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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06. 2024

로마인 이야기 6권 (1)

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초기

로마인 이야기 제6권 『팍스 로마나』는 천재(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천재가 아닌 인물(아우구스투스)이 천재가 이르지 못한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현실만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자신만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하도록 명심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가 평생 치른 ‘전쟁’이었다.

[아우구스투스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제1장 통치 초기
기원전 29년~기원전 19년(34세~44세)


젊은 최고권력자


개선식도 끝난 9월,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포로 로마노 중심부에 짓겠다고 공표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전에 기획한 원로원 의사당(쿠리아)을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포로 로마노의 연장 부분으로 세워진 ‘카이사르의 포룸’에 잇대어 짓겠다고 공표했다


또한 전쟁과 복수의 신 마르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한창 건설되고 있었다. 이 신전 건립의 목적은 기원전 42년에 브루투스와 대결한 필리피 회전을 앞두고 마르스 신에게 서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우구스투스 포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기원전 29년 당시의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한 개선장군이 아니었다. 기원전 82년의 술라, 기원전 46년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파 잔당들의 편지를 비롯한 증거서류를 손에 넣었듯이,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파 가담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손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증거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폼페이우스파였다는 게 분명한 비밀 동조자들도 모두 용서했다. 카이사르의 ‘관용’(클레멘티아)은 공직 복귀까지도 허용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 같은 조치를 그의 후계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옥타비아누스도 답습했다.


안토니우스를 끝까지 추종한 자들까지도 다시 원로원 의석에 앉게 되었다. 증거서류도 카이사르처럼 불태웠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4세의 절대 권력자는 안토니우스파였던 자들의 은밀한 두려움을 그대로 방치하는 쪽을 선택했다.


군비 삭감


로마 전체가 ‘화합’(콩코르디아)의 회복을 기뻐하는 가운데, 젊은 최고 권력자는 그 기쁨을 갑절로 늘리는 정책을 발표했다. ‘군비(軍備) 삭감’이 그것이다. 이 조치는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아그리파의 동의와 협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군 병사인 만큼 빈손으로 제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남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을 팔아서 그 돈을 모두 투입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개인 재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거나 속주에 건설될 식민도시에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해 정착지를 선정해주고 땅을 사주는 것은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


기원전 29년 당시, 유일한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50만 명이 넘는 막강한 군사력이 남아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28개 군단 16만 8천 명까지 군사력을 줄였다. 로마 국가는 이제 영토 확장의 시대에서 영토 유지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국세조사


이듬해인 기원전 28년, 그해의 담당 집정관(콘술)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국세조사를 실시했다. 지난번 국세조사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던 기원전 70년에 이루어졌으니까, 42년 만의 ‘켄수스’(census)다.


종래의 국세조사에서는 본국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대상자를 한정하여 재산과 17세 이상 성년 남자의 수만 조사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살아 있는 동안만 해도 세 차례─기원전 28년, 기원전 8년, 서기 14년─에 걸쳐 실시된 국세조사에서는 여자와 어린애, 노예까지도 조사 대상이 된 모양이다.


17세 이상 성년 남자로서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에 관해,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기원전 28년 - 406만 3천 명
• 기원전 8년 - 423만 3천 명
• 서기 14년 - 493만 7천 명


42년 전의 조사에서는 유권자 수가 90만 명에 불과했다. 그 수가 이처럼 크게 늘어난 이유는 우선 카이사르가 주민 전체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북이탈리아 속주가 이번 조사부터 본국 이탈리아에 추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속주까지도 조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묘 건설


훗날 ‘황제묘’(皇帝廟, 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라고 불리게 된 그 영묘는 포로 로마노에서 북쪽으로 곧장 뻗어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와 그 언저리에서 물줄기가 크게 휘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테베레강 사이에 세워졌다.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이라고 불리는 지대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3단으로 우뚝 솟은 지름 90미터의 원형 영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벽에는 온통 하얀 대리석을 발랐고, 단마다 심어진 노송나무들이 1년 내내 무덤을 푸른 빛으로 장식한다. 원형 영묘의 바깥쪽도 대리석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맨 윗단의 노송나무보다 더 높이 이 영묘 주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팔라티노 언덕 위의 저택이 그토록 소박한데, 무덤만은 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을까. 하지만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35세의 건축주는 이런 행위에 가장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쉬운 원로원을 회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출처 구글 이미지]

원로원 정보공개와 ‘재편성’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는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 공개법’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원로원 의사록이 포로 로마노에 그 이튿날 나붙는 일은 없어졌다. 원로원 의원들이 기뻐한 것도 당연했다.


대신 ‘악타 세나투스’는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 보관소’(타불라리움)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악타 디우르나’는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도시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알리는 ‘관보’로 변경하였다.


또한 당시 원로원의 의원수는 1천 명이 넘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600명까지 줄일 생각이었다. 먼저 일부 의원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설득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의원 140명에 대해서는 원로원 의석을 강제로 박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자신과 아그리파가 우선 30명을 고르고 이 30명이 다른 30명을 고르고 그 30명이 또 30명을 고르는 방식으로 원로원 의원수를 600명까지 줄였다.


공화정 복귀 선언


기원전 27년 1월 13일, 원로원을 가득 메운 의원들 앞에서 35세의 절대 권력자는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신격(神格)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이라고 불리는 『업적록』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일곱 번째 집정관이 된 해(기원전 27년)에, 그때까지 시민 모두의 동의에 의해 절대권력을 부여받아 내전을 종식시켰으므로, 나는 그동안 행사했던 권력들을 포기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주었다.”


의사당은 순간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의사당은 환호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평소에는 그저 엄숙하고 무게있게 행동하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는 원로원 의원들도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35세의 최고 권력자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원로원의 일개 의원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집정관직을 사임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가 포기하지 않은 두 번째 권리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세 번째 권리는 ‘프린켑스’(제일인자)라는 칭호였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돌아온 34세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를 주었다. 이 칭호는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도 부여된 선례가 있었다.


‘임페라토르’는 공화주의자들에게 도발적으로 들렸지만, ‘프린켑스’는 그렇게 들릴 염려가 전혀 없어 옥타비아누스는 이 방패막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업적록』에서 자신을 언급할 때 세 번이나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 때문인지, 현대 연구자들 중에도 앞으로 전개될 시대를 ‘제정’이라고 부르지 않고 ‘원수정’(元首政)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35세의 권력자가 그 대신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공화정 복귀가 선언된 날부터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1월 16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자고 제안한 것은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도 동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폴리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업적록』에서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공적에 대해, 원로원은 앞으로 나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명예도 주기로 결정했다.

우리 집 현관 양쪽에 서 있는 기둥은 월계수로 장식하고, 현관문 위에는 ‘시민관’(市民冠)을 놓는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보여준 결단과 관용, 공정함과 자애에 감사하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그 사실을 새긴 황금 방패를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한다. 그 후 나는 권위(아우크토리타스)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포테스타스)에서는 내 동료 집정관들을 능가하지 못했다.”


승리자를 의미하는 ‘월계관’은 월계수로 짜지만, 로마에서 ‘시민관’이라고 불린 것은 같은 상록수인 떡갈나무 잎으로 짠다. 이것은 로마 군단에서 아군 전우를 구조한 공로에 대해 수여되는 ‘훈장’이었다. 흥미롭게도 로마 군단에서는 적지에 가장 먼저 들어가 받는 훈장보다 이 ‘훈장’이 더 높은 포상으로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것도 월계관보다는 내전을 수습하여 로마 국가를 자멸에서 구한 공로를 나타내는 ‘시민관’이었다.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고대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말에 불과했고, 무력이나 권력을 연상시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신성하다는 뜻이긴 하지만, 다신교 세계인 로마에서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권위는 아니다.


하지만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은 실제로는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권력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얻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그것은 단순한 위신이 아니라 14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최고 권력자의 위신이다.


기원전 27년은 당시의 많은 로마인이 공화정 복귀를 경축한 해였다. 하지만 후세인들에게 기원전 27년은 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가 된다. 그해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하게 된다.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Julius Caesar Augustus)


'내각' 창설


600명으로 정원을 줄여 원로원 재편성을 결행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36세가 되자마자 ‘콘실리움 프린케피움’(제일인자 보좌위원회)을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요즘말로 하면 내각이다. ‘council’의 어원이기도 한 이 ‘콘실리움’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원로원 권고’와 똑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그 구성은 프린켑스(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오늘날의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프라이토르),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 재무관(켄소르), 안찰관(아이딜리스), 여기에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15명이 추가된다.


원로원에서 선발된 인원이 15명이라서 숫자만 보면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생각과 다른 정책을 제출하려 해도, 집정관인 아우구스투스가 거부권을 발동하면 눌러버릴 수 있다. 따라서 ‘콘실리움’의 결의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였다.


속주통치의 기본방침


기원전 27년에 이루어진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는 당연히 속주 총독 임명권을 원로원에 반환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권력자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 감격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속주의 군사도 추가로 맡아달라고 의뢰하기까지 했다.


당시 로마 국가의 영토는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첫째, 알프스에서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본국 이탈리아.

둘째, 원로원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속주(프로빈키아). 역사에서는 ‘원로원 속주(Senatorial provinces)’라고 부른다.

셋째,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 역사에서는 ‘황제 속주(Imperial provinces)’라고 부른다.

넷째, 특수한 정세 때문에 정복자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영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집트.

여기에 동맹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 즉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외교와 군사에서 로마를 추종하는 나라들이 추가되어,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권이 구성된다.

속주로 편입된 지 오래여서 로마화(로마인 자신은 문명화라고 불렀다)의 역사도 길거나, 로마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전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은 지역을 ‘원로원 속주’로 분류하였다. 여기는 원로원이 임명한 전직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1년 임기의 총독을 맡아서 ‘무보수’ 명예직으로 통치한다. 그들은 말썽거리가 적은 속주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환영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하는 ‘황제 속주’는 이베리아반도 대부분,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 일리리쿰, 달마티아 지방, 소아시아 남동부의 킬리키아 속주와 시리아 속주 등인데, 이 ‘황제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하는 장군들이 통치한다.


이로써 원로원은 군통수권까지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겨준 셈이다. 책무를 싫어하면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싶어서 속주를 이런 식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안전보장'


공화정 시대야말로 팽창의 시대였고, 제정은 반대로 방위의 시대였다. 더 이상 통치 지역을 확대하는 것은 로마에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점에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일치하였고, 안전보장의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하게 된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최소한의 방위력인 4개 군단 규모를 넘는 상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에 쫓길 때마다 징집한 병사들로 군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적의 선제공격에 뒤늦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오로지 방위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설 군사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이 군제개혁이 군비축소와 병행하여 이루어진 점도 흥미롭다. 상비군이 되면,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 정도가 기원전 27년 가을까지 35세의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정책들이다. 그에게는 카이사르가 남긴 청사진을 현실화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청사진에 따라 당장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독재라는 의혹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먼저 토대를 쌓는 일에만 충실하자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주춧돌 위에 돌을 쌓기 전에 잠시 시간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의 눈에 명쾌해 보이고 평판도 높이는 일, 즉 『업적록』에 명기할 수 있는 사업을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명분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완전 제패’였다.


서방 재편성


기원전 27년 가을, 36세를 맞이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났다. 아우렐리아 가도를 지나 남프랑스로 들어간 그와 동행한 사람은 ‘오른팔’ 아그리파였다. 그밖에 두 소년의 얼굴도 보였다. 16세의 마르켈루스와 15세의 티베리우스다.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전쟁터를 처음으로 체험시킬 작정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 결혼에서도 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현재의 에스파냐 북부에 사는 산악민족을 제압하는 일은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아그리파에게 맡겼다. 아그리파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의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총사령관은 계속 타라고나에 머물러 있었다. 두 차례의 전투로 에스파냐 북부의 산악민족을 제압하는 데에는 2년도 걸리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로 개선한 것은 기원전 23년이었다. 이 3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무엇을 했을까.


갈리아 재편


우선 기원전 27년 겨울에 그는 갈리아 문제를 처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로마가 내전에 시달리던 14년 동안은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패권을 뒤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계속 로마의 속주로 남아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갈리아 전체가 1년에 통틀어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로마에 바치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가 안정을 되찾은 기원전 30년부터는 갈리아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해방노예가 그 원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었던 그 해방노예는 융통성없이 갈리아에도 다른 속주들과 똑같이 ‘10분의 1세’를 부과하려고 했다. 갈리아 부족장들이 여기에 반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원전 28년에 실시된 국세조사 결과를 보았다면, 갈리아 부족장들도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속주세는 너무 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결국 갈리아도 다른 속주들과 같이 ‘10분의 1세’를 내기로 속주세 제도가 개정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 대신에 갈리아에서 2.5퍼센트였던 관세율을 1.5퍼센트로 인하했다.


세제 개정에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전역을 재편성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북쪽은 도버해협과 북해,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피레네산맥과 지중해, 동쪽은 라인강과 알프스산맥으로 둘러싸인 갈리아 전역은 크게 다섯 지방으로 나뉘었다.


1.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리는 남프랑스 속주 - 로마의 속주로서 역사가 이미 200년이나 된 이 지방은 로마화가 많이 진행되어, 갈리아에서도 이곳 남프랑스만은 ‘원로원 속주’가 되어 있었다. 속주세는 수입의 10퍼센트, 관세율도 본국과 같은 5퍼센트였다.


2. 아퀴타니아 속주 - 이 지역에서는 작은 봉기가 일어나 아그리파가 진압하였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가론강 이북의 강력한 부족인 오베르뉴족이나 비투리지족과 혼합하는 방책을 채택하였다. 이 속주의 수도로 결정된 것은 부르디갈라(오늘날의 보르도)였다.


3.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 갈리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 속주에는 루아르강에서 센강 유역까지, 남쪽으로는 손 강과 론강의 합류점에 자리잡은 리옹까지 포함된다. 수도는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는 ‘리옹 속주’라는 뜻이기도 하다.


4. 벨기카 속주 - 이곳은 센강과 마른강에서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지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방과 링고네스족, 세콰니족, 트레베리족이 사는 지방을 합하여 ‘벨기카 속주’라는 이름으로 재편성했다. 이 지방의 유력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뒤로는 일관되게 친로마파였던 레미족이다.


5. 게르마니아 속주 - 라인강 서쪽 연안 일대를 가리킨다. 라인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한테서 갈리아를 지키는 최전방인 만큼, 이 속주의 수도도 라인강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였다. 라인강 방어선은 카이사르가 선을 긋고 아우구스투스가 토대를 쌓기 시작한 뒤, 100여 년에 걸쳐 역대 황제들이 차츰 완성해갔는데, 군단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지정학적 측면을 배려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군사적 속주인 게르마니아 속주를 제외한 3개 속주를 그 지방 유력 부족의 관할 아래에 두는 방식을 채택했을 것이다. 아퀴타니아 속주는 오베르뉴족,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는 하이두이족, 벨기카 속주는 레미족이 관할하는 식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오직 지형만을 선택 기준으로 삼아 수도를 정했다. 보르도, 리옹, 트리어는 모두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아니, 교통망을 정비하는 것은 로마인이니까,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는 지형이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이다. 유력 부족인 레미족의 근거지인 랭스, 하이두이족의 근거지인 오툉은 로마의 갈리아 지배 기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통망즉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은 이들 도시도 배제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법의 절반도 중앙집권화한다. 속주에 살아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항소권이 인정되어 있었고, 속주민에게도 총독을 고소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최종 재가를 내리는 것은 로마의 ‘제일인자’ 아우구스투스의 임무가 되었다. 속주 총독은 지방법원의 재판장, 아우구스투스는 대법원의 재판장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국세청' 창설


'프로쿠라토르 임페리알레’라고 불리게 된 이 관직을 신설한 것이야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속주 통치체제의 요체라 해도 좋은 개혁이었다. 이 ‘황제 재무관’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다. 급료는 지불되지만, 징세액의 10퍼센트였던 수수료는 절약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유효했다.


‘황제 재무관’ 체제를 도입한 목적은 세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속주에서 징세의 공정성 확보, 둘째, 제국 통치라는 웅대한 청사진에 따라 세금을 배분할 수 있다는 이점, 셋째, 통치의 연속성 확립이다. 황제 재무관의 임기도 아우구스투스가 결정하기 때문에, 10년 이상 근무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속주의 가도 건설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속주의 가도 건설이 비약적으로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업은 아그리파가 주도하여, 리옹 같은 곳은 4개 가도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나는 서쪽의 아퀴타니아로 이어지는 가도. 또 하나는 북서쪽의 대서양으로 향하는 가도. 세 번째는 북동쪽의 라인강으로 달리는 가도. 네 번째는 론강을 따라 남쪽의 마르세유에 이르는 가도. 도로망 건설붐이 일어난 것은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갈리아 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원래 군용도로로 건설된 가도망은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민간 경제 진흥과도 연결된다.  물자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교류도 왕성해진다. 사람의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두뇌에 들어 있는 지식과 가슴에 들어 있는 생각도 교류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로마 문명을 기둥으로 하는 일대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속주 재편성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서도 카이사르가 편성한 속주를 재편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베리아반도를 남부의 ‘베티카’ 속주, 서부의 ‘루시타니아’ 속주, 동부와 제패를 끝낸 북서부까지 포함하여 이베리아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삼분했다.


베티카 속주는 ‘원로원 속주’다. 로마화의 역사가 길어서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루시타니아 속주와 함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가 되었다. 실제로 에스파냐에 주둔시키기로 결정된 4개 군단은 얼마 전에야 제패한 북서부를 에워싸듯이 ‘황제 속주’인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배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사라고사와 메리다에 많은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콜로니아)를 건설했다. 갈리아 원주민과는 달리 에스파냐 원주민에게는 지도자가 될 만한 유력한 부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주한 로마 시민들은 원주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로마군에서 병역을 치르고 있는 현역 병사들은 독신 의무를 지켜야 한다. 만기 제대할 때에는 마흔 살 안팎이 된다. 이 나이의 독신 남자가 이주하여 현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로마의 식민 방식이다.


'행운의 아라비아'


기원전 26년부터 기원전 24년까지, 아우구스투스는 딱 한 번 전쟁을 한다. 국토 방위의 필요성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싸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원정이었고, 그것도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그 전초전은 에티오피아 원정이었는데, 이 원정에는 속주로 편입된 이집트의 남쪽 방위선을 확립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무렵 ‘아라비아 펠릭스’(행운의 아라비아)라고 불린 현재의 예멘까지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시도했다고 말한 것은 그 원정에 파견된 병력이 2개 군단도 채 안 되는 소규모였기 때문이지만, 이 원정은 방위선 확립을 외치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그의 관점에서는 보기 드문 예외가 되었다.


‘행운의 아라비아’는 거기에 사는 아랍인이 그렇게 자칭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 사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붙인 이름인 것 같다. 향료와 몰약, 진주, 보석, 그리고 인도를 거쳐 오는 중국산 비단 같은 고급품을 거래하여 돈을 버는 행운을 타고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 홍해 입구를 장악하면 동방에서 들어오는 물자 교역에 따른 이익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로마는 홍해의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라비아 쪽의 레우케코메와 이집트 쪽의 베레니스, 그리고 나일강 연안의 콥트에 세관을 설치했다. 로마의 관세는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5퍼센트, 저개발 지역인 갈리아에서는 1.5퍼센트였지만, 동방에서 들어온 고급품에 대해서는 무려 25퍼센트나 되는 관세가 부과되었다.


[AD 117 로마의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북서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왕국의 왕조가 단절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탑수스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자결한 누미디아 왕의 아들을 마우리타니아 왕위에 앉혔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상류층 자제와 똑같은 교육을 받은 이 왕자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이집트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북서 아프리카도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하는 ‘팍스 로마나’의 일익을 평화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기원전 24년 말, 로마 세계의 서반부 재편성을 끝낸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은 거행하지 않고 ‘선물’만 나누어주었다. 호주 1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가 선물로 주어졌다. 대장부답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카이사르가 나누어준 ‘선물’과 같은 액수였다. 그리하여 통이 크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확립되었다.


'호민관 특권'


기원전 23년,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또다시 사람들이 예상치도 않았던 선언을 하고, 당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때까지 연속해서 취임해왔던 집정관직을 동료 아그리파와 함께 사임하고, 앞으로 집정관은 공화정 시대처럼 해마다 민회에서 투표로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감격한 의원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겸손’한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1년 기한으로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호민관 특권이란 호민관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1. 신변 불가침권
2. 평민 대표로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지위
3. 평민집회 소집권
4. 정책 입안권
5. 거부권(베토)


‘호민관 특권’을 원한 그의 참뜻은 신변 안전보다는 평민집회 소집권과 정책 입안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부권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평민집회를 소집하여 그가 입안한 정책을 가결시키면, 원로원이 반대하더라도 평민 입법의 형태로 정책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평민집회의 결의는 집정관이 소집권을 갖는 민회에서의 결의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게다가 거부권은 원로원 결의나 집정관이 입안한 정책도 백지로 돌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다.


이러한 ‘호민관 특권’을 획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지도자로서, 아니 황제로서 공적 지위를 확립했다. 그 증거로, 그 후 황제들의 공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명칭을 계승하게 된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 여기까지는 모든 황제가 똑같고, 그다음에 비로소 각자의 이름이 나온다.


화폐개혁


로마에는 오랫동안 화폐라고는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금화는 개선식이나 그밖의 기회에 기념으로 만들어져 배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통화는 아니었다. 물론 금화는 금의 함유량이 100퍼센트인 순금이니까, 갖고 있어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른바 ‘통화’는 아니었다.


이 금화를 통화에 편입시킨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는 금과 은의 상대적 가치를 1 대 12로 정하고, 동전 주조는 원로원의 권한으로 남겨두었지만,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종신 독재관인 자신의 권한으로 만든 단계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화폐제도를 확립하려던 그의 시도도 암살로 중단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시도를 되살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추진할 권한과 개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의 개혁이 철저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덕분에 제국의 경제력 변화에 따라 금속 함유량은 달라져도, 제도 자체는 서기 4세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계속 유지되었다. 제정 초기에 화폐제도 개혁을 단행한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단 하나,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축통화 확립과 그에 따른 제국 전체의 경제 활성화였다.

카이사르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


무덤에는 무관심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스 광장 북쪽 끝에 지금까지 아무도 세운 적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영묘’(마우솔레움)를 지은 것은 귀족 출신이 아닌 자신과 가족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포로 로마노 확장 계획의 첫 번째 사업인 ‘카이사르의 포룸’과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무찌른 기념비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의 건설 계획에 나타난 차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포룸’에 서 있는 조각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신전 안에 놓여 있는 비너스 여신상, 즉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율리우스 씨족의 수호신인 ‘위대한 어머니 베누스’(베누스 게니트릭스)의 대리석상이고, 또 하나는 신전 앞에 펼쳐진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카이사르의 청동 기마상이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그 전체를 장식하는 조각상 중에서 주요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난 수에 이른다. 우선 광장 한복판에는 말 네 필이 끄는 전차에 올라탄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이 서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전쟁과 복수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것은 납득이 간다. 또한 신전 안에는 마르스 신상, 그 왼쪽에는 베누스 여신상, 오른쪽에는 신격 카이사르 석상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도 이 ‘포룸’을 바친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요한 조각상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자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로 되어 있는 아이네이아스, 그 손자인 실비우스, 그 친척들, 율리우스 씨족이 처음에 살았던 알바롱가의 왕들, 로마가 공화정이 된 이후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위인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듯한 느낌이다.

[카이사르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 출처 본문]

또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였던 시절에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악티움에서 대결하기 전날 밤 아폴로 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 그래서 개선하자마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아폴로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그때까지 아폴로는 로마 사회에서 중시한 신들 중에는 끼어 있지 않았다.


그전까지 신들이 사는 성역으로 되어 있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신전을 가진 것은 유피테르(그리스에서는 제우스), 그의 아내인 유노(헤라),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아테나)였다. 로마 최고 권력자의 수호신이 된 덕분에 로마의 신들 사이에서 아폴로의 지위가 높아졌지만, 카이사르처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수호신을 갖지 못한 아우구스투스의 고심 어린 선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선거제도 개혁


집정관 선거가 재개되어 시민(유권자)의 정치의식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기원전 23년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선거제도를 개혁할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카이사르가 건설하기 시작한 ‘사이프타 율리아’(의역하면 율리우스 투표소)는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했다. 판테온 동쪽에 인접해 있던 이 투표소는 세로 120미터, 가로 300미터의 넓은 회랑으로, 주위에는 원기둥이 늘어서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선거제도 개혁이 ‘개혁’이었던 이유는 로마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 투표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도시국가의 역사 때문에 선거는 수도에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은 부재자 투표를 인정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선거는 활기찬 행사인 만큼, 그대로 방치해두면 선거법 위반 행위도 활기를 띠기 쉽다. 아우구스투스는 선거법 위반에 대한 벌칙도 법제화했다. 후보자는 의무적으로 일정액의 공탁금을 내야 했다. 선거법을 위반하면 공탁금은 몰수되어 국고로 들어간다. 다만 후보자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은 인정되었다.


공화정 시대에도 일정한 공직을 거치면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무관이 대상자를 검토하여 원로원 의석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했다.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 역임자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재무관이 가부를 결정하는 제도를 폐지한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한다. 다만 그 추진 방법은 달랐다. 카이사르는 임기가 끝났을 때 최소한 31세가 되어 있는 원로원 의원 후보자에게 그 시점에서 합격이나 불합격을 통고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4년의 유예 기간이 있다.


로마 시대의 '노멘클라투라'


로마의 유력자들은 옛날부터 외출할 때는 ‘노멘클라토르’라고 부르는 노예를 동반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력자니까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으면 다가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이면, ‘노멘’(이름)을 ‘클라토르’(일러주는 자)의 역할을 맡은 노예가 얼른 주인에게 상대의 이름을 속삭인다.


선거운동 중에는 ‘노멘클라토르’가 기억해야 할 자료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노멘클라토르’는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였는데, 정보통인 만큼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받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서 식사하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연회가 열릴 때는 손님들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로마의 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의 선거운동만이 아니라, ‘추천’이라는 형식으로 최고 권력자의 선거운동도 이루어졌다. 이것을 적극 활용한 사람이 비민주적으로 여겨지는 정치체제인 제정을 추진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카이사르는 추천서를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추천서를 보내지 않았다. 선거 때가 되면 넓은 ‘사이프타 율리아’에 장막 따위를 쳐서 선거구별로 구획을 만들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자파 후보자를 거느리고 그 모든 구획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자기가 추천한 후보자에게 표를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제정으로 가는 길은 아우구스투스의 이 같은 탁월한 수완으로 차츰 다져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이 잠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이 실시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덕분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의원들의 거리낌없는 언동을 꾹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핏줄에 대한 집착


이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말에 처음으로 집안의 비극을 겪는다.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가 느닷없이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40세의 아우구스투스가 외동딸 율리아를 시집보내고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젊은이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례식에서 조사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읽었다. 이 마르켈루스가 영묘에 매장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10년 뒤에 완공된 극장 이름을 ‘마르켈루스 극장’(테아트룸 마르켈리)이라고 짓기도 하였다.

[마르켈루스 극장 출처 구글 이미지]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달랐던 점은 핏줄을 이어가는 데 끝까지 집착했다는 것이다. 16세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는 남편의 상을 벗자마자 재혼했다. 새 남편은 17세 때 카이사르의 배려로 아우구스투스와 짝을 이룬 뒤 줄곧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이미 옥타비아의 딸인 마르켈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따라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핏줄을 잇는다는 면에서도 성공이었다. 2년 뒤에 맏아들이 태어났고, 다시 3년 뒤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마흔세 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기원전 22년, 41세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국정개혁은 여기서 4년쯤 중단된다. 아우구스투스가 더 이상의 개혁을 추진하기 전에 다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동반부 재편성과 그동안 미루어둔 파르티아 문제 해결이었다.


동방 재편성


오늘날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중앙부는 고대에는 갈라티아 지방이라고 불렸다. 로마가 공화정이었던 시대에는 동맹국, 로마인의 표현으로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였다. 그런데 기원전 24년에 갈라티아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지막 왕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듣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재빨리 동방으로 보냈다. 그것도 실제로는 황제인 자신의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주어서 파견했다. 말하자면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특명 전권대사다. 아우구스투스의 참뜻은 이번 기회에 갈라티아를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만, 군사력은 사용하지 않고.


동방에 파견된 아그리파는 군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또한 갈라티아에는 직접 들어가지 않고, 소아시아 서해안 근처에 있는 레스보스섬에 머물면서 갈라티아를 평화적으로 속주화하려는 교섭을 시작했다.

시칠리아


기원전 22년에 동방을 재편성하기 위해 수도를 떠난 아우구스투스는 길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여행은 느긋하게 시작되었다. 최초의 행선지는 시칠리아섬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700년이나 된 그리스 이민의 정착지 시칠리아에는 이미 시라쿠사·카타니아·메시나·팔레르모·트라파니·마르살라·아그리젠토 등 7개 주요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이 모두 항구도시인 까닭은 해운과 통상의 민족인 그리스인이나 카르타고인이 건설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우선 이 7개 도시를 충실하게 하려고 애쓴다. 7개 도시를 잇는 도로망은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와 내륙을 횡단하고 종단하는 도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륙 도로를 건설한 것은 그리스인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은 내륙지방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속주로 남은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입의 10분의 1인 속주세를 내야 했다. 하지만 수입이 많아지면 세금을 내고도 남는 액수가 많아진다. 이 시칠리아 속주만이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도 군대는 1개 군단도 주둔하지 않았다. 주둔시킬 필요도 없을 만큼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이듬해인 기원전 21년, 아우구스투스의 순행지는 그리스로 옮겨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재건 구상은 자치도시와 식민도시, 그리고 그 도시들을 잇는 도로망 건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치도시란 도시국가로서 완전한 자치를 인정받고,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도 가지며, 당연한 일이지만 속주세도 면제되는 도시를 가리킨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니코폴리스를 포함하여 열 개가 채 안 되는 자치도시가 특별지구로 존재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이런 특전이 인정된 것은 이 두 도시국가의 역사를 로마의 역대 통치자들이 존중했기 때문이다.


식민도시란 로마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퇴역병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주민은 로마 시민이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고속도로로 생각할 수 있는 로마식 가도는 그때까지는 이그나티아 가도 하나뿐이었지만, 이것이 자치도시와 식민도시를 잇는 도로망으로 차츰 발전해간다.


아우구스투스가 경제 부흥이야말로 그리스 재건의 열쇠라고 믿었다는 증거는 아테네 북부에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시장을 지어서 아테네 시민에게 기증한 것에도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아테네시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 세우고,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조각상을 만들어 그 신전 안에 세우는 것으로 보답했다.

소아시아와 갈라티아 속주


공화정 시대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은 동맹관계를 축으로 삼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페르가몬 왕이 죽으면서 나라를 로마에 맡기자 그것을 속주화했을 뿐, 소아시아의 각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군사력이 우세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소아시아 전역을 속주화하는 것을 되도록 피해왔다.


로마의 동맹국인 각 왕국은 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군주정이 오리엔트인의 기질과 결부되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래서는 로마의 패권 밑에서 소아시아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갈라티아를 직할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이웃 나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군단을 이용하지 않고 그 일을 끝내고 싶었다. 특명 전권대사에다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 자격까지 얻어 실제 교섭에 나선 아그리파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약속하여 갈라티아 유력자들과의 교섭을 성사시켰다.

(1) 부채 상환 기간의 연기.
(2) 속주세의 공정 과세.
(3) 속주 총독의 통치 지역을 명확하게 한다.
(4)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는 대신,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시리아 속주


오늘날로 치면 터키 남동부의 일부에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합해야만 겨우 로마 시대의 시리아 속주가 된다. 이렇게 땅이 넓은 만큼 민족 구성도 복잡해서, 그리스계와 페니키아계와 셈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속주는 대국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따라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를 ‘황제 속주’로 삼고, 평시에도 4개 군단을 주둔시키기로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헬리오폴리스(오늘날 레바논의 발베크)에 군단기지를 건설하고, 병사들이 변경에서도 쾌적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공공시설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대상로를 고려하여 그 연변에 있는 도시들을 진흥시키는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먼저 다마스쿠스와 팔미라에 진흥책이 집중되었다. 안티오키아와 팔미라 사이, 팔미라와 다마스쿠스 사이, 다마스쿠스와 베리투스(오늘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사이, 베이루트와 안티오키아 사이, 발베크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잇는 도로망이 정비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돈과 티로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페니키아 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도시 시돈과 티로가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의 혼란기에 이 두 도시에는 로마에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거기에 머물고 있던 로마 상인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도시에서 ‘자유도시’의 자격을 박탈하고, 시리아 속주에 속하는 일개 도시로 격을 낮추었다.


유대 문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왕(라틴어식 이름은 헤로데스)'을 유대 쪽에 가질 수 있었다. 헤롯 왕은 기원전 73년에 태어났으니까, 아우구스투스보다 열 살 위다. 기원전 40년, 유대를 침공한 파르티아군은 당시의 왕을 생포하고 친파르티아파인 왕의 동생을 왕위에 앉힌다. 퇴위당한 왕의 고관이었던 헤롯은 로마로 망명했다.


33세의 헤롯은 명석한 두뇌와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강한 의지로 로마 지도층의 호의와 신뢰를 얻고 있었다. 헤롯은 곧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한테서 받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간다. 반격은 성공하여, 그는 유대 왕위에 올랐다.

[헤롯 왕 출처 구글 이미지]

유대 왕국은 로마의 ‘클리엔테스’로 존속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물론 유대인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롯 왕의 친로마 정책도 철저했다. 유대 국내에도 그리스·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 표시로 사마리아를 세바스티아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파르티아 문제


로마가 파르티아 왕국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로마의 동쪽 방어선이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파르티아를 로마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도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리엔트의 평화를 유지하는 열쇠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총사령관의 품격은 있지만 전투를 지휘하는 재능은 없었다. 아그리파는 용장이지만 천재적인 사령관은 아니었다. 그에게 맡겨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한 기원전 30년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의 속주를 위협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급하지 않게 치밀한 준비를 해 나갔다.


기원전 21년, 아테네에서 사모스섬으로 이동한 아우구스투스는 동행한 티베리우스에게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고 있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얕보고 있던 로마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란 아르메니아 궁정은 아르탁세스 왕을 죽이고, 사절을 급파하여 로마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친히 동방에 진입했을 때부터 파르티아에는 경계경보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방 아르메니아가 로마 쪽으로 돌아섰다. 파르티아 왕 프라테스 5세는 로마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그동안 방치해둔 강화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33년 전의 크라수스 군대와 15년 전의 안토니우스 군대가 빼앗긴 은독수리 깃발은 모두 반환되었다. 하지만 33년 전에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파르티아군이 전사자한테서 빼앗아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로마 장병들의 갑옷과 무기는 반환되었다.


보스포루스 왕국


흑해의 북쪽 끝, 돈강이 흘러드는 아조프해를 끼고 있는 보스포루스 왕국과 동맹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계 주민이 지도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광대한 흑해를 사이에 두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주보고 있는 이 작은 왕국도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였다.


하지만,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분쟁 조정에 나선 아그리파 덕분에 여왕을 정점으로 하는 안정된 정권이 성립되었다. 로마는 보스포루스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흑해 쪽에서도 아르메니아 왕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보스포루스 왕국 출처 구글 이미지]

이집트


로마에 정복된 피점령국이면서도 통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나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뒤의 이집트였다. 이 나라만은 아우구스투스 개인 영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물론 당시의 로마인들도 이집트를 국가 로마의 소유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는 그리스계 주민을 피정복민으로 억압하지 않고, 그들이 로마인과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에 착안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이집트 경제를 활성화한 것이다. 이집트 경제의 토대는 나일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농업’에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나일강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로망 정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농업 활성화는 ‘사회간접자본’ 정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 토지 사유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는 신전 소유지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의 경작지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소유지를 불하하여 자작농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연상시키는 정책이다. 이러한 관개 공사와 가도망 정비, 그리고 농경지 사유제의 도입은 이집트의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 도입한 마지막 개념은 정교분리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앞다투어 땅을 기증했기 때문에, 각 신전의 영지는 광대해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영지들을 몰수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은 소작인들이 나라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임차 형식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정교분리 정책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을 뿐, 종교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 배제하기는 커녕 이집트 신전 수리와 신축 공사는 차츰 로마황제들의 일거리가 되었다.


수도 로마로 돌아오다


그리스를 거쳐 귀국길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잠시 들른 아테네에서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그보다 일곱 살 위인 이 시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자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시조인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고 있는 문인이었다. 황제는 병에 걸린 시인을 데리고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기원전 19년 9월 21일, 로마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는 브린디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사시 『아이네이아스(AENEIS)』는 아직 퇴고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시인은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원고를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와 아이네이아스 출처 구글 이미지]

3년 만의 귀환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원로원의 결의로, 집정관 퀸투스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과 법무관, 호민관을 포함한 일행이 캄파냐(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까지 마중 나와 나를 영접했다. 이런 명예는 나 말고는 이제껏 아무도 받은 적이 없다.”


정작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일은 『업적록』에 자세히 남기는 것이 미소를 자아낸다. 전투도 하지 않고 정복한 땅도 넓히지 않은 채 돌아온 황제를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로마인이 많았던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행운이기도 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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