는커녕, 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 것 같다. 부채 문제에서 공정을 기해야 할 것은 담보물의 가치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이자율을 규제하는 것이라는 게 카이사르의 생각이었다.


행정 개혁


카이사르는 최고위 행정직인 집정관을 해마다 두 명씩 선출하는 제도는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두 명 가운데 하나는 독재관인 카이사르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집정관이라 해도 실질적으로는 독재관 카이사르를 보필하는 부독재관 같은 존재로 바뀌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다음가는 요직인 법무관(프라이토르)의 정원을 속주가 늘어난 관계로 8명에서 16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1년 임기는 그대로 두었다. 법무관은 1년 임기가 끝나면 전직 법무관(프로프라이토르)이 되어 전략단위인 2개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고 속주에 파견된다.


수도 로마의 ‘시장’이라 해도 좋은 안찰관(아이딜리스)도 4명에서 6명으로 정원을 늘렸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면에서 다른 도시를 뛰어넘는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로 변모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일종의 관선 지사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장관’(프라이펙투스)이 중앙에서 파견된다. 다만 지방장관은 지방의회와 함께 그 지방을 다스려야 한다. 지방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해방노예' 등용


카이사르가 일찍이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리베르투스)도 지방의회 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즉 ‘해방노예’를 행정 분야에 대거 등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카이사르는 공직에 종사하는 해방노예를 더 이상 ‘리베르투스’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포고했다.


카이사르가 로마 화폐를 ‘로마 세계’의 기축 통화로 만들기 위해 설치한 국립조폐소의 소장격인 ‘조폐 3인 위원회’의 초대 위원은 셋 다 평소부터 카이사르한테 경제통으로 인정받고 있던 카이사르 집안의 노예였다.


속주 통치


카이사르가 인정한 '동맹국'은 소아시아의 폰투스와 갈라티아, 그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갈릴레아라고 불린 유대, 이집트와 마우리타니아 등이다. 동맹국은 로마와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어서 로마가 전쟁을 치를 경우에는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로마에 직접세를 낼 의무는 없다.


다음은 로마 제국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던 속주인데, 카이사르는 속주를 18개로 나누었다. 그때까지 1개 속주였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와 아카이아 속주로 나뉘었다. 속주 재편성은 방위상의 이유만이 아니라 각 속주의 경제력도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갈리아는 여전히 1개 속주로 남아 있었다.

[로마 제국 영토의 확장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본국과 속주의 관계를 착취적 식민 통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속주는 행정상의 필요에서 생긴 행정구획에 불과했다. 속주에는 속주민만이 사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의 속주 이주를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장려했다. 로마 가도도 모든 속주를 망라하게 되었다.


속주 통치의 최고 책임자인 총독은 관선 지사와 비슷한 지방장관과는 달리, 속주 통치 이외에 방위 의무도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속주민에게는 안전보장을 위한 비용으로 여겨진 속주세가 부과되었지만, 어쨌든 군단 사령관인 속주 총독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제까지 시행된 ‘푸블리카누스’라는 민영 징세제를 폐지하고, 공영 징세기관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징세업에서는 입찰제의 폐해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납세자 명단도 공개하고 징세관의 재량권이 작용할 수 있는 소지를 되도록 줄여서 조세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통치나 군사나 장사를 위해 속주에 가거나, 속주에 이주하여 정착하는 로마인도 계속 늘어났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로마의 종교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고신 유피테르(Jupiter)와 그 아내 유노(Juno)와 미네르바(Minerva)를 로마의 주신(主神)으로 정하고, 속주에서도 이 신들의 축일은 휴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 출처 구글 이미지]

사법 개혁


로마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소권과 배심원이었다. 카이사르는 ‘셈프로니우스법’을 되살려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강력한 무기를 원로원한테서 빼앗았다. 이에 따라 로마 시민권 소유자라면 재판도 받지 않고 항소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사형당하는 일도 없어졌다.


카이사르는 배심원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정했다.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로마 시민이 그 자격 요건이었다. 당시 로마인의 경제력으로는 중산층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이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면 출신 계급은 묻지 않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로마법의 집대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로마법률도 ‘로마 세계’의 공통항으로 만들려 했으나 결국 로마법의 집대성을 미처 실현하지 못한 채 죽었다. 카이사르의 생각은 600년 뒤에야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으로 실현된다.


사회 개혁


복지정책 : 최고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초기에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민중파’의 이익 대표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복지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생계비가 보장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공짜로 밀을 배급받는 사람의 수를 32만 명에서 단번에 15만 명으로 줄였다. 또한 이 일만 담당하는 안찰관을 두 명 두기로 결정했다. 세대주의 소득과 가족수 등을 엄격히 조사하여 무상 배급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공정하게 심사하기 위해서였다.


실업대책과 식민정책 : 카이사르는 처음 집정관에 취임한 기원전 59년에 농지개혁이자 실업대책이기도 한 ‘농지법’을 그라쿠스 형제 이후 70년 만에 되살렸다. 또한 로마 군단은 실업 예비군을 흡수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실업자나 제대 군인에게 토지를 주어 이주시키는 곳을 여러 속주에 분산시켰다. 카이사르의 식민정책은 결코 로마 시민을 불모지에 갖다 버리는 ‘기민’(棄民) 정책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총애하고 신뢰한 고참병 군단의 식민지는 모두 남프랑스를 비롯한 속주에 분산되어 있다.


또한 카이사르는 로마가 멸망시키고 소금까지 뿌려서 불모지로 만들어버린 카르타고와 코린트를 멸망한 뒤 무려 100년 만에 부활시켰다. 카이사르가 이런 땅에 이주시킨 로마인은 세대주만 해도 8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식민정책만 보아도, 카이사르가 생각한 ‘로마 세계’나 ‘로마 제국’은 착착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에게해에 이를 수 있도록, 그리고 코린트의 중요성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지협에 운하를 파는 문제도 고려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착상한 토목공사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이 생각이 실현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조합대책 : 카이사르는, 호민관 클로디우스에 의해 평민계급의 권력의 온상이 되고, 그 때문에 정치조직화한 ‘조합(콜레기움)’을 과감하게 해산해버렸다. 그 대신 조합원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직능조합은 재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조합’들이 각자의 수호신을 자유롭게 받들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치안대책 : 카이사르 시대에 수도 로마의 인구는 여자와 어린이, 노예, 외국인까지 포함하여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로마에는 수도 경찰 같은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수도 경찰을 창설하였다. ‘세계의 수도’가 된 로마는 치안에서도 다른 도시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제국의 수도가 될 자격이 없다.


교통대책 : 100만 명 안팎의 인구가 집중해 있으면, 도심인 포로 로마노나 장이 서는 테베레강 일대는 몹시 혼잡해지는 게 당연하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수레의 정체도 심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시내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것은 기혼부인과 여사제뿐이었다. 짐수레는 해가 진 뒤부터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만 다닐 수 있다. 최고권력자인 카이사르도 시내에서는 걸어다닌다. 야간에만 짐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규제한 결과, 길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퀴 소리 때문에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청소문제 : 카이사르는 로마의 청소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공장소의 청소는 안찰관이 관장했지만, 그밖의 장소를 청소하는 것은 거기에 사는 주민의 의무가 되었다. 자기 집 주위는 스스로 청소하자는 것이다. 자신있게 말하건대, 고대 로마는 오늘날의 로마보다는 훨씬 깨끗했을 것이다.


사치금지법 : 카이사르는 도가 지나친 사치를 금지했다. 한 예를 들면, 생선장수 외에는 양어장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을 금지했다. 로마의 부유층 사이에서는 웬만한 수영장쯤 되는 커다란 양어장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유행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미식에는 무관심했다. 병사들과 한솥밥을 먹는 데 익숙해진 탓도 있다. 포도주도 취할 만큼 마시는 일은 전혀 없었다. 최고권력자가 된 뒤에도 카이사르는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음식 투정을 하면, 마음에 안 들면 안 먹으면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수도 재개발


무솔리니는 독일이 흉내낼 수 없는 무대장치에서 벌어지는 군사 퍼레이드를 히틀러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가 앞장선 로마 도심 재개발 구상은 한 줄기의 넓은 도로로 무참하게 분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에 이르는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가 뚫리게 되었다.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출처 구글 맵]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via dei fori imperiali)’, 직역하면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남쪽에는 카이사르의 입상, 북쪽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네르바, 티투스 등 카이사르의 재개발 구상을 이어받은 황제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다.


‘세계의 수도’가 된 로마의 공공생활은 신들을 모시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 황제들의 포룸,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의 재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카이사르의 포룸


‘포룸’(forum)-이탈리아어로는 ‘포로’(foro)-은 고대 로마인에게는 공공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했다. 포룸은 정치·행정·사법·종교·경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곳이다. 카이사르의 수도 재개발 구상은 이 혼연일체 방식을 더욱 명확히 한 것이다.


카이사르 이전의 신전들은 따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전 양식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55년부터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6년에 완성한 ‘카이사르의 포룸’은 좀 다르다.


카이사르 집안의 수호신인 베누스(비너스)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정면으로 하여, 그 좌우에는 회랑이 길게 뻗어 있다. 원기둥 행렬이 떠받치고 있는 회랑 안쪽에는 상점이 늘어서 있다. 상점이라 해도 생필품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기사계급’(경제인)의 오피스 같은 곳이다. 이것은 종교와 경제의 동거다.


여기에 ‘문화’와 ‘교육’이 추가된다. 한쪽 길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이 들어서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한때 폼페이우스파였던 바로가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을 수집하고 있었다. 또 한쪽에는 사설 학원 형식의 학교가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윗쪽이 포로 로마노, 아랫쪽이 임페리얼 포룸 출처 구글 이미지]
[임페리얼 포룸 출처 구글 이미지]

포로 로마노의 신전과 바실리카


포로 로마노에는 국고(國庫)로도 쓰이는 사투르누스 신전 외에 신전이 몇 개나 있다. 그리고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회당도 두 개 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세운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회당과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가 세우고 카이사르가 더 큰 규모로 재건한 ‘바실리카 율리아’ 회당이다.

[사트르누스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마르스 광장


카이사르의 수도 재개발 구상은 성벽 밖에 펼쳐져 있는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에도 미쳤다. 이 일대는 크게 굽이치는 테베레강에 감싸안겨 있는 넓은 평지다. 원래는 군대 집결장이자 연병장이었는데, 로마가 강대해짐에 따라 성벽 안에 수용할 수 없게 된 공공건물이 조금씩 이 일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 로마 출처 본문]

이 마르스 광장에 맨 처음 세워진 공공건물은 아마 ‘빌라 푸블리카’(공청)였을 것이다. 이것은 곡물창고이자 빈민들에게 밀을 배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테베레강 연안에는 대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기원전 221년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가 지어서 국가에 바친 로마 최초의 반원형 석조 극장이 완성되었다. 수용인원은 1만 2천 명. 폼페이우스는 이 극장 옆에 길이가 180미터, 너비가 135미터나 되는 대회랑도 건설했다. 회랑의 한쪽에서는 원로원 회의도 열 수 있을 정도였고, 물론 회랑에는 오피스 거리가 진출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개발한 지역 바로 북쪽에 ‘사이프타 율리아(Saepta Ivlia)’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민회 투표장 겸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규모는 길이가 300미터, 너비는 125미터나 되었다. 그밖에 카이사르는 테베레강 근처에 반원형 석조 극장을 건설할 계획도 세웠다.

[마르스 광장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이 과정에서 기원전 6세기부터 로마의 일곱 언덕을 둘러싸고 있던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했다. 이 성벽은 총길이가 8킬로미터에 이르렀는데, 이는 로마의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벽이 없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카이사르의 강한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교사와 의사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에서 ‘아르테스 리베랄레스’(교양과목)를 가르치는 교사와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인종도 피부색도 따지지 않는다. 민족과 종교의 차이도 문제삼지 않는다. 조건은 단 하나, 로마에서 교사나 의사로 일하는 것뿐이었다.


카이사르는 교육이나 의술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런 직접적인 이익만을 미끼로 해서는 낚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사에게는 의료설비를 충실하게 갖추어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제정 시대의 군단기지 병원은 이게 정말로 2천 년 전의 병원인가 하고 놀랄 만큼 훌륭한 설비와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한편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한테는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직장까지 제공했다. ‘카이사르의 포룸’ 안에 있는 국립도서관은 그 자체가 이미 연구소였고, 수많은 ‘에세드라’는 사설 학원을 열기 위한 구획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제책법


카이사르가 실행하거나 계획한 사업 가운데 평판이 나빠서 실현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제책법이었다. 고대의 서적은 파피루스 종이에 필사한 두루마리였다. 책을 제○장이 아니라 제○권이라고 하는 것도 그 흔적이다.


카이사르는 긴 두루마리를 일정한 길이로 절단하고 그것을 한 묶음으로 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다. 필요한 부분만 즉석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합리적이었던 카이사르가 생각할 법한 일이지만, 이것만은 로마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고안한 제책법은 무시되고 말았다.


그런데 고대 로마에 이어 역사의 주인공이 된 기독교, 특히 고대 서적의 필사에 열중한 중세 수도원이 이 제책법에 주목했다. 중세의 종이는 파피루스가 아니라 두껍고 뻣뻣한 양피지였기 때문에 제책법이 필요해서 카이사르의 제책법이 중세에 부활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특권


55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원로원과 민회가 안겨준 영예와 권위와 권력은, '종신 독재관' 취임과 집정관 겸임 외에도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 권리, 원로원 회의장에서 집정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앉을 수 있는 권리, 거부권과 신체불가침권, ‘조국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권리 등이었는데, 이러한 특권을 고려하면 사실상 제정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염두에 둔 제정, 즉 다민족의 통합국가를 다스리는 통치방식으로서의 제정은 동시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한번은 군중 속에서 카이사르를 ‘왕’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나온 적이 있었다. 거기에 대해 카이사르는 “나는 왕이 아니다. 그저 카이사르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반대파는 이것을 위선으로 받아들였다. 왕이 되고는 싶은데, 아직은 시기상조라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관용’은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대로 놓아둔 채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추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파르티아 원정 준비


기원전 44년으로 해가 바뀌자마자,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 발표했다.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원정 준비에 들어간 카이사르는 출발 날짜를 3월 18일로 결정했다. 파르티아 원정은 카이사르로서는 생전에 꼭 해두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파르티아군에 사로잡힌 로마 병사가 1만 명 있었다. 모두 파르티아 왕국의 북동쪽 끝에 있는 메르프(오늘날 투르크멘 공화국의 마리)로 끌려가 종신 병역을 강요당하고 있다. 9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생존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구출하는 것은 로마군의 의무였다.


카이사르는 이 원정 기간을 2년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앞으로 2년 동안 본국과 각 속주의 통치와 방어를 맡을 책임자를 선정해두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에게 이 원정은 원숙기의 후반을 장식하는 데 어울리는 일대 장거가 될 터였다.


카이사르는 원정을 떠나기 전 원로원 의원들에게, 카이사르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그들에게도 적이고, 그 적과 맞서서 카이사르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이 서약서에는 키케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도 서약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모두의 서약을 받은 뒤, 호위대를 해산했다.


소문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을 발표하고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에게 한 가지 소문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으러 가는 시빌라의 신탁 가운데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소문의 출처였다.


해마다 2월이면 로마에서는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는 경기대회가 따라다닌다. 그날 대회가 열린 대경기장에서는 카이사르도 참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그해 집정관이 된 안토니우스가 관중석 중앙에 앉아 있는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본뜬 관을 바쳤다.


안토니우스가 바치는 관을 물리친 카이사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당장 깨달았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 한쪽의 대리석 기둥에 새기는 ‘공식기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기게 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종신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왕의 권위를 받도록 요청했지만, 카이사르는 그것을 거절했다.”


제7장 '3월 15일'
기원전 44년 3월 15일~기원전 42년 10월


'3월 15일'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원로원 회의장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포룸’은 아직 마무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가 참석하는 원로원 회의는 대개 폼페이우스 극장 바로 동쪽에 있는 대회랑에서 열리곤 했다. 어쨌든 길이가 180미터에 너비가 135미터나 되는 대회랑이다.


3월 15일의 원로원 회의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다시 세워진 폼페이우스의 석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에서 열렸다. 포로 로마노의 최고제사장 관저에 살고 있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회랑으로 가려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날 관저에서 회의장으로 가는 카이사르를 수행한 사람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였다.


라틴어로 ‘Idus Martiae’라고 하든, 영어로 ‘The ides of March’라고 하든, 이탈리아어로 ‘Idi di marzo’라고 하든, ‘3월 15일’ 또는 ‘3·15’라고 쓰면, 서양 사람들은 이것이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서양사에서는 극적인 하루로 손꼽히는 날이다.


중차대한 파르티아 원정의 출발을 사흘 앞둔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의 원로원 회의는 아내 칼푸르니아가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정도의 이유로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회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 마지막 기회는 음모자들에게도 마지막 기회였다.

[카이사르를 붙잡는 칼푸르니아, 카이사르 옆이 데키우스 브루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9년 전에 당한 패배를 설욕해야 한다는 것은 로마인이라면 누구의 가슴에나 맺혀 있는 원망이었다. 이런 열망에 사로잡힌 의원들이 원정 출발을 사흘 앞둔 마지막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에게 공식으로 왕위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음모자 일당이 두려워하고 있는 점이었다.


무기를 지니고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도 무방비 상태로 출석할 터였다. 주름이 많은 토가 안쪽에 단검을 숨긴 암살자들이 염려한 것은 안토니우스의 체력뿐이었다. 키케로가 검투사 못지않다고 평가했을 만큼 안토니우스는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안토니우스를 대화로 유인하여 카이사르에게서 떼어놓기로 했다. 그 역할은 '트레보니우스'가 맡았다.


암살자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회의가 열리기 직전, 의원들이 오락가락하느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때를 골라서 결행한 것이다. 광란에 빠진 14명이 한 사람을 마구 찌른 결과, 카이사르가 입은 상처는 모두 23군데. 그중 가슴에 받은 두 번째 상처가 치명적이었다고 한다.


죽음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꼴사납게 자빠지지 않도록 토가 자락을 몸에 감으면서 쓰러졌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오랜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입상 발치였다고 한다. 다른 의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멍한 사이에 시작되어 끝난 한순간의 참극이었다.

[빈센조 카무니치 작, ‘카이사르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한 원로원 의원이 60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지만 확증은 없다. 그러나 암살을 실행한 14명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이들도 막상 큰일을 결행할 때에는 침착성을 잃었는지, 단검을 겨누고 카이사르에게 덤벼들다가 실수로 동지를 찔러버린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에게 용서받은 옛 폼페이우스파


1) 마르쿠스 브루투스: 아버지는 ‘마리우스파’에 속했고, 술라가 죽은 직후에 무력으로 민중파 정권을 수립하려 한 레피두스와 손잡고 싸우다가, 그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폼페이우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나이는 8세. 세르빌리아는 재혼도 하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일편단심을 바쳤다.


36세가 된 브루투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삼촌인 카토에게 동조하여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했다. 그리고 파르살로스 회전이 일어났다. 이때 브루투스는 포로로 잡혔지만,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은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명령해둔 덕택에 목숨을 건졌고 또 석방되었다.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에게 세르빌리아는 또다시 외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카이사르는 평생 애인의 부탁을 뿌리칠 사나이가 아니었다. 국가 공직을 하나도 경험하지 않은 브루투스가 전직 법무관이라는 직위를 받고 북이탈리아 속주 총독에 부임한 것은 기원전 46년,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브루투스는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뒤, 이제까지 함께 살던 아내와 이혼하고 아프리카에서 자결한 카토의 딸 포르키아와 재혼했다. 포르키아는 카이사르에 대한 반대로 일생을 불태운 카토의 딸일 뿐 아니라, 카이사르와 동료가 될 때마다 계속 당하기만 한 비불루스의 미망인이기도 했다.


브루투스는 당시 법무관이었는데, 항상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카이사르 암살도 처음부터 그가 주모자였던 것은 아니다. 매제인 카시우스가 진짜 주모자다. 하지만 브루투스가 주모자가 되었기 때문에 음모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많았으니까, 우두머리에 어울리는 무언가는 갖고 있었을 것이다.

[포르키아와 마르쿠스 브루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평생 애인의 아들이어서 정실 인사로 정계에 진출시키긴 했지만,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재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브루투스, 너마저!”의 브루투스는 이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데키우스 브루투스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2) 카시우스 롱기누스: ‘3·15’의 실질적인 주모자. 나이는 브루투스와 같지만 경력은 전혀 다르다. 카시우스는 30세 때인 기원전 54년 시작된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회계감사관으로 종군했다. ‘카레의 패전’으로 유명한 파르티아군과의 이 전투는 크라수스군의 궤멸로 끝났다. 그때 카시우스는 총사령관 크라수스를 버리고 기병 500명과 함께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도착하자, 카시우스는 휘하에 있던 군선과 함께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카이사르에게 협력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로 알려진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카시우스는, 같은 법무관이라도 브루투스는 수석 법무관에 임명되었는데, 자신은 본국 로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담당 법무관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주 불만이었다. 카시우스는 폼페이우스를 등진 뒤에는 오로지 카이사르한테 충성을 바쳤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신을 홀대하는 카이사르에 대한 원한이 활활 타올랐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외에 3) 리갈리우스, 4) 아킬라, 5) 루블리우스, 6) 나소, 7) 가이우스 카스카, 8) 푸블리우스 카스카, 그리고 카이사르 반대파의 선봉장으로 기원전 54년도 집정관이었던 9) 에노발부스의 아들도 음모에 가담했다. 이 아홉 사람을 역사가들은 ‘카이사르에게 용서받은 옛 폼페이우스파’로 분류하고 있다.


두려워한 카이사르파


10) 툴리우스 킴브로: 경력은 분명치 않지만, 카이사르의 추천으로 원로원에 들어간 카이사르 동조자.


11)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기원전 54년부터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갈리아 원정을 끝까지 치렀다. 내전이 일어난 뒤에도 카이사르 진영에 남아서, 마르세유 공방전 때는 육지 쪽 공격을 맡았다.


12) 데키우스 브루투스: 갈리아 원정 시절에 카이사르를 모신 참모들 중에서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이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군사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가 이 두 사람을 언급할 때는 ‘젊은 크라수스’나 ‘청년 브루투스’라고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재능을 인정하는 아랫사람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는 표현이다.


이 청년 장교의 재능을 높이 산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제1상속인이 상속을 사양한 경우의 두 번째 상속인으로 그를 지명했다. 그러나 ‘3·15’ 당시 마흔 살이었던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언장이 공개된 이후, 그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하여 줄곧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알게 된 로마 서민층의 분노는 마르쿠스 브루투스보다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집중되었다.


13) 술피키우스 갈바: 이 사람도 역시 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이었다. 하지만 군단장으로서의 재능은 별로였는지,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원로원 대책 임무를 갈바에게 맡겼다.


14)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기원전 55년부터 갈리아 원정에 참가한 군단장. 내전 시대에도 카이사르 밑에서 싸웠다. 무장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은 없다. 카이사르파이면서도 키케로의 제자를 자처했다.


이 다섯 사람은 ‘3·15’ 이후 2년 안에 모두 살해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고 말을 남기지도 않았는데, 연구자들의 추측으로는 카이사르에게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들이 카이사르 편에서 싸운 것은 로마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지 카이사르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다섯 사람을 ‘두려워한 카이사르파’로 분류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손을 카이사르의 피로 더럽혔을까. 이런 일은 권력자에게 중용되고 있던 사람이 어느 시기부터 소외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떻든 간에, 이 14명이 카이사르에게 칼을 들이댄 동기는 왕정 이행을 저지하고 종래의 공화정으로 돌아가자는 데 있었다.


암살 직후


무려 스물세 군데나 칼을 맞고 쓰러진 카이사르의 시신 앞에서는 아무도, 심지어는 안토니우스조차도 고인을 애도하는 말을 입 밖에 낼 여유가 없었다. 하나같이 달아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도, 카이사르파 의원들도 카이사르가 살해된 것을 알자마자 모두 도망쳐버렸다.


암살자들은 브루투스를 앞세워 밖으로 나왔다. “자유는 회복되었다!” “폭군은 죽었다!” 그들은 외치면서 밖으로 나왔지만, 거기에 응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앞서 달아난 의원들이 달려가면서 “카이사르가 살해됐다!”고 외쳐댔기 때문에, 시민들은 각자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당초 계획이 틀어지자, 암살자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갔다. 신전에 틀어박히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변고를 전해 들은 키케로가 캄피돌리오로 달려왔다. 키케로는 아직도 피묻은 단검을 손에 쥐고 있는 암살자들을 치하한 뒤, 당장 원로원을 소집하여 공화정으로 복귀할 것을 결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피테르 카피톨리노 신전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또 다른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제쳐놓고 법무관 브루투스가 회의를 소집하면 위법행위가 된다. 브루투스는 그 이유를 들며 키케로의 충고를 거부했다. 공화정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이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브루투스도 ‘루비콘’을 건너기는 했지만, 카이사르와는 달리 건넌 뒤에는 제자리걸음을 해버린 것이다.


한편 ‘폼페이우스 회랑’ 한쪽에 쓰러진 카이사르의 유해는 방치된 채였다. 그래도 오후 늦게, 평소에 주인에게 심취해 있던 노예 세 사람이 폼페이우스 회랑에 몰래 들어가 카이사르의 유해를 들고 나왔다. 그들이 유해를 운반한 곳은 포로 로마노에 있는 관저가 아니라 수부라에 있는 사저였다.


그러는 동안 3월 15일 밤이 되었다. 키케로가 노예를 보내 조사한 결과, 마르스 광장 일대에서 야영하고 있는 카이사르군 고참병들도 예상치 못한 변고에 망연자실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에 따라가고 싶어 하는 고참병들은 데려가기로 하고 마르스 광장 일대에서 야영하도록 했다. 암살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대부분 백인대장인인 그들의 동태였다.


3월 16일


이튿날인 3월 16일.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에 모여 있었다. 카이사르의 고참병들도 연단 주위를 가득 메운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브루투스가 그 유명한 연설을 시작했다.


“로마인들이여! 동포들이여! 친구들이여! 나의 이유를 들어주시오. 듣기 위해서 조용히 해주시오. 나의 명예를 생각하고 나를 믿어주시오. 믿기 위해서 나의 명예를 생각해주시오. 여러분이 현명하게 나를 판단해주시오. 현명하게 판단하기 위해 여러분의 지혜를 일깨워주시오.


만일 여러분 중에 카이사르의 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소. 카이사르에 대한 브루투스의 사랑도 그이의 것만 못하지 않다고.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느냐고 묻거든, 이것이 나의 대답이오. 내가 카이사르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고 만인이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카이사르가 살고 만인이 노예처럼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시오?


카이사르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그를 위해 울고, 카이사르에게 행운이 따랐던 만큼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카이사르가 용감했던 만큼 나는 그를 존경하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던 까닭에 그를 죽인 것이오. 그의 사랑에는 눈물이 있고, 그의 행운에는 기쁨이 있고, 그의 용기에는 존경이 있고, 그의 야심에는 죽음이 있소.


여러분 중에 노예가 되길 원하는 비굴한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여러분 중에 로마인이 되길 원하지 않는 야만적인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여러분 중에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비열한 사람이 있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브루투스의 연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연설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브루투스에 이어 킨나가 연단으로 올라갔고, 카이사르의 유해는 장례식도 허용하지 말고 테베레강에 던져버리는 것이 폭군에게 어울리는 처사라는 킨나의 말은 당장 일어난 고함소리에 묻혀버렸고, 성난 군중은 연단을 향해 몰려갔다. 암살자들은 다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신전으로 도망쳤다.


유언장 공개


암살 후 24시간만에 안토니우스는 처음으로 카이사르의 유해와 대면했다. 수부라에 있는 카이사르의 집에는 미망인이 된 칼푸르니아와 그녀의 아버지이자 원로원의 유력 의원인 피소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것을 안토니우스에게 알려준 사람은 피소였다. 유언장은 여제사장에게 맡겨져 있다고 한다.


여제사장에게 사람을 보내 받아온 유언장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뜰 회장에서 개봉되었다. 칼푸르니아와 피소,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히르티우스와 발부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개봉된 것이다. 날짜는 기원전 45년 9월 15일로 되어 있었다. 여섯 달 전에 작성된 유언장었다.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2.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컴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3.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4.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집행 책임자로 데키우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에게 아이가 생겼을 경우, 데키우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그 아이의 후견인으로 지명한다.
5.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일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18세 6개월의 젊은이였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소도시 벨레트리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인물이고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의 딸이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는 외할머니의 오빠니까 종조부가 된다. 피나리우스와 페디우스는 둘 다 카이사르의 생질이다


유언장대로 로마 시민 모두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 증여하면 재산도 바닥이 나버릴 테니까, 재산을 증여하기 위한 유언장도 아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그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성을 주는 것으로 후계자를 지명한 정치적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이 공표되었을 때 대다수 시민이 “옥타비아누스가 누구지?” 하고 되물었을 만큼 로마 안에서도 밖에서도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를 왜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는 반대되는 재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즉 옥타비아누스는 평시의 통치능력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 이 젊은 두 사람을 파르티아 원정군이 집결하고 있는 그리스 서해안의 아폴로니아로 보냈다. 파르티아 원정은 18세의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최초의 본격적인 출전이 될 터였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없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 내용을 안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없는 것을 기화로 후계자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우선 카이사르의 금고를 자기 집으로 옮기고 그 안에 있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거액을 수중에 넣은 뒤, 암살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히르티우스는 그날 밤에 이미 데키우스 브루투스의 집을 은밀히 방문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그 일을 당장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편지로 알렸다. 그와 동시에 키케로한테도 그 편지의 사본을 보냈다.


“3월 17일 아침, 로마.
(......) 안토니우스는 우리가 이탈리아 안에 머물면서 아무리 사소한 관직에라도 취임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소. 시민과 병사들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킬 자신이 없다는 거요. 그래서 나는 히르티우스에게 제안해보았소. 우리 모두가 그 제도(원로원 의원만은 공무가 아니라 사적인 일로 속주나 동맹국에 가도, 공무로 나갔을 때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체재할 수 있는 제도)의 적용 대상이 되어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떠냐고. (……)

당신은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고 물을 거요. 그래서 나는 제안하겠소. 불운에 굴복합시다. 이탈리아에서 멀리 떠납시다. 로도스섬으로 가든 다른 어디에 가든 상관없소. 그리고 운이 트이면 다시 로마로 돌아옵시다. 운이 평행선을 그리면 망명생활을 계속합시다. 운이 다하면 우리도 모두 무너질 뿐이오."


타협


같은 날인 3월 17일 오후, 민중이 포로 로마노에 모여 계속 불온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첼리오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소집한 원로원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암살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마련해둔 이듬해와 그 이듬해의 요직 내정자 명단을 처음 알았을 때, 두 파 중에서 더 심하게 동요한 것은 암살자 쪽이었다. 명단에는 자기네 이름이 많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피가 흐른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이날, 원로원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이 이루어졌다.

- 카이사르 쪽은 공식 선서를 어기고 카이사르를 죽인 암살자들의 형사적 책임은 추궁하지 않기로 한다.
- 한편 암살자 쪽은 카이사르의 정치가 계속되는 것을 용인한다. 구체적으로는 카이사르가 내정한 요직 인사를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 일당의 주된 관심사는 카이사르를 죽이면서까지 회복시키려 한 공화정보다는 불온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는 민중과 카이사르의 고참병들로부터 목숨을 지키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부 요직에 앉으면, 목숨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가 암살자들에게 양보한 것은 앞으로 종신 독재관을 폐지한다는 것뿐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이상, 누가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든 시민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라는 것은 안토니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파르티아 원정도 더 이상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없었다.


요직 인사라는 미끼에 걸려든 암살자들 가운데 카이사르의 장례식을 포로 로마노에서 거행하겠다는 카이사르파의 뜻에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례식은 이튿날인 3월 18일에 거행하기로 결정되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3월 17일의 원로원 회의가 끝난 직후에 남몰래 로마를 떠났다. 카이사르가 그의 임지로 내정해둔 북이탈리아 속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그날 이루어진 타협을 믿었던 모양이다. 원로원 회의가 끝난 뒤, 이들은 각자 카이사르파 인물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저녁식사는 마음속의 생각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고 한다.


카이사르, 화장되다


이튿날인 3월 18일은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고인을 추도하는 연설은 안토니우스가 혼자 했다. 그러나 연설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 고대 역사가 가운데 한 사람은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놓인 카이사르의 유해 옆에 서서, 수도에 사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의 정원을 기증한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낭독하고, 암살자들도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키겠다는 서약에 서명했다고 말한 다음,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추도사를 끝냈다.”

[안토니우스의 연설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의 유해를 목격한 군중은 그제야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눈물과 함께 분노를 폭발시켰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우는 불을 저마다 횃불에 옮겨붙인 군중은 순식간에 폭도로 변하여 암살자들의 집으로 몰려갔지만, 모두 피신했기 때문에 암살자들 가운데 이날 피살된 사람은 없었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이번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운 재는 누군가가 미처 긁어모으기도 전에 빗줄기에 씻겨가버렸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무덤이 없다. 그러나 평범한 무덤 따위는 없는 편이 카이사르한테는 어울리는 것 같다.


도피행


이튿날인 3월 19일, 아직 동도 트기 전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에서 달아났다. 목적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30킬로미터쯤 내려간 곳에 있는 브루투스의 별장이었다. 그들은 안전한 그곳에 머물면서, 안토니우스가 약속한 ‘사면’이 실현되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 쪽에서 보면 상황은 예상보다 한결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키케로는 타협안을 실현하려고 애썼지만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약속했던 암살자 전원에 대한 ‘사면’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분노가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만약 ‘사면’을 실행하려고 하면 그 실행자까지도 분노의 표적이 될 판이었다.


원로원과 민회는 카이사르에게 ‘조국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부친 살해는 로마에서는 최고의 중죄였다. 증오와 슬픔과 분노에 찬 민중은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을 암살자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브루투스 일당에게 내뱉은 말은 ‘파리키다’(아비를 죽인 놈)였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지난해인 기원전 45년 가을부터 그리스 서해안의 아폴로니아에 머물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죽음과 카이사르의 유언장 내용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폴로니아에는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에 따라갈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군단 지휘관들은 카이사르의 젊은 후계자에게 로마에는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18세의 옥타비아누스는 한시라도 빨리 로마에 돌아가서 카이사르가 남겨준 것을 계승하는 것이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고 고집했다.


카이사르는 처음 옥타비아누스를 데리고 간 에스파냐 문다에서 승리하고 귀국한 뒤에는 이제 갓 18세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아그리파'라는 젊은이를 붙여주었다. 그래서 아그리파도 아폴로니아로 파견된 옥타비아누스와 동행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출처 구글 이미지]

어린 시절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로마에서는 여자가 재혼하면 전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데려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소년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와 함께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인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이다. 과부인 율리아는 친정으로 돌아와, 당시에는 아직 생존했던 어머니-즉 카이사르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사정으로 소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집에서 자랐다.


로마 도착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4월 중순 브린디시에 상륙한 뒤 나폴리부터는 카이사르의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아피아 가도를 따라 4월 말경에 로마에 도착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를 쌀쌀맞게 맞이했다.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38세의 안토니우스도 이 18세의 젊은이를 ‘어린애’로밖에 보지 않았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안토니우스 저택을 방문한 옥타비아누스는 우선 카이사르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안토니우스가 맡고 있던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안토니우스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도 한동안은 난감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어린애’의 결심은 확고했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 가운데 재력이 있는 이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 가운데 마티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사계급’에 속하는 경제인으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주의로 일관한 금융업자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주최하는 카이사르 추모 경기대회는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인 7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개최를 앞두고 대대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게 되었다. 18세의 젊은이는 군단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첫 번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암살자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라누비움의 별장을 떠나 로마에서 60킬로미터나 떨어진 안치오의 브루투스 별장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도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불안 속에서, 안치오에 있는 브루투스의 별장에 사람들이 모여 선후책을 의논하게 되었다. 키케로가 도착했다.


선후책을 의논하는 자리가 단번에 동지들끼리 서로 비난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특히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암살자들 중에서 카이사르와 가장 친했으니만큼 암살 직후 망연자실한 시민들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카시우스만이 아니라 마르쿠스 브루투스까지 그를 비난했다.


이날 회합이 끝난 뒤,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선물로 준 나폴리 근처의 별장으로 떠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카이사르 측근들의 배려로 경제적 걱정은 물론 신변 안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별장에 아들을 숨겨두지는 않았다.


카이사르 추모 경기대회


이후 7월 중순 7일 동안 계속된 카이사르 추모 경기대회에는 모든 시민이 초대되었다. 시민들은 56세 생일을 앞두고 죽은 카이사르를 그리워했고, 그 카이사르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새로이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시민들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 나누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기대회 마지막 날 밤, 커다란 혜성이 로마의 밤하늘을 가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카이사르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나중에 후세 천문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핼리 혜성'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만든 카이사르 기념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이즈음 안토니우스는 계속 높아지는 옥타비아누스의 명성에 대항하기 위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다시 접근했다. 이런 정세 변화는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해외로 탈출하고 싶은 일념에 사로잡힌 암살자들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국외 탈출


원로원은 ‘율리우스’ 다음 달인 8월 초에 회의를 열고,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제안한 의제를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가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부임할 임지를 결정하는 형태를 취하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관한 내용을 곁다리로 끼워 제출되었다.


1. 기원전 43년에 ‘전직 집정관’이 되는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3년부터 5년 동안 계속 북이탈리아 속주 총독을 맡는다. 돌라벨라도 역시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5년 동안 시리아 속주 총독을 맡는다.

2.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을 맡고 있는 기원전 44년 말까지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맡는다. 카시우스도 기원전 44년 말까지 시리아 속주 총독을 맡는다.


8월 말에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로, 카시우스는 시리아로 떠났다. 공직에 부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낮에 당당히 출발했다. 하지만 폭군은 죽었다고, 자유는 회복되었다고 외친 ‘3·15’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던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안토니우스 탄핵


키케로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그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얻은 키케로가 두 사람이 떠난 로마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 아니 자기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한 것은 장기인 언론을 무기로 공화정 재건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4년 9월부터 무려 열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저 유명한 키케로의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 『필리피카이』가 시작된 것이다. 키케로가 이 연설에 ‘필리포스 탄핵’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보아도 그의 의도는 이미 분명했다.

[키케로와 필리피카이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즉 쇠퇴기에 들어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통일하려 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를 규탄하고, 자유야말로 시민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호소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제목이 『필리피카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케로의 안토니우스 탄핵 캠페인은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늙은 키케로의 정열은 ‘3·15’ 이후 안토니우스의 전횡을 불쾌하게 여겨온 원로원 의원들, 키케로의 말을 빌리면 온건파를 안토니우스한테서 떼어놓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안토니우스 한 사람에게만 비난을 집중시킴으로써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이간시키는 것이 키케로의 의도였다. 키케로의 탄핵 연설에 깜짝 놀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협력하기보다는 키케로 편에 붙어서 ‘아버지’의 충고에 따르게 되리라고 키케로는 기대했다.


10월, 겉으로는 계속 교착상태에 있던 ‘3·15’ 이후의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집결해둔 군대가 그리스에서 귀국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군단 상륙항인 브린디시로 달려갔다. 이 군대를 빨리 자기 휘하에 넣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사들이 안토니우스 휘하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의 휘하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황한 안토니우스는 북이탈리아 속주 총독인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그 자리를 넘겨달라고 요구하는 집정관 통보를 보냈지만 그 역시 거절당했다.


안토니우스는 전투를 치러서라도 데키우스 브루투스한테서 북이탈리아 속주 총독의 자리를 빼앗기로 결심했다. 모데나 성채에 틀어박힌 데키우스를 안토니우스 군대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 키케로는 『필리피카이』 제3탄을 쏘았다. 그날 원로원에서 행한 연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1. 로마를 안토니우스의 폭정에서 해방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찬사.
2. 안토니우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키우스 브루투스를 하루 빨리 지원해야 할 필요성.
3. 안토니우스야말로 로마군의 공격 목표여야 한다는 사실의 강조.


하지만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번의를 촉구한다는 것만 결의하고 산회했다. 기원전 43년 3월, 새로 집정관이 된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4개 군단을 거느리고 로마를 떠났다. 무력으로 안토니우스에게 번의를 강요하는 이 군사행동에는 옥타비아누스도 동행했다.


4월,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격을 당하게 된 안토니우스는 어쩔 수 없이 데키우스 브루투스에 대한 포위를 풀고 두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의 연합군과 맞섰다. 이 대결은 안토니우스의 패배로 끝났고, 안토니우스는 서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전사했다. 두 집정관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카이사르 암살의 하수인인 데키우스 브루투스 휘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달려왔다.


절망한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혼자서라도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있는 그리스로 가려고 했지만, 그 일대 주민인 갈리아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을 안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 트레보니우스도 시리아로 간 돌라벨라에게 목숨을 잃었다. 카이사르를 죽인 사람 가운데 두 명이, 게다가 카이사르 밑에서 오랫동안 군단장을 지냈으면서 카이사르에게 칼을 들이댄 네 사람 가운데 두 명이 먼저 복수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복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라는 키케로의 요청을 무시했다. 젊은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버렸다. 원로원은 군사력을 등에 업은 젊은이의 압력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두 집정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집정관에 옥타비아누스가 출마하는 것을 인정했다.


8월, 민회는 압도적 다수로 옥타비아누스를 집정관에 선출했다. 동료 집정관에는 카이사르의 조카인 페디우스가 뽑혔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의 자격 연령인 40세에 21세나 미달한 나이였다.


집정관에 취임한 19세 소년이 맨 먼저 한 일은 지금까지 줄곧 안토니우스의 방해로 실현하지 못한 자신의 양자 입적이었다. 민회는 이번에야말로 쌍수를 들어 찬성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야 비로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 민중도 원로원 의원들도, 심지어는 키케로조차도 그를 카이사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세의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한 일은 동료 집정관 페디우스의 이름으로 제안한 ‘페디우스법’을 성립시킨 것이었다. 이 법은 카이사르가 요구한 서약에 서명했으면서도 그 서약을 깨뜨리고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을 유죄로 선언하고, 그들에 대한 추방을 결의한 법률이다.


기원전 43년 11월, 북이탈리아 속주에 있는 도시 볼로냐에서 카이사르파의 재통합이 이루어졌다. 역사상 ‘제2차 삼두정치’라고 불리는 안토니우스·레피두스·옥타비아누스의 공조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에게 걸었던 키케로의 희망을 산산조각내버리는 새로운 사태의 출현이었다.


‘삼두’가 모두 군대를 거느리고 볼로냐에서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그리고 11월 27일, 민회는 5년으로 기한을 정하긴 했지만 삼두정치 체제를 국가 로마의 위기관리체제로 공인했다.


'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통치 형태가 되었다. 이로써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즉 로마의 독자적인 과두정 체제는 이것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제2차 삼두정치’의 성립은 39세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을 일단 거두어들인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19세 젊은이의 힘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해져 있었다.

제2차 삼두정치는 당면 과제로 다음 두 가지를 채택했다.

1. ‘살생부’를 작성하여 반대세력을 숙청한다.
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공동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다. 그동안 레피두스는 본국에 남아서 배후를 철저히 지킨다.


‘살생부’에는 원로원 의원 300명과 2천 명에 이르는 ‘기사계급’ 출신이 올랐다. 원로원 의원 300명 가운데 130명은 반역의 죄를 물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하기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처벌자’ 2천여 명에게는 재산 몰수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2차 ‘삼두’가 ‘살생부’를 만든 속셈은 바로 자금 조달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3년 한겨울, 로마와 이탈리아반도에 숙청의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이것도 역시 술라를 본뜬 것이지만, 밀고하면 상금을 주는 제도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인간 사냥도 더욱 음침한 양상을 띠었다. 40년 전에 술라가 편 공포정치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제2차 ‘삼두’는 친척도 봐주지 않았다. ‘삼두’ 가운데 하나인 레피두스의 친동생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나 안토니우스의 외삼촌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즉결 처형자 명단에 올랐고, 처형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키케로의 죽음


제2차 ‘삼두’의 ‘살생부’가 발표된 것은 기원전 43년 11월 28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2,300명의 이름이 모두 발표된 것은 아니다. 11월 28일에 발표된 것은 제1진인 16명뿐이었다. 카이사르 암살에 직접 가담한 브루투스 일당 14명에 키케로 형제를 추가한 16명이다. 게다가 키케로의 이름은 제1진인 16명 중에서도 맨 윗자리에 올라 있었다.


당시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손잡은 것에 절망하여 수도를 떠나 8개나 되는 별장을 돌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살생부’의 맨 윗자리에 자기 이름이 오른 사실을 안 것도 아스툴라의 별장에 머물 때였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그리스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결심이 서지 않았다. 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는 키케로는 자기만 혼자 도망칠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키케로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토록 글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된 뒤로는 편지조차 쓰지 않았다.


키케로는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따라, 키케로의 시체에서는 머리만이 아니라 오른손도 잘렸다. 키케로의 목과 오른손은 로마로 보내져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효수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필리피카이』를 쓴 오른손까지 처벌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키케로의 나이 63세였다.

[키케로의 잘린 목의 혀에 바늘을 꽂은 풀비아 출처 구글 이미지]

후일 늙은 아우구스투스는 손주들에게 키케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교양은 있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애국자이기도 했단다.”


키케로가 이상으로 삼은 것은 포에니 전쟁 시대의 로마였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조국’은 본국에서 태어난 로마인, 그중에서도 엘리트인 원로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통치하는 국가였다. 그런 키케로에게 북쪽의 루비콘강과 남쪽의 메시나해협은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명백한 국경이었고, 그 국경 안쪽만 ‘조국’이었다.


신격(神格) 카이사르


키케로의 죽음에 이어지는 기원전 42년은 참으로 상징적인 사건으로 막이 올랐다. 고대 로마의 1월 1일은 축제일이 아니니까 휴일도 아니다.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일 뿐이다. 그 1월 1일에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죽은 카이사르를 신격화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카이사르는 신이 된 것이다.


물론 신으로 격상된 실존인물은 건국의 아버지인 로물루스를 빼면 카이사르가 처음이다. 하지만 신이 된 덕택에 유감스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유머 감각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가 신이 된 카이사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제외한 모든 저술을 폐기처분해버렸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왕위에 앉히는 것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킨 로마인들이 신격화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것에도 로마 다신교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카이사르의 신격화로 카이사르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거기에 대한 로마인의 반응도 너그럽고 시원스러웠던 모양이다.


로마인의 수호신이 된 카이사르를 죽인 자는 이제 로마인으로서는 방치할 수 없는 공동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신격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공동전선이 굳건해졌다. 여름에 19개 군단이 아드리아해를 건넜다. 전쟁터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결했을 때처럼 그리스의 어딘가가 될 게 분명했다.


브루투스의 죽음


브루투스는 그리스에서,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언젠가는 찾아올 결전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집정관 돌라벨라를 죽여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단에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군비 증강 때문에 그리스와 그 동쪽에 있는 속주의 주민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부과하는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 결과, 기병 2만 기를 자랑하는 10만 대군이 편성되었다. 로마군은 12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파르살로스 회전 때보다 두 배나 많은 군사력이 충돌하게 되었다. 전쟁터는 그리스 북부의 필리피였다.

[출처 구글 이미지]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도 부사령관으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독자적으로 군대를 지휘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역시 독자적으로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전반전은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의 대결이 되어 통일된 전략에 바탕을 둔 결전으로 끌고 갈 수 없었다. 또한 양군은 기병 전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기동력을 활용할 줄도 몰랐다. 따라서 필리피 회전은 단지 ‘양’(量)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가 되었을 뿐이다.

[영화 ‘Rome’의 필리피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필리피 평원에서 벌어진 전반전은 브루투스가 몸이 약해 전투 중에 몸져누운 옥타비아누스를 이기고,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를 이기는 결과로 끝났다. 카시우스는 패배에 절망한 나머지 자결해버렸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필리피 전투 전반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후반전이 시작될 때까지 20일 동안, 브루투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했다. 카시우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진영에 들어간 브루투스는 친구의 유해를 화장한 뒤에도 진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 틈에 옥타비아누스군은 재기할 수 있었고, 안토니우스군은 더한층 기세가 올랐다.


필리피 회전의 후반전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브루투스는 피신하라는 권유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43세에 자살한 것이다. 두 장수는 브루투스의 유해를 로마식으로 화장하고, 유골은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보내주었다. 브루투스의 무덤이 어딘지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지 않다.

[필리피 전투 후반전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도 ‘3·15’를 이렇게 단정하고 있다. “회고주의자들의 자기도취가 초래한 무익하고 유해한 비극.” 이런 브루투스가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코스모폴리스(세계도시)인 로마가 무너진 지 1,500년 뒤에 도시국가(폴리스)를 재건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인들 덕택이었다. 『줄리어스 시저』도 영국의 르네상스인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제8장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42년~기원전 30년


브루투스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의 내전은 정치 투쟁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올리가르키아)을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한 개인이 통치하는 군주정(모나르키아)을 채택하느냐 하는 로마의 국가 시스템을 둘러싼 정치적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10여년 동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어쨌든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3·15’ 직후 시작되어 13년 뒤인 기원전 30년에야 겨우 수습된 혼란과 파괴와 무질서와 살육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키케로가 마음이 나약해졌을 때 토로했듯이, 그것은 죽인 쪽에게도, 죽음을 당한 쪽에게도, 그리고 로마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은 “해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불모의 비극”이었다.


제일인자 안토니우스


‘살생부’의 철저한 실행과 필리피 회전의 승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복수극을 끝내는 동시에 공화주의자를 말살하는 데 성공했다. 필리피 회전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제2차 삼두정치를 해소한 것은 아니지만, 애당초 레피두스는 두 사람이 필요로 할 때는 참가를 요청받고 필요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시당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의 동부는 안토니우스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분담하기로 결정한 것은 안토니우스의 의향이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안토니우스가 동부를 선택한 것은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서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맡긴 것도 폼페이우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가 에스파냐 땅에서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처리를 떠넘기려 한 것이다. 게다가 속주세만 놓고 보아도 동부와 서부의 징세액 규모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서기 14년 기준 로마 식민지의 소득 수준 추정치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서부에는 동부에 없는 이점이 있었다. 첫째, 서부에는 로마 본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더없는 이점이라는 것을 안토니우스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병사를 모집하기에 유리했다는 점이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아니면 군단병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필리피 회전에서 이긴 뒤로는 클레오파트라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를 로마 세계의 명실상부한 제일인자로 보았을 것이다. 나이도 한창때인 40세. 키케로가 검투사 같다고 말했을 만큼 건장한 체격에 병이라고는 앓아본 적이 없는 사나이. 게다가 어려운 문제가 많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맡겨놓고, 자신은 동부의 부를 마음껏 누리면서 경쟁자의 심신이 소진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동쪽으로 가는 안토니우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방의 제후들은 언제나 승자 편에 선다. 그 덕택에 싸움 한번 치르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현재 튀르키예 도시)에 당분간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거기로 소환했다.

[타르수스 출처 구글 이미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맹국 이집트의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권력자인 카이사르의 애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로마 세계의 제일인자가 된 안토니우스의 소환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보다는 클레오파트라의 수완이 한 수 위였다. 클레오파트라. 이 여자는 최고권력자 앞에 나타나는 방법만 보더라도 상당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는 손꼽히는 도시였다. 오늘날보다 훨씬 바다에 가까웠고, 바다와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강을 이집트에서 여왕을 태우고 오는 배가 거슬러 올라간다. 선박 자체가 이미 오리엔트의 풍요로운 부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의 옥좌에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아 있다.

[안토니우스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 출처 구글 이미지]

졸지에 ‘남신’이 되어버린 안토니우스는 자기를 찾아온 ‘여신’을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여신’은 초대에 응하는 대신, 거꾸로 안토니우스를 초대했다. 안토니우스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승부는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로, 즉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안토니우스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것도 클레오파트라가 원한 형태로, 즉 로마의 ‘전직 집정관’ 자격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방문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41년 가을, 41세의 장군은 이때 이미 28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에 몸을 던진 것이다.


기원전 41년 가을부터 기원전 40년 봄까지, 옥타비아누스는 본국에서 악전고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페루자에서 안토니우스의 동생(루키우스)과 아내(풀비아, Fulvia)가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40년 2월 말, 22세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두 사람은 드디어 진압에 성공하고, 풀비아와 루키우스를 그리스로 추방하는 것으로 페루자 전쟁을 끝냈다.

[페루자 출처 구글 이미지]

아내와 동생이 군대를 일으켜 옥타비아누스를 흔들어놓으면, 자신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쫓아낸다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그는 이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나 이탈리아로 갔지만, 브린디시에 입항해서야 비로소 반란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는 당장 태도를 바꾸어, 페루자 반란의 책임을 아내에게 덮어씌웠다. 자기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풀비아가 동생 루키우스를 부추겨 군대를 일으켰다고,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한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풀비아는 달아난 그리스 땅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풀비아의 전 남편은 호민관 클로디우스, 호민관 쿠리오였다).

[풀비아 출처 구글 이미지]

'브린디시 협정'


카이사르는 누구한테나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길 가망이 없는 강력한 적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0대의 옥타비아누스는 그럴 필요가 있었고,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그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이렇게 하여 외교라는 것의 존재이유를 배워간다.


그리고 그는 이 외교에 동년배의 젊은이를 등용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 ‘기업의 메세나 운동’의 시조이기도 하다. 문예의 후원자를 뜻하는 ‘메세나’는 마이케나스 또는 메체나스라고 읽는 라틴어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마이케나스'의 집에 있는 당시 문학인 호레이스, 버질, 바리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브린디시에서 서로 의심하며 대치하고 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를 원만하게 수습하려고 애쓴 것은 마이케나스였다. 이리하여 ‘브린디시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협정은 제2차 삼두정치의 ‘삼두’가 각자의 세력권을 결정한 협약이다. 로마의 패권이 미치는 지역 전체를 삼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부,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그리고 레피두스는 남부에 해당하는 아프리카를 맡기로 한 것이다.


‘브린디시 협정’을 좀더 확실한 것으로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인척관계가 맺어졌다. 풀비아의 죽음으로 홀아비가 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전처 풀비아가 첫 남편 클로디우스와 관계해서 낳은 딸 클로디아와 약혼했다.


미세노 협정


나폴리만의 서쪽 끝 미세노곶(Capo Miseno)에 폼페이우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를 불러서 성립시킨 것이 ‘미세노 협정’으로 불리는 삼자 협약이다. 이번 회담에 참석한 사람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였다. 이곳을 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배를 타고 오는 섹스투스의 편의를 고려해서였다.


‘미세노 협정’에서 결정된 것은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폼페이우스파의 적대행위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옥타비아누스는 문다 회전에서 패한 뒤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따라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자들이 로마로 돌아와 공직에 복귀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섹스투스에게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의 통치권을 양도했다.


미세노 회담에서 안토니우스의 역할은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카이사르의 아들 사이에 이루어진 화해의 보증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그의 의붓딸인 클로디아와 파혼하고 섹스투스의 처고모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는 것도 허락했다. 섹스투스의 장인의 누이인 스크리보니아는 당시 23세였던 옥타비아누스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 결혼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가 태어났다.


옥타비아와 결혼한 안토니우스는 다시 로마 남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신혼의 보금자리를 꾸민 곳이 아테네인 탓도 있어서, 악사와 무희를 동원하는 클레오파트라 스타일의 잔치를 그만두고 철학자들과 환담하는 플라톤 스타일의 향연을 베풀어 부하들을 놀라게 했다. 안토니아라고 이름지은 딸도 태어났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피하는 기색을 보였다.


옥타비우누스의 사랑


사랑을 잊으려고 애쓰는 43세의 남자가 있었던 반면, 한편에는 난생처음 찾아온 사랑에 가슴 설레는 24세의 젊은이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사랑한 여자의 이름은 리비아(Livia Drusilla)였다. 옥타비아누스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이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한 유부녀이고, 티베리우스라는 세 살바기 아들을 둔 어머니이기도 했다. 게다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리비아 드루실라 영화 ‘도미나’에 나오는 리비아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독신이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험악해지자마자 정략결혼 상대였던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24세의 젊은이는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과 직접 담판을 벌였다. 로마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아내를 양보했다. 기원전 38년 1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신부 들러리를 전남편이 맡은 색다른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지 석 달 뒤에 리비아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에게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집안에 대대로 흔한 이름인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24세의 남편과 19세의 아내는 로마 상류층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생을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으로 불린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2대 황제가 된 것은 바로 리비아가 데려온 전남편의 자식 티베리우스였다.

[카이사르 가계도 출처 구글 이미지]

옥타비아누스가 착착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 초조해진 것은 안토니우스였다. 안토니우스도 어느덧 45세가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도 이루지 못한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하면, 눈부시게 부상하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거라 생각한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리고 둘째 아이의 해산을 앞두고 있는 아내 옥타비아에게 수도 로마로 돌아가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기원전 37년 가을, 안토니우스는 동쪽으로 떠났다. 그전에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티오키아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자마자 클레오파트라도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가득 싣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돛을 올렸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4년 만의 재회였다. 그리고 일단 재회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내로 돌아갔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애인으로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에게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그리스 스타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두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속주거나 로마가 동맹자로 인정한 제후의 영토였다. 클레오파트라가 강력하게 원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끝내 허락하지 않은 것은 헤로데 왕이 다스리는 유대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안 로마인은 아연실색했다. 로마법은 이중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로마의 패권 밑에 있는 많은 지방을 로마의 동맹국에 불과한 이집트에 주어버렸으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만 성공하면 로마인들도 자신의 조치를 추인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로마인에게 파르티아 원정은 우선 크라수스의 참담한 패배를 설욕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둘째로는 파르티아를 제압함으로써 유프라테스강을 방어선으로 확립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방어선만 확립되면 로마 세계의 동부 지역의 안전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르티아 원정의 목적은 파르티아를 정복하여 영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파르티아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향으로, 안토니우스는 종래의 전략을 바꾸어버렸다. 치고 빠지는 전략이 아니라, 치고 눌러앉는 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원정 방식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AD 1년경 파르티아 제국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안토니우스가 준비한 전력은 크라수스 때의 세 배가 넘는 대군이었다. 병사만 해도 11만 명. 여기에 수많은 공성기가 추가된 대규모 원정이었다. 한편 파르티아군은 총병력이 4만 기. 지휘는 파르티아에 귀화한 그리스인 모네수스가 맡았다. 병력만 놓고 비교하면 로마군의 압승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원정의 목적이 방어선 확립이 아니라 파르티아 정복에 있다는 사실을 부하들에게도 숨기고 있었지만, 오리엔트 제후들은 이것을 꿰뚫어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이집트 여왕이 로마군을 이용하여 야망을 달성하는 것을 도와주기 싫어서 모조리 파르티아 편에 붙어버렸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기원전 36년 3월에 출발하여 10월 말에 돌아올 때까지 8개월이 걸렸다. 먼저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의 주력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송부대를 공격하여 그 부대를 수비하고 있던 2개 군단을 궤멸시켰다. 물자는 빼앗기고 공성기는 불타버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파르티아군은 로마군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공격을 집중했다.


10월, 사막이 많은 중동의 밤은 이 계절이 되면 견딜 수 없이 추워진다. 마침내 안토니우스도 철수를 결심했다. 11월, 안티오키아로 퇴각한 로마군은 주력인 군단병만 해도 3분의 2로 줄어들어 있었다. 본격적인 회전은 한 번도 치러보지 못한 원정이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뒤 안토니우스가 한 일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전령을 보내 안티오키아로 와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


파르티아 원정이 실패한 것을 로마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알았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는 재빨리 지원 물자를 구입하고, 가장 시급한 군자금도 마련하여 병사까지 2천 명 고용한 다음, 직접 그것을 안토니우스에게 갖다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가 보낸 편지에는 물자와 자금은 보내도 좋지만, 당신은 로마로 돌아가라고 적혀 있었다. 옥타비아는 이번에도 순순히 남편의 말에 따랐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동은 그녀의 뜻과는 반대로 안토니우스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이바지했을 뿐이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암투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로마의 일반 민중조차도 현모양처의 귀감이라 해도 좋은 옥타비아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무정한 처사에는 분개했다.

[소 옥타비아 출처 구글 이미지]

타국에서의 개선식


클레오파트라는 파르티아 원정 실패로 낙담하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달려왔다. 클레오파트라는 47세의 안토니우스를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다시 한번 원정해서 패배를 과거 속에 묻어버리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부하 장병들도 파르티아로 다시 쳐들어갈 자신감과 의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원정의 목적지는 파르티아보다 훨씬 다루기 쉬워 보이는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갔다는 것뿐, 진정한 의미의 원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안토니우스는 재빨리 아르메니아 왕과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아르메니아 원정 성공을 축하하는 개선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장소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였다. 이것이 로마인을 격분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48세인 이날까지 로마 사나이에게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거행한 적이 없었다. 그해에 타국에서 올린 개선식이 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개선식이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비극’, 안토니우스를 환영하는 클레오파트라 출처 구글 이미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영역 출처 구글 이미지]

클레오파트라가 앉아 있는 옥좌 옆에는 역시 황금으로 만든 옥좌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전차에서 내린 개선장군은 거기에 앉았다. 로마인 개선장군은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1.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정식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적자다.
2. 클레오파트라는 왕 중의 여왕이고,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는 왕 중의 왕이다.
3.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는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아르메니아 왕국과 메디아 및 파르티아 왕국을 주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에게는 키레나이카 왕국과 리비아 왕국을 준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준다.
4. 이 모든 나라를 망라하는 이집트 제국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가 공동으로 다스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가 저지른 언행에 아연실색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집정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이용하여 당장 원로원을 소집했다. 원로원 회의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결했다.


1. 기원전 43년에 결성되어 5년 뒤인 기원전 38년에 다시 5년 기한으로 경신된 ‘제2차 삼두정치’를 더 이상 경신하지 않는다.
2. 안토니우스가 결정한 사항들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로 간주한다.
3. 로마 세계의 양분은 카이사르의 유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의제로 상정할 것도 없이 기각한다.


대결을 향해


18세의 젊은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옥타비아누스도 기원전 33년 가을에는 30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방인 일리리아를 제패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제패가 이탈리아반도에 사는 모든 로마인에게 환영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 사람들은 이 30세의 젊은이가 50세를 앞둔 나이에 외국 여자에게 놀아나는 안토니우스보다 애국자라고 느꼈다.


그런 가운데 옥타비아누스는 벌써 다음 행동에 착수했다. 안토니우스가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유언장을 공개한 것이다. 유언장 내용을 안 로마인들은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다.


첫째, 안토니우스가 자식으로 인정하고 유산을 남겨준 것은 모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뿐이고, 풀비아가 낳은 자식도 옥타비아가 낳은 자식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장지를 알렉산드리아로 지정한 점이다. 공개된 유언장은 로마 민중의 가슴속에 안토니우스에 대한 배신감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증오심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이용하여 지중해 동부 세계를 로마의 패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려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그리스인들 처지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신뢰할 만한 협력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다.


개인성향이 강한 그리스인들과 다르게 로마인은 아직 쇠퇴기에 접어들지 않았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의욕도 왕성하고, 무엇보다도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부와 그리스인의 후원과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으로 그런 로마인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준비


기원전 32년, 31세를 맞은 옥타비아누스는 드디어 결전의 시기가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국지전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세계를 누가 수중에 넣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자 그대로의 결전이어야 했다.


30대에 접어든 옥타비아누스는 참으로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 간의 투쟁을 국가 간의 투쟁으로 바꿔치는 데 성공했다.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그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저지른 실수는 모조리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용되어 옥타비아누스의 득점이 되었다.


그해 가을, 로마 본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옥타비아누스를 ‘국가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원정군 총사령관’에 선출했다. 이제까지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해온 폴리오나 플란키우스 같은 참모들은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울 때부터 안토니우스의 동료였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이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바뀐 것을 알고는 안토니우스를 떠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클레오파트라는 드디어 로마와 맞붙게 된 것에 흥분했다. 또한 안토니우스라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본영을 에페소스에서 사모스 섬을 거쳐 서쪽의 아테네로 옮기기 시작했다. 본영에서의 나날은 화려한 잔치로 채색되었다.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안토니우스의 기분을 북돋우려고 클레오파트라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50세의 안토니우스는 술에 절은 나날을 보냈다.


악티움해전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가 기다리는 그리스로 떠날 때 집정관으로 재선된 뒤에 출전하겠다고 고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을 지낸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재선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집정관의 지위를 달라고 고집스럽게 요구한 것은 공화정 로마에서는 집정관이야말로 일반 공직으로는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로마 집정관이 동맹관계를 파기한 이집트 여왕을 공격한다는 도식은 모두 완료되었다.


양군의 전력


안토니우스의 진영의 육군은 중무장 보병 6만 5천 명과 궁병 및 투석병을 비롯한 경무장 보병 2만 명, 그리고 기병 1만 2천 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군은 군선 60척과 연락용 쾌속선 5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8개, 모두 합하면 520척에 이르는 대함대였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승선하는 기함 '안토니아'는 노 하나에 노잡이가 무려 10명씩 매달린 10단층 갤리선이었고, 그밖에 안토니우스와 장수들이 타는 배는 모두 5단층 갤리선으로 되어 있어서 대형선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전투원으로 승선하는 중무장 보병을 합하면, 520척의 승선 인원은 모두 15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로마 쪽 전력은 육군에서는 이집트 쪽과 막상막하였지만, 해군력은 열세였다. 육상 전력은 8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1만 2천 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상 전력은 모두 400척이었다. 다만 5단층 갤리선은 5척도 안 되고, 나머지는 노 하나에 노잡이가 3명 달린 3단층 군선이 함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쪽 군선은 마력에서는 열세지만, 이집트 쪽에 비해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1. 아그리파가 고안한 한팍스라는 화기를 모든 배가 갖추고 있었다는 점.

2. 뱃머리를 종래보다 견고하고 날카롭게 개량한 결과, 적선에 대한 돌파력이 높아진 점.


대형선은 속력도 빠르고 방어력도 뛰어나지만, 소형선은 좁은 곳에서도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한테서 준비와 작전과 지휘까지 모두 위임받은 아그리파는 그리스에 집결한 적군 함대의 초대형 선박에 대한 평판을 듣고도 아군 함대의 군선을 대형화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다.


출정


기원전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갔다. 안토니우스는 지난해 겨울부터 이미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본영을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함대는 파트라스에서 직선거리로 130킬로미터 북서쪽에 있는 프레베자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에서도 그리스 북서부의 어딘가가 전쟁터가 되리라고 예측했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지만, 지상전을 먼저 할 것인가 바다에서 먼저 승부를 결정지을 것인가를 놓고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안토니우스 휘하의 로마인 장수들은 지상전을 먼저 치르자고 주장했다. 총지휘를 맡을 안토니우스가 지상전에 익숙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지상전에서 이기면, 당장 프레베자만에서 대기하고 있는 함대에 육군 병력을 태워 이탈리아 남부로 건너가서 단숨에 수도 로마로 북상하자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작전회의에 늘상 참석하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해전을 먼저 치르자고 주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해군력이 적보다 우세하다는 것이다. 결정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인 안토니우스에게 맡겨졌다.


안토니우스는 잠시 생각한 끝에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안토니우스는 로마군의 ‘등뼈’인 백인대장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라면 그 위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집트 여왕은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대비책도 미리 마련해두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작전회의는 해전에서 패했을 경우에는 육군과 해군이 모두 이집트까지 철수하여 그곳에서 로마군을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런 작전회의에 실망한 안토니우스 휘하의 로마 장수들이 계속 탈출하기 시작했고, 동방의 유대와 그리스 스파르타 등까지도 옥타비아누스쪽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쪽 로마 병사들은 군선에 올라탈 때 놀라운 것을 목격하고는 아연실색했다. 돛이 언제라도 펼 수 있는 상태로 돛대 밑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다고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아침, 싸움이 벌어진 해역의 이름을 따서 역사상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는 결전의 막이 올랐다. 날씨는 쾌청했고,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이었다. 프레베자만에서 나오는 안토니우스군은 아침 햇살과 바람을 등지는 상태가 되었다. 모든 상황이 안토니우스가 바란 대로였다.


포진 단계부터 모든 것은 안토니우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탄 기함과 그 기함을 수비하는 이집트 선단으로 구성된 ‘중앙’은 프레베자만에서 나온 순서에 따라 후위에 배치되었다. 오른쪽 끝에는 안토니우스가 탄 배가 포진했다. 포위 전술에 앞장서는 것은 그가 지휘하는 ‘우익’이었다.


한편 프레베자만에서 나오는 적을 맞아 싸우는 처지가 된 옥타비아누스군은 넓은 해상에 활 모양의 진형을 펴고 적을 기다렸다. ‘중앙’은 옥타비아누스. 사실상 지휘를 맡은 아그리파가 탄 배는 안토니우스의 배와 마주 보는 ‘좌익’에 포진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불고 있던 동풍이 느닷없이 북풍으로 바뀐 것이다. 3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 나가서 직접 지휘까지 맡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전개되는 적의 화공에 의한 지옥 같은 광경은 이집트 여왕을 보통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클레오파트라가 내린 명령은 “더욱 힘차게 돌격하라!”가 아니라 “어서 빨리 돛을 올려라!”였다.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장군의 신분을 잊고 돛을 올리게 했다. 그러고는 클레오파트라가 탄 배를 뒤따랐다. 하지만 전쟁터를 탈출하고 있던 그의 눈에는 뒤에 남겨진 아군 함대가 아그리파의 함대에 포위되는 광경이 들어왔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모두 300척이 넘는 함대가 로마군에 포획되었다.

[악티움 해전 출처 구글 이미지]

한편 파트라스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상군은 그래도 여드레 동안이나 사령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소식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아흐레째 되는 날, 이 지상군 병사들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사랑하는 여인의 뒤를 계속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는 남쪽으로 곧장 도망쳐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했다. 51세의 안토니우스는 그저 해변의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간청으로 안토니우스는 다시 이집트 왕궁으로 돌아갔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유유히 추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 세계의 동부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권으로 바뀐 것을 의미했다. 군주들 가운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편드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종막


해가 바뀐 기원전 30년 봄,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은 자결을 선택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는 퇴위할 테니까 아들의 즉위를 인정해달라는 클레오파트라의 편지에는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는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7월 31일, 옥타비아누스가 앞서 보낸 로마 기병대와 안토니우스의 기병대 사이에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중 안토니우스를 따르고 있던 기병들이 모조리 적진으로 돌아섰다. 바로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이에 상심한 안토니우스는 칼로 제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즉사하지 못했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여왕은 아직 살아 있다고 전했다. 많은 출혈로 기진한 안토니우스는 부하들에게 자기를 여왕에게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음을 맞았다.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는 안토니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안토니우스가 죽은 8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이집트 수도에서 이 승자에게 저항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왕궁으로 향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죽음이 전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왕을 산 채로 잡아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왕궁으로 끌려간 클레오파트라는 그제야 비로소 옥타비아누스가 그녀의 자식들에게 어떤 운명을 주었는가를 알았다. 17세가 된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자들은 모두 로마로 보내져 아버지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 술을 부어주고 싶다면서, 영묘에 가게 해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독사는 야심찬 여자의 일생을 한순간에 끝내주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의 정장 차림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은 시녀 두 사람도 자살한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랐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편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겼다. 거기에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달라고 적혀 있었다. 젊은 승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이 소원만은 들어주었다. 300년 동안 계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출처 구글 이미지]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죽음을 공표하는 동시에 이집트 왕국을 개인의 영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신이 아니면 지배자가 될 수 없는 이집트에서는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S.P.Q.R.)이 지배자가 될 수는 없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신이 된 카이사르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이 지배한 선례를 세운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에필로그


로마에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수도를 사흘 동안이나 열광시킨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33세의 승자를 향한 시민의 열광은 그가 이룩한 승리보다 마침내 내전이 끝난 데 대한 기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창조적 천재는 아니었지만, 카이사르가 갖고 있지 않았던 두 가지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첫째, 회고주의자들이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모두 죽어버렸다는 점이다.
둘째,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라는 동년배 협력자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모두 30대 전반인 이 세 사람이 ‘팍스 로마나’를 쌓아올리게 된다. 신생 로마 제국의 출발에 어울리는 젊은 힘의 결집이었다.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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