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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29. 2024

로마인 이야기 9권 (1)

트라야누스 황제, 트라야누스 원기둥

『로마인 이야기』 제9권 '현제(賢帝)의 세기'에서는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등 세 황제, 연대로 치면 서기 98년부터 161년까지의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전체 로마 제국의 황제 중에서 업적이나 평판 측면에서 가장 인정받는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의 로마인들마저 ‘최고의 제일인자’(Optimus Princeps)로 찬양하고, 게다가 이것을 공식 칭호로 삼기로 원로원이 의결했을 만큼 평판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에 관해서는 신뢰할 만한 문헌자료가 전혀 없다.


따라서 이번 편의 내용은 대부분 고고학, 금석문, 화폐, 조형미술, 파피루스 문헌 등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 시대를 ‘오현제 시대’라고 부른 것은 후세지만, 동시대 로마인들도 ‘Saeculum Aureum’(황금 시대)이라고 불렀으니까 실질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제1부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서기 98년 1월 27일~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제위로 가는 길


네르바가 후계자로 지명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서기 53년 9월 18일 에스파냐 남부의 베티카 속주에 있는 세비야 부근의 이탈리카(Italica)*에서 태어났다. * 이곳은 하드리아누스, 테오도시우스 등의 황제들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탈리카의 로마식 원형 극장 유적과 위치 출처 구글 이미지]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버지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된 유대 전쟁 당시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제10군단을 지휘했고, 총사령관이 티투스로 바뀐 예루살렘 공략전에서도 공격에 참가한 4개 군단 가운데 하나를 이끌고 눈부신 전공을 세운 무인이다.


서기 75년,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총독 관저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간 트라야누스는 견습기간을 끝낸 뒤 수석대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Tribunus laticlavius)‘로 진급했다. 이후 아버지를 떠나 제국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라인강 주둔 군단으로 옮겨가서 3년을 보낸다.


서기 81년, 28세가 된 트라야누스는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경력’(쿠르수스)이라고 부른 엘리트 코스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국고 출납 책임자인 임기 1년의 회계감사관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근무지는 수도 로마였다. 83년 무렵에는 원로원에도 들어간 것 같다. 그리고 87년, 34세가 된 트라야누스는 ‘명예로운 경력’의 두 번째 단계인 법무관에 당선되었다.


트라야누스도 법무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근무지는 로마화가 오랫동안 진행된 탓에 적과 대치할 일이 전혀 없는 히스파니아, 그에게 맡겨진 군단은 오래전부터 이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제7군단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에스파냐 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도 겸했다.

이즈음, 고지 게르마니아(Germania Superior)에서 '사트루니누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 진압 과정에서 사트루니누스의 자결로 고지 게르마니아의 사령관 자리가 비게 되었다. 서기 9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39세의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도 겸하는 중책이다.


근위대 평정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고 네르바 황제가 즉위한 뒤, 도미티아누스에게 심취하여 암살 주모자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는, 1년이 지나도록 네르바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마침내 네르바 황제를 방에 감금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네르바도 사태 수습의 필요성을 느꼈다. 서기 97년 10월 27일, 카피톨리노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유피테르 신전 앞에서 제사를 끝낸 네르바 황제는 전격적으로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 황제로 지명한다고 선언하였다.

[네르바 황제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서기 98년 1월 27일 쾰른에서 네르바의 죽음을 통고받은 뒤에도 그는 계속 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이상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반도의 질서 유지는 그의 책임이다. 이를 위해 먼저 트라야누스는 베르바 황제를 감금하고 위협했던 근위대장과 그 동조자 몇 명을 쾰른으로 불러들인다.


황제의 명령이니까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들은 쾰른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살해되었다. 이것으로 근위대 내부의 불온분자 문제는 해결되었다. 수도에 있던 1만 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네르바한테는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트라야누스는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엄격한 조치에 복종했고, 이로써 근위대는 평정되었다.


기개를 가슴에 품고


45세 생일을 8개월 남겨둔 성숙한 나이에 제위에 오른 이 속주 출신 황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루려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업의 계승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금지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다.


단독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로 귀환을 미루면서까지 ‘사업’을 속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실제적인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한층 더 실제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트라야누스다운 선택이었다. 그 ‘사업’이란 ‘저지 게르마니아’(Germania Inferior)라고 불린 라인강 중류와 하류 지역의 방위체계를 완비하는 일이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족을 상대로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갑절이나 되는 전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실행하려면 도나우강 방위선의 전력 외에 추가로 인접한 라인강 방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고, 라인강 병력이 줄어든 상태에서도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라인강 방위체계를 완비해두어야 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통치 첫해인 서기 98년의 대부분을 라인강 연안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도나우강 연안으로 이동하여, 이번에는 전쟁 재개를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지휘했다. 트라야누스가 황제의 신분으로 수도 로마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은 서기 99년 여름도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로마 귀환


트라야누스는 성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한 황제답게 하얀 투니카 위에 은빛 강철 흉갑을 대고 어깨에는 진홍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지만, 말을 탄 채 수도에 입성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걸어서 로마에 들어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만큼 키가 작았다면 인파 속에 묻혀버렸겠지만, 트라야누스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도 그의 머리만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권력에서 배제되어 잠재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러한 겸손하지만 당당한 태도를 보고 당장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AI로 그린 트라야누스 얼굴과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원로원 배려


황제로서 트라야누스의 일상 역시 그런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배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화려한 궁전 따위는 추가로 지을 필요가 없었고, 궁중 야회도 원로원 의원들이 그 소박함에 놀랄 정도였으며, 사생활에서 지출이 아주 적은 황제였다. 아내인 플로티나 역시 최초의 속주 출신 황후였는데, 교양 있고 현명한 여자였지만, 미인도 아니고 사치하지도 않았다.

[플로티나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원로원 의원인 소플리니우스가 증언했듯이, “말에 담긴 진실감, 강하고 의연한 음성, 위엄에 찬 얼굴, 솔직하고 성실한 눈빛”으로 그의 말은 누구나 경청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은데, 트라야누스는 국가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게다가 트라야누스는 20년의 재위기간 동안 세 번밖에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았고 반사적으로 더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광대한 로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고위급 인재 확보 차원에서도 필요했지만 그로 인해 원로원 의원들이 황제에 대해 더욱더 호감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고대 로마의 '군주론'


이런 트라야누스의 방식 덕분에 집정관이 된 소플리니우스가 서기 100년 9월 원로원에서 연설했다는 「트라야누스에게 바치는 송가」가 남아 있는데, 우선 집정관이 될 기회를 준 트라야누스에게 감사한다는 것이고, 그 주된 내용은 고대 로마인이 쓴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전문은 아래 링크 참조).

[소 플리니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먼저 소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혈연 때문이 아니며, 선제 네르바가 그를 양자로 삼은 것도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지 그의 개인적 야심이 낳은 결과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문구는 "나서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 내세우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라"는 당시 지식층이 선호하는 가치관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소플리니우스는, 로마 황제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 군대, 속주,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통치를 위임받은 유일한 존재이며" 그 목적은 "오직 만민의 자유와 번영과 안전보장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만민에 대한 통치자는 만민 가운데 선택된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마디- 라틴어 원문으로는 "Imperaturus omnibus eligi debet ex omnibus"는 계몽주의를 거친 근대 서유럽 국가의 위점자들에게도 "늘 명심해야 할 말"이 된다.


법치국가에서 황제의 권력에 대해, 소플리니우스는 "당신이 우리 원로원 의원을 넘어서는 권력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권력을 당신이 가져주기를 바란 것은 우리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황제란 법 위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법이 황제 위에 서는 존재입니다.“ 

아울러 후천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은 황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전제군주가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라고.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쾌활한 동시에 진지하고, 소박한 동시에 위엄이 있고, 상냥하면서도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원로원과 함께 제국의 양대 주권자인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당신이 위임받은 통치권은 국익을 지키는 데 행사되어야 하지만, 그 국가는 시민 모두의 것입니다. 따라서 황제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소플리니우스의 ‘군주론'에도 돈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광대한 팔라티노 궁전이 비난을 받자, 다음 황제 네르바는 'Villa publica'(공관)라고 새긴 석판을 내걸고 정문을 항상 열어두게 했고 트라야누스도 이를 답습했다.

[도미티아누스 궁전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소플리니우스는 그것을 칭송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황제의 재산을 마치 공동 소유권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우리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부담하는 상속세와 관련하여, 당시 네르바 황제는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세법을 개정하여, 부모와 자식 간에 상속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해 주고 2만 세스테르티우스 이하는 누가 상속하든 상속세를 전액 면제해주기로 결정했다.


소플리니우스는 이것도 트라야누스가 계승해야 할 정책 가운데 하나로 들고 있다. "로마 시민권은 매력 있는 권리여야 하고, 근친을 잃은 슬픔에다 재산을 잃는 슬픔까지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게 그 이유였다.

군대와 황제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는 지금까지 군단에서 트라야누스가 취한 태도를 칭송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트라야누스가 병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태도가 낳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당신과 함께 굶주림도 목마름도 견뎌냈습니다. 훈련에도(로마군의 훈련은 실전보다 더 진지했다) 당신은 병사들과 함께 참가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기병들과 똑같이 땀을 흘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들 속에서 당신이 유독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병사로서 당신의 탁월함과 용맹함 때문이었습니다. 투창 훈련에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창을 던지고, 상대가 창을 던지면 누구보다도 재빨리 몸을 피했습니다. 당신의 갑옷이나 방패를 찌른 병사에게는 당신의 노여움이 아니라 칭찬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냉철한 관찰자요 사령관이었습니다. 병사들의 무기를 일일이 점검하여 부적당한 것은 바꾸게 하고, 병사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면 당신이 대신 져주었습니다. 부상병은 육친처럼 정성껏 돌봐주었습니다. 게다가 병사 전원에 대한 최종 점호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막사에 들어가지 않고, 모든 병사에게 휴식을 준 뒤에야 자신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소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먼저 도발해서도 안 됩니다.” 라틴어로는 “Non times bella nec provocas”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사관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격언이다.


소플리니우스가 군대 다음으로 언급한 것은 속주다. 황제는 속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소플리니우스는 "속주민도 로마인의 일부"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은 어디에나 균등한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도움이 필요한 지방을 원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또한 “교역은 서방과 동방을 이어주고, 따라서 제국 안의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산 가운데 수출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자기네 고장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수입할 필요가 있는 물산이 무엇인가를 이제는 완전히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속주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대경제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황제의 중요한 책무라는 것을 암시한다.


공동화(空洞化) 대책


이즈음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광대해지고 개발이 활성화됨에 따라 점점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가 공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법안 하나를 가결해달라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로마 사회의 지도층인 원로원 의원은 적어도 재산의 3분의 1을 본국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한다는 법안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작농 진흥책으로 ‘농지법’을 제정한 이후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은 중소 자작농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가 되어 있었던 반면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속주에서는 대농장이 지배적인 구조가 되어 있었다. 즉 본국은 중소기업 사회이고 속주는 대기업 사회 같은 느낌이었다.


이 격차가 분명해질수록 재산가인 원로원 계급의 투자가 속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추세다. 본국 이탈리아에는 수도 로마의 저택과 해변 별장만 있을 뿐, 나머지 재산은 모두 속주에 투자했다고 큰소리치는 의원도 나오는 형편이다. 이를 방치해두면 제국의 중추여야 할 본국 이탈리아가 공동화할 것은 뻔했다. 3분의 1 정도면 괜찮다고 의원들도 생각했는지, 이 법안은 간단히 가결되어 당장 시행되었다.


참고로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모두 본국 이탈리아 농업의 건전한 발전이, 이탈리아가 계속 제국의 중추 역할을 맡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서, 이탈리아의 중소 자작농에 대한 혜택을 계속 제공했다. 그 중 하나가 금리 우대책이다. 당시 연리 12퍼센트가 보통인데, ‘중소기업은행’ 같은 국가 기관의 이자는 5퍼센트였다.


육영자금(알리멘타)


트라야누스는 또 하나의 본국 공동화 방지책을 시행했는데, 통칭 ‘알리멘타’(Alimenta)라는 법이다. 당시 로마인은 이것을 차세대 육성기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본국의 빈곤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 성격의 ‘육영자금제도’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시작한 것은 이런 육영제도의 국책화였다.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설립된 ‘중소기업은행’에는 국고 세입(Erarium)이 아니라 황제 세입(Fiscus)에서 자금이 출자되었는데, 그 이자 수입을 ‘알리멘타’의 재원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자를 내는 사람의 농지가 있는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가 그 이자를 직접 받아 사용하도록 하였다.


트라야누스의 ‘알리멘타법’에는 미성년자*만 보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규정되어 있고, 그 액수도 정해져 있었다. 이 자금은 성년이 된 뒤에도 갚을 필요가 없었다. 분할 상환도 요구받지 않았다. 군단병 월급이 75세스테르티우스였던 시절이다. *남자의 성년은 17세, 여자의 성년은 14세다.

적출 남자─매달 16세스테르티우스
적출 여자─매달 12세스테르티우스
서출 남자─매달 12세스테르티우스
서출 여자─매달 10세스테르티우스


이자 수입이 적은 자치단체에서는 부자들의 기부를 유도하여 부족한 액수를 벌충하려고 애썼다. 이리하여 개인의 육영제도와 국가의 육영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법은 이탈리아 본국의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으로도 효과를 발휘하였다.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속주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이제는 속주 출신 황제까지 등장하다보니, 본국 출신 의원들은, 제국의 중심이 트라야누스의 고향인 에스파냐로 옮아가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위 두 법률은 본국 이탈리아의 활성화를 노린 정책으로서, 그들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도 한몫을 했다.


다키아 전쟁 준비


이런 본국의 일들을 마무리한 후, 드디어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족과의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도나우강 중류에서 하류까지의 전선을 맡고 있는 7개 군단 외에, 라인강 방위선의 제11군단과 제1군단에 이미 이동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제2군단과 제30군단도 새로 편성되어 훈련에 들어갔다.


트라야누스가 벌인 다키아 전쟁에는 군단병 8만 명과 그보다 조금 적은 수의 보조병을 합친 15만 명이 투입된다. 로마 황제가 이끄는 전력으로는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현지에서의 모든 준비를 리키니우스 술라에게 일임한다. 술라는 트라야누스와는 동년배이고 동향인데다 군단 경력도 함께 쌓은 사이였다. 황제가 누구보다도 신임하고 있던 사내였다.


당시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는 도미티아누스와 데케발루스(Decebalus)가 맺은 평화협정이 건재했다. 다키아 쪽에서 평화협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런데 도나우강 건너편에 대군이 집결한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다키아군 일부가 분별없는 행동을 저지른 모양이다. 이 소식은 당장 수도 로마에 전해졌다. 원정에 적합한 봄이 찾아오자마자 트라야누스는 수도를 떠난다. 서기 101년 3월 25일이었다.

[데케발루스와 그의 조각 출처 구글 이미지]

다키아 정복에 관한 사료는, (1) 트라야누스 자신이 쓴 것으로 알려진 『다키아 전쟁기』(Com-mentarii Dacii), (2) 카시우스 디오가 쓴 『로마사』의 다키아 전쟁 부분 그리고 (3) ‘트라야누스 원기둥’(코론나 트라야나)이라고 불리는 승전기념비에 새겨진 부조의 세 가지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은 훗날 다른 사람이 인용한 글에 단 한 줄의 흔적만 남긴 채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2)도 단편 밖에 남아 있지 않다.


(3)의 경우에도,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이 돋을새김에는 전쟁의 진전 상황이 꽤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이 세 가지 사료를 실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고고학적 조사 연구는 전쟁터가 오늘날의 루마니아인 탓도 있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다키아 전쟁의 서술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작업이 되어버렸다.

[트라야누스 원기둥과 부조 출처 구글 이미지]

제1차 다키아 전쟁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서기 101년 봄에 어느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건넜는지에 대해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기』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다음 한 줄뿐이다.

“inde Berzobim, deinde Aizi processimus”(베르조비스로, 그리고 아이지스로 우리는 진군했다)


베르조비스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레시차라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지만, 아이지스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쳐들어가는 목적지는 다키아족의 본거지인 사르미제게투사였을 테니까,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산맥 서쪽을 지나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따라서 베르조비스를 거쳐 북동쪽으로 진군했을 게 분명하다.

[루마니아의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렇다면 도나우강을 건넌 지점은 로마 군단기지를 기원으로 하는 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직선거리로 60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로마 시대의 비미나키움(오늘날의 코스트라크)이 아니었을까. 서기 101년에 로마군은 그 부근에서 도나우강을 건넌 다음, 그대로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루마니아로 쳐들어간 것이다.


다키아 전쟁기(원기둥의 부조 해설* )


'트라야누스 원기둥(Trajan’s Column)'에 새겨진 『다키아 전쟁기』는 아래쪽에서 위쪽을 향해 나선형으로 올라가면서 전개되고, 각 장면은 가느다란 나무로 구획되어 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가 다짜고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다키아 전쟁기』도 바로 도나우강 연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아래 사이트에서 모든 장면 사진과 해설을 볼 수 있다.

[트라야누스 기둥 부조 출처 구글 이미지]

1) 도나우강에 면하여 세워진 감시용 요새가 보인다. 모두 소형이지만 석조 건물이고, 주위에는 목책을 둘러 이중으로 보호하고 있다. 목책을 만들기 위해 엇갈리게 쌓아놓은 통나무들도 보인다. 높은 요새인 경우에는 맨 위층에 만들어진 테라스에서 긴 횃불이 튀어나와 있다. 긴급할 때의 의사전달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요새 근처에는 완전무장한 보초들이 서 있는 것도 보인다.


2) 석조 건물 몇 채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싼 구역은 군량 창고였을 것이다. 포도주 통이 배에 실리고 있다. 로마 병사들의 식사에는 포도주가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제패한 땅에는 기후만 허락하면 어디에나 포도밭을 만들었다.


3) 장면이 바뀌어, 회당(바실리카)이나 높은 석조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도시가 보이고, 그 성문에서 완전무장한 군단병의 행렬이 나타나 배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강물 속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도나우 강의 신이 로마군의 도강을 축복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4) 여기서 처음으로 트라야누스가 등장하지만, 화려한 최고사령관의 군장으로 말을 탄 모습은 아니다. 다리를 다 건넌 병사들이 행군을 계속하는 옆에서 의자에 앉아 참모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황제 왼쪽에 역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이 트라야누스의 친구이자 다키아 전쟁 때 부사령관 역할을 맡은 리키니우스 술라라고 한다.


5) 적지인 도나우강 북안으로 건너가 최초의 제사가 거행된다. 제물로 바쳐질 소와 양이 끌려오고, 병사들도 노력하겠지만 신들도 로마에 승리를 베풀어달라고 최고제사장 차림을 한 트라야누스가 기원한다. 붉은 망토와 강철 흉갑을 벗고 하얀 투니카 위에 토가를 걸치고, 그 토가 끝자락으로 머리를 덮은 모습이다.


6) 장면이 바뀌면, 다시 군장 차림으로 돌아간 트라야누스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숲처럼 늘어선 군단기를 등지고 병사들 앞에서 연설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경청하는 병사들의 군장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황제의 연설이 군단병만 대상으로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7) 적지에서 최초의 격려 연설을 했으니까 그대로 적진을 향해 돌진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그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네 장면은 모두 돌과 나무로 숙영지를 만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공사에는 군단병과 보조병이 모두 참여한다.


8) 공병으로 변모한 로마 병사들의 토목공사는 숙영지 만들기에 머물지 않는다. 당시 유럽은 삼림지대이기도 했다.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진군할 때는 도로포장까지 하지 않지만, 새로 길을 평탄하게 고르는 작업은 한다.


9) 진행 중인 공사를 시찰하던 트라야누스 앞에 다키아족 포로가 끌려온다. 다키아족 지배층의 풍습인 빵떡모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척후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척후병이라도 포로는 사령관이 직접 심문하는 것이 로마군의 관례였다.


10)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적군이 강 건너 숲 저편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 장면에는 전투를 앞둔 준비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흥분해서 날뛰는 말들, 대오를 지어 기다리는 군단병들의 긴장한 얼굴 생동감 넘치는 리얼리즘이다.


11) 아니나 다를까, 다키아군은 숲이 끝나는 곳에 펼쳐진 평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치러진 전투가 트라야누스의 로마군과 데케 발루스의 다키아군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로서, 역사상 '타파이 전투'라고 불린다. 다키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미제게투사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쯤 떨어진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타파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그들이 가장 장기로 삼고 있던 진형-좌익·중앙·우익으로 나뉜 회전 진형을 갖출 시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에는 이 전투 장면이 몇 개나 이어져 있는데, 모두 기병과 중장비 보병인 군단병, 경장비 보병인 보조병이 뒤섞여 싸우는 혼전 상황이다.


다키아 병사들은 투구도 흉갑도 없이 짧은 상의에 바지를 입고 칼과 방패만 든 모습이다. 반면에 로마 군단병은 강철 갑옷을 입고, 보조병은 가슴에 가죽 흉갑을 대고 있다. 보조병들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평소 방식대로 반나체로 싸우는 게르만 병사들이다.


그들 사이를 뛰어난 전투력으로 유명했던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출신 기병들이 달려나가 다키아 병사들을 짓밟는다. 그들은 등자가 없어도 자유자재로 말을 달리는 기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강한 완력에다 말의 돌진력까지 합하여 창을 던지는 기술도 뛰어났다. 이런 모든 장면에는 전투를 지켜보는 트라야누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적군의 배후에는 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얼굴도 보인다.


12) '타파이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격전으로 일관한 전투였다. 잘라낸 다키아 병사의 목을 황제에게 보이는 로마 병사. 자른 적병의 머리카락을 입에 문 채 계속 싸우는 로마 병사. 그리고 패주하는 적을 뒤쫓는 로마 병사들의 눈앞에 나타난 성벽에는 다키아족에게 빼앗긴 군기와 살해된 로마 병사의 목을 꿴 창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시 전체에 불을 지르는 로마 병사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13) 병사들 앞에서 건투를 치하하는 트라야누스


14) 트라야누스를 찾아온 다섯 명의 다키아 사절. 하지만 그들을 맞은 트라야누스는 그들이 다키아족 유력자의 증거인 빵떡모자를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강화 제의에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15) '타파이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진격을 계속하는 로마군은 앞을 가로막는 도시, 마을, 요새를 융단폭격하듯 공격하여 불태운다. 남자는 눈에 띄는 족족 죽여버리고, 도망치는 노인이나 아녀자는 잡아서 도나우강 남쪽으로 압송한다. 뒤에 남은 것은 개나 소나 양 같은 가축뿐.


이때쯤 서기 101년의 겨울이 다가온 모양이다. 트라야누스는 군대의 절반을 다키아에 남겨놓고, 나머지 절반과 함께 도나우강 연안의 군단기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돌아갔다.

 

16) 그러나 다키아 왕은 수도에서 50킬로미터 거리까지 바삭 다가온 로마군의 창끝을 피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도나우강 하류에 있는 로마 군단기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공격 목표가 된 것은 먼 모에시아 속주에서도 제1군단이 주둔해 있는 노바에. 오늘날 불가리아의 스비슈토프다.

[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출처 구글 이미지]

17) 노바에 앞 강변에 도착한 다키아군은 떼를 지어 군단기지를 공격한다. 성벽 위에서 로마 병사들이 그들을 맞아 싸운다. 다키아 공략에 병력의 절반 이상이 동원되었을 테니까, 수비군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18) 원경에 즐비하게 서 있는 석조 건물과 원형경기장으로 미루어보아, 트라야누스가 겨울철 숙영지로 택한 곳은 도시화가 진행된 군단 기지였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로마인이 가까운 모에시아 속주의 도읍으로 삼고 있던 싱기두눔(오늘날의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이었을지도 모른다.

[베오그라드 출처 구글 이미지]

19) 도나우강을 따라 내려가는 로마 함대. 그중 한 척은 황제가 직접 키를 잡는다. 도나우강도 하류로 접어들면 대하(大河)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폭이 넓어져 동쪽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기 때문에,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별동대는 육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갔을 게 분명하다.


20) 트라야누스는 노바에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오에스쿠스 기지 부근에 상륙한 것 같다. 육로로 달려온 별동대와 합류하여 노바에를 구원하러 가기 위해 앞장서서 말을 달리는 황제. 그의 좌우를 지키며 뒤따르는 갖가지 군장 차림의 병사들.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돌아와 적군의 상황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21) 선발대로 결정된 마우리타니아 출신 기병대가 출동한다. 이 기병대를 맞아 싸운 것은 병사도 말도 온몸이 비늘 갑옷으로 덮여 있는 게 특징인 사르마티아족 기병대다. 이들은 다키아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부족이다. 하지만 마우리타니아 기병의 맹공 앞에서는 전신 무장도 효과가 없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22) 세 명의 참모를 거느린 군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병사들의 노련한 솜씨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숙영지 건설 작업을 시찰하고 있다. 그런 트라야누스에게 다키아족 노인들이 아녀자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투항의 뜻을 전하고 목숨을 구걸하러 왔다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그들의 차림으로 보아 정식 사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23) 서전에서는 이겼지만, 노바에 기지를 구원하는 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포로의 손을 뒤로 묶어 염주처럼 엮고 있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들도 보인다. 다른 한편에는 내일로 다가온 두 번째 전투를 위해 군기와 나팔을 점검하는 병사도 있다.


24) 두 번째 전투는 주전력인 중장비 보병을 주역으로 벌어졌다. 이곳 일대는 평원이기 때문에 로마군이 장기로 삼는 회전 방식으로 치러진 듯하다. 로마인의 회전 방식은 적을 포위하여 궤멸시키는 병법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병의 참전이 필수적이다. 다키아군은 전쟁터에 시체 무더기를 쌓을 뿐이었다.


25) 전투가 끝나고,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치하하는 황제의 연설 장면이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트라야누스를 존경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회전 방식으로 싸웠을 경우, 승리는 총지휘를 맡은 사람의 군사적 재능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26) 숙영지 안에 수용된 다키아족 포로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바로 다음에는 특히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황제가 일일이 치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27) 발가벗겨진 포로 셋이 여자들에게 고문당하고 있는 장면. 그중 한 사람은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도 없기 때문에, 사로잡은 로마 병사 세 명을 다키아 여인들이 고문하는 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28) 노바에 기지를 구원한 트라야누스는 다시 배에 올라탄다. 다키아족 노인들이 황제에게 탄원을 계속하지만, 아녀자를 포함한 포로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이리하여 다키아군의 도나우강 하류 교란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29) '원기둥'은 해가 바뀐 서기 102년 봄부터 다키아 전쟁에 대한 서술을 재개한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배에 군량을 심는 병사들과 배다리를 건너는 군단이 묘사되어 있다. 군단기에 달린 표지로 보아, 라인강 방위선의 가운데 기지 하나인 본에 주둔해 있는 제1군단임을 알 수 있다.


서기 102년, 트라야누스는 산맥 북쪽에 있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양쪽에서 협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산맥을 서쪽에서 우회하는 방법과 동쪽에서 우회하는 방법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도나우강 남쪽의 군단기지에서 출동할 때 이미 포위 섬멸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한 셈이다.


동쪽에서 우회하는 길은 로마군이 한번도 가보지 않았고 거리도 세 배나 된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기병과 젊은 정예 군단병을 보낸다. 이 제2군의 총지휘를 맡은 것은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용명을 떨친 루시우스 퀴에투스였다. 트라야누스 자신은 술라와 함께 서쪽 우회로로 진격하는 제1군을 이끈다


30) '다키아 전쟁' 2년째를 서술하고 있는 부조는 오로지 제1군의 진격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만 중점을 둔 것 같다. 견고한 숙영지나 나무 난간까지 갖춘 다리를 건너는 로마 병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병사들과 함께 진군하는 황제였을 것이다. 적지에서 겨울을 난 병사들과 재회하여 노고를 치하하는 트라야누스.


31) 황제 옆에서는 벌써 병사들이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작업에 매달려 있다. 로마군은 전투 결과도 나오기 전에 벌써 승리한 뒤를 생각하여 기반시설을 정비해버린다. 공사 현장을 시찰하는 트라야누스에게 세 명의 다키아 사절이 찾아온다.


몸에 걸친 옷은 유복한 사람의 것이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다키아 왕의 중신이 아니라 다키아의 한 지방 대표일 것이다. 이들은 왕을 떠나 독자적으로 로마군에 투항하고,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다키아족의 내부 분열은 로마가 바라는 바였다.


32) 장면이 바뀌어, 숙영지 안에서 거행된 제사 광경이 묘사된다. 토가 자락으로 머리를 덮은 제사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의식을 주재한다.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은 전투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보여준 다.


33)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이 보여준 특색이기도 하지만, 격려 연설이 끝난 후 토목공사 상황이 몇 장면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 공사의 주역은 방패나 창을 옆에 놓고 일하는 군단병이다. 그들이 군장 차림인 것은 적이 기습해오기라도 하면 당장에 맞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전투 자체보다 토목공사에 종사하는 시간이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고, "로마군은 곡팽이로 이긴다"는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토목공사 전문가가 되면, 20년 동안의 병역을 마치고 제대한 뒤에도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34) 군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사절을 접견하고 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은 다키아인은 둥근 빵떡모자에 옷차림도 단정하다. 지금까지 찾아온 사절들과는 다른 것을 알았는지, 병사들도 멀리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다키아 왕이 정식으로 강화 사절을 보내온 거라면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35) 실제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는 강화 사절을 보내왔다. '원기둥'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트라야누스도 이번에는 강화 교섭을 위해 심복인 술라와 근위대장인 리비아누스를 왕에게 파견한다. 하지만 양측의 조건이 맞지 않아서 교섭은 결렬되었다. 전쟁이 재개된다. 동쪽 우회로로 진군한 루시우스의 제2군도 목적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36) 결전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다키아군이 모든 전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게릴라 전법으로 나오는 다키아군을 격파하고, 보초를 세워둔 채 토목공사를 하고, 또 다시 습격해오는 게릴라와 싸우고, 다시 토목공사로 돌아가는 식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37) 결전에는 로마군도 모든 전력을 투입했지만, 다키아군도 후방에 포진한 데케발루스의 질타와 독려를 받으며 용감하게 싸운다.


38) 하지만 로마 쪽도 결전으로 몰고 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평원에서 벌어지는 회전으로 몰고 가지는 못했다. 로마인이 보기에 미개지인 다키아 지방은 수도 바로 옆에까지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쯤에는 다키아 쪽도 숲을 개척하면서 싸우는 로마식 병법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 부조에 묘사되어 있다.


39) 하지만 그것도 결국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도시가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왕의 누이까지 포로가 된다. 로마군에 붙잡힌 다키아 유력자의 수도 계속 늘어났다.


40) 토목공사를 계속하는 로마군 진영에 모자를 쓴 다키아 유력자들이 강화를 청하러 찾아왔다. 이번에는 한눈에 유력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도 많다. 게다가 이들 뒤쪽에 데케발루스가 서 있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는데(직접 강화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다.


1년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제1차 다키아 전쟁은 끝났다.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03년과 104년에는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나우강에서는 대공사('트라야누스의 다리')가 시작되어 있었는데, 이 공사는 다키아와 강화를 맺은 직후에 착공되었다.

(1) 다키아 왕에게는 ‘로마 시민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가 주어지고, 다키아는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 된다.
(2) 데케발루스와 모든 중신의 지위는 로마가 보장한다.
(3) 다키아 왕은 로마의 1개 부대가 수도 사르미제게투사 근교에 주둔하는 것을 인정한다.


41)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일단 끝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로마에서 트라야누스가 주역을 맡은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49세의 개선장군에게는 ‘다키쿠스’(Dacicus)라는 존칭이 부여된다. ‘다키아를 제패한 자’라는 뜻이다.


건축가 아폴로도로스


로마시대에 '어디어디 출신의 아무개'라고 불리면, 그 사람은 성과 이름으로 불린 사람보다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는 증거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트라야누스 시대에 완성된 대표적인 공공건물에 모두 관여한 당시 이미 레전드 수준의 건축가였다.


피렌체 태생도 아닌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를 발상지로 하는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 구현자가 되었듯이, 다마스쿠스 태생의 그리스 사람인 아폴로도로스도 전혀 로마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로마적인 건축가가 된다. 역시 에스파냐 태생이면서도 로마 출신보다 더욱 로마적이 되려고 애쓴 트라야누스와는 잘 어울리는 짝이었을 것이다.


다키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 트라야누스가 눈에 띄는 공공 건설공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아폴로도로스를 도나우강에 붙잡아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1차 다키아 전쟁이 끝난 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에게 부과된 임무는 대하(大河) 도나우강에 석조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150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대하인 라인강에 다리를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강폭이 500미터도 안 되는 지점을 연결하는 목조 다리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이번 다리는 석조였고, 강폭도 라인강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도나우강 중류다. 다리의 목적이 로마 영토와 다키아 영토를 잇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기술이 이룩한 결정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는 아폴로도로스의 지휘로 착공한 지 1년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된다. 공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강폭이 넓은 도나우강 중류에 석조 다리를 놓는 데 공사 기간이 1년 남짓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총력을 기울인 돌관 작업의 성과였을 게 분명하다.

[트라야누스 다리 공사 부조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다리의 완공을 기념하여 이듬해에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이 발행되는데, 여기에 새겨진 다리는 아치 모양의 무지개 다리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둥근 동전 모양에 맞춘 데포르메(변형)에 불과하다. 다리를 도로의 연장으로 생각한 로마인은 도로와 고저 차이가 없이 다리를 놓는 게 보통이었다(아래 그림 참조).


[트라야누스 다리 완공 기념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트라야누스 다리'


갈리아초가 지은 『로마의 다리』에 실린 도면을 소개하겠다. 우선 놀라운 것은 그 규모다.

길이─1,135미터, 높이─27미터, 너비─12미터

이것을 20개의 석조 교각이 떠받치고 있다.

교각의 길이─33미터, 교각의 높이─14미터, 교각의 너비─18.5미터


그 밑에는 목재가 빈틈없이 메워진다. 뜻밖에도 나무는 물에 강하다. 또한 교각의 간격이 30미터가 넘기 때문에 3단층 정도의 선박도 지나다닐 수 있었다. 이 거대한 교각의 공사 방법은 우선 물속에 빈틈없이 짠 나무 울타리를 세운 다음, 울타리 안에 갇힌 물을 빼내고 그 안에 교각을 세우는 방식이다.


‘트라야누스 다리’가 석재와 목재의 혼합형인 것은 다리 전체의 중량을 줄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각에는 다리를 떠받치는 기능만이 아니라 강물의 흐름에 저항하는 힘까지 요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다리처럼 수십 미터가 아니라 1킬로미터가 넘는 강의 물살을 견뎌야 했다.


‘원기둥’의 부조에도 동전의 도안에도 ‘트라야누스 다리’는 상하로 나뉜 2층 구조로 묘사되어 있다. 아래층은 무거운 병기나 식량을 실은 짐수레, 보통 3열 종대로 행군하는 중장비 보병이 이용하고, 위층은 경비병이나 민간인이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로마 시대 최대의 토목공사인 ‘트라야누스 다리’는, 카시우스 디오의 말에 따르면 “야만족이 이용하는 것을 꺼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목조 부분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제국 말기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할 무렵에는 다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도나우강을 대형 선박 운행에 활용하기 위해 강물 속에 서 있던 교각마저 모두 폭파해버렸다.


이렇게 큰 규모의 다리를 1년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해버린 로마의 위용을 코앞에서 목격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쨌든 다키아 쪽에서 보면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로마의 명백한 도발이었다.


제2차 다키아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데케발루스는 이번에는 파르티아 왕을 움직여 동쪽과 북쪽에서 로마 제국을 함께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파르티아 왕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의 방위선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은 갖고 있지만 로마를 공략할 수 있는 군사력은 갖지 못한 나라였다.


흑해에서 홍해로


파르티아에 대한 다키아 왕의 공작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이 시기에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아 합병에 착수한다. 향료와 몰약과 진주의 산지로 이름난 풍요로운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방을 로마인들은 ‘아라비아 펠릭스’(축복받은 아라비아)라고 불렀지만, 그냥 아라비아라고 부르면 오늘날의 요르단을 가리켰다.


로마 제국의 방위선은 흑해에서 시작하여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국경을 계속 남하하면서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나아가다가, 계속 남하하여 팔미라와 다마스쿠스, 보스트라(오늘날의 부스라), 필라델피아(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 근처를 지나 홍해에 면해 있는 아카바에 이른다.

[아라비아 나바테아 속주 부근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아라비아 나바테아 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된 현재의 요르단 지방에도 간선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에서 부스라와 암만을 거쳐 아카바에 이르는 가도가 된다. 아라비아 속주의 도읍은 암만이 아니라 부스라(Busra al-Sham)로 결정되었다. 전선에 더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부스라 출처 구글 이미지]

제2차 다키아 전쟁


서기 105년 봄, 강화를 파기하고 공세를 취한 것은 다키아 쪽이었다. 다키아는 수적 우세를 믿고, 다키아 영토 안에 있는 로마군 숙영지와 가도를 건설하고 있는 제7군단(군단장 롱기누스), 그리고 도나우강 하류의 로마 영토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6월 4일, 트라야누스 황제는 수도 로마를 떠난다.


이 전쟁에 대한 서술도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장면을 추적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자한다.


42) 제2차 다키아 전쟁의 서술은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에서 트라야누스가 배를 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곳이 안코나라는 것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비너스 신전과 항구 근처에 세워진 개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개선문은 제1차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국한 트라야누스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수많은 군선에 나누어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는 로마군. 노를 것는 것은 갑옷을 벗어 발치에 내려놓고 투니카만 걸친 병사들이다. 그중 한 척의 고물에서는 붉은 망토를 걸친 트라야누스가 큰 소리로 노젓는 박자를 맞추고 있다. 파도 사이에 돌고래떼가 묘사되어 있는 것은 함대가 난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3) 아드리아해를 건너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해안에 상륙한 트라야누스와 병사들. 마중 나온 주민들이 모두 로마식 토가 차림이고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은 달마티아 속주의 도읍인 살로나나 그 바로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스플리트로 여겨진다.


44) 투니카에 망토를 걸친 가벼운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말을 타고 내륙으로 향한다. 그 일행을 길가에서 배웅하는 시민들. 아녀자들의 모습도 섞여 있다.


45) 덩굴과 꽃을 엮은 목걸이로 장식한 소를 몇 마리나 제물로 바치는 제사 장면. 전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일 텐데, 신들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일은 로마인에 게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종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병사들도 시민들도 모두 의식에 참 여한다.


46) 배와 돌다리를 이용하여 진군하는 병사들.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에 입성한 황제와 병사들. '원기둥'에 묘사된 이들 도시는 오늘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도시들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본국 이탈리아와 가깝다고는 하지 만, 로마 시대에 이 발칸반도 일대의 높은 문명도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47) 하지만 도나우강 전선이 다가올수록 원경에 묘사되는 건물도 석조 요새가 많아진다. 그것을 옆으로 보면서 질주하는 로마 기병대 선두를 달리는 트라야누스 황제를 인근 주민들이 모두 나와서 맞이한다. 옷차림이나 머리 길이로 보아, 아녀자들도 섞여 있는 그들이 다키아족임을 알 수 있다.


48) 그러나 로마식 복장을 한 주민도 많다. 다민족 국가인 로마 제국의 주민 구성은 전선 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둘러싸여 제단에 포도주를 부으며 신들에게 로마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트라야누스.


49) 장면이 바뀌자마자, 방패를 옆에 내려놓고 투니카 차림으로 나서서 나무를 베어 숲속에 길을 내는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매번 통감하는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 군대는 다소 불편해도 기존 도로를 이용하는 반면, 로마군은 편리한 길을 만들면서 진군하는 차이점이 있다.


50) 장면이 완전히 바뀌어,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군 기지를 공격하는 다키아 병사들이 묘사된다. 몸을 지키는 것은 대형 방패뿐이다. 공격하는 다키아군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수염을 기르고 모자도 쓴 다키아의 유력자다. 로마와 싸우자는 데케발루스 왕의 호소에 다키아족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것을 알 수 있다.


51) 수비하는 로마 병사들도 지고 있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의 어느 방위선보다도 긴장을 강요당한 것이 도나우강 방위선의 병사들이다. 기후나 지형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가혹한 환경이 평범한 병사들을 정예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다키아군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응전한다.


그러나 전투는 기지의 방벽을 사이에 두고 치러진 것이 아니라, 로마군이 기지 밖으로 나가서 다키아군을 맞아 싸운 모양이다. '원기둥'에는 몇 장면에 걸쳐 치열한 백병전이 묘사된다. 그 형상은 당시의 박진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걸작이다.


52) 전황은 조금씩 로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장면이 진행될수록 땅에 쓰러진 다키아 병사가 늘어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시 로마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트라야누스가 이끌고 온 기병대의 도착이었다. 다키아 쪽은 많은 시체를 버려둔 채 도나우강 이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절은 여기서 가을로 접어든다. 로마군이 도나우강을 건너 반격에 나서는 것은 이듬해 봄까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유럽의 겨울은 혹독하다. 이듬해 봄의 반격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제7군단장 롱기누스


로마군이 가도를 건설하는 공사 현장이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 영토였는지 북쪽의 다키아 영토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다키아군은 가도 공사를 하고 있던 제7군단을 습격했는데, 군단장과 열 명 안팎의 로마 병사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포로로 잡힌 군단장은 롱기누스.


롱기누스는 포로가 되었지만 쇠사슬에 묶이지도 않았고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다. 다키아군의 요새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시중을 들어주는 해방노예까지 거느리고 자유롭게 산책할 수도 있을 만큼 롱기누스가 너그러운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다키아 쪽이 요구한 강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도나우강에서 흑해에 이르는 도나우강 이북 전역을 다키아 영토로 삼는 것을 인정해줄 것. 둘째, 로마와 싸우는 데 사용한 전쟁 비용을 변상해줄 것. 이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롱기누스와 열 명의 포로를 송환하겠다.


왕으로부터 이런 조건을 통고받은 롱기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야누스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승낙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하인인 해방노예를 시켜 독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케발루스가 모르는 그리스어로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편지를 트라야누스에게 가져가는 역할은 자기 하인이 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리고 편지를 휴대한 해방노예가 안전지대에 이르렀을 무렵, 로마 군단장은 독약을 마셨다. '카드'를 잃어버린 다키아 왕은 격분했지만, 그래도 로마 황제한테 양보를 받아내는 것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데케발루스가 직접 트라야누스에게 편지를 쓴다. 모든 것을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한 괘씸한 해방노예를 넘겨주면, 롱기누스의 유해와 열 명의 포로를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스 사람이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속주 총독까지 지낸 역사가 카시우스디오는 이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트라야누스는 롱기누스에게 무덤을 주는 것보다 로마 제국의 존엄을 지키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기둥'에는 이 에피소드는 새겨져 있지 않다.


제2차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부조에는 지난해 여름 도나우강 하류에서 다키아군을 격퇴한 장면에 이어, 이듬해인 서기 106년 봄에 시작된 로마군의 반격이 묘사되어 있다. 트라야누스가 52세 때였다.


53) ‘트라야누스 다리'의 기점이 된 폰테스에 집결한 로마 군단. 주전력인 군단병은 언제라도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트라야누스는 제단에 술만 바치는 약식 제사를 거행한다. 그 배경을 웅장한 '트라야누스 다리'가 메우고 있다.


54) 다리 건너편의 드로베타에서는 인근의 부족장들이 황제 일행을 마중한다. 다키아 왕의 위세가 높았을 때는 다키아 쪽에 붙어야 할지 로마 쪽에 붙어야 할지 망설이던 사람들이지만, 이번만은 그들의 눈에도 로마의 결연한 의지가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55) 줄지어 다리를 건너는 로마 군단병의 행렬. 그리고 군기의 행렬. 각 부대의 선두에 선 백인대장들. 기병대의 선두에 선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다. 원경에는 로마 병사들이 지은 요새가 보인다. 여기까지는 로마군이 제1차 전쟁 때와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6) 제1차 전쟁이 끝난 뒤 다키아에 남겨두고 왔고, 그래서 지난해 다키아군의 공격을 받은 부대와 황제의 재회 하지만 이 병사들도 황제를 따라온 병사들도 하나같이 원기왕성하고 질서정연하게 행군한다. 트라야누스의 결의를 병사들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볼을 부풀리며 피리와 나팔을 부는 군악대가 이 병사들의 진군을 격려한다.


57) 높은 연단 위에서 참모들을 거느리고 연설하는 트라야누스.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의 진지한 표정. 연설하는 황제 뒤에 서 있는 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은 트라야누스의 후임 황제인 당시 30세의 하드리아누스라고 한다.


58) 석조 방벽을 둘러친 견고한 요새 안에서 황제를 둘러싸고 작전회의가 열린다. 야전 지휘 관의 의견이 '참모본부'에 소속된 고급 장교의 의견보다 중시되었다. 언제라도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투구까지 쓰고 진군하는 병사들. 그 저편에서는 말고삐를 쥔 병사들이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를 같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


59) 여기서부터 부대는 둘로 나뉘어 다른 길로 행군한다. 트라야누스가 포위 섬멸 작전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을 보여준다. 군량을 요새 안으로 옮기는 병사들. 그 앞을 진군하는 갑옷 차림의 군단병, 가죽 흉갑을 댄 보조병, 반나체 차림의 게르만 병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화살통을 등에 멘 오리엔트 궁사들. 로마군이 다민족 혼합체였음을 보여준다. 로마 군대는 로마 제국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60) 무장을 한 채 낫을 들고 열심히 보리를 수확하는 군단병. 서기 106년도 어느덧 여름철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보통은 공격당한 쪽이 군량을 비축하기 위해서나 적에게 식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질러 수확을 끝내버리는 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까지 이르는 다키아 땅이 모두 로마 병사로 메워져 있었기 때문일까.


61) 선발대인 보조부대와 다키아군의 첫 번째 접촉. 다음 장면에서는 로마군의 접근을 알고 성채 안에서 격렬한 동요를 보이는 다키아 병사들이 묘사된다. 다키아 성채 앞에서 벌어진 로마 병사와 다키아 병사의 격돌. 다키아 진영도 용감하게 싸우지만, 시체를 밟으며 싸운 백병전은 로마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62) 로마군의 '그물'은 착실히 당겨지고 있었다.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지키기 위해 그 주위에 건설된 견고한 성채 하나를 둘러싼 공방전이 묘사된다. 맹렬히 공격하는 로마 병사, 성벽 위에서 돌덩어리를 던지며 방어하는 다키아 병사. 성벽 밑에는 로마 병사의 화살에 맞아 떨어진 다키아 병사의 시체. 이와 같은 공방전은 다른 요새에서도, 전개되었을 것 이다.


63) 공방전 사이에 참모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시찰하는 트라야누스. 그 너머에 다키아의 성벽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다키아족의 성벽은 짓는 법이 로마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식은 직육면체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반면, 자갈을 채워넣고 그 위 를 널반지나 석판으로 누르고 그 위에 다시 자갈을 채워녕는 식으로 몇 단씩 쌓아올리는 것이 다키아식 축성법이다.


로마의 공성전법 중 하나는, 지름이 30센티미터나 되는 돌맹이를 포탄처럼 쏠 수 있는 공성기로 성벽을 파괴하는 한편,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거북등 진형으로 몸을 지키면서 성벽에 접근한 병사들이 파괴된 곳으로 쳐들어 가는 방법이다. 다음 장면에는 집결한 병사들 뒤로 운반되는 공성기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64) 하지만 다키아 진영도 가만히 앉아서 함락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성 밖으로 몰려 나와 싸움을 건다. 앞장서서 로마군 진영으로 쳐들어오는 다키아 장수에게 로마 병사들도 잠시나마 기가 죽은 것 같다.


65) 성벽 밖에서 벌어진 백병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군은 마침내 성벽 안으로 쳐들 어가는 데 성공한다. 쳐들어가는 군단병과 원호사격이라도 하듯 적에게 덤벼드는 보조병


66) 마침내 성채가 함락되었다. 참모들을 거느리고 입성한 트라야누스 앞에 무릎을 끓은 다키아족 유력자들. 이런 광경은 수도 방위를 위해 세워진 그밖의 많은 성채에서도 되풀 이되었을 것이다. 공격의 고리는 계속 좁혀졌다.


67) 그리고 마침내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가 로마군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 도시의 성벽만은 석재를 쌓아올린 로마식 축성법으로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왠지 성벽을 사이에 둔 공방전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는 다키아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함락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수도를 고스란히 넘겨주기는 싫었던 계 분명하다.


불타오르는 시내에서 절망에 빠진 다키아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이 묘사된다. 두 팔을 벌리고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저주하는 사람. 머리를 감싸안고 땅바닥에 엎드린 사람 침착하게 독약을 마시는 사람. 이미 독이 몸에 퍼져 쓰러진 동료를 안아 일으키려는 사람. 집단자결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그 광경을 치밀하게 묘사해낸 솜씨는 부조의 걸작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집단자결 장면이 계속된다. 이번에는 차림새도 체격도 당당한 장수인 듯한 사람이 독 약이 든 항아리를 옆에 놓고 서 있다.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면서 독약을 달라고 애원하는 병사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수 독배를 건네주는 장수. 이 장수의 배후에는 벌써 독약을 마셨는지 벌렁 쓰러진 젊은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의 유해를 두 팔로 안고 있는 것은 아버지일까.


68) 그러나 도주를 택한 다키아인도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데케발루스 왕이다. 그것은 패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도주였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짜서 추격에 나서 는 로마군의 여유와는 대조적이다.


69) 적의 수도가 함락된 뒤, 트라야누스 앞에 무릎을 끓고 목숨을 구걸하는 다키아인들 로마 병사들은 적이 버리고 달아난 시내에서 전리품을 실어낸다. 다음 장면에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트라야누스에게 대대장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 경례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병사들이 트라야누스에게 '임페라토르!'( 승리자)라는 칭호를 바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70) 승리가 확정되었어도 로마군은 여전히 로마군이다. 군단병들은 또다시 석재를 젊어 지고, 이제 전략 요충이 된 지점에 요새를 짓는다. 나무를 베어 숲속에 길을 내는 공사도 계속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좁은 강에도 급조한 다리를 놓으면서 패잔병을 추격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었다. 적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71) 그렇다고 해서 다키아 병사들이 도망만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야음을 틈타 로마 군 숙영지를 습격하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맞아 싸우는 로마 병사들. 다키아 병사가 용맹하다는 평판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 광경을 숲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데케발루스.


72) 그러나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섰는데도 다키아 쪽의 전황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북쪽으로의 도주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배후를 걱정하면서 도망치는 다키아 병사들. 추격을 계속하면서도 병사들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는 트라야누스.


73) 장면이 바뀌고, 강물 속에 숨겨져 있던 다키아 왕의 보물이 인양되어, 로마로 가져가기 위해 말에 신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74) 숲속에 아군 병사들을 집결시킨 데케발루스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격려 연설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키아 병사들은 이제 왕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사람.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살을 꾀하는 사람. 죽여 달라고 동료 앞에 목을 내미는 사람. 그 부탁을 받고 칼을 쳐드는 사람. 그리고 트라야누스의 진영에서는 투항한 다키아 장로들이 복종을 맹세하면서 목숨을 구걸한다. 다키아 왕국은 무너졌다.


75) 이어지는 것은 데케발루스 왕이 주위에 남은 소수의 기병만 거느리고 계속 도망치는 장면이다. 그 뒤를 쫓는 로마 기병대. 추격 상황은 몇 장면에 걸쳐 묘사된다. 장면이 진행 될수록 창에 찔려 낙마하는 다키아 기병의 수가 늘어난다.


76) 데케발루스를 따라잡아 사방팔방에서 다가가는 로마 기병대. 말을 버린 다키아 왕은 나무 아래 무릎을 끓고 단검을 제 가슴에 들이댄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로마 병사들 무사의 인정이었을까. 하지만 그 직후에 왕은 목이 잘려버렸다.

[데케발루스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92)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포로들과 젊은 여자가 끌려가는 장면. 젊은 여자는 왕의 딸일까. 몸차림이 단정하다.


93) 장교 두 사람이 받쳐든 커다란 은쟁반에 놓인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목이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다. 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왕국을 세우겠다는 데케발루스의 꿈은 20년도 지탱하지 못했다. 패잔병을 사냥하는 로마군. 다키아 쪽에 붙어 로마와 싸운 주변의 소부족들에 대해서도 용서가 없었다.


95)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끌려가는 포로들. 소탕작전은 다키아 북부의 산악지대에까지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방화로 불타오르는 마을과 도시들.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다키아인들. 죽지도 않고 포로가 되지도 않았지만, 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사는 것을 금지당했다. 난민이 되어 고향을 떠나는 노인과 아녀자들의 긴 행렬. 이들에게 끌려가는 소와 돼지, 양, 염소 무리. 서기 106년 여름, 다키아 전쟁은 끝났다.


개선


53세의 승리자 트라야누스의 개선은 수도 로마를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키아 왕국의 멸망은 지난 몇 해 동안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한 적의 소멸을 의미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적인 강화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5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엄청난 양의 왕실 보물은 로마인들에게 오랜만에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는다고 공포했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정복은 제1차와 제2차 전쟁을 합해도 실제 전투 기간은 2년에 불과하다. 로마인들이 받은 인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가 안겨준 인상과 상당히 비슷했다. 다키아 정복은 오랜만에 로마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할 수 있는 승리였고 속주화였다.


다키아를 합병한 트라야누스 시대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어진 시대다. 그래서 공화정 말기에 로마 영토를 크게 넓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흉내내어 트라야누스도 『다키아 전쟁기』를 썼을 것이다. 서기 107년 초에 거행된 개선식도 그 규모와 화려함으로 로마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전후 처리


전쟁 초기에 재빨리 투항하여 복종을 맹세한 다키아인들은 다키아 땅에 그대로 눌러 살 수 있었지만, 항쟁하다 패배한 다키아인들은 모두 카르파티아산맥 북쪽으로 추방되었다. 게다가 5만 명이나 되는 다키아인이 포로나 노예로 고국을 떠났다. 다키아 땅은 거의 전역이 텅 비어버린 셈이다.


텅 빈 다키아 땅에는 주변 지역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것도 한 지방이 아니라 많은 지방에서. 이리하여 다키아 주민은 완전히 교체되었다. 풍습도 언어도 다른 민족의 혼합체가 된 다키아에는 공통어로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침투해 들어간다. 라틴계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루마니아의 언어도 라틴어 계열에 속한다.


트라야누스는 전쟁이 끝난 뒤 도나우강 방위선을 재편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군단기지는 모두 열 군데, 주둔하는 군단도 10개. 4개 속주에는 각각 1명의 원로원급 총독이 상주한다. 주전력인 군단병만 해도 6만 명. 보조병을 합하면 1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도나우강 중류에서 하류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키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르미제게투사는 ‘사르미제게투사의 트라야누스 식민도시(Colonia Ulpia Traiana Augusta Dacica Sarmizegetusa)’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다키아 전쟁에 참전한 만기 제대병들이 대거 이주했다. 다키아 속주의 경제발전에 핵심 역할을 맡고, 여차하면 방위에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는 도나우 강어귀 근처에 있는 아담클리시(Adamclisi)의 언덕 위에 도나우강 너머로 북쪽을 노려보는 승전기념비도 세웠다.

[아담클리시의 전승 기념비 출처 구글 이미지]

공공사업


트라야누스는 서기 107년부터 112년까지 약 6년 동안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제반 상황도 그 일을 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다키아 전쟁을 끝낸 뒤 로마 제국은 막대한 군사비 부담에서 해방되었고, 다키아 지방은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과 은광으로 유명한데다가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가 남긴 엄청난 양의 보물이 재원이 되었다.


또한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키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이들을 도나우 강변에 묶어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결과는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걸친 공공사업 러시였다.


여기서는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트라야누스의 공공사업 가운데 유명한 것만 소개하면, 첫 번째는 ‘트라야누스 목욕탕’이다. 이 목욕탕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 서쪽에 붙어 있는 오피오 언덕 전체에 걸쳐 있다. 바로 남서쪽에는 티투스 황제가 세운 ‘목욕탕’이 있었는데, 이 두 목욕탕이 건설된 덕분에 네로 황제가 세운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본체 부분은 완전히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에 세운 공공건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트라야누스 포룸’일 것이다. 포로 로마노 근처에 세워진 황제들의 포룸 가운데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축물이고, 규모도 가장 크다. ‘트라야누스 포룸’은 웅장할 뿐 아니라 화려하기도 하다. 위용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건축미에도 압도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포룸’ 안에 부조로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원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과거의 어느 황제보다도 큰 ‘포룸’을 짓고 싶다는 트라야누스의 소망을 건축가 아폴로도로스가 실현한다. 퀴리날레 언덕 능선이 저지대로 내려오는 부분을 모조리 깎아내는,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방책을 단행한 것이다. 어쨌든 그런 방법으로 아우구스투스 포룸보다 다섯 배나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웅장하고 화려했던 ‘트라야누스 포룸’의 전모와, 이 포룸의 건설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황제들의 포룸’의 전모를 1900년이 지난 오늘날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우선 무솔리니가 독일인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가능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군사 퍼레이드를 히틀러에게 보여주고 싶은 일념으로 개설한 넓은 도로(무솔리니가 ‘황제들의 포룸 거리’(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라고 명명)가 ‘황제들의 포룸’을 양분해버렸다. 오른쪽에 포로 로마노, 왼쪽에 황제들의 포룸, 정면에 콜로세움이 바라다보이는 도로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다.


[무솔리니 가도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밖의 공공사업


실용적인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실용적이라고 평가받는 트라야누스인 만큼, 그가 시행한 공공사업은 모두 실용적인 것뿐이다. 수도 로마 이외의 지역을 살펴보면, 우선 '오스티아 항만 공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수도 로마 근처에 대형 선박이 마음놓고 기항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사람은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다.


이 항구도 반세기 뒤인 트라야누스 시대에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개조할 필요가 생겼다. 트라야누스(또는 아폴로도로스)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항구 안쪽에 육각형의 후미 모양 선착장을 신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육각형의 각 변은 모두 배를 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선착장을 따라 창고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로써 바람을 완벽하게 막아주는 대피항이 되는 동시에 강을 따라 떠내려오는 토사의 퇴적도 피할 수 있고, 많은 배와 물동량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항구가 된다.

트라야누스는 항구를 세 개 더 만들었다. 첫 번째는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이다. 지중해는 풍향이 계속 바뀌었고, 당시 조난사고의 주요 원인은 폭풍이었기 때문에, 거센 바람을 무릅쓰고 오스티아 항구까지 와야 하는 선박들에 피난처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타라키아(오늘날의 테라치나) 항구에는 대피항 이외에 하역항의 역할도 주어진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아우렐리아 가도 연변의 켄툼켈라이(오늘날의 치비타베키아)는 트라야누스가 처음 개설한 항구다.


아피아 가도의 복선화


또한 효율성을 중시한 트라야누스는 로마 역사와 나란히 걸어왔다 해도 좋은 전통에 손을 대는 것조차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로마인들이 ‘가도의 여왕’이라고 부른 아피아 가도를 복선화한 것이다. 서기 107년 당시 트라야누스가 생각한 것은 베네벤토에서 브린디시까지의 구간을 복선화하는 것이었다.


새 가도는 베네벤토에서 아피아 가도와 헤어져, 동쪽의 아드리아해를 향해 나아가다가 카누시움(오늘날의 카노사)을 거쳐 브린디시에 이른다. 이로써 로마는 오리엔트로 가는 간선도로를 두 개 갖게 되었다. 또한 발레리아 가도를 통해 해변을 따라 브린디시로 남하하는 길을 합하면, 오리엔트로 가는 길은 세 개가 된 셈이다.

아피우스와 트라야누스의 가도라는 뜻의 ‘비아 아피아-트라야나’의 기점이 된 베네벤토에는 가도 개통을 기념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아치형의 개선문은 가도의 장식이다. 그리고 그 가도를 건설한 사람의 업적을 선전하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베네벤토의 개선문에는 육영자금(알리멘타)을 정책화한 트라야누스가 아이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알칸타라 다리


본국 이탈리아 외에서의 공공사업 중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라면 역시 에스파냐의 ‘알칸타라 다리’일 것이다. 알칸타라를 흐르는 타호강(타구스강)에 놓인 이 다리는 오늘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접경 근처에 있는데,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시대에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지는 간선도로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명한 이 다리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이 아니다. 비문에 따르면 건설자는 율리우스 라케르이고, 다리를 건설할 때 트라야누스한테 받은 원조에 감사한다고 되어 있다. 원조란 자금 지원이 아니라 엔지니어라도 보내준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동향 출신 황제를 본받아 공공사업에 손을 대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진심으로 환영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 시대는 공공사업 러시로 들끓게 되지만, 공공 목적의 사업이라면 덮어놓고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티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소플리니우스가 푸르사(오늘날 터키의 부르사)에 목욕탕 건설을 허가할지 말지를 편지로 문의하자, 트라야누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 건설비가 푸르사시의 재정에 지나친 부담을 줄 염려가 없고, 완공된 뒤의 운영비도 보증할 수 있다면, 공중목욕탕 건설은 허가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공사를 발주한 쪽과 수주한 쪽 사이에 부정이 저질러진 것을 의심했다. 로마는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공공사업을 할 때 발생하는 부정에 대해서는 항상 감시의 눈을 번득여야 했다. 또한 지나치게 고지식한 부하 플리니우스에게도 이따금 불만을 터뜨렸다. 수도와 건축 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비티니아 속주 총독에게 황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건축가가 부족할 턱이 없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없는 속주는 제국 안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에서 전문가를 파견해달라니. 일부러 그리스에서 전문가를 불러들여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 로마의 현재 실정이다.”


플리니우스


속주 통치가 잘되느냐는 제국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속주 총독은 중앙인 로마에서 파견되었다. 속주민은 이 총독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의무만 부과하고 권리를 주지 않으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로마는 총독의 통치에 불만이 있으면 중앙에 고발할 수 있는 권리를 속주민에게 인정했다.


원고인 속주민을 대리하여 검사 역할을 맡는 것은 변호사를 겸업하고 있는 소(小)플리니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원로원 의원이다. 원로원은 황제와 협력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기관인 이상, 속주민의 불만 원인을 밝혀내는 것도 원로원 의원의 책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도 공무였다.


황제들을 그토록 헐뜯은 타키투스도 속주 총독의 ‘청렴도’는 공화정 시대보다 제정 시대에 훨씬 높아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황제들이 이런 재판을 중시하여, 몸소 법정에 나가 재판 과정을 참관했기 때문이다. 재판 결과는 피고의 동료이기도 한 원로원 의원들의 표결로 결정된다.


소아시아 서북부의 비티니아 속주에는 유독 속주민의 고발이 너무 많았는데, 트라야누스는 이는 파견되는 총독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속주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비티니아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였다. 즉 원칙적으로 황제의 관여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필요하다면 원로원 속주도 잠정적으로 황제 속주로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트라야누스는 황제에게 인정된 이 권한을 활용한다. 일시적이나마 비티니아 속주는 황제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이 속주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밝혀내어 해결할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총독의 관명은 ‘프로콘술’이 아니라 ‘레가투스’가 된다. 트라야누스는 그 총독에 소플리니우스를 임명한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 통치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는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왕복 서한』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이 편지들이 쓰인 것은 소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에 체류한 서기 111년 가을부터 113년 봄까지 1년 반이다. 당시 플리니우스의 나이는 쉰 살 안팎, 트라야누스 황제는 50대에서 60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해당한다.


플리니우스가 황제 앞으로 보낸 편지는 대개 ‘도미네’(Domine)로 시작된다. 도미네란 ‘나를 지배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이 기독교에서는 ‘신’이 되고 따라서 ‘주여’로 번역된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주군’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왕복 서한』에서 후세에 가장 유명해진 부분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두 사람의 응답이다. 당시 속주 총독에게는 속주민에 대한 사법권도 부여되어 있었다.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저는 기독교도로 고발된 자들에게 일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왔습니다.
그들에게 너는 기독교를 믿느냐고 세 번까지 묻습니다. 기독교도라고 답한 자에게는, 위증하면 고문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확인시킵니다.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는 관계없이, 완고하고 무분별한 것만으로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기독교도라고 주장한 자들 중에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도 있는데, 그들은 황제에게 항소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로마로 송환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영향 탓인지, 기독교도에 대한 고발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양상도 달라졌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의 이름을 열거한 익명 고발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첫째, 고발당한 자라도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언명한 자, 저의 첫 번째 심문에서 신들에게 기원하고 주군의 초상을 경배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매도한 자는 모두 무죄 방면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법정에는 초상과 거기에 바칠 향료며 포도주도 준비시켰습니다.

둘째, 고발당한 자라도 처음에는 기독교도라고 인정했다가 나중에 번복한 자, 전에는 기독교도였으나 지금은 기독교도가 아닌 자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이 3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관계없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물론 이 부류에 속하는 자를 무죄 방면할 때는 우리의 신들을 경배하고 기독교의 신을 매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주군의 생각을 알 때까지는 기독교와 관련된 재판은 모두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재결을 청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고발당하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둘째, 기독교도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나 성별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줄어들기보다는 계속 늘어날 추세입니다.

기독교도로 여겨지는 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단순히 새로운 것에 매혹되어 기독교에 귀의한 데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 중에서 후회하고 기독교를 버린 자에게는 처벌을 면제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트라야누스가 플리니우스에게

친애하는 세쿤두스여, 기독교도로 고발당한 자들에 대한 그대의 법적 대처는 참으로 적절했다. 이런 문제를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규범에 따라 처리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도가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들을 색출해내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식으로 고발되어 자백한 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신앙을 버린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신들을 경배하는 마음을 명확히 보이고, 후회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명확해지면 과거가 어떻든 처벌을 면제해줄 만하다.

또한 익명 고발은 어떤 법적 가치도 없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 우리 시대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일신교도라도 로마에 대한 반항을 거듭하고 있던 유대교도와 달리, 기독교도는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교도와는 분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깊고 조용히 잠행하는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신교와 일신교의 차이는 종교보다 문명관의 차이다. 이 차이에 기인하는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대립은 서서히, 그러나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사인으로서 트라야누스


기독교도 입장에서 보면 로마 황제야말로 사악하고 타락한 로마 사회의 상징이겠지만, 트라야누스한테서는 사악이나 타락을 털끝만큼도 찾아낼 수 없다. 입신출세한 인물에게는 거기에 빌붙어 단물을 빨아먹는 것밖에 생각지 않는 육친이나 친족이 몰려들게 마련이지만, 트라야누스에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자식을 얻지 못한 트라야누스에게는 다섯 살 위인 누나 마르키아나가 있었다. 남매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동생이 황제가 된 뒤에는 누나도 황궁에서 함께 살게 되지만, 신분을 과시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생활도 수수해서 집안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마르키아나한테는 마티디아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열다섯 살 아래인 이 조카를 무척 귀여워했지만 이 여자도 어머니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화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에 동거하고 있던 시누이 모녀와 사이좋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어질고 현명한 아내지만, 남프랑스 속주의 주요 도시 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랐다. 그리스 철학도 화제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교양이 있었고, 교양에서는 남편인 트라야누스를 훨씬 능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여인도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여자의 전형이었다.

황제를 둘러싼 세 여인이 이렇게 수수하면, 그녀들을 무시할 수 없는 로마의 상류층 부인들도 수수해지는 게 당연하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부인들처럼 높이 땋아올린 화려한 머리 모양은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누나와 질녀의 남편이나 아내의 친척들에게 전혀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남의 청탁을 들어주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자기 일에서는 공명정대함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생활이 지극히 건전하고 결점도 이 정도밖에 안 되면, 전기작가는 곤란해진다. 그 덕분에 이 ‘지고의 황제’는 전기가 쓰이는 행운만은 누리지 못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채택했는데도 ‘지고의 황제’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정말로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하게 되었을 때 받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한 때는 언제일까. 다키아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에게 그것은 과거의 어떤 황제도 실현하지 못한 일을 해냈을 때를 의미했다.


파르티아 문제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결국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의 관계다. 또한 로마인에게 ‘파르티아 문제’는 언제나 아르메니아 문제에서 파급된다. 그것은 파르티아인이 아르메니아를 자국의 권역에 속해 있는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파르티아 궁정에서도 아르메니아 왕을 파르티아 왕에 버금가는 지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파르티아 왕은 볼로게세스에서 파코루스로 바뀌어 있었다. 파코루스 왕은 티리다테스가 죽자마자 아르메니아 왕위에 제 아들인 악시달레스를 앉힌다. 그런데 서기 110년에 파코루스가 죽었다. 파르티아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파코루스의 동생 오스로에스였다. 즉위한 지 2년도 지나기 전에 오스로에스는 조카인 악시달레스를 무능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파르타마실리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임명했다.


파르타마실리스가 파르티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자, 악시달레스 왕은 로마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한테 한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아르메니아 왕을 갈아치운 것은 평화협정에 위배되는 행위이기도 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번 사태를 파르티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다. 그가 생각하는 근본적 해결이란 군사력으로 파르티아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파르티아 원정


서기 113년 10월 27일, 트라야누스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황제는 로마를 떠났다. 그를 수행한 장수들의 면면은, 한 사람이 빠진 것만 빼고는 다키아 전쟁 당시와 똑같았다. 그 한 사람은 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출신이고 동년배에다 근무지도 거의 같고, 그래서 친구이자 오른팔이었던 리키니우스 술라였다. 그는 다키아 전쟁이 끝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파르티아 원정에 투입된 병력은 통틀어 10만 명이나 된다. 전선기지는 시리아 속주의 도읍인 안티오키아다. 그 시절 로마 제국은 전략 요충마다 설치된 요새 설비며 군량 보급 등 모든 것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의 동맥이라 해도 좋은 가도망도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정비된 상태였다. 흑해에서 시리아를 거쳐 홍해에 이르는 제국의 방위선은 이미 완성되어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 땅에 상륙한다. 가는 길에 들른 아테네에는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의 사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절은 오스로에스를 대신하여, 파르타마실리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는 데 대한 허가를 트라야누스에게 요청했다. 트라야누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동쪽으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리스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간 황제 일행이 소아시아 남안을 지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는 서기 113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기 114년 봄, 트라야누스는 38세의 하드리아누스에게 안티오키아 방위를 맡기고 이곳을 떠난다. 멜리테네에서 로마 가도를 통해 계속 북상하여 사탈라(오늘날 터키의 케르키트)에 이른다. 이곳도 제15군단의 기지다.


트라야누스는 주변 국가의 왕과 족장들을 이곳으로 소집했다. 모두 로마 황제의 소집에 응했지만, 아르메니아 왕 파르타마실리스만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전군에 명을 내려 에레게이아(오늘날 터키의 에르주룸)로 진군할 것을 지시했다. 에레게이아는 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의 접경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아르메니아 영토 안으로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파르타마실리스는 에레게이아에서 트라야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르타마실리스는 변명했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것은 사탈라로 가는 도중에 악시달레스 군대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다음, 파르타마실리스는 쓰고 있던 왕관을 벗어서 트라야누스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대답했다. 네로와 맺은 협정에는 로마 황제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파르티아 왕이 멋대로 아르메니아 왕을 결정해도 좋다는 말은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고. 그러고는 파르타마실리스와 수행원들에게 물러가라고 말했다. 파르타마실리스 일행은 로마군 숙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몰살당했다.


파르타마실리스가 살해된 지금, 로마도 파르티아도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면 대결에 돌입하게 된다. 트라야누스의 명령을 받은 장수들은 각자 맡은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에는 벌써 이 일대의 주요 도시인 니시비스(오늘날의 누사이빈)가 함락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오늘날 터키·시리아·이라크의 접경 지역)는 모두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도 본격적인 회전 한 번 치르지 않고 제패한 것이다. 승전보를 접한 수도 로마 시민들은 열광한다. 트라야누스는 그동안 사양했던 ‘지고의 황제’ 존칭을 받겠다고 원로원에 통보했다.

[누사이빈 출처 구글 이미지]

전쟁 2년째인 서기 115년 봄부터 가을까지 로마군은 동쪽과 남쪽으로 제패의 고리를 넓혔다. 트라야누스 자신도 티그리스강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제패가 끝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이 경계선이 정착되면,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은 흑해에서 시리아를 지나 홍해에 이르는 선이 아니라, 카스피해에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홍해의 출구인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선이 된다.


일찍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번성했던 지방의 완전 제패를 목표로 내건 서기 116년, 봄이 오기를 기다려 안티오키아를 떠난 트라야누스는 남하해온 군대를 이끌고 우선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강에 이른다. 여기서 강을 따라 남하하여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향한다.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는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도망쳤다.

[크테시폰의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한편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원정했을 때보다 세 배나 나이가 많은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는 대신 남쪽으로는 내려갔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흘러드는 페르시아만에 족적을 남긴 것이다. 로마 황제들 가운데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페르시아만에 도달한 것으로 만족했는지,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겨울을 나기로 결정한다. 유프라테스강을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 거기서부터는 로마 가도를 따라 서쪽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일제히 봉기했다.


페르시아계의 게릴라 전술


파르티아 진영은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파르티아 왕국이 존망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라기보다 토호들 자신이 저마다 존망의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고 봉기한 것이다. 로마군은 제패한 뒤 요새화한 도시에 갇힌 채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군단장이 게릴라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전사하는 피해까지 입었다. 안티오키아의 트라야누스에게 들어오는 보고서들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봉기의 불바다로 변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서는 아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을 트라야누스 휘하에서 치른 장수들은 로마 제국의 명예를 위해 대반격을 결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모양이지만, 트라야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려져 있는 것은 그때까지 병이라고는 몰랐던 황제가 병에 걸려 쓰러졌다는 것뿐이다. 게다가 63세가 된 트라야누스의 걱정거리는 파르티아만이 아니었다.


유대계의 반란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제패하고 있던 서기 115년,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스계 주민과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유대는 로마 제국 안의 속주다. 로마인들에게 속주민의 반란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배후에서 등을 찌르는 배신행위로 보였다.


유대 땅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은 이집트로, 키레나이카로, 키프로스섬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휘하에 2개 군단을 두고도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아서 반란을 확대시킨 이집트 속주 장관은 해임되고, 대신 파견된 젊은 무장 투르보의 활약과 그리스계 주민의 협력으로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키프로스섬의 반란은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한 제7군단을 보낸 뒤에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추방되었다. 이 키프로스에는 그 후 유대인이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이었다.


죽음


117년의 봄이 찾아왔는데도,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해 7월 말에 안티오키아를 떠나긴 했지만, 행선지는 로마였다. 아내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가 중병에 걸린 황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황제를 태운 배는 서쪽을 향해 떠났다. 파르티아 원정군 총사령관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임명되었다.


소아시아 남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트라야누스의 병세가 급변했고, 가까운 셀리누스(오늘날의 가지파샤) 항구에 배를 대고 병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기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 황제는 눈을 감았다. 64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20년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이 끝난 뒤, 아내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와 근위대장 아티아누스가 유골을 안고 로마로 여행을 계속했다. 대망을 가슴에 품고 동방으로 떠난 뒤 4년 세월이 지났다. 귀국한 황제를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장례식이 아니라 개선식으로 맞이했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 위에 안치된 것은 유골을 담은 항아리였다.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은 869년의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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