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10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 제국의 인프라스트럭처에 관해 별도로 정리한 특별편이다. 로마인은 ‘인프라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인프라를 중시한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프라로 인해 로마가 동·서양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1,000년이 넘게 이를 유지하며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후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인프라를 ‘로마 문명의 위대한 기념비’라고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로마인이 중시하던 인프라의 범위는 사실 매우 광범위했다. 하드웨어적인 인프라만 해도 도로·교량·항만·신전·공회당·광장·극장·원형투기장·경기장·공중 목욕장·수도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거기에 소프트웨어적인 인프라에는 국가의 운영에 기본적인 국방·치안·조세에다 의료·교육·우편·통화 등의 사회복지 시스템까지 포함된다. 더구나 이런 인프라는 오랜 세월을 두고 상황에 맞춰 조금씩 발전해 나갔기 때문에 이런 로마의 인프라 전체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종합하여 고찰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인프라스트럭처만큼 그것을 이룩한 민족의 자질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기 때문에 로마 제국과 로마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과 제국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로마만큼 인프라스트럭처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끈기있게 지속하면서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제국은 없었다. 그리고 로마인은 후세에 기념비를 남기기 위해 그러한 대사업을 벌인 게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의 운영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했을 뿐이다.
제1부 로마의 가도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에서는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비암 무니레’(viam munire)라고 한다. ‘비암’은 도로, ‘무니레’는 건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니레’에는 원래 ‘방벽(mūrus)을 쌓는다’는 의미가 있다. 길게 뻗은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곧 길게 뻗은 방벽을 쌓는 것과 같다고 고대 로마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도로와 방벽 자체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로마의 간선도로인 가도(街道)는 큰 마름돌을 깐 4미터 가량의 차도와 좌우 3미터씩의 인도를 합해 너비가 10미터가 넘고, 깊이도 4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1미터가 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평’인 가도를 ‘수직’으로 세우기만 하면 단번에 견고한 방벽으로 바뀌는 것이다.
도로 건설에 필요한 비용은 어디서 마련했는가. 공화정 시대에도 제정 시대에도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입안자였고, 결정권도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로마의 입법기관인 원로원이 갖고 있는 이상, 건설비는 당연히 국고에서 나온다. 요컨대 국세로 건설비를 충당한 셈이다.
공사 시행은 누가 맡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군대로 되어 있는데, 로마 가도를 군대가 건설한 것은 로마 가도가 애당초 군용 도로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가도나 수도가 완성된 뒤 유지·보수를 포함한 관리를 맡은 것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였다. 로마인은 인프라를 ‘공’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 생각은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가도의 시작
길은 사람이 발로 밟아 다지기만 해도 생긴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길은 반드시 존재한다. 로마의 길도 초기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길이었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도 로마에는 오래된 길이 몇 개나 있었다.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는 ‘소금길’이라는 뜻이다.
테베레강 어귀에서 생산된 소금을 자루에 넣어 작은 배에 싣고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와 로마에 하역한다. 그러면 소금 자루를 당나귀에 싣고 이 소금길을 따라 이탈리아 전역에 소금을 팔았다. 초기 로마인들에게 소금은, 판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생산품이었을 것이다. '소금길'이라는 이름이 이 길의 정식 명칭으로 정착된 것 자체가 당시 로마인들에게 '소금길'이 갖고 있었던 중요성을 보여준다.
‘라티나 가도’(Via Latina),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이 길들은 각각 라티나로 가는 길, 티부르(오늘날의 티볼리)로 가는 길, 노멘툼(오늘날의 멘타나)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초기의 로마인과 교류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와 로마를 연결하고 있던 길인데, 이 길들도 ‘소금길’과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길이었을 게 분명하다. 건국 이후 400년 동안, 로마인의 길은 겨우 이 정도였다.
아피아 가도
가도에 대한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은 기원전 312년에 ‘아피아 가도’(Via Appia)가 착공된 뒤였다. 아피아 가도는 ‘아피우스의 길’이라는 뜻이다. 그해의 재무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vs Clavdivs Caecvs)가 입안하고 원로원이 가결하고 아피우스 자신이 총감독을 맡아서 건설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처음 카푸아까지만 놓여졌다. 카푸아는 당시 로마가 제패한 지역의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268년에 베네벤토가 로마 영토에 편입되자마자 거기까지 연장되었고, 다음에는 베노사까지, 거기서 다시 타란토까지 연장되었다. 종점인 브린디시까지 뚫린 것은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는 이 항구도시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온 20년 뒤의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어떤 지역을 로마가 정복한 뒤에는 그 로마군이 거기에 가도를 놓는, 로마인의 인프라에 의한 통치방식이 정착된 것이다.
로마인은 아피아 가도를 ‘가도의 여왕’(regina viarum)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로마식 가도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줄곧 동방으로 가는 대동맥이었다는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로마 가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의 본보기를 아피아 가도가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 가도는 우선 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군용도로서의 기능을 충족해야 하고, 정략적으로 피정복 주민들도 활용할 수 있게 도시 한복판을 관통하도록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피아 가도는 카르타고가 멸망하기 100년 전에 깔렸지만, 이 도로가 그 이후에 생긴 모든 로마 가도의 본보기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가도도 항상 여러 개의 선택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제국에 이미 역사가 헤로도토스를 경탄시킨 포장도로가 있었다.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로 빠지는 도로다. 하지만 길을 네트워크화하면 기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실현한 것은 로마인이다.
로마식 가도의 구조
평야에 직선으로 길을 낼 수 있는 지형인 경우, 로마 가도의 기본형은 아래 그림과 같다. 로마 가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차도 양옆에 배수로가 나란히 뻗어 있었다는 점이다. 배수로에는 물이 길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도록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고대 로마 토목기사들의 좌우명은 “바위는 우리 편, 물은 적”이었다.
로마 가도의 두 번째 특징은 포장도로 바로 바깥쪽에 나무 심는 것을 엄금했다는 점이다. 원래 나무가 있으면 베어버렸다. 지하로 뻗는 뿌리가 네 층으로 이루어진 도로의 주요 부분을 침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다.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시내 도로와 마찬가지로 시외의 가도에도 인도가 딸려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인들이 애초에 이렇게 곧고 평탄한 길에 집착한 것은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는데, 전속력으로 말이나 마차를 몰려면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기원전 120년경 최초의 도로 관련법인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이 성립한다.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입안한 법률이다. 이 법에 따라 모든 로마 가도에는 1로마 마일마다 돌기둥이 세워지게 된다. 로마 시대의 ‘마일’인 ‘밀리아레’(miliare)는 ‘1,000걸음’에 해당하는 거리로서 1.485킬로미터 안팎이다.
아울러 로마에는 길가에 묘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마련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런 관례를 만든 것도 아피우스였다. 아피우스는 아피아 가도 옆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아피아 가도는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부터 로마 시대 공공 건조물에 일관된 방침이었던 견고함·기능성·미관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아니, 그것은 방침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이었다. 입안자이자 공사 시행의 최고책임자였던 아피우스는 가도가 얼마나 평탄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샌들을 벗고 맨발로 걸어보았다고 한다.
아피아 가도에 이름을 남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인이 이룩한 또 하나의 위대한 인프라인 로마식 수도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이것도 아피아 가도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312년에 착공되었다. 기원전 272년 로마가 피로스에게 고전하고 있을 때 이미 은퇴하고 노쇠하여 눈도 보이지 않던 아피우스가 강화를 고민하던 원로원 의원들을 꾸짖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로마 근교의 가도망
로마의 순환도로 표지에는 청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SS.1. VIA AURELIA’라고 씌어 있다. ‘SS’는 ‘국도’를 뜻하는 ‘Strada Statale’의 약자니까, 이 도로표지는 ‘1번 국도, 아우렐리아 가도’를 나타낸다. 1번 국도로 가려면 이 입구로 들어가라는 지시다.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순환도로를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 경우, 눈에 들어오는 도로표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참고삼아 착공된 해와 구간도 기록해두겠다.
2,000년 전의 로마 가도를 아스팔트로 포장만 해서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탈리아의 국도(SS)다. 고속도로는 ‘Auto strada’라고 한다. ‘국도’와 달리 보행자는 배제된다. 도로표지에 적힌 기호는 ‘A’이고, 로마에서 북쪽의 밀라노까지 이어져 있는 고속도로는 ‘A1’, 남쪽의 나폴리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A2’다.
이탈리아에서 현대 문명의 산물인 고속도로보다 고대의 로마 가도를 개량한 국도가 수적으로 우세한 것은, 현대 이탈리아인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고대 로마인이 만든 길이 2,000년 세월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기보다 "모든 길은 로마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지만, 그것은 로마가 제국의 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장에서 몸 구석구석까지 피를 보내는 동맥이 바로 로마 가도였다.
수도 로마를 떠날 때는 12개였던 로마 가도가, 추운 북해에서 뜨거운 사하라 사막까지, 대서양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영국에서 시리아까지,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이집트까지 퍼져 있었던 로마 제국 전역으로 뻗어가는 동안, 의무적으로 돌을 깔아 포장해야 했던 간선도로만 해도 무려 375개로 늘어나고, 그 전체 길이는 8만 킬로미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다 자갈로 포장된 지선을 합치면 15만 킬로미터나 되는 혈맥이 로마 제국이라는 몸에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의 선두 주자가 바로 아피아 가도였다.
아우렐리아 가도
로마에서 북상해 제노바에 이르는 '아우렐리아 가도'를 착공한 것이 카르타고와 강화를 맺은 직후니까, 로마인이 가도 건설에 얼마나 강한 정열을 불태웠는지를 엿볼 수 있다. 티레니아해를 따라 북상해 피사를 지나 제노바에 이르는 아우렐리아 가도는 아피아 가도와 맞먹는 장거리 노선이다.
2,000년 뒤에는 '1번 국도'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고대에는 코사까지를 '옛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 Vetus), 코사에서 피사까지를 '새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 Nova), 피사에서 제노바까지를 '아이밀리아 스카우리 가도'(Via Aemilia Scauri)라고 불렀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공사도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세 가도가 ‘아우렐리아 가도'라는 이름으로 일원화된 것은 제정이 확립된 이후의 일이다. 이 가도 명칭도 입안자 겸 공사 책임자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따라서 '아우렐리아 가도'는 '아우렐리우스(Gaius Aurelius Cotta)'가 만든 길이라는 뜻이다. 이 가도는 언젠가 남프랑스를 지나 에스파냐로 가는 가도와 연결될 예정이었다. 기원전 3세기 초의 제노바는 어촌에 불과했고, 가도 종착지가 될 만한 도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플라미니아 가도
기원전 220년,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 Nepos)는 아피아 가도와 더불어 로마 역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플라미니아 가도’(Via Flaminia)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피아’가 가장 중요한 남행 노선이라면, 가장 중요한 북행 노선은 ‘플라미니아’다.
전체 길이는 ‘아피아’가 540킬로미터인 반면에 ‘플라미니아’는 340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주로 평원을 달리는 아피아 가도와는 달리 플라미니아 가도가 지나는 곳은 대부분 산지다.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리미니까지 340킬로미터를 차도와 인도를 합해 10미터 너비로 뚫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난공사였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는 건설된 지 200년 뒤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전면 개조한 뒤의 모습이지만, 산지인 만큼 골짜기를 흐르는 급류가 많기 때문에 물이 불어났을 경우를 고려해 가도는 산허리를 누비며 달리고, 수많은 다리도 높은 곳에 만들어져 있다. 너비 6미터에 길이 40미터인 터널까지 뚫려 있다.
아이밀리아 가도
가도 건설의 세 번째 물결이 시작된 기원전 187년은 리미니에서 피아첸차에 이르는 ‘아이밀리아 가도’(Via Aemilia)를 착공한 해이다. 로마냐 평야를 거의 일직선으로 달리는 이 가도는 지금도 9번 국도로서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네트워크화를 좋아하는 로마인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피아첸차와 제노바를 잇는 이 가도도 건설되어 아우렐리아 가도와 이어진다.
한니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이탈리아 북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는데, 로마인은 고집스럽게도 방벽을 쌓는 안전보장책보다 도로망을 까는 안전보장책을 택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느리기는 하지만 착실하게 이탈리아반도를 가도로 그물처럼 연결하는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이후의 가도들
로마에서 피렌체에 이르는 ‘카시아 가도’(Via Cassia)가 착공된 것은 기원전 154년 무렵이다. 현재의 ‘2번 국도’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피렌체에서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아이밀리아 가도’ 연변의 군단기지인 볼로냐에 이르는 가도도 건설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늘날 10번 국도가 된 ‘포스투미아 가도’(Via Postumia)가 기원전 148년에 착공되어, 피아첸차와 아퀼레이아가 연결되었다. 네트워크화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카푸아와 칼라브리아를 잇는 ‘안니아 가도’(Via Annia)가 기원전 131년에 착공되었다. 수도 로마에서 카푸아까지는 아피아 가도, 카푸아에서 레조까지는 안니아 가도가 뚫려, 릴레이 경주에서의 배턴 터치처럼 가도들이 연결되었다. 안니아 가도의 개통으로 로마인들은 아피우스가 처음 시작한 지 200년 만에 이탈리아반도의 주요 ‘동맥’을 만드는 일을 끝낸 셈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가도망이 정비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남부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도미티아 가도’(Via Domitia)도 건설되었다. 아피아 가도의 종점인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하루나 이틀 동안 아드리아해를 건너가면 디라키움에 이르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그리스를 가로지르는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도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서쪽과 동쪽 방향으로, 요즘으로 치면 고속철도나 고속도로인 가도를 뚫은 셈이다.
갈리아 가도
알프스산맥은 로마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반도의 북쪽을 빙 둘러싸고 있다. 오늘날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이 되어 있지만, 고대에는 이 나라들이 모두 로마 제국 영토였기 때문에 로마의 간선도로는 당연히 알프스산맥을 넘어 서쪽이나 북쪽이나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래 그림은 프랑스의 발랑스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토리노에 이르는 로마 가도 연변에 어떤 편의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도면이다. 이 도면의 토대가 된 사료는 서기 333년에 보르도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여행한 어느 무명의 순례자가 남긴 기록이다. 『한 보르도인의 예루살렘 여행기』(Itinerarium Hierosolymitanum Burdigalense)라고 불리는 이 기행문의 특징은 자기가 지나간 가도의 모든 시설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히스파니아 가도
브리타니아 가도
그리스 가도
도나우 강변과 동방 가도
중동과 이집트 가도
북아프리카 가도
로마 가도 연구
로마 가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로마 가도가 건설된 지 무려 1,700년 뒤에 프랑스의 니콜라 베르지에(Nicolas Bergier)라는 젊은 변호사의 손으로 시작되었다. 베르지에는 프랑스 북부의 랭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자기가 매일 법원에 가는 길이 로마 가도인 것을 깨달았다.
랭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제패할 때 유력한 부족인 레미족의 본거지였고, 로마의 속주가 된 뒤에서도 7개나 되는 로마 가도가 모이는 교통의 요지로 번영을 누렸다.
이후 그는 변호사 일도 그만두고 프랑스에 남아 있는 로마의 가도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1622년에 파리에서 간행된 『로마 제국의 가도의 역사』(Histoire des Grands Chemins de l ’ Empire Romain)로 결실을 맺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났으니 로마 가도에 대한 연구는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400년을 학자들이 낭비한 것은 아니다. 특히 19세기 중엽부터 150년 동안은 학문적인 연구서가 수없이 발표되었다.
돌로 포장된 간선도로만 해도 5만 3,000로마 마일,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8만 킬로미터, 자갈로 포장된 지선도로까지 합 하면 15만 킬로미터라는 통계 숫자도 각국의 연구 성과를 합계한 숫자다. 로마인이 도로망을 건설한 지역은 너무 광대해서 2,000년 뒤인 오늘날에도 한 사람의 연구자가 그것을 다 총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20세기 중엽에 그 일을 어느 정도 이룩한 사람이 있다. 빅토르 볼프강 폰 하긴(Victor Wolfgang von Hagen)이라는 독일인인데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하는 데 열심이었던 미국의 원조로 1958년부터 조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1968년, 로마에 모인 불과 6명의 조사단원들은 사진과 그림이 많이 들어간 저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로마로 향하는 길들』(The roads that led to Rome)이었다. 로마 가도를 거의 답사하다시피 여행한 뒤인 만큼, 이 제목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초판이 간 행된 곳은 런던이었다.
로마 시대의 지도
지도는 정보의 집적이다. 고대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도 제정 시대에도 이런 정보를 일관되게 공개했다. 황제가 지은 공공 건축물에 반드시 딸려 있는 회랑 벽면에는 색깔 대리석을 이용해 각 속주를 색깔로 구분한 제국 지도가 그려져 있고, 시내 서점에서도 온갖 종류의 지도가 팔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도를 라틴어로 ‘이티네라리움’(itinerarium)이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아래 은컵 4개는 여행에 가져가기 위해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 이 컵은 로마 가도에 1마일마다 세워진 ‘이정표’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컵의 표면을 빙 둘러서 라틴어 문자로 숙박시설, 말을 교환하고 마차를 수리하는 시설, 식사와 음료수를 제공하는 시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 로마 숫자로 그 시설들 사이의 거리를 로마 마일로 표시하고 있다.
이런 은컵 이외에 『미슐랭 가이드』의 ‘고대판’이 아닐까 여겨지는 지도도 있었다. ‘타불라 페우팅게리아나’(Tabula Peutingeriana)라고 불리는 지도인데,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을 11세기에 모사해 빈 국립도서관 소장품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양피지 11장을 길게 이어 맞춘 두루마리로 되어 있고, 길이가 6.75미터에 너비는 34센티미터다.
이 지도에는 왼쪽의 브리타니아가 빠져 있어 원래 고대 원본은 총 12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에는 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북쪽으로는 발트해에서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에 이르는 ‘세계’의 정보가 그려져 있다.
지도에서 동쪽 끝에 있는 인더스강 부근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이곳은 알렉산드로스가, 알렉산드로스야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신탁을 들은 땅”
동방을 원정하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신탁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원정을 중단하고 서쪽으로 발길을 돌린 지점이 인더스강이었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 부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이 일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에게 이끌려 40년 동안이나 헤매 다닌 사막”
시나이산에는 “이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글이 적혀 있다.
로마 시대에는 신전도 교회도 모두 ‘바실리카’(Basilica)라고 불린 건물 모양의 기호로 표시되었다. 로마 시대의 ‘바실리카’는 재판이나 상거래에 이용되는 공회당이었지만, ‘타불라 페우팅게리아나’가 제작된 4세기 중엽에는 법치국가와 자유경제의 상징이었던 ‘바실리카’가 기독교도들이 모이는 ‘바실리카’로 바뀐 경우도 많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타불라’가 제작된 시대에는 아직 로마다운 로마가 건재했다는 증거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실리카’보다 대대적으로 그려져 있는 온천장이다. 요컨대 온천을 바실리카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셈이다. 로마인은 많은 인구를 거느린 도시만이 아니라 변경의 군단기지에도 목욕 설비만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지도가 제작된 시기가 서기 4세기 중엽이라는 데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다. 이 지도에 이미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도 수없이 그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인정했지만 다른 종교를 금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도시는 이탈리아의 로마,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고, 이 지도에서도 이 3대 도시는 특별한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3대 도시 이외에 성벽을 둘러친 기호로 표시되어 있는 6개 도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아퀼레이아,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터키의 앙카라와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다.
가도를 이용한 사람들
군단
로마 가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군단을 이동시키는 길이었다. 여기서 군단은 단순히 군단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 군단은 크게 나누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 속주민 지원병인 보조병, 그리고 대부분 속주 출신인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무장 보병, 경무장 보병, 기병으로 바꿔 말해도 좋다. 수는 기병보다 보병이 휠씬 많고, 군단을 이처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전술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단에는 전투원만이 아니라 비전투원도 함께 편성되어 있어 이들도 수레도 함께 이동하게 된다. 우선 의료진과 말이나 소를 치료하는 수의사가 군단에 배속되어 있다. 다음에는 군단에 근무하는 토목기사들, 이들은 말하자면 공병대장 같은 존재지만, 그 휘하에 공병대원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는 말이 있을 만큼 군단병은 물론 보조병까지도 모두 '공병'이었던 것이 로마 군단의 특징이었다.
또한 공성기와 야영용 텐트나 군량 등을 가득 실은 짐수레도 동행했다. 짐수레를 끈 것은 대부분 소였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도 있었다. 로마군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정신력에 기대를 걸기 전에 먼저 병사 개개인이 정신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도록 그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선결 문제로 여겨졌다. 행군하는 군단과 마주친 일반 나그네들을 위해서라도, 차도와 나란히 달리는 3미터 너비의 인도는 꼭 필요했다.
일반인
로마 가도의 두 번째 이용자는 일반인이다. 로마 가도는 인도가 있고 톨게이트가 없는 고속도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도보 여행자도 지나다니고, 주변의 농산물을 실은 짐수레도 이용한다. 도보 여행자는 다닐 수 없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는 다르다.
휴일에는 교외의 별장으로 몰려 나가는 도시 생활자처럼 근거리 이용자도 있고,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보려고 속주 에스파냐를 떠나 피레네산맥을 넘고 남프랑스를 가로지르고 알프스산맥을 넘고 북이탈리아를 지나 로마까지 먼 길을 더듬어온 사람도 있다. 또한 로마에는 권력자들이 모여 있으니까, 강력한 후원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까마득한 동방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또한 평탄하게 직선으로 뚫려 있고 게다가 포장까지 되어 있는 로마 가도를 이용하면, 사람의 발길에 다져진 종래의 길보다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짐도 많이 실을 수 있었다. 통행 횟수가 늘어나는 동시에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양도 늘어난 것이다. 사람과 물자가 빈번하게 교류되면 당연히 경제도 활성화한다. 제국 전역에 퍼진 도로망은 로마 제국을 하나의 대경제권으로 바꾸어놓았다.
우편배달부
이 로마 가도를 이용한 세 번째 부류는 우편배달부였다. 로마인은 우편제도를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국영 우편배달 시스템이다. 로마의 우편배달부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말을 계속 바꿔 타는 방법으로 속력을 높였다. 게다가 우편물이 있든 없든 정기적으로 배달부가 왕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창안한 제도다. 갈리아 원정 당시 수도 로마와 신속하게 연락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다.
이것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뒤 국영우편제도로 정착시켰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40년에 이르는 치세의 대부분을 수도 로마에 둘러앉아 제국 전역을 다스렸다. 이 로마로 모든 정보가 모이고, 그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 제국 각지로 훈령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만 구축하면 수도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로마 가도를 건설한 애초의 목적이 군단의 신속한 이동에 있었듯이, 로마의 우편제도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할 때의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은 다른 목적에도 전용할 수 있다. 황제와 장군들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편제도를 일반인도 이용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로마 제국의 우편제도가 공문서를 휴대하고 달리는 말과 사람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편마차로 배달하는 편지나 소포도 있었다. 변경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고국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나, 가족들이 병사에게 보내는 물건은 우편마차로 운송되었다. 마차가 사용되면, 말을 교환하기 위한 ‘무타티오네스’ 이외에 마차를 수리할 수 있는 설비도 필요하다.
또한 로마 가도는 우편마차만이 아니라 일반 여행자의 개인용 마차나 여러 사람이 함께 타는 합승마차도 이용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숙박 설비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루 노정마다 온갖 설비를 갖춘 ‘여관’이 설치되었다. 말 교환소 5개에 여관 1개의 비율이었다니까, 여관은 60킬로미터 내지 70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 ‘여관’을 라틴어로 ‘만시오네스’(mansiones)라고 하는데, 영어 낱말 ‘mansion’의 어원이다.
로마 가도가 제국의 일체화에 이바지했듯이, 우편제도도 각 지방에 사는 주민들의 일체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벽을 쌓아서 격리하지 않고,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패자를 동화' 시켜 로마 제국 전체를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은 로마의 위정자가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민족이나 부족의 고립이었기 때문이다.
제2부 로마의 다리
로마의 배다리와 긴 다리
로마의 임시 다리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갈리아 전쟁 때 카이사르가 라인강에 말뚝을 박아서 만든 나무다리일 것이다. 이것이 라인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였다. 배를 타고 건너도 되지만 굳이 다리를 놓고 건넌 이유를 카이사르는 안전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로마 시민 전체의 명예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이사르는 라인강 동쪽까지 정복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며칠 만에 나무다리를 뚝딱 만들어내고 그 다리를 건너 게르만인의 땅으로 쳐들어가는 두 가지 과시 행위를 끝낸 뒤에는 나무다리를 불태워버렸다. 로마인의 생각에 나무다리는 역시 임시 다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임시 다리인 것 같은데, 로마인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지 않은 다리가 있다. 이런 형태의 다리를 로마인은 ‘긴 다리’(pons longus)라고 불렀다. 이것도 역시 카이사르가 착상해낸 것이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 지방은 오늘날의 프랑스·벨기에·스위스와 독일 서부 및 네덜란드 남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기원전 1세기 당시에는 아직 미개지가 많았고, 특히 북부 지방에는 수많은 숲과 늪지가 산재해 있었다.
그러니 늪지대에서도 행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카이사르는 기존 섶나무 다발 위에 자갈을 깔았다. 게다가 이 ‘긴 다리’를 하나가 아니라 나란히 몇 개나 놓았다. 다시 말해, 1차선이 아니라 4차선, 5차선 도로를 만든 것이다.
가도의 연장
로마인은 다리(pons)를 가도(via)의 동생이라고 불렀다. 가도는 여성명사니까 ‘누나’이고, 남성명사인 다리는 ‘남동생’인 셈이다. 오누이인 이상 서로 돕는 사이여야 하고, 이런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내구성(firmitas)과 기능성(utilitas)과 아름다움(venustas)도 실현할 수 있다고 로마인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만들어진 로마의 다리는 동시대에 타민족이 만든 다리에 비해, 또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만들어진 다리에 비해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석조 다리라는 점.
둘째, 홍예교(무지개다리)처럼 올라갔다 내려가는 다리가 아니라 수평으로 놓인 다리였다는 점.
셋째, 가도의 연장선상에 건설되었다는 점.
넷째, 다리도 그것과 이어진 가도와 같은 재료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 돌로 포장된 간선도로와 이어져 있는 다리는 돌로 포장되고, 자갈로 포장된 지선도로는 다리도 자갈로 포장되었다는 이야기다.
다섯째, 다리에서도 차도와 인도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
여섯째, 다리 양쪽 끝에 개선문 형태의 아치문이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 이것은 다리의 출입구를 나타내는 동시에 장식이기도 했다.
로마의 교각 공사
로마 가도의 연장이 로마식 다리였지만, 땅에 놓는 가도와 강에 놓는 다리는 조성 방법에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공사 과정에서 로마의 토목기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배수 문제다.
일단 다리 자체가 완만하게 아치를 그린다. 비가 내리면, 그 물은 아치의 완만한 선을 따라 양쪽의 다리목으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폭우가 내리면 다리목이 당장 물바다가 되어 통행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싶지만, 로마의 토목기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빗물은 다리목에 고이기 전에 양쪽 인도 밑에 파놓은 배수로를 따라 강으로 흘러내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도는 지표에서 1미터 이상 파 내려가 견고한 기반을 만들고 그 위에 자갈 따위를 깔아서 만들었지만, 다리는 땅이 아니라 물 위를 지난다. 교각을 세우는 동안 강물의 흐름을 막아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로마의 토목기사들은 다음 순서로 일을 진행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1. 교각을 세울 위치가 정해지면, 그 전후좌우에 말뚝과 널빤지를 벽처럼 둘러친다.
2. 그 안쪽에 갇힌 물을 모두 퍼낸다.
3. 이리하여 지표와 같은 상태가 된 강바닥을 깊이 파 내려간 다음, 거기에 석재를 층층이 쌓아서 교각을 만든다.
이 방법은 기술이 진보해 작업이 기계화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로마 시대의 유명한 다리들
제3부 로마의 수도(水道)
로마가 세워진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312년까지 440년 동안은 로마인도 고대의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샘이나 우물이나 시내에서 물을 길어 사용했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살았던 한 로마 정치가가 이런 상황을 바꿔버린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최초의 로마식 가도인 ‘아피아 가도’를 입안하고 건설한 바로 그 사람이다. 아피우스는 사람이나 수레가 지나다녀서 자연스럽게 생긴 길이 있는데도 인공으로 로마식 가도를 뚫었듯이, 물도 인공적으로 안정된 공급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피아 가도와 함께 기원전 312년에 착공된 로마 최초의 수도는 가도와 마찬가지로 입안자 겸 공사 책임자인 사람의 성을 따서 ‘아피아 수도’(Aqua Appia)라고 명명되었다. 당시 아피우스는 재무관이었다. 재무관의 임기는 5년이나 된다. 이것이 아피우스가 1년으로는 끝나지 않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을 것이다.
기원전 312년이라는 해는 로마에는 ‘인프라 원년’이었다. ‘아피아 가도’가 나중에 건설된 모든 로마 가도의 모델이 되었듯이, ‘아피아 수도’도 나중에 건설된 모든 로마 수도의 기본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길이는 16.617킬로미터, 그 가운데 지하에 뚫린 길이는 16.528킬로미터, 지상에 있는 길이는 89미터이다.
지하 수도인 경우에는 갱도를 파고, 지상 수도인 경우에는 육교나 고가교를 만들어 그 위를 물이 흐르게 했다. ‘아피아 수도’의 지하 수도와 지상 수도의 비율은 185 대 1로, 나중에 건설된 로마 수도에 비해 지하 수도가 훨씬 길다. 쳐들어온 적이 파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아피아 수도’의 수원(水源)은 로마 동쪽에 있는 산지에서 솟아나는 물이다. 그런데 로마 시대의 수도 공사 관계자는 수원을 어떻게 결정했을까. 우선 산지에 많은 샘이나 호수에서 물을 길어다가 육안으로 검사한다. 이 단계에서는 물이 맑고 색깔도 없고 불순물도 없으면 합격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수원 주변 지역을 조사한다. 초목의 생장 상태는 어떤지, 토양 색깔은 어떤지. 주변에 사는 사람들까지 조사한다. 어쨌든 소독약이 없었던 시대다. 수원을 결정할 때까지 조사나 검사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리고 수면보다 훨씬 밑에 있는 맑은 물을 끌어내려고 호수나 샘 옆에 닿는 갱도를 팠을 정도다.
소독약이 없던 시대에 물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계속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물은 고이면 썩으니까, 계속 흐르게 내버려두면 수질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긴 수도에서 물이 적절하게 흐르도록 적절한 경사도를 계산하는 것은 수도 공사에서 특히 필수였다.
로마인이 수십 미터 높이의 고가교 수도를 만든 것은 권력이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토목기사들은 낙하하는 힘으로 물을 밀어 올리는 사이펀의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기계화하지는 못했다. 동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펀의 원리를 활용하고 싶으면, 물을 높은 곳으로 끌어와서 그것이 낙하하는 힘을 추진력으로 바꾸어 물을 앞으로 밀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촌락이 아니라 도시다. 흘려보내야 하는 물의 양도 훨씬 많다. 게다가 로마인이 ‘카스텔룸’(castellum)이라고 부른 저수조에 일단 모아두었다가 흘려보내는 것이므로, 도시 안팎의 수도는 고가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두 번째 수도인 ‘옛 아니오 수도’(Anio Vetus)는 ‘아피아 수도’보다 40년 뒤인 기원전 272년에 착공되었다. 이 수도에 ‘옛’(vetus)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은 제정 시대에 ‘새 아니오 수도’가 건설된 뒤니까, 그때까지는 그냥 ‘아니오 수도’라고 불렸다. ‘아니오’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테베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이름이다.
세 번째 로마 수도는 기원전 144년에야 착공된다. 그보다 2년 전에는 카르타고가 불타버린 것을 마지막으로 제3차 포에니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제 로마가 나랏돈의 상당 부분을 인프라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수도는 입안자인 법무관 마르키우스의 이름을 따서 ‘마르키아 수도’(Aqua Marcia)라고 부른다. 기원전 125년에 착공된 로마의 네 번째 수도는 ‘테풀라 수도’(Aqua Tepula)인데, 이 수도에 관해서만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후 로마의 수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에 이루어진다. 당시 아그리파는 제국의 수도 로마에도 수도를 세 개나 건설했다. 기존의 수도 네 개를 보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두 개는 아그리파가 완성했지만, 하나는 그가 죽은 지 10년 뒤에야 완성되었다. 그가 착공한 수도의 이름은 '율리아 수도'와 '비르고 수도', 그리고 '알시에티나 수도'다.
‘율리아 수도'는 아우구스투스의 씨족 이름인 '율리우스'를 딴 것이다. 총길이는 22.9킬로미터 지하 수도는 12.5킬로미터 지상 수도는 10.4킬로미터 지상 수도 가운데 9.6킬로미터가 고가 수도로 되어 있다. 하루 송수량은 ’마르키아 수도'의 4분의 1이라니까 5만 세제곱미터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로마 시내의 동부지역에 원활하게 물을 공급하는 것이 이 수도를 건설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그리파가 가장 정열을 기울인 수도는 역시 '비르고 수도'(Aqua Virgo)였을 것 이다. 이것은 그가 건설한 로마 최초의 대규모 공중 목욕장인 '아그리파 목욕장'에 물을 공급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건설된 수도였기 때문이다. '주된 목적'이라고 말한 것은 아그리파 목욕장'만이 아니라 마르스 광장 일대에 물을 공급하는 기능도 겸했기 때문이다.
'비르고 수도'는 북쪽에서 로마 시내로 들어와, 오늘날 스페인 광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고가 수도가 되어 판테온 남쪽에 있는 목욕장까지 시내를 가로질러 남하했다. 나중에는 더 남쪽까지 연장되었는데, 이 수도만은 완공된 날이 확실하다. 기원전 19년 6월 9일 이 수도관에 처음 물이 흐른 날이라고 한다. 제정으로 바뀐 지 11년 뒤의 일이다.
2,000년 전의 '비르고 수도'는 이렇게 르네상스 시대에 '베르지네 수도'로 부활해 오늘날까지 로마 도심에 계속 물을 보내고 있다. 트레비 분수나 스페인 광장의 분수를 비롯해 로마 시내에 수없이 많은 분수는 거의 다 이 수도를 통해 흘러드는 물을 사용하고 있다. 분수만이 아니라 로마의 옛 시가지에서는 하루 종일 물이 잘촬 흐르는 수도꼭지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물도 '비르고 수도'를 지나오는 물이다.
이후 로마는 아그리파가 시작한 ‘알시에티나 수도’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만든 ‘클라우디아 수도’와 ‘새 아니오 수도’(Anio Novus)까지 모두 아홉 개의 수도를 갖추어 안정적인 물 공급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서기 109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완공한 ‘트라야나 수도’(Aqua Traiana), 서기 3세기에 건설된 열한 번째이자 로마의 마지막 수도인 ‘안토니니아나 수도’(Aqua Antoniniana)가 건설되었다.
제4부 로마의 목욕탕
로마인은 그 후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목욕을 좋아해서, 웬만한 도시에 여러 개의 공중 목욕장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목욕장의 크기가 커지는 동시에 호화로워진다. 황제가 지어서 서민들에게 기증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내에 있었던 유명한 목욕장을 지어진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그리파 목욕장, 네로 목욕장, 티투스 목욕장, 트라야누스 목욕장, 카라칼라 목욕장, 데키우스 목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콘스탄티누스 목욕장.
제국의 최전선이었던 오늘날의 영국에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찾아가서 전선에 근무하는 병사들을 위한 목욕장을 보았을 때는 놀라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강물을 이용한 소규모 목욕장이었지만, 최전선에서도 로마인들은 여전히 목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목욕장 안팎에 장식되어 있는 미술품은 수준도 높고 수도 많아서, 공중 목욕장은 로마 시대의 미술관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아그리파 목욕장’에 있는 조각상 하나가 마음에 든 티베리우스 황제가 어차피 서민들은 걸작 미술품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황궁으로 옮겼다가, 목욕객들의 요란한 항의를 받고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감상하는 그리스-로마의 조각상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이런 공중 목욕장 자리에서 발굴된 작품이다. 바티칸미술관의 보배라고 일컫는 ‘라오콘 군상’도 원래는 ‘트라야누스 목욕장’을 장식하고 있었던 작품이다.
이런 걸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던 목욕장(테르마이)을, 로마의 서민들이 ‘우리 가난뱅이들을 위한 궁전’이라고 부른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가. 이만한 설비를 갖추고도 입장료는 빵 한 개와 포도주 한 잔 값에 해당하는 2분의 1 아시스에 불과했다. 게다가 병사와 어린이는 공짜다. 노예도 입장할 수 있었는데, 공무원인 노예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무료였다.
로마 시대에는 어느 도시에나 있었던 이런 공중 목욕장은 오랫동안 남녀 혼욕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남녀를 구별하게 된다. 다만 내부를 남탕과 여탕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도시에 반드시 있었던 공중 목욕장도 4세기 말부터는 입장객이 격감한다. 대형 목욕장에 물을 보내는 수도는 아직 완전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사고방식이었다. 그때까지는 알몸으로 스스럼없이 어울렸지만, 기독교의 지배가 확립된 이후에는 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사고방식이 확산되었다.
제5부 로마의 세제(제13권에서 발췌)
세금 내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에 한 사람도 없다. 무거운 세금에 짓눌리면, 그에 따른 불만이 봉기나 반란과 결부될 위험이 크다. 그래도 세금은 필요하다. 개인은 할 수 없는 많은 일들 국방, 치안, 인프라 정비, 사회복지 등은 주민 공동체인 국가가 해야 하고, 그것을 게을리하면 개인적으로 재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이 분리되어 사회 불안이 일어나기 쉽다.
그렇다면 납세자가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납득하는 세금의 한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공화정 시대에도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를 수 있는 패권 국가로 치닫고 있었던 로마가 참고할 만한 예가 세 개 있었다.
- 오리엔트 군주국 : 세율은 일정하지 않아서 무거운지 가벼운지 확실치 않지만, 부역이나 전쟁에 끌려 나가는 부담이 늘 가중되었다.
- 카르타고 : 세율은 최고 25%나 되지만, 카르타고 본국은 농업 기술을 지도하는 형태로 지방에 대한 진흥책을 취한 모양이다.
- 시라쿠사 : 참주 지배의 전제국가지만, 그곳을 방문한 플라톤이 강한 흥미를 가졌을 만큼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던 이 나라의 세율은 줄곧 10%였다.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달리 원리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로마인은 좋다 싶으면 적의 것이라도 태연히 받아들여 자기 힘을 증강했다. 패권 국가가 되고 제정으로 이행하자 세제도 그에 걸맞게 새로 만들 필요가 생겼지만, 그때도 이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의 세 가지 예도 경우에 따라 교사가 되기도 하고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원칙
공화정 시대를 거쳐 원수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제를 창설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 제국의 세제는 간단명료한 기본 방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세율은 낮게 억누르되 되도록 많은 사람이 세금을 내게 하고, 세율은 변하지 않고 계속 일정하게 유지된다. 상식적인 이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로마 제국의 세제를 후세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은 '세금은 넓고 얇게 징수한다'는 생각을 실현했다.”
고대는 승자와 패자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던 사회였고, 세금은 패자가 내는 것으로 정해져 있던 시대였다. 로마도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이상, 주역은 시민이다. 시민의 권리는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의무는 무기를 들고 공동체를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역이 '피의 세금'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패배자가 되지 않는 한 직접세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는 본질적으로 간접세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 '넓고 얕게' 를 실현하려면 승자인 로마인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 일을 해냈으니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세제는 고대에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세제는 단순한 세금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의 잘잘못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편성한 로마 제국의 세제는 기본 방침도 간단했지만 세금의 종류도 간단했다.
세금의 종류
* 로마에 패하여 정복당한 속주민에게 부과된 세금
속주세 수입의 10% - 그래서 '10분의 1세'(decima)라는 통칭으로 불렸다. 속주민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으니까, 이것은 국방 의무를 지는 로마 제국에 지불하는 안전보장세라고 키케로는 말했다. 이렇게 여겨진 세금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에 지원하여 보조병으로 제국의 안전보장을 담당한 속주민이 이 세금을 면제받은 것은 당연했다.
* 승자이고 정복자인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게 부과된 세금
1) 상속세 - 고대 사회 최초의 상속세로서, 6촌 이내의 친족이 아닌 사람이 상속한 경우에만 물리고 세율은 5%였다. 로마에는 남이라도 장래성이 있는 젊은이에게 재산을 일부나마 물려주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이 되어준 변호사에게도 유산의 일부를 남겼다.
로마법에서는 항상 사유재산을 유증할 수 있는 권리가 중시되었다. 이 권리를 인정 받아야만 비로소 어엿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다. 병사의 처우 개선에도 우선 이 권리가 명기되었고, 계속 독신으로 지낸 여자한테서는 이 권리를 박탈하여 공동체에 이바지하지 않은 벌을 주었다. 이것이 로마 사회였다. '유산 상속 20분의 1세'는 충분히 세입의 한 기둥이 될 수 있었다.
2) 노예 해방세 - 로마인에게는 오랫동안 자기를 섬긴 노예를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는 풍습이 있었다. 오랜 봉사에 대한 보수나 퇴직금을 주듯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 세율은 자유를 주고 싶은 노예를 시장에서 팔았을 때 받을 수 있는 몸값의 5%였다. 이 세금은 '노예 해방 20분의 1세'라고 불렸다.
* 승자인 로마인이든 패자인 속주민이든 로마 제국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야 하는 세금, 간접세
1) 관세 - 원어는 '포르토리아'(portoria)니까 직역하면 항만세지만, 바다나 하천의 항구에 설치된 세관에서 그곳을 통과하는 물산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세율은 15%에서 5% 사이. 오리엔트에서 수입하는 진주나 비단 같은 사치품은 25%였다. 경제력이 강한 이탈리아는 제국의 본국인데도 5%의 높은 관세를 물었지만, 라인강이나 도나우강 근처의 변경 속주에서는 1.5%밖에 물지 않았다.
2) 매상세 - 유통하는 모든 물산과 용역에 매겨지는 세금으로 소비세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세율은 어디서나 모든 물산과 용역에 대해 일률적으로 1%였다. 아무 설명도 없이 ‘100분의 1세'라고 말하면, 로마 제국에서는 이 세금을 가리킨다.
군사력 삭감
특기할 만한 것은 이런 세금의 세율이 낮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낮은 세율을 200년 동안이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세제를 정착시키면서 동시에 군사력의 대규모 삭감을 단행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준다.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통찰력에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항복한 병사를 포함해 50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그 50만 명을 결국 16만 8천 명으로 삭감했다. 16만 8천 명은 정규병인 군단병의 수이고, 군단 수로는 28개 군단이다. 여기에 속주민인 보조병을 합해서 30만 명이면 제국을 둘러싼 긴 국경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재편성은 이후 군사력이 경제력에 비해 지나치게 증강되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지도자였으니까, 그가 만든 세제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바탕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세금은 반란의 불씨가 되기 쉽다. 반란이 일어나면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할 필요가 있다. 국내를 제압하기 위한 병력을 상비해야 할 경우, 외적에 대한 방위력을 삭감할 수는 없으니까 군사력을 증강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 증강은 세금 증가로 이어진다. 세금이 늘어나면 반란이 일어난다. 이 악순환을 막고 싶으면 '넓고 얕게'를 세제의 기본 방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군사도 세무도 결국 정치다.
하지만 '넓고 얕게'는 좋지만, 매년 세입을 기대할 수 있는 직접세는 속주세뿐이었고, 간접세인 관세와 매상세 역시 세율이 200년 동안 변함없이 낮게 유지되는 세금 체제에서, 로마 제국이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사업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국가 재정 문제도 로마인이 공화정 시대부터 오랫동안 익숙해진 두 가지를 활용하여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지방분권'과 '이익의 사회 환원'이었다.
무니키피아의 재정
내가 '지방자치단체'라고 번역하는 '무니키피아'(municipia)는 원래 로마에 정복당한 도시나 부족의 근거지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에도 있고 속주에도 있다. 승리자 로마는 이런 곳을 지방자치단체나 자유도시로 분류하고, 완전한 내부 자치권을 부여했다.
자치권을 행사하려면 재정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와 식민도시와 자유도시의 재정적 기반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에서 추측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확립한 '알리멘타'(Alimenta)다. 가난한 집 자제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육영자금제도인데, 지방자치단체에 들어오는 국유지 소작료를 재원으로 삼도록 되어 있었다.
로마는 공화정 시대부터 각지에 '국유지'(ager publicus)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는 전쟁에 승리한 뒤 패배자의 소유지 일부를 배상금 대신 몰수한 것인데, 로마는 이 국유지를 농민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농지법'으로 양도권까지 포함한 차지권이 확립되었다. 수익의 10%인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짓는 사실상 영구적인 임차지였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중소기업 진흥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사회 실정으로 보아, 그냥 내버려두면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농장화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뭐니 뭐니해도 농업이 기간산업이었다. 이 소작료가 적어도 재정 기반의 상당 부분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도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공공심에도 많이 의존하였다.
공공 건조물 기부
공화정 시대에도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로마의 공공 건조물에는 개인의 가문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착공했지만 그가 암살당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한 마르켈루스 극장이 유일한 예외다.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린 조카를 그리워하여 아우구스투스가 붙인 이름이다. 나머지는 모두 건설비를 댄 사람의 가문 이름을 붙인다. '아이밀리우스 회당', '율리우스 회당', '폴페이우스 극장' 등등.
콜로세움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원형투기장도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투기장‘ 이다. 플라비우스 가문에 속하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게 했기 때문이다. 이 로마 특유의 관습은 이익의 사회 환원으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밀리우스도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도 시민의 선출과 원로원의 승인을 통해 전직 집정관에게 허용된 군단 지휘권을 얻었다. 전쟁에 승리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지만, 기회를 준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이었다.
개인 재산으로 공공 건조물을 지어 주민 공동체에 기증하는 것은 혜택받은 사람의 책무로 여겨졌다. 기증한 쪽이 얻는 권리는 그 인물이 속하는 가문 이름을 공공 건조물에 붙이는 것뿐이다. 이 로마적 관습은 제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쇠퇴하기는커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솔선수범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열심히 장려했기 때문에, 제정 시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더욱 활발해졌다.
콜로세움에도, '테르마이'로 통칭된 공중목욕장에도, 선착장에 세워진 창고들에도 모두 황제들의 가문 이름이 붙어 있다. 원수정 시대에는 황제도 시민과 원로원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존재였으니까, 유권자들에게 이익을 환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홀륭한 조각이나 걸작 벽화로 메워져 있는 '테르마이'를 사람들은 '서민의 궁전'이라고 불렀다. 2천 년 전 공중목욕장에서 목욕을 하면서 감상한 조형미술품이 오늘날에는 미술관에 정중하게 모셔져 있다.
황제의 재산
하지만 황제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막대한 액수의 돈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 었을까. 그것은 황제가 공화정 시대의 어떤 부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유복해졌기 때문이다. 국가 세입을 자기 주머니에 넣은 것이 아니라, 넓은 농경지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년에 아우구스투스가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왕조를 무너뜨린 뒤, 로마군이 정복한 다른 지방은 모두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양대 주권자인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소유하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지만, 이집트만은 제국의 속주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그 뒤를 이은 로마 황제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집트만은 속주 총독이 다스리는 지방이 아니라 황제 대리(vicarius)가 다스리는 지방이었고, 로마 황제는 막대한 수입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생산량만으로도 주식인 밀의 수요를 3분의 1이나 충당한 시대였다.
로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우구스투스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면에서 사회기반시설을 정비하고 충실하게 다지는 데 그 돈을 투입한다. ‘최고 중의 최고’인 그 이익의 ‘사회 환원'에 열을 올리자, 그 열의는 수평적으로는 속주에 전염되었고, 수직적으로는 윈로원 의원들만이 아니라 로마 사회에서 성공한 해방노예에까지 전염되어갔다. 이리하여 로마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제정 시대에 더욱 활발해졌다.
황제가 공공 도서관을 지으면 원로원 의원은 육영자금의 재원이 될 부동산을 기부하고, 시민은 도로를 보수할 때 일부 구간의 보수비를 부담하고,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된 해방노예는 고향에 있는 신전의 복구비를 부담하는 식이다. 로마 인은 이런 다양한 '이익의 사회 환원'을 알려지지 않은 선행으로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인정했고, 도로의 보수비를 일부만 부담해도 길옆에 그 사실을 새긴 비석을 세우는 것을 용납했다. 하지만 그것도 3세기를 경계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광대한 로마 제국은 국가와 지방과 개인의 세 본위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셋이 하나의 기본 이념으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다. 가장 로마적이라는 로마 가도망 중 간선(총계 8만 킬로미터)은 국가가 건설과 유지 보수를 책임지고, 지선(합계 7만 킬로미터)은 지방자치단체와 식민도시가 건설과 유지 보수를, 사도(모두 합하면 15만 킬로미터, 사도지만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는 개인이 건설과 유지 보수를 책임진다.
당시는 간접세의 세계였기 때문에 누진과세라는 사고 방식은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간접세의 세율은 낮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해진다.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기 쉬운 빈부격차 확대를 막고 싶으면 부유층이 돈을 내놓게 할 수밖에 없다. 매사에 신중했던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고, 부유층에 대해서는 공공심만이 아니라 그들의 허영심에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뒤 200년 동안 계속된 원수정 시대의 세제는 이처럼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참으로 세제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선정이냐 악정이냐를 가르는 갈림길이었다.
안토니누스 칙령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세제'라고 불러도 좋은 이 세제는 3세기에 붕괴한다. 붕괴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212년에 공포된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지만, 이 칙령을 발안하고 실시한 카라칼라 황제의 이름을 붙여서 '카라칼라 칙령‘ 이라고 부르는 법률이다. 이 법률의 공포로 로마 제국 안에 사는 종래의 '로마 시민'(romanus)과 속주민'(provincialis)의 차별은 완전히 철폐되었다.
로마 제국에 사는 주민이면 인종 민족.종교:문화의 차이도 관계없이 '로마 시민'이라는 점에서 모두 평등해졌다. 속주민이라는 신분이 사라졌다는 것은 속주세를 낼 의무도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속주세가 지금까지 로마 제국 세입의 기둥이었기 때문에 곤란해졌다. 그 대신 속주민에게도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를 부과하고 그 세율을 5%에서 10%로 올리면 속주세 소멸로 줄어드는 세입을 벌충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세금의 성질이 달랐다.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는 매년 계속해서 내는 세금이 아니고, 육친 이외의 사람에게 유산을 남기거나 노예에게 퇴직금 대신 자유를 주는 것은 속주민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로마 시민으로서는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특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까지 갑절로 늘어났기 때문에 불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두 가지 세금의 세율은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 제위에 오른 마크리누스가 원래대로 되돌린다. 하지만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격차 철폐가 무효가 된 것은 아니어서 속주세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세금 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특별세나 임시세가 남발되고, 게다가 그런 세금이 통상화되는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서기 3세기 이후의 상황
서기 3세기에는 야만족의 침입이 급증하고, 황제들은 고양이 눈처럼 어지럽게 바뀌었기 때문에 정치는 일관성을 잃고 '3세기의 위기'가 대명사가 될 만큼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3세기의 로마 제국에서 ‘세제’도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세제의 변모도 로마 제국이 1세기와 2세기의 원수정과 4세기 이후의 절대군주정으로 나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뒤 역대 황제들이 300년 동안 계승한 원수정 시대의 세금 철학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개조를 단행한 4세기 이후의 세금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야말로 180도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변혁이었다.
아우구스투스 - 세제납세자가 우선이다. 국가는 세입이 허용하는 범위의 것에만 손을 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 세제국가가 우선이다. 국가에 필요한 경비가 세금으로 납세자에게 부과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새로운 세제는 다음과 같은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1) 나라가 필요로 하는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 번씩 결정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된다.
(2) 세무는 모두 통합되고, 중앙정부가 그것을 관할한다.
(3) 세금은 생산 기반인 농경지에 부과되는 ‘토지세’(jugatio)와 생산 수단인 인간에게 부과되는 ‘인두세’(capitatio)로 양분되었고, 액수는 5년에 한 번씩 사정(査定)을 통해 결정된다.
생산 수단인 노동력에 매기는 세금은 14세부터 65세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65세는 평균수명을 넘어선 나이니까, 결국 죽을 때까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자도 인두세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시리아에서는 남녀가 평등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여자를 배제했고, 소아시아에서는 여자의 인두세가 남자의 절반으로 되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제6부 로마의 의료
로마에는 오랫동안 전문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그리스인 의사가 로마에서 진료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건국된 뒤 무려 500년 동안이나 로마인들은 의사가 없는 나라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의사가 없다고 해서 의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중에는 그리스에서 ‘돈을 벌러’ 오는 의사가 드물지 않게 되었지만, 이 그리스 의사들은 유력자나 부자에 대한 치료를 담당했고, 일반 시민은 여전히 가부장과 신들에게 의존하는 상태였다. 계속해서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로마의 의료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그 첫해인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력’을 제정하는 등 수많은 개혁에 착수했다. 의사와 교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것도 이런 개혁 가운데 하나였다. 조건은 단 하나. 수도 로마에서 의사는 의료에, 교사는 교육에 종사하는 것이다. 인종도 피부색도, 출신지도 사회적 지위도 일절 묻지 않는다. 물론 종교도 따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로마에서 일하고자 하는 의사와 교사가 급증했다. 변경을 지키는 군단에 의료진을 상주시킬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경찰서나 소방대도 전속 의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시내 도처에 ‘외래 환자 전용 병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소규모 진료소가 수없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 의학교가 있었던 곳은 소아시아 서해안 지방의 페르가몬, 스미르나, 에페소스, 크니도스, 코스섬,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이 도시들은 모두 헬레니즘의 세례를 받은 오리엔트에 있었다. 로마 시대에 접어든 뒤에도 여전히 의학 용어가 그리스어였던 것도 당연했다.
고대에도 내과, 외과, 산과,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정도는 전문화되어 있었지만, 기초과학보다 응용과학적인 기질을 가진 로마인은 의사들이 제 전문분야 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데 동조할 수 없었다.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의료의 세분화 경향을 개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코스섬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시대에는 아픈 부위마다 다른 의사를 불러야 하지는 않았을 걸세.“
그래서 로마인은 의학 연구는 그리스인에게 맡기고, 의료 세분화에 대한 대응책은 자기들끼리 생각해냈다. 전성기의 그리스인조차 생각지 못한 위생 대책이었다. 상하수도와 공중 목욕장을 완비하는 것은 도시와 그곳 주민들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로마인은 여기에 마사지를 추가한다.
일을 끝낸 뒤 목욕을 하고, 안마사한테 마사지를 받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저녁 식탁에 앉는 것이 로마인의 생활 방식이었다. 몸의 청결도는 키케로가 소크라테스보다 휠씬 높았을 것이다. 흔히 그리스-로마 문명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민족은 역시 달랐다.
군의는 로마인의 사고방식 자체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다. 군단기지 안에 있었던 군병원의 시설이 충실한 데에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 시대가 무려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군병원을 라틴어로 ‘발레투디나리움'(valetudinarium)이라고 하는데, 모두 28군데인 군단 주둔지에만 군병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발굴 조사 결과, 속주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보조부대가 주둔하는 기지에도 군병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한테만 군의가 딸린 것이 아니라, 보조 전력이긴 하지만 제국의 안전보장에 한몫 거들고 있는 보조병한테도 군의를 붙여준 것이다.
제30울피아 군단의 주둔지였던 크산텐의 군병원을 살펴보자. 로마 시대에는 ‘카스트라 베테라'라고 불린 이곳은 제국의 방위선인 라인강에 인접한 전선기지였고, 따라서 이곳에 설치된 병원은 야전병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에 따라 외부보다 내부로 열려 있는 이 병원은 네모반듯한 구조를 갖고 있어서, 마치 병원 자체가 군단기지인 듯한 느김을 준다.
안마당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방은 모두 65개지만, 발굴된 의료기구나 약품 보존용 항아리 등으로 미루어보아 의사 대기실과 약국으로 여겨지는 방을 제외하면 병실로 쓰인 것은 60개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추측이다. 각 병실의 규모는 3.5미터 x4.5미터니까 15.75제곱미터다. 병실 하나에 세 명은 수용할 수 있으니까, 180명의 입원 환자를 받을 수 있는 규모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 병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감탄할만한 특징이 있다. 우선 두 줄로 늘어서 있는 병실 사이의 통로 너비가 6미터나 된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각 병실의 출입구와 너비 6미터의 중앙 통로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은 교묘한 설계이다. 건물 내벽도 너비가 50센터미터나 되었다. 이만큼 벽이 두꺼우면 병실 안은 환자가 만족할 만큼 조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 시대의 군병원은 의료 대상을 군단 관계자로 한정하지 않았다. 특별히 황제의 칙명이나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 법제화한 흔적도 없으니까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기정사실화한 현상일 것이다. 군단병은 만기 제대한 뒤에도 기지 근처에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퇴역병이나 그들의 가족이 아프면 자연히 기지 안의 병원을 찾아갔을 것이다. 로마의 군단기지는 의료 면에서도 속주를 로마화하는 첨병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제7부 로마의 교육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의 유력자 집에서는 그리스인 교사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지만, 가정교사에도 ‘브랜드’가 있었다. 최고로 알려진 ‘브랜드’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다. 그다음은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이나 에페소스, 로도스섬,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다.
‘루두스 리테라리우스’(ludus litterarius)라고 불린 로마 시대의 초등교육은 7세부터 11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 5년 동안 우선 알파벳과 로마 숫자를 배우고, 이어서 읽기와 쓰기와 주판을 배운다.
[로마 숫자]
1-I, 2-II, 3-III, 4-IV, 5-V, 6-VI, 7-VII, 8-VIII, 9-IX, 10-X, 50-L, 100-C, 500-D, 1000-M
‘그람마티키 스콜라’(grammatici schola)라고 불린 중등교육은 12세부터 17세까지의 소년을 대상으로 한다.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에 해당한다. 중등학교 교사를 ‘그람마티쿠스’라고 불렀고, ‘그람마티쿠스’는 교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중등교육 과정에는 그리스어 수업이 추가될 뿐 아니라 수업 내용도 문학과 역사에 집중된다. 교재는 그리스와 로마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다. 그리스 문학에서 서사시인인 호메로스와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반드시 공부하도록 되어 있었고, 라틴 문학에서는 엔니우스·카툴루스·플라우투스·테렌티우스·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오비디우스·루카누스의 작품을 공부했다.
‘레토리스 스콜라’(rhetoris schola)를 현대 연구자들은 ‘고등학교’로 번역하고 있다. 17세부터 20세까지의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학교’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을 보면 변호사나 정치가 양성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교수는 ‘레토르’(rhetor)라고 불렸다. 오늘날에는 대학 학장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사용하지만, 로마 시대에 이런 학교의 교수가 가르치는 것은 라틴어로 ‘아르스 오라토리아’(ars oratoria), 즉 ‘변론을 구사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교재는 키케로를 비롯한 변론술의 대가들이 쓴 저술이다.
아카데메이아와 무세이온
하지만 명색이 제국의 수도인데, 그 이상의 교육을 베풀 수 있는 시설은 로마에 없었다. 로마가 패권을 확립한 시대에는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이 지중해 세계의 최고 학부로서 이미 확고한 기반을 굳히고 있어서, 정복자인 로마인도 그것을 로마로 이전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이민족을 지배하는 정책으로도 적절했다.
로마인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민족이었으니까, 엘리트 양성이라는 필요만 충족되면 그 이상의 교육은 다른 데서 이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창설한 '아카데메이아', 1만 권의 장서로 유명한 '무세이온'도 사실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연구기관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대학원이라 해도 좋다. 이런 최고 학부에서 공부한 경험을 가진 로마인은 적지 않다. 키케로와 시인인 호라티우스도 아테네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최고권력자인 황제 중에는 최고 학부에서 공부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재미있다. 로마 시대에 출세와 학력은 무관했던 셈이다. 그러나 학력을 따지지 않는 세계였는데도 로마 제국은 국비로 '아카데메이아'와 '무세이온'을 지원했다. 교육기관은 사립인데, 연구기관만은 국립이었던 것이다. 교수들에게는 사무관료와 비슷한 연봉이 지급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사립에서 공영으로
원래 로마 제국의 교육제도에서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사립인 것이 특징이다. 교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직접세인 속주세를 면제해주고, 이런 특혜를 받는 대신 적절한 수업료를 받고 교육에 종사하라는 것이 카이사르 법의 의도였다. 국정 교과서나 커리큘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교재 선택이나 교육법도 모두 교사에게 일임했다.
하지만 이 로마 제국에서 초등교육도 중등교육도 고등교육도 공영으로 바뀌는 시대가 온다. 기독교의 지배가 강화되는 것과 교육제도의 공영화는 보조를 맞춰 진행되었다. 교사 자격도 시험을 통해 주어진다. 시험 대상은 지식이나 교육 능력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였다. 교재도 교회가 정한 책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사들도 정해진 봉급을 받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업료도 무료다.
사회는 어떤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손아귀에 넣자마자 우선 교육과 복지를 자기들 생각에 따라 다시 조직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법이다. 로마 국교가 된 뒤 기독교회가 한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 로마 제국은 멸망했고, '아카데메이아'도 '무세이온'도 곧 폐교된다. 의심을 품는 것이 연구의 기본인데, 세상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의 일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10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