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황제 말기와 네로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기
개국 노선 - 원로원 문호 개방
클라우디우스는 이 무렵 유명한 연설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정책을 실시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연설을 로마 문명이 인류에게 남긴 교훈의 하나라고까지 칭찬하게 된다.
일은 원로원의 결원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를 둘러싼 토론으로 시작되었다. 원로원의 정원은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이래 600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파견 근무로 수도를 비우는 의원도 많았기 때문에 정원에 대한 생각은 그리 엄격하지 않았지만 서기 48년에는 그 결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많은 의원이 보충될 예정인 것을 알게 된 갈리아 부족장들이 로마 원로원에 청원서를 보냈다. 자기네한테도 원로원 의석을 달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요직에 출마하려면 원로원에 의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원로원 의석을 달라는 것은 로마 제국 중앙정부에 자기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디우스가 참석한 채 원로원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예상된 일이지만 반대가 심했다. 93년 전,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의 권력으로 ‘장발의 갈리아’ 부족장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었을 때에도 본국 이탈리아 출신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 이후 이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여기서 클라우디우스가 일어났다. ‘반대론’만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발언 요지는 그로부터 1480년 뒤인 1528년에 프랑스 리옹에서 발굴된 비문으로 실증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악타 세나투스』(원로원 의사록)를 많이 참고했다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의 내용을 인용한다.
“내 조상을 생각해보아도, 시조인 클라우수스는 사비니족 출신이었다. 그분이 로마로 이주한 기원전 505년, 로마인은 다른 부족 출신인 클라우수스와 그 일족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클라우수스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주어 귀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상들이 보여준 이런 방식은 우리 시대에도 통치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출신지가 어디든, 출신 부족이 과거의 패배자든 아니든, 우수한 인재는 중앙에 흡수하여 활용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
그리고 신격 카이사르는 이런 경향에 더욱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기원전 49년에 카이사르는 국경을 루비콘강에서 알프스산맥으로 확대하여, 속주였던 북부 이탈리아를 본국에 편입시켰다. 그때까지는 로마 시민화가 개인에 한정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이로써 주민과 토지를 포함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이 로마의 이름 아래 통합된 것이다. 그 후에도 국내의 평화가 확립되고 국외로 패권이 확대됨에 따라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
그렇긴 하지만 여러분의 반대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갈리아의 한 부족인 세노네스족은 기원전 390년에 로마까지 쳐들어와 한때나마 로마의 대부분을 점령한 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부터 로마인이었다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볼스키족이나 아이퀴족도 로마인과 싸우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 조상들은 갈리아 민족의 포로가 된 일도 있었다. 에트루리아 민족에게 볼모를 보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삼니움족도 우리에게 '카우디움의 굴욕‘을 안겨 주었다. (……)
원로원 의원 여러분, 우리가 오랜 전통으로 믿고 있는 일도 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 요직도 오랫동안 귀족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로마에 사는 평민에게 개방되었고 다음에는 로마 밖에 사는 라티움인에게 개방되었고, 다음에는 이탈리아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개방되는 식으로 문호 개방의 물결이 차즘 확대되었다. 의원 여러분, 갈리아인에 대한 문호 개방도, 지금은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로마의 전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토의하면서 수많은 선례를 들었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선례의 하나로 인용될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연설이 끝난 뒤 갈리아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표를 던진 의원이 다수였다. 다만 반대파는 수정안을 발의하였는데, '장발의 갈리아' 중 우선 로마와 오래 전부터 동맹관계에 있는 하이두이족부터 인정하고, 그 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조국(파트리아)의 개념을 이탈리아반도에만 한정하지 않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대하려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신을 부활시킨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의 대단한 점은, 한편으로는 개국 노선을 추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한 법안(노예해방 규제법)도 성립시켰다는 사실이다.
노예해방 규제법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에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을 성립시킨다. 이 법의 명칭은 이 법안을 제출한 집정관 두 명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입안자였다. 요컨대 유언에 따른 노예해방을 규제한 법이고, 5년 뒤인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역시 그해의 집정관 두 명의 이름을 빌려서 성립시킨 ‘아일리우스 센티우스 법’은 생전의 노예해방을 규제한 법이었다.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에 따르면, 유언에 노예해방을 명시하는 경우, 4명 이상 100명 이하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노예의 절반까지 해방할 수 있고, 100명 이상 500명 이하 노예를 가진 자는 5분의 1까지 해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 사람의 유언으로 100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할 수는 없었다.
‘아일리우스 센티우스 법'은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을 생전의 노예해방에도 적용했고, 해방할 경우의 각종 제한도 명시하고 있다. 국가나 주인에게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전과자 노예는 해방될 수는 있지만, 다른 노예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수도에서 100로마마일(약 15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고, 재산 사유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포기하면 이 제한은 해제된다.
주인이 20세 미만인 경우 노예 해방이 허락되지 않았고, 20세 이상이라도 해방대상인 노예가 30세 미만일 경우에는 심사위원회의 재가가 필요하다. 심사위원회의 위원은 10명이다. 수도 로마에서는 5명의 원로원 의원과 5명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구성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위원을 맡았다. 또한 해방노예가 로마 시민권을 얻으려면 3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
로마인의 ‘노예해방 규제법’은 정신을 공유한다는 로마의 전통을 지키면서 열등분자가 섞여들어 로마의 정신이 희박해지는 것만 막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예해방을 ‘금지’하지 않고 ‘규제’하는 데 그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이 선상에서 해석되어야 할 정책이다. 그는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혁명적인 일을 한 게 아니라 로마인의 전통에 따랐을 뿐이다. 『영웅전』 저자인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패자조차 자기들과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생활방식에 있었다고.'
아그리피나의 야망
메살리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클라우디우스는 다시 홀몸이 되었지만 벌써 60세의 나이다. 평소에는 아내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정실 배우자가 없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 타입의 사내였다. 그런데 이 사내는 아내를 고르는 일조차 비서진에게 맡겨, 그들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서진을 구성하고 있는 해방노예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여 검토한 결과, 각자 한 사람씩 세 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 나르키소스가 추천한 여자는 아일리아 페티나. 클라우디우스의 두 번째 아내였지만, 딸 안토니아를 낳은 뒤에 이혼한 여자다(재결합 차원).
- 칼리스투스가 추천한 여자는 미인으로 유명한 롤리아 파올리나. 칼리굴라의 세 번째 아내였지만 얼마 못 가서 이혼했고, 자식은 없었다.
- 팔라스가 추천한 여자는 율리아 아그리피나. 게르마니쿠스와 대(大)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딸이니까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이고, 남편 아헤노바르부스와 사별한 과부였다.
아그리피나를 내세운 팔라스의 추천 이유는 참으로 교묘한 것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아직도 인기가 시들지 않은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라서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라는 두 명문 씨족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는 숙부와 질녀 사이라는 난관이 있었다.
그해 34세였던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는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통치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로마 역사상 여자로는 처음으로 '회상록'을 썼을 정도니까, 어머니보다 훨씬 머리도 좋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맹렬한 공세에 마침내 굴복했다. 하지만 숙부와 질녀의 결혼에는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이때도 오랜 협력자인 비텔리우스가 나서서 지원 사격을 맡아주었다. 게다가 미리 소집되어 있었을 게 분명한 시민들도 원로원이 삼촌과 조카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인 그녀는 당분간은 황제의 아내가 되고, 언젠가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어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로 결심한다. 클라우디우스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는다는 건 처음부터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가 섭정이 되어 조종할 황제 후보자는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해 12세가 된 아들 도미티우스다.
황제의 아내가 된 아그리피나는 옆에서 성가시게 졸라대면 그만 귀찮아져서 잘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해버리는 클라우디우스의 버릇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녀는 우선 자신을 ‘아우구스타’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다음에는 여자의 몸으로 도시에 제 이름을 붙이는 일까지 해치웠다.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출생지인 쾰른(Köln)에 만기 제대한 고참병들을 이주시켜 로마의 식민도시(콜로니아)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쾰른의 옛 이름은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를 뜻하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다. 뜻밖에도 원로원과 시민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첫째 이유는, 아그리피나라는 말 자체에 ‘아그리파의’라는 뜻도 있어서, 사람들은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를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가 아니라 ‘아그리파의 식민도시’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쾰른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 '콜로니아'로 격상시켜 로마의 전진기지로 삼는게 국익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그리피나는 황후를 간택할 때 그녀와 경쟁한 두 여자, 그중에서도 특히 미모로 평판이 자자한 롤리아 파올리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가련한 파올리나에게는 5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만 갖고 수도를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졌고 이후 파올리나를 자살로 몰아넣은 뒤에야 아그리피나는 겨우 만족했다.
아그리피나의 전횡은 메살리나처럼 변덕이나 서방질의 결과가 아니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냉철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서방질도 하지 않았고, 가정도 완벽하게 꾸려나갔다. 아이들 양육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2세가 된 친아들 도미티우스의 교육에는 주도면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철학자 세네카
외아들에게 제왕 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아그리피나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철학자를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는지도 모른다. 아그리피나가 점찍은 것은 코르시카섬에 추방되어 있던 철학자 세네카였다.
후세 연구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공화정 시대에는 키케로, 제정 시대에는 세네카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기원전 4년에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성장한 곳은 로마다.
원로원에 들어간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 로마로 이주했다. 원로원 의원이라도 에스파냐 출신은 로마에서는 신참자다. 신참자는 자식 교육에 열성을 쏟는다. 세네카 집안의 삼형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삼형제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루키우스의 재능이 두드러졌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말기에 소년기를 보낸 세네카는 국가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명예로운 책무로 여겨진 공직에 취임한다. 35세 무렵인 서기 31년에 공직 경력의 출발점인 회계감사관을 지냈다. 당시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였다.
회계감사관을 지낸 사람은 황제만 거부하지 않으면 원로원 의석을 얻을 수 있다. 세네카의 재능은 원로원 회의장에서 꽃을 피운 모양이다. 덕분에 꽤 재치있는 웅변가였던 칼리굴라 황제한테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세네카는 재치있는 사람으로 인기가 대단해서 연회를 베푸는 사람들은 그를 초대하려고 야단이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다시 메살리나 황후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클라우디우스의 누이동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메살리나파 살롱에 단골로 드나든 것이 진짜 이유였다.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황족 여자와 간통한 죄를 물어서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되었다. 서기 41년이니까, 그의 나이 45세에 당한 불운이었다.
하지만 8년 동안에 걸친 유배는 세네카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첫째, 어쩔 수 없이 자연에 묻혀 소박한 식사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둘째, 문필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손을 써서 황제의 추방해제령이 내려져 드디어 세네카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네로의 문과 무의 보좌역
아그리피나의 뛰어난 점은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 제왕 교육을 시킬 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아들이 제위를 계승한 뒤에도 그 보좌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로 세네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로마 황제의 ‘문’(文)을 세네카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무’(武)를 맡길 수 있는 인물도 필요하다.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는 무술을 가르치고, 황제가 된 뒤에는 무술로 아들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그리피나는 그 역할에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를 선택했다. 그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무인이었다.
그녀는 부루스를 근위대장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1만 명의 정예로 이루어진 근위대는 로마 교외에 병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는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아울러 아그리피나는 황후를 간택할 때 그녀를 후보자로 추천한, ‘해방노예 3인방’ 가운데 하나인 팔라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 팔라스에게는 펠릭스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를 움직여 펠릭스를 유대 장관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아그리피나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제1단계를 끝냈다. 뒤이은 제2단계는 아들 도미티우스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아그리피나와 팔라스의 협력관계가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게다가 아그리피나는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는 원칙도 알고 있었다.
네로의 등장
서기 50년, 황후가 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에 아그리피나는 아들 도미티우스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로 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친아들보다 네 살 위인 의붓자식을 양자로 삼고, 그 양자와 친딸 옥타비아를 약혼시키겠다고 공표했다. 도미티우스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로 바뀌었다.
이듬해 서기 51년, 네로가 14세가 되기를 기다려 성년식을 올렸다. 14세의 나이에 성인으로 인정받은 네로는 '예정 집정관'의 권리도 부여받아, 21세가 되면 집정관에 선출될 권리를 얻게 되었다. 동시에 ‘프린켑스 유벤투스’라는 칭호도 얻었다. 이것은 ‘젊은 제일인자’, 의역하면 ‘황태자’라는 뜻이다.
또한 아그리피나는 이런 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군단의 병사들에게 네로의 이름으로 돈을 나누어주고,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서민들을 초대하는 등, 네로의 지위가 강화된 것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해에는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취임시키는 계획도 실현되었다.
2년 뒤인 서기 53년, 네로와 옥타비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게다가 아직 16세밖에 안 된 네로를, 성년식도 치렀고 결혼까지 한 몸이라는 이유로 원로원 회의장에 데뷔시켰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로에게는 아직 의석이 없다. 그래서 네로는 정책입안자로서 원로원의 의결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원로원에서 첫무대를 밟았다.
아이디어와 연설 원고는 아그리피나와 세네카의 합작품이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16세의 네로는 생기발랄하고 재치도 풍부했다. 의원들이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의 제안들은 모두 가결되었다. 네로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만년의 클라우디우스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62세가 되어 있었지만, 아내인 아그리피나에게 계속 휘둘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심성의껏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는 여전했다. 비서실장인 나르키소스가 아그리피나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클라우디우스를 정성으로 보필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리타니아 정복에 착수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현재의 잉글랜드는 일단 제패했지만, 현재의 웨일스 지방에 병력을 보낸 뒤로는 좀처럼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제패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던 것은 나중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인재들이 군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서방의 또 다른 전선인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위선에서는 좋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로마의 동맹국으로서 도나우강 하류의 방위를 분담했던 트라키아 왕국은 왕실의 대가 끊긴 이후로 로마의 속주가 되어 있었고, 흑해에 출몰하던 해적도 잠잠해져서 ‘팍스 로마나’는 변경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동방도 여전히 파르티아가 말썽을 일으키고 유대도 안정이 되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서기 51년에는 기후 악화로 밀의 수입이 중단되는 바람에 식량 위기가 있었지만 이 또한 발빠른 대처로 무리없이 넘어 갔고 본국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대출경색'도 큰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그에 반해 본국 이탈리아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오스티아 항만 공사’와 더불어 의욕적으로 벌인 또 하나의 공공사업은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피치노호를 간척하여 경작지로 바꾸는 공사였는데,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운하를 충분히 파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범람하여 사망자까지 나오는 참사로 끝나버렸다.
황제를 모시고 운하 완공을 축하할 예정이었던 행사는 황제 앞에서 나르키소스와 아그리피나가 말다툼을 벌이는 싸움판으로 변했다. 아그리파는 공사 전반을 책임진 나르키소스가 공사비를 빼돌려 부실공사가 된 것이라고 비난했고 나르키소스는 여자가 뭘 안다고 주제넘게 나서느냐고 쏘아붙였다.
사망
서기 54년 가을, 클라우디우스는 이제 63세가 되어 있었다. 황제에 즉위한 지 13년이 지났다. 그 무렵, 건강을 해친 나르키소스가 나폴리 근교에서 요양하기 위해 수도 로마를 떠났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스런 나르키소스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아그리피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버섯요리를 무척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독버섯을 먹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 때문인지 클라우디우스는 식사를 한 뒤에 곧바로 증세를 보이지 않고 한밤중이 지났을 때 갑자기 용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정오, 황궁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네로가 근위대장인 부루스와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황제를 경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1개 대대 1천 명의 근위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때 비로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네로는 그 길로 곧장 근위대 병영으로 가서, 근위병들한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았다. 병사들에게 일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증여금을 약속했다. 13년 전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할 때와 똑같았다. 근위대가 네로를 지지한 사실을 안 원로원이 재빨리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한 것도 13년 전과 똑같았다.
원로원 의원들과 일반 서민들은 아직 17세도 되지 않은 젊은 황제의 출현을 환영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 해방노예 나부랭이가 우쭐대는 꼴도 보지 않게 되었다고 기뻐했고, 일반 서민들은 마누라 엉덩이에 깔려 꼼짝 못하는 클라우디우스를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로원에서 네로가 맨 먼저 꺼낸 말은 클라우디우스를 신격화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신격’이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은 공표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네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시종일관 도와준 해방노예 나르키소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소식을 전해주는 확실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역사가는 그가 전재산을 바치는 조건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 일개인으로 살아가는 게 허용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옥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제4부 네로 황제
소년황제
네로가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 10개월에 불과했다. 이례적으로 젊은 황제가 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가 환영받은 이유는, 일반 시민은 단지 분위기가 쇄신되기를 원했기 때문이고, 원로원은 해방노예로 이루어진 비서관 정치가 폐지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초를 잡고 네로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낭독한 새 황제의 ‘시정 연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
(2)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
(3) 황제는 사법 집행에 관여하지 않는다.
(4) 도무스(사저)와 레스 푸블리카(직역하면 국가, 이 경우에 맞게 의역하면 관저)를 분리한다.
세네카는 17세도 안 된 애제자에게 이론 무장을 시킬 필요를 느꼈는지 『관용에 대하여』(de Clementia)라는 책을 출판했다. 황제에게 왜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가를 서술한 이 책은 선정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60세 지식인의 열의가 담긴 명저다. 이 책은 네로에게 바쳐졌고, 네로와 문답을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정과 관용의 차이를 서술한 대목에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정이란 현재 눈앞에 있는 결과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고, 그 결과를 낳은 요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관용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 고려하는 정신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성과도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
세네카의 ‘군주론’은 이미 획득한 권력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이야기한 글이고,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대비된다. 어쨌든 젊은 황제 네로의 슬로건은 세네카의 이론에 따라 ‘관용’으로 결정되었다. 네로 시대의 화폐에 가장 많이 새겨진 낱말이 바로 ‘Clementia’(클레멘티아)이다.
즉위한 직후의 네로와 그의 보좌역인 세네카의 통치능력을 평가하는 시금석은 원로원 대책이 아니라 파르티아 문제였다. 서기 54년 가을도 깊어갈 무렵,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 영토에 침입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전해졌다.
파르티아 문제 대응
세네카는 동방에 파견할 총사령관을 제대로 골랐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는 8년 동안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4개 군단에 보조병을 합하여 4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라인강 하류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켜온 장수다.
동방 파견이 결정된 서기 54년 말에는 5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 변경을 지킨 사령관들 가운데, 강대국 파르티아와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동방 주둔군 총사령관을 맡을 만한 인물은 코르불로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네카의 잘못은 그런 코르불로에게 전권을 주지 않은 것이다. 서기 55년 봄, 라인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먼 길을 달려간 코르불로는, 체면을 구기고 기분이 상해 있는 시리아 속주 총독 콰드라투스의 영접을 받았다.
하지만 코르불로의 지위는 동방 주둔군 총사령관이 아니라 콰드라투스보다 지위가 낮은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 속주의 총독으로 되어 있었다. 동방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의 계급에서는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 가장 지위가 높다.
콰드라투스가 로마에서 받은 훈령은 휘하의 4개 군단 가운데 2개 군단을 코르불로에게 떼어주고, 콰드라투스는 남쪽에서, 코르불로는 서쪽에서 파르티아군을 공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몰아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군무 경험이 없는 세네카의 군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훈령이었다.
어쨌든 코르불로는 현지에서 정황을 냉철히 관찰했을 것이고, 그 결과 파르티아 왕이 동생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 뒤에는 군사행동을 중지해버린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는 로마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로마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
교묘히 술수를 부려 아들 네로를 제위에 앉히는 데 성공한 아그리피나는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만사가 그녀 뜻대로 진행되어, 원로원도 일반 시민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섯 중독으로 죽었다는 공식 발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사실 아그리피나는 황후였을 때보다 황태후가 된 뒤에 자기 존재를 더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늘 네로 옆에 자리를 잡았고, 원로원 회의도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의사당이 아니라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에서 열게 했다.
심지어 아그리피나는 아들과 자기가 마주보고 있는 구도의 그림을 화폐 도안으로 채택했다(아래 사진 참조). 여자의 옆얼굴을 새긴 화폐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황제와 어머니가 같은 화폐에 함께, 게다가 평등한 지위를 과시하듯 마주보는 형태로 새겨진 것은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이 즈음 드디어 아들이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반항은 어머니가 경멸할 게 뻔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네로는 아크테라는 여자노예한테 홀딱 반해버렸다. 그래도 어머니의 눈을 계속 속일 수는 없었다. 노예였던 여자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된 아그리피나는 무자비한 어조로 비난했다.
세네카도, 근위대장으로 본국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부루스도, 어머니에 대한 네로의 반항을 지지했다. 아니, 뒤에서 은밀히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처음 네로가 세네카에게 울며 메달렸을 때 세네카는 아크테를 사서 네로와 은밀히 만나도록 도와주기도 했었다.
네로의 두 번째 반항은 ‘경제 비서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팔라스를 해임한 것이었다. 세네카는 그 대신, 팔라스의 동생을 유대 장관에 유임시키고 팔라스 자신의 안락한 여생을 보장하겠다고 제시한 모양이다.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인 팔라스는 수도를 떠났고, 아그리피나는 혼자서 분노를 폭발시켰다.
아글리피나는 네로에게 온갖 언사를 쏟아냈을 것이다. 아마 "아헤노바르부스 씨족 출신인 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인 나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이다.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너보다는 차라리 브리타니쿠스가 훨씬 낫다. 그 아이도 이제 열네 살이다."라고 협박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후 브리타니쿠스는 갑자기 죽었고, 지병인 천식 발작으로 죽은 것으로 공표되었다. 의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납득했다. 1,600년 뒤인 17세기에 프랑스 극작가 라신이 쓴 『브리타니쿠스』는 이때 죽은 브리타니쿠스를 주인공으로 한 비극이다.
아그리피나와 네로의 대립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전혀 기죽지 않고 여전히 황궁에 살면서 맹렬한 반격을 개시했다. 우선 라인강 주둔군 군단장들과 은밀히 연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남편 네로에게 소박을 맞고 동생 브리타니쿠스마저 세상을 떠나 우울증에 빠진 옥타비아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며느리에게 접근했다.
게다가 '회상록'까지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가 타키투스가 그 회상록을 참고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로마 역사상 저술까지 한 여자는 아그리피나를 빼고는 전무후무하다.
하지만 아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선 황태후의 신변 경호를 맡고 있던 병사들을 그 임무에서 철수시켰다. 아그리피나를 ‘황후이자 황태후’에서 보통 여자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서도 쫓아냈다. 아그리피나는 같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할머니 안토니아의 저택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들은 어머니가 호되게 비난한 또 한 가지 일을 전보다 더욱 당당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년배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밤마다 로마 시내로 몰려나가는 것이었다. 몰려나갈 때는 황제나 유력한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보이지 않도록 평범한 젊은이 차림으로 변복한다. 쾌활한 젊은이들은 거리로 몰려나가 멋대로 즐긴다.
치세의 시작
서기 57년의 담당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네로였다. 네로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55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자격 연령이 43세인 집정관에 십대 젊은이를 선출한 것은 원로원 의원 대다수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최고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은 아니다. 국가 로마에서 공식적으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집정관 자리에 앉힘으로써 ‘제일인자’라는 비공식적인 직책을 공화정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였다. 공화정 체제에 편입시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생각도 그 뒤에 깔려 있었다.
서기 58년, 원로원은 ‘종신 집정관’(콘술 페르페투아)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창안하여, 20세가 된 네로에게 그 자리를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네로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원로원의 손아귀에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네로는 이제까지의 원로원 편향 정치에서 명백한 황제 정치로 옮아가게 된다.
이 즈음 네로는 만기 제대한 군단병들의 정착지를 오랜만에 본국 이탈리아로 바꾸었다. 카이사르 이후, 퇴역병들의 정착지는 주로 속주였다. 게다가 네로는 군단별로 한곳에 이주시키는 종래의 방식을 버리고, 병사 개개인이 원하는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퇴역병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네로는 ‘피스쿠스’(fiscus, 황제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 가운데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융자하여 ‘에라리움’(erarium, 원로원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의 부족을 메워주었다. 이로써 둘로 나뉘어 있던 국고를 일원화하는 데 성공한 듯싶다. 이로써 ‘제일인자 통치’로 넘어가던 시기에 원로원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다.
또한 서기 58년, 네로는 간접세인 5퍼센트의 관세를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관세를 철폐하면 경제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10분의 1세’인 속주세도 더 많이 들어오리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의원들은 반대하면서, 생필품인 밀에 대해서 ‘20분의 1세’를 폐지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네로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 전선
아르메니아 왕위를 빼앗은 파르티아 왕제(王弟)를 쫓아내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다시 로마의 패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명을 띠고 있던 코르불로는 로마에서 전략을 변경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식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파르티아 대책의 지휘계통은 양분된 채였고, 파르티아 왕과의 휴전 교섭조차 시리아 속주 총독인 콰드라투스와 코르불로가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력도 콰드라투스와 코르불로가 양분하고 있었다.
이에 서기 58년 5월, 코르불로는 단독으로 훈련 시킨 병력 2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군사밖에는 생각지 않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과 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에게 다음을 제안했다.
"로마 황제 네로에게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떠냐. 티리다테스가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로마 황제한테 아르메니아 왕위를 선물로 받는 게 어떠냐."
코르불로는 단숨에 아르탁사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각지의 성채를 각 부대에 공략 목표로 할당하고, 융단 폭격처럼 성채를 격파하면서 진격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는 수도 방위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로마군과 한번 싸워보지도 않은 채 도망쳤다.
네로는 아르메니아 왕위에 로마가 고른 왕자를 앉히기로 결정했다. 선택된 왕자의 이름은 티그라네스였다. 그리고 콰드라투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시리아 속주 총독에 코르불로를 임명해놓은 것이 네로에게는 행운이었다.
어머니 살해
20세를 맞이할 무렵, 네로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포파이아 사비나(Poppaea Sabina)였다. 첫 남편은 기사계급에 속하는 유복한 남자였다. 재혼 상대는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자 네로 황제의 놀이 친구인 오토(Marcus Salvius Otho)였다. 결국 네로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셈이다.
네로는 오토를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하여 멀리 보내버렸다. 그런데 속주 총독이 된 오토는 밤마다 네로와 함께 놀러 다니던 사람치고는 꽤 유능했다. 9년 동안이나 벽지에 근무했는데도, 오토의 속주 통치는 선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랑의 걸림돌을 제거했는데도, 포파이아는 네로의 애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포파이아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옥타비아와 이혼해야 한다. 하지만 옥타비아와 이혼하는 것은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단호히 반대했다.
네로가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선황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 자리가 더욱 확고해진 것은 선황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했기 때문이니까, 이혼은 당치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단호한 반대가 벽처럼 앞을 막아서자, 그 벽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된 네로는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치달았다.
어머니를 죽일 하수인으로는 능력은 있지만 인격이 비열한 아니케토스가 선정되었다. 소년 시절의 네로를 가르친 체육교사였고, 그 후에도 네로와는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 자기를 중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후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결행 날짜도 결정되었다. 미네르바(그리스어로는 아테나) 여신의 축일이었다.
살해는 우연한 사고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네로는 아니케토스의 진언을 받아들여, 밑창의 일부를 떼어내면 간단히 침몰해버리는 배를 은밀히 만들었다. 배가 만들어지는 동안, 네로 자신은 어머니와 화해하겠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지만, 어떤 결점이 있더라도 어머니는 어머니라면서.
3월 20일 배는 예정대로 침몰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물에 빠져죽지 않았다. 그녀는 칼리굴라 황제 시절에 1년 동안 벤토테네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수영의 명수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침몰 장소는 칼리굴라가 배를 잇대어 급조한 발판 위를 말을 타고 달려갈 수도 있었을 만큼 파도가 잔잔한 포추올리만이다
네로는 세네카와 부루스를 급히 불러 모든 것을 자백하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매달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의 성격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날 리는 없었다. 결국 실패한 자가 책임을 지게 한다는 이유로, 아니케토스에게 아그리피나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아니케토스와 부하들은 아그리피나의 별장으로 가서 침상을 에워쌌다. 아그리피나도 만사가 끝난 것을 깨달았다. 죽이려면 네로가 들어 있었던 여기를 찌르라면서 아랫배를 가리켰다. 그 손짓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랫배만이 아니라 온몸에 칼이 꽂혔다.
세네카는 고심 끝에 아그리피나가 국가반역죄로 죽음을 맞았다고 공표했다. 원로원도 일반 시민들도 속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아그리피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 ‘척’했다. 하지만 네로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응이 두려워 한동안 로마에 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로마 올림픽’
서기 60년, 어머니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다. 그해는 1년 동안 준비해온 일을 로마에서 실행에 옮긴 첫 해가 되었다. 그것은 ‘루디 퀸퀘날리’(Ludi quinquennali, 5년마다 열리는 제전[祭典])로 불렸지만, 일반적으로는 ‘네로 제전’이라고 불렸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과 구별하여, 로마에서는 5년마다 열기로 한 것이다.
네로의 ‘로마 올림픽’은 성황리에 끝났다. 대중이 ‘네로 제전’이라고 불렀듯이, 수도 로마에 있는 공공시설을 모두 사용한 대대적인 축제였기 때문이다. 대경기장, 바티카누스 경기장, 폼페이우스 극장, 마르켈루스 극장, 발부스 극장 등 로마 전체가 행사장이 되었고, 입장료는 모두 무료였다.
‘네로 제전’은 5년 뒤에 한 번 더 개최되었을 뿐, 결국 네로의 죽음과 함께 잊혀버린다. 네로 제전’ 이듬해인 서기 61년, 로마 제국의 변경이 오랜만에 소란해졌다.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반대하여 총궐기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역시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였다.
브리타니아 문제
서기 61년에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총궐기는 아직 로마가 제패하지 못한 지역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제패가 끝나,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은 지방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이것은 로마의 브리타니아 통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총궐기한 브리타니아인의 우두머리는 이케네족의 여왕이었다. 이름은 부디카(Boudicca). 그녀는 총궐기를 주도한 게 아니라 우두머리로 추대된 데 불과했던 모양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디카의 두 딸이 로마인에게 강간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 아직 정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미 패배하여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간 브리타니아인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정복자 노릇을 했다. 둘째는 돈 문제다. 10퍼센트의 속주세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아니다. 그 세금을 내려면 빚을 져야 할 때가 많았는데, 금리가 너무 높았다.
궐기한 브리타니아인들은 오늘날의 콜체스터에 정착한 로마 퇴역병을 습격했다. 이들을 피의 제물로 바쳐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반란군은 출동한 로마군 1개 군단까지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수에토니우스 총독(역사가 수에토니우스와 다른 인물)이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1만 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에 수에토니우스는 평원에 포진하여 정면 대결을 벌이는 회전으로 승부를 겨루기로 결정했다. 회전에서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로마군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전투 방식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로써 일단 응급조치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로마의 네로가 나설 차례다. 네로는 우선 라인강 방위군 병력 중에서 2천 명의 군단병과 8개 대대의 보조병 및 1천 기의 기병을 떼어 브리타니아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전부 합하면 1만 1천 명 정도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브리타니아의 실정을 시찰하도록 해방노예인 폴리클레토스를 파견했다. 그의 보고를 토대로 네로는 브리타니아 통치 체제를 크게 바꾸었다. 물론 로마의 제패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후 무려 400년동안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저항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네로는 브리타니아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응했지만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대처는 합격점을 받기 어렵다. 그것은 이 두 가지 문제가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브리타니아 문제는 제국의 한 지역을 통치하는 문제였던 반면,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는 제국 전체의 안전보장과 관련된 문제였다.
로마가 낙하산식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 티그라네스는 아니나다를까 1년도 지나기 전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아르메니아가 도로 파르티아의 수중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계속 로마 편에 남아 있느냐는 로마 제국의 오리엔트 방위체제가 기능을 발휘하느냐 못하느냐를 좌우한다.
이 문제 해결에 골몰하던 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적당한 후보자가 달리 없는 이상, 로마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끝까지 티그라네스의 왕위를 지켜준다.
(2) 아르메니아 왕국의 두 수도가 로마의 수중에 들어와 있는 지금, 문제가 끊이지 않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아예 로마의 속주로 만들어버린다.
(3)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의 생각을 받아들여, 파르티아 왕제(王弟)인 티리다테스가 신하로서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서약하는 조건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는 것을 승인한다.
(3)을 채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네로는 그 용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180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네로는 (1)도 될 수 있고 (2)도 될 수 있는 대책을 채택했다. 티그라네스의 왕위를 지켜주는 데 성공하면 좋고, 성공하지 못하면 속주화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을 통고받은 코르불로는 로마의 네로에게 아르메니아 전선만 담당할 사령관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진언했다. 네로는 이 진언을 받아들였다. 사령관에는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강경파인 페투스가 임명되었다.
서기 62년 초에 부임한 페투스에게는, 네로의 명령으로 라인강에서 이동해올 2개 군단을 포함하여 3개 군단이 주어졌다. 보조병과 동맹국 참가병을 합하면 3만이 넘는 병력이다. 코르불로는 역시 3개 군단 병력으로 시리아 속주 총독의 임무에만 충실하게 되었다.
이 무렵 로마인의 대다수는 페투스가 파르티아군을 무찔러 아르메니아가 명실공히 로마의 것이 되리라고 믿었다. 벌써 다 된 밥처럼, 털끝만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민중은 항상 낙관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 서기 62년 당시 로마에 여론조사가 있었다면, 이 무렵 네로 황제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높은 지지율은 자칫하면 함정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갈수록 더욱 철저한 자기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통제는 네로가 가장 서투른 분야였다. 게다가 이 무렵 25세의 네로는 사리사욕과는 무관하게 그에게 직언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
세네카 퇴장
우선 측근에서 네로를 지켜준 근위대장 부루스가 병사했다. 후세에는 네로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설이 퍼졌지만, 증세로 보아 후두암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부루스의 죽음으로 세네카의 권력도 쇠퇴했다”고 말했다.
철학자이자 비극작가이기도 한 세네카는 네로가 12세였을 때부터 14년 동안이나 네로를 최측근에서 섬겼다. 처음 6년 동안은 스승이었고, 다음 8년 동안은 보좌관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네로가 황제가 된 이후 줄곧 세네카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세네카는 아무리 교양이 뛰어나다 해도 속주인 에스파냐 출신이고, 로마의 명문 귀족에게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클리엔테스’도 갖고 있지 않다. 세네카 같은 독불장군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본국 이탈리아의 유일한 군사력인 1만 명의 근위병을 거느린 부루스가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브리타니아에서 고리대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세네카만이 아니었는데도 세네카는 고리대금업자의 대표처럼 비난을 받았고,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의 책임자라도 되는 듯이 탄핵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루스가 사망한 것이다. 세네카는 발 밑의 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래도 네로에게 매달려 독불장군의 비참한 말로를 보이는 것은 지식인인 세네카의 감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은퇴하여 일개 야인으로 돌아가 저술 활동에 전념하는 쪽을 택했다. 나이도 60대 후반에 접어들어 있었다. 66세의 스승과 25세의 제자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이로써 원래 자제력이 떨어지는 네로에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부루스가 죽고 세네카가 은퇴하자,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애인인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게다가 이혼한 옥타비아를 섬으로 유배하여 죽여버렸다.
이로써 네로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내를 죽였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구나 이 결혼은 옥타비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아 그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황제로서 네로의 권위와 권력은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고 있었는데 네로는 이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당시 25세의 네로는 ‘피’의 후원을 받지 못해도 ‘실력’으로 승부할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로가 간과했던 것은, ‘피’의 후원이 사라지면, 원로원과 시민들만이 아니라 군대도 네로 황제가 실력으로 거둔 성과를 더욱 엄정하게 채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로마군의 투항
동방에 부임한 페투스는 네로의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모두 아르메니아에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을 양분하고 군량 보급로를 확보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로마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연말에 페투스가 로마에 보낸 보고서는 마치 아르메니아 제패를 완전히 끝낸 듯한 낙관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페투스가 네로에게 보낸 두 번째 보고서가 아직 지중해를 건너고 있는 동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볼로가세스 왕이 직접 이끄는 파르티아군이 페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투스는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당시 그의 휘하에는 2개 군단도 안 되는 병력밖에 없었다.
타키투스의 말에 따르면, 아군의 위기를 알게 된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정복보다 포위된 아군을 구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앞장서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격려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을 계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에게 포위되어 있던 페투스가 너무 일찍 체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에게 항복을 제의했고, 볼로가세스는 그것을 수락했다. 코르불로의 군대가 도착하기 사흘 전이었다. 파르티아가 제시한 조건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로마군의 완전 철수였다. 페투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서쪽으로 철수한 페투스의 군대와 북상하던 코르불로의 군대는 유프라테스강 연안에서 만났다.
코르불로는 군사적 우위 상황에서 파르티아 왕과 평화협정을 맺을 작정이었지만, 이번 패배로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페투스는 파르티아 왕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쳐들어가면 아르메니아는 다시 로마의 수중에 들어올 테고, 따라서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항변했다.
코르불로는 이 항변을 차가운 어조로 물리쳤다. 나는 네로한테 아르메니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내 임무는 시리아 속주를 방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것은 아군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두 사령관의 회견은 끝났다.
페투스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떠났고, 코르불로도 휘하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코르불로는 시리아 총독이다. 속주 총독의 임무에는 통상적인 행정과 사법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 임무에는 다른 사람을 임명하고, 코르불로를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이 무렵부터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와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 사이에는 ‘물밑 교섭’이 시작된 듯하다. 로마에서는 코르불로에게는 ‘마그누스’(최고)라는 형용사가 붙은 지휘권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비록 동방에만 한정된다 해도, 황제와 다름없는 권한이다. 백지 위임장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메니아 본토가 목적지였다. 목적지는 아르메니아지만 싸울 상대는 파르티아군이다. 수도 로마의 민중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은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네로 자신이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 동안 로마에서는
우선 서기 62년에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인 폼페이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피해는 대단치 않아서, 국고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폼페이시가 자력으로 복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로부터 16년 뒤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와 그 주변이 매몰된 대재난의 전조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마르스 광장 한편에 네로가 세운 ‘체육관’(김나시움)이 벼락을 맞고 불타버린 사고가 발생했다. 이 체육관은 로마 시민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네로는 당장 체육관을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그리스적인 신체 단련 습관을 로마에도 도입하고 싶다는 네로의 열의는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그해에 네로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다. 포파이아가 딸을 낳은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기뻐 날뛰며, 갓 태어난 딸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을 주었다. 아우구스타는 신성한 존재라는 뜻과 황후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석 달도 지나기 전에 죽었다. 네로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서기 63년에는 그밖에도 로마 제국다운 사건이 두 건 더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근엄한 타키투스의 말을 빌리면 ‘수치스러운 관습’을 둘러싼 토의로 원로원 회의장이 한바탕 떠들썩해진 사건이었다. 가짜 양자를 맞아들임으로써 얻은 공직은 무효로 한다는 법안이 제출되었고, 이 법안은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두 번째 사건도 원로원이 무대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속주민이 속주 총독을 고발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다. 속주에서의 악정을 막는 것이 목적이지만, 사법은 자칫하면 ‘무기’로 바뀌기 쉽다. 하지만 속주민의 총독 고발권은 오랫동안 인정되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로는 그 대신 임기가 끝난 총독에 대해 관례적으로 이루어진 속주민의 감사 결의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감사 결의는 총독에 대한 ‘인사고과’가 되기 쉬웠기 때문에, 이것을 완화하는 것이 법안의 목적이었다. 원로원은 이 법안을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외교전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영토로 들어간 지점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로마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성채는 모조리 공략하여 파괴하고, 파르티아파 귀족의 영지는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마치 불도저가 지나가는 것처럼 진격했다. 아르메니아는 온 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티리다테스도, 파르티아 본국에서 동생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고 있는 볼로가세스도, 코르불로의 로마군이 어떤 식으로 진격하고 있는지를 알고, 이번에는 로마도 진지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코르불로 진영에 사절을 보내 강화를 맺자고 청했다.
볼로가세스도 로마와 우호관계를 빨리 회복하고 자국 통치에만 전념하는 편이 현명하다. 늘상 동쪽의 외적에 시달리고 있는 파르티아는 서방의 로마와 대결하는 데 군대를 투입할 여유가 없다. 반대로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면 다른 지역은 모두 평화롭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투입할 수도 있는 형편이다.
코르불로의 회신에는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를 로마 황제의 선물로 받는 편이 현명하다"고 적혀 있지만, 왕관을 받는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의 회담에서 결국 젊은 티리다테스는 자기가 직접 로마에 가서 왕관을 받아도 좋다고 말해버렸다.
애초부터 로마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티리다테스는 코르불로의 말에 설득되었고, 이것을 기정사실로 들이대자 볼로가세스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코르불로는 볼로가세스에게 티리다테스 일행이 로마까지 가는 길에서의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문제 해결
파르티아군을 이겼다는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평화조약을 체결했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아무리 백지 위임장을 주었다 해도, 코르불로가 한 일은 황제와 내각의 방침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로도 원로원도 시민도 거부하기는커녕 기꺼이 승인했다.
대관식은 포로 로마노에서 거행되었다. 중앙 연단 위에 보랏빛 옷차림의 네로가 왕관을 들고 서 있고, 그 앞에 황금빛 예복 차림의 티리다테스가 무릎을 꿇는다. 네로는 아르메니아 왕관을 티리다테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티리다테스는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고, 로마 측도 티리다테스를 존중했다. 파르티아인이 통치하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태평하면 파르티아 왕은 만족이니까, 파르티아와의 관계도 자연히 좋아진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설 때까지 반세기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가수 데뷔
네로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다. ‘키타라(Kithara)’라는 일종의 리라를 연주하면서 자작시를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스 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뷔 장소를 나폴리의 야외극장으로 결정했다. 나폴리는 원래는 그리스인이 이주하여 세운 도시였고, 로마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그리스색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 나폴리의 주민이라면 그가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믿는 리라를 타면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도 이해하고 인정해주리라고 네로는 믿었다.
이 성공적인 데뷔로 자신감을 얻은 네로는, 다음에는 로마혼의 아성인 로마에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다음에는 드디어 본바닥인 그리스로 진출하여 그리스인들 앞에서 재능을 펼쳐 보이자고 결심했다.
로마의 대화재
서기 64년 7월 18일부터 19일에 걸친 밤, 대경기장 관중석 밑에 들어차 있는 가게에서 일어난 불은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가까운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으로 번졌다. 여름철이면 로마에서는 자주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라'는 남서풍이 맹위를 떨친다.
밤사이에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까지 집어삼킨 불길은 ‘수부라’로 번지고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황제 일가과 명문 귀족들의 저택이 몰려 있었다. 첼리오 언덕은 위쪽에는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지만, 아래쪽은 서민의 집들로 메워져 있었다. 맹렬한 불길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별하지 않았다.
소방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직 불타지 않은 건물을 부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엿새째 저녁 겨우 불길을 잡았지만 동쪽에서 불어온 강풍에 불길은 또다시 사흘 동안 맹위를 떨쳤다. 결국 ‘세계의 수도’는 아흐레 동안 불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불이 났을 당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에서 불이 난 것은 그 이튿날 알았다. 그것을 알자마자 네로는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로 들어갔다. 그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 지휘했다.
네로는 이재민 수용과 함께, 전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식량 공급도 잊지 않았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는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밀도 있었고, 하역한 직후여서 아직 선착장에 쌓여 있는 밀도 있었다. 네로는 그 밀을 몽땅 로마로 운반하라고 명령했고, 이재민들에게 밀가루나 빵으로 배급되었다.
이 14개 행정구 가운데 전소한 행정구는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하는 제10구, 대경기장이 있는 제11구, ‘수부라’가 있는 제3구였다. 모두 도심 중의 도심이지만, 포로 로마노와 신전으로 가득 차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은 피해를 면했다. 대리석으로 지은 공공건물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건
14개 행정구 가운데 3개 행정구가 전소되고 7개 행정구가 반소되었으니, 이를 복구하는 작업은 사실상 본격적인 재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황제 이름으로 제국 각지에 재건을 위한 의연금을 요청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재해가 일어났을 때 서로 원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네로는 로마를 재건하는 작업도 진두 지휘한다. 황제의 명령은 이제까지 로마인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네로는 화재에 강할 뿐 아니라 좀더 쾌적하고 아름다운 로마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원 확보를 위해 '손질'에 가까운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7.8그램의 순금으로 만들어지던 아우레우스(금화)를 7.3그램으로 줄이고, 3.9그램이던 데나리우스(은화)를 3.4그램으로 줄였다. 데나리우스는 원래 100퍼센트 순은으로 만들었지만, 이 함유량도 92퍼센트로 떨어졌다. 아시스(동화)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네로가 ‘손질한’ 금화와 은화는 오현제 시대를 거쳐 서기 215년에 카라칼라 황제가 화폐 개혁을 단행할 때까지 무려 150년 동안 계속 유통되었다. 우리 귀에 익숙한 평가절하와는 달리, 네로의 화폐 개혁은 로마 제국의 경제력 향상을 반영했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타당한 개혁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건설과 재원 확보를 통한 네로 황제의 로마 재건책은 시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힘을 합쳐, 로마 재건 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로마는 전보다 더욱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도무스 아우레아’
한편 이 즈음 네로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 네로가 생각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아르카디아’라고 부른 목가적 이상향을 로마 도심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에스퀼리노 언덕에 이르는 50만 제곱미터의 땅을 모두 사용한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팔라티노 언덕 밑에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통행실’)가 시작된다. 구조는 기둥이 늘어서 있는 주랑 형식이고, 한복판에는 높이가 4미터나 되는 네로의 황금상이 서 있다. 그곳을 지나 오피우스 언덕까지 가는 길의 오른쪽 저지대는 드넓은 인공호수로 변모한다. ‘도무스 아우레아’의 본관 정면은 이 인공호수를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그 본관 배후에 있는 에스퀼리노 언덕 전체는 동물들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본관도 넓고 기발해서, 살롱의 천장은 회전하도록 되어 있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꽃잎이 흩뿌려지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치와 기술의 정수와 꿈을 모두 투입한 것이 ‘도무스 아우레아’였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결국 네로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인공호수 예정지에 콜로세움을 짓고, 네로의 황금상 머리부분은 태양신의 머리로 교체했다. 티투스 황제는 정원 자리에 목욕탕을 지었고, 트라야누스 황제는 본관을 허물고 거기에 대목욕탕을 지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자리에 신전을 지었다. 이리하여 ‘도무스 아우레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네로는 또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공사 재개 시기를 잘못 잡은 것이다. 서기 64년 초에 착공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대화재로 전소되자, 네로는 공사 재개를 서둘렀다. 게다가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 예정지와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 시민들의 의심을 샀다.
그래서 네로가 방화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네로는 에스퀼리노 언덕의 별궁에서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스스로 연주하는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소문이 불행을 탄식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27세의 네로는 사람들의 반감이나 적개심에 익숙지 않았다.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네로는 당황했다. 사람들의 적개심을 어떻게든 다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기가 화를 당할 거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런 경우, 못된 꾀를 일러주는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기독교도 박해
유대교도들은 서기 64년 여름에 대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4개 행정구 가운데 하나인 테베레강 서쪽의 제14구에 모여 살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은 서기 33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뒤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포교활동은 그들의 동포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네로 시대에 로마의 기독교도 공동체는 유대인 사회에 비해 규모도 작고 약체여서, 철저한 박해로 궤멸시켜야 할 정도의 세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는 포파이아 황후라는 보호자를 갖고 있었지만, 기독교도 공동체는 그런 보호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알맞은 상대였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고발한 이유에는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는 기독교도는 로마인이 창설한 인류 공생체의 규칙을 어지럽히려 드는 어둡고 불길한 적이었다.
현대의 연구자들이 추산한 결과에 따르면, 순교자의 수는 200명 내지 300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네로는 이것을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이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당한 잔혹한 죽음은 네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시민들의 가슴에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이 혐오하는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만들어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의혹을 풀려고 했던 네로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남게 되었다.
노래하는 황제
이듬해인 서기 65년은 제2회 ‘로마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육체와 시와 변론을 겨루는 이 제전의 당초 목적은 일반 로마인에게도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침투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시들어버린 인기를 만회하려는 목적도 추가되었다.
그날 폼페이우스 극장은 노래하는 황제를 보러 온 시민들로 대만원이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로마의 봄은 아무 일이 없어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날씨다. 하지만 3만 명을 수용하는 로마 제일의 노천극장이 만원을 이룬 것은 네로가 출전하는 것을 알고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네로가 우승했는지 어떤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성공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심판의 평가와 함께 관객의 인기투표도 실시되었다면, 인기상은 네로가 차지했을 게 틀림없다. 출전자들 중에는 네로가 가장 성대한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석 앞쪽의 ‘지정석’에 앉아 있던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 남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관객 속에 섞여 있던 속주나 동맹국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탤런트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피소 음모
같은 해인 서기 65년 말, 역사상 ‘피소 음모’라고 불리는 네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Gaius Calpurnius Piso)는 이런 경우에 추대되는 인물의 전형이었다. 우선 가문이 좋다.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아내의 친정이기도 했다.
주모자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기보다 제국의 행방을 우려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연히 음모가 형성되었고, 네로를 죽인 뒤 누구를 제위에 앉힐 것인지도 결정되었다. 피소를 제외하면, 음모 가담자는 거의 다 네로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음모 가담자들 가운데 스카이비누스라는 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재산 정리를 해버렸다. 생전에 유언을 집행하듯, 지금까지 충실히 봉사해준 데 감사한다는 명목으로 하인들에게 돈을 나누어준 것이다. 돈을 받은 사람 가운데 밀리쿠스라는 해방노예가 있었다.
스카이비누스는 밀리쿠스에게 단검을 잘 갈아두라고 명령하고, 지혈제와 붕대도 준비해두라고 일렀다. 밀리쿠스는 눈치를 채고 주인이 갈아두라고 지시한 단검을 들고 네로의 거처를 찾아갔다. 밀리쿠스의 이야기를 듣고 네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 즉위 후 10여 년. 그동안 그를 죽이려는 음모는 전혀 없었다.
스카이비누스는 처음에는 잡아뗐지만 나탈리스라는 가담자가 연행되었는데, 그는 고문 도구만 보고도 겁에 질려, 피소와 세네카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나탈리스가 자백한 것을 안 스카이비누스도 마음이 약해졌는지, 음모 가담자의 이름을 댔다. 거기에는 세네카의 조카이자 시인인 루카누스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근위병들이 음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로마 전역으로 달려갔다. 각오한 피소는 병사들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에 혈관을 잘랐다. 이듬해 집정관에 선출되어 있던 라테라누스에게는 자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심문도 받지 않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세네카 역시 음모 가담자로 단정되고 말았다. 네로는 그에게 “죽음을 주었다.” 즉 자결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70세가 다 된 세네카는 혈관을 잘라도 피가 잘 나오지 않아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눕혔으나 그래도 죽지 않았다. 땀을 흘리기 위한 한증막의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겨우 죽을 수 있었다.
[세네카의 어록]
- 때로는 사는 것조차 용기 있는 행동이다.
- 오직 시간만이 이성이 치유할 수 없는 것을 치유할 수 있다.
- 만일 당신이 현재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온 세계를 차지해도 불행할 것이다.
- 모든 잔인함은 나약함에서 나온다.
-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자주 고통을 겪는다.
- 가난한 사람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 스스로 비참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할 것이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할 것이다.
- 감사함을 표현하는 마음은 선을 베푸는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 참으로 위대한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법이다.
- 종교는 일반인에게는 진리이고, 현자에게는 거짓이며, 권력자에겐 유용하다
-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가치다.
- 인생을 한탄하는 것보다 인생을 비웃는 것이 더 적합하다.
- 설사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해도 가치 있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dimus. Satis longa vita.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충분히 길다.
삶의 짧음에 관하여(De Brevitate Vitae)
- Quemadmoeum gladis nemeinum occidit, occidentis telum est.
검은 살인자가 아니다. 그저 살인자의 손에 들린 도구였을 뿐이다.
루키우스에 대한 서간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 Ignis aurum probat, miseria fortes uiros.
불은 황금을 시험하고,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섭리에 대하여(De Providentia)
네로 암살의 실행자로 예정되어 있던 근위대 대대장 플라우스는 황제에게 왜 칼을 들이댈 마음이 났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을 무렵에는 저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운동경기에 열광하고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르게 된 뒤로는 폐하에게 증오밖에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자살을 강요당한 사람들 중에는 풍자문학의 걸작 『사티리콘』의 저자이며 네로의 측근이기도 했던 페트로니우스도 끼어 있었다. 이 사람은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로마를 묘사한 소설 『쿠오바디스』에서도 주인공의 한 사람이 되었다.
청년 장교들
이 무렵 로마군의 주력인 군단이 처음으로 네로에 반대하여 일어날 조짐도 보였다. 주모자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가진 도시의 이름을 따서 ‘베네벤토의 음모’라고 부르는 서기 66년의 이 음모는 군단의 청년 장교들이 모의한 네로 암살 계획이다.
우국지심에 사로잡힌 이들 젊은 장교들의 지도자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해결의 진짜 공로자인 코르불로의 사위 비니키아누스였다. ‘베네벤토의 음모’ 주모자들은 네로를 죽이고 코르불로를 제위에 앉히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네로는 이 사건의 심문기록은 공표하지 않았다. 구태여 공표할 것까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여행
'베네벤토의 음모' 사건을 처리한 이후 네로는 평소에 동경하던 그리스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황제의 순행이 아니라 가수로서 역량을 시험해보기 위한 여행이었고, 그래서 ‘아우구스티아니’라고 불리는 응원단도 데려가게 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를 여행할 때 황제다운 일을 몇 가지 했다. 그중 하나는 코린트 지협을 뚫어서 운하를 만들어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공사였다.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아가는 시간과 거리를 단축하는 것이 이 토목공사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공사도 네로의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그 후에는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된다.
그리스 각지를 ‘순회공연’하며 돌아다니던 네로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기뻐할 만한 선물을 주었다. 그리스 전역을 ‘자유도시’로 선언한 것이다. ‘자유도시’는 내정의 자치를 인정받고 속주세도 면제받는 특전이 주어진 도시를 말한다. 이제까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이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도시 선언은 네로가 죽은 지 2년도 지나기 전에 백지화된다. 건전한 상식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속주들을 차별 대우하는 것은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특별 대우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것도 ‘정치’다.
사령관들의 죽음
이 당시 로마의 라인강 방위선 8개 군단의 사령관은 우연히도 스크리보니우스 집안의 두 형제였다. 둘 다 오랫동안 전선에서 근무한 베테랑 사령관이다. 네로는 이 두 장수를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무렵,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유프라테스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던 코르불로도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리스에 도착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제의 초대장이 아니라 죽음의 통고였다. 네로는 그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죽음을 명령했다. 라인강에서 온 두 사람은 네로가 마중하러 보낸 티겔리누스 휘하의 근위병에게 둘러싸여 자살을 강요당했고, 코르불로는 역시 네로가 마중하러 보낸 근위병한테서 자살을 명령하는 네로의 친서를 받았다.
네로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세 사령관을 죽임으로써 로마군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렸다. 그가 로마를 비운 동안 내정을 맡고 있던 해방노예 헬리우스가 성가시게 재촉하는 바람에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서기 68년 1월 하순이었다.
개선식
네로의 개선식 플래카드에는 그가 자작곡 경연대회에서 가수로 우승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우승으로 얻은 황금 월계관을 받쳐든 사람들이 플래카드 대열을 뒤따른다. 월계관의 수가 무려 1,808개에 이르렀다니까, 플래카드의 수도 이것과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선장군 네로가 등장한다.
역사가들은 서민들이 네로의 개선식에 열광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파격적인 개선식은 신기한 구경거리였겠지만 개선장군은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돌아온 사람이다. 리라를 켜면서 자작시를 노래하는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것과는 다르다. 로마 시민들의 열기는 쉽게 식어버렸다.
이 또한 네로는 불만이었다. 로마인은 너무나 비문화적인 민족이라고 개탄하고, 그가 생각하기에 문화의 향기가 짙은 나폴리로 가버렸다. 나폴리에서는 언제든지 어느 극장에서나 노래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나폴리에 있는 네로에게 날아들었다.
우국(憂國)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빈덱스라는 성은 그가 갈리아의 한 지방인 아퀴타니아(오늘날의 아키텐) 출신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빈덱스도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속주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리옹 속주) 총독에도 임명되었다.
당시 로마는 갈리아 전역 중 유일하게 ‘장발의 갈리아’의 수도인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 2개 대대(1천 명도 안 된다)만을 상주시키고 있었고, 그 책임을 빈덱스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런 빈덱스가 반기를 들었고 격문에서 빈덱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로는 제국을 사유화하고, 제국의 최고책임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행에 도취해 있다. 어머니를 죽이고, 제국의 유능한 인재까지도 국가반역죄로 죽였다. 게다가 가수로 분장하여 서투른 리라 연주와 노래 솜씨를 보이고는 기뻐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지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인물은 한시라도 빨리 퇴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갈리아인과 로마인을, 아니 제국을 구해야 한다.”
빈덱스에게는 당장 10만 명에 이르는 갈리아인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갈리아인이라기보다 로마인으로서 궐기한 이 리옹 속주 총독은 에스파냐 동북부의 속주 총독인 갈바에게도 궐기를 호소했다. 당신이야말로 네로 대신 로마 제국의 ‘제일인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서.
그해에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은 군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올라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였다. 빈덱스에게 10만 명의 갈리아인이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루푸스는 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설령 10만 대군이라 해도, 갈리아인은 로마군 정예부대의 적수가 못되었다. 로마군은 그들을 간단히 진압해버렸다.
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네로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은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푸스는 거절했다. 군인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그 서약에 어긋나는 결심을 할 수 없었을까.
궐기
빈덱스의 호소를 받은 갈바 총독은 루푸스와 달리 망설이지 않았다. 갈바는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인 명문 출신이다. 8년에 걸친 그의 속주 통치는 선정으로 알려져 있었고, 갈리아인도 그토록 나라를 걱정하는데,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 거기에 질 수는 없다고 갈바는 생각했다.
갈리아인의 반란이 간단히 진압되고 빈덱스가 자결했다는 소식도 갈바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갈바는 선언했다. 이것은 반(反)네로 선언이기도 했다. 서기 68년 4월 2일, 네로가 개선식을 거행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인 오토가 갈바를 지지하고 나섰다. 베티카 속주에 주재하는 회계감사관이자 총독 대리인 카이키나도 지지의 뜻을 전해왔다. 하지만 고지 게르마니아의 4개 군단은 루푸스 사령관의 거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저지 게르마니아의 4개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네로는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일단 원로원은 갈바 총독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에스파냐에서 갈바가 1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주곡인 밀을 실어와야 할 수송선이 네로의 명령으로 경기장에서 쓰이는 모래만 가득 싣고 온 사건이 네로에 대한 그들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원로원은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갈바와 은밀히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갈바는 이미 수도에 심복을 보내놓았기 때문에, 갈바와 원로원은 네로에게 들키지 않고 연락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보수적이라서 30세인 네로보다는 72세인 갈바가 황제 자리에 앉는 편이 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국 통치를 맡겨볼 때까지는…….” 이 갈바가 에스파냐에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원로원과 시민들은 태도를 결정해버렸다.
국가의 적
네로는 내리막길을, 아니 가파른 비탈을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믿고 있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는 어딘가로 도망쳐버렸다. 티겔리누스를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본국 이탈리아의 유일한 군사력인 1만 명의 근위병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한 명의 근위대장인 니피디우스는 재빨리 갈바 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상태에서 네로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이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그것을 뒤쫓듯 이제 니피디우스 한 사람의 지휘를 받게 된 근위대도 갈바를 ‘황제’에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그래도 네로는 자살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특별 대우를 해준 그리스로 도망치기만 하면, 그리스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때는 파르티아로 망명하는 것까지도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이 사태에서 네로가 보여준 꼴사나운 행동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퍼져갔고, 그 소문이 그대로 굳어져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집에까지 체포의 손길이 뻗친 것을 안 네로가 절망 끝에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그의 마지막 말도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실치 않다.
제5대 황제 네로는 이렇게 죽었다. 서기 68년 6월 9일, 30세 5개월 20일의 생애였다. 17세도 안 된 나이에 황제가 된 뒤, 14년이 지났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황제묘’에 매장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네로의 유해도 제3대 황제 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황제묘’가 아닌 다른 곳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네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무너졌다. 100년 동안 지속된 뒤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왕통의 단절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교묘한 속임수’로서의 제정이 붕괴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혈통'이라는 부가가치가 없는 실력들이 공화정 말기처럼 정면 대결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서기 68년 여름부터 1년 반 동안 계속된 혼란도 정치체제를 모색하는 혼미는 아니다. 제정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콘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누구를 ‘유일한 통치자’로 할 것인가였다.
<7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