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117년 8월 9일~138년 7월 10일)
8월 9일,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양자로 맞아들여졌다는 통고를 안티오키아에서 받는다.
8월 9일, 셀리누스에서 황제가 죽었다.
8월 11일, 동방군단의 장병들이 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로 에워싸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나는 아티아누스에게 브린디시까지 와서 그가 한 일을 해명하라고 엄중하게 명령했다. 그는 항구 근처의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쪽에 면해 있는 그 방은 일찍이 베르길리우스가 죽은 방이라고 한다. 그는 방 입구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마중을 나왔다. 통풍을 앓고 있었다. 단둘이 남게 되자 내 입에서는 비난과 질책이 쏟아져나왔다.
온화하고 이상적인 통치를 할 작정이었는데, 깊이 생각지도 않고 저질러진 네 사람의 처형으로 치세가 시작되다니!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은 본보기로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 해도 적법성이 결여된 형태로 처형한 것은 비난의 표적이 될 게 뻔하다. 이번의 권력 남용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관대하고 공정하게 행동해도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비판의 구실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 미덕조차도 가면으로 간주되어 폭군의 전설을 낳는 이유가 되고, 역사상으로도 나를 떠나지 않고 줄곧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도 고백했다. 나도 이제는 인간성이 지닌 잔혹함과 무관할 수는 없지 않을까. 범죄는 범죄를 부른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나도 그 예가 되지 않을까. 마치 피맛을 본 야수처럼 충성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그 노인이 벌써 그 충성심에서 해방된 게 아닐까. 그리고 나에게서 약점을 보았다고 믿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나를 위한다는 구실로 니글리누스나 팔마와의 오랜 불화를 청산한 게 아닐까. 평화 확립이라는 내 과업을 위험에 노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서, 나의 로마 귀환을 우울하고 어두운 것으로 만들 준비까지 해주었느냐고 질책했다.
노인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붕대를 감은 다리를 옆에 있는 발받침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이야기하면서 그 아픈 다리에 무릎덮개를 덮어주었다 그는 내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어려운 암송을 그런대로 무난히 해내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하의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대처할 작정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 일당이 폐하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증거를 모으는 것은 간단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별문제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숙청을 수반하지 않는 정권교체는 있을 수 없다.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역할이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여론이 희생자를 요구한다면 나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은 없다.
그는 이미 이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었고, 나에게 그 해결책을 채택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가 있으면, 좌천당해도 추방 당해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아티아누스는 나에게 아버지 대신이고 충실한 인도자였다. 나는 이따금 그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곤란한 일이 있을 때는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처음으로 나는 깨끗이 수염을 깎은 온화한 얼굴과 지팡이 위에 조용히 겹쳐놓은 주름투성이의 두 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서는 나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병약한 아내, 이미 결혼한 두 딸, 그리고 외손자들. 이 손자들에게 그는 자신이 그러했듯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미식에 대한 기호, 그 리스제 카메오와 젊은 무희들에 대한 취미.
그래도 그에게는 이런 것들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먼저였다. 게다가 그것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았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나를 돌보고 키우는 것, 나를 위해 애쓰 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장래의 꿈만 우선시켰다. 나에 대한 그의 성실함은 예사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성실함이 기적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헌신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것.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그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는 지위를 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예상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석에서 충고 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오랜 친구에게 보답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 충고가 예리한 정치감각에 뒷받침되어 있고, 달리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그가 더 많은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몇 달 동안 은둔생활을 시킨 뒤, 나는 그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는 데 성공했다. 기사계급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그는 가족이나 일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유복하긴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평온한 노년을 보냈다. 나는 알바노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을 자주 찾아갔다. 이제 그 일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회전을 앞둔 전날 밤의 알렉산드로스처럼,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공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티아누스도 제물로 꼽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명의 집정관 경험자를 살해한 것은 결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황제 암살 음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긴급 대처를 명령하긴 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오해한 근위대장이 독단으로 살해를 강행했다. 그래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106~43 BC)는 엘레우시스 밀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당신들 아테네인들이 가져다와서 인간의 삶에 기여한 많은 뛰어난 제도들과, 참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도들 중에서, 나의 견해로는, 그 어느 것도 [엘레우시스] 밀교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엘레우시스] 밀교 덕분에 우리 [로마인]들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삶의 양식을 벗어나서 교육 받고 품위를 지닌 문명의 상태로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레우시스] 밀교의 의식들은 "비전들(initiations)"이라고 불리는데, 비전, 즉 비법 전수라는 말에 합당하게 진실로 우리 [로마인]들은 [엘레우시스] 밀교의 의식들로부터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으며, [현생에서]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뿐만 아니라 더 나은 희망을 가지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 — 키케로 《법률론》 II, xiv, 36
<시와 문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수학과 기하학, 회화에도 꽤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악기 연주와 노래도 좋아해서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악기와 노래를 연습할 때도 남몰래 숨어서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노래한 사랑의 시도 몇 편 지었다. 무예에서는 제일급의 달인이었다. 검투사가 사용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성격은 복잡했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요컨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제국 전역을 순행하고, 게다가 호우나 혹한이나 혹서를 무릅쓰고 여행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건강을 해쳐서 병상에 몸져눕고 말았다.>
제3부 아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재위 서기 138년 7월 10일~161년 3월 7일)
(1) 수도 로마에 머무는 편이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정책을 결정하는게 편리하다.
(2) 황제가 순행할 때 순행지인 도시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비용이 절약된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가 계속 보수를 받는 것만큼 국가에 해롭고 헛된 행위는 없다.”
“현인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