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높은 황제들 - 칼리굴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중기까지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서기 37년~서기 41년)
젊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사망과 칼리굴라의 등장을 로마 제국에서도 특히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의 주민들은 길고 침울한 겨울이 지나고 화창한 봄이 찾아온 듯한 기쁨으로 맞이했다. 77세의 늙은 황제를 뒤이은 것은 24세 7개월의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이것만으로도 민심을 새롭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칼리굴라의 등장은 말하자면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특히 라인강 방위선의 8개 군단은 칼리굴라의 즉위를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시절을 라인강 연안의 군단 기지에서 보낸 새 황제는 병사들이 만들어준 유아용 칼리가(로마 군화)를 신고 놀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본명인 가이우스가 아니라 칼리굴라(작은 군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총사령관이었던 게르마니쿠스는 세 아들을 두었지만, 군단병들의 마스코트가 된 것은 셋째 아들 칼리굴라뿐이었다. 그 칼리굴라가 이제 황제가 된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즉위했을 때와는 달리, 칼리굴라가 즉위했을 때는 봉급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스트라이크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폴리 서쪽의 미세노에서 티베리우스가 숨을 거둔 것은 서기 37년 3월 16일이었다. 이튿날 로마 전체가 황제의 죽음을 알았다. 그리고 3월 18일에 이미 원로원은 모든 권력을 칼리굴라에게 주기로 의결했다. 티베리우스의 유해와 함께 수도로 가고 있던 칼리굴라의 모습도 보기 전에 제국 통치권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3월 28일, 선황 티베리우스의 유해가 로마에 도착했다. 칼리굴라는 아피아 가도 종점까지 마중나온 두 집정관과 함께 원로원으로 갔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에 칼리굴라가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자, 원로원은 또 하나의 선물을 주기로 의결했다. 그것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55세의 나이로 이 존칭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국가의 아버지’가 된 것은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로서 30년 세월을 보낸 61세 때였다. 이런 영예를 칼리굴라는 25세 생일에 증정받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시정(施政) 연설’을 하면서, 티베리우스 시대와는 정반대의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원로원 의원들도 일반 시민들도 이 선언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주된 내용은 “밀고자(델라토르)라고 불리는 정보원 제도를 폐지하고, 주요 요직을 다시 민회에서 선출하며, 평판이 나쁜 세금(1퍼센트의 매상세)은 폐지하고, 티베리우스와 달리 로마에 살면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 등이다.
티베리우스의 장례는 조용히 치뤄졌고, 유언도 시민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는 유증금 외에는 모두 무시되었다. 칼리굴라가 무시한 게 아니라 원로원이 무시했다.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손자인 게멜루스에게 제위 계승권을 균등하게 남겼지만, 원로원은 칼리굴라 한 사람에게만 계승권을 인정했다. 칼리굴라가 오히려 제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한 게멜루스를 양자로 삼았을 정도였다.
젊은 황제는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 외항인 오스티아에 준비해둔 배에 오른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출항시켰다. 목적지는 벤토테네섬과 폰차섬이었다. 유배 중에 거기서 사망한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사람의 유해는 ‘황제묘’에 매장되고, 이 일을 새긴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장 과정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가 타계하기 2년 전인 서기 12년 8월 31일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서 태어났다. 안치오는 오늘날 어촌에 불과한 작은 도시지만, 고대에는 로마 상류층의 호화 별장들이 늘어서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해변도시였다. 칼리굴라의 다음다음 황제가 되는 네로도 여기서 태어났다.
두 살부터 네 살까지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라인강 연안 군단 기지에서 ‘칼리굴라’라는 애칭을 얻고, 로마에 돌아 왔다가 그해 말에 오리엔트로 임지가 바뀐 아버지를 따라 5세의 칼리굴라도 그리스를 가로질러 소아시아를 돌아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을 경험했다.
이듬해 6세의 칼리굴라는 역시 부모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돌아온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은 서기 19년 10월 10일, 이제 갓 33세가 된 게르마니쿠스가 세상을 떠났다. 칼리굴라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읜 셈이다.
어머니와 맏형이 유배된 뒤 칼리굴라는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맡겨진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나,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에게 시집간 여인이다. 그 시절 칼리굴라에게는 트라키아 왕자나 유대 왕자 등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학우 겸 놀이 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17세부터 19세까지의 이 2년이 칼리굴라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런 외국 왕자들한테서 칼리굴라는 큰 영향을 받았다.
19세에 카프리섬에 불려 가 늦은 성년식을 치른 지 2년 뒤, 21세의 칼리굴라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로마의 지도자 계급에서 태어난 사람의 책무인 공직 경력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해에 칼리굴라는 첫 아내를 맞았다. 같은 해 초에는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 지하실에 유폐되어 있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고, 가을에는 벤토테네섬에 유배된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죽었다.
첫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3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서기 36년,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아벤티노가 완전히 불타버린 해에 젊은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도 살아나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서기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었다.
치세의 시작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안팎으로 적이 없는 평화로운 제국과 건전한 국가 재정과 막대한 흑자였다. 로마 제국은 이제 외적이 침입할 우려도 없고, 내부의 적도 싹이 자라기 전에 제거되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세금을 인상하지도 않고 신설하지도 않은 채 건전한 국가 재정을 이룩하여, 필요한 비용을 지출하고도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자금을 저축할 수 있었다.
칼리굴라가 로마에 들어온 3월 28일부터 ‘국가의 아버지’가 된 9월 27일을 지나 10월 말까지 7개월 동안 수도 로마는 날마다 명절 같은 분위기였다. 날마다 어딘가에서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경주나 체육대회가 열리고, 연극이 상연되었다. 신전에서는 칼리굴라의 치세가 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그 해 10월, 이제까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민중 앞에 나타나 사람들의 환호를 받곤 했던 칼리굴라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칼리굴라는 아직 젊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건강해서 이제껏 한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열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깜짝 놀랐다.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는 물론 먼 속주에서도, 심지어 일신교를 믿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그래서 로마의 병역도 면제받고 있는 유대인들까지도 칼리굴라의 쾌유를 빌며 제물을 바칠 정도였다. 칼리굴라가 차츰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춤을 추었다.
칼리굴라는 즉위할 때 티베리우스와 정반대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정치는 세금 폐지나 축제나 볼거리 등 자신의 인기를 높여주는 ‘화려한’ 일에만 한정되었고, 속주 통치나 변경 방위 등 일반 서민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수수한’ 분야에서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완쾌한 최고권력자가 맨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양자로 삼았던 게멜루스를 죽인 것이었다. 선황 티베리우스의 유언으로 칼리굴라와 동격의 계승권을 부여받은 게멜루스는 티베리우스가 죽은 지 8개월도 지나기 전에 제거되었다. 황제의 완쾌를 기뻐한 세상 사람들은 25세의 황제가 18세의 제위 계승자를 죽인 것을 완전히 묵인했다.
신으로
서기 37년 겨울부터 38년 초여름까지 7개월 동안이 젊은 최고권력자가 가장 권력에 도취할 수 있었던 시기였으리라. 그런데 25세의 칼리굴라가 생각한 ‘권력’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가 생각한 ‘권력’, 다시 말해서 로마적인 권력이 아니라, 소싯적의 학우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오리엔트 왕자들이 가르쳐준 동양적인 권력이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에서는 신들에게 계급이 있어서, 최고신 유피테르(그리스의 제우스)와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 그리고 여신인 유노(헤라)와 미네르바(아테네)와 베누스(아프로디테), 남신인 마르스(아레스)와 아폴로(아폴론)가 일급 신으로 되어 있다. 죽은 뒤에 신격화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신으로서는 2급 내지 3급의 지위를 감수해야 한다.
그가 바란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와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을 조각할 때처럼 벌거벗은 상반신에 맨발을 드러낸 모습에다가 제우스를 흉내내어 머리와 수염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모습으로 원로원에 나타난 칼리굴라를 보고 아연실색한 의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세간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젊은이나 서민들은 “재미있잖아” 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칼리굴라는 젊은이나 서민들과 취향도 비슷했다.
쾌락
칼리굴라가 해금한 오락을 대표하는 것은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다. 둘 다 서민들이 열광하는 경기였다. 칼리굴라의 발안으로 프로 검투사의 1 대 1 시합이 프로 검투사와 아마추어인 중죄인의 대결로 바뀌었다. 칼싸움 기술을 전혀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시합에 나서면 경기는 더욱 잔혹해진다. 서민들이 여기에 열광한 것은 당연했고, 그 경기의 후원자는 칼리굴라였다.
전차경주를 좋아했던 칼리굴라는, 훗날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지는 바티카누스(오늘날의 바티칸) 땅에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로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지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테베레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서 개인용 경기장을 짓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기원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대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다. 칼리굴라도 개인용이긴 하지만 ‘키르쿠스’를 짓는 것이므로 그 중앙부에 있는 띠 모양의 지대 끝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만들어,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오벨리스크를 가져왔다.
칼리굴라가 제공하는 오락에 만족한 사람들은 칼리굴라가 무슨 짓을 하든 너그럽게 용납해주었다. 칼리굴라는 얼마 전에 타계한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기로 결정하고, 원로원의 승인도 얻었다. 이 존칭은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인 리비아에게 주어진 전례밖에 없다. 안토니아는 사춘기 시절의 칼리굴라를 맡아서 키워준 사람이다. 하지만 칼리굴라도 유배지에서 죽은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까지는 하지 않았다.
여동생들
25세의 칼리굴라에게는 22세인 아그리피나, 20세인 드루실라, 19세인 율리아 리비아라는 세 누이동생이 있었다. 셋 다 티베리우스가 만년에 골라준 명문 출신 남자들과 결혼했다. 칼리굴라가 한 일은 황제인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자기 이름 뒤에 세 누이동생의 이름도 덧붙이게 한 것이었다.
*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은 소문이다.
누이동생들을 우대한 칼리굴라는 아내가 된 여자들한테는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칼리굴라는 21세부터 27세까지 6년 동안 무려 네 여자와 결혼했다. 하나는 죽었고, 둘은 이혼했고, 28세에 죽음을 맞이한 그와 운명을 같이한 것은 네 번째 아내인 카이소니아였다. 칼리굴라의 생애에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그림자는 비쳐도 아내들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다.
여동생들 중 아그리피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미인인 데다 머리도 좋은 야심가다(나중에 네로 황제의 어머니). 드루실라는 고전적인 미모를 가졌고, 상냥하고 섬세하다. 율리아 리비아는 수수하고 얌전한 성격이다. 오빠의 애정을 한몸에 받은 것은 다섯 살 아래인 드루실라였다. 그 드루실라가 서기 38년 21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몇몇 호위병만 거느린 채 시칠리아까지 갔는데, 로마로 돌아와서 한 일은 드루실라의 신격화였다.
공공사업
칼리굴라는 공공사업, 특히 요즘 말로 하면 사회간접자본 정비와 관련된 건설사업이 일반 시민들의 호의를 얻는 데에는 오락 스포츠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미 일곱 개의 수도가 물을 공급하고 있는 수도 로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다.
수원지에서 로마까지의 70킬로미터 가운데 10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을 고가수도로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공사는 서기 38년에 착공되어 52년에 끝나지만, 완공자의 이름을 따서 ‘아쿠아 클라우디아’(클라우디우스 수도)라고 불리게 되는 이 수도와 역시 칼리굴라가 착공한 ‘아쿠아 노부스’를 합하면 모두 아홉 개의 수도가 로마 주민에게 일인당 하루 900리터의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오늘날 로마 물 공급량의 2-3배이다).
또한 칼리굴라는 또한 식량의 자급자족 노선을 버린 지 오래인 본국 이탈리아에 ‘식’(食)을 보장하는 것이 일반 시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시칠리아에 갔을 때 깨달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밀 생산지인 이집트에서 로마로 곡물을 운송할 때 지나가야 하는 메시나 해협에 피난항을 건설하는 일이다.
서기 38년 10월, 수도 로마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사료는 이때 피해를 입은 지역이 어디였는지는 밝혀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칼리굴라는 화재로 인한 피해는 전액 국가가 보상해주기로 결정했다. 물론 시민들은 대환영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곧 찾아올 국가 재정 파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칼리굴라의 인기 정책은 전대미문의 일을 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바닷길 횡단과 초대형 선박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가면 무역항 포추올리에서 시작하여 미세노까지 해변이 이어진다. 칼리굴라는 말을 타고 포추올리(라틴어 Puteoli)와 바이아(라틴어 Baiae)를 잇는 해상을 횡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거리는 요즘 단위로 치면 5.4킬로미터. 칼리굴라는 징발한 수많은 선박을 옆으로 잇대어 포추올리에서 바이아까지 늘어놓고, 돛대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널빤지를 걸쳐놓은 다음, 그 위를 흙으로 포장하여 평탄한 도로로 바꾸었다.
바이아로 건너갈 때는 로마 기병대 스타일로 시민관을 쓰고 말을 몰고 가고, 돌아올 때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황금갑옷을 입고 그리스 스타일로 말 두필이 끄는 전차를 타고 파르티아 왕가의 볼모 왕자와 함께 행진하는 방식이었다. 끝나고 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거품’이었다. 단지 황제의 젊음과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을 뿐이다.
또한 로마 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3단 노가 보통이었던 시대에 칼리굴라는 노가 10단이나 되는 초대형 선박을 만들었다고 한다. 돛은 능직으로 짜서 햇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비단으로 만들고, 배 안에는 욕실과 살롱에 침실까지 갖추어져 있고, 갑판 위는 회랑식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배에 초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와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서 잔치를 벌이는 호사스러움을 즐겼다고 한다.
자금 마련책
칼리굴라가 즉위한 지 3년도 지나기 전에 황제의 사유재산은 물론 국가 재정까지 파탄난 것이 분명해졌다. 티베리우스가 남긴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흑자는 각종 오락 스포츠를 제공하느라 벌써 오래 전에 탕진해버렸다. 그 후로는 이리저리 돈을 변통해서 구멍을 메우고 있었지만, 즉위한 지 3년째가 가까워질 무렵에는 변통할 방법도 바닥나버렸다. 그래도 칼리굴라는 이제까지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가 없었다.
우선 그는 황실의 가재도구와 패물에서부터 노예까지 경매에 내놓기로 했다. 하지만 경매는 수도 로마가 아니라 속주 갈리아의 수도 격인 리옹에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로마에서 하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좀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을거라는 생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경매에는 갈리아 전역에서 몰려 들었다고 한다.
칼리굴라는 속주민에게만 부과되는 10퍼센트의 속주세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속주세의 감소로 이어지는 길은 철저히 틀어막기 위해 속주민의 로마 시민권 취득을 사실상 허가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속주민의 아들에게만 시민권 취득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준 ‘디플로마’(증명서)를 내보이며 항의했는데, 칼리굴라는 그렇게 낡은 증서는 무효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시내에서 팔리는 땔감에도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지만, 세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밝혀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역시 세율은 알 수 없지만, 매춘업자와 창녀에게도 수익금의 몇 퍼센트를 세금으로 부과했다. 심지어는 짐꾼한테도 하루 번 돈의 8분의 1을 세금으로 부과했다고 한다.
나아가 칼리굴라는 유산 상속인 명단에 자기 이름도 넣으라는 강제 규정을 만들었다. 상속하는 유산은 현금보다 부동산이 많고, 노예나 검투사처럼 ‘살아 있는 재산’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칼리굴라는 유산을 물려받자마자 경매에 부쳐 현금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돈이 들지 않는 한 국가나 개인이 제공하는 볼거리나 오락 스포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공한 사람에게 지지를 아끼지 않지만, 자기 돈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그때까지의 지지를 거두어버리는 법이다.
갈리아로
황제에 즉위한 지 2년 반이 지난 서기 39년 가을, 27세의 칼리굴라는 느닷없이 갈리아로 떠났다. 그때부터 이듬해 여름에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 7개월 동안 칼리굴라가 무엇을 했는지는 고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글을 통해 대충 알 수 있지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갈리아에 들어간 칼리굴라는 리옹에서 잠시 지낸 뒤 라인강 전선을 방문했다. 하지만 무슨 사정 때문인지어쩌면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군단장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지만 게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8개 군단과 보조부대를 합하여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처지였고, 게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한다면 수도 시민들이 환호하며 지지했을 게 뻔한데도 그것을 단념한 것이다.
그래도 사소한 군사행동은 있었다. 오늘날에도 적의 코앞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서기 39년 10월에 칼리굴라가 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최고사령관이기도 한 칼리굴라는 산야를 가득 메운 병사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제군의 힘과 사기는 적과 맞섰을 때를 위해 온존해두기 바란다"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브리타니아
칼리굴라는 다음 후보지로 브리타니아에 눈을 돌린다. 브리타니아 침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작한 이래 100년 가까이나 방치된 채였다. 칼리굴라는 승리한 뒤의 전리품과 속주화한 뒤의 속주세 수입을 기대하고 브리타니아에 눈을 돌렸지만, 군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이쪽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국고가 그렇게 빈약해진 주요 원인은 칼리굴라 자신이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불만스러웠는지, 칼리굴라는 도버 해협 앞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시위를 벌였다. 병사들에게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조개를 줍게 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했지만, 이것은 줍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병식을 치르기 위해 북부 갈리아까지 끌려온 병사들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까 조개라도 주운 게 분명하다. 칼리굴라가 한 일은 모래밭에 정렬한 병력을 사열하고, 모래톱 끝에 등대를 세운 것뿐이었다.
로마 개선 후
두 달 뒤인 서기 40년 5월 말에 칼리굴라는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통칭 ‘포메리움’이라고 불리는 도심에는 들어가지 않고, 개선식을 거행하기로 한 8월 31일까지 로마 근교에서 지냈다. 개선장군은 개선식 날까지 도심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로마의 전통적 관습을 지킨 것이다.
손쉬운 자금 마련책은 부유층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부유층은 곧 원로원 계급이다. 거기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국가반역죄 처벌법’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줄 알았던 공포시대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다시 시작되었다. 칼리굴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칼리굴라의 두 누이동생은 유배되고, 죽은 누이동생 드루실라의 남편이었던 레피두스와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인 게툴리쿠스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즉위할 당시의 열광적 지지는 차츰 시들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칼리쿨라와 원로원은 이제 완전한 대결관계로 바뀌었다. 일반 서민층은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부유층이 타격을 받으면 당연히 환영할 터인데도, 그들조차 원로원 계급을 동정하게 되었다. 인간은 너무 많이 받으면 싫증을 내는 법이다. 일반 시민들도 칼리굴라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칼리굴라는 제국의 동방 일대를 시찰하러 가기로 마음먹는다. 오리엔트는 풍요로운 땅으로 알려져 있었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칼리굴라의 즉위에 열광한 것은 서방보다 오히려 동방이었다. 동방에서는 자금을 마련하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문제가 그 앞에 나타났다. 이것 또한 그 원인은 칼리굴라 자신에게 있었다. 그 자신의 언동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유대인
로마인들이 다른 민족을 지배할 때의 기본 정신은, 제정 로마 시대에 태어난 그리스 사람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듯이,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 데 있었다. 패배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 승자인 로마인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과의 동화도 거부한 것이 유대 민족이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로마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지만, 속주세 면제라는 현실적 이익이 있는데도 로마 시민이 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 고대에는 ‘특수’의 전형이었던 유대 민족이었다. 하지만 헤롯왕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는 유대인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 이 특수한 민족을 제국 내부에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서기 4년에 헤롯왕이 죽으면서 유대 왕국을, 왕국의 북부는 필리포스에게, 남부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아르켈라오스에게 남겨주었다. 북부와 남부의 통치권은 두 왕자가 별문제없이 계승했지만, 문제는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젊고 미숙한 아르켈라오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군대 출동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로마는 서기 6년부터 왕정을 폐지하고 헤롯왕이 아르켈라오스에게 준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를 시리아 총독을 통하여 직할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적임자 후보였던 헤롯왕의 손자 헤롯 아그리파는 유능하긴 하지만 책임감이 모자란다는 게 티베리우스의 평가였고, 시리아 총독의 지휘를 받는 ‘장관’을 통해 유대에 대한 직할 통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과 유대인
그리스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이나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도 지중해 세계의 동방에 있는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로마를 비롯한 서방 도시에는 동방만큼 규모가 큰 유대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총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알렉산드리아의 주민은 5개 지구에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3개 지구에는 그리스계 주민이 살고 나머지 2개 지구에는 유대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 수는 최소한 40만 명은 넘었을 게 분명하다. 역시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로마 황제가 ‘무관의 제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들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왕들을 넘어서려면 ‘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유대인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리자 유대인들은 제물까지 바치며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칼리굴라를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신이라고 공언하기 시작한 칼리굴라에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대립 감정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대립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발한 것은, 제국 동방에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리스인 사회와 유대인 사회의 세력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폭동
칼리굴라가 즉위한 지 1년 뒤인 서기 38년에 불을 뿜은 알렉산드리아 폭동은, 그 과정을 추적해보면 그리스인들이 칼리굴라의 이름을 빌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폭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그리스인 쪽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폭동은 이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 사회로서는 로마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의 직소는 로마법으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그 권리를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로 떠나는 사절단의 단장은 ‘유대의 플라톤’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학식이 풍부하고 유대인 사회에서 인망이 높았던 필로(라틴어 Philo Judaeus, 필론이라고도 함)로 결정되었다.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유대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서기 38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만나줄 줄 알았던 칼리굴라한테서는 좀처럼 알현을 허락하는 통지가 오지 않았다. 한참 후 유대 측과 그리스 측이 함께 초대된 접견장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황제의 사저였다. 이 저택은 ‘마이케나스의 정원’이라는 통칭을 갖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유대인 사절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진 않았지만, 필로가 단장을 맡은 유대인 사절단의 성과는 실패인 동시에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불리한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실패였지만, 칼리굴라가 새로 임명한 장관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이 더 이상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힘의 대결과 외교의 패착
칼리굴라가 갈리아를 다녀온 이후 제국의 동방 유대에는 칼리굴라가 게르만족에 대승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 모양이다. 그것을 기뻐한 그리스계 주민들은 칼리굴라를 위해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제물을 바치려고 했다. 이것이 유대인을 자극했다. 성난 그들은 제단으로 몰려가 대리석 제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렸다. 이 사건은 로마로 돌아와 있던 칼리굴라에게 보고되었다.
원래 유대인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던 칼리굴라는 이 보고를 받고 격분했다. 유대를 관할하고 있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칼리굴라를 본뜬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상을 만들어 예루살렘 신전 안에 세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에 유대 전역이 스트라이크에 돌입했다.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총독 관저로 떼지어 몰려가, 신을 모독하는 이런 행위가 실현되지 않도록 손을 쓰라고 요구했다.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영리하게 태업하는 길을 선택했다. 티루스(오늘날 레바논의 티레)의 공방에서 제작되고 있는 신상을 되도록 천천히 만들라고 은밀히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증거가 남지 않는 방법으로 답했다. 이로써 시위도 스트라이크도 진정되었다.
자신의 뜻이 이행되었다는 소식이 지연되자 칼리굴라는 페트로니우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사실상 황제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하고 자결을 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로마에서 안티오키아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칼리굴라의 명령이 아직 지중해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있었고, 페트로니우스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파르티아와 마우리타니아 문제
하지만 칼리굴라 때문에 생긴 제국 통치의 ‘균열’은 유대 문제만이 아니었다. 파르티아 왕국과의 우호관계도 아르메니아 왕국이 로마 쪽에 붙느냐 파르티아 쪽에 붙느냐를 둘러싸고 또다시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도 파르티아와의 경계인 유프라테스강에 2개 군단을 못박아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70년 동안이나 로마의 믿을 만한 동맹국이었던 북아프리카 서쪽의 마우리타니아 왕국에서도 칼리굴라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마우리타니아 왕은 트로메우스였는데, 이 왕의 외조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다. 실제로는 속국인 마우리타니아의 왕에게 자기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칼리굴라는 트로메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우리타니아 왕국을 속주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마우리타니아인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로마인들이 걱정도 하지 않은 마우리타니아에서도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듯 칼리굴라의 치세는 국가 재정의 파탄을 낳았을 뿐 아니라, 외치에서도 여기저기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반정의 칼
서기 40년부터 41년까지 칼리굴라를 둘러싼 환경은 즉위 당시의 열광이 거짓말로 여겨질 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열광이 차갑게 식기까지는 3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치의 실패 따위에는 무관심한 일반 시민의 지지도까지 떨어진 것은 땔감에 부과된 세금 때문이었다. 칼리굴라로서는 폐지된 매상세를 되살리는 대신 땔감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겠지만, 땔감은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서기 41년 1월 24일, 신격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팔라티노 축제가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열리고 있었다. 축제 때는 으레 그렇듯이, 제물을 바친 뒤에는 연극이나 경기대회가 이어진다. 팔라티노 축제가 닷새째를 맞은 그날은 연극을 상연하는 날이었다.
오후 한 시쯤, 그는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장과 황궁은 짧은 지하도로 이어져 있다. 그 지하도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근위대 대대장(트리부누스)인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가 뒤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칼리굴라가 비틀거렸다. 그러자 또 다른 근위대 대대장인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가 정면에서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다음 순간, 카이레아가 쓰러진 칼리굴라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게르만족 경호원이 달려왔을 때는 황제만이 아니라 황제의 네 번째 아내인 카이소니아도 심장을 단칼에 찔려 숨을 거둔 뒤였고, 한 살배기 딸 드루실라도 죽어 있었다. 근위대 대대장들은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드루실라를 낚아채어 지하도 벽에 내동댕이쳤다. 칼리굴라라는 애칭으로 불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통치는 이로써 3년 10개월 6일 만에 끝났다. 28세 5개월에 맞은 죽음이었다.
칼리굴라는 결혼도 하지 않고 계속 독신으로 지내는 카이레아를 동성애자라고 놀렸다고 한다. 여기에 원한을 품고 칼리굴라를 죽였다는 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이지만, 병사로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황제를 그 정도의 원한으로 죽였다는 건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칼리굴라를 죽인 뒤, 카이레아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데려오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끌려오자, 그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돌아가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게 했다.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서 클라우디우스도 어디까지나 ‘가족’이었다.
칼리굴라의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칼리굴라를 테베레강에 내던지라는 목소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린 사람도 없었다. 칼리굴라의 유해는 에스퀼리노 언덕의 정원 구석에서 서둘러 화장한 뒤 매장되었다. 황족의 묘지인 ‘황제묘’(마우솔레움)에는 묻히지 않았다. 무덤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서기 41년~서기 54년)
예기치 않은 등극
카이레아가 클라우디우스를 근위대 병영으로 ‘연행’한 것은 제정에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이 될 수 있는 원로원에 대해 인질로 삼기 위해서였다. 인질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쪽의 뜻에 거역하면 잡아둔 인질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이다. 둘째, 이쪽의 뜻에 거역하면 잡아둔 인질을 내세운 군대를 보내 반대세력을 궤멸시키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1월 24일 밤 긴급 소집된 원로원은 두 호민관을 클라우디우스에게 파견했다. 근위대 병영에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직접 만나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두 호민관이 지참한 원로원의 서한은 다음 두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일개인의 생활로 돌아가면 오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2) ‘제일인자’가 될 마음이 있다면 원로원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
억지로 끌려갔는데도 클라우디우스는 망설이지 않고 (2)를 택했다. 그리고 호민관들에게 말했다. ‘제일인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이상 회피할 마음은 없다고. 그날 밤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갖고 있던 모든 권한을 클라우디우스에게 부여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젊은 칼리굴라에게 넌더리가 난 뒤인 만큼, 50세라는 나이도 그들을 안심시키는 요소가 되었을지 모른다.
원로원의 추인으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칼리굴라 황제의 살해범을 처형하는 일이었다.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황제 살해라는 대역죄를 지었으니 죽으라고 요구했을 때, 카이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동료 사비누스는 사형을 면했는데도 카이레아를 뒤따라 자결했다. 둘 다 대대장이다.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고 칼리굴라의 숙부인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토가의 갈리아’, 즉 로마화(로마인의 표현으로는 문명화)가 진행된 남프랑스가 아니라, 로마화가 뒤늦게 시작된 프랑스 중북부의 이른바 ‘장발의 갈리아’가 그의 출생지인 셈이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총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에 있었고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속주 전체의 총독이기도 했기 때문에, 총사령관 겸 총독의 가족은 갈리아 속주의 수도인 루그두눔에 살고 있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의 공식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시대, 로마인들은 명백한 신체적 결함을 가진 인물을 제국의 통치자로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탓이 아닐까 싶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걸을 때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곤 했다. 체형도 좌우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머리를 움직이는 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했고,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고, 자세도 좋지 않았다. 머리는 작고, 얼굴은 역삼각형이고, 턱은 빈약하고, 좁은 이마에는 세 가닥의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최대 보호자는 형인 게르마니쿠스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를 공직에 앉히려 하지 않았다. 군대 지휘관에 임명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역사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할 때, 그의 스승은 만년의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AD 17)였다고 한다. 그는 『로마사』를 32세 때부터 10권씩 모아서 간행하여 142권 전체를 간행하고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그의 저서는 로마인이 쓴 로마 역사의 금자탑으로 내용은 로마 건국부터 기원전 9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50세에 황제로 끌려나올 때까지 클라우디우스가 쓴 저술을 보면, 역시 리비우스한테 받은 영향이 엿보인다. 그는 우선 20권에 달했다는 『에트루리아 역사』를 썼다. 이어서 모두 8권이었다는 『카르타고 역사』를 썼다. 다음에 쓴 것이 정치가로서는 역시 패배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키케로의 전기’였다. 키케로를 변호한 것이 이 전기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카이사르 암살로 재개된 동시대 역사인 『내전기』를 쓰려고 했으나 이 내전의 주역인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둘 다 클라우디우스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안토니아의 권유로 중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 역사에 대한 관심은 버릴 수 없었는지,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시기를 다룬, 모두 41권으로 이루어진 『평화기』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러한 역사 연구와 저술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황제로 끌려나올 때까지 그는 칼리굴라가 깊이 생각지도 않고 지명해준 덕에 몇 달 동안 집정관을 지낸 것을 빼고는 군대 경험도 정치 경험도 전혀 없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에 대처하려면, 비록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 해도 50세까지 축적된 지식이 효과를 나타내는 법이다. 역사가 황제의 탄생이었다.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클라우디우스는, 건국 이래 로마 역사와 로마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은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 역사,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창조한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역사’도 마음속으로 되씹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서기 41년에 황제가 된 ‘역사가’는 이 조상들 중에서도 특히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통치 지표로 삼았다.
신뢰 회복
칼리굴라의 통치는 4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는 우선 이 신뢰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우선 그는 ‘국가반역죄’를 이유로 한 처벌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한다. 법은 존속시키되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추방되거나 유배당한 자들의 귀국을 허락했다.
이 중에는 벤토테네섬에 유배당한 칼리굴라의 두 누이동생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아그리피나는 섬생활로 초췌해지기는커녕 원기왕성하게 귀국한다. 그해에 26세였던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이고, 얼마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네로 황제의 어머니가 된다. 이름이 같은 어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소(小)아그리피나’라고 부르는 이 여인은 1년 동안의 섬생활로 수영의 명수가 되어 귀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또한 원로원이 환영하는 정책도 실시했다. 집정관을 비롯한 로마 제국 중앙정부의 요직을 티베리우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에서 선출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티베리우스의 정치를 답습한 것은 여기까지뿐이고, 황제 자신을 비롯한 부유층 사람들이 선거운동의 일종인 각종 오락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은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했다. 이로써 요직 선거권을 빼앗긴 민중의 불만도 억누를 수 있었다.
국가 재정 회복
우선 칼리굴라의 낭비로 파탄에 빠진 국가 재정을 재건해야 한다. 클라우디우스도 세금을 늘려서 재정을 재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긴축재정 정책을 채택할 마음도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시작한 대규모 수도공사를 칼리굴라가 갖지 못했던 불굴의 의지로 재개했다. 일단 칼리굴라가 폐지한 ‘1퍼센트의 매상세’를 부활시키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출은 가차없이 삭감했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획했지만 그 후계자들이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은 양대 공공사업에도 도전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지중해 최고의 설비를 갖춘 항구로 바꾸는 공사였고, 또 하나는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피치노 호수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바꾸는 공사였다.
몸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은 클라우디우스는 자기가 사는 집에도 무관심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검소한 집에는 더 이상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같은 팔라티노 언덕에 새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카프리 은둔으로 건축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집을 완성한 것은 칼리굴라였다. 클라우디우스는 그 집에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축재에도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대외 정책 정비
북아프리카
우선 마우리타니아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 문제는 단지 북아프리카의 일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우리타니아와 마주보고 있는 이베리아반도 전체의 안전과도 관련된 문제인 만큼, 해결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칼리굴라가 죽을 때 남겨놓고 간 마우리타니아 왕국의 반란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 대한 통치상의 이유 때문에 옛 마우리타니아 왕국은 둘로 분할되었다. ‘마우리타니아 팅기타나’(탕헤르의 마우리타니아)와 ‘마우리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셰르셸의 마우리타니아)가 그것이다. 둘 다 로마의 속주가 된 것이다. 전자의 수도는 팅게(오늘날의 탕헤르), 후자의 수도는 카이사레아(카이사레아가 아랍식으로 바뀌어 지금은 셰르셸)였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파견되는 장관이 다스리게 된 이 두 속주에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에서 실시한 통치방식을 도입했다.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사람이나 로마인 지원자를 대거 파견하여 건설한 식민도시(콜로니아)들을 핵으로 삼고, 그 사이를 로마식 가도로 연결하여 산업을 진흥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북아프리카가 본국에 필요한 밀의 3분의 1을 보장하게 되자 로마의 생명줄은 세 가닥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 및 본국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섬을 합하여 세 가닥이 된 것이다. 경제력이 향상되면 인재를 등용할 필요가 생기게 마련이다. 카르타고계 주민이 로마의 통치체제로 침투하게 되었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일찍이 지중해 최고의 번영을 자랑한 이 황무지에 도시를 재건했다. 게다가 카르타고라는 이름까지 부활시켰다. 그로부터 90년 뒤, 비록 로마의 속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농업대국이고 통상대국인 과거의 카르타고가 되살아난 것이다. 로마의 이런 ‘제국주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로부터 150년 뒤에 이 지방은 로마 황제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유대 문제
로마화를 거부한 이들에 대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하기로 했다. 유대인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과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그리스계 도시에 사는 유대인으로 나누어 대처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에 대해서는 35년 만에 같은 유대인 왕에게 통치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유대 통치를 맡게 된 인물은 헤롯왕의 자손으로, 서양식 이름으로는 율리우스 아그리파, 유대식 이름으로는 헤롯 아그리파였다. 어렸을 때 로마에 볼모로 와서 자랐기 때문에 칼리굴라의 친구였고, 클라우디우스와도 깊은 신뢰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헤롯 아그리파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서기 41년부터 44년까지 3년 동안 유대인 왕의 지배를 거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방은 다시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되었다. 황제가 임명하는 유대 장관이 직속상관인 시리아 총독의 감독을 받아 다스리는 체제다. 유대 장관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사레아에 주재한다. 로마군 병영도 카이사레아에 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지배 내용은 티베리우스 방식으로 되돌렸다. 유대에서 지배자 로마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나 물건은 최대한 배제한 것이다. 즉, 로마 황제를 나타내는 것은 우상숭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상(彫像)은 물론 군단기조차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 방식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땅은 2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된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갈등과 관련하여, 클라우디우스는 즉위하자마자 ‘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공식 서한을 보냈다. 주된 내용은 불만이 있으면 상대에게 폭발시키기 전에 로마에 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민족의 공존공영은 종교와 생활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클레멘티아)의 정신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3년 전에 일어난 폭동으로 재산상의 손실을 본 유대인에 대해 손해배상은 하지 않기로 하는 대신 유대계 주민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가 인정한 종교의 자유와 군문의 면제 등의 권리를 모두 재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음 말로 서한을 끝맺었다.
“로마의 ‘제일인자’가 앞으로도 계속 이해심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응할 것인지의 여부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브리타니아 원정
기원전 42년, 브리타니아 부족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부족을 오랫동안 잘 다스리던 크노벨리누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왕의 수도는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이다. 크노벨리누스의 죽음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해온 브리타니아를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었다. 동생과 아들들이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어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였다. 53세인 클라우디우스와 동년배였고, 브리타니아 원정을 명령받을 때까지는 판노니아 총독을 지내면서 도나우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어려운 일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총사령관 플라우티우스에게 주어진 병력은 4개 군단 2만 4천 명에 갈리아 및 라인강 서쪽의 게르마니아와 에스파냐 출신 보조병을 합한 4만 명의 정예였다. 그는 죽은 크노벨리누스의 두 아들이 지키는 카물로두눔을 우선 공략하기로 했다.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막강한 부족을 먼저 쳐부수면, 브리타니아 전역을 제패하기도 훨씬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는 템스강 남쪽에서 벌어져 로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로마군은 승리한 뒤에도 곧장 템스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로마에서 올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먼저 배를 타고 마르세유로 갔다. 갈리아에 상륙한 뒤에는 고향인 리옹에 들르기도 하면서 느긋한 여행을 계속한 끝에, 로마군이 기다리고 있는 템스강변에 도착했다. 카물로두눔 입성도 순조롭게 끝났다.
클라우디우스는 이곳에서 브리타니아를 속주화하는 데 필요한 기본정책을 결정했다. 카물로두눔에 로마 시민인 퇴역병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것만 결정한 뒤, 뒷일은 장수들에게 맡기고 브리타니아를 떠났다. 수도를 떠나 있었던 6개월 동안, 그가 브리타니아에 머문 것은 16일뿐이었다.
원로원은 황제에게 개선식 거행을 인정하고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외아들에게 브리타니아를 제패한 자라는 의미인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브리타니쿠스는 당시 세 살배기 어린애였다.
이후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공략은 카물로두눔이 있는 에식스 지방에서 북쪽의 노퍽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일대를 제패한 뒤에는 전선을 템스강 남쪽으로 옮긴다. 오늘날의 캔터베리·런던·바스를 잇는 선의 남쪽 지방에 대한 파상 공격이 벌어졌다. 로마군의 두 번째 물결이 브리타니아를 덮친 것이다.
비서관 체제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는 매사에 솔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를 돕는 비서관 체제도 공공연한 존재로 만들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신체적 결함에도 개의치 않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기 집 고용인들에게 협력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노예나 해방노예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들로 관저에서 일하는 비서관 조직이 형성되었다. 우수한 해방노예라면, 당시에는 거의 다 그리스인이었다.
나르키소스나 팔라스 같은 이름은 그리스 자유시민의 이름이 아니다. 미소년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50대였고, 매우 우수한 관료였기 때문에 이들을 발탁한 클라우디우스는 매우 만족했다. 이들 해방노예에게 부과된 임무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었다.
‘아브 에피스툴리스’(ab epistulis) : 직역하면 ‘편지’ 담당이다.
‘아 라티오니부스’(a rationibus) : 직역하면 ‘회계’ 담당이다.
‘아 리벨리스’(a libellis) : 직역하면 ‘청원서’ 담당이다.
‘수브스크립티오’(subscriptio) : 직역하면 ‘필기’ 담당인데, 청원서나 진정서에 대한 황제의 회신을 작성하는 것이 이 부서의 임무다.
‘아 코그니티오니부스’(a cognitionibus) : 직역하면 ‘지식·정보’ 담당인데, 모든 서류를 정리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정리해두는 것이 임무다.
‘아 스투디스’(a studiis) : 의역하면 ‘공부’ 담당인데, 황제의 이름으로 나가는 포고문을 작성하는 것이 임무다.
이것이 클라우디우스가 실행한 비서관 체제다. 황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이 체제의 목적이다. 이것은 강철 같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두 어깨에 걸린 최고통치자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생각해낸 제도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비서관 체제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결국 이 체제는 ‘문고리’ 권력이 될 수밖에 없었고, 로마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는 이들이 아무리 황제의 신뢰가 두텁다 해도 원래는 노예에 불과했던 비서관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황제와 연락도 취할 수 없다. 결국 이들 사이에 불만과 분노가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를 짊어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비서진 중에서도 특히 거만한 나르키소스와 팔라스와 칼리스투스를 ‘해방노예 3인방’이라고 부르며 증오하게 되었다.
한편 일에서도 유능하고 열성적인 이 비서관들은 공공사업을 발주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것을 이용한 축재에도 열성을 쏟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자신은 축재에 무관심했지만, 황제의 측근들은 축재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팔라스는 무려 3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축재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10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이었던 시대다.
클라우디우스의 성격에는 부하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었다. 바꿔 말하면 얕잡아 보이기 쉽다는 뜻이다. 그 결과 노예 출신 비서관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가 클라우디우스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비서진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메살리나 황후
클라우디우스는 50세에 황제에 즉위할 때까지 세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첫 아내인 우르굴라닐라와는 이혼했고, 두 번째 아내인 아일리아 페티나와의 사이에는 딸이 하나 태어났지만 이혼으로 끝났다. 세 번째 아내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인 메살라 집안의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였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보다 35세나 젊었다.
메살리나는 어머니인 도미티아 레피다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과도 혈연관계를 갖고 있었다. 외조모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살리나는 황후가 된 직후에 그동안 딸밖에 얻지 못한 클라우디우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메살리나의 허영심
메살리나의 방종은 허영심과 물욕과 성욕이라는 여자다운 욕망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허영심은 남편의 개선식에 참가하는 것으로 발휘되었다. 아무리 황제의 아내라 해도 종군하지도 않은 여자가 개선식에 참가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개탄스러운 일로 생각했지만, 19세의 메살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살리나의 물욕
그녀의 물욕 역시 기존 제도를 악용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간통죄 처벌법으로 단죄된 자는 재산을 몰수당한다. 그 몰수된 재산을 국고에 넣지 않고 자기 품에 넣으면 되었다. 메살리나가 자살로 몰아넣은 포파이아(네로 황제의 아내가 된 포파이아 사비나의 어머니)가 그 좋은 예다. 메살리나는 제 애인인 유명한 배우를 포파이아가 가로챈 데 화가 나서 그녀를 간통죄로 고발했다. 클라우디우스가 고발장에 서명하자 포파이아는 자살했다.
또 다른 사례는 아시아티쿠스의 ‘루쿨루스 정원’을 가로챈 것이다. 그해 57세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이름만 보면 로마인 같지만, 남프랑스의 유력 부족인 알로브로게스족 출신이다. 아시아티쿠스가 공화정 시대의 용장 루쿨루스가 만든 정원을 사들여 더욱 아름답게 꾸몄을 때도 그것을 문제삼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2세의 메살리나는 로마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평판이 난 이 정원을 갖고 싶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그녀는 아시아티쿠스를 국가반역죄로 고발하기로 했다. 아시아티쿠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결백을 논리정연하게 입증했다. 클라우디우스도 납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메살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혐의가 풀렸다고 믿고 있던 아시아티쿠스에게 날아온 것은 자살을 권하는 황제의 편지였다. 57세의 남프랑스 출신 로마인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죽는 건 괜찮지만 여자의 사기에 걸려들어 죽는 게 유감이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서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정원은 메살리나의 차지가 되었다.
메살리나의 성욕
역사가들은 메살리나가 허영심과 물욕만이 아니라 성욕도 동시에 추구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성욕이 유난히 강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정무에 몰두한 나머지 아내를 돌보지 않는 밤이 계속되자 반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황후는 밤마다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와, 이 언덕 옆에 세워진 대경기장의 관람석 밑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매음굴에서 손님을 받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과연 실제로 이 정도까지 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현대 이탈리아어의 ‘메살리나’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따라서 이탈리아 남자가 “너는 메살리나 같다”고 말하면, 황후 같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두는 게 좋다.
젊은 아내의 방종 덕택에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는데도, 클라우디우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찬미나 경의보다 경멸과 혐오의 눈길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에게는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국세조사(켄수스)
클라우디우스는 국세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지 34년 만의 국세조사다. 클라우디우스는 국세조사를 위해 제정 시대가 된 뒤로는 모습을 감추었던 재무관(켄소르) 제도를 부활시켰다. 공화정 시대에 재무관의 원래 임무가 국세조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 1년 반의 임기로 정원이 두 명인 이 관직에는 클라우디우스 자신과 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비텔리우스가 취임했다.
조사 결과, 병역이 가능한 17세 이상의 남자 가운데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는 통틀어 598만 4,072명으로 밝혀졌다. 서기 14년 조사 결과보다 100만 명 가량이 늘어났다. 그런데 본국 이탈리아보다 속주의 증가율이 더 높았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그 군사력을 이용하여 영토 확장에 나서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편 제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국영 우편제도를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라고 부르는데, 의역하면 ‘공용 파발’(擺撥)이다. 문자 그대로, 공적인 명령과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창설된 것이었다.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려면 이런 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에는 무언가를 남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는 사설 우체국에 맡기거나 자기 집 노예에게 심부름을 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로마 가도 연변에 10킬로미터 내지 15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무타티오네스’(mutationes), 즉 역참(驛站)이 설치되었다. 또한 역참 다섯 곳마다 ‘만시오네스’(mansiones, ‘mansion’의 어원)라는 역관(驛館)이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교대할 파발마와 파발꾼 외에 나그네를 위한 숙박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여인숙과 마구간은 물론, 마차 수리공과 우체국 직원들도 있었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실시한 개선책은 이 국영 우편제도를 공용만이 아니라 민간에게도 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도 국영 우편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결과, 민영 우체국은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민영 우체국이 다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로 접어든 뒤였다.
우편제도 개선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치자로서의 클라우디우스는 일반인의 생활 환경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변호비 상한선을 법제화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변호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상한선을 정했다. 상한선은 1만 세스테르티우스. 병졸의 10년치 봉급에 해당한다. 싸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한선이다.
‘클라우디우스 항’
칼리굴라 시대인 서기 38년에 착공한 수도공사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도 착실히 진행되어, 전체 길이 70킬로미터 가운데 10킬로미터는 고가수도로 만들 수밖에 없는 대공사인데도 4년 뒤에는 완공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에 착공한 또 하나의 수도가 완성되면 수도 로마에 집중된 수도는 모두 아홉 개가 되고, 수도 주민에게는 1인당 하루에 900리터나 되는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칼리굴라의 유업인 수도공사보다 자신이 시작한 오스티아 항만공사에 더 관심을 쏟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공사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이듬해에 착공되었다. 그러나 착공한 지 12년 만에 이 항만이 완공되었을 때 그는 암살당했고, 완공식은 네로 황제가 거행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티아는 강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피난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계속 활용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여 오스티아 항구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게 아닐까. 그래도 ‘클라우디우스 항’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항구의 건설공사는 인간이 자연에 도전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림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바다로 튀어나간 제방 건설공사와 테베레강의 오른쪽 연안을 잘라서 테베레강과 새 항구의 독을 연결하는 운하 공사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 운하는 50년 뒤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조하여 ‘트라야누스 운하’로 불리게 된다.
좌우 방파제 사이에 등대를 겸한 또 하나의 방파제가 만들어졌는데, 등대가 서 있는 중앙 방파제의 기반이 된 것은 칼리굴라의 대형선이었다. 이 배에 암석을 가득 실어 가라앉힌 뒤, 그것을 토대로 방파제를 만든 것이다. 칼리굴라가 이집트에서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 특별히 만든 선박이다.
클라우디우스가 본격적인 로마 외항을 완성한 덕택에, 세금 우대 조치를 받은 곡물 수송선은 겨울철에도 안심하고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소비지인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밀을 수출하지 않으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경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곡 수입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경제를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메살리나의 몰락
메살리나의 방종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번 상대는 미남으로 평판이 자자한 실리우스였다. 원로원 의원일 뿐 아니라, 이듬해 집정관에 이미 선출된 신분이다. 황족이 아닌 경우에는 40세가 넘어야만 집정관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으니까, 단순히 젊은 혈기로 난봉을 피우는 잘생긴 건달은 아니다. 하지만 독신이고 자식도 없었다.
이런 실리우스에게 23세가 된 메살리나가 홀딱 반해버렸다. 바람을 피우는 정도로 그쳤다면 입방아에 오르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메살리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실행했다. 메살리나는 남편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진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이중 결혼이다.
황후의 이중 결혼을 알게 된 나르키소스와 팔라스와 칼리스투스는 이번만은 그냥 둘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무엇보다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알리는 게 선결문제였다. 이 보고서는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와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간통뿐이라면 유배형이지만, 혼인서약을 어긴 아내에게 남편이 가부장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처벌은 사형이다.
상황을 알게 된 메살리나는 자기가 직접 오스티아에 가서 남편과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오스티아로 가기 위해 마차를 준비하라고 명령해도, 그 명령에 따르는 하인이 하나도 없었다. 노예들까지도 메살리나를 저버린 것이다.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로마로 돌아온 클라우디우스는 비서관들의 재촉을 받고 이미 체포된 실리우스를 심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클라우디우스는 시종 말이 없었고, 심문은 비서관들이 대신 진행했다. 실리우스는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판결은 자살이라는 형태의 사형이었고, 이 판결은 당장 집행되었다.
비서실장이라 해도 좋은 나르키소스는 근위대 백인대장을 은밀히 불러서 황제의 명령이니 황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백인대장은 한 무리의 병사를 거느리고 ‘루쿨루스의 정원’으로 갔다. 처음에는 자살을 권했지만 황후가 망설이자 기다릴 마음이 없는 백인대장은 황후를 칼로 찔렀다. 23세의 죽음이었다.
이 사건으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한 황제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가 서민들의 가슴에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남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에게 배신당한 60대 남자는 묵묵히 정무에만 몰두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