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황제, 갈리아제국과 유대 전쟁
로마인 이야기 8권 『위기와 극복』편은, 네로 황제가 죽은 뒤부터 트라야누스 황제가 등장할 때까지 서기 68년 여름부터 서기 97년 가을까지 29년 동안의 이야기이다.
이 기간에 제위에 오른 사람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등 무려 일곱 명에 이른다.
특히 서기 69년은 갈바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까지 4명의 황제가 모두 교체된 해라서 '4명의 황제의 해'(The Year of Four Emperors)'라고 불린다.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저술 가운데 바로 이 시대를 다룬 『역사』(Historiae)가 있다. 그의 13세부터 40대 초반까지 한창 시절을 이 시대에 보냈을 것으로 여겨지는 타키투스는 『역사』를 쓰면서 ‘동시대인의 증언’을 기록하는 심정이었을 게 분명하다.
“내가 이제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넷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했다.
제국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유대 전쟁)은 로마에 바람직한 결과로 끝낼 수 있었지만, 제국 서방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도나우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사르마타이족과 수에비족은 로마 군단에 손해를 끼치고, 다키아족은 로마에 패했을 때도 기세를 올리고,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가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본국 이탈리아도 잇따라 일어나는 재해에 시달렸다. 캄파냐 지방의 풍요로운 도시들은 매몰되고(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이 매몰된 것을 가리킨다),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고, 유서 깊은 신전들은 파괴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서 있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까지도 같은 로마인의 손으로 불타버렸다.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는 소홀히 하고, 거리낌 없이 간통을 저지르고,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나르는 배가 넘쳐나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신분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만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 친구 때문에 파멸당했다.
그렇긴 하지만, 악덕이 횡행한 이 시대에도 고결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방된 아들을 따라간 어머니, 추방된 남편을 버리지 않고 본국의 편안한 생활을 버린 아내, 용기를 보여준 친척, 장인이 실각했는데도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남편,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인에 대한 충절을 지킨 노예도 있었다. 자살 명령을 받은 이들도 옛사람들 못지않은 호탕함을 보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하늘과 땅이 보여준 조짐이나 경고는 수없이 많았다. 신들의 뜻이 로마인의 안전보다 로마인에 대한 징벌에 있다는 사실이 조짐을 통해 그렇게 명확히 드러난 시대도 없었다.”
제1부 갈바황제
(재위 서기 68년 6월 18일~서기 69년 1월 15일)
네로의 죽음이 로마인에게 제기한 문제
서기 68년 6월 9일, 네로를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원로원도 시민도 사태를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한 것 같다. 네로 대신 갈바가 제위에 앉기만 하면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롭게 이어지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와 역량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로마 제정에서 ‘정당성’은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고, ‘권위’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역량’은 로마 황제의 두 가지 책무인 안전과 식량 보장을 비롯하여 제국 운영에 적합한 능력을 의미했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군단이 그를 황제로 옹립한 것은 서기 68년 초여름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네로가 자살한 것을 알았다. 갈바는 당장 로마로 갔어야 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 들어가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혀놓아야 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라고 불린 이베리아반도 북동부가 그의 임지였지만, 총독 주재지인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에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까지는 순풍을 타고 직항로를 따라가면 닷새밖에 안 걸린다. 불안한 해로를 피해 육로를 택한다 해도, 남프랑스를 돌아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로마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
원로원이 그를 승인하고 로마 시민인 근위병들도 갈바의 즉위를 환영했으니까 ‘정당성’은 얻은 셈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으니까 그런 종류의 ‘권위’는 없었지만, ‘역량’은 갈바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되도록 빨리 로마에 들어가 황제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갈바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가을로 접어든 뒤였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붕괴라는 중대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막중한 시기에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동안이나 권력을 공백 상태로 방치해둔 셈이다. 그는 원로원이 일찌감치 인정해준 ‘정당성’을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다.
인간 갈라
갈바는 얼마 안 되는 로마 출신 명문 귀족 가문으로 기원전 3년께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에는 역시 티베리우스 황제 밑에서 집정관을 지냈다.
서기 39년에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라인강 방위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4년 근무 후 갈바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따라 브리타니아에 가게 되었다. 그후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거쳐 서기 60년에 네로 황제는 환갑이 지난 갈바를 황제 속주인 에스파냐 북동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갈바는 아프리카에서 1년, 에스파냐에서 8년 동안 총독을 맡았다. 그동안 한 번도 속주민에게 고발당하지 않았다. 로마는 총독의 통치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속주민에게 총독을 고발할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속주민에게 한 번도 고발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갈바의 통치는 속주민들도 만족할 만큼 선정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민심 장악책
황제가 새로 즉위하거나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수도의 평민이나 속주의 군단병들에게 보너스를 나누어주는 관습이 생겼다.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인당 보너스는 군단병 연봉의 3분의 1 정도였다.
필요악이라고 해도 좋지만, 어쨌든 이것이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갈바는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주지 않았다. 병사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지원한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정론만으로 할 수 없다.
타키투스는 갈바를 단 한 줄로 처리하고 있다.
“좋은 자질을 타고났다기보다 나쁜 자질이 전혀 없었던 데 불과한, 요컨대 평범한 인물이었다.”
협력자 인선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혼자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협력자를 선택하는 것은 통치자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갈바는 제1협력자로 당연히 오토를 선택했어야 한다. 오토는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갈바에게 속주 총독으로서는 누구보다 먼저 지지를 표명한 인물이었다.
갈바 혼자서는 제국 최전방 지역의 속주 총독에 비해 ‘무게’가 떨어지지만, 오랫동안 속주를 공정하게 다스린 실적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짝을 이루면 이런 불리한 요건도 희석된다. 로마 제국의 ‘전방’은 라인강과 도나우강과 유프라테스강이다.
그런데 갈바가 서기 69년에 동료 집정관으로 선택한 것은 '비니우스'였다. 그는 총독 시절의 갈바 밑에서 군단장을 지낸 인물로 속주의 일개 지휘관에 불과하다. 게다가 비니우스는 황제의 동료 집정관으로 선임되자마자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갈바의 인사는 이중으로 잘못된 셈이다.
갈바는 재정 재건책에서도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내놓은 시책은 네로한테 받은 금품을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갈바의 재정 재건책은 화젯거리만 제공하는 것으로 끝났다. 갈바는 수도에 들어온 이후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던 석 달을 줄곧 그런 실수만 하면서 보낸 셈이다.
한편 68년 말 현재 갈바에게 도착한 충성 서약은 수도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라인강 방위군 사령관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Lucius Verginius Rufus)가 보낸 것뿐이었고, 머나먼 시리아나 전쟁 중인 유대에서 보낸 충성 서약은 지중해를 건너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갈바는 이들의 호의에 찬물을 끼얹는 짓을 해버렸다.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스를 해임하고 본국으로 소환한 것이다. 게다가 다른 요직에 앉힌 것도 아니고 그냥 해임하고 귀국을 명령했을 뿐이다. 이 인사(人事)는 병사들의 분노만 샀을 뿐이다. 루푸스는 병사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루푸스의 후임으로는 나이도 많고 성격도 소극적인 플라쿠스를 보냈다. 플라쿠스라면 경쟁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석이었던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는 비텔리우스를 임명했다. 자기와 같은 원로원 계급 출신인 비텔리우스라면 끝까지 자기를 지지해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게르마니아 군단’ 또는 ‘라인 군단’이라고 불린 이 군단에 소속된 병사들은 최전방을 맡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서기 69년 1월 1일 마인츠 군단기지에 모인 병사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갈바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비텔리우스, 황제를 자칭하다
오늘날 프랑크푸르트에서 4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마인츠는 로마 시대에는 중요 군단기지인 모군티아쿰(Moguntiacum, 켈트족의 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었다. 라인강 방위군의 최대 거점인 만큼, 여기서 제국의 수도 로마까지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크게 보아도 길이 두 개 있다.
첫 번째 길은 마인츠에서 서남서쪽 모젤강변의 주요 기지인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의 트리어)으로 간 다음,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베손티오(오늘날의 브장송)와 레만호를 지나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아우구스타 프라이토리아(오늘날의 아오스타),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오늘날의 토리노)에 이르는 길이다.
또 하나는 마인츠에서 라인강 상류의 군단기지인 아르겐토라툼(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으로 가는 길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강을 따라 계속 올라가 보덴호에 이르면, 오늘날의 스위스를 가로질러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코모호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가게 된다.
마인츠 군단기지를 떠난 전령이 어느 길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군단병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중대 사건은 적어도 1월 10일께에는 수도에 전해진 게 분명하다. 그 무렵부터 15일까지 며칠 사이에 정국이 급변해가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1월 2일, 다시 모인 군단병들은 갈바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한다는 뜻은 바꾸지 않았지만, 갈바의 후임자 선정을 원로원에 맡긴다는 항목을 철회하고, 후임 황제로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또다시 전령이 이 결의문을 가지고 수도 로마로 떠났다.
라인강 연안의 군단병들이 현직 황제에게 충성을 거부한 것은 일반 병사들이 주도권을 발휘한 결과였다. 요즘 군대로 치면 하사관 역할을 맡고 있던 백인대장들조차 일반 병사들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기네 사령관을 추대하는 것이다.
서기 69년 1월 현재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은 갈바가 임명한 플라쿠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도 역시 갈바가 임명한 비텔리우스가 맡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는 54세니까 나이도 적당하고,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특별히 한 일이 없으니까 판단 자료가 풍부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점수가 깎일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는 하늘에서 넝쿨째 굴러떨어진 이 호박을 이게 웬떡이냐 하고 냉큼 받아먹었다. 로마인들이 백 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내전의 먹구름이 또다시 로마 제국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갈바 살해
갈바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피소를 양자로 맞아들여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피소는 갈바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오는 명문 귀족 출신이다. 철학자 세네카도 연루된 저 유명한 ‘피소 음모’가 탄로나는 바람에 피소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추방되었지만, 네로가 죽은 뒤 귀국했다.
피소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전방에 근무하는 군단병들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명문 귀족을 좋아하고 네로를 싫어하는 원로원의 호의를 얻는 것만 염두에 둔 조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이어받지 않았고 군단 경험도 전혀 없는 상류층 출신의 ‘도련님’을 전방의 병사들이 환영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갈바는 또다시 인사에 실패했다. 이제까지 갈바를 지지해온 오토도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피소는 30세의 젊은이다. 그리고 갈바에 반대하여 일어난 비텔리우스는 54세다. 37세인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한테는 영영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위병들은 반년 동안 모신 갈바에게 벌써 실망하고 있었다. 젊고 활기에 넘치는데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격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오토가 그들을 회유하기는 식은죽 먹기였다. 갈바가 수도에 들어왔을 때는 열렬히 환영했던 일반 시민들도 모두 갈바에게 등을 돌렸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은 불과 사나흘 만에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결행에 옮겨졌다. 서기 69년 1월 15일, 암살자들은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에서 가마에 타고 있던 갈바 황제를 끌어내려 살해했다.
갈바와 함께 보름 전에 집정관에 취임한 비니우스와 가엾은 피소도 갈바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수도 로마의 교외 근위대 막사에서 기다리던 오토는 결과를 알자마자 “황제 만세!”라는 근위병들의 환호를 받으며 곧장 원로원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원로원 의원들은 오토를 ‘제일인자’로 승인했다.
제2부 오토황제
(재위 서기 69년 1월 15일~4월 15일)
오토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마인츠에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안 것은 1월 말께였을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규모가 큰 군단의 동향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사인 만큼, 오토도 서둘러 그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 달 사이에 게르마니아 군단 전체가 로마로 진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7개 군단 4만 2천 병력에, 그것과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행동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아직 낯도 익지 않은 병사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기고만장해진 비텔리우스는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가서 황제로 군림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염두에 없었다. 새 황제 오토는 죽은 갈바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에서 라인강 방위선 다음으로 중요한 전선은 도나우강 일대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이었다. 이 ‘동방 전선’의 책임자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무키아누스는 4개 군단,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두 사령관이 갈바 황제에게 보낸 충성 서약을 가지고 서쪽으로 항해하던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는 그리스의 코린트에 들렀다가, 오토가 즉위하고 비텔리우스가 궐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했고, 이것이 베스파시아누스를 동족상잔의 내전에서 구해내는 결과가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각 군단의 배치 상황은 아래 표와 같다. 서기 69년 이전의 추이도 함께 기록했는데, 이 배치표를 보면 제정으로 바뀐 뒤의 ‘전방’ 추이와 함께, 로마 제국이 군사력의 활용을 얼마나 중시했고, 기존의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려고 애썼는지도 알 수 있다.
인간 오토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 출신인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할아버지 때까지는 로마 사회에서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등용되어 원로원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 시절부터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여서 부모나 선생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다섯 살 아래인 네로와는 죽이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네로가 이 친구의 아내인 포파이아에게 홀딱 반해버렸고, 오토에게 포파이아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오토는 네로 황제의 부탁을 거절했다. 당시 22세였던 네로는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오토를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하여 로마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변방으로 파견되는 것은 오토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배형에 처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토는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이 경탄할 만큼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수도 로마의 이름난 플레이보이가 활력에 넘치는 공정한 행정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의 관저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오늘날의 메리다)에 있다. 동기가 무엇이든, 젊은 총독 오토는 속주 통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10년 동안, 오토는 아내 포파이아가 네로 황제의 공공연한 애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식으로 결혼한 것을 알았다. 오토는 계속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 홀아비로 6년을 살았을 즈음에 포파이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네로는 오토를 로마로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뒤 갈리아 속주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거기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그때 어느 속주 총독보다 먼저 갈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사람이 10년째 루시타니아 속주를 통치하던 오토였다. 그로부터 7개월 뒤에 오토는 갈바를 죽이고 제위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오토에게는 휘하 병력이 전혀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로마를 떠나 있었으니까 근위병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근위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지도 않고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다. 갈바의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고,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는 데에도 지장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오토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가 좋긴 했지만, 남하해 오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총병력이 10만 명에 가까웠다. 오토는 먼저 남하 자체를 저지하는 방책을 쓴다. 비텔리우스에게 공동 황제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그 제의를 일축한다.
오토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느낌이지만, 구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나우강 방위를 맡고 있는 7개 군단이 오토에 대한 지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방 군단’ 같은 소극적인 지지가 아니라, ‘라인 군단’과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적극적인 지지였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라인 군단’ 대 ‘도나우 군단’
도나우 전선의 병사들이 보기에, 오토 황제가 건재하는데도 자기네 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고 본국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무력으로 결판을 내려 하는 게르마니아 군단의 행동은 오만불손하고 아니꼬운 월권행위였다.
실제로 피를 흘리며 야만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은 도나우 전선을 지키는 우리들이고, 너희들은 완전히 철벽이 된 라인강 방위선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오토를 지지하고 나선 게 아닐까.
무력 충돌을 향하여
비텔리우스는 본국 이탈리아를 향해 남하하는 ‘라인 군단’을 셋으로 나누었다. 저지 게르마니아의 노바이시움(오늘날의 노이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4군단장 카이키나가 이끄는 제1군은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쳐 약 3만 명. 제2군은 저지 게르마니아의 본나(오늘날의 본)에 주둔하고 있는 제1군단장 발렌스가 이끈다.
제3군은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비텔리우스가 직접 이끌었다. 제3군의 출발이 늦어진 이유는 ‘우두머리가 앞장서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신병을 모집하여 군단을 편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카이키나의 제1군보다 두 달 뒤에야 이탈리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포강을 사이에 두고
오토는 쌓인 눈을 헤치며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비텔리우스 군대를 맞아 싸우게 되었지만, 그가 생각한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첫째는 카이키나가 이끄는 제1군과 발렌스가 이끄는 제2군의 합류를 저지하는 것. 둘째는 포강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나우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강을 건너면 거의 직선으로 리미니까지 뻗어 있는 아이밀리아 가도가 나온다.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는 리미니에서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아펜니노산맥을 지나 로마까지 곧장 뻗어 있다. 또한 포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면 피아첸차에서 제노바까지 가도가 뻗어 있고, 제노바에서 로마까지는 역시 아우렐리아 가도가 곧장 뻗어 있다.
우선 오토는 카이키나의 제1군과 발렌스의 제2군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나폴리 근처의 미세노 해군기지에 있는 함대를 남프랑스의 프레쥐스 항구로 보냈다. 그곳에 병사들을 상륙시켜 리옹에서 내려오는 발렌스의 제2군을 기다렸다가 기습하게 한 것이다.
포강을 사수해야 하는 오토 측 본대는 근위대와 해병 출신 1개 군단에 검투사 부대를 합쳐서 2만 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제7군단(갈바 군단이라고 불렸다)이, 브리타니아에서는 제14군단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도나우 5개 군단에서 2천 명씩 선발한 1만 명의 선발대가 이탈리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은 첫 번째 일은 카이키나의 제1군이 겨울철인데도 3월 초에 알프스를 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이들을 맞아 싸우기 위해 본대 일부를 급히 출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뒤이어 오토에게 전해진 소식은 발렌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임무를 띠고 남프랑스에 상륙한 1개 군단이 궤멸했다는 것이었다.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
크레모나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베드리아쿰 주변을 전쟁터로 하여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는 양쪽 다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격하는 비텔리우스 진영의 경우, 카이키나와 발렌스의 두 부대가 합류하긴 했지만 지휘계통은 여전히 카이키나와 발렌스로 양분되어 있다.
수비하는 오토 진영도 지휘계통을 통일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전쟁터에서 총지휘를 맡아야 할 오토 황제는 장병들을 포강 북쪽 연안으로 보내놓고, 자신은 남쪽 연안의 브릭셀룸(오늘날의 브레셀로)에서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토 진영의 가장 큰 패인이다.
서기 69년 4월 15일에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는 베드리아쿰을 중심으로 한 넓은 평원 곳곳에 흩어진 적군과 아군이 각자 마음대로 맞부딪쳐 싸우는 혼전으로 시종일관한다. 하지만 황제군 병사들은 바로 뒤에 진을 치고 직접 싸움을 지휘해주리라 믿었던 최고 사령관 오토가 참전하지 않자 맥이 빠졌다.
오토의 자살
패배를 안 오토는 그로부터 30년 뒤에 역사가 타키투스가 극찬한 일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련없이 깨끗하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장병들에게는 승자의 인정에 호소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밤 칼로 가슴을 찔렀다. 단칼에 심장이 꿰뚫렸다. 3개월 동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던 오토는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오토의 산뜻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끼리의 내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원인은 비텔리우스가 패배한 병사들을 잘못 처리했기 때문이다. 내전에서는 패배한 병사들에 대한 처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비텔리우스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
(서기 69년 4월 16일~12월 20일)
서기 69년 4월 16일에는 전날 벌어진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와 그에 뒤이은 오토의 자살이 적어도 북이탈리아 일대에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말을 탄 전령들이 제국의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달려갔다. 원로원 의원들은 오토가 죽은 것을 알자마자 재빨리 비텔리우스를 ‘제일인자’로 승인했다.
오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리옹에서 접한 비텔리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이제까지는 간간이 벌이던 잔치를 앞으로는 밤마다 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나이도 어린 아들에게 ‘게르마니쿠스’(게르만족을 제압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다.
패자에 대한 처우
알프스 건너편의 리옹에서 고주망태로 취해 있던 비텔리우스가 내린 명령은 오토 휘하에서 싸운 각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오토 진영 병사들의 마음속에 굴욕감에 더하여 증오가 싹튼 것도 당연하다. 사형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다.
그가 뒤이어 내린 명령에 따라, 패배한 병사들은 크레모나(*스트라디바리, 과르넬리, 아마티 등 현악기 역사상 최고의 명품들이 만들어진 곳으로 유명하다)의 원형경기장 건설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동안 내전에 시달린 주민들에게 보상하고, 비텔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올 때 검투사 시합을 거행하여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명령에 따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돌관공사(突貫工事)를 강요당하는 병사들에게 던져진 크레모나 주민들의 모욕은 같은 로마 시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병사들의 가슴이 패배의 충격과 굴욕감과 증오가 뒤섞인 원한으로 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옹에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까지는 열흘 거리지만, 리옹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는지 아니면 느긋하게 여행을 했기 때문인지, 5월 중순에야 북이탈리아에 도착한 모양이다. 크레모나에 들어온 비텔리우스는 완성된 원형경기장에서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그의 즉위를 축하하여 주최한 검투사 시합을 관전했다.
서기 15년에 태어난 비텔리우스는 당시 54세. 노령이 정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던 갈바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젊고, 30대라는 나이가 좋게든 나쁘게든 겉으로 드러나 있던 오토보다는 열일곱 살 위다. 고대 로마에서는 40대부터 50대까지가 남자의 한창 나이로 여겨졌다.
그에게는 아버지 루키우스가 남긴 후광이 있었다.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황제에 버금가는 중진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군에서 최강 군단으로 꼽히는 ‘라인 군단’이 배후에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비텔리우스는 이런 ‘힘’을 활용할 줄 몰랐다. 새 황제 비텔리우스는 먼저 근위병을 모조리 해고했다. 퇴직금도 주지 않았으니까 파면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토 편에 서서 비텔리우스 진영과 싸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근위병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반감을 품은 것은 당연하다.
근위병들은 해고했지만 근위대 자체는 존속시킨 것이 그 증거다. 게다가 그냥 존속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강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9개 대대 9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근위대 규모를 16개 대대로 늘린 것이다. 거기에 딸린 기병대를 합치면 원래는 1만 명 안팎이었는데, 이제는 1만 7천 명이 넘게 되었다
비텔리우스는 근위병만이 아니라 오토 진영에서 싸운 모든 병사에 대한 대책에서도 잘못에 잘못을 거듭했다. 해병으로 구성된 제1군단만은 원래의 근무지인 미세노가 아니라 그들이 가본 적도 없는 에스파냐로 쫓아보냈다. 제14군단이 받은 명령도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동쪽의 도나우강 유역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심정도 서쪽의 에스파냐나 브리타니아를 향해 출발한 병사들의 심정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들의 원한은 더욱 강하고 깊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토 진영에 서서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원형경기장 공사에 끌려나간 것은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시리아총독 무키아누스
새 황제 비텔리우스에게 원한을 품고 근무지로 돌아온 ‘도나우 군단’ 병사들의 감정이 다른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 ‘도나우 군단’의 7개 군단은 다르다넬스해협을 경계로 하여 소아시아 방위를 맡고 있는 시리아의 4개 군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코르불로 휘하의 걸물로 꼽히는 무키아누스(Gaius Licinius Mucianus)가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건재했다. 밀사가 무키아누스의 의사를 타진하는 임무를 띠고 안티오키아로 떠났다. 그런데 무키아누스는 자신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지지를 베스파시아누스 쪽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버지의 직업도 확실치 않고, 군단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출세한 사람이다. 출신지도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단체에 불과한 '리에티'다. 하지만 무키아누스는 당시 상황에서는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밝은 눈으로 직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키아누스 자신도 상당한 교양을 가진 데다 변경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으로 현실 인식 능력도 뛰어났을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 제국을 다시 통합할 기수로는 기존 지배계층에 속하는 자신보다 그 바깥쪽에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
이집트 장관 알렉산드로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오래전에 이집트 제1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큰아버지는 ‘유대의 플라톤’이라는 평판을 듣던 철학자 '필로'였다. 그는 유대인이 장기로 삼는 경제계로 진출하지 않고, 군대를 택했다. 당시 군인의 길을 택한 유대인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서기 46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발탁으로 유대 장관에 임명되어 2년 동안 일했다. 아그리파 1세가 죽었을 때 유대를 다시 로마의 직할령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유대 장관에 임명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가 워낙 통치를 잘해서, 그 시기에는 로마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코르불로가 네로 황제의 명을 받아 자살한 뒤 오리엔트에서는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총독이 되었다. 한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시리아 다음가는 제국 동방의 요지인 이집트 장관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집트 통치 책임자는 ‘장관’(프라이펙투스)이라 부르고, 그 임명권은 원로원이 아니라 황제에게 있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최종 경력은 수도 경찰청장이다. 황제 자리를 확실히 굳힌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를 수도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 이 자리에 앉은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전략은 무키아누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함께 생각하고 추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자칭하다
6월 말께에 베리투스(오늘날의 베이루트)에서 열린 삼자회담은 무키아누스의 주도로 실현되었을 게 분명하다. 셋 다 대낮에 당당하게 자기 휘하의 군단장, 대대장, 상급 백인대장들을 거느리고 회담에 참석했다. 유대의 아그리파 2세를 비롯하여 콤마게네와 나바테아의 왕 등 제국 동방에 있는 동맹국 원수들도 참석했다.
회담 후 이들은 다음과 같이 역할을 나누었다. 무키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로 가서 기다리며, 유대 전쟁은 이듬해인 서기 70년 봄에 재개하고, 총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는다.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티투스의 실질적인 부장(副將)으로서, 유대 전쟁의 총결산이 될 예루살렘 공략에 참전한다. 이후 전개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의 2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 7월 3일, 카이사레아에서는 유대 전쟁에 참가한 3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 그리고 며칠 뒤, 안티오키아에서는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 뒤이어 소아시아의 각 속주에 주둔해 있는 부대들도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비텔리우스와 6만 병사는 7월 18일에야 겨우 수도에 들어왔다. 비텔리우스의 수도 입성은 무지와 동의어인 오만함의 전형이었다. 무장한 차림으로는 로마에 들어갈 수 없는게 전통이었는데, 비텔리우스 휘하 장병들은 마치 승자가 정복한 도시에 입성하듯 무장한 채 대열을 짜고, 군단기와 대대기를 앞세워 이 길을 행진했다.
게다가 그 후에도 6만 병사를 수도에 계속 머물게 한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대로 도심에 ‘방목’되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포룸도, 회당(바실리카)도, 거룩한 신전 안팎도 헝겊만 둘러친 야영지로 바뀌었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불만에 가득 찼으며, 황제 옹립에 크게 기여한 발렌스와 카이키나는 황제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다툼을 벌인다. 비텔리우스는 그의 타고난 버릇인 과식에 점점 탐닉했다. 원로원은 비텔리우스에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무시당하지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당시 수도 로마의 상황이다.
제국의 동방에서는
한편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에서의 문제는 시리아 주둔군 4개 군단,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3개 군단, 이집트에 있는 2개 군단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선 예루살렘 공략전에는 4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도시 하나를 공략할 뿐인데, 유대 땅의 대부분을 제압하는 데 사용한 3개 군단도 충분치 않다고 하여 시리아의 1개 군단을 그쪽으로 돌려서 모두 4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대 땅에서 반란은 서기 66년 중반에 일어났다. 네로 황제의 명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진압에 나선 것이 서기 67년 봄이었다. 하지만 68년 가을에는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유대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예루살렘 공략만 남겨두었는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유대를 제압한 로마군은 휴전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베스파시아누스 대신 티투스가 총지휘를 맡아 예루살렘 공략을 재개한 것이 70년 봄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쪽은 느긋하게 공격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 유대 전쟁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시험대이기도 했다.
유대인 출신이라서 유대인을 잘 이해하는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를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시킨 것도, 잘되면 대화로 안 되면 무력으로, 강경책과 유화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4개 군단의 시리아 주둔군에서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한 1개 군단을 뺀 나머지 3개 군단도 그들의 사령관 무키아누스가 모두 서쪽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르메니아나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의 경계인 유프라테스 방위선을 텅 비워놓은 채 서쪽으로 가는 것은 무키아누스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무키아누스가 서쪽으로 데려간 군사력은 보조병을 포함해도 2만 명을 웃돌지 않았다. 이 정도 군사력으로 서방행을 결행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겠다고 밝힌 ‘도나우 군단’의 7개 군단을 믿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서기 69년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까지, 비텔리우스 진영과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이 아직 직접 접촉하지 않은 시기에, 양쪽 다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라인강 방위선과 도나우강 방위선에서 일어났다. 라인 쪽 당사자는 로마 군단에 딸린 보조부대의 속주병이었고, 도나우 쪽 당사자는 ‘도나우 군단’의 군단병이었다.
'도나우 군단'
‘도나우 군단’ 장병들은 불과 다섯 달 전에는 오토 편에 서서 싸웠지만,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탓으로 참패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승자가 된 비텔리우스는 참전한 병사든 참전하지 않은 병사든 가리지 않고 ‘도나우 군단’ 전체를 패배자로 다루었다.
‘도나우 군단’ 장병들은 더 이상 얌전히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무키아누스가 2만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지만, 그가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복수심에만 사로잡혀 무작정 서쪽으로 달려갔다.
‘도나우 군단’은 도나우강 하류의 방위를 맡고 있는 모에시아의 3개 군단, 도나우강 상류를 맡고 있는 판노니아 속주의 2개 군단, 판노니아 바로 남쪽에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본국 이탈리아와 마주 보고 있는 달마티아 속주의 2개 군단, 합쳐서 7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총독 가운데 두 사람은 몰래 이탈리아로 달아나버렸다.
69년 가을, 주도권을 쥔 군단장들 중에서 특히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와 '아리우스 바루스'가 두드러진 행동을 하게 되는데, 둘 다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병사들이 혈기왕성한 장교들에게 이끌려, 자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키아누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행동을 일으킨 것이다.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이른바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가 크레모나에서 베드리아쿰까지 뻗어 있는 지름 30킬로미터의 평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번에도 포강을 사수하는 것이 목표다. 황제이자 통수권자인 비텔리우스는 북쪽으로 떠나는 군대를 이끌지 않고, 수도 로마에 남고, 카이키나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적이 동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도나우 군단’이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속주에서 본국 이탈리아로 들어온 뒤 맨 처음 만나는 주요 도시는 아퀼레이아다. 이곳 아퀼레이아에서 포강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퀼레이아에서 안니아 가도를 따라 파타비움(오늘날의 파도바)까지 가서, 포필리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파도바에서 평원을 가로질러 곧장 남하하는 방법이다. 포강을 건넌 뒤에도 아이밀리아 가도를 향해 계속 남하한다.
비텔리우스 진영의 총지휘를 맡은 카이키나는 적이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거나 양쪽으로 나뉘어 포강을 건널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북상하는 병력과 헤어져 라벤나로 갔다. 라벤나에 주둔해 있는 함대의 동향이 적군을 저지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키나의 짐작은 빗나갔다는 게 일찌감치 분명해졌다. 이탈리아에 들어온 ‘도나우 군단’은 이 두 길을 택하지 않고, 아퀼레이아에서 포스투미아 가도를 따라 서쪽의 베로나로 향했다. 포스투미아 가도는 베로나를 지나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무의식중에 일찍이 굴욕감으로 눈물을 삼킨 곳을 설욕전의 장소로 택하는 법이다. 그들에게는 그 장소가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였다.
라벤나에 도착한 카이키나는 예측이 빗나간 데 절망했는지, 중대한 방향 전환을 단행했다. 그것은 비텔리우스 쪽에서 보면 배신이지만, 카이키나로서는 비텔리우스를 버리는 행위였다. 병사들 앞에서 카이키나가 행한 연설은 출전이 아니라 ‘배반’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인대장과 일반 병사들은 단호히 반대했다. 그들이 비텔리우스를 존경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도나우 군단’ 병사들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배반에 반대한 병사들은 카이키나를 붙잡아서 쇠사슬로 묶고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비텔리우스 진영은 총지휘를 맡을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카이키나의 배신을 안 발렌스는 병석에서 일어나 배를 타고 남프랑스로 가서 군대를 재편한 뒤 서쪽에서 ‘도나우 군단’을 공격하려 했지만, 남프랑스에 상륙하자마자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갈리아인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서기 69년 10월 24일에 벌어진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는 제1차 전투와 마찬가지로 혼전 상태로 시작되어 끝났다. 참전한 병사들은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비텔리우스파와 오토파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공격하는 쪽이 이겼다. 다만 승자는 지난번의 굴욕을 앙갚음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반년 전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건설 현장에서 혹사당한 것과 그때 크레모나 주민에게 모욕당한 것도 잊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 탄생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크레모나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반항한 사람도 반항하지 않은 사람도 무차별로 살해되었다.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파 군대가 패배하고 크레모나에서 참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당장 수도 로마에 전해졌다. 비텔리우스는 오토처럼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하해올 게 뻔한 ‘도나우 군단’을 맞아 싸울 준비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타키투스의 붓은 이 무렵의 비텔리우스 황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원의 나무 그늘에 숨어서 납작 엎드린 채 음식을 받을 때에만 얼굴을 들 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일절 신경쓰지 않는 짐승.”
공격에 나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도 비텔리우스파 패잔병들이 필사적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폐허가 된 크레모나를 떠나 포강을 건넌 다음,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리미니까지 가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수도 로마 근교에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50일이나 걸렸다.
‘도나우 군단’이 이탈리아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텔리우스 황제가 원군 파견을 명령했는데도 침묵만 지켰던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의 5개 군단이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를 안 뒤에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텔리우스 살해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도나우 군단’의 수도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간 비텔리우스파는 몇 차례에 걸쳐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 저항도 12월 15일에 병사들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54세의 황제는 상복 차림으로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나와 포로 로마노로 갔다. 로마의 서민들이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서 그를 에워싼 시민들에게 국가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퇴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튿날인 17일, 비텔리우스가 밝힌 퇴위의 뜻을 받아들여 원로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지위를 비텔리우스에서 베스파시아누스한테로 평화롭게 이양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 수도 경찰청장이며 베스파시아누스의 친형인 사비누스를 찾아갔으나 그는 비텔리우스 과격파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로마에 있는 조카, 즉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 도미티아누스를 데리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피신했다.
19일, 아직 동도 트기 전에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오르막길을 비추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횃불들이 신전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을 태우는 데 사용되었다. 내던진 횃불이 석조 신전에도 곳곳에 쓰인 목재에 옮겨붙은 것이다. 모여든 로마인들 앞에서 해가 높이 떠오른 뒤에도 오랫동안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로마인의 수호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 외국인도 아닌 로마인의 손으로 불타버린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신전을 보고, 횃불을 던진 비텔리우스파 병사들도 망연자실하여 명하니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그 틈에 도미티아누스는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비누스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날 밤 자정, '도나우 군단' 선발대가 로마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병사들은 비텔리우스가 팔짱을 낀 채 지켜보는 앞에서 사비누스를 죽이고, 그 시신을 테베레강에 던져버렸다.
12월 20일,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이후 무려 150년 만에 또다시 로마 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도나우 군단’에 의해 손을 뒤로 결박당한 비텔리우스는 돼지처럼 병사들에게 내몰려 팔라티노 언덕 바로 밑에 있는 포로 로마노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이없이 살해되었다. 황제의 주검은 처형당한 중죄인처럼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여덟 달 동안 황제 노릇을 한 뒤 54세로 죽음을 맞은 것이다.
무키아누스의 활약
그리고 며칠 뒤,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비텔리우스가 반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군대와 함께 입성하여 승리를 과시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내전으로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재건자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냉철하고 노련한 통치자는 당장에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에 원로원을 소집하여, 이듬해인 서기 70년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당선시켰다. 비텔리우스 타도의 실질적 공로자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는 원로원을 움직여 무공훈장을 수여하긴 했지만, 그밖의 보상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평화와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서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서기 70년 가을까지 사실상의 황제 역할을 한다. 무키아누스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은 불타버린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화의 첫 번째 조건인 질서 회복은 신전 복구 같은 평화적인 사업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아직 공적인 신분은 시리아 속주 총독에 불과한 무키아누스가 무엇보다 먼저 직면해야 했던 과제는 라인강 주변에서 일어난 속주병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속주병 반란
로마인들은 오늘날 네덜란드인의 선조를 바타비족(族)이라고 불렀다. 라인강 어귀 근처에 살던 이 게르만계 부족은 로마의 속주민은 아니지만 동맹관계는 맺고 있었다. 즉 바타비족이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는 바타비족의 독립을 존중해주고, 다른 부족이 쳐들어오면 도와준다는 협약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그들은 로마인의 지휘를 받아,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을 보조하는 ‘보조병’으로서 보조부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로마인이 병력을 제공받는 것은 단순히 병력 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용을 보장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서기 69년 당시 8천 명으로 구성된 바타비족 부대를 통솔하던 지휘관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Gaius Julius Civilis)였다. 물론 로마 시민권 소유자다. 그리고 이 ‘율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로마인끼리 싸우는 틈을 노려 라인강 하류 일대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율리우스 키빌리스
바타비족의 지도자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네로 황제 시대인 62년에 브리타니아 제패를 추진하던 파울리누스 휘하에서 바타비족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을 때였다. 당시 적어도 마흔 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기 69년에는 40대 후반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4월 15일에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승리한 뒤 보조병들은 주둔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이끄는 바타비족 부대의 반란은 귀환 명령을 받은 보조병들과 함께 라인강 연안에 도착한 여름에 일어났다.
어쨌거나 1년 동안 황제가 네 명이나 연달아 나타났다 사라진 이 혼란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속셈은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지만, 일단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이 지키는 라인강 연안의 기지를 공격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기치로 내걸었다.
또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연회를 위장하여 초대한 바타비족 유력자들 앞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게르만족의 혼을 역설하고, 지금이야말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강조했다. 정예 병력이 이탈리아에 가 있는 지금, 기지를 지키는 군단병은 노약자들뿐이다. 그런데 기지에는 빼앗을 만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다.
아울러 키빌리스는 라인강 서쪽의 칸니네파티족과 강 어귀 북쪽의 프리시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고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 참전한 뒤 마인츠로 돌아가 있던 보조부대에도 밀사를 보냈다. 이 정도까지 우군을 확보한 단계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라인강 어귀의 최전방 요새를 지키던 수비대를 습격했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키빌리스는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동쪽으로 내민 손은 브룩테리족과 텡테리족을 포섭한다. 두 부족은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지 않은 게르만 야만족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내민 손은 네르비족과 퉁그리족을 향했다. 이들 두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한 뒤 로마의 속주민이 된 게르만계 갈리아인이다. 이들 두 부족에도 보조병으로 로마군에서 복무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기세가 오른 키빌리스는 라인강을 지키는 함대까지 수중에 넣었다. 선원이나 노잡이는 속주민이니까 로마 시민인 함장만 죽이면 일은 간단했다. 라인강 함대를 손에 넣은 것은 전술적으로도 유리했다. 로마의 군단기지는 모두 라인강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함대를 손에 넣으면 육지와 강에서 군단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공격당하는 로마군
라인강 양쪽의 게르만 부족들을 거느릴 만큼 증강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반란군은 비로소 로마 군단기지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카스트라 베테라(베테라 군단 숙영지)라고 불린 저지 게르마니아의 베테라(오늘날의 크산텐) 기지를 공격한 것이다. 이 기지는 제5 종달새군단과 제15 무적군단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저지 게르마니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은 며칠 뒤에는 고지 게르마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지인 마인츠에 도착했다. 마인츠에 주둔해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플라쿠스는 구원군을 구성했고, 실제 지휘는 젊은 티베리우스 보쿨라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보쿨라는 제22 무적군단의 군단장이다.
보쿨라가 크산텐에 접근했을 때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가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인 군단'의 사기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병사들은 장교들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고 보쿨라는 이를 피해 달아나기까지 했다. 바로 그때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라인강 동쪽 게르만족을 부추겨 마인츠를 공격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로마 군단을 유명하게 만든 엄격한 규율이 되돌아왔다. 보쿨라도 다시 진두지휘를 맡았다. 그는 마인츠를 구원하기 위해 제1군단·제4군단·제22군단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 마인츠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라인강 방위선은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군이 마인츠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사이에 게르만계 갈리아인에 대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설득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군사적인 성과를 먼저 보여준 다음에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키빌리스의 방식이 옳았다는 게 입증되었다. 그러자 갈리아에서는 유력한 부족인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이 공동투쟁을 제의해왔다.
'갈리아 제국'
트레베리족은 모셀라(오늘날의 모젤)강 주변에 사는 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지 100년이 지났다.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링고네스족의 거주지는 트레베리족의 거주지 남쪽에 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피워 올린 반란의 불길이 어느새 갈리아의 한복판까지 바싹 다가온 것이다.
회합 장소로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라인강 연안에 사는 속주민의 도시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회합에는 우비족 대표도 참석했다. 이 쾰른 회담에서 처음으로 ‘갈리아 제국’(임페리움 갈리쿰) 창설이 결정되었다.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과 서쪽의 게르만계 갈리아인, 그리고 거기서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갈리아 전역의 주민을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로마 세력을 알프스 남쪽으로 몰아낸다는 웅대한 계획이었다.
12월 19일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화재가 일어나 신전이 불탔다는 소식이었다. 로마인들이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유피테르 신전이 불탄 것을 두고, 게르만족이나 게르만계 갈리아인들은 신들조차 로마 제국을 버린 징조로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일도 이제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했다.
그래도 보쿨라는 마인츠 기지를 방위하는 데 성공한 뒤, 다시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농성전을 벌이고 있는 크산텐 기지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병력을 일단 노이스 기지까지 데려가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동지가 된 트레베리족 지도자 율리우스 클라시쿠스는 군장이 같은 점을 이용하여 보쿨라 휘하의 로마 군단에 자기 부하들을 침투시켰다. 그들은 노이스 기지에서 크산텐을 구원하러 떠나기 전에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보쿨라의 연설을 비웃고 야유를 퍼부어 결국 연설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사태는 연설 중단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 사이를 뚫고 연단까지 돌진한 그들은 보쿨라를 연단에서 끌어내려 보조병이 사용하는 장검을 보쿨라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지휘관을 잃고 혼란에 빠진 군단병들 앞에 율리우스 키빌리스와 율리우스 클라시쿠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치욕
노이스 기지에 있던 로마 군단병들은 키빌리스의 강요에 따라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사건을 두고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로마 역사상, 칸나에나 카라이나 테우토부르크숲에서 전멸당한 것은 노이스에서 일어난 이 불상사에 비하면 오히려 훌륭한 일이었다”고 개탄했다.
노이스 기지에서 일어난 일은 크산텐 기지에서도 되풀이되었다. 크산텐 기지의 군단병들은 절망적인 농성전에 지쳐 있었다. 마인츠 기지를 지키던 군단병들도 동료들의 뒤를 이어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눈사태 현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의 스위스 취리히 근처 빈도니사 기지에 있던 1개 군단뿐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로마군 병사들은 트레베리족의 근거지인 트리어로 끌려갔다. 충성 서약을 거부한 일부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라인강 연안의 로마 군단기지는 모두 반란을 일으킨 속주병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인 라인강 방위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래 처음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반격의 시작
수도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통제력을 장악한 무키아누스는 갈리아 사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반격 작전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5개 군단, 에스파냐의 2개 군단, 브리타니아의 1개 군단, ‘라인 군단’ 중에서 유일하게 무사했던 빈도니사(오늘날의 스위스 빈디쉬)의 1개 군단, 합해서 9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무키아누스는 수도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9개 군단을 지휘할 장수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켈리아리스와 갈루스를 골랐다. 로마의 반격도 로마인답게 단호하고 철저했지만, ‘율리우스’들의 꿈을 쳐부순 것은 사실 또 다른 ‘율리우스’들이었다. 갈리아계 ‘율리우스’가 그들이다.
이 갈리아계(그리스식 명칭은 켈트계) 갈리아인들은 처음에는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제의한 공동투쟁에 동조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이 수립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갈리아계 유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의는 전통적으로 친로마적인 레미족의 본거지에서 열렸다. 여기서 그들은 갈리아 제국에 참가할 것이냐, 아니면 로마 제국 쪽에 남을 것이냐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은 갈리아 제국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갈리아계 ‘율리우스’들이 게르만계 ‘율리우스’들에게 ‘노’(No)라고 대답한 것이다. 참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마군의 보조자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로마인의 불상사는 로마인이 해결하겠다면서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켈트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족에 맞서 행동을 개시했다. 갈리아 제국에 가담한 링고네스족의 남쪽에 사는 세콰니족이 맨 먼저 움직였다. 세콰니족은 율리우스 사비누스가 이끄는 링고네스족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켈리아리스가 거느린 병력은 이탈리아에서 데려간 5개 군단뿐이었다. 하지만 2만 명이라도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로마군은 모젤강변에 있는 트레베리족의 본거지 트리어에 도착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트리어 공략에 성공했다.
승리와 관용
켈리아리스는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트리어로 끌려온 뒤에도 비참한 상태로 살고 있던 로마 군단병들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면서 모두 용서했다. 그리고는 트리어에 있다가 붙잡힌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의 유력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게르만족이 갈리아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말은 언제나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남을 지배하려는 민족치고 이 두 마디를 기치로 내걸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 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가 갈리아에 요구한 것은 속주세뿐이다. 다른 것은 모두 그대들의 자치에 맡겼다. 그뿐만 아니라 동화정책을 창시한 카이사르 시대부터 이미 로마군의 요직에도 많은 갈리아인이 등용되었다. 속주 총독까지도 갈리아 출신에게 맡겼지 않은가(네로 시대의 율리우스 빈덱스를 말한다). 차별도 하지 않고 문호도 닫지 않는다는 게 로마의 방침이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개혁 이후 속주 출신에게도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을 가리킨다).
만약 로마인을 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물론 그런 일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겠지만, 만약 허락한다면 어떤 상태가 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제국 전역은 끊임없는 전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이 평화가 무너진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은 당신네 갈리아인이다. 전쟁을 유발하는 최대 원인은 황금과 부에 대한 욕망인데, 지금은 그것이 당신네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평화를 누리면서 안전하게 번영하고 있는 당신네 도시와 마을을 생각하고, 거기서는 정복자도 피정복자도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것이 사랑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주기 바란다.“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켈리아리스의 이 연설만으로 충분했다. 로마 제국 영토인 라인강 서쪽의 게르만계 갈리아인도 ‘갈리아 제국’을 떠나 로마 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뒤에 남은 것은 게르만족뿐이다. 이래서는 ‘갈리아 제국’을 자칭할 자격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퇴각을 계속하면서도 용감하게 저항했다.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율리우스 투토르는 격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아내와 누이는 로마군에게 사로잡혔다. 바싹 추격당한 바타비족 지도자는 로마군 사령관에게 회담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회담은 라인강 어귀의 여울에 떠 있는 섬에서 이루어졌다.
회담 후 바타비족은 몰살당하지도 않았고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로마에 반기를 들기 전과 똑같이 로마의 동맹부족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속주세를 내는 대신 로마군에서 보조병으로 복무하는 것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처형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그의 소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이리하여 ‘갈리아 제국’은 반년도 지나기 전에 무너졌다. 하지만 이 ‘갈리아 제국’ 문제에 대한 로마인의 대처 방식은 ‘관용’이었다. 그 후 200년 동안 속주병이 군단병을 공격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기 70년 당시의 관용정책이 효과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대 문제
서기 66년 여름에 일어나 73년 봄에 끝나는 ‘유대 전쟁’은 로마 제국 내 속주민이 패권자 로마에 저항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바타비족 반란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란은 불가피했고, 유대인과 로마인의 사고방식, 즉 문명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것은 숙명적인 대결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인은 칼리굴라 황제 말기를 빼고는 로마가 유대를 직접 지배하게 된 서기 6년부터 60년 동안 유대인에 대해 위와 같은 방침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신권정치를 수립하는 것만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통치는 ‘자유’에 대한 유대교도의 소망이 활활 타오르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후 60년 뒤에 폭발한 유대인 반란은 펠릭스·페스투스·알비누스·플로루스로 이어지는 역대 유대 장관들의 악정에 원인이 있다고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말했다.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플로루스 시대까지는 유대인의 인내가 계속되었다. 플로루스가 장관이었던 시기에 반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시카리오이’(살인자)라고 불린 테러 집단은 유대 전역에서 암약했다. 또한 대신전 복구공사가 끝난 2년 전부터는 예루살렘에 많은 실업자가 생겨나 있었다. 신권정치 수립이라는 대의명분, 실업으로 인한 생활 불안, 중근동이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는 무더위, 이런 것들이 겹치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반란
불씨가 활활 타오른 것은 플로루스 장관이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한 것이 발단이었다. 예루살렘 신전은 유대교도가 의무적으로 1년에 2드라크마씩 봉납금을 바치는 곳이지, 세금을 체납했다고 해서 멋대로 돈을 꺼낼 수 있는 은행계좌도 아니다.
게다가 플로루스는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에 대해 강경 진압을 단행했다. 유대인의 분노가 고조되는 것도 당연했다. 유대인도 분노를 억제할 줄 몰랐다. 17탈렌트 때문에 일어난 폭동은 예루살렘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서기 66년 6월의 일이다.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는 제12군단과 아그리파 2세 등의 우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유대 쪽의 반격은 격렬했다. 또한 케스티우스의 지휘도 적극성이 부족했다. 결국 예루살렘 최대의 요새라 해도 좋은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 데 실패한다. 게다가 군대를 철수하다가 습격을 당해 참패를 당하고 만다.
네로는 유대 문제가 시리아 총독의 임무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대 문제만 담당하는 책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반란 진압을 위한 군사행동은 이듬해인 서기 67년 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끌고 갈 병력은 3개 군단으로 결정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유대인 요세푸스
여기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틴어: Flavius Josephus)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대 전쟁기』 등 유대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쓴 사람이다. 서기 37년에 태어났다니까, 네로 황제와 동갑이다. 아버지는 제사장 계급, 어머니는 유대 왕가와 혈연관계에 있는 상류층 출신이다.
그는 유대교를 샅샅이 체험하려는 듯 각 종파를 돌아다니며 청년기를 보낸다. 사두카이파와 에세네파에도 접근했고, 사막에서 집단 거주하는 종교단체의 생활도 체험했고, 파리사이파에도 접근했던 모양이다.
서기 64년, 펠릭스 장관 시절에 반로마 폭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로마에 끌려간 유대인들을 석방해달라고 네로 황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27세가 된 요세푸스는 그 사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어쨌든 황후를 통한 탄원은 성공하여, 로마에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대 전쟁
서기 67년 5월, 요세푸스가 동포를 지휘하며 대기하고 있는 유대 북부의 갈릴라이아를 향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만으로 구성되었던 케스티우스 때와는 달랐다.
주전력인 제5군단·제10군단·제15군단은 모두 명장 코르불로의 담금질로 정예화한 군단이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는 유대 북동부를 다스리는 아그리파 2세의 유대인 병사들을 비롯하여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참가했다. 그들의 왕이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6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의 진격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성격을 반영하여 착실하고 견실하게 진행되었다.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예루살렘에 접근하는 것이 로마의 작전이었지만, 물론 전략적 요충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요세푸스가 이끄는 유대군은 그런 로마군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요세푸스와 유대인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궁지에 몰렸다. 요타파타는 7월 20일에 함락되었다. 사망자가 4만 명, 포로가 1,200명이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도 40인의 장로와 동굴에 피신하고 있다가 이들이 모두 자결한 후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을 설득해 같이 투항했다.
로마군에 잡힌 요세푸스는 생애 최대의 도박을 한다. 이 유대인 포로는 로마군 사령관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만 요세푸스와 만나는 자리에 아들 티투스와 친구 두 명을 동석시켰다. 안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언
요세푸스는 말했다. “당신은 요세푸스라는 이름의 유대인을 붙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신이 어떤 일을 전하기 위해 저를 당신께 보낸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네로의 뒤를 이을 사람은 당신과 당신의 자손이고, 이 예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당신 곁에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어쨌든 요세푸스의 계책은 성공했다. 네로에게 압송될 염려도 없어졌고, 티투스는 자기와 동년배인 이 유대인을 이제 공공연히 친구로 대하게 되었다. 이후 갈바와 오토가 황제가 되었기에 요세푸스의 예언은 두 번이나 빗나갔다. 그런데도 요세푸스의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서기 69년 7월, 로마 황제가 오토에서 비텔리우스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방 군단은 비텔리우스의 즉위를 납득하지 않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제야 비로소 2년 전에 이루어진 요세푸스의 예언을 믿었다. 요세푸스는 석방되어 전처럼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서기 70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그 이듬해에 티투스가 로마에 개선했을 때도 요세푸스를 동반했다. 황제 즉위 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에게 자신의 씨족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주어 그 후 요세푸스의 이름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되었다. 그 후 죽을 때까지 반평생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저작 활동을 하면서 보낸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라고 증오를 받았지만, 요세푸스의 저술은 라틴어와 함께 당시의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유대 반란의 인과관계와 그 경과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린 공적이 있었다. 정통 유대교도도 이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경과
서기 67년 5월부터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나선 로마군은 요세푸스가 지키던 갈릴라이아를 제압한 뒤에는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겼다. 서기 68년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과 북쪽에서 포위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네로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갑자기 유대 전쟁은 중단되었다.
로마의 회답을 기다리던 베스파시아누스는 1년 반이나 되는 휴전 기간을 유대 쪽에 준 셈이다. 유대 쪽에서는 물론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시설 보강과 식량 비축 같은 현실적인 방어대책에 전념했다.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온건파에 속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서기 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예루살렘 공략전을 재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하게 된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신하여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제5군단·제10군단·제15군단에 새로 제12군단을 추가한 4개 군단이다. 제12군단은 케스티우스 때 유대에게 패한 군단이다.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부대에도 유대인 병사들이 끼어 있었지만, 이 로마군을 지휘하는 티투스의 측근에도 유대인이 적지 않았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명장 코르불로 밑에서 경력을 쌓은 노장이다. 거기에다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 그리고 이제 티투스와 친구 사이가 된 요세푸스.
이래서는 로마군 참모본부가 로마인과 유대인을 불문하고 예루살렘이 평화적으로 성문을 열기를 강력하게 바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예루살렘 시내에서는 급진파의 영향력이 계속 강해져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목소리뿐이었다. 서기 70년 봄, 티투스가 지휘하는 4개 군단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진을 쳤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 있는 천연 요새다. 이곳을 공략하려면 깊은 골짜기라는 장애물이 없는 북쪽에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다. 요소요소에는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다. 종교의 터전인 대신전조차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다.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은 5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8월 10일, 대신전에 불이 붙었다. 9월 8일, 시내에서의 저항도 겨우 수그러들었다. 9월 20일, 저항은 모두 끝났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포로의 수는 9만 7천 명,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 중에는 돌림병으로 죽은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겨두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대부분은 노예가 되어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분배되었고, 병사들은 그들을 노예상인에게 팔아치웠을 게 분명하다.
예루살렘 대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한 사건은, 로마가 앞으로는 유대교도에게 유대교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성인 남자가 어디에 살든 해마다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바치는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후 봉납금은 예루살렘 신전이 아니라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바쳐졌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한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 제사장 70명으로 구성되어 예루살렘의 자치기관 구실을 했던 ‘70인회’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거기에 딸린 보조병을 합쳐 병력 1만 명이 상주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세 군데 요새가 아직 유대인 수중에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에 있는 마카이로스, 그리고 사해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마사다. 이들 요새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달아난 급진파가 틀어박혀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헤로디온과 마카이로스 요새는 곧 함락되었지만, 마사다 요새를 공략하는 데에는 3년이 걸렸다. 아녀자를 포함하여 수백 명에 불과한 농성군을 공격하는데 3년이나 걸린 것은 공격하는 쪽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 전쟁’은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기 70년의 ‘유대 전쟁’은 반항하지 않는 유대인은 존속할 수 있지만, 반항하는 유대인을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이 아니면 노예 신세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유대에서 반로마 운동의 불길은 꺼져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