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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26. 2024

로마인 이야기 8권 (2)

플라비우스 왕조, 폼페이 화산 폭발, 콜로세움, 네르바 황제

서기 69년부터 96년까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티투스 황제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한 27년간을 플라비우스 왕조(Domus Flavia)라고 한다. 이 편은 주로 성문법으로 황제권을 확립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부터 국가 재난을 처리하다 짧은 2년의 재위를 마친 티투스 황제 그리고 30세에 갑자기 황제에 올라 원로원과 대립하며 공포정치를 펴다 암살 당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오현제 중 최초의 네르바 황제까지 다루고 있다.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69년 12월 21일~79년 6월 24일)


로마로 가는 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 이탈리아의 동쪽 현관이라 해도 좋은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서기 70년 8월이었다. 5년 동안이나 얼굴을 못 본 둘째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19세의 늠름한 청년이 되어 마중을 나와 있었다.


60세의 베스파시아누스는 70년 1월 1일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이미 ‘제일인자’로 승인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공식적으로 열 달이나 미룬 것은, 실제로는 아들 티투스를 보낸 예루살렘이 함락될 전망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이다. 로마군 통수권자인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개선장군이 되어 본국에 귀환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대기’ 장소로 이집트를 선택한 데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밀을 장악함으로써 비텔리우스파가 버티고 있는 본국 이탈리아에 ‘군량 보급을 차단’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주식을 수입에 의존하게 된 뒤, 본국 이탈리아에서 필요한 주식의 3분의 1은 이집트에서 수입하는 밀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를 손에 넣는 것은 강력한 무기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행운은 무키아누스라는 둘도 없는 협력자를 얻은 데 있었다. 베스피아누스가 귀국하기 전 열 달 동안 무키아누스가 시행한 모든 정책이 황제로서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짐을 덜어주었고, 베스파시아누스가 귀국하자 이 둘도 없는 협력자는 이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는 듯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배턴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


베스파시아누스의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가 되었다. 이제 로마 제정은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시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어받았다. 그 후로는 누가 황제가 되든,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이름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붙는 것이 관례가 된다. 황제 부적격자는 배제되어도 황제 통치체제는 계속된다는 로마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서 맨 처음 한 말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단에서 잔뼈가 굵은 이 황제가 내건 목표는 “평화와 질서”였다. 질서가 흐트러지면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려워지니까 ‘팍스 로마나’를 다시 기치로 내세웠을 뿐이지만, 내전의 국난을 1년 반이나 경험한 뒤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동의를 얻기도 더욱 쉬웠을 것이다.


그는 우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게 했다. 머리 두 개로 표현되는 야누스 신을 모신 신전 문이 열려 있으면 로마가 전쟁 상태에 있다는 표시이고, 문이 닫히면 평화가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로마의 야누스의 문 출처 구글 이미지]

인간 베스피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화 포룸’(포룸 파케스, 아래 그림 맨 아래 왼쪽)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고, 당장 공사를 시작했다. 공화국 시대에는 포로 로마노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로마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포로 로마노 북쪽에 ‘카이사르 포룸’을 건설하여, 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능을 모아놓은 장소를 확대한 것이다.

[황제들의 포룸 출처 본문]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 포룸’도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의 포룸과 같은 목적으로 지어졌다. 최고 지도자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공공생활의 터전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에서는 공공 건축물에 그것을 지은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이라고 불러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평화 포룸’이라고 불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건장한 체격에 찐빵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서민적인 풍모였다. 그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궁전을 짓지도 않았고, 네로 황제의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유대 전쟁 때 아내가 죽어서 지금은 독신이었지만, 황후를 맞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애인은 있었지만, 로마의 상류층 여자가 아니라 노예 출신인 소싯적 친구였다.


일상생활도 전과 다름없이 검소했다. 황제가 된 뒤에도 여전히 군인이라는 게 그의 자랑이었다. 황제와 접견할 사람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미리 검사받는 것이 보통이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제도마저 폐지했다. 행동거지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교양의 대명사였던 그리스어는 이해한 모양이지만 듣는 사람을 감탄시키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다만 이 시골뜨기 황제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 황제 앞에서 공화정 복귀를 열심히 주장하자, 한동안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지껄일 작정인 모양인데, 하지만 나는 깽깽 짖는다고 해서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그 후 이 철학자들은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병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병으로 쓰러지자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게도 내가 신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죽은 황제의 신격화는 이제 관례가 되어 있었다. 로마인에게 신은 이 정도 존재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황제법’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결코 단순한 호인이 아니었다. 친정을 시작한 서기 70년 가을부터, 아니 황제를 자칭한 69년 여름부터 이미 두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생각과 황제권을 법제화하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밝혔다. 제위계승자를 명시해두면 제위를 둘러싼 다툼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고, 법제화를 통해 황제권을 명쾌히 해두면 원로원과의 불화의 원인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건전한 상식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각이었다.


둘도 없는 협력자인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이 생각을 정확하게, 게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재빠르게 실현한다. 비텔리우스 황제가 살해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서기 69년 12월 말 수도에 들어온 무키아누스는 당장 원로원을 소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에게는 원로원 소집권이 없었기 때문에, 소집권이 있는 법무관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를 통해 원로원을 소집한 뒤, 의원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의결해달라고 요구했다.


제위 세습과 관련하여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제위계승자 문제는 내 아들들을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갈 것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정국 안정으로 이어지는 제위 세습에 찬성표를 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음은 황제권을 명문화하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로마의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남아 있는 비문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Lex de imperio Vespasiani)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Lex de imperio Vesp asiani’ 출처 구글 이미지]
(1)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그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나라와도, 어느 군주와도 동맹이나 우호조약을 맺을 권리를 가진다.
(2)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을 소집할 권리, 원로원에 법안을 제출할 권리, 법안을 원로원으로 퇴돌려보낼 권 리를 가진다.
(3) 황제가 소집한 임시 원로원 회의에서 가결된 법안도 통상적으로 가결된 법안과 동 능한 효력을 가진다.
(4) 본국 이탈리아의 행정을 맡는 법무관:재무관:집정관 등의 공직이나, 속주 통치를 담 당하는 황제 속주 총독:원로원 속주 총독.이집트 장관이나, 세무를 담당하는 황제 재무관 등의 공직을 선출할 때 황제의 추천을 받은 자는 그에 상응한 배려를 받는다.
(5) 수도 로마의 거주구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경우,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그 권리를 가진다.
(6)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국가의 존엄성과 이익 에 맞다고 판단될 경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어떤 것도 제안하고 실행할 권리를 갖는 다.
(7)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회의나 민회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이 ‘황제법’의 진짜 목적은 맨 마지막에 그 권한들을 총괄하듯 덧붙어 있는 ‘상티오’(Sanctio)였다. 의역하면 ‘면책특권’이다. 그리고 이 조항의 복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제6항, 즉 국익에 맞다고 판단될 경우 황제에게는 어떤 일도 허용된다는 조항은 이 ‘면책특권’과 연동하여 더욱 강력해진다.


(1) 황제가 민회나 원로원의 의결에 반하는 일을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2) 황제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3) 민회나 원로원의 의결에 반하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황제를 고발하거나 탄핵 재판에 회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인정되지 않는다


무키아누스는 이렇게 황제의 권한을 명확히 밝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을 황제 제출 법안, 말하자면 황제 입법으로 의결하지 말고, 원로원 입법이라 해도 좋은 ‘원로원 권고’ 형식으로 의결해줄 것을 요구한다. 요컨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제화하는 형식을 취해달라는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황제법’에서 볼 수 있듯이 제정의 전제화(專制化)를 크게 진척시켰지만, 흥미롭게도 9년에 걸친 그의 치세는 온당한 통치로 일관했다. 원로원의 불신임권을 박탈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선정이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특기할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로원 대책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제적 색채가 짙은 ‘황제법’이 성립되기를 바란 사람치고는 원로원에 대한 태도가 온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갖고 있던 균형감각 때문일 것이다. 매달 1일과 15일에 열리는 통상적인 원로원 회의에는 중요한 의제가 없어도 반드시 참석했다. 9년 동안 거의 해마다 집정관직을 겸임했기 때문에 의장석에 앉을 필요도 있었지만.


그가 의원들의 호감을 산 또 다른 이유는 원로원 의원을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는 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의원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신직에다 봉급도 없는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적어도 10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 자신도 전에 원로원 의원이 되기 위해 형 사비누스를 보증인으로 돈을 빌린 경험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고안하여 활용한 위원회 방식을 되살렸다. 문제를 서둘러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경우, 또는 전문 지식이나 능력이 필요한 경우, 600명이 정원인 원로원에서 토의를 거듭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원로원 의원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해결을 맡기는 방식이다. 물론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해낸 방식이다.


인재 등용


황제에 즉위한 직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고 밝힌 베스파시아누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에 속주 출신을 12명 등용한 것이다.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은 갈리아 중부와 북부의 갈리아인에게 원로원 문호를 개방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같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 가운데 다섯 명에게 귀족 칭호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이 다섯 명 가운데 황제에 즉위한 직후,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는 인물은 다음 세 명이다. M. 울피우스 트라야누스(트라야누스 황제의 아버지), C.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브리타니아 원정, 타키투스의 장인), L.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수도청 장관, 고대 로마 수도에 관한 해설서를 남김). 이들 세 사람을 포함한 12명의 출신지는 에스파냐·갈리아·그리스·소아시아·시리아·북아프리카 등 제국 전역의 속주에 걸쳐 있다.

[프론티누스의 로마 수도 해설서 출처 구글 이미지]

기사계급과 평민에 대한 대책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사회에서 제2계급이라 해도 좋은 ‘기사계급’ 출신이다. 그런데도 이 계급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은 그의 균형감각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앞사람이 세워놓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간 데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풍부한 경제 경험 덕에 실무능력이 뛰어난 ‘기사 계급’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실무 ‘관료’로 활용하였다.


고대 로마처럼 사회 계급을 인정하되 계급 간의 유동성을 인정하면, 외부인의 유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우선 하층계급에 들어가게 하고, 그 후의 신분 상승은 당사자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력을 보여준 사람은 당장 그 실력에 어울리는 계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고대 로마는 '그 시대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기회 균등을 실현한 사회였다.


평민과 관련해서는, 제정으로 바뀐 지 100년이 지난 서기 1세기 후반에는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을 원로원에서 선출하게 되었고, 민회도 그 존재 의미가 퇴색해서 열리지 않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이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민이라 해도 로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들은 각종 경기 대회나 축제에서 거침없이 자기 의사를 표출했으니까, 지배자에게는 공포의 장소이기도 했다. 황제의 책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장소에도 성실하게 얼굴을 내민 아우구스투스는 서민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경기장에서 평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한 사례가 있었다.


유대의 공주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는 아버지 휘하에서 유대 전쟁에 참전할 때부터 유대 공주 베레니케(Berenice)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레니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유대 왕위에 복귀한 아그리파 1세의 딸이다. 유대 전쟁에서 로마 편에 붙은 아그리파 2세의 누나이기도 하다. 티투스보다는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고, 오리엔트 군주들과 두 번 결혼한 경험도 있었다.

[베레니케 출처 구글 이미지]

베레니케도 티투스가 바치는 애정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황제의 아들과 유대 공주의 재회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예방하기 위해 로마를 찾은 아그리파 2세가 누나를 동반한 덕분에 이루어졌다. 티투스는 애인을 황궁에 살게 했다.


베레니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베스파시아누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황제 대신 민중이 했다. 그날 경기장 귀빈석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만이 아니라 유대 공주 베레니케도 앉아 있었을지 모른다. 자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그들을 향해 맹렬한 반대의 외침소리를 질렀다.


결국 티투스는 사랑을 포기했다. 베레니케는 유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9년이 지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죽고 티투스가 제위에 오른 뒤, 베레니케는 다시 한번 로마를 방문한다. 하지만 황제가 된 뒤에도 티투스는 경기장에서 들은 비난의 함성을 잊지 못했다. 유대 여인은 이번에도 다시 오리엔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티투스와 베레니케’ 출처 구글 이미지]

콜로세움


오늘날에도 도시 로마를 삽화 하나로 표현하고 싶으면, 누구나 콜로세움을 택할 것이다. 이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다. 따라서 이 원형경기장의 정식 명칭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Amphitheatrum Flavium)’이다. 번역하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그리스인이 창안한 반원형 극장(theatrum) 두 개를 합쳐 놓아 ‘한 쌍’을 뜻하는 ‘amphi’를 붙인 것이다.


수도 로마에 건설된 이 원형경기장만 ‘콜로세움’이라는 통칭으로 불린 것은 네로의 ‘거대한 입상’(콜로수스) 바로 옆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할 당시, 자신을 본뜬 거상(巨像)을 세우게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거상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얼굴 부분을 네로에서 태양신으로 바꾸었다. 파괴하지 않은 이유는 이 거상이 그 규모 때문에 민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콜로세움 복원도와 외부와 내부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콜로세움은 황제와 서민들이 얼굴을 맞대기에는 딱 알맞은 넓이였다. 5만 명이라 해도, 인구 백만의 도시인 로마에서는 지나치게 넓지도 좁지도 않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콜로세움은 오락장만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에 대한 찬성이나 비판을 받는 곳이기도 했다. 시민들도 그 점을 정확히 이해했다. 인공호수에는 비판적이었던 그들이 콜로세움 건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도 최고의 걸작이다.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아치 양쪽에 원기둥을 세우고, 아치 모양의 공간에는 입상을 세우는 형태가 연속되어 있는데, 1층에 사용된 기둥은 중후한 도리스식, 2층의 기둥은 산뜻한 이오니아식, 3층의 기둥은 섬세한 코린트식으로, 층마다 기둥을 바꾸어 답답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없앴다. 그렇게 규모가 큰데도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나 단조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게다가 출입구를 교묘히 배치하여, 사고라도 일어나면 15분 만에 모든 관객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고 하니, 기능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다. 투기에 사용하는 맹수는 지하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담당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지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관중을 로마의 강렬한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해, 돛을 만들 때 사용하는 범포로 관중석 위를 덮었다고 한다.


재정 재건


베스파시아누스는 국가 재정을 재건한 면에서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어떤 연구자는 그가 최고의 국세청장감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율도 올리지 않고, 함부로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세수(稅收)를 늘릴 수 있을지를 연구하여 그것을 성공시킨 사람이었다.


교육과 의료


현대 국가의 복지제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복지에는 교육과 의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로마인은 이 두 가지를 국가의 책무로 생각지 않았다. 황제들이 다투어 건설한 것은 큰 병원이 아니라 큰 목욕탕이었고, 여름철에도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상수도였다. 로마 제국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은 모두 민간에 위탁하는 방침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작은 정부’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로마 제국 시대의 수도 로마를 복원한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공공시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학교다. 로마인들은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의욕과 자질과 경제적 여력이 있는 자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예라 해도 의욕과 자질이 있으면 주인의 아들과 함께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또한 로마 사회에서는 교육 수준의 높낮이가 경력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의료에 관한 로마인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생사관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국이라는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다친 사람에게는 완벽한 치료가 보장된다. 하지만 수명은 이미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감수한다. 그렇다면 나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리스 의학의 시조인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도 계속 살아 있었다. 병에 걸린 뒤에 치료하기보다는 우리 몸이 원래 갖추고 있는 저항력을 높이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로마 황제들이 대형 병원보다 대형 목욕탕이나 상수도시설을 건설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도 이 사상의 귀결이 아닐까 여겨진다.


로마 시대의 목욕탕을 ‘테르마이’(thermae)라고 부르는데, 입욕과 마사지 설비만이 아니라 운동장과 도서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오락장, 정원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여가 선용을 목적으로 하는 종합 시설이었다. 카이사르는 의사에게 직접세 면제라는 특전을 주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마사지사에게도 같은 특전을 주었다.

[로마 공중 목욕탕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특유의 ‘목욕탕’ 입장료는 남자가 0.5아시스(밀 300그램의 가격에 해당한다), 여자가 1아시스였다. 이런 ‘목욕탕’은 원로원 의원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또한 특별한 축하행사가 있는 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 입장의 혜택을 주었다. 이 로마식 목욕탕은 로마 제국 안이라면 어디에나 있었다.


재원을 찾아서


서기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아들 티투스는 재무관에 취임한다. 황제와 황태자가 함께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는 국세조사(켄수스)를 진두 지휘하게 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의도가 국세조사를 통해 조세 수입을 늘리는 데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해 생각해낸 또 다른 방책은 국유지 임차료 수입을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59년에 카이사르가 성립시킨 ‘농지법’에 따르면 국유지를 임차할 수 있는 면적에는 상한선이 있었고, 국유 경작지를 분할할 때 최소 경작 단위가 200유게룸이었다. 하지만 토지가 ‘농지법’에 적합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지에 ‘자투리땅‘이 산재했다.


그 전까지 200유게룸에 미달하는 토지는 거기에 인접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경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임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류상으로는 임차지가 아니니까 국가에 임차료를 낼 의무가 없다. 이런 상태로 130년이 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일은 이 ‘자투리 농지’도 일일이 측량하여 임차료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조세 수입이 상당히 늘어났다고 한다.


조세 수입을 늘리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열의는 마지막으로 ‘벡티갈 우리나이’(Vectigal urinae)라는 세금을 신설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가십을 좋아하는 로마인들이 가장 많이 도마에 올려놓은 이 세금은 ‘오줌세’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공증변소에 모인 오줌을 수거하여 양털에 포함되어 있는 기름기를 배는 데 사용하는 섬유업자에게 부과되었다. 공짜 오줌을 사용하여 이윤을 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들 티투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의 코앞에 은화 한 줌을 들이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티투스가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말했다. "나지 않느냐.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 오늘날에도 유럽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라는 이름이 공중변소의 통칭으로 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말하면, 로마 황제가 아니라 공중변소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죽음


서기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난생처음 병에 걸린 황제는 고향 온천에 가서 요양도 해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채 황제니까 일어나서 죽어야 한다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다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70세. 황제로서 10년을 지낸 뒤의 죽음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발행된 통화에 새겨진 문장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에 의한 평화 회복’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들에 의한 영속적인 평화 확립’
‘국가에 대한 군대의 충성 회복’
’베스파시아누스, 시민의 자유의 수호자‘
‘황제의 공정한 통치’
‘로마 시민인 것은 더없는 행운’
’로마 시민이여, 영원하라!‘


아들 티투스의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황제법’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국을 다스리는 동안 거의 줄곧 공동 통치자로서 쌓아온 업적이 인정받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로마인들이 종교 문제가 아니라 속주민 반란으로 처리한 유대 전쟁을 해결한 당사자였다는 점도 티투스가 갖고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제6부 티투스 황제
(재위 서기 79년 6월 24일~81년 9월 13일)


서기 79년 6월 24일, 39세에 즉위한 티투스만큼 좋은 황제가 되려고 애쓴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 당시에도 공복(公僕)이라는 표현이 존재했다면, 티투스야말로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철저한 공복이 되려고 애썼을 게 분명하다. 백성이 원치 않으면 평생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의에 넘치는 티투스 황제의 치세는 거듭되는 재난으로 물들게 된다. 그리고 이 재난들이 겨우 끝난 서기 81년 9월 13일, 티투스 황제는 생명의 불꽃이 다 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거둔다. 향년 40세. 겨우 2년 남짓한 그의 치세는 대재난의 사후 처리에 밤낮으로 몰두하다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서기 79년 6월 24일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사망. 티투스가 제위에 오름
두 달 뒤인 8월 24일 ─ 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오늘날의 에르콜라노)을 비롯한 나폴리만 동부 해안 일대의 도시들 매몰
이듬해인 서기 80년 봄 ─ 수도 로마의 도심에서 대화재 발생
그 이듬해인 서기 81년 여름 ─ 수도를 비롯한 본국 이탈리아 전역에 전염병 발생


폼페이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냐 지방 사람들은 지진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폴리 서쪽에 펼쳐진 무역항 포추올리, 고급 피한지인 바이아, 군항 미세노에서 이스키아섬에 걸친 일대는 곳곳에 온천이 솟을 정도니까 화산지대다. 또한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베수비오산과 그 기슭에 있는 폼페이에 이르는데, 네로 시대인 17년 전(서기 62년)에는 강한 지진이 폼페이 일대를 덮쳤다. 서기 79년 당시의 폼페이는 17년 전의 지진 피해를 거의 복구한 상태였다.

하지만 베수비오산이 분화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9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화산으로 간주되었다. 능선은 꼭대기까지 울창한 수목으로 덮여 있어서, 기원전 1세기에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이 검투사에게 호응한 노예들이 도망쳐 들어갈 수 있었을 정도였다.

[베수비오산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그날은 평소의 진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동에 뒤이어 불덩어리 같은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졌다. 하지만 피난민들의 숨통을 끊은 것은 그 후 소리도 없이 덮쳐온 화산재였다. 화산재를 잔뜩 머금은 안개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사람들을 질식시켰다. 불운하게도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아무리 도망쳐도 이 안개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세는 이 안개구름을 서지(surge)라고 부르게 되었다.


게다가 막판에는 화산재가 섞인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이 돌멩이와 화산재 더미는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희생자 수는 2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5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다. 폼페이 인구는 1만 5천 내지 2만 명이었던 모양이다. 바닷가 피한지인 헤르쿨라네움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해변으로 달아났지만, 지진으로 바다도 거칠어져 배가 접안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산재가 섞인 구름은 이들도 감싸버렸다.

[영화 ‘폼페이’에서의 화산 폭발 장면들 출처 구글 이미지]

현장 증인


서기 79년 여름의 베수비오 분화를 기록한 유일한 현장 증인이 바로 소(小)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다. 그의 어머니의 오빠였던 외삼촌은 37권에 달하는 『박물지』(Naturalis Historia)의 저자로 유명한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 대(大)플리니우스)다. 이 방대한 저서는 티투스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서기 23년에 코모에서 태어난 대 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때 56세가 되어 있었다.

[대 플리니우스와 박물지 출처 구글 이미지]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하니까 대플리니우스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려달라는 타키투스의 부탁을 받고 소플리니우스가 보낸 두 통의 답장에 그의 목격담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가 씌어진 시기는 타키투스가 『역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서기 100년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지 20년 뒤에 이루어진 ‘증언’이 되는 셈이다.



진두 지휘


서기 79년 8월 24일에 발생한 대참사가 수도 로마에 전해진 것은 이틀도 지나지 않은 26일께였을 것이다. 티투스는 이재민 대책본부를 현지에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직접 진두 지휘를 맡았다. 티투스가 재해대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실상의 공동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 유적지 출처 구글 이미지]

서기 80년으로 해가 바뀌어도 티투스 황제는 여전히 현지의 대책본부에서 재해대책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80년 4월에 수도 로마에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캄파냐 지방에 있던 티투스는 황급히 로마로 돌아온다. 이렇게 재난이 연달아 일어나니, 40세의 황제는 잠시도 몸을 쉴 틈이 없었다.


로마 화재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시작된 불길이 언덕을 내려와 인접한 마르스 광장의 남쪽 절반을 태운 서기 80년의 화재는 ‘로마의 대화재’로 알려진 네로 시대의 화재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대에는 각종 공공 건축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견고한 석조건물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불이 꺼진 뒤에 방치해두면 붕괴 위험이 늘 따라다닌다. 특히 피해가 큰 건축물은 테베레강에 인접한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 추정도 출처 구글 이미지]

손상이 너무 심해서 복구를 포기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경기장은 평민계급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을 대신할 다른 경기장을 세우는 일은 다음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스타디움 도미티아니)은 오늘날 나보나 광장이라는 아름다운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 외에 화재로 손실된 곳은 아우구스투스의 ‘옥타비아 회랑’(포르티쿠스 옥타비아)과 카이사르가 건설한 ‘사이프타 율리아’였다. 이런 공공 건축물을 복구하기 위해 티투스 황제가 먼저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 그러자 로마의 부유층도 다투어 돈을 기부했다. 공공 건축물 복구비는 모두 이런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로마인들에게는 요즘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존경받는 사람의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착공된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통칭 ‘콜로세움’도 서기 80년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티투스는 베수비오 분화와 수도 로마의 화재 등 잇따른 재난으로 우울해하는 시민들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


또한 티투스 황제는 ‘티투스 목욕탕’(테르마이 티티)이라고 불리게 되는 로마식 공중목욕탕─목욕 시설 외에 체육관·도서관·오락실·정원까지 갖춘 목욕탕─을 네로의 꿈으로 끝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 자리에 세웠다.

죽음


서기 81년에 발생한 전염병을 두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전례없는 전염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가을로 접어들자 전염병은 가을에 자리를 내주듯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티투스가 병으로 쓰러졌다.


잇따른 재난으로 심신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티투스는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요양하러 간 고향 온천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온천에 도착한 지 얼마 되기도 전에 티투스는 세상을 떠난다. 서기 81년 9월 13일이었다. 서기 40년 12월 30일에 태어났으니까, 41세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셈이다. 그의 치세는 2년 3개월에 불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대한 통치도 잊지 않았던 티투스는 그런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79년부터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크로아티아의 풀라에 이르는 가도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완전한 신규 사업이었기 때문에, 이 가도는 ‘비아 플라비아’, 즉 플라비아 가도로 명명되었다.그러면서도 자신의 승전을 기리는 개선문은 공사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에야 겨우 완공되었다.

[플라비아 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속주 출신을 원로원에 맞아들이는 일에도 아버지처럼 적극적이어서 속주민한테도 평판이 좋았지만,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만은 예외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신전을 불태운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로마인과 공생하기로 작정한 유대인들은 티투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유대 전쟁기』를 쓴 요세푸스와 티투스의 우정 역시 12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81년 9월 14일~96년 9월 18일)


‘기록 말살형’


로마 제국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형벌이 있었다. 의역하면 ‘기록말살형’이 될까. 원로원에서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야만 성립되는 황제 탄핵제도다. 확정되면 황제의 조상(彫像)은 모두 파괴되고, 공식 기록도 모두 말살되며, 자손은 대대로 ‘임페라토르’를 사용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된 황제 중에는 네로가 있었고, 칼리굴라도 사실상 이 조치를 받았지만, 짧은 재위기간과 딱히 말살할만한 기록도 별로 없어 공식적으로는 단죄되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도 사후에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받게 되는데, 하지만 그는 그렇게 간단히 황제 부적격자로 단정할 수 없다. 원로원의 감정적인 보복 조치라는 의심이 든다.


인간 도미티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도미티아누스(Imperator Caesar Augustus Domitianus)라는 이름으로 제위에 오른 것은 형 티투스가 죽은 다음 날이었다. 서기 51년에 태어났으니까, 30세의 젊은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새 황제는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도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군사 경험도 전혀 없었다. 또한 툭하면 모두 입을 모아 좋은 황제라고 칭송한 형 티투스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불쾌했을 것이다. 외모도 달랐다. 티투스는 땅딸막한데, 도미티아누스는 키도 훤칠하고 늠름한 체격에 얼굴도 잘생긴 젊은이였다.

로마 황제란


고대 로마인들은 제정이 된 뒤에도 ‘황제’(임페라토르)가 아니라 ‘제일인자’(프린켑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임페라토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군사령관을 부르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이 낱말이 성립된 사정으로 보아도, 제정 시대의 로마인들 중에서 평소에 ‘황제’(임페라토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군단병뿐이었다.


‘임페라토르’가 최고 사령관인 이상, 부하 장병들은 그에게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군대는 군사조직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린켑스’(Princeps)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 가운데 ‘넘버원’이라는 뜻이고, ‘제일인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프린켑스'라는 호칭을 채택한 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다. 이로써 로마 황제는 절대 복종 대상인 ‘임페라토르’인 동시에 절대 복종 대상이 아닌 ‘프린켑스’라는 모순을 내포한 ‘미묘한 허구’가 되어버렸다. 다만 ‘미묘’하기 때문에 이 체제를 운영하는 당사자의 성격이나 자질이 체제 운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도미티아누스가 즉위 후 맨 먼저 한 일은 아내 도미티아(Domitia Longina)에게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존칭을 부여한 일이다. 리비아, 소(小) 아그리피나에 이어 도미티아는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받은 세 번째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미티아가 명장 코르불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가 유부녀인 그녀에게 반하여 끈질기게 설득해서 아내로 삼은 것도 리비아와 비슷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남편과 담판하여 양보받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전혀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전남편인 아일리우스 라미아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아내를 빼앗은 남자에게 평생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공공사업(1)


황제가 된 직후에 도미티아누스는 세 가지 공공사업에 착수했다. 첫째는 중세 이후 나보나 광장으로 탈바꿈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현재 나보나 광장 자리)이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불타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게 된 이상,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서민 전용 체육시설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착공하여 형이 준공한 콜로세움이다. 아직도 맨 위층은 미완성인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네르바 포룸’이다. 이 일대를 포룸으로 개발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지만, 그가 죽은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다음 황제인 네르바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복원도와 나보나 광장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위의 세 가지는 모두 수도 로마의 주민을 위한 사업이다. 황제는 적이 쳐들어온 뒤에 격퇴할 게 아니라, 미리 방위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어 야만족의 침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 일을 단행할 시기가 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방위체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착수하기 전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는 병사들 처우 문제였고, 또 하나는 게르만족 문제였다.


봉급 인상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무려 110년 만에 병사 급료를 인상했다. 남아 있는 사료로는 군단병, 그것도 직책이 없는 일반 병사의 봉급밖에 알 수 없지만, 그 추이를 도표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20년이라는 복무 기간은 그대로였고, 만기 제대한 뒤에 받을 수 있는 퇴직금 3천 데나리우스도 변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도미티아누스가 결정한 봉급 인상에 대해 원로원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황제가 돈으로 병사들의 지지를 사려 한다는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는 병사 1인당 봉급은 인상하되 로마군 병사의 총수를 줄이기로 작정하고 치세 말기에 그것을 실현했다. 요컨대 그는 군대의 정예화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봉급은 인상하되, 그 인상분은 군단 소속 회계감사관에게 맡겨서 적립한 뒤, 만기 제대할 때 퇴직금과 함께 적립금을 내주기로 결정하였고, 병사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이 조치를 납득했다. 이 적립금은 만기가 되기 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해도 그 병사의 근친자에게 지급하기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르마니아 방벽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이 라인강과 도나우강이라면,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상류가 모이는 일대가 방위에서는 가장 취약하다. 강은 상류로 갈수록 산악지대로 들어간다. 게다가 두 강의 발원지 근처에는 낮에도 어둡다는 뜻에서 ‘검은 숲’, 즉 ‘슈바르츠발트’라고 불리는 넓은 숲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위선을 연결하여 두 강의 상류와 슈바르츠발트를 포함한 일대를 제국 영토 안에 넣어버리자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려면 종래의 방위선인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 거주지까지 진격해야 했기 때문에, 그 땅에 사는 게르만족을 평화적으로 굴복시키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투에 호소해서 굴복시키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로마 제국 시대의 변경 방벽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선에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영국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이 방벽을 ‘헤이드리언스 월’(Hadrian’s Wall)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히드리아누스 방벽 출처 구글 이미지]

‘게르마니아 방벽’에는 400미터 내지 7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사방 40미터의 석조 요새가 세워졌다. 그리고 게르만족 기마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V자 모양으로 깊이 판 해자와 몇 미터 높이의 울타리를 설치했다. 그리고 요새를 지은 것은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연기나 봉화로 적의 침입을 알린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 중앙을 가로지르는 로마식 가도를 건설했다. 낮에도 컴컴한 숲속을 로마식 도로가 관통한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고속도로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름돌을 평탄하게 깔아서 포장한 5미터 너비의 길 양쪽에 배수용 도랑까지 갖춘 로마식 가도다.

[슈바르츠발트 도로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시대에 ‘카스트라 레기나’라고 불린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에서 도나우강 방위선과 합류할 때까지가 ‘게르마니아 방벽’이었다. 전체 길이는 542킬로미터. 이로써 라인강과 도나우강이라는 제국 북쪽의 양대 방위선은 서로 연결되었다.

카티족


마인강 일대의 강력한 부족인 카티족은 눈앞에서 시작된 ‘리메스’ 건설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갈리아 지방의 국세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현지에 가 있던 도미티아누스가 군대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제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카티족과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게 되자, 32세의 황제는 피가 끓었을 것이다.


비록 실전 경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도미티아누스가 이끈 로마군은 카티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깨끗한 승리는 아니어서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고, ‘게르마니쿠스’를 자칭하자, 원로원 의원들은 냉소를 보냈고 일반 시민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상류 일대를 ‘리메스’로 둘러싸면,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은 철벽이 된다. 하지만 아직 도나우강이 남아 있었다. 이쪽 방면을 철벽으로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도나우강 북쪽 연안의 야만족들이 단결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내각


도미티아누스는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인자 보좌위원회’(Concilium Princepium)를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개혁은 원로원 몫으로 주어진 20명을 줄이고, 그 대신 기사계급 출신을 등용한 것이다. ‘내각’에서 원로원 몫을 줄이면서까지 기사계급 출신을 집어넣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른바 ‘관저’를 조직화하는 일도 단행했다. 황제에게 집중되는 엄청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비서관 체제를 정비한 것이다. 각 비서관의 담당 분야는 이 체제를 처음 채택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와 같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비서관 전원을 기사계급에서 등용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그것은 사저라기보다 관저였고, 시민들을 초청하여 경기도 벌일 수 있는 본격적인 ‘스타디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 궁전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도 살고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이 이제는 황제의 전용 구역이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궁전(Palace of Domitian)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기원후 82년에 세운 거대한 궁전으로, 팔라티노 황궁의 핵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궁 중 크기가 가장 거대했고, 크게 '도무스 플라비아(Domus Flavia)', '도무스 아우구스타나(Domus Augustana)', 정원(Stadium)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도무스 플라비아는 정무를 돌보고, 손님과 만찬을 여는 대전 역할을 했고,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는 황제와 그 가족들이 거주한 공간이었다. 정원은 비밀 정원과 함께 경기장, 사우나 등이 조성되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가 처음 건축할 때부터 황제가 가족이나 정부,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는 곳으로 활용됐다. 모두 건축가 라비리우스가 설계했고,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뒤에도 여러 황제의 명으로 증축되거나 개조됐다.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정궁으로 기능하였다. 도미티아누스 궁전은 본디 네로 황제가 세운 황금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공공사업(2)


로마 황제가 공공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공공 건설사업은 로마 황제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임무였다. 로마 황제는 마치 건설부장관도 겸했던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도미티아누스의 업적은 아버지와 형을 훨씬 능가했다. 주요한 것들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로마 근교의 티볼리,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 플라미니아 가도의 종점인 리미니, 시칠리아 서부의 항구도시로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와의 연락항인 마르살라 등의 수도공사.
-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관개공사
- 라티나 가도의 전면 보수 공사
- '도미티아나 가도' 건설
- 샤르데냐섬의 도로망 정비
- '아우구스타 가도'의 정비
- 도나우강 하류의 모에시아 속주(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있는 두 개의 군단기지를 연결하는 가도 건설.

역사가 몸젠은 로마 제국의 국경을 군사적 국경과 정치적 국경으로 나눈다. 군사적 국경이란 그 선을 넘어 쳐들어오면 당장 반격체제가 가동한다는 점을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위선이다. 한편 정치적 국경은 그곳을 국경으로 삼을 생각은 늘 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필요성에 쫓기지 않은 탓도 있어서 방위선을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지 않았을 경우, 그것을 정치적 국경이라고 한다.


라인강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한 것은 티베리우스였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여 라인강과 도나우강 상류 지역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다. 도나우강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하는 사업의 마지막 단계도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시작되었다. 다만 그는 시작만 해놓았고, 도나우강 방위선을 군사적 국경으로 완전히 확립한 사람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였다.


‘야간 경기’ 개최


도미티아누스는 이런 ‘큰 사업’만이 아니라 ‘작은 일’의 중요성도 아는 황제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사상 처음으로 ‘야간경기’를 제공한 황제이기도 했다. 등불을 켜려면 돈이 많이 들어 서민들은 해가 지면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시대에 5만 명을 수용하는 콜로세움 전체를 환히 비추는 수많은 등불빛 아래서 야간경기를 관전하는 것만큼 서민들을 호사스러운 기분에 잠기게 해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메스’를 건설하고, 사회간접자본에도 돈을 쏟아붓고, 야만족을 상대로 전쟁도 치르고, 야간경기까지 제공하면 국가 재정이 파탄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전 재정을 계속 유지했으니 흥미롭다. 국세조사를 통해 “세율은 올리지 않되, 받아야 할 곳에서는 정확히 세금을 받는” 세제를 확립한 덕분에 세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브리타니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은 완전히 정복되고 스코틀랜드 제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용한 '아그리콜라'가 총독에 취임한 서기 78년부터 84년까지 7년 동안은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부른 스코틀랜드 깊숙이까지 제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그리콜라의 브리타니아 원정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아그리콜라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서기 84년 겨울, 도미티아누스는 7년 동안이나 브리타니아 제패를 혼자 떠맡고 있던 총독 아그리콜라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타키투스가 『역사』 첫머리에서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끝났는데도 방치되었다”고 씁쓸하게 말한 것은 아그리콜라의 귀국과 함께 로마의 스코틀랜드 제패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칼레도니아를 제패하는 것은 단념했지만, 브리타니아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아그리콜라의 스코틀랜드 원정 출처 유튜브]

다키아 전쟁


도미티아누스가 본국으로 불러들인 아그리콜라를 도나우 전선에 파견하여 다키아 전쟁의 일선 사령관에 임명했다면, 도나우 전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고, 아그리콜라에게 심취해 있던 타키투스도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비난을 상당히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서기 85년 겨울이 가까워지던 어느날, 로마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도나우강 하류의 북쪽 연안에 살고 있는 다키아족이 대거 강을 건너 로마 영토인 남쪽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이 충격으로 바뀐 것은, 다키아족을 격퇴하러 나간 군단이 참패당하고 그 군단을 지휘하던 모에시아 속주 총독 사비누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뒤이어 도착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직접 전선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봄에 시작될 로마군의 반격을 현지에서 총지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전 지휘관으로는 근위대장 푸스쿠스를 데려가기로 했다. 야만족은 게릴라 전술에 능하기 때문에, 6년 동안이나 칼레도니아에서 게릴라를 상대로 싸운 아그리콜라를 등용해야 했다.


그래도 서기 86년에 벌어진 다키아족과의 첫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5개 군단의 주전력과 그와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 외에 근위대의 절반도 참전했다니까, 로마가 동원한 총병력은 6만 명이 넘은 셈이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다키아족을 일단 도나우강 북쪽으로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 데에 만족한 도미티아누스는 두 번째 싸움은 푸스쿠스에게 맡기고 수도 로마로 돌아갔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가 보고를 받은 두 번째 전투 결과는 참패였다. 1개 군단과 근위병은 전멸하고, 총지휘를 맡고 있던 푸스쿠스도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후 설욕전 준비는 1년 동안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이번에 도미티아누스가 임명한 사령관은 율리아누스였다. 모에시아 속주에 주둔하는 군단장을 지낸 경험이 있고, 기사계급 출신인 푸스쿠스와는 달리 원로원 의원에다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서기 88년, 로마군을 이끌고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 땅으로 진격한 율리아누스는 교묘한 움직임으로 적을 유인하여 평원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로마군은 넓은 평원을 무대로 벌어지는 회전에서는 천하무적이었다. 결과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하지만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가지는 못했다. 겨울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고 있는 율리아누스는 도나우강 남쪽으로 철수한 뒤 배다리를 해체하고 이듬해 봄까지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반란


이 무렵 제국 동방에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사내는 생전에 네로에게 우호적이었던 파르티아에 가서, 자기를 앞세워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일으키라고 권했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깰 뜻이 없었다. 가짜 네로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인계되었고 당장 처형되었다.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휘하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한 것은 서기 89년 1월 12일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장 에스파냐에 주둔해 있는 제7군단장 트라야누스에게 병력을 이끌고 마인츠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남아 있는 근위병만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상황은 곧 종료되었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막시무스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본과 코블렌츠의 중간 지점에서 사투르니누스파 병사들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1월 25일에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자결했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경거망동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뒤에 마인츠에 도착한 도미티아누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투르니누스의 야욕에 공모자가 된 군단 장교들 중에서 여러 명이 처형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에스파냐에서 갈리아를 가로질러 도착한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30대 중반에 불과한 트라야누스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발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속주 출신이었는데, 속주 출신이 황제가 되면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살 게 분명하다. 이런 약점을 보완해준 것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서 9년 동안 쌓은 업적이었다.


평화 협정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수도 빈,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는 모두 로마 군단기지에서 유래한 도시들이다. 서기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는 이 지역에 두 개였던 판노니아 속주와 모에시아 속주를 가까운 곳와 먼 곳으로 나누어 네 개로 재편성한다.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출처 구글 이미지]

다키아족의 세력은 유능한 지도자 데케발루스를 얻은 덕분에 더욱 강해진다. 데케발루스는 자기 부족의 거주지인 도나우강 하류만이 아니라 중류 지역에 사는 마르코만니족·콰디족·야지게스족까지 합병하여 도나우강 북쪽 일대에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로마와 다키아의 평화협정은 서기 94년 무렵에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부터 도나우강 중류 지역에서 로마군의 반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 왕의 대리인으로 로마를 방문한 왕자를 우호국 군주처럼 대우했다.


그런데 평화협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당시 포로가 된 로마 병사를 돌려받는 대가로, 포로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지불한다는 조항이다. 로마인은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돈이 아무리 상징적인 액수에 불과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의 몇 년 동안은 자존심을 희생하여 얻은 이 평화가 큰 효력을 발휘했다. 다키아 왕은 협정을 지켰고, 로마군은 도나우강 북쪽까지 진격하여, 오랫동안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었으면서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로마 영토를 침범한 세 부족을 철저히 응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사령관 시절의 임지인 고지 게르마니아에 남아서 전쟁 준비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서기 101년에 시작된 것이 역사상 유명한 ‘다키아 전쟁’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평화협정은 그가 죽은 지 5년도 지나기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셈이다.


교육 개혁


네로 황제와 같은 서기 37년에 태어난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는 이름만 보면 본국 태생의 로마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에스파냐 북부의 사라고사에서도 에브로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칼라오라'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속주민이다.


퀸틸리아누스는 40세가 되기 전에 변론술 학교를 개설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하버드대학의 ‘로스쿨’(법과대학원) 같은 곳이었다. 어쨌든 제자들이 쟁쟁했다. 타키투스와 소(小)플리니우스도 퀸틸리아누스의 ‘로스쿨’ 졸업생이었다. 나중에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도 청년 시절에 여기서 공부했다.


퀸틸리아누스는 매우 청빈해서 빚을 내어 딸을 결혼시켜캬 할 정도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그런 퀸틸리아누스에게 1년에 1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봉급을 지급하였다. 국가에서 봉급을 받은 교육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연봉을 계속 지급하면서 이 고명한 교육자를 다른 일에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라틴어로 ‘엘로퀸티아’(eloquentia)는 웅변이나 변론으로 번역되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기술을 뜻하는 웅변술이나 변론술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엘로퀸티아’는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자기 생각을 적절히 표현하는 수사법(rhetorica)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퀸틸리아누스가 쓴 12권의 『인스티투티오 오라토리아』(Institutio Oratoria)는 말뜻 그대로 번역하면 『변론술 대전(大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을 고려하여 의역하면 『교육론 대전』이라고 해도 좋다. 이 저작은 퀸틸리아누스가 20년 이상 교육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양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지를 교사들에게 설파하기 때문이다.

[퀸틸리아누스와 ‘인스티투티오 오라토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책의 편찬을 지시한 도미티아누스와 퀸틸리아누스 모두, 국가에서 교육이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가 일치했던 것 같고, 도미티아누스는 교육은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성장하는 천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지력(知力) 향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서기 95년에 완성되어, 이듬해 로마에서 간행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지도층을 육성하기 위한 교과과정을 집대성한 이 저술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교육 관계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공포 정치


타키투스는 『역사』 첫 머리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기간 동안의 공포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나르는 배가 넘쳐나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혈통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치세 15년 동안 사형이나 추방형에 처해진 사람은 주로 후반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사형 8명 내지 9명, 추방 5명 내지 6명, 공직생활에 절망하여 은둔한 사람은 3명 내지 4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다 원로원 의원이긴 했지만 그 숫자가 아주 많다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외에는 대부분 문제가 많았던 점쟁이와 그리스인 철학자 집단들이었다. 아마 타키투스는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람의 수를 문제삼기보다 공포정치의 최전선에 선 이른바 고발자들(델라토르)과 그들의 암약을 허용한 도미티아누스를 맹렬히 비난하는 것 같다.


‘델라토르’


로마 법정은 다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재판장은 원로원에서 선출된 법무관이 맡는다. 임기를 마친 속주 총독이 속주민에 의해 고발당할 경우에는 ‘오라토르’(Orator)라고 불린 변호사가 원고 측을 대리하여 검사 역할을 맡는다. 물론 ‘오라토르’가 피고 측 변호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델라토르’(Delator)는 고발자로 번역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발이 전문이기 때문에 피고 측에 서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배심원은 ‘켄툼비리’(Centumviri)라고 불렸는데, 직역하면 ‘백 명의 남자’다. 수도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바실리카 율리아’ 회당에서 재판이 열렸다. ‘바실리카 율리아’는 사방이 트여 있어서, 방청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다.

검사 역할도 맡고 변호사 역할도 맡는 ‘오라토르’와 달리, ‘델라토르’는 검사 역할만 전문적으로 맡는다. 로마 제국에서는 델라토르도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공직이 아니라 민간 직업이었다. ‘델라토르’는 유죄 판결을 받은 자에게 몰수한 재산의 일부를 보수로 받는다. 델라토르는 재산 사냥꾼이나 마찬가지라 하여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델라토르’가 혐오 대상이 된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말하면 함정수사나 협박으로 증언을 끌어내는 짓까지 동원해서 증거나 증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토대로 피고를 법정에 세우는 수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현제 시대에도 ‘델라토르’ 제도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이 제도 자체는 로마인도 용납했던 게 분명하다. 문제는 희생자 수가 아니라, 황제가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이 제도를 이용했느냐 아니냐에 있다. 티투스는 ‘델라토르’의 고발에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종신 재무관


재무관은 공화정 때부터 존재한 관직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 선출되고, 집정관보다 더 권위있는 자리로 여겨졌다. 임기도 다른 관직은 1년인데, 재무관은 1년 반이다. 또한 재무관에게는 사회 지도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 원로원 의원의 의석을 박탈할 권한도 주어졌다.


서기 83년 가을, 제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뒤에 그는 동료 한 명과 함께 재무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1년 반의 임기가 끝난 서기 85년 봄, 이번에는 종신 재무관에 취임했다. ‘종신 재무관’(켄소르 페르페투아)도 도미티아누스가 새로 마련한 관직이다. 물론 동료가 없이 혼자 취임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이 ‘무기’를 빼들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 속주 총독 켈리아리스가 역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된 사건이 일어난 서기 87년부터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사건도 일어났다. 이 두 사건은 원로원 내부의 황제 반대파가 군단 지휘권을 가진 속주 총독을 부추긴 결과로 여겨지고 있었다.


40세 안팎의 나이에는 분노를 억제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기’를 뺐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 숙청에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 바로 ‘델라토르’였다. 서기 90년대 이후 도미티아누스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델라토르’들과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 사이에 존재했던 팽팽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면 원로원 의원인 타키투스의 붓이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증오감에 물든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는 토지가 한정되어 있는 도심의 팔라티노 언덕에 웅장한 궁전을 신축했을 뿐 아니라, 알바에는 산장을 짓고 치르체오에는 해변 별장을 짓고 있다. 치르체오 별장은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 상상해보아도 유난히 규모가 컸다.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별장도 치르체오 별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다.

[알바 별장과 치르체오 별장 출처 구글 이미지]

도미티아누스는 말할 것이다. 시민을 위한 공공사업은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공적 의무를 다한다고 해서 사적으로 무슨 짓을 하든 괜찮은 것은 아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보다 언행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암살


도미티아누스는 아직 황제의 아들이었을 무렵 그와 동갑이거나 조금 나이가 많은 도미티아에게 반하여 이미 남편이 있었던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도미티아누스도 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지 3년, 당시 도미티아누스는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때문에 라인강 전선에 머물 때가 많았고, 카티족과의 전투까지 겹치는 바람에 로마를 오래 비웠다. 그런데 오랜만에 돌아온 황제를 맞이한 것이 황후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었다.


상대는 비극배우인 파리스라고 한다. 32세의 도미티아누스는 깊이 조사해보지도 않고 소문을 곧이들었다. 파리스는 살해되고, 황후는 이혼을 당하고 황궁을 떠났다.

[도미티아 출처 구글 이미지]

고독을 벗삼아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불과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티투스에게는 율리아 플라비아라는 딸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에게는 조카딸이다. 율리아는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와 숙부인 도미티아누스가 사는 궁전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1년도 지나기 전에 도미티아누스는 이혼했던 황후와 재결합했다. 하지만 율리아도 궁전에 계속 살고 있었다. 끝내 재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기 88년에 이 율리아가 갑자기 죽었다. 율리아가 임신하자 도미티아누스가 낙태를 강요했고, 그 때문에 율리아가 죽었다는 소문이 하인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율리아 플라비아 출처 구글 이미지]

도미티아가 분노와 굴욕감을 씹으면서 남편의 연애를 그냥 참고 넘겼다면, 라이벌의 죽음으로 문제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율리아가 죽은 것은 서기 88년 무렵이니까, 도미티아누스가 피살된 96년보다 8년 전이다. 그 8년 동안 도미티아누스 주변에 아내 이외의 여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기 95년에 측근들까지 동조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황후의 심중을 차지한 것은 고뇌와 증오였지만, 그녀의 측근들이 품은 것은 공포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라는 두 아들말고도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플라비아. 삼남매 가운데 맏이였던 모양이다. 플라비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역시 플라비아라는 딸을 두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으로서 내전 기간에 피살된 사비누스의 손자인 클레멘스가 결혼 상대로 선택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티투스는 아들을 남기지 않았고 도미티아누스의 아들도 어릴 때 죽었다. 제위에 오른 뒤 도미티아누스는 조카딸의 두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하고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젊은 제위계승자의 친부모인 클레멘스와 플라비아가 둘 다 어느 종교에 귀의해버린 것이다. 종교 문제에 관대한 당시 로마에는 종교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들이 귀의한 종교는 기독교였다는 게 초기 기독교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서기 95년 가을로 접어들 무렵, 클레멘스와 플라비아 부부는 고발당했다. ‘델라토르’들이 증거를 굳히기 위해 활약한 결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식 재판을 거쳐 클레멘스는 사형, 플라비아는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유배지는 판다타리아(오늘날의 벤토테네)섬이었다.


플라비우스 씨족은 신흥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일가붙이가 처형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죽인 사람도 죽은 사람도 같은 씨족의 일원이다. 플라비우스 씨족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포에 사로잡혔을 게 분명하다. 이 공포와 황후의 증오가 뒤섞인다면……


침실에서 자고 있는 도미티아누스를 덮친 것은 도미티아 황후를 모시는 스테파누스라는 해방노예였다. 하지만 황제는 나이도 40대 중반이고, 게다가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동지가 있었을 테지만, 그들의 이름이나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암살자들이 침실에 침입하자마자 안쪽에서 빗장이 걸렸다.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일이 끝난 뒤에는 뒤처리도 빨랐다. 그제야 호위병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암살자들을 현장에서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원로원 의원 네르바에게 당장 사람을 보냈다.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원로원은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장 회의가 소집되고, 그 자리에서 모든 대책이 결정되었다.


황제로 지명된 네르바에게는 즉석에서 황제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한이 인정되었다. 공식으로 로마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면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원로원은 재빨리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한 것이다. 게다가 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록말살형’에 처한다는 결의까지 해버렸다.


아무도 인수할 사람이 없는 시신을 인수하여 몰래 화장한 사람은 도미티아누스의 유모였다. 그녀는 도미티아누스의 유해를 먼저 매장되어 있던 율리아의 유해와 섞어서 매장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기록말살형’으로 묘비조차 세울 수 없게 되었지만, 무덤 속에서는 율리아와 함께 잠들 수 있었다.


이리하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은 두 번째 세습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도 27년 만에 무너졌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도미티아누스가 죽을 때까지 27년을 세 황제가 다스린 셈이다.


로마 제국이 직면한 위기를 수습하고, 제국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고, 게다가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정책을 시행하여 제국의 활력을 되찾고, 로마 제국이 번영으로 나아갈 기반을 쌓은 것이 ‘플라비우스 왕조’ 황제들의 최대 업적이라는 게 현대 역사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제8부 네르바 황제
(재위 서기 96년 9월 19일~98년 1월 27일)


네르바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후세는 ‘오현제’(五賢帝)라고 부르게 된다. 따라서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서기 96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180년까지를 로마 역사에서는 ‘오현제 시대’라 부른다.


‘구원 투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는 수도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의 언덕 마을인 나르니아(오늘날의 나르니)에서 태어났지만, 예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집안이다. 태어난 해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인 서기 26년. 43세 때 일어난 내전을 무사히 넘긴 뒤, 44세부터 53세까지는 베스파시아누스 치하에서 살았고, 그 후 티투스를 거쳐 55세부터 70세까지는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보낸 인물이다.

[이탈리아 나르니 출처 구글 이미지]

44세 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서기 90년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을 지냈다.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원로원 귀족은 제정 이후 얼마 남지 않게 되었지만, 네르바는 그 원로원 귀족의 한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찬성파도 반대파도 아니었다. 반대파의 반발을 살 염려도 없고, 친도미티아누스파를 자극할 염려도 없었다.


그리고 타키투스 같은 중류계급 지식인이 좋아하는 ‘고귀한 혈통’이기도 했다. 또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어 ‘플라비우스 왕조’가 계속되면서 그 결함을 깨닫게 된 이들에게는 네르바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 70세의 나이로는 이제 자식을 낳을 수도 없다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여겨졌다.


원로원 의원인 네르바의 즉위를 원로원이 환영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파로 여겨지던 근위대도, 변경에 근무하는 군단도 새 황제 네르바에게 순순히 충성을 맹세했다. 네르바는 고령일 뿐 아니라 건강도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네르바를 ‘과도기에 잠깐 등장한 구원 투수’ 정도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즉위 후


황제에 즉위한 뒤 처음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네르바는 원로원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성립시켰다. 원로원은 황제의 사법권 밖에 있다는 것이 이 법률의 요점이다. 이로써 원로원 의원들은 아무리 황제가 ‘델라토르’를 이용하여 법정에 끌어내도 처형당할 염려는 없어졌다. 다만 치외법권이라 해도, 그것은 황제의 사법권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치외법권’이고, 그밖의 일반 형법이나 민법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의 인사 기준은 어디까지나 적재적소였다. 프론티누스는 수도청(水道廳) 장관과 비슷한 ‘쿠라토르 아콰룸’(curator aquarum)에 임명되었고, 이때의 경험은 『로마시의 수도에 관하여』(De aquae ductu urbis Romae)라는 저서로 열매를 맺는다.


소(小)플리니우스도 네르바에게 발탁된 인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국세청장이라 해도 좋은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부를 추구하지도 않았지만 경멸하지도 않은 그에게는 딱 알맞은 자리였을 것이다.

[소 플리니우스와 그의 서한집 출처 구글 이미지]

네르바는 운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도미티아누스로부터 건전한 재정을 물려받았고, 게다가 착공은 도미티아누스가 했지만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직후에 완공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두 건축물이 그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하나는 ‘네르바 포룸’이고 또 하나는 오스티아 항구 근처에 세워진 ‘네르바 창고’였다.


후계자는 원로원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네르바가 스스로 결정한 모양이다. 서기 97년 10월에 느닷없이 후계자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후계자를 지명한 게 뜻밖이어서가 아니라, 지명된 제위계승자가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등장


입양(入養) 형식으로 후계자에 지명된 것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ianus, 친부와 동명)다. 이베리아반도 남부 출신이니까 말하자면 속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서 군단장을 지냈고, 귀족까지 되었으니까, 전통적인 명문 집안은 아니지만 사회 지도층에 속해 있었다.


서기 97년 당시 트라야누스의 지위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포함한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군 사령관이었다. 나이는 44세. 사회적 지위도, 군사 경험도, 연륜도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변경의 군단들도 트라야누스라면 대환영이었다. 빈정대기 좋아하는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오로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고른 한 가지 업적 때문이라고.


서기 98년 1월 27일, 네르바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자연사였다. 1년 4개월의 치세다. 유해는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역대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황제묘에 매장되었다. 네르바가 죽었을 때 트라야누스는 콜로니아(오늘날의 쾰른)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당시 22세였던 하드리아누스였다.

[게르만 전선의 트라야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1월 1일 집정관에 취임할 때도 수도로 돌아가지 않은 트라야누스는 45세에 새 황제가 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어, 1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에서 3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뛰어오른 트라야누스는 알고 있었다. 군인인 자기가 황제가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르바가 한 일과는 다르다는 것.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로 돌아간 것은 제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서기 99년 여름이었다.


로마의 인사(人事)


로마 역사는 릴레이 경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기성 지도층의 기능이 쇠퇴하면, 어김없이 새로운 인재가 배턴을 넘겨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국정의 경우에는 지금 달리는 주자 자신이 다음 주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에는 후계자 결정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를 보면, 현재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육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제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등장했다. 속주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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