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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Dec 06. 2024

로마인 이야기 11권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로마인 이야기 11권 『종말의 시작』은, 후세에 철인(哲人) 황제로 불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존재감은 적었지만 그 중 8년 동안 공동 황제의 재위에 있었던 루키우스 황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너무 달랐던 그의 아들 콤모두스 황제 그리고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후 혼란스러웠던 내란의 시대를 거쳐 최종 승자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 시기였던, 서기 2세기 중엽부터 3세기 초반까지의 이야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는  여전히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가 제국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던 '황금 시대'다. 역사가 기번에 따르면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황제로서 그가 직면한 문제는 모두 새롭고 어려운 과제뿐이었다. 그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병약한 몸으로 59세까지 버틸 수 있었듯이 로마 제국의 목숨을 연장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에드워드 기번을 포함해서 로마 제국은 콤모두스 황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제1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161년~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만큼 평판이 좋은 로마 황제도 없을 것이다.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이고 철인(哲人) 황제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그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 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에도 줄곧 높은 평가를 누려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후세가 『명상록(The Meditations)』이라고 부른 책을 한 권 남겼다. 그 덕분에 ‘철인 황제’라고 불리게 되지만, 그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학문적으로 철학을 논한 저서는 아니다. 『명상록』은 로마 황제로서 야만족 격퇴라는 공무를 수행하는 전쟁터에서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작은 책일 뿐이다.


다만 ‘고대인의 윤리를 드러낸 최상의 발로’이며 ‘고귀한 영혼의 진지한 외침’이라는 것이 근대 서양의 지식인들이 그 책에 바친 찬사였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정치를 담당하는 것이 국가에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계몽주의를 경험한 근현대의 지식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플라톤의 이상이 역사상 유일하게 실현된 사례로 여겨질 것이다.


이 ‘목소리’에 버금가는 것이 ‘몸’인데,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카피톨리노 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마상은 플라톤을 모르는 사람도 『명상록』을 읽지 않은 사람도 한눈에 그 훌륭함을 알 수 있는 걸작이다. 중세에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리나 언덕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설계하면서 다른 곳에 있던 이 기마상을 이곳으로 옮겨왔을 정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기마상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에 바치는 송가


26세의 젊은 그리스 지식인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Aelius Aristides)가 로마 제국의 통치자 계급인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유명한 『로마에 바치는 송가』 연설을 행한 것은 서기 143년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다.

(……) 로마는 만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다민족·다문화·다종교가 공생하는 로마 세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각 분야에서 제각기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공통된 축제일에는 황제가 주최하는 제의가 거행되지만,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고유한 제의도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각자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정의를 유지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률을 마련하여, 인종과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공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패배자한테도 많은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깨우쳐주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57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세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하는 말로 이 연설을 마무리했다. 당시 22세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얻어 차기 황제로 결정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로마 제국이 앞으로도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그대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


생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카일리우스(지금의 첼리오) 언덕은 콜로세움 바로 남쪽에 있는데, 로마의 제2대 왕인 누마가 자주 님프를 만났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예부터 맑은 샘과 울창한 수목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이곳이 고급 주택지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바로 이 카일리우스에서 태어났다. 서기 121년 4월 26일,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 출처 위키백과]

외가가 엄청난 부자였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어머니인 도미티아 루킬라(Domitia Lucilla)는 그 많은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친가인 베루스(Verus) 집안은 족보를 더듬어가면 로마 속주인 에스파냐 출신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로마로 이주했을 당시에는 이른바 ‘신참자’(호모 노부스)였다. 하지만 그 후 로마 사회에 순조롭게 침투한 듯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에는 귀족으로 승격했다.


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이미 제국의 권력 중추에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워서, 제국 순행을 위해 자주 수도를 비운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그런 황제의 추천으로 세 번이나 집정관에 취임했고, 다른 해에도 줄곧 ‘내각’의 일원으로 있었으니까, 황제의 중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미래의 철인 황제에게 주어진 개인 이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인 마르쿠스였고, 황제가 될 때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였다. 마르쿠스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특별한 기록은 없으니까, 전사한 것이 아니라 병사했을 것이다. 로마 사회에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면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양자로 맞아들여 후견인이 되어주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명상록』에서 말하듯이 당시 로마의 지도층 가정처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는 아들의 양육을 여자 노예들에게 맡기고 사교 생활에만 열중하는 상류층 부인이 아니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도미티아 루킬라는 재혼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들은 이 젊은 어머니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어머니에게서는 겸허와 인덕을 배웠으며, 나쁜 일에 손을 대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부자들의 습관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생활방식을 배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는 아들 교육도 남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차기 황제로 결정된 뒤에도 가정교사와 서신 왕래를 계속했는데, 편지 끝에는 반드시 어머니가 안부를 전한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이런 어머니까지 여읜 것은 마르쿠스가 34세일 때였다. 그래서 그는 고결하면서도 온화했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로마 제국도 평화로운 시대였다.

소년 시절 (127년~135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직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라는 이름이었던 127년에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로마 사회에서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기사 계급의 일원이 되었다. 일곱 살에는 라틴어로 ‘살리우스 팔라티누스’(Salius Palatinus), 번역하면 ‘군신 마르스 사제회’의 일원이라는 칭호도 받았다. 마르스를 기리는 제의는 이탈리아 반도에 옛날부터 있었고, 이 제의를 담당하는 집단은 소년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세 때부터 중등교육이 시작된다. 보통 17세에 사회로 나가니까, 로마인은 그때까지 5년 동안 받는 중등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교사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중학교 교사를 의미하는 ‘그라마티쿠스’였던 것이 무엇보다 좋은 증거다.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란 마르쿠스인 만큼, 가정교사들도 모두 최고 등급인 그리스인이었고 주로 대화 훈련, 화술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12세 소년을 매혹한 것은 화술보다는 오히려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활방식이었다. 마르쿠스도 이를 따라서 공부할 때는 일부러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밤에 잠을 잘 때도 그 차림으로 맨 바닥에 누었다고 한다. 해학을 좋아하는 하드리아누스가, 마르쿠스의 성(姓)인 ‘베루스’는 진실이라는 뜻이라서, 그 ‘베루스’에 최상급 어미를 붙인 ‘베리시무스’(Verissimus, 가장 진실한)를 소년 마르쿠스에게 별명으로 붙여주었다.


135년은 제국 전역을 순행하기 위해 수도를 비울 때가 많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체력이 떨어진 것을 자각하고 수도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기로 결정한 해이기도 하다. 59세의 황제는 로마의 황궁보다 티볼리의 별장에 틀어박힐 때가 많았지만, 14세가 된 마르쿠스는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황제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이 무렵부터 하드리아누스가 이 소년을 단순히 중신의 손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왕 교육


마르쿠스는 열 다섯살 무렵 아버지 대신이었던 할아버지도 여읜 모양이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은밀히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성년식이 끝나자마자 마르쿠스의 약혼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약혼녀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딸인 케이오니나였다. 그 직후에 하드리아누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마르쿠스는 차기 황제의 딸과 약혼한 셈이다.


성년식을 마쳤지만 아직 15세,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끝나기는커녕 이때부터 마르쿠스를 가르치는 교수진이 더욱 충실해졌다. 교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선발되었다고 한다. 이는 늙은 황제의 마음속에서 소년 마르쿠스의 자질에 대한 평가가 나날이 높아진 것을 보여준다.


교수진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태생의 그리스 사람으로 그리스어 교육을 맡았던 알렉산드로스, 라틴어 교육을 맡았던 슬로베니아 태생의 트로시우스 아페르, 일찍이 강대국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토론 기술을 가르쳤던 코르넬리우스 프론토(Marcus Cornelius Fronto) 등이었다.


차기 황제 마르쿠스 (139년)


138년 1월 1일, 차기 황제로 결정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의관을 갖추다가 엄청난 피를 토하고 죽자, 서기 138년 2월 25일,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후계자 지명을 공표했다.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조건을 모두 수락했기 때문이다.


첫째, 마르쿠스와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여덟 살의 루키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일 것. 둘째, 이미 약혼한 사이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과 마르쿠스가 적령기에 이르면 곧바로 결혼시킬 것*. 셋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가 적령기에 이르면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킬 것.
*나중에 안토니누스는 이 조건을 어기고 마르쿠스를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약혼시킴.


이듬해인 139년은 열여덟 살이 된 마르쿠스가 처음으로 공직을 경험하는 해가 되었다. 국가 요직의 출발점인 회계감사관에 선출된 것이다. 그 직후에 마르쿠스는 이듬해(140년) 집정관 선거에 황제 추천으로 입후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집정관은 두 사람인데, 그중 한 사람으로 일찌감치 지명된 셈이다.


그런데 마르쿠스는 원로원 의원도 아니고 법무관을 지낸 경험도 없이 대번에 집정관으로 올라가버렸다. 그것도 겨우 열아홉 살에. 게다가 마르쿠스가 열여덟 살 때인 139년에 안토니누스 황제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그에게 주었다. 자신의 치세가 시작되자마자 후계자를 공표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원로원과 일반 시민들은 선제와의 약속을 지키는 공정하고 사심없는 황제라고 칭찬했다.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받고 차기 황제로 결정된 139년에 18세의 마르쿠스는 첼리오 언덕에서 팔라티노 언덕으로 거처를 옮긴다. 황궁에 함께 살기를 원하는 황제 안토니누스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의 마르쿠스는 날마다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와 교수들의 집까지 공부하러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듬해인 140년부터는 공부 이외에 두 가지 중요한 정무까지 맡게 되었다.


140년을 담당할 두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열아홉 살 생일을 넉 달 남짓 남겨둔 마르쿠스였고, 동료 집정관은 황제인 안토니누스였다. 열아홉 살의 마르쿠스가 140년부터 부여받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정무는 ‘내각’의 상임위원이 된 것이었다. 수도를 자주 비운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안토니누스 시대에는 제국 통치의 실무를 책임지는 ‘내각’을 황제가 관장했다. ‘각의’에서는 황제 옆자리가 최연소 국무위원인 마르쿠스의 자리로 정해졌다.


스승 프론토


청년 마르쿠스의 일상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와 마르쿠스 사이에 오간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론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쿠스는 감동적일 만큼 진솔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했다.


<누구보다도 경애하는 선생님께,
방금 공문서 전령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난 사흘 동안 제가 무엇을 했는지를 선생님께 보고할 수 있는 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더는 글을 쓸 수가 없군요. 지금 저는 30통이 넘는 공문서를 구술했기 때문에 목이 쉬어서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니까요.>


<경애하는 프론토 선생님께,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내려주시는 제 문장의 불안정함이 지금의 제 건강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은 저 자신이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건강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속쓰림’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의사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병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문가의 치료에 성실하게 따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병은 오래 끌면 끌수록 심리적으로도 영향을 미치니까 한심합니다. 그래서 더욱 건강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날마다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선생님께 어머니도 안부를 전합니다.>


<저는 몹시 화가 나 있습니다. 동시에 더없이 슬프기도 합니다. 찾고 있는 것이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식사도 하지 못하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니까 초조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 생각다 못해 저도 모르게 그만 저와 다른 철학자들의 능력을 비교하게 됩니다. 아테네 의회가 격렬한 논쟁으로 수습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의원 한 사람이 제안했답니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의원이 우선 집에 돌아가서 잠을 자라는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저도 그 선례를 본받아, 지금은 모두 다 집어치우고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수도 로마에 와서 변호사로 성공한 프론토를 소년 마르쿠스의 가정교사로 발탁한 사람은 하드리아누스인데, 프론토의 출신지는 당시 누미디아 속주, 오늘날에는 알제리 북동부에 있는 콩스탕틴이라는 도시다. 3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카르타고 영토였던 곳이다. 프론토는 “카르타고인을 대표하여 원로원에서 감사 연설을 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프론토와 그의 비문이 새겨진 조각상 받침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프론토는 상당히 훌륭한 교사이기도 했다. 제자인 마르쿠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철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웅변은 그것을 어떻게 말하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프론토는 철학에 매료된 나머지 허술한 옷을 걸치거나 맨바닥에서 잠을 자는 견유학파(犬儒學派) 철학자 흉내를 내다가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두고도 여전히 그런 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마르쿠스를 이런 말로 위로해주기도 했다.

“카이사르여, 그대가 클레안테스나 제논 같은 뛰어난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총명한 지혜를 타고났다 해도, 철학자가 걸치는 거친 옷이 아니라 황제의 보랏빛 망토를 걸치는 것이 그대에게 지워진 운명입니다.”


이 스승과 제자의 친밀한 관계는 30년 가까이나 이어진다. 황제가 되어 보랏빛 망토를 걸친 제자는 늙은 스승의 자랑이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낸 생일 축하 편지를 보고 프론토는 이런 답장을 쓴다.

“교사인 제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일이지만,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이 사랑하고 기꺼이 받들어 모실 황제일 것입니다. 폐하는 제가 남몰래 바라던 제자,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잃지 않는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께서 늘 자신에게 요구했던 일이지만, 설득력이 풍부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훗날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황제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자신이 이끄는 로마 제국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집행되고, 개인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기반을 둔 군주정의 존재 이유다.“


결혼 (145년)


145년부터 스승 프론토에게 보낸 편지의 맺음말이 ‘어머니가 안부를 전한다’에서 ‘아내가 안부를 전한다’로 바뀌었다.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24세가 된 그해에 마르쿠스는 황제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한다. 약혼 기간을 7년이나 둔 것은 신부가 15세를 맞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 파우스티나 황후 출처 구글 이미지]

2년이 지난 147년 11월 30일, 파우스티나가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 딸에게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도미티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튿날인 12월 1일, 첫 손주의 탄생을 기뻐한 황제는 마르쿠스에게 황제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호민관 특권’을 나누어주었다. 또한 딸에게는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칭호를 주었다.


‘아우구스타’(Augusta)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여성형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의 이름인 동시에 그 후의 모든 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이상, ‘아우구스타’는 ‘황태자비’가 아니라 ‘황후’라고 번역해야 마땅하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면 황제이고, ‘카이사르’는 황태자, 그리고 ‘아우구스타’는 황후를 말한다.


아내가 한 발 먼저 ‘황후’가 되는 바람에 마르쿠스는 황후의 남편으로서 비로소 차기 황제 자격을 갖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훗날 마르쿠스는 파우스티나 황후와 이혼하라고 권한 사람에게, 이혼하면 제위도 돌려주어야 한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선제 하드리아누스가 예정해둔 마르쿠스의 제위를 딸 파우스티나의 지참금으로 바꾸어버린 셈이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장에 머물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갑자기 몸져누운 지 이틀 만에 잠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질서있는 평온’이라고 평가받은 치세의 종막에 어울리는 평온한 죽음이었다. 75세 생일을 반 년 앞둔 나이였다. 안토니누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마르쿠스의 역할은 ‘아버지’ 안토니누스의 국장을 치르는 일이었다. 마르쿠스는 이 일을 아홉 살 아래인 루키우스와 함께 했다.


국장의 마지막 절차인 화장도 무사히 끝나고, ‘하드리아누스 영묘’(Mausoleum Hadriani)라고 불린 황제묘에 유골을 안치한 뒤 ‘아들’이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신격화를 결의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는 것이었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신격화는 간단히 실현되었다. 마르쿠스가 요청하기도 전에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신격화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전임 황제가 신이 되면 그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워야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신전은 로마의 도심 중에서도 도심인 포로 로마노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에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이것도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두 명의 황제


그런데 황제 취임 의식에서 마르쿠스는 황제 취임을 요청받는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루키우스와 둘이라고 깜짝 선언을 했다. 이것은 원로원이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의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두 황제가 공존하는 것은 로마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히 서 있는 마르쿠스의 모습에서는 심사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린 사람의 굳은 의지가 배어나왔다.


결국 원로원 대표는 절차에 따라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에게 황제 취임을 요청했다. 둘 다 관례에 따라 일단 사양한 뒤에 요청을 받아들였고, 두 황제의 공식 이름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Lucius Aurelius Verus August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출처 British Museum]

두 황제의 공동 통치는 더없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원로원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황제를 2인제로 바꾼 마르쿠스의 참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런 일에 무관심한 병사나 일반 시민들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는 70대 중반에 죽은 안토니누스 황제와 대비되어 더욱 참신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민중도 만족했다.


루키우스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차남의 장점을 타고난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남 타입인 마르쿠스처럼 강한 책임감은 갖고 있지 않은 대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일은 마르쿠스에 대한 루키우스의 감정이었다. 루키우스는 원망이나 부러움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랐다. 자기보다 항상 앞서가는 마르쿠스를 시샘하기는커녕, 형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정말로 사이좋은 ‘형’과 ‘아우’였다.


기근과 홍수


하지만 두 황제의 치세는 의도치않은 어려움으로 시작되었다. 맨 먼저 닥쳐온 것이 흉작이었다. 161년은 날씨가 불순했는지, 예년 같으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여름에 자주 비가 내렸다. 로마인은 주식인 밀을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및 시칠리아섬과 사르데냐섬에서 수입했지만, 이탈리아 본국에서도 밀이 생산된다. 그 밀이 전멸했다. 포도나 과일이나 채소 같은 농작물도 큰 타격을 받았다. 기근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수도 로마까지 들려와, 이제 갓 황제가 된 두 사람은 대책 마련에 몰두해야 했다.


게다가 가을로 접어들자마자 테베레강이 범람했다. 당시에는 집들이 강기슭에 늘어서 있고, 그 바로 앞을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후세에 ‘나보나광장’으로 바뀐 ‘도미티아누스 경기장’도 현재의 지표면보다 상당히 낮은 곳에 서 있다. 테베레강이 서쪽으로 크게 곡선을 그린 곳은 로마 시대에 공공 건축물이 집중되어 있었던 ‘마르스광장’인데, 테베레강의 수량이 늘어나면 가장 홍수 피해를 입기 쉬운 것도 이 일대였다.


이런 사정도 있어서, 아무리 테베레강의 강둑을 정비하는 담당관을 두어도 제국의 수도 로마는 홍수와 인연을 끊지 못했다. 특히 마르쿠스 황제의 치세 첫해에 일어난 홍수는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공공 건조물이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물이 다 빠질 때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 문제도 아직 해결되기 전에 오리엔트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파르티아 왕은 로마 황제의 교체기를 로마로 쳐들어갈 좋은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해에 파르티아 군대의 아르메니아 침공은 제국의 동방을 지키는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동방의 전운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간 곳은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는 시리아 속주가 아니라, 유프라테스강 상류 파르티아 왕국의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이었다.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간 파르티아 군대의 행동은 재빨랐다. 수도를 공격하고, 불안해진 주민의 봉기를 이용하여 친로마파 왕을 쫓아내고, 대신 반로마파인 파코루스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로마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태가 된 것이다.

당시 시리아 속주 총독은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였다. 그는 이미 노령으로 은퇴를 결정하고, 새 황제가 임명해줄 후임 총독이 도착하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아 총독은 동방 방위선의 최고책임자로서 부하인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에게 카파도키아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 가운데 1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파르티아군을 맞아 싸우라는 훈령을 보냈다.


하지만 파르티아군은 왕이 직접 이끌고 있는 이상 대군일 게 분명하다. 그런 군대를 상대하는 데 겨우 1개 군단만 출동시킨 것은 아무리 44년 동안 평화가 계속된 뒤라고는 하지만 통찰력이 둔해진 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안티오키아에 있는 시리아 총독을 통해 로마로 보내진 두 번째 소식은 로마의 1개 군단이 궤멸했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치는 데 성공한 병사가 가져온 소식이었다고 한다. 로마군은 적군에 포위되어 용감히 싸웠지만 패배했고, 지휘를 맡았던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세베리아누스는 갈리아 출신인데도 옛날 로마 장수처럼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파르티아 전쟁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후임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Marcus Statius Priscus)를 임명했다. 프리스쿠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다키아와 모이시아 등 도나우강 방위선의 최전방에 있는 속주 총독을 역임했다. 말하자면 군단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이것은 실력을 중시한 인사였다.


그런데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으로 결정되었을 당시 프리스쿠스는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로 보내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프리스쿠스의 후임을 시급히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이 브리타니아에 3개 군단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그 3개 군단을 지휘하여 브리타니아 속주의 안전을 확보하는 임무를 띤 총독에 마르쿠스는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임명했다. 동시에 라인강 방위선에 있는 두 속주 가운데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도 바꾸었다. 마인츠에 있는 총독 관저에 새로 부임한 총독은 마르쿠스의 학우이며 은사 프론토의 사위인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였다.


마르쿠스에게 오리엔트에서 세 번째 소식이 날아왔다.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킨 파르티아 군대가 이번에는 공격 목표를 시리아 속주로 바꾼 것이다. 시리아 속주 총독 코르넬리아누스는 노구를 이끌고 나섰지만 궤멸을 면치 못했고, 결국 로마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이었다. 뒤이어 로마의 패배에 동요한 오리엔트의 작은 군주들 사이에 파르티아 쪽에 붙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루키우스 황제 출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는 사태가 된 것을 깨달았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맞붙는다는 것은 황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간다는 뜻이다.  동방에는 31세의 루키우스 베루스가 가기로 결정했다. 마르쿠스는 수도에 남아서 후방 대책을 총지휘하기로 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전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마르쿠스는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을 루키우스에게 딸려 보내기로 했다. 이들은 직접 군단을 지휘하지는 않는다. 직함은 ‘comes Augustorum’이니까 직역하면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수행원’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브레인’이다.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가 최고사령관이 된 이상, 로마군의 양과 질도 보강되어야 한다. 마르쿠스는 유프라테스강 방위선을 맡고 있는 8개 군단을 믿을 수 없었는지, 서방에서도 3.5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를 떠나 오리엔트로 출발한 것은 이듬해인 162년 초여름이었다.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여 종점인 브린디시항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마르쿠스도 중간 지점인 카푸아까지 동행했다.


루키우스는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의 코린트(코린토스)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갔다. 악사와 가수까지 동반한 화려한 일행이었다. 루키우스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로마 황제의 여행이었다. 아테네에서는 고명한 개인교수 중에서도 가장 고명했던 헤로디아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화려한 환영 행사를 준비해놓고 이제 황제가 된 옛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아테네에 눌러앉아 32세의 생일도 그곳에서 맞은 모양이다. 이윽고 아테네를 떠나기는 했지만, 뱃머리를 곧장 안티오키아로 돌리지는 않았다. 어디서나 섬이 보이는 에게해에서 항해를 즐기고, 소아시아 서해안에 늘어서 있는 에페소스나 밀레투스 같은 그리스 도시에 기항하면서 느긋하게 여행을 계속하여, 그해 겨울에야 겨우 목적지인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아테네의 헤로디아스 아티쿠스 극장 출처 구글 이미지]

반격 개시


로마 쪽에 다행이었던 것은 브리타니아에서 카파도키아로 임지가 바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가 느긋하게 여행하는 황제와는 반대로 그 먼 거리를 서둘러 달려온 것이었다. 도버해협을 건너고, 갈리아를 가로지르고, 도나우강에서는 순시선을 타고 흑해까지 내려와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넌 다음 다시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광대한 로마 제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단숨에 달려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동방 전선의 최고사령관 루키우스는 드디어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장군들의 기대와 달리 루키우스가 주재한 작전회의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격렬한 논쟁은 황제와 장군들 사이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황제 루키우스와 그보다 먼저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시리아 속주의 신임 총독 리보 사이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수습한 것은 마르쿠스가 루키우스에게 딸려 보낸 ‘황제의 수행원’들이었다. 수습했다고는 하나, 파르티아 전쟁을 총지휘하는 최고사령관과 부사령관의 관계가 개선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제쳐놓고 작전회의를 진행했을 뿐이다. 그 직후 총독 리보는 안티오키아에서 병사한다.


파르티아 전쟁 제1기


163년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은 총독과 군단장급의 활약으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황제 루키우스는 몸소 군대를 지휘하기도 싫어했고, 군대를 이끌고 전선에서 싸우는 장군들의 전략과 전술에 참견하지도 않았다. 그 점은 칭찬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자, 역시 그 전력은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했다.


163년 봄에 아르메니아 전선에서 시작된 반격의 주역은 카파도키아 군단을 재건하기 위해 브리타니아에서 급히 불려온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였다. 이 아르메니아 전선에는 본에 기지를 둔 제1 미네르바 군단도 소아시아 출신 군단장인 클라우디우스 프론토의 지휘로 참전했다. 빈에 주둔하는 제10 게미나 군단의 일부도 군단장의 지휘로 참전했다. 이 군단장은 북아프리카 출신인 게미니우스 마르키아누스였다.


또한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는 2개 군단은 필요하면 당장 북상할 수 있도록 시리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군단의 지휘를 맡은 것은 시리아 출신으로 제3 갈리카 군단의 군단장을 지낸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빛나는 별 같은 당대의 맹장들이다.

특히 카파도키아 군단을 지휘한 프리스쿠스의 행동은 재빨랐다. 아르메니아로 진입한 뒤에도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봄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카스피해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진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공격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왕이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 파코루스 왕자는 쫓겨나고, 대신 소파에무스가 왕위에 올랐다. 소파에무스도 파르티아 왕족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친로마파였다. 실제로 반격에 나선 지 반 년도 지나기 전에 아르메니아 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163년 말까지는 아르메니아 전역에서 파르티아 군대를 모조리 몰아냈다.

파르티아 전쟁 제2기


파르티아 전쟁은 제2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1기 때는 시리아에서 대기했던 시리아 군단도 숲이 움직이듯 창을 세우고 동쪽으로 진격한다. 북쪽과 서쪽에서 파르티아 왕국의 심장부로 바싹 다가가 심장을 찌르는 것이 파르티아 전쟁 제2기의 전략이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장군은 라인강 방위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참전한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 사람인 클라우디우스 프론토와 파르티아를 혼내줄 생각으로 들떠 있는 시리아 군단의 군단장인 시리아 출신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다.


파르티아 전쟁의 제2기가 2년째에 접어든 164년, 루키우스는 배를 타고 시리아를 떠나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에페소스로 가고 있었다. 이오니아 지방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 에페소스에서 마르쿠스의 딸인 루킬라를 맞아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에페소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루키우스 황제는 황후 루킬라를 데리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파르티아 전쟁의 제2기에도 전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파르티아군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쳐들어간 로마군을 맞아 싸우기는커녕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붕괴 직전에 몰려 있었다.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로마는 파르티아에 침략당한 지방을 모두 되찾는 데 성공했다. 제2기 전쟁도 로마의 압승으로 끝나려 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전쟁 제3기


제3기 전쟁의 목적은 제1기와 제2기처럼 침략당한 영토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티그리스강을 건너 파르티아 영토의 중심부까지 깊이 쳐들어가 철저히 쳐부순 뒤에 철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3기에 벌어진 전투는 시리아 출신인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파르티아 전쟁은 로마에 손을 대면 어떤 꼴이 되는가를 오리엔트 사람들에게 재인식시킨 전쟁이 되었다. 이것이 파르티아 왕국을 약화시켜 결국 60년 뒤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대두하는 원인이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옳은 전략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은 중동 전역에 로마의 힘을 재인식시켜, 이 지역에서 30년 동안 평화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166년 10월, 로마에서는 귀국한 루키우스를 맞아 파르티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무려 49년 만에 열리는 개선식이었다. 그런데 이 개선식에는 전통적인 로마의 개선식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개선장군인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처자식을 개선장군이 타는 황금 전차에 동승시킨 것이었다.

철인 황제의 정치


동방에서 파르티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마르쿠스 황제는 서방에서 국정에 전념했지만, 로마에서 국정이라면 낡은 법을 현실에 맞게 고치거나 필요에 따라 법률을 새로 제정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처음 제정된 법률 몇 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자녀를 낳으면 30일 이내에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한 법률이다. 출생 신고를 의무화한 이 법률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속주에도 적용되었다. 예비 군단병의 수를 대충이라도 예측하는 것이 이 법률의 목적이었던 것 같다.


수를 예측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 것은 마르쿠스 시대에 군단병을 지원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계속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다만 주전력인 군단병 16만 8천 명은 이미 확보되어 있었으니까, 문제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처럼 지원자를 엄격하게 선발해서는 군단병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마르쿠스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지방자치단체 의원 지원자가 줄어드는 추세에 제동을 걸기 위한 일련의 법률이다. 공화정과 제정을 불문하고 로마에서는 사무관료나 사무직원들에게는 급료를 보장했지만 집정관을 비롯한 중앙정부 관직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공직은 모두 무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폼페이 유적에 남아 있는 선거운동 낙서가 보여주듯, 입후보자가 많아 지방의회 선거전이 치열했었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광범위한 ‘인프라’가 이루어졌지만, 또한 이것이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자가 점차 줄어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추세는 지방자치단체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마르쿠스가 제정한 법률은 입후보자가 줄어드는 원인을 ‘아파티아’(apatia)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무기력·무감동·무관심·냉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법률을 입안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 게다가 나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무엇이든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던 은사 프론토를 잃었다.


페스트


전쟁에서 진 파르티아는 이긴 로마에 한 가지 복수를 했다. 로마에서 거행된 개선식에 참가한 병사들 사이에 역병이 퍼진 것이다.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군단기지로 돌아간 병사들 중에도 같은 역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들이 원정한 오리엔트가 전염원인 것은 분명했다. 라틴어로는 ‘역병’을 ‘페스틸렌시아’(pestilentia)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미 쥐가 페스트를 옮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양 역사상 유명한 첫 번째 페스트는 기원전 430년 무렵에 그리스 아테네를 덮친 페스트였다. 이 역병은 때마침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맞물려 도시국가 아테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정치가 페리클레스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서기 166년부터 167년까지 로마 제국을 덮친 ‘페스틸렌시아’라고 한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페스트는 14세기에 이탈리아를 덮친 페스트만큼 큰 피해는 주지 않은 것 같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으로 유명해진 이 14세기의 페스트로는 1년 사이에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지만, 고대 로마에서 창궐한 페스트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제국의 가장 중요한 방위선인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군단기지에서 계속 페스트 환자가 발생한 것이 로마에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로마의 방위력이 약해진 것을 눈치챈 야만족이 이 북방 전선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로마가 직면해 있던 새로운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기독교도


황제 마르쿠스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신들에게 기원을 드리는 대규모 제의를 올린다. 황제는 두 명이지만 최고제사장은 마르쿠스 한 사람이다. 로마인들이 신들에게 드리는 ‘기원’은 이 불행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신들도 그런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다.


제의는 신전 밖에서 거행된다. 불을 사용하는 탓도 있지만,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제의는 그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을 구우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아라비아산 향료를 불에 끼얹어 그 향내 속에서 기도를 드린다. 제의가 끝나면 구워진 고기를 잘라 참가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설교도 없고 찬송가도 없다. 로마인의 종교에는 전문 사제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민이 모두 참가하는 제의가 여기저기서 열리자, 거기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가 눈에 띄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도들은 제12구와 제13구와 제14구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모여 살고 있었다. 제12구와 제13구는 로마 남쪽, 제14구는 테베레강 서쪽에 있지만, 모두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황제가 앞장선 제의에 기독교도들이 참가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사악하고 타락한 사회’는 로마 제국이고, 신의 나라는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에 찾아올 기독교인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일신교를 믿는 이상, 다른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제의에 참가할 수도 없었다.

로마인들이 전통적인 신들을 재인식하던 이 무렵,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도들에게 로마인의 반감이 높아졌다. 로마인은 기독교도들을 ‘아테오’라고 부르면서 비난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낱말은 요즘에는 ‘무신론자’로 번역되지만, 로마 시대에는 ‘무신앙자’라는 뜻이었다.


시민들이 기독교도를 비난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공공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자기네끼리는 상호부조에 열심이었지만, 그들이 사는 도시나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공공사업이나 복지사업에는 열의를 쏟지 않았다. 이것은 공공생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의무라는 생각이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이 시대에는 충분히 비난받을 이유가 되었다.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라는 인물은 스토아 철학자로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고 로마 정부의 요직이었던 수도 로마의 장관을 맡고 있었다. 당시 수도 장관은 사법관의 직무도 수행한다. 그는 로마로 전도하러 왔다가 체포된 그리스인 유스티누스를 심문하고 참수형에 처한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순교자 유스티노의 재판을 진행하는 루스티쿠스 출처 구글 이미지]

황제 마르쿠스는 『명상록』 첫머리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의 하나로 루스티쿠스를 들고,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스티쿠스한테서는 나 자신의 성격을 다듬고 수양하는 것을 배웠다. 궤변의 말씨름을 하거나, 공리공론으로 글을 쓰거나, 대중적 인기만을 목적으로 변설을 늘어놓거나,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일부러 검소한 체하거나, 단지 과시하기 위해서 자선행위를 하는 따위의 일에 빠지지 말며, 수사학이나 시적 표현이나 세련되고 화려한 문장에 탐닉하지 말 것을 배웠다. 또한 루스티쿠스가 자신의 장서 중에서 에픽테토스의 『인생 강의』를 내게 주어 감명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해준 데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다.>


마르쿠스가 언급한 '에픽테토스'는 서기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살았던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인이지만, 네로 황제를 모신 해방노예 에파프로디투스의 노예였다. 후세는 로마 제정 전성기를 대표하는 스토아 철학자로 노예였던 에픽테토스(저서로 ‘엥케이리디온’이 유명하다)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꼽게 된다.

[에픽테토스 출처 구글 이미지]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딱 한 번 기독교도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야 할 때 그 상황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마음의 준비는 기독교도처럼 고집스러울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도달한 결과여야 한다.>


168년 1월 6일, 이제 곧 47세가 되는 마르쿠스는 로마 근교에 있는 근위대 병영에서 장병들에게 말했다. 북방 문제의 해결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해 봄에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황제는 도나우강으로 떠나기로 했다.


게르마니아 전쟁


로마 역사를 쓴 동시대의 역사가 가운데 아피아누스라는 그리스인이 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데, 트라야누스 시대(서기 98~117)에 태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로 나간 아피아누스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수도에서 국세청 관료로 일한 것이 그의 마지막 경력이다.

[아피아누스와 '로마 역사' 출처 구글 이미지]

그의 주요 저작은 로마 건국부터 제정에 이르기까지의 로마 역사지만, 그밖에도 동시대 사건들을 기록한 글이 남아 있다. 아피아누스는 서기 160년의 일이라고 기록했으니까,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의 일이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아피아누스는 현장 증인이기도 했다.

<수도를 찾아온 야만족 우두머리들은 제국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 다른 속주민과 같은 입장이 되고 싶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황제는 로마 제국에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168년 봄이 오자마자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는 도나우강 전선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47세인 마르쿠스도 38세인 루키우스도 붉은 망토를 걸치고 말을 몰았다. 이렇게 되면 누가 보아도 단순한 전선 시찰이 아니라 싸우러 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 이후 무려 60년 만에 도나우강 전선에서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결의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루키우스의 죽음 (169년)


169년 이후의 일정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역사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해가 바뀌자마자 루키우스가 수도 로마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km쯤 떨어진 알티눔까지 왔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뇌졸중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39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생활은 화려하고 그래서 불규칙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공정한 정신이 낳은 두 황제의 공동 통치는 한쪽이 전혀 협력하지 않는 바람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8년 만에 막을 내렸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국장이 끝난 뒤에도 마르쿠스는 한동안 수도에 머물러 있었다. 단독 황제가 된 자신이 몸소 전선에 나가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에 앞서 해두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루키우스의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버린 딸 루킬라를 재혼시키는 일이었다.


루킬라의 재혼 상대로 선택된 사람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Tiberius Claudius Pompeianus)였다. 이름은 본국 이탈리아 태생 같지만,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시리아인이다.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 출신이고, 로마 사회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기사 계급이었다.


황제의 사위로 뽑혔을 당시 그는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과 부다페스트에 기지를 둔 제2 아듀트릭스 군단의 군단장을 겸하고 있었다. 전 황제 루키우스의 미망인인 루킬라는 당시 열아홉 살이었다. 폼페이아누스를 사위로 고른 것은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폼페이아누스와 루킬라 출처 구글 이미지]

그 후 10년이나 계속된 ‘게르마니아 전쟁’에서도 마르쿠스는 실제 지휘를 폼페이아누스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었고, 그 후 20년 동안 로마 제국의 무장들은 대부분 폼페이아누스 문하에서 배출된다. 이 시리아인 무장은 성실함에서도 마르쿠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콤모두스가 고립감에 시달릴 때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신뢰한 사람이 매형인 폼페이아누스였다고 한다.


폼페이아누스와 루킬라의 결혼은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부부의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은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 남편의 낮은 출신 성분이 황제의 딸이자 황후였던 루킬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재혼한 뒤에도 계속 ‘황후’라는 존칭을 쓴다는 타협책으로 불만을 무마한 모양이다.


그해(169년) 가을에 마르쿠스는 다시 수도를 떠나 도나우 전선으로 갔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는 막내딸 사비나가 태어났다. 첫아이가 태어난 것이 147년이니까, 쌍둥이가 두 쌍 있었다 해도 23년 동안 아이를 열네 명이나 낳은 셈이다.


그로부터 4년 뒤에 파우스티나 황후가 도나우 전선에 간 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뒤따라가서 죽을 때까지 남편 곁에 줄곧 남아 있었다. 그것도 병사들이 북적거리는 기지 안에 살면서 부상병을 위문하거나, 사실상 군단병들의 아내로서 기지 밖에 살고 있는 여자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지냈다. 병사들은 이 황후에게 ‘기지의 어머니’(mater castrorum)라는 존칭을 붙여주었다.


전쟁 개시


이야기를 169년으로 되돌리면, 다시 도나우강으로 돌아온 황제 마르쿠스는 169년에서 170년에 걸친 겨울을 ‘먼 판노니아’에 있는 보급기지 시르미움(현 코소보의 미트로비차)에서 나기로 했다. 시르미움은 로마 시대에는 군단 주둔지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보급기지 가운데 하나로, 발칸반도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르다가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사바강 연안에 있다.

5개나 되는 로마 가도가 모여 있는 시르미움은 군단기지 근처에는 반드시 대규모 보급기지를 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위체제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시르미움은 로마인이 도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서 군단기지나 주도 못지않게 잘 짜여진 도시였다. 보급기지인 만큼 가장 중요한 조건은 뭐니뭐니 해도 교통이다.

[코소보의 미트로비차 출처 구글 이미지]

서전의 패배


170년 봄에 로마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를 북상하면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병력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알려져 있다. 파르티아 전쟁 때도 활약한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다. 오리엔트에서 돌아온 뒤에는 ‘가까운 모이시아’ 속주와 ‘다키아’ 속주의 총독을 겸임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는 용맹하고 재능도 풍부한 무장이었다.  그런데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산악지대로 들어가버린 게 아닌가 싶다. 중무장 보병이 주전력인 로마군은 평원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는 무적이지만, 좁은 전쟁터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 속주로 들어가 후방에서 결과 보고를 기다리던 황제에게 날아온 소식은, 격전 끝에 적은 패주했지만 사령관 프론토는 전사했고 적이 끌고 간 포로가 2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포로는 대부분 병사가 아니라 다키아 속주민이었다.


동시대인의 역사책에 ‘최악의 해’로 기록된 이 170년은 속주 총독의 전사로 끝나지는 않았다. 로마군의 공세가 다키아 북부에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서 그 양쪽으로 도나우강을 건넌 게르만의 2개 부족이 참으로 대담무쌍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


빈의 군단기지를 피해 그보다 훨씬 상류에서 도나우강을 건넌 마르코마니족은 로마 영토로 들어온 뒤에도 계속 남하하여 아퀼레이아를 습격했다. 아퀼레이아는 북동쪽 끝이긴 하지만 본국 이탈리아의 도시다.


한편 다키아 속주의 동쪽을 돌아 도나우강을 건넌 코스토보치족도 질풍처럼 남하하여 그리스 중부 깊숙이까지 쳐들어왔다. 이 부족은 보물을 노려 그리스 각지의 신전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리메스가 뚫렸다!’는 소식이 제국 서방으로 파도처럼 퍼져갔다.


하지만 침략자들도 실수를 저질렀다. 욕심에 눈이 멀어 너무 많이 약탈한 것이다. 바람처럼 남하했을 때와는 달리 약탈한 물건과 사람을 끌고 북상하느라 속도가 떨어졌다. 그것을 폼페이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날아가고 칼에 찔려 죽는 것은 이번에는 게르만인이었다.


'방위선이 뚫리다'


어쨌든 170년에 일어난 이 변고의 영향으로 맨 먼저 나타난 현상은 도시와 마을 주민들이 방벽을 보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적’은 도적떼가 고작이었지만, 앞으로는 야만족일지도 모른다. 제국 안전보장의 최고책임자인 마르쿠스도, 200년 뒤의 역사가한테는 ‘사후약방문’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지체없이 대책을 세웠다.


첫째, ‘이탈리아와 알프스의 방위부대’(Praetentura Italiae et Alpium)를 신설했다. 둘째,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편성과 훈련이 본국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지는 이 2개 군단은 제2 이탈리카 군단과 제3 이탈리카 군단으로 명명되었다. 셋째, 도나우강 중류에서 흑해로 흘러드는 하류까지의 방위력을 재검토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먼 모이시아’ 속주와 ‘다키아’ 속주에 주둔하는 군단의 배치를 바꾸었다.


이리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정착시킨 뒤 반세기 동안이나 바뀌지 않았던 도나우강 방위체제가 더한층 강화되었다. 투입되는 군단 수만 해도 10개 군단에서 12개 군단으로 늘어났다.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시대로부터 반세기 뒤에 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지내게 되는데, 이 사람도 저서에 이런 말을 남겼다. 로마인들이 이런 생각을 최초로 갖게 된 것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였다.

<도나우강 방위선은 항상 제국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측정기였다. 로마 제국의 존속은 도나우강 연안에 있는 각 속주(판노니아를 포함)의 안전에 달려 있었다.>


에스파냐 '리메스'


일시적이나마 게르만의 두 부족에게 방위선 돌파를 허용한 170년의 이듬해, 빈에서 도나우강을 따라 50km쯤 내려간 카르눈툼 기지에서 이듬해로 예정된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마르쿠스에게 에스파냐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북아프리카에 사는 마우리타니아인이 고대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린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하여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쫓아낸 뒤 베티카 속주 일대를 점령하고 눌러앉았다는 보고였다. 속주 총독은 원군도 요청했다.


제국의 북방만이 아니라 서방에서도 ‘리메스’가 뚫린 셈이다. 이베리아반도에 주둔하는 군단은 북부의 레온에 기지를 둔 1개 군단뿐이다. 마르쿠스 황제는 급히 파르티아 전쟁 때 활약한 베테랑 장군인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를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무장이 도착하자 당장에 상황이 바뀌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침략자들이 만행 흔적만 남기고 쫓겨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 사건도 로마 제국 안으로 쳐들어오려는 야만족들이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조짐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인들과는 다른 어려운 시대의 통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국 북방에서도 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인과 야만족


유럽의 북동부 일대는 기후가 좋지 않고,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수렵을 하는 야만민족이다. 그들은 자연조건과는 무관하게 아이를 많이 낳았고, 저수지에 물이 차면 방죽이 무너져 물이 넘쳐흐르듯 인구가 많아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넘쳐흐른 물이 가는 방향은 늘 남서쪽이었다. 유럽 남서부는 농경이 활발하고 따라서 교역도 활발하여 생활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야만족이 용맹해서 침략한 것이 아니라, 야만족이었기 때문에 침략한 것이다.

제국 동방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파르티아 왕국이 대처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도 야만족은 있었고, 그들이 남서쪽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도 일상적인 현상이었지만, 유럽의 야만족이 로마를 노린 반면 아시아의 야만족이 노린 것은 중동에서 가장 풍요로운 파르티아였다.


또한 제국 남쪽에 있는 북아프리카는 방위에 별 문제가 없었다. 사막을 건너 쳐들어오는 원주민은 대군을 조직할 능력이 없으니까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로마 제국의 야만족 대책은 유럽 북부에서 쳐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동안 로마인에게는 제국 안에 살면서 로마 제국의 지배나 통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민족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이런 생각을 계승했을 게 분명하다. 다만 그의 시대에는 야만족 침입이라는 문제의 성질이 달라졌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5세기에 로마를 멸망시킨 랑고바르드족·고트족·반달족의 이름이 멀리서 울리는 우레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


서기 17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강 전선에서 50세 생일을 맞았다. 제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났지만 사람을 대하는 마르쿠스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황제 역사』는 그런 마르쿠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는 그것이 군사적 문제든 정치적 문제든 그 방면의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황제 마르쿠스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너무 굼떠서 답답할 정도라고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으레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친구들이 나 한 사람의 생각에 그냥 따르는 것보다는 내가 많은 친구의 생각을 듣고 결정하는 게 옳지 않은가.”

하지만 마르쿠스는 철학(스토아 학파)에 몰두했기 때문인지, 군대나 자신의 일상생활에는 엄격했다. 이 엄격함이 부하들의 비판을 받을 때도 많았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맞대놓고 당당하게 비판했고, 그에 대해 황제는 논리정연하게 반론을 펴곤 했다.>


쉰 살이 된 171년은 마르쿠스가 처음으로 야만족 대표들과 직접 접촉한 해이기도 했다. 마르쿠스가 도나우강이 눈앞에 바라보이는 카르눈툼의 군단기지에 머물고 있을 때, 수많은 부족의 사절단이 도나우강을 건너와서 황제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야만족의 제안은 부족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째, 우리는 침략행위를 그만두고 로마 황제와 강화를 맺을 용의가 있다. 로마 편이 되면 다른 부족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제국 방위의 최전선을 맡겠다. 다만 거기에 필요한 자금은 원조해달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로마에 대해 적대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둘째(이것은 도나우강 중류의 북안 일대에 사는 유력 부족인 마르코마니족과 야지게스족과 콰디족 가운데, 콰디족만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고 싶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마르코마니족과 동맹관계를 끊고, 말과 가축을 로마군에게만 팔겠다.


셋째(이것은 큰 부족이 아닌 중소 규모 부족의 제안이었다. 도나우강 북안 일대, 즉 로마 방위선과 마주 보는 일대에 살고 있는 부족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부족의 침략을 받고 있는 우리는 앉아서 죽거나 로마 영토 안으로 도망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로마 제국 안에 확보해주면, 우리도 본의 아니게 폭력적으로 침입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대해 마르쿠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첫째, 강화를 맺고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그들의 요청도 받아들였다. 두 번째 요청에 대해서는, 말과 가축을 사들이는 것은 승낙했다. 탈주병과 민간인 포로를 송환하겠다는 제의도 물론 받아들였다. 하지만 콰디족이 로마 영토에서 열리는 장에 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생김새도 같고 언어도 같으니까, 로마인인 군단병은 콰디족과 반로마적인 마르코마니족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


로마군은 이듬해 봄에 마르코마니족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 예정이었다. 그 부족의 첩자가 로마 영토에 들어오게 할 수는 없었다. 황제 마르쿠스는 콰디족 대표에게 강화 요청은 받아들이겠지만 너희가 마르코마니족과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는 확증을 얻을 때까지는 장에 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너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재검토하겠다는 뜻이다. 강화는 이루어졌다.


셋째, 로마 영토로 이주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계 우비족의 이주를 인정했고 그들의 이주지가 쾰른으로 발전한 선례에 따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그들의 이주를 인정했다.


모두 중소 규모의 부족이었기 때문에 부족별로 다키아·모이시아·판노니아 속주만이 아니라 저지 및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에도 땅을 주어 이주시켰다. 모두 라인강과 도나우강 연변에 있는 속주였고, 주민과 생활 습관도 원래 게르만계였던 지방이다.


이런 지방으로 이주시킨 것은 성공했지만, 마르쿠스가 생각한 이주지는 또 한 군데가 있었다. 그것은 본국 이탈리아의 라벤나였다. 마르쿠스는 라벤나 근교에 땅을 주어 야만족을 이주시켰는데, 이것은 완전한 실패였다. 이주자들이 떼를 지어 라벤나를 습격하여 분탕질한 것이다.


알프스와 본국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특별히 창설한 부대가 출동하여 겨우 진압했지만, 라벤나 주민은 이런 결정을 내린 황제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마르쿠스도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벤나 근교로 이주했던 게르만인은 모두 이탈리아반도에서 추방되었다.


전쟁 준비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대군을 투입하여 단번에 결판을 내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지만, 마르코마니족과의 전쟁 준비는 3년 전에 벌써 시작되어 있었다.


우선 로마군의 보조 전력인 보조병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군단병으로 승격시켰다. 군단병이 되려면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속주민인 보조병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군단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보조부대의 결원을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노예도 군대에 지원할 수 있게 했다.


그 조치로도 부족해서 마르쿠스는 검투사에게도 군대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검투사는 당시 인기 직업이었고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병역을 마친 뒤에는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겠다는 조건에 넘어간 노예 검투사, 그것도 B급 이하의 검투사밖에 모으지 못했다.


이 무렵 마르쿠스가 내놓은 아이디어 가운데 뜻밖에 효과적이었던 아이디어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산적으로 편성된 부대를 신설한 것이다. 투항하고 군대에 복무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미끼에 산적들이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부족을 떠난 게르만인을 모아서 부대를 편성한 것이다. 그들은 정규병이 아니라 용병으로 로마군에 편입되었다.


군대를 편성하여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마르쿠스는 세율을 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임시 특별세도 거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황궁 안에 있는 물건(개인 물건이 아니라 외국 사절의 선물 등)을 경매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마르쿠스 황제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 한 가지 방책을 사용했다. 그것은 금화와 은화의 양 자체를 줄이는 방책이었다. 줄인 양은 동시대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적었다. 너무 많이 줄이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평가절하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인플레 시대의 전조는 아니다. 금화와 은화는 그로부터 4년 뒤에 다시 원래의 분량으로 돌아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


172년 시작된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은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에 시작했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 전쟁의 전개 과정을 따라갈 수 없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n Cassius)의 기술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전쟁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것일 뿐 일관된 전쟁기는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도 ‘트라야누스 원기둥’과 같은 형태로 게르마니아 전쟁 장면을 새긴, ‘콜룸나 마르키 아우렐리이’(Columna Marci Aurelii)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원기둥이 있다. 하지만 이 돌기둥에 새겨진 장면에는 온갖 것이 너무 과하게 많이 들어가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밑에서 위를 향해 나선 모양으로 따라 올라가도 전쟁의 전모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에피소드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게르마니아 전쟁 자체가 에피소드의 집대성이었기 때문이다. 유기적으로 짜인 기본 전략에 따라 전개된 전쟁이 아니라, 전선 여기저기에서 개별적으로 치러진 전쟁이라는 뜻이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부조는 ‘사실적’인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기둥에 새겨진 부조는 ‘감정적’이다. 파토스(비애감)의 과잉은 정치나 군사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결점이 될 수 있다.

도나우강 전선


서기 172년, 도나우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한 로마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펼친 것치고는 참으로 어이없이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로마군 전체의 전략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황제가 참전할 때는 반드시 전선에 가담하는 근위대가 마르코마니족과 격돌하여 참패했다. 근위대장 빈덱스까지 전사해버렸다. 마르코마니족은 거기에 만족하여 철수했다.


지난해에 강화를 맺은 콰디족이 마르코마니족의 승리를 보고는 로마와 맺은 강화를 파기하고 게르만 쪽으로 돌아가버렸다. 게르만 부족들의 공동투쟁 전선이 콰디족의 이탈로 끊겼다가, 1년도 지나기 전에 원래 상태로 복원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사정도 있어서 그해에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한 에피소드다. ‘뇌우(雷雨)의 기적’이라 하여 원기둥에도 묘사되어 있다.

[디오 카시우스와 '로마사' 출처 구글 이미지]
<각지를 전전하며 싸우던 로마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의 일이다. 그 위기에서 로마군을 구해준 것은 신들의 은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콰디족은 기마를 장기로 삼는 그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로마군을 몰아넣고 포위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방패를 빈틈없이 맞붙여 위와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면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전형적인 전투대형 가운데 하나로, 방패를 맞붙인 모양이 거북등 같다 하여 ‘귀갑대형’이라고 한다.)

야만족들은 이것을 보고 공격을 멈추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평원에서 더위와 갈증에 지친 로마 병사들이 항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어서 가까운 강으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야만족은 수적으로도 우세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더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렸다. 이어서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모두 방패를 치우고 얼굴을 들어올려,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고 벌린 입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번갯불과 호우는 로마군과 야만족을 함께 덮쳤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전열이 흐트러져 대혼란에 빠진 것은 로마군이 아니라 야만족이었다.>

규율을 엄격히 지키는 습관과 평소의 훈련 성과는 이런 상황에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다시 기운을 차린 로마군은 전황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그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같은해 말에 로마군은 마르코마니족한테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를 의미하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전선에 있는 마르쿠스에게 바쳤다. 하지만 원로원의 결의는 너무 성급했다. 172년에 로마군은 고전을 거듭했고, 그래도 게르만인 중에서 유력한 부족으로 꼽히는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을 이긴 덕분에 겨우 체면을 유지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해에는 제국 동방도 평온 무사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카시우스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도시 지역에 사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나라였고, 그 사람들을 다시 로마가 지배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이집트 원주민들이 이집트의 전통 종교 의례를 담당하는 신관들의 부추김을 받아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도나우강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마르쿠스는, 파르티아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승진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집트는 특수한 사정으로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황제의 사유지 상태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다른 로마 영토의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개인 카시우스를 동방 전역의 총사령관으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파르티아 전쟁 때 루키우스 황제가 차지한 지위와 동격이다. 동방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른 셈이다.


동방 전역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카시우스는 멋지게 그 임무를 수행했다. 이집트 폭동은 조기에 진압되었고, 게다가 이집트 원주민의 원한을 사지 않는 형태로 진압되었다. 이집트 주민들 사이에서 카시우스의 평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르쿠스 황제는 카시우스가 폭동을 진압하고 시리아 속주로 돌아간 뒤에도 그를 동방 총사령관 자리에 그대로 앉혀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3년 뒤에 일어난 재난의 원인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태


172년 당시 오리엔트에서 일어난 또 다른 변고는 늘 그렇듯이 아르메니아 사태였다. 로마와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다투었지만, 파르티아 전쟁에서 로마가 이겼기 때문에 파르티아 왕족 가운데 친로마파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궁정에는 항상 친파르티아파가 있었다. 로마가 도나우강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킨 틈을 타서 이들이 쿠데타를 기도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쿠데타 세력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아르메니아 왕국과 맞닿아 있는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인 마르티우스 베루스의 외교 수완 덕분이었다. 고대 로마의 무장들 중에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드물지 않은데, 마르티우스 베루스도 그런 인물이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재개


해가 바뀌어 173년이 되었다. 동방의 정세는 위와 같은 경위를 거쳐 안정되었지만, 서방에서는 게르마니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듯 172년의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이듬해인 173년에 작전을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전을 바꾸었다. 172년에는 전면전이었지만, 173년에는 각개 격파 작전으로 바뀐 것이다.


어쨌든 1년 만에 전략의 오류를 깨달은 것은 마르쿠스에게도 로마에도 다행이었다. 173년에는 우선 전쟁터를 레겐스부르크에서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도나우강 북안 일대로 한정했다. 적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이었지만, 이번에는 이 게르만의 양대 부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그들 산하에 있는 중소 부족을 적으로 삼았다.


일관된 전쟁기도 없고 전략을 기술한 역사서도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173년에 로마군이 세운 전략은 아마 위와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남아 있는 전과가 딱 하나 있다. 그것은 기병대를 이끌고 싸운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나리스테 족장과 일대일로 겨루어 상대를 쓰러뜨린 에피소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은 바로 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출처 구글 이미지]

173년의 전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 에피소드뿐이지만, 각개 격파 작전은 성공한 것이 분명하다.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뿐만 아니라 아직 로마군과 격돌하지 않은 야지게스족까지 마르쿠스에게 강화를 청해왔기 때문이다. 콰디족과의 강화가 1년도 지나기 전에 깨진 경험 때문에 야만족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된 마르쿠스는 야만족의 요청을 물리치지만, 결국에는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를 맺었다.


로마도 이것을 일시적인 강화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로마 쪽도 강화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이듬해인 174년에 로마군은 다른 적과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도나우강과 트라야누스 황제가 속주로 삼은 다키아 사이에 낀 지역에 사는 야지게스족이었다. 그들도 북쪽에서 내려온 사르마티아족에게 밀려나 로마군과 부딪치게 된 것이다.


로마인은 174년의 전쟁을 ‘사르마티아 전쟁’이라고 불렀지만, 실제 적은 야지게스족이었다. 카르눈툼의 군단기지에 머물러 있는 마르쿠스 황제에게는 하루도 마음 편히 쉴 날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어느새 마르쿠스도 50대로 접어들어 있었다.


173년에서 174년에 걸친 겨울, 남편의 건강이 염려되었는지 황후 파우스티나가 도나우강변의 진영을 찾아왔다. 판노니아 총독으로 마르쿠스의 오른팔이 된 폼페이아누스에게 시집간 딸 루킬라도 동행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그대로 남편 곁에 머물렀다. 5년 만에 다시 황후와의 일상생활을 시작한 곳은 도나우강을 따라 한참 내려간 곳에 있는 시르미움이었다.


시르미움은 군단기지가 아니었으니까 주위에 방벽을 두른 병영도 없고 그 근처에 펼쳐진 ‘카나바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시에도 제4 플라비아 군단이 상주하는 베오그라드의 보급기지였다. 로마인이 도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설비는 완비되어 있고, 도나우강변의 도시 유적에서 반드시 볼 수 있는 바닥 난방설비와 벽난로도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시르미움 추정도 출처 구글 이미지]

174년에 벌어진 ‘사르마티아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일관된 전쟁기가 없기 때문에 추적할 수가 없다. 마르쿠스 원기둥의 돋을새김도 줄거리를 더듬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몇 가지 일화로 미루어, 치열한 전투가 거듭되기는 했지만 주도권은 계속 로마군이 쥐고 있었던 것 같다. 필사적으로 싸운 야지게스족도 마침내 강화를 요청해왔다. 마르쿠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강화를 맺었다.


야만족의 도미노 현상


그때까지만 해도 야만족 문제는 침입한 야만족을 격퇴하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했지만, 종래의 해결책으로는 야만족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마르쿠스는 이 무렵에야 비로소 깨달은 모양이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해결책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단행한 다키아 속주화였다. 야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격파한 뒤에 끌어안는 방법이다.


실행할 생각이라면 이듬해인 175년은 절호의 기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과는 이미 강화를 맺었다. 야지게스족과도 강화를 맺었지만, 중요한 ‘적’은 역시 강력한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이었다. 마르쿠스가 속주화 대상으로 생각한 곳은 이 두 부족이 사는 도나우강 중류의 북쪽 일대였다. 오늘날의 빈 서쪽에서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도나우강 북쪽이고, 예부터 보헤미아 지방이라고 불린 지역이다.

하지만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이 요청한 것은 속주화가 아니라 강화였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야만족에 밀려나 갈 곳이 없으니 로마 영토 안에 정착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들보다 힘도 약한 중소 부족이다.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도 그런 중소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야만족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도미노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군을 1~2년 동안은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진 강력한 부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순순히 속주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그렇다면 군사력으로 압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에 속주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불행한 사태 때문에 이 구상을 실행하는 일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모반


갑자기 시리아 속주 총독인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그런데 사실 그 사태는 잘못된 정보가 빚어낸 사건이었다. 마르쿠스 황제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카시우스가 마르쿠스의 뒤를 이을 사람은 열세 살인 아들 콤모두스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서둘러 선언하고, 시리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3개 군단에서 병사들의 승인까지 얻었다는 것이다.


175년은 지난해에 강화를 맺은 야지게스족을 앞에 내세워 사르마티아족과 전면 대결을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몸소 도나우강을 건너 전쟁터 후방에 진을 치고 있던 마르쿠스에게 시리아 총독의 반란을 알린 것은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보낸 전령이었다. 마르티우스 베루스는 동방에서 카시우스의 권유에 응하지 않은 유일한 총독이었다.


마르쿠스가 맨 먼저 생각한 것은 서방에 있는 군단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다잡는 일이었다. 마르쿠스는 모을 수 있는 장병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던 자가 배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 군단과 원로원에 의해 카시우스가 선택된다면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제국을 그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국가와 시민에게 폐해가 적은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제 늙은 몸이고 건강도 별로 좋지 않다. 조금만 먹어도 속이 쓰리고, 숙면을 취한 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그대들의 지지를 확인한 다음 단호한 결의로 이 사태에 대처할 생각이다.”


마르쿠스는 정직하게 호소했지만, 도나우 전선의 장병들은 병에 시달리면서도 전선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황제를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이다. 마르쿠스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도나우 전선만이 아니라 서방 전역의 ‘목소리’가 되었다. 원로원도 만장일치로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경거망동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명백했다.


이미 전투 상태에 들어가 있던 사르마티아족과 강화 교섭을 시작한 것이었다. 마르코마니족·콰디족·야지게스족 등 도나우강 북쪽의 야만족과는 이미 강화를 맺었다. 마르쿠스는 이제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오리엔트로 갈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마르쿠스가 동쪽으로 떠나기도 전에 문제가 해결되어버렸다. 카시우스의 부하인 백인대장이 카시우스를 죽이고 그 목을 마르쿠스에게 보내왔기 때문이다. 카시우스는 ‘백일 천하’로 끝났다. 마르쿠스는 카시우스의 목을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고 매장하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이제는 오리엔트로 갈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마르쿠스는 가기로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방의 상황이 주모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카시우스에게 맡긴 동방의 방위력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를 따르는 무장은 페르티낙스, 막시미아누스, 퀸틸리우스 형제 등이었다. 이름만 보아도 제국 방위의 최전선에 서 있는 베테랑의 3분의 1이 따라간 것을 알 수 있다.


뒤처리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 일행은 군단을 먼저 보낸 뒤, 소아시아로 건너가 우선 동쪽의 앙키라(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갔다. 하지만 타우루스산맥만 넘으면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지점까지 왔을 때 황후 파우스티나가 몸져눕고 말았다. 황후는 오래 앓지도 않고 곧 숨을 거두었다. 30년의 결혼생활,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는 여섯뿐이지만 두 차례의 쌍둥이 출산을 포함하여 열네 명이나 자식을 낳은 아내가 죽은 것이다.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들어간 황제 일행은 지중해 동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이집트는 가벼운 벌만 받았다. 카시우스의 반란에 누구보다 먼저 동조한 이집트 장관 스탄티아누스 한 사람만 본국에 소환된 뒤 처형당했을 뿐이다. 이집트 장관의 부하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카시우스를 황제로 받든 알렉산드리아 주민에게도 전혀 벌을 내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황제는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티오키아로 들어갔다.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서 처벌을 받을 사람이 공표되었다. 유혈은 거의 없었다. 카시우스에게 동조한 도시들 가운데 비잔티움만 마르쿠스가 먼저 보낸 군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방전이 벌어졌을 뿐이다. 마르쿠스가 이처럼 관대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인 베루스의 신속한 조치 덕분이기도 했다.


베루스가 총독 관저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증거 서류를 소각한 것이었다. 반란의 주모자가 이미 죽은 지금, 반란에 관련된 자들을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숙청하면 상처만 더 깊어질 뿐이다.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이나 편지 따위를 모두 태워버릴 수밖에 없다. 베루스는 마르쿠스가 도나우강에서 떠나기도 전에 이미 그 일을 끝내버렸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베루스의 뜻을 이해하고 이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176년 가을에 황제 일행은 수도 로마에 돌아와 있었다. 55세의 마르쿠스에게는 7년 만의 귀국이었다. 11월 27일에는 게르만인에 대한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와 황태자를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거행되어 수도 주민을 열광시켰다.


세습 확립


해가 바뀐 177년 1월 1일. 이날은 15세의 콤모두스가 처음으로 집정관에 취임하는 날이었다. 새 집정관의 취임 연설이 끝난 뒤, 마르쿠스는 원로원 회의장을 가득 메운 의원들 앞에서 제국의 장래에 중대하기 이를 데 없는 결정을 발표했다. 그것은 아들을 공동 통치의 파트너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옳은 일을 하려고 그토록 신경을 썼으니까 사사로운 부정(父情)에 끌려 그런 결단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위인 퀸틸리우스를 아들 콤모두스의 동료 집정관에 앉혔다. 퀸틸리우스 이외의 네 사위도 이미 집정관을 경험했다. 이 다섯 사위 가운데 적어도 세 명은 속주 출신이고, 다섯 명이 모두 베테랑 무장이다.


원로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황제의 결정을 승인했다. 원로원 의원들의 머리에도 내란의 폐해가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끝마친 마르쿠스는 쇠진했는지,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시의인 갈레누스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황제를 보살폈다. 그래서 177년에는 수도와 로마 근교의 별장을 오가면서 조용히 한 해를 보냈다.


마르쿠스는 이듬해인 178년에도 전반까지는 평온한 생활을 계속했다. 눈에 띄는 행사라고는 17세 생일을 앞둔 콤모두스와 크리스피나를 결혼시킨 것뿐이었다. 마르쿠스가 네 딸에게는 출신 지역도 계급도 따지지 않고 실력있는 무장들을 남편으로 골라주었지만, 황제가 될 아들의 아내로는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속한 규수를 골랐다. 크리스피나의 할아버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브루티우스 플레겐스였다.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


로마군은 179년 봄에 대공세를 시작하기로 했다. 황제가 둘 다 전선에 있었던 것만 보아도 로마가 여기에 얼마나 전력을 투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해의 집정관도 둘 다 참전했다. 두 황제가 전선에 도착한 것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이바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무렵에는 로마인들도 북방 야만족을 한 묶음으로 다룰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기록에도 '야만족'이 '가까운 야만족'(바르바리 수페리오르)과 '먼 야만족'(바르바리 인페리오르)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까운 야만족'은 로마의 방위선과 가까운 지역(고지 게르마니아)에 사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로마와는 이따금 싸우기도 하고 교역도 하면서 줄곧 교류해온 야만족이다.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먼 야만족'은 그보다 더 북쪽 지역(저지 게르마니아)에 사는 사람들로 로마와는 관계를 갖지 않았고, 그래서 로마인으로서는 이 시기에 처음 이름을 들은 부족들이었다. 사르마티아족, 랑고바르드족, 반달족, 고트족, 프랑크족, 삭손족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먼 야만족'이 남서쪽으로 이동한 것이 '가까운 야만족'이 로마 영토를 침범한 진짜 원인이었다.


마르쿠스 황제의 웅대한 계획은 '가까운 야만족'을 로마에 병합하여 속주화함으로써 '먼 야만족'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을 때 제국의 방위선을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에서는 거의 모든 지휘관이 용감하게 싸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부시게 활약한 사람은 기병대를 지휘한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다. 판노니아 출신 인 이 무장은 기병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을 교란하고, 적이 대열을 정비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의 활동 범위는 도나우강에서 북쪽으로 120km까지 이르렸다.


마르쿠스의 생각은 오늘날의 체코를 속주화하는 것이었으니까, 막시미아누스는 그 지역 전체를 공격하고 다닌 셈이다. 황제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부다페스트에 기지를 둔 최전선 제2 아듀트릭스 군단의 군단장에 임명했다. 다만 군단장이 되려면 원로원 의원이어야 한다. 속주 출신으로 군단에서 잔다리를 밟아 출세한 막시미아누스지만, 마르쿠스는 망설이지도 않고 즉석에서 그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로마 원로원에는 사후 승인을 요청했다.


죽음


마르쿠스는 카르눈툼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빈도보나(오늘날의 빈)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전선기지가 된 카르눈툼과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조용히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도보나의 겨울 날씨는 도나우강 연안의 다른 전선기지와 마찬가지로 혹독했다. 179년에서 180년에 걸친 겨울 동안 빈에서는 봄철에 시작될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 2년째를 준비하기 위해 오가는 사람과 말과 수레바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르쿠스 황제가 쓰러진 것은 전투 개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180년 3월 초였다. 아들 콤모두스와 주요 장군들이 병실로 불려왔다. 마르쿠스는 총독이나 군단장으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군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콤모두스를 도와 제국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진력해달라. 둘째.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해달라. 아마 올 가을에는 군사력으로 야만족을 제패하여 속주화의 첫 단계를 끝낼수 있을 것이다.


유언을 끝낸 뒤 황제는 약도 식사도 거부했다. 그리고 나흘째인 3월 17일,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눈을 감았다. 59세 생일을 한 달 앞둔 때였다. 황제로서의 치세는 19년에 이르렀다. 기질적으로는 군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 점철된 19년이었다. 마르쿠스의 시신은 군단기지의 광장에서 도열한 장병들이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되어, 그 후 테베레강변에 솟아 있는 '영묘'에 매장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선에서 죽음을 맞은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콤모두스는 18세 5개월밖에 안 된 나이에 단독 황제가 되었고, 죽은 아버지에게서 새로 물려받은 것은 '최고제사장' 자리뿐이었다. 젊은 황제를 도와 제국의 안전 유지에 진력하고 내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첫 번 째 유언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게르만 전쟁을 계속하라는 두 번째 유언은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죽은 해에 25세 안팎이었고 그 직후에 로마로 이주한 디오 카시우스는 나중에 쓴 역사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진지한 생활방식과 강한 책임감을 생각하면, 좀더 행복한 세월을 보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선 그 자신이 건강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거의 줄곧 어려운 문제들이 연달아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에게 더욱 깊은 경의를 품고 찬양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황제로서 그가 직면한 문제는 모두 새롭고 어려운 과제뿐이었다. 그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병약한 몸으로 59세까지 버틸 수 있었듯이 로마 제국의 목숨을 연장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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