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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Dec 07. 2024

로마인 이야기 11권 (2)

콤모두스 황제와 내란의 시기, 세베루스 황제

제2부 콤모두스 황제
(재위 180년~192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멋진 기마상과 달리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후세에 남긴 ‘몸’은 사자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손에는 곤봉을 쥔 헤라클레스 신을 본뜬 멍한 눈빛의 반신상이었다. 동 시대의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의 치세를 “제국의 재앙이었다”고 거리낌없이 단죄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로마 제국을 총괄하는 데 1장부터 3장까지 할애한 뒤, 콤모두스 시대부터 본문으로 들어간다. 로마 제국의 쇠망은 콤모두스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기번의 시대로부터 2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사에서 악제(惡帝)로 단죄된 사람은 티베리우스·클라우디우스·네로·도미티아누스 등인데, 대부분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구제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초기 황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구제되지 못한 악제는 칼리굴라인데, 그의 치세는 4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아직도 구제되지 않은 콤모두스의 치세는 12년이나 계속되었다.


선왕 암살설


게다가 콤모두스 황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 특수한 사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왜 황제로는 부적격자인 줄 알면서도 콤모두스에게 뒤를 맡겼을까 하는 의문이다. 올바른 삶의 지침을 철학에서 찾을 만큼 현명했던 사람이 단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무책임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콤모두스를 다룬 영화는 지금까지 두 편 제작되었는데, 둘 다 이 문제를 뼈대로 삼고 있다. 첫 번째는 1964년에 제작된 『로마 제국의 멸망』(The Fall of the Roman Empire), 여기서는 시의가 콤모두스의 뜻을 받들어 황제를 죽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2000년에 제작된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부하 장군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자 이를 눈치챈 콤모두스가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고 당시 마르쿠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오현제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황제가 가장 적합한 인재라고 판단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는 방식이 계승되었다는 점이지만, 이 방식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현제 가운데 네 명이 아들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말마따나 "아들은 선택할 수 없지만 후계자는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친아들이 있었다. 실력주의에 철저하여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제국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선제의 친아들이면서도 황제가 되지 못한 사람만큼 추대하기에 적당한 존재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런 사태를 미리 막으려고 했다.


또한 마르쿠스가 제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아들을 일찌감치 공동 황제로 삼았을 당시 콤모두스는 아직 열다섯 살의 소년이어서 황제로는 실격이라고 단정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열아홉 살 때까지 콤모두스는 아버지 마르쿠스가 다른 사람에게 제국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결단을 내릴 만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콤모두스의 성격이 표변한 것은 아버지가 죽은 지 2년 뒤에 일어 난 음모 사건 이후였다.


전쟁 종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이 꺼지면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의 불길도 꺼졌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끝내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장군들은 젊은 황제의 매형이자 오랫동안 선제의 오른팔이었던 폼페이아누스를 앞세워 앞으로 1년, 길어야 2년이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니까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한 모양이다.


이런 젊은 황제 앞에서 장군들은 일종의 모순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들은 임종을 앞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국이 내란에 휘말려들지 않게 하고 콤모두스를 도와 제국을 부흥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새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전쟁을 계속하면 새 황제를 돕겠다는 맹세를 어기게 된다.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로마 사나이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콤모두스가 야만족과 재빨리 강화를 맺은 뒤 도나우강 방위를 그들에게 맡기고 서둘러 로마로 떠나준 데에서 한 가닥 위안을 얻었다. 국경을 수비하는 일이라면 그들의 책임 범위 안에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경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황이 전보다 나빠져 있었다. 그것은 야만족과 맺은 강화 내용 때문이었다.


야만족은 로마군의 대공세로 거의 숨통이 끊어질 지경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느닷없는 강화 제의에 마르코마니족도 콰디족도 당연히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로마가 별안간 강화를 제의해온 이유를 냄새맡을 능력쯤은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로마는 약점을 들키고 말았다. 로마와 마르코마니족, 로마와 콰디족이 개별적으로 맺은 강화조약의 주요 조항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 탈주병과 포로를 즉시 로마로 송환한다.
2) 해마다 밀을 로마에 공물로 바친다.
3) 로마 영토 안에서 열리는 장에 참가할 권리를 갖되, 한 달에 한 번 로마 쪽이 허가한 도시나 마을에 한하여 백인대장과 그 휘하 병사들의 감시 아래 참가한다.
4) '가까운 야만족'의 배후를 위협하던 '먼 야만족' 가운데 1만 2천 명이 다키아 속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앞으로 그들과는 싸우지 말 것.
5)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은 각각 병사 1만 3천 명을 로마군에 제공한다.
6) 도나우강 북안을 따라 5마일(로마마일이니까 약 7.5km) 너비의 무인지대를 설치한다 현재 거기에 배치되어 있는 로마 쪽 요새와 감시탑은 철거하되, 야만족도 방목을 구실로 사람이나 가축이 무인지대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전체적으로 승전국이 패전국과 맺은 강화조약은 분명 아니다. 강화를 서두른 나머지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가 야만족과 잠정적으로 휴전할 때 맺는 휴전협정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2)항은 제대로 이행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5)항이다. 현대의 로마사 연구자들은 한꺼번에 로마군에 야만족이 대거 편입되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 조항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로마군에 이민족을 편입시킨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었다. 편입한 이민족이 언제까지나 이질 분자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로마 사회에 침투하여 제국 전체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생각하는 로마 시민의 한 사람이 되느냐가 문제였다. 전선기지에서 로마군의 일원으로 로마군의 규율에 복종하고, 같은 민족과도 싸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다.


‘60년의 평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생각한 대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북부와 체코에서 슬로바키아에 걸쳐 있는 보헤미아 전역을 정복하여 속주화했다면(마르쿠스의 생각으로는 2개 속주), 이 도나우강 중류 지역에도 북부의 2개 속주와 그 남쪽을 흐르는 도나우강으로 이루어진 이중 방벽 체제가 갖추어졌을 것이다. 도나우강 하류에서 다키아 속주와 도나우강이 이중 방벽 체제를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는 그 부담을 계속 감당할 수 있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이미 로마의 방위력은 28개 군단에서 30개 군단으로 늘어났다. 거기에 또다시 2개 군단이 추가되는 것이다. 보헤미아 전역이 속주화되었다 해도, 그 지역이 광대하기는 하지만 로마에는 결국 교두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기느냐 마느냐는 정복욕을 만족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냉철한 정략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어제까지 적대했던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과는 강화를 맺었고, 로마 병사들은 도나우강 북쪽 연안에 7.5km 너비로 뻗어 있는 중립지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빈과 부다페스트도 다시 최전방 기지가 되었다. 이것이 로마인이 말하는 ‘굴욕적인 강화’의 결과였다. 콤모두스의 참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별문제로 하고, 이때 콤모두스가 내린 결단이 그 후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를 살펴보면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교양서로서 로마사를 쓴 저자이자 학자로서 여전히 명성을 누리고 있는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콤모두스의 결단이 ‘60년의 평화’를 낳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180년부터 240년까지 도나우강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 콤모두스


그러나 콤모두스 황제를 변호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콤모두스는 통치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20세부터 31세까지 11년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수도 로마로 돌아온 콤모두스를 맞은 분위기는 최고로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돌아왔지만 시민들은 결국 20년이나 지속된 전쟁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국고 부담도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평화가 돌아오면, 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아직 강하니까 사람들은 안심하고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로마가 전력을 투입한 전쟁이 끝난 것은, 전쟁터인 변경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바꾸어놓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의 치세에는 현제로 여겨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 달리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이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콤모두스의 치세는 이처럼 평화롭고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아버지 마르쿠스는 충성스럽고 책임감도 강한 장군들을 아들에게 남겨주었고, 내치에서도 유능한 관료들을 남겨주었다. 그런데 제위에 오른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182년에 콤모두스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사건이 일어난다. 황제 암살 음모이기는 했지만, 실상은 가정 비극이었다. 누나 가운데 하나가 주모자였기 때문이다.


누나 루킬라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낳은 자녀 열네 명 가운데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아들 콤모두스와 딸 다섯뿐이었는데, 다섯 황녀 가운데 루킬라는 항상 맏딸로 행세했다. 150년에 태어났으니까 콤모두스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누나다.


그녀는 열네 살 때 20세나 연상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했다. 루키우스는 공동 황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루킬라는 황녀이자 황비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마르쿠스는 결혼 선물로 루킬라에게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존칭을 주었다. 그런데 루키우스 베루스가 5년 뒤에 죽어버렸다. 루킬라는 열아홉 살도 되기 전에 과부가 되었다. 반 년 뒤, 마르쿠스는 아직 상도 벗지 않은 딸을 신임하는 부하인 폼페이아누스와 결혼시킨다.


아버지의 분부니까 따르기는 했지만 이 결혼은 루킬라의 자존심을 몹시 손상시켰다. 결국 루킬라는 앞으로도 ‘황후’의 지위와 칭호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에 동의하여 이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 그래도 루킬라는 남편 폼페이아누스를 계속 멸시한 모양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소아시아에서 세상을 뜬 뒤로는 루킬라가 유일한 ‘황후’로서 로마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루키우스 베루스, 루킬라, 폼페이아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아버지 마르쿠스가 죽고 동생 콤모두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을 때부터 루킬라는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것을 느끼기 시작했겠지만, 아직 그녀는 단독 ‘황후’였다. 그런데 2년 뒤인 182년에 황제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가 잉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것은 헛소문이었던 모양이지만, 그 소문을 들은 루킬라는 흥분했다.

크리스피나는 아직 10대지만 자식을 낳으면 ‘황후’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황제의 누나이고 황제의 신하의 아내에 불과한 자기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린다. 흥분한 그녀는 결국 황후의 지위를 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인물인 황제를 죽이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암살 음모


황제 암살 음모는 루킬라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한마디로 엉성하기 짝이 없다. 황제를 죽이는 것이니까 후임자로 누구를 앉힐 것인가를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루킬라는 남편을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에 결국 루킬라가 후임 황제로 택한 사람은 마르쿠스 우미디우스 콰드라투스였다. 아버지 마르쿠스의 누이동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안니아의 아들이니까, 루킬라와는 사촌 사이다.


루킬라가 이 인물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암살에 성공하면 폼페이아누스와 이혼하고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미끼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루킬라는 다부지고 드세 보이는 얼굴이지만 미인이었다. 루킬라는 건장한 체격에 무술에도 능한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를 자객으로 골랐다. 그는 남편 폼페이아누스의 조카인데, 젊고 생각이 얕은 남자였다고 한다.

살해 장소를 고르는 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음악이나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을 그리스식으로 ‘오데온’이라고 불렀는데, 이 극장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극장에서 나오는 콤모두스를 칼로 찔러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도미티아노 오데온 복원도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살인자가 칼을 빼든 뒤 쓸데없는 말을 외친 것이 탈이었다. “원로원의 이름으로!” 하고 외쳤던 것이다. 로마에서 ‘원로원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폭군을 죽일 때의 상투적 문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말로 범행을 예고해버렸기 때문에 자객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았다.


황제 암살을 기도한 퀸티아누스는 당장 참수형에 처해졌다. 콤모두스의 후임자로 선정된 콰드라투스도 목이 잘렸다. 이들 두 사람을 모시고 있던 두 노예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루킬라는 카프리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카프리섬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살해되었다. 황제 일가의 묘소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유골이 매장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암살 음모 사건은 21세의 황제 콤모두스를 의심의 포로로 만들어버린다. 전혀 폭군이 아니었던 그를 폭군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근위대의 장관은 전통적으로 두 사람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마르쿠스 시대 말기부터 그 자리를 맡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파테르노였다. 이 그리스계 로마인은 오랫동안 마르쿠스 황제의 비서실장 같은 역할을 맡아 두터운 신임을 받은 유능한 측근이었고, 야만족과의 외교 교섭을 도맡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파테르노는 그 후 근위대장에 임명되었고, 마르쿠스가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실제로는 결백했던 모양이지만, 의심의 포로가 되어버린 콤모두스가 이 파테르노에게 의혹의 눈길을 돌렸다. 우선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고, 얼마 후 사고를 위장한 타살로 목숨을 잃었다.


의심을 받은 것은 파테르노만이 아니었다. 182년부터 183년까지 1년 동안, 음모를 알면서 잠자코 있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이 여섯 명에 이른다. 모두 원로원 의원이었고, 게다가 모두 '집정관 경험자'인 유력한 의원들이었다. 여섯 명 가운데 네 명은 사형, 두 명은 추방형에 처해졌다. 또한 마르쿠스 밑에서 군단장으로 활약한 퀸틸리우스 형제 중 형은 황제의 딸과 결혼했으니까 콤모두스의 매형이자 역시 집정관 경험자였는데, 그도 살해되었다.


콤모두스에 대한 의원들의 감정은 이 사건으로 단번에 달라져버렸다. 그리고 일반 시민이 콤모두스를 보는 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민도 방관하지 않는 경우가 하나 있었다. 육친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경우다. 로마인은 전통적으로 가정을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서민들은 제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제국을 제대로 다스릴 리가 없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5년간


파테르노의 죽음으로 혼자 남은 근위대장은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Sextus Tigidius Perennis)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페렌니스를 믿고 의지하라고 콤모두스에게 충고한 것은 콤모두스가 여전히 의지하던 폼페이아누스였다고 한다. 페렌니스는 서기 2세기에는 차츰 소수파가 되어가던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그때까지 줄곧 전선에서 경력을 쌓은 순수한 무인이었다.


페렌니스는 변경에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수도에서 쾌적한 생활을 즐기는 것밖에는 생각지 않는 원로원 의원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페렌니스를 벼락 출세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당시 50세 안팍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페렌니스가 콤모두스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도맡아 관리하게 된다.

[로마 근위대 출처 구글 이미지]

브리타니아 야만족 격퇴


황제를 대신하여 사실상 제국을 도맡아 관리하던 페렌니스는 184년에 야만족이 브리타니아를 침범한 사건에 직면한다. 오늘날의 잉글랜드인 브리타니아는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침입에 늘 대처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브리타니아의 방위선은 돌벽이 길게 이어진 '하드리아누스 성벽'이고, 병력도 3개 군단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184년에 로마로 날아온 급보에 따르면, 침입한 칼레도니아 병사들을 맞아 싸운 1개 군단이 심한 타격을 받고 퇴각한데다 군단장까지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당황한 로마 원로원은 라인강 방위선이나 이베리아반도에서 적어도 1개 군단을 원군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근위대장 페렌니스는 그 주장을 물리친다. 병력에 여유가 없고, 원군을 보낼 시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페렌니스는 라인강 방위선에서 근무하던 울피우스 마르켈루스에게 당장 브리타니아로 가서 전사한 군단장을 대신하라고 콤모두스의 이름으로 명령했다. 전선 경험이 풍부한 페렌니스는 패배의 쓴맛을 본 군단도 지휘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마르켈루스의 지휘를 받게 된 군단은 다른 2개 군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설욕에 성공했다.


브리타니아군의 충성 거부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에 야만족 침입보다 휠씬 중대한 사건이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났다. 로마 제국의 군단병 들은 해마다 1월 1일이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가장 먼 군단기지인 칼리온에 주둔해 있는 군단병들이 콤모두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네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병사들의 추대를 받은 군단장 프리스쿠스는 그것을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병사들이 군단장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페렌니스는 원로원의 뜻을 문지 않고, 자기와 같은 폼페이아누스 문하인 페르티낙스를 서둘러 브리타니아로 파견했다. 페르티낙스가 어떻게 군단병들을 설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설득은 성공했고, 군단병들은 다시 콤모두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페렌니스는 사태의 중대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는 군단병들이 황제에게 품고 있는 불만이 다른 국경의 병사들에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페렌니스는 이 사건이 해결된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로 했다. 로마 제국에서 무언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방법은 그것을 새긴 금화나 은화나 동전을 발행하는 것이다.


겉면에 콤모두스 황제의 옆얼굴을 새긴 은화를 두 종류 주조하여, 하나에는 'Concordia exercitum'(군대의 단합)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또 하나에는 'Fides exercitum'(군대의 충성)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병사들의 봉급은 데나리우스 은화로 지불된다. 그 은화에 군대의 단결과 충성을 강조한 선전 문구를 새긴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사고는 다른 국경에 파급되지 않았다.

클레안드로스의 모함


그런데 한시름을 놓은 반동인지, 원로원에서 페렌니스에 대한 반발을 표면화했다. 이것이 24세가 된 콤모두스를 불안에 빠뜨렸다. 이들은 페렌니스가 원로원을 무시하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그런 그의 방식과 정책에 대한 평가를 혼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 페렌니스에 대한 반감이 표면화되자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가 나타났다. 황제의 침실에서 시중을 드는 클레안드로스라는 하인이었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황궁에서 일하게 된 직후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나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해방노예'가 되었다. 이름으로 보아 분명 그리스인이다. 침실에 딸린 하인이니까 주인인 황제와 접촉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 인물이 콤모두스에게 페렌니스에 대한 원로원의 반감을 부풀려 고자질했다.


콤모두스는 클레안드로스의 귀엣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페렌니스에 대한 원로원 의 반감이 언젠가는 페렌니스를 중용하고 있는 자신에게 돌려지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다. 침실에 딸린 해방노예는 이런 콤모두스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졌다.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휘하의 근위병 1만 명을 동원하여 황제를 제거하려 한다고 속살거린 것이다.


자객 역할은 황제를 경호하는 호위병들이 맡은 모양이다. 남몰래 팔라티노 언덕을 떠난 그들은 어둠을 틈타 페렌니스의 저택을 덮쳤다. 페렌니스만이 아니라 아내와 누이와 두 아들까지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 아침 이 사건은 로마 전역에 알려졌다. 원로원 의원들까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콤모두스는 황제 암살 음모가 사전에 발각된 것은 자기가 행운아라는 증거라면서, 자신의 공식 이름에 행운아를 뜻하는 '펠릭스'를 덧붙이겠다고 공표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원로원 의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원로원의 권위주의에 물들지 않고 회의장 분위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페렌니스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야심가이기는 했지만, 뇌물이 통하지 않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정책은 온건하고 무리가 없었다. 원로원을 대하는 태도가 고집스럽고 강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능한 공직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좀더 행복한 죽음을 맞을 자격이 충분했다.>


측근 정치


콤모두스의 치세에서 그래도 괜찮았던 시대는 페렌니스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렸다. 페렌니스 대신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배의 키를 잡은 것은 해방노예 클레안드로스였다. 천박한 노예 출신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서자, 그는 축재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거의 공공연하게 매관 매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190년에는 한 해 동안 취임한 집정관이 무려 25명에 이를 지경이었다.


집정관은 1년에 2명, 많아야 4명으로 정해져 있다. 클레안드로스가 아무리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다 해도 원로원에 돈으로 집정관 자리를 사는 의원이 없었다면 25명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숫자다. 원로원이 이 꼴이었으니, 노예 출신인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도 항의하는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항의는커녕 클레안드로스에게 '파테르 세나투스'(원로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바치는 데 찬성하기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87년에 두 번째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정말로 그들이 암살을 기도했는지, 아니면 축재와 보신밖에는 염두에 없는 클레안드로스가 콤모두스의 피해 망상을 부추긴 결과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주모자로 지목된 마메르티누스와 부루스는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살해되었다. 둘 다 콤모두스의 매형이나 매제였다.


그래도 콤모두스는 누이들한테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아내한테는 거리낌이 없었다. 아내 크리스피나가 암살 음모에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다. 새 애인이 생겼기 때문에 아내가 거추장스러웠을 뿐이다. 크리스피나는 간통죄로 카프리섬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살해되었다.


하지만 해방노예 클레안드로스의 천하도 4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마에는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사회복지제도가 있었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매달 밀 30kg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제도였다. 축재에 혈안이 된 클레안드로스는 국정 운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마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시장에는 내놓지 않고 무상 배급용으로만 써야 할 질 나쁜 밀까지 시장에 나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상 배급되는 밀의 양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러자 서민들이 화가 났다. 여자들이 앞장서고 남자들까지 동조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몰려갔다. 1차 모반 음모 사건 직후 퀸틸리우스 형제한테 빼앗은 저택이다. 그 일대는 직선으로 뻗어 있는 아피아 가도 양쪽으로 언덕 하나 없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담장 바로 아래까지 성난 군중이 몰려들자 28세의 콤모두스는 깜짝 놀랐다.


공포에 사로잡힌 콤모두스는 제물을 바치기로 했다. 클레안드로스를 혼자 저택에서 밀어내고 그의 등뒤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클레안드로스는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로마까지 끌려가 어이없이 살해되었다. 그가 굵어모은 재산은 모두 국고에 환수되었지만, 콤모두스는 그 돈을 밀 시장을 본래 상태 로 되돌리는 데 쓰지 않고 콜로세움에서 대규모 검투 시합을 개최하는 데 써버렸다.


‘로마의 헤라클레스’


180년부터 192년까지 계속된 콤모두스의 치세는 처음 5년이 페렌니스 시대, 다음 4년은 클레안드로스 시대였다. 그리고 그다음 치세의 마지막 3년 동안에도 콤모두스는 여전히 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 마르키아 : 얼마 전부터 콤모두스의 애첩. 원래는 콰드라투스의 노예였지만 콰드라투스의 재산을 접수한 황제의 소유물이 되었다. 기독교도였다지만, 통치에 무관심한 콤모두스는 기독교의 폐해에도 무관심했다.

- 에클렉투스 : 클레안드로스를 대신하여 황제의 침실 담당 하인으로 승격한 그리스 태생의 해방노예. 마르키아와 부부 사이였다.

- 아이밀리우스 레토 : 클레안드로스가 살해된 뒤 단독 근위대장이 되었다.


이런 자들이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황제 주변의 유능한 인재들은 배제되거나 스스로 사직하여 콤모두스를 떠나게 된다. 나중에는 속주 총독과 군단장에게 보내는 공문서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가 보낸 서한에는 ‘vale'라는 한 마디만 달랑 적혀 있었다고 한다. '발레'는 '잘 있어라, 안녕, 몸조심해라' 등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는 인사말로,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관례적인 용어다.


황제는 이제 거리낌없이 검투 시합과 경기대회에 열중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0대 후반의 콤모두스는 체격이 건장하고 힘도 센데다 프로 검투사와도 막상막하로 겨룰 수 있는 기술까지 습득하고 있었다. 이제 콤모두스는 자신의 친아버지는 유피테르 신이며 자기는 그 아들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면서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칭하게 되었다. 사자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오른손에는 곤봉을 든 조각상을 만들게 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가 29세에서 30세를 거쳐 31세에 이르는 마지막 3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원로원 의원으로 콤모두스와 함께 수도에 살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은 바랄 수 없는 최적의 현장 증인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콤모두스가 31세 때인 192년에 콜로세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어느 날 투기장에서 우리 원로원 의원들은 관람석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황제의 뛰어난 무술을 관전하고 있었다.  그날 콤모두스의 상대는 저것도 새인가 싶을 만큼 커다란 타조였다. 콤모두스는 돌진해오는 그 새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런 다음 의기양양한 얼굴로 의원들을 돌아보며 손에 든 칼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번 휘둘렸다.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 목도 이렇게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듯이, 무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우스광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의원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폭소는 의원들이 앉아 있는 지정석 끝에서 끝까지 퍼져갔다 디오 카시우스는(카시우스도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저술에서는 자신을 제3자로 지칭했다) 이대로 가면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난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머리에 쓰고 있던 월계관에서 월계수 잎을 한 닢 떼어내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다른 의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이를 본 콤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월계수 잎을 질겅질겅 씹고 있어서 웃는 것처럼 보였을 뿐, 황제의 협박을 비웃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잔인한 심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구실도 사라져버렸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암살


콤모두스에 대한 암살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일이 있은 지 몇 달 뒤인 192년 12월 31일 밤에 결행되었다. 암살을 모의한 사람은 황제의 애첩 마르키아와 황제의 침실 담당 하인인 에클렉투스, 자객은 콤모두스의 레슬링 코치인 나르키소스였다. 나르키소스는 황궁 욕실에서 목욕하 고 있는 콤모두스를 목졸라 죽였다. 31년의 생애, 황제로서 12년의 치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동기는 전혀 모른다. 마르키아와 에클렉투스는 콤모두스가 있었기 때문에 위세를 부리고 사치도 부릴 수 있었으니까, 콤모두스가 죽으면 누구보다도 그들이 손해다. 또한 원로원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증거도 없다. 어쨌든 콤모두스를 죽인 직후에 세 사람이 취한 행동은 대단했다. 당장 콤모두스의 이름으로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레토를 불러 진상을 밝혔다.


레토의 행동도 재빨랐다. 그 날 밤 안으로 유력한 원로원 의원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후임 황제도 결정했다. 그동안 황궁 안에서도 사후 처리가 조용히 진행되었다. 욕실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의 주검은 시트에 싸여 은밀히 황궁 밖으로 실려나가 매장되었다. 마르키아와 에클렉투스와 나르키소스는 그날 밤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세 사람의 소식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세 사람 모두 그 후의 로마 역사에서 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

[콤모두스 살해 출처 구글 이미지]

권력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피지배자가 납득하려면 실력만이 아니라 정통성도 필요하다. 콤모두스는 황제로서는 무능하고 실격자였지만 정통성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황제 마르쿠스가 후계자로 지명했고, 3년 동안 공동 황제의 경험을 쌍았고, 원로원의 승인도 받았고, 시민에게도 환영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런 콤모두스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보한 사람이 없어졌다.


이제 실력만 겨루는 세계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실력으로 이긴 최후의 승자가 다음에 밟아야 할 단계는 정통성 획득이다. 정통성이 없으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의 서약을 지키느라, 무려 12년 동안이나 콤모두스가 실정을 거듭해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장군들에게 192년 마지막 날 일어난 콤모두스의 죽음은 그 서약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전 황제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이어 세 번째다. 죽은 뒤 이 불명예스러운 형에 처해지면 초상은 파괴되고 공적비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공공건물도 짓지 않았고 수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버려야 할 비문도 없었다.


제3부 내란의 시대
(193년~197년)
[페르티낙스와 율리아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뒤 제위를 다투게 된 다섯 명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제국의 방위를 떠맡았던 사람들이다. 난세는 하극상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야생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힘과 지혜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힘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군단의 ‘성공 신화’


페르티낙스는 원래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스스로 나선 인물은 아니다. 5년 전부터 수도 로마의 행정장관을 맡고 있었는데, 콤모두스가 암살된 것을 안 근위대장 레토가 그를 설득하여 제위에 앉힌 것이다. 원로원의 유력자들도 페르티낙스라면 괜찮겠다고 동의했기 때문에, 레토는 원로원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줄 거라는 카드를 내세워 페르티낙스를 설득했다. 페르티낙스가 레토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그 나름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페르티낙스는 그때 이미 66세였다. 서기 193년 1월 1일,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황제에 취임했다. 회의장에는 일흔 살이 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폼페이아누스도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페르티낙스는 이 옛 상관에게 ‘공동 황제’가 되어달라고 제의했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던 이 노장은 더 젊은 사람을 고르라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는 126년에 북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모직물을 거래하는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르티낙스는 교사를 하면서 얻은 시민권을 가지고 군단에 지원했다. 정예 군단으로 알려진 서방 군단에 지원하지 않고, 도나우강 방위선의 군단병들이 ‘오리엔트적’(로마에서는 연약하다는 뜻)이라면서 경멸한 시리아 군단에 지원하였고, 능력을 인정 받아 당당히 대대장으로 진급했다.


얼마 후 페르티낙스는 속주에 근무하는 ‘재무관’에 임명된다. 속주 총독이 정치·군사·사법의 책임자라면, 재무관은 속주의 재정 책임자로서 지출과 수입을 관리한다. 지출은 대부분 인프라를 건설하거나 유지 보수하는 비용이고, 수입은 속주세나 기타 세금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여러 속주에서 재무관을 역임한 모양이다.


원로원에 들어간 페르티낙스를 기다리는 것은 법무관 자리였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에 있는 3개 군단기지 가운데 브리게티오(오늘날 헝가리의 수니)에 주둔하는 제1 아듀트릭스 군단에 군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여러 곳을 다니며 군단장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 때 페렌니스이 지시를 받아 브리타니아군의 반란을 수습하기도 했다.

수도로 돌아온 페르티낙스에게 제공된 자리는 수도 로마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장관’이었다. 192년에는 황제 콤모두스와 함께 집정관도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었고, 이듬해 1월 1일 페르티낙스는 황제에 취임했다.


페르티낙스의 경력은 밑바닥부터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상까지 올라간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성공 신화’로서, 로마 사회가 참으로 계급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해방노예의 아들이 황제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페르티낙스 황제


193년 1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황제 취임을 승인받은 직후, 66세의 페르티낙스는 제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취임사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본받겠다고 공언했다. 원로원과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또한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원로원 의원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오현제 시대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의원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페르티낙스는 국가 재정 건전화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모든 조직을 재평가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위는 세습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1남1녀가 있었지만, 아내에게는 ‘황후’ 칭호를 주지 않았다. 자녀가 황궁에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근위대장 레토의 공이 컸다. 최고 공신인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거기에 보답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 황제가 자기를 이집트 장관에 임명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새 황제는 전통적으로 황제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한 원로원조차 찬성할 수밖에 없는 정책에 전념한 나머지, 레토의 희망을 들어주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석 달 가까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오지 않자, 헛물을 켠 기분이 든 레토는 마침내 부하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새 황제 페르티낙스는 원로원의 꼭두각시라면서, 황제의 원로원 편향 정책을 비난한 것이다.


193년 3월 28일, 레토의 선동을 받은 근위병들이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을 습격했다. 황제의 신변 경호를 맡은 호위병들도, 황궁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그들의 서슬에 놀라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은 페르티낙스는 단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위에 오른 지 87일 만이었다. 아내와 두 자녀를 저승의 길동무로 삼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


페르티낙스를 없애는 데 성공한 레토가 다음 황제로 점찍은 사람은 바로 그 무렵 북아프리카에서 수도로 돌아온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런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승낙했지만,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라는 원로원 의원이었다. 이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제위에 앉힐 것인지는 레토의 책동으로 근위대 병사들이 결정하게 되었다.


이 경합은 술피키아누스가 근위병 1인당 5,000데나리우스, 율리아누스가 6,250데나리우스를 불렀을 때 승패가 판가름났다. 여기에는 원로원도 분개했지만, 결국 제위를 낙찰받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황제 취임을 승인했다. 하지만 변경의 방위선을 지키는 장병들은 승인하지 않았다. 페르티낙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동요하지 않았던 군단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을 알고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Marcus Didius Julianus)는 하드리아누스 치세 말기인 133년에 북이탈리아의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율리아누스 가문은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밀라노의 유력자로 대단한 부자였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태어나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린 공직을 차례로 밟으면서 힘들고 중요한 자리를 역임했다.

[메디올라눔과 밀라노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다가 이제 예순 살이 가까워진 192년에는 편한 자리를 맡게 되었다. 오늘날의 튀니지와 리비아를 합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다. 그 임기를 마치고 수도로 돌아왔을 때 페르티낙스 황제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문 자제로서 ‘명예로운 경력’을 성실하게 거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인생도 예순 살이 되는 그해에 완전히 바뀌었다.


제위 쟁탈전의 시작


193년 3월 8일, 살해된 페르티낙스의 뒤를 이어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취임했고 원로원도 승인했다. 그러자 4월 9일,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가 각각 휘하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는 움직이지 않았던 군단이 왜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는 움직였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근위병에 대한 군단병의 반감이다.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를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군단병들과 출신도 같고 성장 환경도 같았다. 게다가 근위대를 특별히 우대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 뒤를 이은 율리아누스는 근위대의 후원으로 제위에 오른 사람이다. 율리아누스가 즉위한 것을 안 군단병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두 번째 열쇠는 군단병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던 속주 총독들의 반발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동년배이자 오른팔인 폼페이아누스가 제1세대라면, 페르티낙스는 경력으로 보아 제2세대가 된다. 오랫동안 폴페이아누스의 참모였기 때문이다. 130년대 중반에 태어난 율리아누스, 알비누스, 니게르는 제3세대이고, 이들 세 장군보다 열 살 젊은 세베루스도 나이가 아니라 지위로 보면 같은 제3세대에 속한다.


이들 네 장군이 페르티낙스의 황제 취임에 반발하지 않은 것은 페르티낙스가 그들의 상관이었고, 또한 그들이 존경하는 폼페이아누스가 페르티낙스의 뒤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살해되고, 뒤이어 제위에 오른 사람은 자신들과 같은 세대인 율리아누스였다. 이 사실을 안 세 명의 심정을 속된 말로 표현하면, '지가 뭔데, 저는 황제가 되고 나 는 부하가 되어야 하나?'였을 것이다.


세 번째 열쇠는 군단병이 누군가를 황제로 추대하여 국정에 참여할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대답은 ‘그렇다’였다. 일반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은 해마다 1월 1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의식은 황제와 변사가 맺는 계약을 의미하는 동시에 황제에 대한 신임투표이기도 했다.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취임했으니 율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받은 군단병들이 황제에 대한 신임 투표이기도 한 충성 선서를 거부한 것이다.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는 불신임을 받은 결과가 되었다.


출신지


그리하여 193년 봄부터 제위 쟁탈전이 시작되는데, 그 주인공 네 명의 출신지에서도 시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시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도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의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브리타니아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하드루메툼 출신이다. 판노니아 총독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이다.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 두 명, 북아프리카 출신이 두 명이다.


오현제 시대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에스파냐 출신이어서 에스파냐 출신이 활개를 편 시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그 물결이 차츰 북아프리카로 옮아가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위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그의 은사인 프론토도 아프리카 속주의 키르타(오늘날 알제리의 콩스탄틴) 출신이다. 600명이 정원인 원로원 의원 중에도 북아프리카 출신이 20%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제리 콩스탄틴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판노니아 총독 세베루스였다. 다른 세 명의 경쟁자가 모두 60세 안팎인 반면, 47세로 가장 젊은 이 북아프리카 출신 총독은 '게르마니아 방벽'을 지키는 2개 군단, 판노니아의 4개 군단, 모이시아의 4개 군단, 다키아의 2개 군단, 합해서 12개 군단의 지지를 받았다. 12개 군단이면 군단병만 해도 7만 2천 명에 이른다. 휘하 병력은 세베루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런데도 세베루스는 수도로 가기 전에 우선 알비누스를 회유했다. 알비누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자신과 세베루스의 군사력 차이를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세베루스는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수도 로마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진군


5월에 세베루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도나우강 중류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곧장 수도로 향한다. 그물처럼 뻗어 있는 로마식 가도만 줄곧 따라가면 된다.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해 달구지를 제외하고 식량도 보름치만 지참하게 했다. 지참한 식량이 거의 떨어질 무렵 2개 군단은 이미 이탈리아에 들어와 있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도 수수방관만 한 것은 아니지만, 직속 군단이 없으니까 뾰족한 수가 없다.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고, 근위대장 레토를 통해 근위대를 움직이고, 나폴리 근교의 미세노 군항에서 해군과 노잡이를 불러들여 세베루스를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세베루스가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로 들어가자, 이탈리아에서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맨 먼저 등을 돌리고 세베루스 쪽으로 돌아선 군사력은 라벤나에 기지를 둔 해군이었다. 초조해진 율리아누스는 하다못해 민중의 지지라도 확보하려고 민중이 싫어하는 근위대장 레토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레토의 부하였던 근위병들의 마음만 떠나게 했을 뿐이다.


율리아누스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쓴다. 세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사절로 내세워 그것을 명시한 서한을 세베루스에게 보냈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답장도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 마지막 수단도 허사로 끝났다. 193년 6월 1일, 율리아누스를 지나치게 편든 것을 후회하던 근위병 몇 명이 거실에 혼자 있던 율리아누스를 죽였다. 제위에 오른 지 64일 만이었다.


세베루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는 146년 4월 11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렙티스 마그나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다. 집안은 윗대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가 카르타고를 무찌른 시대에 북아프리카로 이주해온 이탈리아인이라고 하다. 하지만 원주민과 결혼하고 혼혈을 거듭했을 것이니 북아프리카 태생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5년쯤 수도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동안, 황제가 된 뒤에도 학문을 좋아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마르쿠스는 이 청년이 기사 계급에 속하는데도 원로원 계급 출신이 걷는 엘리트 코스인 '명예로운 경력'을 거칠 수 있게 해주었다. 24세에 회계감사관이 되었고, 176년에 30세가 된 세베루스는 '호민관'으로 선출된다.


그는 32세 때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에스파냐에 파견되었고, 이후 시리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제4 스키티카 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콤모두스로 바뀐 뒤, 세베루스는 왠지 이 젊은 황제에게 호감을 사지 못해서 제국의 출세 코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인으로 돌아간 세베루스는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도 유학을 떠나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다. '석사 학위'를 가진 최초의 황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도 콤모두스의 치세가 후반에 접어들자, 세베루스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주도 리옹) 총독으로 파견되었고, 거기에 2년 머무르는 동안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상대는 시리아 제사장의 딸인 율리아 돔나(Julia Domna)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로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리옹에서 태어났다.

[율리아 돔나 출처 구글 이미지]

191년, 세베루스는 '전직 집정관'이라는 직함을 얻어 '가까운 판노니아' 총독에 임명되었다. 도나우강 방위선의 요총에 자리 잡고 있는 최전선으로, 군단기지만 해도 빈도보나, 카르눈툼, 브리게티오에 세 개나 있다. 이 판노니아에서 3개 군단을 이끌고 국경을 지키는 것이 45세의 세베루스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그 임무를 맡은 지 2년이 가까워진 192년 말에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것이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가 살해되고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페르티낙스가 살해되고 율리아누스가 그 뒤를 이은 것을 알았을 때는 움직였다. 그 후 그는 일단 움직인 이상 끝까지 달린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수도 로마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순조롭게 수도에 입성했다. 흘린 피는 전임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피뿐이었다. 재빨리 승자가 된 세베루스에게 근위대도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했다. 근위병들에게 갑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 근위병들이 갑옷을 벗고 투니카 차림이 되자 “지금 당장 수도를 떠나라! 수도에서 100마일(150km) 이내에 머무르면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소집된 원로원 회의장에서 세베루스의 태도에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다만 완벽하게 감정을 억누른 침착한 어조로 간단명료하게 할 말을 할 뿐이었다.


먼저, 자기가 한 일은 제국을 격정하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어서 페르티낙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통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세베루스는 자신과 갈리아에 있는 알비누스가 공동 황제로 취임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뒤에는 시민의 승인을 얻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트라야누스의 '포룸'에서 세베루스가 행한 연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베루스의 연설은 신중했다. 원래 신중한 그의 연설로서도 신중했다. 요컨대 구체적 인 약속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경쟁자는 한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아직도 한 사람--그의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ㅡ이 남아 있었다. 난생처음 그의 실물을 보는 민중 앞에서 47세의 새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터에서는 엄격하고 용감하지만, 정치는 신중하게 하겠다. 적이나 반대자에게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겠지만, 시민에게는 공정하고 온화한 통치자가 되고 싶다. 사생활은 내 성격대로 계속 조심스럽게 꾸려가겠지만, 공적 생활에서도 거만해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엄격하지 않은 신중함, 비굴하지 않은 친절함, 악의 없는 배려, 겉치레가 아닌 진정한 공정함, 일부러 과시할 필요는 없지만 로마 시민의 대표에 어울리는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  이런 것으로 시민의 ‘제일인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수도 주민에게 '안전'은 곧 '치안'이었다. 세베루스는 심복인 데스트로스를 ‘수도 장관'에 임명하고 수도의 치안 유지를 맡기면서, 좀도둑도 눈감아주면 안 된다고 엄명했다. 세베루스는 인구가 120만 명이라는 수도의 '식량'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으로 주식인 밀을 앞으로 7년 동안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항상 2년치를 비축하도록 의무화하고, 밀의 수입 운반 체계도 정비했다.


또한 세베루스는 군사적인 대책도 잊지 않았다. 누미디아의 람바이시스(랑베즈)에 주둔하는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도나우강 하류의 방위선을 지키는 모이시아의 4개 군단에도 부대를 나누어 동방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풍요롭고 광대한 동방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니게르를 북아프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흔들어댈 작정이었다. 또한 니게르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했다.


이런 조치를 끝내는 데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속공은 효과적이다. 세베루스는 전원을 교체 편성한 근위대 가운데 1개 대대만 거느리고 니게르가 기다리고 있는 동방으로 떠났다. 경로는 일부러 도나우강 연안의 군단기지인 레겐스부르크로 직행한 다음 도나우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는 힘든 우회로를 택했다. 도나우강 방위선을 지키는 각 군단기지를 돌면서 정예부대를 직접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경쟁자 알비누스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Decimus Clodius Albinus)는 이름만 보면 타고난 로마인 같지만, 사실은 카르타고 시대부터 번영한 항구도시 하드루메툼에서 태어난 속주 출신이다. 하지만 생가는 유복하고 대대로 유서깊은 집안이었다.

[알비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세베루스가 동방에 가 있는 동안 알비누스는 왜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을까. 그는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 라인강 방위선의 4개 군단, 에스파냐의 1개 군단을 합하여 8개 군단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집정관 직무를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에 들어가 수도 로마를 장악하려고 마음만 떠였다면 얼마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알비누스가 비티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175년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이 일어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휘하 장군에게 배신당한 유일한 사례가 되었지만, 그때 비티니아 속주는 바로 동쪽에 있는 카파도키아 속주와 함께 카시우스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르쿠스 황제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이에 대한 포상인지, 알비누스는 마르쿠스 황제의 추천으로 이듬해인 176년도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보결'이 아니라 1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정규' 집정관이었다.


라인강 근무를 마친 뒤에는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의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리타니아도 결코 속편한 변경은 아니었다.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걸핏하면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넘어 침입했기 때문에 로마는 이곳에 3개 군단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브리타니아에 근무하는 동안 콤모두스가 살해되고, 그 뒤를 이은 페르티낙스도 살해되어 로마는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그리고 알비누스도 그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되었다.

 

또 하나의 ‘성공 신화’


알비누스에 반해 이제 세베루스와 정면으로 충돌하려 하는 니게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데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성공 신화'의 전형이었다. 출생지는 이탈리아반도로만 알려져 있을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수 없다. 그래도 본국 출신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을 테고, 생가는 기사 계급'에 속해 있었던 모양이다.

[니게르 출처 구글 이미지]

그 전환점은 마흔 살이 넘었을 무렵에 찾아왔다. 이집트에 주둔해 있는 로마 군단의 ‘프로쿠라토르'로 임명된 것이다. 프로쿠라토르는 전투 지휘를 제외한 군단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리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뒤처리하기 위해 이집트를 방문한 마르쿠스 황제의 눈에 띄었다. 이후 마르쿠스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에 들어갔는데, 마르쿠스의 오른팔인 폼페이아누스의 추천도 받았던 모양이다.


이런 경위로 원로원에 들어간 니게르는 나이도 이미 4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2년 뒤에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군단을 지휘할 자격을 얻은 니게르를 콤모두스 황제는 최전선인 다키아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다키아는 게르만인의 바다 속으로 불쑥 튀어나간 교두보 같은 곳이니까, 이곳의 방위는 보통 수단으로는 안 된다. 니게르는 다스리기 어려운 이 속주에서 5년 가까이 총독을 지냈다.


이후 니게르는 동방 방위선의 핵심인 시리아 속주로 보내졌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 지휘하는 병력은 시리아에만 3개 군단에 이른다. 여기서도 니게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니게르 총독의 방식은 매파가 아니라 분명 비둘기파였다. 파르티아는 항상 로마 제국의 가상 적국이었지만, 니게르는 파르티아 왕국을 존속시키는 것이 로마에는 더 유리하다는 방침에 따라 파르티아와 로마라는 두 강대국의 공생 노선을 추진했다.


니게르는 군단병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니게르는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 앉아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군단기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과 끊임없이 교류했기 때문이다. 둘째, 동방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속주의 총독이면서도 청렴 결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병사들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한테도 효과가 있었다.


이수스 평원


동방에서는 오리엔트 최대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 입성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 세베루스가 로마에는 무혈 입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안티오키아로 가는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 시리아의 3개 군단,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3개 군단, 이집트의 1개 군단을 합하면 9개 군단의 대병력이었다. 니게르는 마음만 먹으면 이 병력을 거의 다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니게르가 세운 전략은 초전박살이 아니라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단계로, 세베루스 군대가 아시아로 건너오기 전에 비잔티움(오늘날의 이스탄불)에서 서쪽으로 100km 지점에 있는 페린투스에서 저지한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제2단계로 비잔티움에서 공방전을 벌인다. 이것도 실패할 경우에는 소아시아 동남부에 가로놓인 타우루스산맥을 넘어 남쪽의 시리아 속주로 들어가기 직전에 세베루스 군대를 맞아 싸운다.

193년 말에 페린투스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는 니게르 군대가 이겼다. 승리한 니게르는 세베루스에게 서한을 보내 공동 황제가 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답장도 보내오지 않았다. 니게르는 두 번째 싸움터를 소아시아 쪽의 니카이아 근처에 있는 평원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194년 1월에 여기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세베루스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니게르는 194년 10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오려는 세베루스 군대를 맞아 이수스 평원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수스는 그보다 500년 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정면으로 격돌한 전쟁터였다. 여기서 벌어진 양측의 전투는 처음 얼마 동안은 니게르 진영이 우세했지만, 최종 승리는 역시 세베루스에게 돌아갔다.


세베루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항복한 적을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형세가 불리해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니게르 쪽 병사들은 잽싸게 도망쳤다. 이것이 이수스의 결전에서 니게르가 패배한 진짜 원인이었다. 니게르 자신도 도망쳤다. 안티오키아로 가서 처자식을 이집트로 탈출시킨 뒤, 자신은 소수의 병사만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망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보낸 추격대는 유프라테스강에 이르기 훨씬 전에 니게르를 따라잡았다. 총독은 붙잡히기보다는 죽기를 바라고, 스스로 적진 속에 깊숙이 쳐들어가 살해되었다. 니게르의 처자식도 붙잡혔지만, 세베루스는 명색뿐인 추방형에 처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세베루스의 경쟁자가 또 하나 사라졌다.


니게르를 죽인 뒤 세베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니게르에게 호의적이었던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니게르에게 이겼다는 것을 파르티아 쪽에 확실히 알려주기 위한 시위에 불과했다. 세베루스는 그 후 1년 동안 제국 동방의 방위체제를 재편성한 뒤, 196년 여름에 안티 오키아를 떠났다.


알비누스와의 결전


리옹에 있던 알비누스는 그제야 자기가 시간을 낭비해버린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3년이 지난 지금, 동방 군단을 장악한 세베루스의 군사력은 원래의 갑절로 늘어난 반면 알비누스의 군사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니게르가 패한 것을 알고 서방에서도 라인강 방위선의 4개 군단이 알비누스 진영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알비누스에게 남은 것은 총독 시절의 직속 부하였던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과 에스파냐의 1개 군단뿐이었다.


세베루스는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197년 2월 19일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격전의 연속이 었다. 로마의 주전력인 군단병끼리 정면으로 격돌한 것이다. 게다가 한쪽은 도나우강 전 선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방위군이고, 또 한쪽은 그에 못지않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자랑하는 브리타니아 군단병이었다. 양쪽 다 엄격하고 격렬하기로 유명한 로마 군단의 훈련을 받은 전사들이었다.


세베루스와 알비누스가 진두 지휘한 이 결전이 치열한 격투로 일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전투가 끝났을 때 승리자가 된 것은 세베루스였다. 패배를 깨달은 알비누스는 자결을 택했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주검을 말발굽으로 짓밟게 했다고 한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을 재편성한 뒤 수도 로마로 개선한 것은 같은 해 6월이었다. 유일한 승리자, 단독 황제가 되어 돌아온 세베루스는 51세가 되어 있었다.


제4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재위 193~211년)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로서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얻은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살해된 뒤 수도에 들어온 193년 6월이었지만, 그 후 3년 동안은 니게르와 알비누스라는 두 경쟁자를 타도하는 데 소비했으니까, 사실상의 치세는 그 일을 끝낸 197년 6월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세베루스는 유일한 황제가 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실행했다. 197년, 그날 원로원 회의에 출석했다는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베루스 황제의 연설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계자다. 따라서 황제의 공식 이름에도 마르쿠스와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황제의 가문 이름인 안토니누스를 덧붙일 작정이다. 원로원 의원들도 여기에는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세베루스는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튿날 원로원이 콤모두스에게 내린 ‘기록말살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콤모두스의 명예 회복을 요구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계자를 자칭한 이상 그 철인 황제가 후계자로 삼은 콤모두스를 로마 엘리트에게 최고의 불명예인 ‘기록말살형’의 낙인이 찍힌 상태로 방치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로원은 4년 전에 내린 선고를 철회한다.


세베루스는 키가 남보다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건장했고, 웃는 얼굴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도 그 표정은 여전했다. “제국은 이제 진지하게 재건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도 마리우스나 술라나 아우구스투스처럼 반대자의 가면을 벗기고 엄격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한 세베루스는 먼저 원로원 의원 26명의 이름을 불렀다. 로마 제국은 유일한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였지만, 그래도 통풍은 잘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통풍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반대를 허용하는 것은 확고한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지만, 세베루스에게는 그런 자신감이 없었을까. 아니면 이제 그런 ‘관용’을 허락하면 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세베루스 자신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전통에 충실한 로마인을 자처했다. 어린 아들 카라칼라의 지위가 분명해진 것을 로마 시민과 함께 축하하려고 콜로세움과 대경기장에서 검투 시합과 전차 경주를 개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세베루스는 로마인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이라고 부른 공공사업에도 열심이었다. 새로운 가도 건설에 착수한 것은 무려 30년 만이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해안을 따라 테라치나까지 연결되는 ‘세베리아나 가도’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세베리아나 가도’가 로마의 본격적인 가도 공사로는 마지막이 되었다.

세베루스는 2년 뒤 포로 로마노에 개선문을 세웠는데, 이것도 도심 속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에 황제가 세운 마지막 건조물이 되었다. 카라칼라 대목욕장은 카라칼라 시대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목욕장을 착공한 것도 세베루스였다. 그때까지 로마 남부에는 ‘서민의 궁전’이라고 불릴 만큼 호화롭고 도서관까지 갖춘 대목욕장이 없었다. 그것을 세베루스가 만들어준 것이다.

[카라칼라 대목욕장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군인 황제


세베루스 황제는 군단 수를 늘려 군사력을 강화하지는 않았다. 그의 군사력 강화책은 우선 주전력인 군단병 개개인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봉급 인상이다. 세베루스의 군단병 봉급 인상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나 도미티아누스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안보를 담당하는 군단병의 지위를 높이고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처우 개선책은 모든 군단병에게 금반지를 낄 권리를 준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백인대장 이상의 장교와 기병뿐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반지가 장식품이라기보다 인장이었다. 따라서 순금반지나 보석을 박은 금반지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처우 개선책은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백인대장은 물론 기병으로도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네 번째 처우 개선책은 정식 결혼을 허가한 것이었다. 병사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기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기거한다. 그리고 일과를 끝낸 뒤 몇 시간 동안, 또는 축제일 같은 휴일에 처자식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달라진 것은 법률상의 문제뿐이었다.


뜻밖의 결과


아마 세베루스 황제는 로마군을 강화하는 문제만 생각하고 이런 정책을 실시했을 것이다. 제국의 안전보장을 담당하는 병사들의 사회적·경제적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훌륭하고 인도적이다. 어쨌든 선의에서 나온 것만은 틀림없다.


세베루스의 개혁으로 군단 생활이 너무나 편안해져버렸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군사 정권화의 시초였다. 병사들이 군대 생활에 전혀 불만을 갖지 않게 된 결과, 민간인이 되어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욕이 줄어들었고, 그것이 로마 사회에서 군사 관계자를 격리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비로마적인 전제군주, 로마 제국의 군사 정권화로 방향키를 돌린 통치자’였다.


율리아 돔나


로마 시대에 ‘비로마적’이라는 말은 곧 ‘오리엔트적’이라는 뜻이었다. 원로원 의원들한테서 나온 이 비판에는 세베루스의 아내이자 이제 로마 제국의 ‘황후’인 율리아 돔나가 시리아 제사장의 딸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동방 출신이 로마 황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율리아 돔나는 미인인데다 교양도 높은 여인이었다. 세베루스를 처음 만난 것은 세베루스가 시리아에서 군단장으로 근무할 때인 모양이지만, 정략 결혼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세베루스는 갈리아 총독 시절에 율리아 돔나와 결혼했다. 황제가 되기 전이나 된 뒤에도 그 옆에는 애인의 그림자조차 없었으니까, 세베루스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일부일처였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 부조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 돔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 뒤에도 가십을 좋아하고 음모를 좋아하는 상류층 부인들에게 둘러싸이기보다 학자나 문인들에게 둘러싸이기를 좋아했다. 그런 방법으로 남편을 따라다니는 군사적 색채를 희석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황궁에서 열리는 살롱에 단골로 드나든 사람들 중에는 고명한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실적보다 허명이 앞선 문필가가 많다는 느낌이 든다. 율리아 돔나는 VIP의 반려로는 가장 적당한 부인이었을 것이다.


동방 원정, 그리고 그 결과


세베루스가 유일한 승리자로 수도에 돌아온 것은 197년 여름이었지만, 그 후 2년밖에 지나지 않은 199년 가을에 다시 수도를 떠났다. 아내와 두 아들도 동행했다. 이번 동방 원정의 목적은 파르티아 왕국이 공격의 칼날을 로마로 돌리기 전에 불온한 움직임을 미리 억누르는 것이었다. 적어도 공표된 내용은 그러했다. 하지만 파르티아가 로마 영토를 침략한 사실은 없다.


파르티아 왕실은 이제 로마를 도발할 만한 힘도 없었다. 파르티아 왕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된 것은 세베루스가 죽은 지 15년이 지나서였다. 세베루스는 파르티아 내부에서 신흥 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도와준 것이다. 그리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오리엔트는 이제 가상 적국이 아니라 진짜 적국이 되어버린다.


세베루스는 티그리스강변까지 쳐들어간 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고 서쪽으로 돌아온다. 세베루스보다 동행한 아들 카라칼라가 소년답게 의기양양했던 전쟁이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승리는 승리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에 보내는 승전보에서 개선문 건립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승전비가 세워진 이후 새로운 건조물이 세워지지 않은 포로 로마노 중심부에 세베루스의 귀국도 기다리지 않고 개선문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개선장군이 말 네 필이 끄는 전차를 몰고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올라가는 ‘비아 사크라’(신성한 길)라는 비탈길 입구에 지금도 그 개선문이 남아 있다.

[세베루스 개선문 출처 구글 이미지]

세베루스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에 머물다가 로마로 돌아온 것은 202년 봄이었다. 두 아들도 참가한 개선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 직후, 성년식은 이미 치렀지만 아직 열네 살인 카라칼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부는 황제가 없는 로마에서 막강한 세력을 휘두른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었다.


세베루스는 둘째 아들 게타와 이 근위대장을 이듬해인 203년도 집정관으로 취임시켰다. 게타도 그해에 겨우 열네 살이었다. 최고권력자 세베루스의 주변은 점점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금의환향


204년부터 205년까지는 틈틈이 고향 렙티스 마그나를 찾았다.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 렙티스 마그나는 예부터 상업기지로 번영한 도시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시찰한 뒤에는 도시 기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에서도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린 당시의 화려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베루스는 로마 황제들이 아무도 하지 않은 금의환향도 실행했다.

[렙티스 마그나 출처 구글 이미지]

이제 세베루스 황제의 권력 기반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했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누리던 권력은 그의 주변에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205년에 제1의 제위 계승자인 카라칼라와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 사이에 생긴 불화가 표면화했다. 세베루스 황제와 고향 친구인데다 근위대 1만 명의 실권을 등에 업고 으스대는 근위대장의 건방진 태도에 격렬한 성품을 타고난 17세의 카라칼라가 반발한 것이다.


아내 플라우틸라를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도 장인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을 것이다. 세베루스 황제로서는 맏아들과 최측근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었다. 이 불화에는 또 다른 인물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라칼라보다 한 살 아래인 동생 게타였다. 205년 1월 1일, 17세의 카라칼라와 16세의 게타는 아버지 세베루스의 지시에 따라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형제의 불화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1월 22일,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의 말에 카라칼라의 분노가 폭발했다. 17세의 ‘황제 지명자’는 아버지 면전에서 허리에 찬 칼을 빼들어 플라우티아누스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집정관에게 인정된 권리를 행사하여 맨 먼저 발언권을 얻은 카라칼라는 황제 일가족을 죽이고 제위에 오르려 한 근위대장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면서 격렬하게 플라우티아누스를 비난했다.


카라칼라가 아내와 처남의 유배지로 결정한 곳은 시칠리아섬 근처에 있는 리파리섬이었다. 화산섬인 리파리섬은 한적한 어촌일 뿐이었다. 이곳에 유배된 남매는 6년 뒤 카라칼라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리파리섬 출처 구글 이미지]

형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은 채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베루스가 무위도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정책은 모두 제위에 오른 직후에 잇따라 결정한 정책의 연장일 뿐이었다. 건장한 몸을 자랑하던 세베루스도 60대 노인이 되었고, 통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베루스 황제는 병든 몸을 스스로 바로잡기라도 하려는 듯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브리타니아


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한 지역이 로마 시대의 브리타니아 속주였고, 로마인이 칼레도니아라고 부른 북쪽의 스코틀랜드는 계속 로마의 패권 밖에 놓여 있었다. 로마는 그 북쪽까지 제압하는 것은 포기하고, 칼레도니아와 브리타니아의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쌓았다.


그 황무지 너머에 호전적인 칼레도니아 민족이 살고 있었다. 로마인은 그들을 라인강이나 도나우강 건너편에 사는 게르만계 야만족과 똑같이 보지 않았다. 특히 칼레도니아의 한 부족에게는 ‘브리간테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끔찍이 싫어했다. 브리간테스는 산적이나 도적을 뜻하는 라틴어다.


세베루스 황제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단행한 것은 어떤 사건에 격분했기 때문이다. 성벽을 넘어 쳐들어온 브리간테스가 많은 물자를 빼앗고 그 물자를 호위하던 군단병들까지 잡아가자 브리타니아 총독이 돈을 주고 그들을 구출했다. 로마의 속주 총독이 도적의 협박에 굴복하는 사태는 방치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브리타니아 원정이 결정되었고, 208년에는 원정을 준비하면서 한 해를 보냈다.


이듬해인 209년, 세베루스는 봄이 오기를 기다려 황후와 두 아들을 데리고 수도 로마를 떠났다. 본격적인 전쟁은 210년 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칼레도니아 전역을 제패할 생각이었으니까 로마군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치고 나갔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넘어 칼레도니아로 깊숙이 쳐들어간다. 로마군 전위부대는 나중에 하일랜즈(Highlands)라고 불리게 된 산악지대까지 기세 좋게 밀고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하일랜즈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항상 앞장서서 병사들을 지휘한 것은 젊은 카라칼라였다. 동생 게타는 형제 사이가 나쁜 것을 무시하지 못한 아버지의 배려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전선에는 나가지 않고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에 남아 있었다. 세베루스도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에부라쿰(현재 요크)에 발이 묶여 있는 황제의 마음은 우울했다. 병고에 시달린 탓만은 아니다. 칼레도니아 전역을 제패하려면 치밀하면서도 적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전략이 필요한데, 22세의 카라칼라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나이가 젊어서라기보다 결국 군사적인 재능 문제였다.


죽음


해가 바뀐 211년 2월 4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에부라쿰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쟁터에서 달려온 카라칼라, 론디니움을 떠나 얼마 전부터 아버지 곁을 지킨 게타, 세베루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간 아내 율리아 돔나, 브리타니아 전쟁에 참가한 주요 장군들이 황제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영국 요크 출처 구글 이미지]

조용한 죽음이었다. 죽음은 그에게 고통과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65세 생일을 맞기 두 달 전, 제위에 오른 지 18년째였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베루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나라를 다스려라.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한 세베루스는 혼자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구나.”


세베루스는 고향을 꿈꾸면서, 음산하고 춥고 온종일 비가 그치지 않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죽어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황제였다. 세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 일어난 일도 비슷하다. 세베루스가 죽은 직후, 새로 황제가 된 23세의 카라칼라는 재빨리 칼레도니아인과 강화를 맺고, 선제의 유골을 수도에 매장해야 한다면서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세베루스가 죽은 지 1년 뒤인 212년 2월 12일,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에서는 예상된 참극이 일어났다. 어머니 면전에서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칼로 찌른 것이다. 겨우 스물두 살인 게타는 끌어안은 어머니의 가슴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카라칼라는 로마에 있는 모든 ‘가족 초상화’에서 동생 얼굴만 지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게타 출처 구글 이미지]

죽고 나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죽을 때까지는 마찬가지가 아니라는 긍지를 가지고 로마를 짊어진 지도자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 후에도 이런 긍지를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 사람은 나오지만, 그들이 주도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그 후의 로마 제국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3세기의 위기’로 돌진한다.


<1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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