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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Dec 02. 2024

로마인 이야기 9권 (2)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서기 117년 8월 9일~138년 7월 10일)


소년 시절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는 서기 76년 1월 24일,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같은 도시 태생인 트라야누스보다 스물세 살 아래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대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퇴역병을 이주시켜 세운 것이 이탈리카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도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공을 세운 트라야누스의 아버지가 천거한 덕분이라고 한다. 나중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에게 외사촌동생이었으니까, 조카가 외삼촌의 연줄로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상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하드리아누스도 열 살 때까지는 에스파냐 남부의 시골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후견인으로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정해 두었다. 당시 트라야누스는 33세. 군단에 근무하는 대대장에 불과했고, 12년 뒤에 황제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 존재였다.

그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두 후견인에 의해 로마에서 중등교육을 받는데, 이 시절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그리스 아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연약해 질 것을 걱정한 두 대부에 의해 다시 이탈리카로 돌려 보내졌는데 이번에는 사냥에 심취했다고 한다. 3년 후 대부들의 부름을 받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청년 시절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직업도 군단에 소속된 장교였다. 맨 먼저 파견된 곳은 먼 판노니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제2군단이다. 군단기지는 오늘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방위선의 요충 가운데 하나다. 수도에서 느닷없이 최전선으로 보내진 것이다. 2년쯤 뒤에 전속 명령을 받았다. 이번 임지는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였다.


이곳에 근무하고 있을 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했다. 제위는 네르바가 물려받았다. 서기 96년은 어수선하게 지나갔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97년 10월, 네르바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두 달 뒤인 98년 1월 27일, 노령이었던 네르바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황제열전』의 저자에 따르면, 그 소식을 트라야누스에게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스물두 살의 하드리아누스였다고 한다.


그는 서기 101년에 회계감사관에 당선되어 ‘명예로운 경력’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스물다섯 살에 회계감사관이니까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신부인 사비나(Vibia Sabina)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이다. 즉 황제의 생질손녀를 아내로 맞이한 셈이다.

[비비아 사비나의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서기 101년부터 102년까지 계속된 제1차 다키아 전쟁에 하드리아누스는 도중에 참가한 모양이다. 이 전쟁에서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책임 있는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기록에 남을 만한 전공도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그로부터 3년 뒤인 서기 105년부터 106년까지 계속된 제2차 다키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에게 중책을 맡긴다. 본(Bohn)에 기지를 둔 제1군단의 군단장에 임명하고, 휘하 군단과 함께 다키아 전쟁에 참전시킨 것이다.

[독일 본 출처 구글 이미지]

황제로 가는 길


다키아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트라야누스를 따라 로마에 개선한 하드리아누스는 법무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명예로운 경력’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셈인데, 지위가 높아진 만큼 ‘혜택받은 자의 사회 봉사’가 요구된다. 로마에서는 검투시합이나 경기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거기에 드는 400만 세스테리티우스는 후견인인 대부 트라야누스가 대신 내주었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트라야누스 외에도 아티아누스라는 대부가 또 한 명 있었는데, 트라야누스는 제위에 올랐을 당시 이 아티아누스(Publius Acilius Attianus)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와 근위대장이라는 두 실력자를 대부로 둔 몸이 되어 있었다.


법무관 임기를 마치면 ‘전직 법무관’(프로프라이토르)이라는 관명으로 속주 총독에 취임할 자격을 갖게 된다. 하드리아누스가 부임한 곳은 도나우강 전선의 먼 판노니아 속주였다. 다키아족이 멸망하자 이제 도나우강 북쪽에서 가장 큰 세력은 자기들이라고 과신하고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침입해온 사르마티아족을 격퇴한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이끄는 제2군단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듬해에 먼 판노니아에서 귀국한다.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했기 때문이다. 집정관은 원로원에서 선거로 선출하지만, 황제가 추천하면 출마는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른두 살에 집정관이라면 발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반대파와 그를 인정하는 지지파의 대립이 분명해진 모양이다. 반대파는 트라야누스를 도와서 황제 자리에 앉혔다고 자처하는 장군들. 지지파는 트라야누스에게 등용되었지만 아직 군단장급에 머물러 있는 젊은 세대다.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태도가 모호했던 것은 이 두 파벌의 대립을 걱정하는 그의 심사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이런 걱정만으로 인사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기 113년 가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는 트라야누스 일행 중에는 하드리아누스의 모습도 끼어 있었다.


황후 플로티나


서른일곱 살에 제일선으로 복귀한 것은 황후 플로티나가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황제열전』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참가하게 되긴 했지만, 제2차 다키아 전쟁 때처럼 군단을 이끌고 실전에 참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가 그를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기대를 걸었던 파르티아 전쟁은 그가 꿈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끝났다. 그로 인한 마음고생 때문인지 황제는 병으로 쓰러졌고, 아내와 질녀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수도 로마로 돌아갈 것을 승낙했다. 트라야누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 하드리아누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전쟁을 계속하라고 명령한 뒤, 안티오키아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서기 117년 8월 9일, 제국 전체로부터 ‘지고의 황제’로 칭송받은 트라야누스는 64년의 생애를 마쳤다. 플로티나 황후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발표한다. 이것이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발단이 되었다.


즉위의 수수께끼


트라야누스는 정말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에 죽었을까. 황제의 죽음을 확인한 플로티나 황후가 그 사실을 잠시나마 덮어둔 채, 서둘러 안티오키아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사람을 보내 알리고, 하드리아누스가 휘하 군단의 충성 서약을 받아 즉위를 기정사실로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제의 죽음을 공표한 것은 아닐까.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의심을 품은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8월 9일,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양자로 맞아들여졌다는 통고를 안티오키아에서 받는다.
8월 9일, 셀리누스에서 황제가 죽었다.
8월 11일, 동방군단의 장병들이 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로 에워싸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라틴어에 ‘인 엑스트레미스’(in extremis)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 그대로 쓰이는 말인데, ‘마지막 순간에’라는 뜻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은 그야말로 ‘인 엑스트레미스’로 이루어졌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 원로원에 황제로서는 최초의 친서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우선 원로원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군단의 충성 서약을 받은 것을 사과하고, 제국 통치를 잠시라도 공백 상태에 두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변명하고 있다. 사실 안티오키아와 로마 사이를 왕복하는 데에는 최소한 두 달이 걸렸다. 여기에는 원로원도 동감이었는지,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를 간단히 승인했다.


황제로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라는 공식 이름과 함께 하드리아누스의 치세, 로마인의 표현에 따르면 ‘황제로서의 날들’(dies imperi)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중 하나는 유대 문제였다. 2년 전인 서기 115년에 일어난 유대교도의 반란은 아직도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이미 유대에 파견되어 있던 용장 투르보에게 조속히 진압하라고 명령이 떨어진다. 또 다른 문제는 브리타니아에서 폭발한 원주민 반란이다. 이들의 거주구역은 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만나는 일대였던 모양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령관을 파견할 필요는 없었다. 브리타니아에는 이미 3개 군단이 상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제는 북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아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그것은 마우리타나 기병들이 주도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의 대장인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마음 속에 싹튼 불만과 분노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문제는 도나우강 북쪽의 사르마티아족이 또다시 로마 영토를 위협한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도 이 문제만큼은 자기가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속주 총독으로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이미 겪어 본 상대라는 것이 그가 직접 나선 이유였다. 여기에는 트라야누스가 지시했던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참여한 도나우 군단을 철수시키면서 비난을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컨대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에 시급히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파르티아 전쟁을 어떻게 끝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하드리아누스의 생각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국의 안전을 지키려면 평화는 필수불가결하고,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장래를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고 어느 영국 연구자가 말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바로 그렇게 행동했다.


사르마티아족 반란 평정


동방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가지 않고 그해 11월에 군단을 이끌고 바로 서방으로 떠났다.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간다.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하류에는 북쪽으로 돌출한 형태의 다키아 속주와 흑해 사이에 록솔라니족의 거주지역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슬라브계로 여겨지는 이 부족의 족장과 회담하여 동맹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18년에 도나우강 중류 지역으로 이동한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와 먼 판노니아 속주 사이에 살고 있는 야지게스족과 동맹관계를 굳히기 위한 교섭에 들어간다. 봄에 황제는 도나우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 먼 판노니아 속주에 이르렀다.


여기서의 상대인 사르마티아족한테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야만족을 도나우강 북쪽으로 멀리 쫓아내는 격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부다페스트의 총독 관저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마우리타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도나우강으로 달려온 용장 투르보에게 지휘를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


도나우강 전선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근위대장인 아티아누스가 보낸 밀서를 받았다. 이 친서에는 선제의 중신 네 사람이 하드리아누스 암살을 모의하는 기미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 하비디우스 니글리누스 :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속주 초대 총독에 임명한 사람.

- 코르넬리우스 팔마 : 아라비아(오늘날의 요르단) 제패의 공로자.

- 푸블리우스 켈수스 : 트라야누스 휘하의 장군. 역시 두 번 집정관을 지내는 명예를 얻었다.

- 루시우스 퀴에투스(Lusius Quietus) : 북아프리카 키레나이카(오늘날의 리비아) 출신의 장군.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활약했다. 사실상 트라야누스의 부장.

[루시우스 퀴에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제국의 안전을 지키려면 평화는 필수불가결하고 그 평화를 확립하려면 위험도 무릅쓰기로 결심한 하드리아누스에게 ‘위험’은 바로 트라야누스 시절과는 전혀 다른 그의 정치적 방침에 대한 선제 시대 중진들의 반발이었다. 밀서를 읽은 하드리아누스도 몰래 답장을 보내, 당장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근위대장 아티아누스도 근위대를 보내 ‘당장 대처’했다.


니글리누스는 별장이 있는 북이탈리아의 파엔차에서, 팔마도 역시 중부 이탈리아의 테라치나에 있는 별장에 머물고 있다가 살해되었다. 켈수스가 살해된 곳은 남부 이탈리아의 바이아에 있는 별장이었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행길에 살해되었다.


원로원은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체포하여 재판을 거친 다음 사형에 처한 게 아니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하자마자 원로원의 유력자 네 명을 살해한 것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과거의 악몽을 상기시켰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년 같은 공포정치가 또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에는 이 사건에 대한 변명이 적혀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는 죽이라고까지는 명령하지 않았는데, 아티아누스가 멋대로 죽였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여류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역사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Mémoires d’Hadrien)에서도 그 내용을 따르고 있다(아래 원문 인용). 이 소설은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늙은 하드리아누스가 젊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앞으로 쓴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와 ‘하드리아누스의 회상’ 출처 구글 이미지]
<나는 아티아누스에게 브린디시까지 와서 그가 한 일을 해명하라고 엄중하게 명령했다. 그는 항구 근처의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쪽에 면해 있는 그 방은 일찍이 베르길리우스가 죽은 방이라고 한다. 그는 방 입구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마중을 나왔다. 통풍을 앓고 있었다. 단둘이 남게 되자 내 입에서는 비난과 질책이 쏟아져나왔다.

온화하고 이상적인 통치를 할 작정이었는데, 깊이 생각지도 않고 저질러진 네 사람의 처형으로 치세가 시작되다니!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은 본보기로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 해도 적법성이 결여된 형태로 처형한 것은 비난의 표적이 될 게 뻔하다. 이번의 권력 남용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관대하고 공정하게 행동해도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비판의 구실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 미덕조차도 가면으로 간주되어 폭군의 전설을 낳는 이유가 되고, 역사상으로도 나를 떠나지 않고 줄곧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도 고백했다. 나도 이제는 인간성이 지닌 잔혹함과 무관할 수는 없지 않을까. 범죄는 범죄를 부른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나도 그 예가 되지 않을까. 마치 피맛을 본 야수처럼 충성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그 노인이 벌써 그 충성심에서 해방된 게 아닐까. 그리고 나에게서 약점을 보았다고 믿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나를 위한다는 구실로 니글리누스나 팔마와의 오랜 불화를 청산한 게 아닐까. 평화 확립이라는 내 과업을 위험에 노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서, 나의 로마 귀환을 우울하고 어두운 것으로 만들 준비까지 해주었느냐고 질책했다.

노인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붕대를 감은 다리를 옆에 있는 발받침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이야기하면서 그 아픈 다리에 무릎덮개를 덮어주었다 그는 내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어려운 암송을 그런대로 무난히 해내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하의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대처할 작정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 일당이 폐하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증거를 모으는 것은 간단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별문제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숙청을 수반하지 않는 정권교체는 있을 수 없다.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역할이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여론이 희생자를 요구한다면 나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은 없다.

그는 이미 이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었고, 나에게 그 해결책을 채택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가 있으면, 좌천당해도 추방 당해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아티아누스는 나에게 아버지 대신이고 충실한 인도자였다. 나는 이따금 그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곤란한 일이 있을 때는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처음으로 나는 깨끗이 수염을 깎은 온화한 얼굴과 지팡이 위에 조용히 겹쳐놓은 주름투성이의 두 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서는 나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병약한 아내, 이미 결혼한 두 딸, 그리고 외손자들. 이 손자들에게 그는 자신이 그러했듯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미식에 대한 기호, 그 리스제 카메오와 젊은 무희들에 대한 취미.

그래도 그에게는 이런 것들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먼저였다. 게다가 그것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았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나를 돌보고 키우는 것, 나를 위해 애쓰 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장래의 꿈만 우선시켰다. 나에 대한 그의 성실함은 예사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성실함이 기적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헌신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것.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그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는 지위를 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예상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석에서 충고 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오랜 친구에게 보답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 충고가 예리한 정치감각에 뒷받침되어 있고, 달리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그가 더 많은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몇 달 동안 은둔생활을 시킨 뒤, 나는 그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는 데 성공했다. 기사계급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그는 가족이나 일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유복하긴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평온한 노년을 보냈다. 나는 알바노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을 자주 찾아갔다. 이제 그 일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회전을 앞둔 전날 밤의 알렉산드로스처럼,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공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티아누스도 제물로 꼽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지회복책(서기 118년~121년)


서기 118년 7월,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게다가 11개월 만의 귀환인데도 하드리아누스를 맞는 수도의 공기는 냉랭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의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마흔두 살의 황제는 역설했다.


네 명의 집정관 경험자를 살해한 것은 결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황제 암살 음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긴급 대처를 명령하긴 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오해한 근위대장이 독단으로 살해를 강행했다. 그래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다…….


이어서 하드리아누스는 앞으로는 절대 원로원 의원을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살해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원로원 의원이 처벌 대상이 된 경우에도 원로원 재판에서 과반수가 찬성표를 던진 경우에만 유죄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절대 국가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수도로 귀환한 지 로마 시민을 위해 1년 남짓 동안 보여준 하드리아누스의 씀씀이는 착실한 세무 담당자라면 졸도할 정도의 규모였다. 황제 즉위를 함께 축하한다는 이유로 시민권 소유자 1인당 70데나리우스 정도의 하사금을 주는 일은 틀림없이 실행했을 것이다. 군단병들에게는 파르티아에서 철수한다는 인상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트라야누스가 죽은 직후 충성 서약을 받을 즈음에 이미 하사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너스’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콜로세움이나 대경기장을 무대로 한 검투시합이나 전차경주 등 시민들이 열광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음에 한 일은 트라야누스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체납 세금을 전액 탕감한 것이다. 세금 체납자의 이름과 체납액이 적힌 파피루스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거기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공정한 조세제도를 실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는 15년마다 부동산 등기를 다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맞붙었다. 대부분은 트라야누스가 이미 제도화한 것이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이 좀더 기능을 발휘하도록 제도를 조정하고, ‘곤궁한 모자 가정에 대한 원조’ 제도를 창설했다. 다만 가난의 원인이 어머니의 나쁜 행실에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리하여 1년도 지나기 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에워싸고 있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는 잇따라 새 ‘은화’와 ‘동전’을 발행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통화에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넣었다. ‘관용’(Pietas), ‘화합’(Concordia), ‘정의’(Justitia), ‘평화’(Pax)

[하드리아누스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1년 동안 대담한 인기만회 정책을 편 뒤에도 하드리아누스는 1년 남짓 본국 이탈리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황제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투기장이나 경기장 귀빈석에 황제의 모습이 보이면 안심한다. 하드리아누스도 여러 가지 정책이 뿌리를 내리는 것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기가 좋은 황제라는 인상을 더욱 철저하게 심어줄 필요도 있었다.


이탈리아 각지를 순행하느라 수도를 비우거나 아무래도 손을 뗄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원로원 회의에 반드시 참석했다. 의장인 집정관이 입장할 때는 다른 의원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고, 토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 통치에 필요한 황제의 권력 행사는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해서라고 언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회간접자본 정비는 ‘황제’로서 해야 할 책무 가운데 하나지만, 트라야누스가 모두 해주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해야 할 공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수도로 귀환한 지 2년 만에 황제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은 완전히 호전되었다. 수도 로마를, 본국 이탈리아를 비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만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황제가 없어도 ‘내각’(콘실리움)이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도록 조직을 다지는 작업도 끝나 있었다.


히드리아누스의 ‘순행’


로마 황제들은 뜻밖에 여행을 많이 한다. 그것은 황제에게 부과된 책무─첫째는 안전보장, 둘째는 속주 통치, 셋째는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완수하려면 현지 사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나설 필요가 생겼을 때 현지에 가는 정도였고, 제국 전역을 돌면서 계획적으로 시찰하지는 않았다.


로마 황제들은 실무적인 목적이 없는 여행은 하지 않았다. 본국을 비우고 관광여행이라도 떠났다가는 원로원과 시민의 반발을 살 게 뻔했다. 네로 황제가 결정적으로 악평을 받게 된 것은 그에게 동경의 땅이었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로마인에 맞서서 하드리아누스는 현지 시찰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정비 정돈만을 목적으로 한 대여행을 감행한다. 규모에서는 어떤 황제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장기간의 광범위한 여행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순행지에서 그곳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알면 당장 그 문제 해결에 착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건설된 곳에는 그 사실을 기록한 기념비가 세워진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지는 대부분 변경이나 벽지였다. 방위시설을 시찰하며 다니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해는 서기 121년으로 바뀌었다. 1월 24일은 하드리아누스의 생일이다. 마흔한 살에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도 어느덧 마흔다섯 살을 맞았다.  4월 21일은 로마의 건국기념일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서 토가 자락으로 머리를 가린 제사장 차림으로 엄숙하게 제의를 거행했다. 제의를 마친 황제는 수도 로마에 베누스(비너스) 신전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리하여 하드리아누스는 대여행을 앞두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준비를 모두 끝냈다. 바꿔 말하면, 원로원과 시민이 황제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손을 써두었다. 순행지는 제국의 서방 일대였다.

라인강 (서기 121년)


수도 로마에서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여 오늘날의 남프랑스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들어간 뒤, 론강을 거슬러 올라가 리옹으로 간다. 로마 시대에 루그두눔(Lugdunum)이라고 불린 리옹은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의 수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시였다.

[프랑스 리옹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화의 우등생이라고 불리는 갈리아인 만큼, 리옹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일도 간단히 끝났다. 갈리아 전역을 시찰할 필요도 없었다. 리옹에는 며칠 머물렀을 뿐, 곧장 라인강 방위선을 향해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모젤 강변에 있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의 트리어)이었다. 리옹에서 로마 가도를 따라 북상하면 디비오(오늘날의 디종)에 이르고, 다시 북상을 계속하면 모젤 강변에 이른다.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은 원래 트레베리족의 근거지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도시화하여 벨기카 속주의 도읍으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라인강 방위선의 책임자 전원을 모든 가도가 연결되는 이곳에 소집한 게 분명하다.

[독일 트리어 출처 구글 이미지]

트리어 접견은 전선의 현황 보고로 채워졌을 게 분명하다. 접견이 끝난 뒤, 하드리아누스는 라인강 연안의 마인츠로 갔다. 전선을 구석구석까지 시찰하기 위해서다. 야만족이 내습했다는 보고는 없었으니까, 트리어 접견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데리고 시찰하러 갔을 것이다.


라인강 방위선 시찰은 ‘게르마니아 방벽’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하드리아누스는 병사용 막사에서 잠을 자고 병사들과 한솥밥을 먹는 생활을 계속했다. 시찰은 본, 노바이시움, 크산텐에 그치지 않고 라인 강어귀에 가까운 분견대 기지 노비오마구스(오늘날의 네이메헨)를 지나 강어귀에 ‘포룸 하드리아니’(하드리아누스 포룸)라고 명명한 도시까지 세우게 했으니, 정말 철저하다.

[네덜란드 네이메헨 출처 구글 이미지]

어쨌든 순행 첫해는 라인강 방위선을 구석구석까지 시찰하는 데 보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전선에 염주처럼 늘어서 있는 기지들 가운데 하나에서 겨울을 났다. 북유럽의 겨울은 혹독하니 아마 한두달은 군인과 민간인이 같이 사는 크산텐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방위체제 재구축


라인강 방위선 시찰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그 후 다른 지방을 순행할 때 실행한 일을 모두 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방위체제의 재구축이었다. 기능이 저하되거나 둔화된 것은 주저없이 고치고, 필요하면 보강하여 현재 상태에 적합하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축했을 뿐이다. 어느 연구자는 이를 ‘shake-up’이라고 표현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쇄신’이라고 할까.


인적 쇄신


조직이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그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인사에 많은 신경을 썼다. 하드리아누스가 라인강 방위선을 시찰할 당시의 ‘고지’와 ‘저지’ 게르마니아의 두 총독은 선제 트라야누스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안목이 뛰어났는지, 하드리아누스는 그들을 교체하지 않았다.


다른 지방을 순행할 때는 총독을 교체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해임이나 경질 같은 과감한 수단에는 호소하지 않고, 원로원에 돌려보낸다는 명목으로 해임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도록 추천해주고, 집정관을 지낸 뒤에는 평화로운 원로원 속주 총독으로 보내 ‘명예로운 경력’을 마치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제국의 안전보장을 최전선에서 담당하는 사람은 모두 하드리아누스에게 역량을 인정받은 이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대대장 임명권은 군단장에게 있었지만, 군사적 역량보다 부하 병사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이 대대장에 임명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을 바꾸었다. 병사들의 인망보다 군사적 역량에 중점을 두어 대대장을 임명하게 한 것이다. 원로원 계급의 자제만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에 임명하는 특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대대장의 경우와는 달리 백인대장 인선에는 부하 병사들의 인망도 참고자료로 추가했다. 그 이유는 군단기지나 숙영지에서도 대대장에게는 장교용 숙소가 제공되는 반면 백인대장은 부하 병사들과 같은 숙소나 막사에서 함께 기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도 부하들과 함께 했다.


다음은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인데, 이것도 무조건 지원자를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선발 기준은 엄격했고, 시험을 통과하면 당장 입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작성한 교본이 전군에 배포된 뒤로는 그것이 로마군 전체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착했다.


무기 훈련


하드리아누스가 집착한 훈련에는 크고 무거운 공성기를 다루는 법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 군단에는 이런 종류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있지만, 이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병사는 없다.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군단병이 조작한다. 군단병이라면 누구나 사용법에 익숙해져야 했다.

의료시설


그렇다고 하드리아누스가 매사에 엄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지 내의 병원 시찰은 거르지 않았고, 전투 중에 다친 사람과 다른 병으로 쓰러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충분한 치료를 베풀 수 있도록 설비나 의료진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꼼꼼히 점검했다.

보급


하드리아누스는 군단기지와 군량 공급지, 그리고 이 두 곳을 잇는 보급로의 조직화를 추진했다. 유통만 보장되면 여분의 식량까지 비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기지의 재고가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에서도 효율을 중시하는 하드리아누스의 사고방식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방위력 증강에도 나타나게 된다.


누메루스


하드리아누스는 ‘누메루스’(numerus)라는 조직도 새로 만들었다. ‘누메루스’란 직역하면 ‘수’(數)나 ‘수의 집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 즉물적인 이름이 붙여진 이 조직은 주변 지역의 속주민 지원자로 편성된다. 다만 정규 조직은 아니고 병역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말하자면 계절 노동자 같은 병사들이다. 주요 임무는 망보기이고, 전투력까지는 기대하지 않으니까 훈련을 시킬 필요도 없다.

이상이 ‘게르마니아 방벽’을 포함한 라인강 방위선을 시찰하는 동안 하드리아누스가 시행한 일이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이만한 일을 해냈으니까, ‘게르마니아 방위군’(Exercitus Germanicus)이라고 새겨진 통화를 발행하는 정도는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의 순행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게르마니아 방위군 시찰 기념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브리타니아 (서기 12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기간은 21년이다. 그 가운데 그가 본국 이탈리아에 있었던 것은 세 차례에 걸쳐 7년밖에 안 된다. 게다가 45세부터 58세까지의 13년은 거의 줄곧 속주를 순행하면서 보냈다.


서기 122년, 46세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봄을 기다려 라인 강어귀에서 배를 타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브리타니아행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5년 전인 117년에 브리타니아의 브리간테스족이 봉기하여 제9군단이 궤멸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갓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대륙에서 군단을 파견하고,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도 반격에 나서서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브리타니아의 방위체제 재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서기 117년에 반란을 일으킨 브리간테스족은, 당시에는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접경 근처에 사는 원주민이었다. 브리간테스는 로마인이 붙인 이름이다. 라틴어로 산적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로마 병사만 잔혹하게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 쪽에 붙은 브리간테스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생각한 브리타니아 방위체제 재구축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화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산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바로 저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다.

[하드리아누스 성벽 출처 구글 이미지]

고대 로마인들이 ‘발룸 하드리아니’(Vallum Hadriani), 현대 영국인들이 ‘헤이드리언스 월’(Hadrian’s Wall)이라고 부른 이 성벽은 타인 강 하구에서 뉴캐슬을 지나 솔웨이만까지 80로마마일(약 117킬로미터)을 석벽과 망루와 요새로 채워버린 브리타니아 속주의 방어설비다. 하천 같은 천연 경계선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게르마니아 방벽’과 같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후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이 ‘하드리아누스 성벽’보다 북쪽에 성벽이 또 하나 세워진다. 그것은 ‘안토니누스 성벽’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결국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로마화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경계선으로 고착되고 이것이 훗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리로 이어진다.

브리타니아에서 갈리아로 돌아온 후, 로마화의 우등생이었던 갈리아에서 하드리아누스가 재구축해야 할 것이 거의 없었다. 알려져 있는 것은 아베니오(오늘날의 아비뇽)를 건설한 것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드리아누스는 선제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프랑스 아비뇽 출처 구글 이미지]

그가 쓴 『회고록』이 남아 있다 해도, 사적인 감정은 기록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플로티나의 부음을 전해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호적상으로는 양어머니인 이 여인의 고향 네마우수스(오늘날의 님)에 그녀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는 것뿐이다.


에스파냐 (서기 122년~123년 겨울)


황제는 서기 122년에서 123년에 걸친 겨울을 에스파냐의 타라고나에서 보냈다. 그리고 거기로 이베리아반도의 식민도시와 지방자치단체 대표들을 소집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 구파와 속주 출신으로 로마 시민이 된 신파의 대립이 군단병 모집에 협조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스페인 타라고나 출처 구글 이미지]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자손인 고참 시민들을 통틀어 ‘이탈리아인’-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도 여기에 속했다-이라고 불렀는데, 군단병 모집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온건한 ‘거부’였다. 한편 ‘에스파냐인’으로 통칭되는 신참 시민들의 반응은 강경한 ‘거부’였다.


두 파의 대표를 소집하여 타라고나에서 회합했을 때, 하드리아누스가 어떤 조정안을 채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사태 수습에 성공했다. 타라고나까지 왔으면서도 고향 이탈리카에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지만, 그리고 황제 취임을 기념하는 건조물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그것도 구파와 신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에게 중대한 소식이 날아왔다. 파르티아 왕국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긴급 보고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외교도 방위의 중요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다. 황제는 몸소 현지에 가기로 결정했다.


에스파냐에서 시리아로 가는 여행이다. 직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지중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게 되었다. 황제의 항해라고 해서 대규모 호위선단을 조직할 필요는 없었다. 해적의 소굴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지중해도 오랫동안 ‘팍스 로마나’를 누리고 있었다.


오리엔트 (서기 123년~124년)


황제를 맞이한 시리아 속주의 도읍 안티오키아에서는 파르티아 전쟁을 언제라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왕과의 정상회담을 통한 해결을 선택한다.


파르티아 왕국이 로마 제국에 강경한 태도로 나올 때는 국왕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국내 강경파의 압력에 떠밀린 경우가 많았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담장으로 정해진 유프라테스강의 작은 섬으로 가면서 하드리아누스는 군단을 대동하지 않았다.


파르티아 왕과 로마 황제의 회담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알고 있다.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영토로 진격하기 위해 편성된 게 아닐까 하고 로마를 걱정시킨 파르티아군은 수도로 돌아간 국왕의 명령으로 해산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곧장 북상하여 소아시아로 들어가, 소아시아 남부와 서부를 시찰하기로 했다. 로마 시대에는 이 지방이 원로원 속주였다. 즉 로마화의 역사가 길고, 따라서 정세가 안정되어 있고, 그래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도 없는 지방이었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해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로도스와 소아시아


하드리아누스는 장미꽃 섬이라는 뜻의 로도스섬도 방문했다. 로도스섬은 풍광이 아름답고 기후도 온화하고, 게다가 당시에는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험하고 좁은 길을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높은 벼랑 위의 린도스 신전도 방문했을 것이다.

[로도스섬의 린도스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소아시아 서쪽 끝으로 돌아오면,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튀르키예의 보드룸), 그리스 철학의 시조인 탈레스가 태어난 밀레투스,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페수스가 이어져 있고, 과거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 후에도 줄곧 학문의 중심지인 페르가몬을 지나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무대가 된 트로이에 이른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밀레투스의 현재 모습 출처 구글 이미지]
[페르가몬의 급경사 반원극장 출처 구글 이미지]
[트로이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도나우강 중류


소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간 황제 일행은 일단 아테네로 가지 않고 먼저 트라키아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간다. 트라키아를 지나 도착한 도나우강 방위선은 하드리아누스가 청년 시절에 근무한 곳이다. 도나우 강어귀에서 시작하여 빈이 있는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찰을 계속했다.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라인강과 도나우강이라는 로마 제국의 최전방 바위선을 모두 시찰한 셈이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에야 황제는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카이아 속주의 도읍인 아테네에서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아테네 (서기 124년 가을~125년 봄)


그토록 동경하던 땅을 4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 찾은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난생처음 아테네를 찾은 하드리아누스는 겨울을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반년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구레나룻을 기른 최초의 황제로 알려져 있다. 로마가 패권 국가가 되고 그리스가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간 뒤, 구레나룻은 ‘그람마티쿠스’로 통칭된 교사들의 상표가 되었다. 로마 황제가 그리스풍으로 구레나룻을 길러도 이제는 스캔들이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 중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람이 훨씬 많다.


이때 그는 해외여행을 처음 떠난 젊은이처럼 그리스적인 것이라면 모조리 경험하며 돌아다닌다. 아테네 시내는 물론 델피, 코린트, 스파르타, 올림피아 같은 명승고적은 빠짐없이 찾아갔고,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니온곶에 서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맞이도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수니온곶 포세이돈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게다가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에도 열중했다고 한다.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은 아테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엘레우시스에서 거행되는데, 제우스의 누이이자 농사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그 딸 페르세포네에게 바치는 제의를 한밤중에, 게다가 관계자 외에는 모두 물리친 채 비밀리에 거행하기 때문에 비교(秘敎, 또는 밀교)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106~43 BC)는 엘레우시스 밀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당신들 아테네인들이 가져다와서 인간의 삶에 기여한 많은 뛰어난 제도들과, 참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도들 중에서, 나의 견해로는, 그 어느 것도 [엘레우시스] 밀교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엘레우시스] 밀교 덕분에 우리 [로마인]들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삶의 양식을 벗어나서 교육 받고 품위를 지닌 문명의 상태로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레우시스] 밀교의 의식들은 "비전들(initiations)"이라고 불리는데, 비전, 즉 비법 전수라는 말에 합당하게 진실로 우리 [로마인]들은 [엘레우시스] 밀교의 의식들로부터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으며, [현생에서]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뿐만 아니라 더 나은 희망을 가지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 — 키케로 《법률론》 II, xiv, 36

 

이 즈음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에서 안티노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1월 27일에 태어난 것은 알려져 있고, 죽은 해는 확실하니까 거기서 역산하고, 그의 나체 조각상에서 짐작할 수 있는 신체 연령을 감안하여 추측하면, 이 때 안티노는 열다섯 살 무렵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테네와 그리스의 재건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꿈을 꾸는 동시에 현실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비친 그리스, 그중에서도 특히 아테네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듯하다. 그런 안타까움이 아테네를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게 아닐까.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를 학예와 관광의 도시로 만들고, 그리스를 상업과 관광의 지방으로 만들려 한 게 아닌가 싶다.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은 명승고적이 되어버린 아테네의 공공건물을 철저히 수리하고 복원했다. 또한 새 건물과 화려하고 웅장한 시장, 즉 ‘경제 센터’까지 기증했으니 아테네시민들이 기뻐한 것도 당연하다.


[아테네의 하드리아누스 도서관과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 전역을 관광지로 만드는 문제에서는 그리스에 옛날부터 존재한 4대 경기대회를 활성화하는 데에서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4대 경기대회는 파티아 경기대회, 누메이아 경기대회, 이스투미아 경기대회, 올림피아 경기대회이다. 이들 경기대회는 조합이 잘 되어 있어 매년 어딘가에서는 경기대회가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사업을 반년 만에 모두 끝낼 수는 물론 없다. 서기 124년 가을부터 125년 봄까지의 체류 기간은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짓도록 지시하고 공사를 착공시키는 것만으로 끝났다.


시칠리아 (서기 125년 여름)


아테네 외항인 피레우스에서 배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본국 이탈리아의 브린디시가 아니라 시칠리아섬으로 뱃머리를 돌리게 했다. 시칠리아섬은 원래 그리스 이주민이 건설한 도시가 많은 곳이다. 특히 섬의 동쪽 절반은 과거에 ‘대그리스’(Magna Graecia)라고 불린 곳으로,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 메시나 등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가 늘어서 있다. 하드리아누스도 그리스색이 짙은 이런 도시들을 순행했을 게 분명하다.

[시칠리아 타오르미나 출처 구글 이미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에 이미 활화산이었던 에트나산에 올라간 일이다. 화산에 흥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에트나산에서 동쪽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에트나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일곱 빛깔의 일출이라 하여, 고대에는 유명한 장관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에트나 화산 출처 구글 이미지]

하드리아누스는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야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본국 이탈리아에 돌아온 것을 제국 전역에 알리기 위해, 그것을 새긴 은화를 발행했다. 4년 만의 귀국이라고는 하지만 ‘황제의 이탈리아 귀국’(Adventui Augusti Italiae)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하여 그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동안은 본국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본국에 머문 것은 겨울뿐이었다. 이듬해(126년) 봄이 되자마자 50세가 된 황제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북아프리카 (서기 126년)


수도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배를 타고 카르타고로 달린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소금까지 뿌려서 불모지로 만든 카르타고도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난 이제는 로마 제국의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카르타고를 도읍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는 로마화의 역사가 길고 안정된 속주를 의미하는 ‘원로원 속주’라서, 카르타고에는 갈리아의 리옹과 마찬가지로 1천 명의 병사밖에 주둔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카르타고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서남쪽으로 떠났다. 북아프리카에도 그물눈처럼 깔려 있는 로마 가도를 지나 람바이시스(오늘날 알제리의 랑베즈)로 들어간다. 이곳이 아프리카 방위선을 지키는 유일한 주전력 집단인 제3군단의 기지였다. 랑베즈에서 발굴된 기념비(지금은 루브르박물관에 소장)에 새겨진 글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순행 중인 하드리아누스의 ‘음성’(군사들에 대한 연설)을 접할 수 있다.

키레나이카에서 마우리타니아까지 이르는 전선에서 근무하는 모든 지휘관이 랑베즈의 군단기지에 소집되었다. 리비아에서 모로코까지의 전선을 1개 군단 6천 명과 대대 규모의 기병대,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보조병 등 많아야 2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지키는 것이므로, 효율과 기능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막 부족의 습격은 반드시 격퇴해야 했다. 그들은 쳐들어와서 약탈해갈 뿐, 땅을 점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습격이 거듭되면 주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변 도시로 피난한다. 주민이 떠난 농경지는 황무지로 변한다. 사막화를 피하고 싶으면, 농사를 계속하여 땅이 늘 초록빛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랑베즈를 떠난 하드리아누스는 바로 동쪽에 있는 타무가디(오늘날의 팀가드)를 방문한다. 이곳은 트라야누스 시대에 황제의 명을 받아 제3군단의 만기 제대자를 위한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도시를 세운 것은 제대를 앞둔 군단병들이었다. 퇴역한 뒤에 정착할 곳을 자기 손으로 지은 셈이다. 그 때문인지, 도시는 군단기지를 그대로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는 정사각형이다. 하지만 로마식의 생활은 모두 가능하도록 조성되었다.

[알제리 팀가드의 개선문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시대 로마 제국의 군단기지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군단기지, 보조부대 기지, 성채, 감시용 요새와 망루로 이루어진 군사적 ‘방벽’ 바로 안쪽에는 기지촌이라 해도 좋은 ‘카나바이’, 제대병들이 정착한 ‘식민도시’, 로마가 자치권을 부여한 원주민의 ‘지방공동체’ 등이 산재했다.


이런 지역들이 모두 로마 가도로 연결되어 훨씬 높은 기능을 발휘하는 커다란 유기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광대한 제국을 15만 명 안팎의 군단병으로 방위할 수 있었고, 제국 전역에 도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제대병의 도시인 팀가드를 방문한 뒤, 로마 가도를 따라 동쪽의 아프리카 속주(오늘날 튀니지와 리비아 북부)로 돌아가서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사브라타, 트리폴리, 렙티스 마그나를 차례로 방문한다. 이들 도시는 포에니 전쟁 당시에는 카르타고 영토였고, 따라서 주민들도 카르타고계였다. 로마 제국은 이 일대의 도시에 군단병 1개 부대도 배치하지 않았다.

[사브라타와 렙티스 마그나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하드리아누스는 렙티스 마그나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돌아왔다. 서기 126년 봄부터 시작된 순행이지만, 수도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여름도 다 지나지 않은 계절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강행군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후 약 1년 반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간에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대사업에 착수했을 것이다.


『로마법 대전』 (서기 126년~131년)


‘법은 선과 공정의 기술이다’(Jus est ars boni et aequi)라는 말은 하드리아누스가 이 대사업을 맡긴 법률학자 유벤티우스 켈수스(Publius Juventius Celsus)가 남긴 말이다. 하드리아누스가 로마법 집대성 작업을 맡긴 법률학자들 가운데 세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있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ucius Neratius Priscus), 유벤티우스 켈수스, 살루비우스 율리아누스가 그들이다.

[유벤티우스 켈수스 동상과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의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법령 집대성은 단순히 법령을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악법으로 간주되거나 시대에 맞지 않거나 하여 사실상 사문화한 법은 폐기하고, 필요한 법은 새로 제정하는 방법으로 방대해진 법령을 정비하고, 로마 사회의 규범인 로마법을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정비하고 재구축한다는 점에서는 군사도 법률도 마찬가지다. 하드리아누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 제국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세 사람의 작업에서 기본자료가 된 것 가운데 하나는 공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판결문이었다. 해마다 판결문을 보존하는 것은 그해의 법무관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이 대사업이 완성되어 『로마법 대전』이 편찬된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지 14년째인 서기 131년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로마 제국에서 법령이나 판례를 알 필요가 있는 사람은 정치가도 행정관도 검찰관도 변호사도 모두 자신의 ‘로마법 대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베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는 제1차 순행을 떠나기 전에 베누스(비너스)와 로마에 바치는 신전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포로 로마노 동남쪽 끝, 콜로세움 앞에 세워진 이 신전은 참으로 특이했다. 종래의 건축방식으로는 하나의 신전 안에 베누스 여신과 신격화한 로마를 함께 모시게 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이 신전은 두 신을 따로 모셨을 뿐 아니라, 두 신전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다마스쿠스 태생의 건축가 아폴로도로스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달랐다. 그는 나름대로 확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건축가나 기사들에게는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작업만 맡기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아름답고 화려했을 게 분명한데, 그 후 아무도 이 양식을 모방하지 않았다. 베누스 여신을 참배한 다음,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가 로마 신을 참배하는 방식이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폴로도로스는 여신이 일어서면 신전 지붕이 뻥 뚫려버릴 거라고 말한 모양이다. 이 말이 하드리아누스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기분이 상했다. 딜레탕트적인 면을 찔린 것이 퍽이나 아팠던 모양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뒤 가뜩이나 공공건축을 맡을 기회가 줄어들었던 아폴로도로스는 이 일로 더욱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판테온


판테온은 오늘날에도 고대 로마 시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원래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아그리파가 세운 신전이었다. 카이사르의 눈에 띈 덕분에 낮은 신분에서 로마 제국의 2인자 지위까지 출세한 아그리파는 모든 신에게 바치는 ‘판테온’(만신전)을 건립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목욕탕’ 북쪽, 카이사르가 세운 ‘사이프타 율리아’ 서쪽에 ‘판테온’을 지었다. 기원전 15년 무렵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판테온은 아예 헐어버리고 새로 짓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손상이 심한 상태였다. 따라서 후세의 우리가 보는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가 토대부터 다시 지은 것이다. 신전 정면에는 ‘M. Agrippa L.F. Consul ter(tium) Fecit’라고 새겨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웠다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초대 건설자를 존중하여 새긴 것이다.


목재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 게다가 대담하고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콜로세움과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감탄하게 되는 점은 건물이 완벽한 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돔 구조의 둥근 지붕을 떠받치는 시멘트 천장도 위로 올라갈수록 얇게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시멘트에 가벼운 속돌이 더 많이 섞여 있다고 한다. 하중을 줄이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다신교의 대표적 상징인 이 판테온이 기독교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구조가 워낙 견고해서 파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교회로 전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상들이 들어서 있던 벽감(壁龕)에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석상이 대신 놓여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런 석상들이 다 철거되어, 교회가 아니라 로마 시대의 건축물로 돌아와 있다.

빌라 아드리아나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별궁을 갖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을 땅을 고르는 데에는 신중했다. 시내는 물론 시내와 가까운 교외도 배제하고, 결국 로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티부르(오늘날의 티볼리)에 별궁을 짓기로 했다.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 즉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티볼리 별궁에도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별장과 마찬가지로 공무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완전포장된 로마식 가도로 수도 로마와 직결되어 있는 것은 공무에서 달아날 수 없는 황제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었다.


착공한 해가 123년이라면,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지 6년 뒤가 된다. 공공건물도 건축가에게 일임하지 않았던 하드리아누스가 별궁 설계를 남에게 맡길 리가 없다. 제국 각지를 순행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지을까 궁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이 별궁이 ‘하드리아누스적’ 특징을 갖는 것은 제2차 순행 때 돌아다닌 지방에서 받은 영향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황제는 순행지에서 티볼리로 계속 아이디어를 보냈을 것이다.


[빌라 아드리아나 정원과 복원 모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일’을 망각할 황제는 아니었다. 하루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사를 거행하러 신전으로 가는데, 한 여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여자는 황제에게 청원하려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발길을 멈추고 여자의 청원을 들어주었다.


다시 ‘순행’에 (서기 128년~134년)


서기 128년 여름, 52세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두 번째로 긴 여행을 떠났다. 첫 번째 순행의 목적이 제국 서방을 시찰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여행의 목적은 제국의 동방을 시찰하는 데 있다. 긴 여행이 될 것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수도 로마를 떠나기 전에, 원로원이 결의했는데도 10년 동안 계속 사양했던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내 사비나한테도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칭호를 주었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떠난 배는 이번에는 먼저 아테네로 향한다. 지난번에 아테네에 머문 지 3년이 지났다. 그 3년 동안, 하드리아누스가 지시해둔 대로 ‘테세우스의 아테네’ 옆에 ‘하드리아누스의 아테네’가 거의 완성된 상태에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와 그리스 각지를 돌면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반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에도 참가했다. 지난번과 다른 점은 지시해둔 공공건물의 준공식에 잇따라 참석했다는 점이다.


아테네시민들은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로마 황제에게 ‘올림피우스’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올림포스산에 살고 있는 그리스 신들의 반열에 끼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는 왕을 곧 신으로 여기는 게 보통인 오리엔트와 가까운 탓인지, 그리스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신격화하는 데 별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서기 129년 봄이 오기를 기다려 피레우스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서해안으로 향한다.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에는 곧장 소아시아 북부로 간다. 시노페(튀르키예어 Sinop)를 중심으로 흑해에 면해 있는 소아시아 북부를 시찰하는 여행이다. 흑해 지방을 순행한 뒤에는 로마 영토의 경계선을 따라 소아시아 내륙지방을 남하한다. 사탈라와 멜리테네(오늘날의 말라티아)를 시찰하기 위해서다.

[튀르키예 시노프 출처 구글 이미지]

아르메니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로마 속주는 카파도키아인데, 사탈라와 멜리테네는 그 로마의 방위선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탈라에는 제15군단, 멜리테네에는 제12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황제가 이곳까지 순행한 것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하드리아누스는 ‘Exercitus Cappadocicus’(카파도키아 방위군)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했다.


카파도키아 전선기지를 시찰한 하드리아누스 일행은 남쪽으로 향했다. 서기 129년에서 130년에 걸친 겨울을, 시리아 속주의 도읍이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필적하는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하드리아누스는 강대국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속주에서도 군단기지 시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는 정말 중요한 외교를 해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그리스계 도시로 중동지역의 제후들을 초대한 것이다. 파르티아 왕까지 참석했다. 파르티아와 로마 양 대국의 상황에 따라 처지가 늘 바뀌는 제후나 부족장들이 파르티아 왕과 로마 황제가 얼굴을 맞대는 자리에 동석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이때의 회담에서 중동의 평화가 확인되었다.


이듬해인 서기 130년 봄,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팔미라로 간다. 지중해와 유프라테스강의 거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팔미라는 시리아사막 한복판에 있는 도시지만, 팔마이(야자나무)의 도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오아시스이고, 낙타 캐러밴이 오리엔트에서 서방으로 운반하는 물산의 중계지로 번영해왔다.

[시리아 팔미라 출처 구글 이미지]

이곳 팔미라에도 약점은 있었다.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족의 약탈이 그것이다. 베두인족에게 약탈은 악행이 아니라 어엿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베두인족도 로마의 패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팔미라의 부호들도 베두인족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직업’을 금지당한 베두인족에 대해서 로마는 변경을 방위하는 부대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팔미라 방문을 마친 하드리아누스는 이번에는 다른 길로 다마스쿠스로 간다. 사막이라서 거의 직선으로 뚫려 있는 로마식 가도를 230킬로미터만 가면 다마스쿠스에 이른다. 다마스쿠스 방문은 거쳐가는 정도로 끝낸 모양이다.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아라비아 속주(오늘날의 요르단)에 주둔하고 있는 제3군단의 보스트라(오늘날의 부스라)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주요 방위선을 모두 순행하고 시찰한 셈이 된다.


유대 속주


다마스쿠스에서 홍해 연안의 아카바까지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건설된 로마 가도가 뚫려 있다. 유프라테스 방위선의 요충 가운데 하나인 보스트라 군단기지 시찰을 끝낸 하드리아누스는 그 길을 거쳐 필라델피아(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남하를 계속하지 않고 유대 속주에 발을 들여놓는다. 로마 제국의 화약고였던 유대의 통치체제를 재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 많은 속주에는 북부에 제6군단, 남부에 제10군단이 상주해 있었다. 이것은 서기 70년에 이스라엘 함락으로 끝난 유대 전쟁 뒤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 당시 유대에 상주해 있던 로마 군단은 1개 군단뿐이었지만,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에 다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2개 군단으로 증강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 시내가 아니라 바로 북쪽에 제10군단 기지를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기지를 중심으로 한 도시를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이름 붙였다.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가문 이름이다. 따라서 ‘아일리아’는 ‘하드리아누스의 땅’이라는 뜻이 된다.


자신들의 성역인 예루살렘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이런 이름을 붙인 도시가, 더구나 자신들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인 군단의 기지로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뿐만 아니라 하드리아누스는 유대교도의 할례를 금지했다. 아니, 단순히 금지한 게 아니라, 범죄자에게 할례를 강제하여 할례를 경멸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건설된 제10군단 기지 안에는 전부터 유대교회가 있었다. 그 유대교회는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그리스-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로마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도 그리스를 애호한 나머지, 오리엔트에 사는 그리스인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던 반유대 감정에 물들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에 머무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유대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하드리아누스는 짧은 유대 방문을 마치고 이집트로 발길을 돌린다. 헬레니즘 왕국의 하나였던 이집트도 2세기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은 지금은 그 넓은 지역에 1개 군단만 상주시키면 충분할 만큼 정세가 안정되어 있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장관이 관장하는 속주 통치기관을 순시하고, 알렉산드리아와 가까운 니코폴리스 기지로 가서 제2군단을 시찰한 뒤에는 체재 기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자기 취미에 맞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그 하나로 역사가들이 서술하고 있는 것은, ‘무세이온’이라는 그리스어 명칭으로 통용된 저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방문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에도 ‘무세이온’을 가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리스 아테네와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가몬, 로도스섬과 더불어 로마 세계의 최고 학부였다. 아니, 인문계가 주류인 아테네나 로도스섬과는 달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인문계와 자연과학계를 망라한 종합대학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공부하는 학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에는 로마 황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는 연금을 황제의 개인 영지인 이집트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드리아누스가 ‘무세이온’을 방문한 것은 후원자로서 자기가 후원하는 기관을 방문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심포지엄이라도 열어서 황제를 영접했을 것이다. 황제는 날카롭고 매서운 비판으로 학자들에게 논쟁을 걸었다. 게다가 학자들의 주장을 완벽하게 논박하기까지 했다. 이 기록을 남긴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지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고 평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서른 살 안팎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로부터 몇 년 뒤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혁명적 집대성인 방대한 저서를 간행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했을 당시 페르가몬에서 막 태어난 갈레노스(Claudius Galenus)도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그 성과인 해부학 저서를 간행하여, 로마 시대의 높은 의학 수준을 후세에까지 전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시대 사람이 쓴 유일한 하드리아누스 전기인 『황제실록』(Historia Augusta)의 저자는 하드리아누스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와 문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수학과 기하학, 회화에도 꽤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악기 연주와 노래도 좋아해서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악기와 노래를 연습할 때도 남몰래 숨어서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노래한 사랑의 시도 몇 편 지었다. 무예에서는 제일급의 달인이었다. 검투사가 사용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성격은 복잡했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요컨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안티노의 죽음


이집트에서 하드리아누스는 나일강 유람을 떠난다. 나일강 유람은 이집트를 방문하는 로마 황제에게는 상례처럼 되어 있는 행사였다. 이집트는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따금 배에서 내려 강변에 서 있는 신전을 방문하면 보아야 할 것을 전부 볼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화려한 어용선(御用船)이 알렉산드리아에서 300킬로미터 이상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사고가 일어났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상대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안티노가 나일강에서 익사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그 소식을 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아녀자처럼 울었고, 아무도 황제를 위로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안티노 조각상 출처 구글 이미지]

실수로 배에서 떨어진 안티노를 악어가 공격했고, 변고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안티노를 건져냈을 때는 이미 악어한테 물려죽은 뒤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하드리아누스의 자필 회고록을 믿는다면, 안티노는 점술가가 예언한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일까. 그렇다면 스스로 택한 죽음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무려 7년 동안 측근에 둘 정도로 이 소년을 아꼈다. 황제는 뛰어난 조각가를 쉽게 모을 수 있는 아테네에서 죽은 안티노의 초상 조각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려고 결심한 것 같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초상들을 그리스 동쪽의 로마 세계에는 곳곳에 뿌려놓았지만, 로마에는 사저인 ‘빌라 아드리아나’ 이외에는 어디에도 놓아두지 않은 듯하다.


안티노가 죽은 뒤, 하드리아누스는 여느 때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건설공사가 시작된 안티노폴리스를 떠났고, 황후 일행은 로마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황제는 우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갔다가 거기서 소아시아를 북상하여 흑해로,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그리스의 아테네로 들어간다.


가는 길에 ‘하드리아노폴리스’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건설했다. 오늘날 터키의 세 번째 도시가 된 에디르네가 바로 하드리아노폴리스다. 에디르네라는 이름은 ‘하드리아누스’를 터키식으로 읽은 것이다.

[에디르네 출처 구글 이미지]

유대 반란


그 직후 유대가 드디어 불을 뿜었다. 아테네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들은 하드리아누스는 겨울철에 접어들었는데도 당장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 정확한 정보를 모아 그것을 토대로 직접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하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한 것은 유대교도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아무래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할례는, 다른 민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유대교도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증명이었다. 이것을 금지하는 행위는 패자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온 로마의 방침에 어긋난다.


서기 131년 가을에 일어난 유대 반란에는 지도자가 두 명 있었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와 라비 아키바(Rabbi Akiba)가 그들이다. 코크바는 구세주를 자처하며 반란을 선동했고, 유대교회 사제인 아키바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성전이라고 주장하여 종교면에서 코크바를 지원했다.


바르 코크바는 히브리어로 ‘별의 아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구세주를 자칭했지만, 라비 아키바는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절규한다. “바르 코크바야말로 유대의 왕이고 구세주다!”


[사이먼 바르 코크바 출처 구글 이미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 진압군의 총지휘를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인 율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유대 지역과 양상이 비슷한 브리타니아에서 게릴라 전술에 맞서서 훌륭한 공을 세웠다는 게 이유였다.


유대 북부의 갈릴리 지방은 간단히 제압되었다. 유대 중부로 진격한 세베루스는 전군을 대대 단위의 소부대로 나누어 반격하는 융단폭격식 전술로 전략을 바꾼다. 로마군의 본격적인 반격은 아무리 빨라도 132년 여름 이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유대 전쟁은 이듬해인 13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서기 134년 초, 느리지만 착실히 그물을 끌어당기는 느낌으로 진행되던 유대 전쟁도 예루살렘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예루살렘은 64년 전과 똑같이 불타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베틸이 제2의 ‘마사다’가 되었고, 결국 136년에는 전멸한다. 바르 코크바는 전사하고, 포로가 된 라비 아키바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디아스포라’


황제는 전쟁 수행은 휘하 장수에게 맡겼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의 전후처리는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유대는 이제 더 이상 유대라고 불리지 않고, '팔레스타인'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뀐다. 예루살렘 시내의 복구도 로마식 도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결국 유대 반란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모조리 추방하라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즉 이산(離散)을 초래했다. 하드리아누스가 강요한 ‘이산’은 그 행선지를 지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했을 뿐, 그다음은 각자 마음대로 연고를 찾아 원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또한 유대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도만 추방했고, 그것도 예루살렘에 사는 것만 금지했다. 예루살렘이 항상 반란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이나 해외의 유대인들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리하여 유대인은 또다시 조국을 잃었다. 원로원 의결을 거쳐 135년부터 공식 발효한 ‘디아스포라’는 20세기 중엽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드리아누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한 가지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그 후 유대교도의 대규모 저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서기 134년 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카이사레아에서 배를 타고 어디에도 들르지 않은 채 곧장 로마로 향했다. 6년 만의 귀국이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는 생각을 품고 귀국했을 게 분명하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도 어언 17년이 지나고 있었다.


여생


6년 만에 돌아온 황제에게 원로원은 개선식 거행을 허락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사양한다. 그리고 전선에서 유대 전쟁을 지휘한 총사령관 세베루스에게 그 영예를 양보했다. 하지만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6년 만에 그를 대한 원로원 의원들의 눈에는 딴사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매사에 엄격하고 까다롭고 쾌락적이고 인색하고 불성실하고 무자비하여, 요컨대 보통 사람들이 결점으로 여기는 성향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누스의 변화를 질병 탓으로 돌린다. 『황제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제국 전역을 순행하고, 게다가 호우나 혹한이나 혹서를 무릅쓰고 여행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건강을 해쳐서 병상에 몸져눕고 말았다.>


하지만 귀국한 뒤 하드리아누스가 병석에 몸져누운 채 4년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은 것은 아니다. 공적인 책무도 비난받지 않을 만큼은 해냈고, 사적인 취미에도 시간과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체력 감퇴만은 감출 수 없었다. 체력은 계속 쇠퇴할 뿐이었다.


매사에 까다롭게 변한 하드리아누스가 마음의 평안을 찾은 곳이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였다. 그는 그 곳에 자신의 추억을 모아놓았다. 그 대상은 아테네의 고등교육기관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설한 것으로도 유명한 리케이온(라틴어로는 리케움), 아테네시의회인 프리타네이온, 이국 정서가 물씬 풍기는 이집트의 카노푸스 등이었다.

[빌라 아드리아나 정원 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고, 건물이나 그것이 서 있는 장소가 그에게 준 인상을 상징적인 형태로 바꾸어 옮겨놓았다. 또한 순행길에 구입한 수많은 미술품도 모아놓았다. 미술에 관한 하드리아누스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걸작들뿐이다.


하드리아누스 컬렉션의 특징은 역사적 위인들의 초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황제의 나체상도 없다. 그리스 신들을 제외하면 나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젊고 아름다운 안티노의 모습뿐이다. 안티노만이 아니라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초상도 바라보고 있으면 ‘지성’보다는 ‘관능’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후계자 문제


귀국한 지 2년이 되어가던 서기 136년, 환갑이 지난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 선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체력 감퇴는 이제 숨길 수 없었고,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루면 황제의 직무 태만이 된다. 사비나 황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누구를 양자로 삼느냐가 곧 후계자 선정이 된다.


황제의 매부인 세르비아누스에게는 손자가 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생질손에 해당한다. 황제는 세르비아누스가 자신의 손자를 황제에 옹립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근위대 병사들을 세르비아누스의 저택에 보내, 황제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케이오니스 콤모두스(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황제는 그 일로 인해 강경해진 원로원에 대한 대책을 겸하여, 매부와 그의 손자를 죽인 일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후계자를 공표했다. 당시 서른 살 안팎이었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름을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었다.


당시에는 에트루리아라고 불린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니까, 본국 이탈리아 태생의 로마인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 숙청된 네 사람 가운데 하나인 니글리누스의 딸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당시 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적절한 황제감으로 여겨진 이 청년은 병을 앓는 몸이었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출처 구글 이미지]

해가 바뀐 서기 137년, 하드리아누스는 군단 지휘를 경험해야 한다면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전선으로 보냈다. 겨울을 로마에서 보낸다는 구실로 1년도 채 안 되어 귀국했지만, 원래 호리호리했던 몸이 유령처럼 변해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138년 1월 1일에 열릴 원로원 회의 전날 밤 많은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안토니누스


하드리아누스는 10여 년 전부터 한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소년이 바로 다음다음 황제가 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인데, 당시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였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신임이 두텁고 집정관도 두 번이나 경험한 마르쿠스 안니우스의 손자다.


서기 138년 1월 24일 예순두 번째 생일을 맞은 하드리아누스는 이날 평소 신뢰하는 안토니누스만 초대했다. 찾아온 안토니누스에게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철학을 좋아하는 안니우스와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으라는 조건이었다.


한 달 뒤에 안토니누스는 다시 티볼리를 방문했다. 황제의 제의를 삼가 받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장 그 사실을 공표했다. 황제는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이했고, 안토니누스는 안니우스와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았다고 공표한 것이다.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원로원에서 호평을 받았다. 안토니누스가 누구한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계자 선정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하드리아누스도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셈이 되었다.


죽음


봄기운이 티볼리의 ‘하드리아누스 별궁’을 감싸기 시작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황제의 가슴은 조금도 명랑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드리아누스의 병세가 계속 악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하인 두 사람이 멘 가마에 누운 채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할 수밖에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상황을 비관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노예에게 단검을 건네주면서 자신의 가슴을 찌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물론 노예는 이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그때마다 안토니누스는 빌라로 달려가서 애원했다. “그런 짓을 하시면 저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됩니다.” 그러고는 단검을 숨겨버렸다.


또 다른 가슴아픈 일화가 있다. 당시 티볼리의 별궁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줄곧 동행한 그리스인 의사가 있었다. 이 충직한 시의에게 하드리아누스는 절대 비밀로 하라는 엄명과 함께 독약 조제를 명령했다. 시의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만, 따를 수도 없어 결국 스스로 조제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드리아누스의 자살 시도는 잠잠해졌지만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갔다. 결국 서기 138년 7월 10일, 하드리아누스는 급보를 받고 달려온 안토니누스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62세 5개월 16일의 생애였고, 21년의 치세 뒤의 죽음이었다.


1,800년 뒤의 한 연구자는 하드리아누스를 이렇게 평했다. “속주민들이 로마로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친히 속주를 돌아다니며 속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평가야말로 하드리아누스의 묘비명에 가장 어울리는 찬사가 아니었을까.



제3부 아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재위 서기 138년 7월 10일~161년 3월 7일)


행복한 시대


후세가 '오현제 시대'라고 부른 시기를 동시대의 로마인들은 ‘황금 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황금’(aureum)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다고 평가한 세 황제에게는 각각 다음과 같은 수식어구를 바쳤다.


트라야누스─‘지고의 황제’(Optimus Princeps)

하드리아누스─‘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

안토니누스 피우스─‘질서 있는 평온’(Tranquilitas ordinis)


서기 138년 7월 10일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Imperator Caesar 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라는 공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오늘날의 남프랑스인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론강 근처에 있는 네마우수스(오늘날의 님) 출신이다. 2천 년 뒤인 지금도 남아 있는 ‘르 퐁 뒤 가르’(Le Pont du Gard)라는 수도교(水道橋)로 유명한 도시이고, 로마 시대에는 갈리아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르 퐁 뒤 가르 출처 구글 이미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서기 86년 19일에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라누비오는 수도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30킬로미터쯤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다. 친가와 외가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안토니누스는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안토니누스도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인 서기 111년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역시 트라야누스 시대인 116년에는 원로원에 들어가는 동시에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인 120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49세부터 50세까지 1년 동안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다.


황제 즉위 후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면, 대개는 측근을 비롯한 협력자를 교체한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본국 이탈리아에 상주해 있는 유일한 군사력인 근위대 대장에는 황제의 심복을 임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자리도 교체하지 않았으니까, 하드리아누스의 인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이 정도면 정말 철저하다.


또한 이 황제의 일상생활은 일개 원로원 의원이었던 시절과 전혀 다름이 없어서, 풍족하기는 했지만 호화롭지는 않았다. 우선 화려한 별궁 따위는 일절 짓지 않았다.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별장과 황제가 되어 상속받은 별궁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52세의 새 황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생각을 공표했다. 우선 순행은 떠나지 않고,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면서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1) 수도 로마에 머무는 편이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정책을 결정하는게 편리하다.
(2) 황제가 순행할 때 순행지인 도시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비용이 절약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선제의 업적을 거의 다 계승하면서 불편한 것만 조금씩 조정했지만, 즉위한 직후에 선제의 뜻에 어긋나는 일 두 가지를 감행했다. 첫째, 하드리아누스가 말년에 원로원 의원들을 마구잡이로 고발했는데, 이를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황제 즉위를 기념한 사면이라는 형태로 무효화했다.


선제의 뜻에 어긋나는 두 번째 일은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따라 양자로 삼은 안니우스와 루키우스의 약혼녀를 바꾼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두 소년의 신부감을 간택하고 벌써 약혼까지 해놓았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이런 일도 독단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일 사람이 아니다. 안니우스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당시 17세인 미래의 ‘철인 황제’는 잠시 생각한 뒤에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했다.


인격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방식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정책도 법안도 반드시 ‘내각’이나 ‘아미쿠스’(친구)라고 부른 측근 브레인들과 의논한 뒤에 결정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남의 의견을 청한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강행했던 할례 금지령은, 서기 134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인 ‘이산’(디아스포라)이 실현된 뒤에는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안토니누스는 이 금지령의 해제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산’을 명령한 법률은 계속 살아남아서 그 후 1,80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역사를 결정했다.


로마 황제의 최대 책무인 제국의 안전보장에서도 안토니누스 황제는 모든 전선을 시찰하며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자신의 이름이 붙은 전선을 딱 하나 남겼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북쪽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구축된 60킬로미터 길이의 ‘안토니누스 성벽’이 그것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보다 훨씬 동방 전제군주들의 호감을 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는 로마 방문을 거부했던 카스피해 근처의 부족장도 안토니누스 시대에는 로마를 방문하여 복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사형통이라는 느낌으로 로마 제국은 평화를 구가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나날이었다.


안토니누스는 국가 재정이 흑자인데도 ‘구조조정’을 잊지 않았다. 일도 하지 않고 봉급을 받는 자는 가차없이 해고했다. 그리고 안토니누스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그 이유를 분명히 했지만, 공직자를 해고할 때도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했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가 계속 보수를 받는 것만큼 국가에 해롭고 헛된 행위는 없다.”


안토니누스에 따르면 일은 철저하고 명쾌하고 간략하게 해야 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연고나 정실로 친지나 친구를 등용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친구나 친지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했고, 그래서 상대들도 지나치게 황제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었다.


제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에 파우스티나 황후를 여읜 안토니누스는 아내의 유산에 자신의 재산을 보태서 '파우스티나 재단'이라고 불러도 좋은 기금을 설립했다. 죽은 아내의 이름을 붙인 이 재단은 불우한 소녀들에게 결혼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파우스티나 황후 출처 구글 이미지]

이렇게 흠잡을 데 없는 인격자는 자칫하면 숨막히는 존재가 되기 쉽지만, 안토니누스의 경우는 유머 감각이 있고 얼굴에는 늘 온화한 웃음이 감돌고 있어서 남에게 경원당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또한 낚시와 포도주를 좋아하고 직접 수확철에는 농부와 함께 일하기도 해서 완벽한 시골 신사라는 느낌이 늘 따라다녔다.


신사에게는 행동거지에서 품위와 온화함을 잃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남을 꾸짖을 때도 품위있고 온화한 태도를 허물어뜨리면 안 된다. 하루는 ‘아들’ 안니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정교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현인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


죽음


행운과 행복으로 충만한 23년을 보내고 찾아온 서기 161년 봄, 롤리오 별장에 머물고 있던 황제는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먹은 것을 다 토해버렸다. 그날 밤부터 이튿날까지 고열이 계속되었다. 반년만 지나면 75세가 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국장을 너무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같은 로마 황제지만,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통치자로서 치세를 마쳤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버지 역할로 일관했다. 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묘사한 안토니누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像)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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