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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Dec 11. 2024

로마인 이야기 12권 (1)

제1부 3세기 전반

로마인 이야기 제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에서 다룬 시기는 서기 211년부터 284년까지 73년간이다. 이 시기에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로마 황제만 해도 총 22명이다. 이 시대가 로마 역사에서 특별히 '위기의 3세기'로 불리게 된 것은 로마 황제가 산 채로 적에게 붙잡히는 전대미문의 불행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전의 수많은 위기와 3세기의 위기는 '위기'(crisis)라는 말은 같아도 그 성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후세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대부분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열거 한다.

•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 야만족의 침입 격화

• 경제력 쇠퇴

•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 기독교의 대두


하지만 어느 것도 1천 년에 이르는 로마인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대두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어느 정도 경험한 위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극복할 수 있었던 위기를 3세기부터는 왜 극복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로마 황제가 자주 바뀌면서 정책의 지속성을 잃어버린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제1장 서기 211년~218년


카라칼라 황제(서기 211년~217년)

[출처 구글 이미지]

여름이 되면 오페라가 상연되는 이유도 있어서, 카라칼라 목욕장(이탈리아어로는 테르메 디 카라칼라)은 로마 시대 유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카라칼라(Caracalla) 황제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카라칼라 목욕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목욕장의 정식 명칭은 ‘안토니누스 목욕장’이었다. * 이 목욕장은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으로 212년부터 216년까지 지어졌는데, 6세기까지 사용되다가, 고트 전쟁 중에 동고트족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카라칼라 욕장의 오페라 출처 구글 이미지]

카라칼라 황제의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이고, 황제 취임 후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이 공식 이름에서 특이한 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들과 혈연관계도 없을뿐더러, 전자는 50년 전에, 후자는 30년 전에 사망한 황제다.


당시 명군으로 평판이 높았던 두 황제의 삶과 통치를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아들의 공식 이름에 덧붙인 것이다. ‘안토니누스’는 이 두 황제의 공통된 ‘성’이라(마르쿠스가 양자라서), 카라칼라 황제의 공식 이름은 안토니누스였고,  '카라칼라'는 황제가 갈리아인의 복장인 긴소매의 긴옷(카라칼라)을 황제가 된 뒤에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211년 2월 4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인 23세의 카라칼라와 22세의 게타가 뒤를 이었다. 아버지 세베루스는 이미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온화한 성격만이 장점인 동생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상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이 자기를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여버렸다. 212년 2월 12일, 아버지가 죽은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카라칼라는 소원대로 유일한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게타의 재능에 의문을 품고 있던 원로원은 이렇다 할 비판도 하지 않고 이 동생 살해를 추인했다. 그 직후 로마 제국 전역의 모든 광장과 모든 회랑에 칙령 하나가 나붙었다.


누구나 로마시민! (212년)


법치국가인 로마에서 정책은 모두 법률의 형태를 취한다.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라고 불린 이 법의 내용은 로마 제국에 사는 신분이 자유로운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나와 내 백성들은 제국을 지키는 부담을 나누어 가질 뿐만 아니라 영예도 나누어 가져야만 좋은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로마 시민권자만 누릴 수 있었던 영예를 이 법령에 따라 비로소 모든 국민이 함께 누리게 되었다.>


로마 제국을 특징지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로마 시민’(romanus)과 ‘속주민’(provincialis)의 차별이 철폐된 것이다. 정복한 자와 정복당한 자의 차이는 로마가 제국으로 바뀐 지 250년 만인 212년에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획기적이라고 해도 좋은 인도적인 법률이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획기적인 법률인데도 로마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나 역사가들은 거의 무시하다시피 한다. 오히려 로마 시대의 ‘목소리’인 디오 카시우스가 ‘안토니누스 칙령’에 대해 내린 평가는 시민권을 확대함으로써 세수 증대를 노렸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증세책인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212년에 나온 ‘안토니누스 칙령’은 속주민을 로마 시민으로 승격시켜 속주세 부담 의무에서도 해방해주었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속주민’도 오늘부터는 ‘로마 시민’인 이상 ‘로마 시민세’라 해도 좋은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를 낼 의무를 지게 된다.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는 그때까지 200년 동안 5%로 고정되어 있었던 이 ‘로마 시민세’의 세율을 단번에 10%로 인상했다. ‘안토니누스 칙령’이 증세책에 불과하다고 단정된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증세책으로 받아들여진 ‘안토니누스 칙령’은 악평만 받고, 카라칼라 황제가 죽은 지 1~2년도 지나기 전에 원래 상태로 돌아가버렸다. 상속세도 노예해방세도 다시 5%로 세율이 인하된 것이다.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은 세율뿐이고, ‘속주민’과 ‘로마 시민’의 차별 철폐와 그에 따른 속주세 폐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취득권’의 ‘기득권’화가 미친 영향


이전까지 로마 시민권은 의욕만 충분하면 획득할 수도 있는 '취득권'이었기 때문에 아직 시민권을 갖지 못한 속주민은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로마 제국을 살리는 힘이 되었다. 그런데 카라칼라 황제는 속주민도 업적을 쌓았든 못 쌓았든 관계없이 누구나 로마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이 ‘기득권’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른 영향은 인도적인 법이라고 찬양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첫째, 종래의 로마 시민권자는 자신들이 제국의 기둥이라는 기개와 긍지를 잃어버렸다. 이제 누구나 동등하니까 자기만 앞장서서 고생할 필요도 없다.
둘째, 새로 로마 시민 대열에 낀 속주민들은 향상심이나 경쟁심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카라칼라 황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로마 시민으로 격상된 속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제국을 짊어지고 나갈 기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넷째, ‘안토니누스 칙령’은 속주민과 로마 시민의 경계를 없애 로마 사회의 특질인 유동성까지 없애버렸고, 이는 인간의 동맥경화 현상과 마찬가지였다.
끝으로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차별 대신, 두 계층을 합한 일반시민 계급이 ‘호네스타스’(존귀한 자)와 ‘후밀리우스’(비천한 자)로 양분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어쨌든 카라칼라 때문에 로마 시민권은 오랫동안 유지해온 매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시민권에 딸린 의무감과 책임감도 느끼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다민족·다문화·다종교의 제국 로마가 서 있는 기반에 균열을 초래했다. 이 현상을 현대식 개념으로 바꾸면 ‘브랜드는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국 방위


젊은 최고권력자는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치스럽고 안일한 생활을 깨끗이 버리고, 동생 게타를 죽여 유일한 황제가 된 지 2년째인 213년에 벌써 로마를 떠나 북부 전선으로 향했다. 황제가 수도를 비운 동안 내정은 ‘콘실리움’에 맡겼다. 원로원은 국회, 콘실리움은 ‘내각’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시기의 내각을 뒤에서 떠받치게 된 것은 절묘한 균형감각을 지닌 여성인 율리아 돔나였다. 율리아 돔나도 제 눈앞에서 차남이 장남에게 살해된 불행을 쉽사리 극복할 수는 없었겠지만, 흉중의 생각이야 어떻든, 그 후에는 아들 카라칼라의 통치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로 일관했다.


황제가 주로 정비한 곳은 라인강 방위선과 ‘게르마니아 방벽’ 주변이다. 먼저 주변 도로망을 정비하였고, 20대 전반의 젊은이답게 우선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가서 방어에 나선 게르만 군대를 철저히 쳐부순 다음에 개수공사를 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깊이 파 내려간 참호 안쪽에 목책만 쳐두었던 곳도 돌과 벽돌로 보강했다.

카라칼라는 이해 가을에는 수도로 돌아와, 게르만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원로원은 이 젊은 황제에게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 직역하면 ‘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자’라는 존칭을 주었다. 하지만 승리를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군사비 증대로 제국의 재정이 구멍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인플레이션


‘안토니누스 칙령’ 때문에, 그때까지는 로마군의 주력이라는 이유로 로마 시민권자에게만 문이 열려 있던 군단병과 속주민도 지원할 수 있는 보조병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다. 원래의 보조병한테도 군단병과 같은 액수의 급료를 주고 만기 제대할 때 군단병과 같은 액수의 퇴직금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편 카라칼라는 지난 30년 동안 조용히 진행되고 있던 통화의 평가절하에 대해서도 무언가 손을 써야 하는 ‘유산’까지 물려받았다.


로마 제국의 기축통화는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와 ‘세스테르티우스 동화’ 세 종류다. 그중 ‘데나리우스 은화’는 특히 중요했다. 속주에 파견되는 관료의 급료와 군단병의 연봉도 모두 데나리우스 은화로 표시되었다.


기원전 23년에 실시된 통화개혁으로 ‘1아우레우스=25데나리우스=100세스테르티우스’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체제가 87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다가 64년에 네로 황제가 조금 손질했다. 네로의 통화개혁은 단순한 평가 절하가 아니라 ‘팍스 로마나’의 보급으로 계속 성장한 경제의 필요에 따른 금융 완화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네로 시대보다 150년 뒤에 카라칼라가 실시한 개혁은 이와는 달리 군사비 증대에 따라 국가 재정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아래 도표를 보면 3세기의 로마 제국이 경제면에서도 위기에 빠져들어간 것을 한눈에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티아 전쟁


214년, 카라칼라는 갓 완성된 통화개혁을 실시하는 일은 ‘내각’에 맡기고, 봄이 되자마자 수도를 떠나 북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도 동행했다. 첫 목적지는 도나우강 전선이지만, 원정의 진짜 목적이 파르티아 전쟁인 이상 시리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는 없다.


우선 카라칼라는 평화적인 방법과 군사적인 방법을 둘 다 구사하여 도나우강 방위선을 강화한다. 같은 게르만계이지만 다른 부족인 마르코만니족과 반달족 사이를 교묘한 외교로 갈라놓는 한편, 다키아족과는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해놓고 카라칼라의 제의를 거부한 콰디족 족장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처형했다.


소아시아 순행


이후 좁은 헬레스폰투스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간 카라칼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니코메디아로 곧장 가지 않고, 당시 일리움이라고 불린 트로이로 직행했다. 카라칼라가 동경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일리아스』를 애독했기 때문이지만,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이곳을 찾은 젊은 대왕과 똑같은 일을 카라칼라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트로이의 옛 전쟁터를 떠난 뒤에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페르가몬을 방문했다. 로마 시대의 페르가몬은 그리스 아테네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학문과 예술의 도시였다. 이곳을 찾은 것은 동행한 교양 있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겨울을 나기 위해 니코메디아(현 튀르키예 이즈미트)로 갔다. 마르마라해에 면해 있고 비잔티움(오늘날의 이스탄불)과도 가까운 니코메디아는 여러 가지로 중요하다. 비티니아 속주의 주도일 뿐만 아니라, 보스포루스해협이 가까이 있어서 흑해의 제해권을 지키는 후방기지 역할도 맡고 있었다.

[니코메디아(현 이즈미트) 출처 구글 이미지]

이듬해인 215년, 니코메디아를 떠난 카라칼라 일행은 이번에는 소아시아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질러 시리아로 직행한다. 지중해의 동쪽 끝을 돌아 5월에는 벌써 안티오키아에 들어갔다. 여기서 카라칼라는 로마의 전통을 깨뜨린다. 그 후 로마군의 전투에서 차츰 주역을 맡게 되는 기동부대를 신설한 것이다.


기동부대


라틴어로 ‘벡실라티오네스’(vexillationes)라고 부른 기동부대를 활용한 사람은 카라칼라가 처음은 아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활용했다. 하지만 명칭은 같아도 카라칼라의 기동부대는 새로 편성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내실과 용도가 달랐다.


그 이전의 ‘기동부대’는 우선 소속 군단에서 일시적으로 파견된 임시부대였다. 따라서 당면한 임무가 끝나면 원래 군단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기동부대’는 각 군단에서 뽑힌 병사들을 모아 군단과는 별도의 새로운 독립 부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당초의 임무가 끝난 뒤에도 그 형태대로 남겨졌다.


기동부대원의 선발 기준을 살펴보면, 전에는 ‘정예’만을 기준으로 삼고 나이는 문제삼지 않았지만, ‘아직 가정을 갖지 않은 독신이고, 따라서 주둔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기간 파견되어도 견딜 수 있는 병사’라는 것이 카라칼라가 세운 선발 기준이었으니까, 나이가 젊은 병사들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카라칼라는 군단병과 보조병을 불문하고 젊은 병사만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하는 방법으로 그 구별을 없애려 한 게 아닐까. 가정을 가진 고참 병사들은 군단에 남아서 기지를 지키고 젊은 병사들은 전선을 따라 이동하는 이 새로운 체제는 양쪽에서 모두 호평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시책도 해가 갈수록 단점이 커져갔다. 20년도 지나기 전에 로마 제국은 쳐들어오는 야만족과 싸우지 않은 해가 없다고 할 만큼 야만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때 반드시 일어난 비판이 방위선을 지켜야 할 전력의 노령화였다. 기지를 지키는 군단과 기동부대가 항상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로


215년 시점으로 돌아가면, 27세의 황제는 자기와 같은 세대인 젊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자신감에 넘쳐 있었을 테고, ‘기동부대’에 속하게 된 병사들도 사기가 올라갔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그들의 직속 사령관은 나이는 젊지만 패배를 모르는 카라칼라다.


젊은 최고사령관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군대를 내보내기 전에 먼저 외교사절을 보낸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 5세에게 파견된 특사는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내놓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이란 전부터 로마에 반대해온 궁정 내부의 유력자 티리다테스와 그 일파를 로마 쪽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볼로가세스 5세는 순순히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궁정 내부의 세력 다툼에 골치를 앓고 있던 파르티아 국왕은 로마와 다시 싸우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카라칼라는 싸울 명분이 없어졌다. 파르티아와 로마는 강화조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살


이 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파르티아의 사절들과 교섭하는 일은 신하들에게 맡기고, 지중해를 따라 팔레스티나 지방을 남하하여 이집트로 들어갔다. 사건은 알렉산드리아의 젊은이들이 카라칼라를 큰 소리로 비난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비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라칼라의 기분을 몹시 해친 것은 사실이었다.

 

카라칼라는 젊은이들을 체육관(김나시움)에 모아 놓고 모조리 학살했다. 게다가 이 학살에 항의하여 봉기한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인근 도시에 기지를 두고 있는 로마 군단이 출동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드리아 시민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잔인한 만행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는 특별히 카라칼라에게 반대하지 않았던 로마 원로원도 이 사건이 전해진 뒤로는 젊은 황제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들도 일반 시민들도 카라칼라가 지난 10년 동안 장인과 아내와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낸 것이다.


카라칼라의 청혼


이 참극이 일어난 후 재빨리 시리아로 돌아온 카라칼라에게 파르티아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왕의 동생인 아르타바누스가 형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새 파르티아 국왕은 벌써 바빌로니아와 왕국 남부를 제외한 전역을 장악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216년 봄에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은 전반까지는,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남하해온 군대와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행군한 로마군이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해 들어가자 파르티아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여름이 되면서 전황도 바뀌었다. 양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교착 상태를 타개해야 할 필요에 쫓긴 것은 적지로 깊숙이 쳐들어간 로마군이었다.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국왕 아르타바누스와 교섭할 길을 찾는다. 그래서 파르티아에게 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싶다고 제의했다. 양국이 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아가 더 큰 문제는 로마인의 일반적인 정서는 최고권력자가 외국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로마 원로원은 반(反)카라칼라 일색으로 돌변한다. 이 반감이 수도 시민들 사이에 퍼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암살 (217년)


216년에서 217년에 걸친 겨울도 거의 끝나갈 무렵, 불상사를 일으킨 병사들을 카라칼라 황제가 호되게 꾸짖은 일이 있었다. 심한 굴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카라칼라가 준 벌이 병사들에게는 부당하게 무거웠다. 병사들은 상관인 마크리누스에게 불만을 호소했다.


나아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카라칼라보다는 당신이 나으니까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도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근위대장 2명 가운데 하나인 마크리누스는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속주 출신으로, 무어인 해방노예의 아들이라는 낮은 계층에서 현재의 높은 지위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은 은밀히 이루어졌을 터인 병사들과 그의 회담을 카라칼라의 친구가 눈치챈 것이었다. 그 친구가 황제에게 고자질하면 자기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직속 부하인 황제 경호대장을 불렀다. 그가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한 데 분개한 것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217년 4월에 접어들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겨울을 난 로마군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프라테스강변에 있는 기지에 집결한 뒤, 그 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가서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노리는 작전이었던 모양이다.


집결지는 두라 에우로푸스(Dura Europus)였는지도 모른다. 주위에 성벽을 둘러치고 도시 구조를 보아도 로마인이 만든 것이 분명한 이 성곽도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파르티아 전쟁에 대비한 로마 제국 최전선 기지가 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런데 카라칼라는 이 기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4월 8일 에데사를 떠난 카라칼라는 다음 도시인 카라이로 가는 중간에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에 들르기 위해 가도를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경호대장이 따라갔고 아무도 없는 작은 신전 안에서 기도를 드리는 카라칼라의 등에 칼을 꽂았다. 다시 가도로 돌아왔을 때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라칼라가 죽은 뒤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취임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그 사흘 동안 군단장과 장군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사흘 뒤인 4월 11일,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추대한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마크리누스는 제위에 올랐다.


카라칼라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로마식으로 화장되어 유골만 안티오키아로 보내졌다. 안티오키아에 있던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결을 택했다. 마크리누스는 원로원에 카라칼라의 신격화를 요구했고 원로원도 이를 승인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의 유골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매장되었다.


마크리누스 황제(217년~218년 재위)

[마크리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카라칼라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고 카라칼라 신격화를 원로원에 요청한 이상, 마크리누스(Marcus Opellius Macrinus)도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카라칼라가 시작한 파르티아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양대 강국이 격돌한 1차전은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전투를 우세하게 진행한 것은 파르티아 쪽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뒤에 벌어진 2차전에서도 승패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시종일관 우세를 차지한 것은 이번에는 로마 쪽이었다. 양군은 겨울을 나기 위해 각자의 숙영지로 돌아갔는데, 마크리누스는 전쟁터 근처에서 숙영하지 않고 곧장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버렸다.


철수


실제로 218년 봄이 되어도 전쟁은 재개되지 않았다. 겨울을 이용하여 강화교섭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마크리누스는 하루라도 빨리 수도 로마에 가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원로원의 도움을 얻어 제위를 확실하게 굳히고 싶었다. 파르티아 국왕도 형을 죽이고 얻은 왕위를 탄탄히 다지기 위해 내정에 전념하고 싶었다.


협상 과정에서 파르티아 국왕은 로마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완전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마크리누스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공식으로 로마 속주가 된 지 20년이 지난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땅에 배속되어 있던 2개 군단도 시리아로 철수하여, 새로 선정된 주둔지로 보내졌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다음에는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쟁터가 되지만, 로마 제국이 버리지 않는 한 항상 로마 편에 서서 싸웠다. 하지만 218년에는 로마가 그들을 버렸다. 이때 마크리누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 병사들의 동요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여인이 있었다.


시리아의 여자


황후가 된 율리아 돔나에게는 율리아 마이사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율리아 마이사도 고향 시리아를 떠나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 전체를 차지한 웅장한 황궁에서 살게 되었다. 시리아의 태양신을 모시는 사제의 딸도 이제 황제의 처제였다. 결혼 상대도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런데 조카인 카라칼라 황제가 죽자 수도 로마에서의 화려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율리아 마이사 출처 구글 이미지]

카라칼라와 가장 가까운 관계자인 율리아 마이사는 고향 에메사(현 시리아의 홈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율리아 마이사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두 딸과 이제 소년으로 성장한 두 외손자의 환영을 받았다. 두 외손자 가운데 손위인 엘라가발루스는 열세 살의 나이에 벌써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인 제사장이 되어 있었다. 또 다른 외손자인 알렉산데르는 아직 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시리아 홈스 출처 구글 이미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빼앗은 마크리누스를 타도하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굳게 맹세한 사람은 시리아에서 산 지 오래된 두 딸도 아니고 시리아밖에 모르는 두 외손자도 아니었다. 로마 생활을 20년 동안이나 만끽한 율리아 마이사였다. 그리고 기회는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온다.


시리아 속주 전체에 주둔해 있는 3개 군단 가운데 2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에메사 부근 라파네아에 계속 주둔한 것은 제3갈리카 군단뿐이었다. 제3갈리카 군단 병사들이 같은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다른 군단 병사들보다 강한 자부심을 갖고, 파르티아에 맞서 로마를 지킨 것은 우리라는 의식이 더 강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 그들이 마크리누스 황제의 저자세 외교에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느끼게 되었다.

제위 탈환


이런 제3갈리카 군단에 마크리누스를 타도할 마음을 품은 율리아 마이사가 접근했다. 제3갈리카 군단 장병들도 기분전환을 위해 말로 4시간이면 갈 수 있던 에메사를 찾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 무렵에 자주 찾아가게 된 곳이 율리아 마이사의 저택이었다. 선제 카라칼라의 이모니까 군단장과 장교들도 방문할 이유는 있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장교들에게 열네 살이 된 외손자 엘라가발루스(Elagabalus)를 소개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의 친아버지는 내 딸 소아이미아스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인 카라칼라라고.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생전에 카라칼라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제3갈리카 군단 장병들은 마크리누스를 타도하러 나설 구체적인 명분을 얻게 되었다.


에메사에서 북쪽의 안티오키아로 올라가는 길에 아파메아라는 도시가 있다. 마크리누스 황제는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은 뒤 메소포타미아 속주에서 철수한 제1파르티카 군단과 제3파르티카 군단 장병들을 주둔지가 결정될 때까지 이 아파메아에 놓아두었다.

[시리아 아파메아 출처 구글 이미지]

이 2개 군단 장병들도 이유는 다르지만 제3갈리카 군단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마크리누스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훨씬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마크리누스가 포기한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얼마 전까지 20년 동안이나 최전방에서 지켜온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3갈리카 군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218년 5월 15일 해질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를 데리고 남몰래 에메사를 떠난 이 여인은 40km 떨어진 라파네아 군단기지로 갔다. 제3갈리카 군단장이 일행을 맞았다. 열네 살 소년이 병사들에게 소개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대대장이 발의하고 병사 전원이 엘라가발루스를 황제로 추대하는 환호성을 지르는 것까지 모두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겨우 모은 병력을 이끈 마크리누스파의 근위대장과 엘라가발루스파의 3개 군단이 아파메아에서 마주쳤다. 마크리누스파 장병들이 볼 수 있도록 군장을 갖춘 엘라가발루스가 가까운 언덕 위에 올라섰고, 그 옆에 죽은 카라칼라의 전신상이 세워졌다. 이것을 본 마크리누스파 장병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


병사들한테 버림받은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것도 위험해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목적지는 까마득히 먼 로마였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원로원이 있는 로마에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피행은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속주까지 왔을 때 막을 내렸다. 가도를 경비하는 병사들한테 들켜버린 것이다. 우편마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나려 했지만, 쫓아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제2장(서기 218년~235년)


엘라가발루스 황제(218~222년 재위)

[엘라가발루스 황제 출처 위키피디아]

동서에 걸친 로마 제국에 처음으로 ‘동방’ 출신 황제가 등장했다. 엘라가발루스는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시리아 속주였고, 오리엔트의 종교인 태양신앙의 제사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로마 황제가 된 이상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한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그의 머리에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리아식 이름인 엘라가발루스는 ‘성소를 관리하는 자’라는 뜻이었는데, 황제가 된 뒤에도 그는 태양신을 모시는 제사장 신분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열네 살의 황제는 행동에서도 로마 황제라기보다 오리엔트의 군주를 연상시켰다. 무슨 일을 하든 느긋했다. 행동을 시작하는 것도 느리지만, 시작한 뒤에도 굼떴다.


황제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시리아를 떠난 지 무려 1년 5개월이 지난 이듬해 가을이었다. 219년 9월 29일, 가을 햇살을 받으며 수도에 들어간 황제 일행을 맞은 로마 서민들은 깜짝 놀랐다. 열다섯 살이 된 새 황제는 로마식 군장으로 수도에 들어간 모양인데, 바로 뒤를 따라간 것은 건장한 노예 여섯 명이 짊어진 가마였다.


커튼이 바람에 날렸을 때 언뜻 보인 것이 원뿔 모양 검은 돌뿐이었기 때문에 모두 아연실색한 것이다. 그것이 태양신앙의 상징인 신체(神體)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에메사 신전에 안치되어 있던 신체를 엘라가발루스가 로마로 옮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는 최고제사장도 겸하고 있다. 유피테르와 그의 아내 유노와 미네르바라는 세 주신(主神)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로마인은 거국일치의 상징으로 ‘화합’(콩코르디아)까지 신격화했고, 로마인들이 국가 로마를 지켜준다고 믿는 그런 신들의 축제일에는 최고제사장인 황제가 제의에 앞장서야 한다.


그런데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그 책무는 수행하겠지만 태양신에게 바치는 제의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신성한 신체를 안치할 태양신전을 반드시 건립해야 했다. 실제로 그 신전은 콜로세움이 바라보이는 팔라티노 언덕 한 귀퉁이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엘라가발루스의 실책


이후 로마인들이 불쾌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하나는 포로 로마노 안에 집까지 받은 여사제를 애인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 직후에 버린 것이었다. 또 하나는 동성애 문제였는데, 엘라가발루스는 많은 사람 앞에서 가까이 다가온 남자한테 아양을 떨고, 공식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남자의 손을 잡아 제 손에 포갠 채로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엘레가벨루스의 장미 출처 구글 이미지]

엘라가발루스의 실질적 통치가 시작된 해로부터 2년 뒤인 221년, 이 오리엔트 스타일의 로마 황제를 단념한 것은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였다. 율리아 마이사는 황제에게 네 살 아래 사촌동생 알렉산데르를 ‘카이사르’로 삼으라고 권한다. 카이사르의 칭호를 준다는 것은 곧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뜻이다.


할머니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알렉산데르를 카이사르로 승격시키면 황제의 공무도 맡길 수 있으니까 너는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무에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의 청을 승낙하고, 열세 살의 알렉산데르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라는 이름으로 원로원에 정식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를 찾아가는 유력자들이 늘어나자, 엘라가발루스는 얼마 후 이를 후회하기 시작한다. 외할머니에게 ‘카이사르’ 칭호 수여를 철회하겠다고 말했지만, 외할머니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222년을 맞았다. 그 무렵 엘라가발루스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생각은 라이벌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근위대 사령관을 불러 알렉산데르를 암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사령관이 부하인 근위병들에게 명령한 것은 알렉산데르가 아니라 엘라가발루스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222년 3월 11일, 열여덟 살의 황제는 황궁에서 붙잡혀 병사들의 조롱을 받으며 살해되었다. 어머니인 소아이미아스도 이때 함께 살해되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죽음과 함께 수도 로마의 태양신앙과 그밖의 온갖 오리엔트 스타일도 말끔히 사라졌다. 팔라티노 언덕 한 귀퉁이에 세워진 태양 신전은 성난 유피테르 신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원뿔 모양의 검은 돌은 시리아의 에메사 신전으로 돌아갔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222~235년 재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작년에 이미 ‘카이사르’로 지명해 놓았기 때문에 알렉산데르의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새 황제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이번만은 긴밀한 공동작전을 펴서, 눈에 띄지 않게 일을 추진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엘라가벨루스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되었다. 그의 모후까지 살해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22년 3월 11일,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정식으로 황제에 취임한 알렉산데르는 208년 10월 1일 시리아의 소도시 알카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서 시작되어 이 알렉산데르에서 끝나는 왕통을 역사에서는 ‘세베루스 왕조’라고 부른다.


황제가 된 뒤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였다. 세베루스나 카라칼라와의 혈연을 강조하면서, 명군으로 인정받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즉석에서 알렉산데르의 제위 계승을 가결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미소년은 아니었지만 진지한 표정에 온화한 성품을 지닌 소년이었다. 알렉산데르는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 앞에서도 의자에 앉아도 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원로원 의원에 대한 알렉산데르의 겸손한 태도는 즉위하자마자 의원들의 호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된 모양이다.


법학자 울피아누스


이번만은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율리아 마이사는 우선 외손자인 황제가 모든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상담역으로 고명한 로마법 전문가인 울피아누스를 등용했다.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오늘날 레바논 영토인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티루스(현 레바논 티레)에서 태어났다. 아마 그리스계의 동방 사람일 것이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티레 공격 출처 구글 이미지]
[티루스의 로마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울피아누스는 ‘황제 보좌관’(magister libellorum)과 ‘식량청장’(praefectus annonae)을 거쳐 마침내 황제의 최고 측근인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에 같은 법률가인 파울루스와 함께 취임하게 된다. 근위대장은 마치 황제의 왼팔과 오른팔처럼 항상 두 명이 정원이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울피아누스가 공식 석상만이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항상 알렉산데르 황제 옆에 붙어 있게 했다.


울피아누스가 소년 황제에게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황제와 원로원의 ‘2인3각’ 통치 시스템을 부활시킨 것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단계부터 원로원이 관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알렉산데르는 활발한 토론을 환영한다고 거듭 밝혔기 때문에, 거의 독단으로 통치한 세베루스나 카라칼라 시대를 알고 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가 돌아온 것처럼 기뻐했다.

[울피아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 마이사의 후원을 얻은 울피아누스의 지도가 주효하여, 미숙한 황제였던 알렉산데르의 통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뢰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젊은 황제인데도 사생활은 수수했다. 알렉산데르도 그의 ‘스승’인 울피아누스도 화려하고 떠들썩한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화려한 연회는 옛날 일이 되었다.


애독서가 플라톤의 『국가』와 키케로의 『의무론』뿐이라면 가엾은 생각도 들겠지만,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오비디우스의 시도 좋아했다니까 정상적인 젊은이의 독서였을 것이다. 또한 침실에는 존경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장식해두었는데, 그들은 소아시아 태생의 신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인 아폴로니우스, 전설 속의 시인이고 하프의 명수였던 오르페우스, 유대 민족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예수 그리스도까지 4명이었다고 한다.


6년간의 평화


알렉산데르 황제의 통치는 공정하고 온건했다. 아울러 울피아누스는, 수도에 사는 사람들의 식량을 '보장'하는 조직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를 맡았다. ‘식량청장’에 취임한 울피아누스가 애쓴 보람이 있어서, 알렉산데르 치세 13년 동안 수도 로마는 식량 부족을 모르고 지냈다.


또한 알렉산데르 황제는 치안을 중요시 여겨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는 ‘레스 푸블리카’(국가, 공동체)의 적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치하에서는 살인범은 물론 강도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 시민의 방범 대책은 적절한 문단속, 그리고 현관 앞 토방에 사납게 짖고 있는 개와 맹견을 조심하라는 글자를 모자이크로 새기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

알렉산데르는 시리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부르면,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 로마인이며, 자기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는 신하의 노고를 치하할 때 항상 그냥 '고맙다(gratia)'고 하지 않고 ‘국가는 그대에게 감사한다’(gratias tibi agit res publica)고 말할 정도로 고지식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좋은 황제로서의 통치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것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226년,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 뒤부터였다. 사인은 노쇠에 따른 자연사였다. 로마에서는 드물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성대한 장례 행렬이 테베레강 서안에 우뚝 서 있는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향해 아일리우스 다리를 건너갔다.

[율리아 마이사 출처 구글 이미지]

충신 실각


율리아 마이사 대신에 젊은 황제의 후견인이 된 것은 모후인 율리아 마메아(Julia Mamaea)였다. 하지만 마이사가 악녀라 해도 현명한 여자였던 반면, 그의 딸 마메아는 악녀에다 현명하지도 않은 여자라는 점이 달랐다. 이것은 일을 추진할 때 후원이 필요한 자에게는 일하기가 무척 어려운 환경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율리아 마메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녀는 알렉산데르 황제가 아닌 모후인 자기가 진정한 최고권력자라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과시했다*. 그런 마메아에게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은 황후인 살루스티아였다. 마메아는 아이를 못 낳았다는 이유로 며느리를 구박했고 결국 이혼시켜 북아프리카로 추방했다. * 당대부터 '여자 도미티아누스'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한편 율리아 마이사의 후원을 받아 황제의 최고 측근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던 울피아누스에게는 항상 적이 있었다. 마이사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마메아가 울피아누스에게 거리를 두자, 그 적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228년,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지 2년 뒤, 충신 울피아누스는 자신의 부하인 근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24세가 되어 있었다. 이 4년 동안 그는 재혼도 거절하고 통치에만 전념했다. 그 노고가 보답을 받았는지 제국은 질서있는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동시대 역사가인 헤로디아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원로원 의원 가운데 반역죄로 고소당한 자는 하나도 없고, 원로원 회의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제국은 모든 의미에서 ‘무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에 걸친 로마 제국을 묘사한 역사책으로 맨 먼저 꼽히는 것은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일 것이다. 그리스어로 쓰인 80권짜리 대작이었다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25권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인생은 로마 제국 후기의 격변기에 살았던 재능있는 사람의 전형이어서 흥미롭다.


[디오 카시우스와 ‘로마사’ 출처 구글 이미지]

디오 카시우스는 165년 무렵에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비티니아 속주의 주도 니코메디아에서 이 고장 명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할아버지 때는 당시의 황제 네르바한테서 코케이아누스라는 성까지 받았다. 따라서 그의 정식 이름은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다.


아버지는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등용되어, 속주 출신인데도 제국의 상층부에 들어간 사람이다. 디오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180년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콤모두스 황제 시절에는 원로원 의석만 차지했지만 타고난 관찰력은 이때부터 날카로웠던 것 같다.


페르티낙스 황제 시대에 디오 카시우스는 법무관에 당선했다. 이후 페르티낙스가 살해되고 내란 상태에 들어가자 카시우스는 재빨리 세베루스 진영에 붙었고, 내란이 수습된 뒤,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카시우스는 처음으로 집정관을 지냈다.


카라칼라 시대에는 이 황제를 따라 파르티아 전쟁에도 참가했지만 썩 중용되지는 못했으나, 마크리누스는 디오 카시우스를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인 스미르나와 페르가몬의 행정 책임자에 임명했다. 마크리누스가 살해되고 엘라가발루스 시대가 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공직 생활에 탄력을 받았다. 먼저 달마티아 속주 총독,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거쳐  도나우강 전선의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여 224년부터 227년까지 3년 동안 머물렀다. 59세부터 62세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는 이 3년 동안의 체험을 토대로 나중에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는 도나우 방위선’이라고 쓰게 되었다. 이 최전방에서 그는 울피아누스의 후원자였던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것을 알았다.


수도로 돌아온 뒤 2년 동안의 소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울피아누스가 살해된 데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런데 229년에 디오 카시우스는 64세의 나이로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수도의 분위기는 울피아누스의 죽음을 고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황제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으면서도 디오 카시우스는 지병인 통풍이 도졌다는 구실로 나폴리 근처의 별장에 틀어박혀버렸다. 이후 비티니아로 은퇴한 뒤에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한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로마사』 80권 외에도 저술이 적지 않으니까, 아마 장수를 누렸을 것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 무렵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직면해야 했던 것은, 파르티아 왕국의 500년의 역사를 닫고, ‘동방’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 사산조 페르시아였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도 수도는 파르티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크테시폰이었듯, 동서 교역으로 성립되는 ‘동방’의 사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서방’인 로마와의 관계는 파르티아 시대와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창시자 아르다시르는 파르티아의 왕을 224년 전투에서 격파하고, 파르티아를 지배자의 자리에서 몰아낸다. 그런 다음 국내를 제압하는 데 2년을 더 소비하고 226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기치로 내세운 것은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지배한 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을 부흥하자는 것이었다.

[아르다시르 1세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된 페르시아의 영토는 그 후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 동부로 양분되었다. 따라서 그 영토의 부흥을 기치로 내세운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의 대결이 파르티아와 같은 느낌으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사산조 페르시아는 국교까지도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배화교)로 되돌려놓았다.

[조로아스터교 출처 구글 이미지]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3세기 당시의 페르시아인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의 페르시아 제국을 부흥하는 것은 민족적 긍지를 안겨주고 그로써 통일전선 결성도 이루어질 테니까 물심 양면에서 효과적이었다. 이것은 같은 오리엔트 민족인데도 파르티아인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기개였다.


227년에 시작된 이런 ‘동방’의 변화를 ‘서방’인 로마 쪽이 올바로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시기도 나빴다. 1년 전에 율리아 마이사가 세상을 떠났고,  아르다시르가 등장한 직후 울피아누스가 살해당했다. 결국 이 시기에 이러한 ‘동방’의 커다란 변화에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서방’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아르다시르가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것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과거의 파르티아에 비해 종교색이 더 짙기 때문이 아니라 신흥 국가였기 때문이다. 신흥 국가는 국내의 반대파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라도 외부에 공격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르다시르가 북서쪽으로 군대를 보내기까지는 4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페르시아 대군 앞에서는 유프라테스강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바뀐다. 북쪽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군대는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방위선을 돌파하여 카파도키아 속주로 물밀듯 밀어닥쳤다.


이 상태를 방치해두는 것은 로마 제국 동부의 주민들에게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몸소 출전하기로 결정한다. 232년, 제위에 오른 지 10년 만인 24세에 비로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황제로서 진가를 시험받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1)


몸소 출전하기로 결정한 뒤 알렉산데르의 행동은 재빨랐다. 6개 군단에 보조부대가 딸려 있었다니까, 이때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하게 된 로마군 병력은 5만 안팎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전력인 군단병, 즉 중무장 보병은 3만 정도밖에 안 된다. 시리아 속주에 도착한 뒤, 시리아와 그 주변에 상주하는 군단을 원정군에 포함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은 군단병만이 아니라 보조병까지도 모두 충분한 군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역할에 따라 다르게 휴대한 무기는 철저히 손질되어 있고, 대열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로마 가도를 따라 행군해 갔다고 한다. 이 질서는 해가 진 뒤에도 유지되었다.


알렉산데르는 커튼을 치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누워서 갈 수 있는 가마도 타지 않았고, 체력 소모가 적은 마차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대개는 군단장이나 대대장처럼 말을 타고 갔지만, 때로는 백인대장이나 병사들처럼 걸어가기도 했다. 음식도 병사들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군율은 엄수되어야 하고 질서 있는 군대야말로 싸움터에서도 강하다는 것은 로마군의 전력이 증명해주었다. 알렉산데르는 그것을 체험하지는 않았어도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은 알렉산데르가 먼 여행 끝에 목도한 광경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병사들의 파업


유프라테스 방위선을 지키는 주력 군단이 된 지 오래인 시리아 속주의 3개 군단은 전략 요충마다 기지를 두고 있다. 2개 군단은 오늘날 터키 영토인 유프라테스강 상류 연안의 사모사타와 제우그마, 나머지 1개 군단은 에메사 근처의 라파네아 기지에 상주하고 있다.

하지만 232년 당시 시리아에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한 제1파르티카 군단과 제3파르티카 군단이 일정한 기지도 배정받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갈 곳이 없어져버린 2개 군단은 안티오키아 남쪽 10km 지점에 있는 다프네에서 숙영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안티오키아에 들어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이 병사들이었다.


대열도 흐트러지고 군장도 갖추지 않은, 게다가 결원도 많은 군단이었다. 듣자하니 이 병사들은 다프네의 숙영지에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있는 공중목욕탕이나 투기장이나 갈봇집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결원이 많은 것은 황제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렸는데도 그런 곳에 틀어박혀 집합 시간에 늦은 병사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격분한 알렉산데르는 결석한 병사를 모조리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퍼지자, 다른 병사들이 동료에 대한 처벌에 항의하여 황제가 머물고 있는 속주 총독 관저를 포위했다. 물론 무기도 들었다. 이를 안 알렉산데르는 투옥된 병사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총독 관저 앞 광장으로 끌어내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준엄한 연설을 했다.


“전우 여러분, 칼을 든 손을 내려라. 너희에게 전사의 혼이 남아 있다면 그 오른손은 적을 죽이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것이다. 너희의 협박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지금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나 자신은 한 남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너희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 전체의 분노와 복수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병사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자, 24세의 황제는 카이사르가 급여 인상을 요구한 병사들에게 제대를 무기로 '시민들이여'이라고 불러 그들을 진정시켰던 선례처럼, 이번에도 제대를 무기 삼아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시민 여러분, 무기를 놓고 떠나라!”


그런데 카이사르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황제의 연설이 끝나자 병사들은 무기를 놓고, 짧은 망토도 벗어 던지고 모두 광장을 떠났다. 다프네의 숙영지로 돌아간 것은 아니고, 대도시 안티오키아에 수없이 많은 여관에 흩어져 투숙했다. 어쨌든 이후 항의 집회를 선동한 몇 명은 참수형에 처해지고, 이듬해인 233년에 시작될 페르시아 전쟁에는 이 병사들도 참전하기로 결정되었다.


일차전 (233년)


로마 제국과 신흥 국가인 사산조 페르시아가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전쟁은 233년 봄에 시작되었다. 233년의 페르시아 전쟁은 로마 쪽에는 방위 전쟁이었지만, 로마는 수세보다 공세를 전략으로 삼는다.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상류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가는 부대, 시리아 사막을 동쪽으로 나아가 유프라테스강 중류를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가는 본대, 그리고 남서쪽에서 치고 올라가는 부대, 이렇게 세 방향에서 협공하는 전법을 택했다.


233년에 벌어진 로마와 페르시아의 일차전에 대해 분명히 알려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 양쪽의 손실이 막대해서,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양쪽이 출발지로 회군하는 형태로 전쟁이 끝났다. 강화도 맺지 않았고, 강화 교섭을 위한 휴전협정도 맺지 않았다.


- 그래도 15년 전에 마크리누스가 파르티아 국왕과 맺은 강화로 잃어버린 북부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시리아 영토.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는 되찾았다. 제1·제3파르티카 군단은 다시 자신들의 상주 기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은 여름에 접어들기 전에 끝났으니까 공격을 계속할 시간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황제는 월동을 이유로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리고 황제 자신은 수도 로마로 돌아온다.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서다. 같은 해 9월 25일에는 원로원에서 승전을 보고했다.


어쨌든 이듬해인 234년에 벌써 로마 제국의 양대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은 일치단결하여 알렉산데르를 라인 전선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이것이 젊은 황제에게 파멸을 가져왔다.


게르만 대책


3세기에 로마 제국이 점점 빠른 속도로 쇠퇴해간 요인 가운데 하나는 로마화한 야만족이 아니라 로마화하지 않은 야만족이었다. 25세의 알렉산데르가 대결해야 했던 것도 야만족다운 야만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야만족이었다.


마인츠를 전선 본부로 삼은 로마군은 234년 겨울을 맞기 전에 전투 준비를 끝냈다. 이제 다가오는 북유럽의 혹한을 로마 영토 안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라인강을 건너 대공세를 펴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겨울 동안 황제는 게르만인과 외교 교섭을 시작했다. 알렉산데르가 교섭을 추진하는 동안, 마인츠 일대에 집결해 있던 장병들 사이에 야만족과 교섭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갔다.


알렉산데르 황제의 죽음 (235년)


235년 3월, 그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마인츠 근처 마을에 머무르고 있던 알렉산데르는 황제의 막사로 몰려든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칼로 찌를 때 병사들은 “언제까지나 젖내 나는 놈!”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전선에 동행하여 이웃 막사에 있었던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도 이때 살해되었다.


알렉산데르가 살해된 뒤 마인츠 일대에 숙영하고 있던 부대에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장교들은 쾰른에서 신병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막시미누스 장군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그가 황제에 취임하는 것을 병사들까지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 막시미누스가 알렉산데르 살해 계획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때부터 50년 동안을 로마사에서는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부른다. 군단이 원로원의 의향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고, 그 때문에 나라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반세기가 시작되었다.


제3장(서기 235년~260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235~238년 재위)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 역사에서는 ‘트라키아 사람 막시미누스’(Maximinus Trac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의 출신지가 트라키아 속주이기 때문이다. 본국은 물론 속주의 엘리트 계급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의 지급계급과도 연고가 없었다. 아버지가 양치기였기 때문이다.


막시미누스는 소년기를 벗어나자마자 로마 군단에 지원하였다. 속주민에게도 문호가 열려 있는 보조부대에 지원했지만, 자격 연령인 17세에 한 살이 모자랐는데도 입대가 허용된 것은 16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체격(*전해지는 바로는 키가 2미터가 훨씬 넘었다고 한다)이 신병 선발을 맡은 부대장들의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로마군의 공용어인 라틴어도 트라키아 사투리 억양이 그대로 드러난 엉터리인데다 교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예의조차 모르는 젊은이였지만, 태도만은 당당했다. 이 초년병은 입대한 해에 벌써 훗날의 황제 세베루스에게 자신을 ‘파는’ 데 성공했으니 유쾌하다.

입대 후 경력


그가 입대한 189년은 세베루스의 장남인 카라칼라에 이어 차남인 게타가 태어난 해였다. 둘째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여 세베루스가 순행하고 있던 군단기지에서도 병사들이 무술과 기량을 겨루는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이 행사에서 엄청난 체력과 실력을 보였고 이걸 본 세베루스는 이 초년병을 황제용 막사 경호원으로 발탁했다.


211년, 세베루스 황제는 브리타니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요크에서 죽고 아들 카라칼라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그해에 막시미누스는 38세. 그 무렵에는 군단병 80명을 지휘하는 백인대장으로 승진한 모양이니까, 벌써 로마 시민권을 얻었을 것이다. 217년에 카라칼라가 살해되고,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취임했다.


모두 새 황제 밑에서 싸우기로 동의했으나 막시미누스만은 달랐다. 은인의 아들을 죽인 사람 밑에서 싸울 수는 없다고 충성 서약도 거부하고 고향 트라키아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1년 만에 끝난다. 마크리누스가 살해되고 카라칼라의 사촌누이의 아들인 엘라가발루스가 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트라키아 사내는 번창하고 있던 목축업도 남에게 넘기고, 병사 1천 명을 지휘하는 대대장이 되어 전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대대장으로 승진한 것을 고맙게 여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엘라가발루스 치세 4년 동안 막시미누스는 비정상적인 황제를 만날 기회를 계속 피했다.


222년에 엘라가발루스도 살해되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다. 쉰 살을 앞두고 있던 막시미누스는 그것을 알자마자 로마로 갔다. 소년 황제도 기꺼이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대대장 자격을 가진 이 트라키아 남자를 신병 훈련 책임자로 임명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고 장병들에 의해 추대되었을 때 ‘트라키아 남자’는 예순두 살이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군단장도 되지 못하고, 속주 총독도 경험하지 않았고, 당연히 원로원 의석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지치지 않는 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력과 정통성


병사들이 기정 사실을 들이대자 원로원은 그것을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얻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 제국의 주류인 기득권층이다. 뒤에서는 막시미누스를 거리낌없이 ‘반(半)야만족’이라고 불렀다. 새 황제가 수도 로마에 오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라키아인 막시미누스’는 자기한테는 제위를 정당화할 실적도 정통성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적이라고는 신병 훈련 전문가라는 것뿐, 외적을 상대로 눈부신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막시미누스는 실적을 쌓는 것을 수도 방문보다 우선하기로 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살해된 235년부터 지체없이 시작된 게르만인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황제를 앞세워 적극전법을 펴고 있었다. 라인강을 건너 적지 깊숙이 50km가 넘게 쳐들어가는 것은 당연했고, 막시미누스가 이끄는 부대는 나중에 베스트팔렌이라고 불리게 된 일대까지 진격하여 게르만인과 치열한 격투를 벌였다.


막시미누스는 3년간 승리를 거듭하며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을 ‘평온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에게 딴죽을 건 것은 같은 로마인이었다. 발단은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항의 운동이었다.


주도 카르타고에서 세금을 징수하러 인근의 티스드루스(Thysdrus, 오늘날 튀니지의 엘젬)에 파견된 황제 재무관에게 농장주들이 반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젊은 농장주들은 주도 카르타고로 몰려갔다. 속주 총독에게 재무관의 가혹한 과세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고르디아누스(Gordianus) 총독이 임지의 사정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티스드루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카르타고에 도착하여 총독 관저에서 회담을 하다 보니 이야기가 예상치도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젊은 농장주들이 총독에게, 당신을 황제로 추대할 테니까 수락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원로원의 반격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황제였던 5년 전부터 황제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황제의 편지가 남아 있다)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취임한 고르디아누스는 그해에 여든 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3세기 로마 사회의 기득권층을 대표하고 있었다. 가문도 좋았고 재력은 동료들을 압도했다. 이들의 부를 상징한 것은 로마 교외에서 5km 떨어진 교외의 엄청난 별장(빌라 고르디아니)이었다.

[빌라 고르디아니 출처 구글 이미지]

238년 6월 26일, 소집을 받고 원로원 회의장에 모인 의원들 앞에서 그해의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가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아프리카 속주의 미래를 담당할 젊은이들은 나를 황제로 추대했소. 나 자신은 나이도 많아서 내키지 않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감히 중책을 맡는 것도 우리에게 부과된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오. 다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이고, 내가 제위에 앉을지 어떨지도 원로원의 결정에 따르겠소.”


‘트라키아 남자’를 혐오하던 원로원은 여기에 넘어갔다. 편지가 낭독되자마자 원로원 회의장은 폭발했다. 흥분한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마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신들이 그대를 지켜주기를. 당신이라면 제국을 견실하게 통치할 수 있을 겁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원로원의 통고문을 지닌 파발꾼이 제국 전역으로 출발했다.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은 속주 총독, 군단장, 군단 소속 장병은 물론 각지의 지방 의회를 포함한 모든 공적 기관에 관계하고 있는 자들에게 알린다. 야만스러운 자에게서 제국을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고르디아누스 황제 밑에 결속하라.>


로마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황제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원로원은 내란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이튿날 원로원이 ‘야만스러운 적, 국가의 적’으로 규탄한 막시미누스 황제는, 도나우강 건너편에 사는 야만족과의 싸움은 일단 뒤로 미루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 로마를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1년에 황제 다섯 명


고르디나우스 부자의 죽음


그런데 고르디아누스 황제 쪽의 상황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출발하자마자 발부리가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속주’ 서쪽에는 ‘누미디아 속주’가 있다. 그 누미디아에는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에 하나뿐인 군단기지가 있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3아우구스타 군단이 사하라사막을 건너 쳐들어오는 사막 민족한테서 300년 동안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지켜왔다.


제3아우구스타 군단이 동쪽에 있는 아프리카 속주의 민간인과 수도 로마의 원로원이 공모한 고르디아누스 황제 옹립에 반발한 것이다. 막시미누스를 옹립한 것은 군대인데, 그것을 원로원이 뒤집었다는 데 반발한 것이다.

은독수리 기(旗)를 앞세운 군단병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있는 카르타고로 갔다. 고르디아누스의 아들은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승부는 뻔했다. 수비병 1천 명은 흩어졌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도 칼 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제위에 오른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이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옹립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예기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막시미누스에게 내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취소할 수도 없다. 한밤중까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원로원 의원들인 푸피에누스(Pupienus)와 발비누스(Balbinus) 두 사람을 공동 황제로 옹립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는 막시미누스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또한 원로원은 수도 로마에 살고 있던 고르디아누스의 손자에게 카이사르, 즉 차기 황제의 칭호를 주고 새 황제 두 사람과 손을 잡게 했다. 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아직 열세 살 소년이었지만, 서둘러 성년식을 치르고 ‘원로원’과 더불어 공식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주권자인 ‘시민’에게 소개되었다.


원로원도 이번에는 필사적이었다. 원로원에는 적극방위파 의원 2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설치되고, 군사만이 아니라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트라키아 남자’를 타도하기 위해 단결했다.


막시미누스의 죽음


하지만 막시미누스 황제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역시 주민들의 저항이었다. 도나우강에서 가도를 따라 본국 이탈리아로 들어오자마자 마주치는 도시는 아드리아해 안쪽 끝에 있는 아퀼레이아다. 이 도시 주민들이 막시미누스 황제 앞에 성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주민들에게 거부당한 막시미누스는 성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그 사이 겨울이 찾아왔다.


막시미누스 진영에서는 날이 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병사들의 동요도 심해져갔다. 특히 심하게 동요한 것은 수도 근처의 알바노 땅에 기지가 있는 제2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이다. 거기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온 이들은 원로원이 탄핵한 막시미누스 편에 서서 싸우기 때문에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 있는 듯한 망상을 품게 되었다.


야음을 틈타 황제가 자고 있는 막사를 습격하는 강경한 수단으로 나온 것은 제2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이었다. 이것이 ‘트라키아 남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던 막시미누스 황제의 최후였다. ‘트라키아 남자’의 목은 나흘 뒤 로마에 도착하여 원로원의 검시를 받았지만, 그 후 매장도 하지 않고 테베레강에 던지는 데 반대한 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죽음


아퀼레이아에 도착한 푸피에누스 황제 앞에서 막시미누스 휘하의 장병과 아퀼레이아 주민은 충성을 맹세했다. 그해에 일흔 살이었던 푸피에누스는 원로원 의원이기는 했지만, 자기 힘으로 의석을 얻은 이른바 ‘신참자’였다. 본국 이탈리아 태생인 모양이지만 출신 계급은 ‘평민’이다.


또 한 명의 황제인 발비누스는 귀족 출신으로, 태어날 때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수도 로마에서 쾌적한 생활만 누린 것은 아니다. 예순 살이 될 때까지 경험한 속주 통치 횟수와 제국의 거의 전역을 망라하는 활동 범위는 푸피에누스에 못지않았다. 무능한 ‘귀족’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원로원 분위기가 두 황제를 도와 앞으로도 일치단결하자는 쪽이 아니라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단독 황제로 옹립하자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내부 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혼란을 드러낸 원로원에 누구보다 먼저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막시미누스의 수도 진군에 동행했고 막시미누스가 살해된 뒤에는 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병들이었다.


실망과 경멸이 뒤섞인 이 감정이 두 황제를 죽이는 행위로 이어졌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살해되었고, 원로원은 버려진 시체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238년이라는 해는 3년 전부터 황제였던 막시미누스, 그해에 즉위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 거기에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합하면 무려 다섯 명의 황제가 나타났다 사라진 해가 되었다. 남은 것은 열세 살 소년뿐이었다.


그래도 위기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원로원 의원을 단결시킨다.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즉 황제로 앉혀 제구실을 하도록 돕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옹립했을 때 설립한 ‘20인 위원회’가 그대로 소년 황제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되었다. 원로원도 긴급사태를 맞아 법안의 신속한 처리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 출처 구글 이미지]

실무가 티메시테우스


소년 황제를 떠받치는 것으로 시작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치세는 예상과 달리 로마 제국에 6년 동안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20인 위원회’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실무에 뛰어난 한 인물의 판단력과 조직력 덕분이었다. 그 인물의 이름은 티메시테우스(Gaius Furius Sabinius Aquila Timesitheus)였다.


이 사람의 경력은 근무지가 어디든 직무가 무엇이든 행정으로 일관했다. 군단에서 근무한 적은 있었지만, 병사를 지휘한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경력을 열거하면 로마 제국 행정관료의 전형적인 모습이 자연히 떠오른다. 젊은 티메시테우스가 맡은 임무는 보조병으로 구성된 대대의 ‘프라이펙투스’(praefectus)였다. 전투 이외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책임자였다.


그는 이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듯 여러 군단을 돌아다니며 계속 병참 책임자로 일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후 티메시테우스가 장기로 삼는 분야는 속주의 재무 담당으로 바뀌었다. ‘황제 재무관’이라는 관직명을 가진 이 직책은 물론 속주의 재무 전반을 감독하는 역할이지만, 징세 업무가 중심을 이루는 것도 당연하다. 드디어 수도 로마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막시미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온 뒤였다. 수도에서 맡은 일은 상속세 징수 총책임자.


그후 ‘20인 위원회’를 실무적인 면에서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아 원로원과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신임을 얻은 모양이다. 소년 황제의 치세도 3년째에 접어든 241년, 황제는 티메시테우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근위대장’은 1만 명이 정원인 근위대의 총책임자다. 역대 황제들은 이 자리에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앉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티메시테우스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오른팔만이 아니라 두뇌까지 황제를 대신했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이 티메시테우스를 완전히 신뢰했다. 아니, 신뢰한 정도가 아니라 심취해 있었다. 열여섯 살이 된 황제는 그해에 결혼했는데, 아내로 맞은 것은 바로 티메시테우스의 딸이었다.

[티메시테우스의 딸, 티메시테우스 기념비 출처 구글 이미지]

동방 원정


241년, 티메시테우스가 근위대장에 임명된 해에 동방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창시자인 아르다시르가 세상을 떠났다. 왕위는 당연히 맏아들이 물려받았지만, 당장 둘째 아들로 바뀌었다. 로마 역사에서는 잊을 수 없는 샤푸르 1세가 등장한 것이다. 왕실 내부의 재빠른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다 해도, 이런 경우에 새 왕이 하는 일은 국내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한 페르시아군은 당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 동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쳐들어왔다. 샤푸르 1세는 페르시아 궁정에 드나들던 안티오키아 태생의 그리스인을 안티오키아 시내에 잠입시켰다. 이 배신자의 선동이 주효하여, 중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대도시가 어이없이 성문을 열었다.


서방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된 티메시테우스는 페르시아의 이 공격이 결코 일과성 사건이 아니라 로마에 대한 공세의 ‘시작’이라고 판단한다. 페르시아 전쟁 준비는 실무가인 티메시테우스의 독무대였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참으로 로마적이었다. 아니, 얼마 전부터 소홀히 취급받아온 로마적 방식을 부활시켰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로 원정할 로마군 주력부대는 역시 도나우강 연안에 기지를 둔 장병들이었다. 항상 강적과 맞서 있는 병사가 최강의 정예 병력이 된다. 티메시테우스는 이때에도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하여,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벌써 황제와 근위대장은 동방 원정군을 거느리고 안티오키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열여섯 살 소년이라 해도 황제가 직접 출정한다는 것은 로마 제국이 진지하게 싸운다는 의사 표시다.


고대의 지정학

안티오키아를 떠난 로마군이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곧장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한 것도 납득이 갈 것이다. 우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확보한 뒤에 페르시아 수도를 공격하는 것이 로마군의 기본 전략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북부 메소포타미아가 싸움터가 되었다. 로마군은 처음부터 우세하게 싸웠다. 5만 명이 넘는 병력이고, 게다가 주력은 중동 기후와는 정반대인 도나우강에서 온 병사들이지만 보급이 완벽했고, 시리아와 요르단에 상주하는 병사들과도 협조가 잘 이루어졌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되찾은 이상,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가장 접근한 곳에 있는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격하는 제2단계로 넘어갈 뿐이다. 장병의 사기도 높고, 로마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페르시아 전쟁은 243년이 가기 전에 끝낼 수 있다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로마군은 물밀듯 메소포타미아를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티메시테우스가 갑자기 죽는 불행이 덮쳤다.


티메시테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독살이나 암살이라고 주장한 역사책은 없다. 티메시테우스의 후임에는 차석을 맡고 있던 필리푸스가 승격했지만, 그래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비축한 식량만 축내는 날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래도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상급 백인대장까지 소집된 작전회의에서는 이듬해 봄에 페르시아 수도로 진격을 재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봄이 오자마자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겨울에도 북부 메소포타미아 안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244년 2월도 끝나가는 어느 날, 고르디아누스 3세의 막사에 병사 아홉 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필리푸스가 돈으로 매수했다고 한다. 근위대장 필리푸스는 당장 원로원에 황제가 병이 도져서 죽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장병을 소집해서, 전시에 최고사령관 자리가 비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설득하여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한 것은 물론이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244~249년 재위)

[출처 구글 이미지]

필리푸스(Philippus)뿐이라면 그리스계 성이지만, 거기에 ‘아랍인’을 뜻하는 ‘아라부스’(Arabus)를 덧붙여 부른 것이 보여주듯 진짜 아랍인이 로마 제국 제위에 올랐다. 출생지는 시리아 속주의 남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황제가 된 필리푸스는 이 고향을 필리포폴리스로 개명했다.


‘아랍인’ 필리푸스가 제위에 올라 맨 먼저 한 일은 페르시아 국왕 샤푸르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한 것이다. 샤푸르는 필리푸스 황제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로마인이 ‘메소포타미아 속주’라고 부른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완전 포기를 강화 조항으로 명시하라고 요구했다. 요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이 페르시아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묵인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나중에까지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 쟁점으로 남았지만, 황제로서 수도 로마에 되도록 빨리 들어가고 싶었던 필리푸스는 샤푸르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로써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수도 로마에 들어간 필리푸스 황제의 평판은 그의 걱정이 지나쳤다고 여겨질 만큼 좋았다. 그것은 이 아랍인 황제가 원로원에 대해 철저히 저자세로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로원 의원들도 속으로는 새 황제를 베두인족 출신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어쨌든 수도 로마에서 필리푸스 황제가 보낸 2년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원로원은 황제를 규탄하지 않았고, 일반 시민은 황제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첫째 요인은 국경이 평온했기 때문이다. 둘째,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아랍인 황제가 원로원에 대해 철저히 겸손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셋째, 정책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건국 천년제 (248년)


아랍 출신의 로마 황제 필리푸스를 모든 역사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로마 건국 1천 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주최한 사람이 이 황제였기 때문이다. 이 아랍인 로마 황제가 수도 로마에 바친 찬탄은 진정한 것이었다. 로마에 온 뒤 그는 ‘세계의 수도’라고 불린 이 도시를 구경하는 데 열중하여 싫증도 내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이런 도시를 수도로 하는 나라의 황제인가”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건국 1천 년을 축하한 해는 하필이면 북방 게르만족이 성난 파도처럼 남하하기 시작한 해와 겹치게 되었다. 게르만인은 그 후 반세기 동안 남하를 되풀이하게 된다. 이것도 역사에는 드물지 않은 얄궂은 우연의 일치였다.


248년, 로마에서 건국 천년제가 장엄하고 화려하게 거행된 지 반년도 지나기 전에 도나우강 하류 일대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로마 영토와 맞닿아 있는 강력한 게르만 부족인 고트족이 모이시아 속주 총독에게 조공이 늦다고 항의했다. 아니, 항의는 형식일 뿐 항의가 제기되기 전에 이미 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고 있었다.


제국의 전선인 도나우강을 지키는 병사들과 그 일대에 사는 주민들은 수도 로마에 있는 필리푸스 황제가 직접 전선으로 달려와 대규모 보복 공격을 총지휘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필리푸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수도 로마 시장 자리에 있었던 데키우스를 도나우강 전선에 파견했을 뿐이다.


데키우스는 장병들의 기대 이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지휘 아래 도나우강은 ‘방위선’으로 다시 일어서서, 그 후 1년 동안 고트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249년으로 해가 바뀐 어느 날, 장병 대표가 데키우스의 숙소를 찾아가서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장병 모두의 뜻을 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필리푸스는 토벌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원로원 의원들은 아무도 배웅 나오지 않았다.


제위 찬탈자라는 오명을 쓰고 토벌군까지 다가오자, 데키우스는 어쩔 수 없이 남하하여 북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토벌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 내전은 전투다운 전투도 치르지 않고 끝났다. 휘하 병사한테까지 버림받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가 붙잡히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필리푸스를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데키우스 황제(249~251년 재위)

[데키우스 황제 출처 위키백과]

데키우스(Gaius Messius Quintus Traianus Decius)도 속주 출신으로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도나우강 중류의 군단 지역인 시르미움(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차)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시르미움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방에서는 그 후 제위에 오르는 사람이 속출하는데, 데키우스가 말하자면 1번 타자였다. 생가는 ‘부농’이었다고 하는데, 17세부터 시작된 군단 생활은 순조로웠는지 45세에 원로원에 들어갔다.

[시르미움 출처 구글 이미지]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군사적인 능력과 함께 통치 능력도 충분했기 때문에, 무인인 동시에 문민이어야 하는 로마 제국 황제에 어울리는 인재이기도 했다. 남자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인 40대에 황제가 된 데키우스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도나우 방위선을 재편성한 것이었다.


데키우스가 죽었을 때, 병사들의 발의로 ‘reparator disciplinae militaris’(군율을 회복한 자)라는 구절이 묘비명에 새겨졌다. 데키우스 황제가 회복하려 한 것은 군단의 규율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 사회의 규율을 회복하려 했고, 게다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데키우스가 기독교도를 박해한 로마 황제의 한 사람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독교도 탄압 (1)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을 일반 신자한테까지 확대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데키우스 황제였다. 데키우스는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명기한 증명서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발급 대상은 성직자가 아니라 모든 로마 시민권자였다. 증명서는 ‘리벨루스’(libellus)라고 불렸다. 도시와 마을마다 증명서 발급을 담당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성직자들은 특별위원회에 불려나가기 전에 도피하기로 했다. 카르타고 주교이자 많은 책을 저술한 키프리아누스도 이때 몸을 감추었다. 하지만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이듬해인 251년 부활절, 즉 봄에는 이미 카르타고로 돌아와 있었다. 1년도 지나기 전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데키우스 황제가 기독교도 소탕에 정신을 쏟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 주교 출처 구글 이미지]

야만족의 대침입 (250년)


고트족은 이제 물이 가득 차서 터지기 직전의 댐과 같은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로마에는 안된 일이지만, 고트족이 거주하는 지대가 하필이면 도나우 방위선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취약한 지역인 도나우강 하류의 북쪽 연안이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아직 젊은 두 아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주어 후계자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고트족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자마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까지 주어 공동 황제로 삼았다. 제위의 세습을 노렸다기보다 다가오고 있는 태풍에 대비한 방책이다.


250년, 게르만족 가운데 고트족과 반달족이 대거 도나우강 하류를 건너 로마 영토로 쳐들어온 것은 큰 강에도 수량이 줄어드는 여름이었다. 일단은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전군을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트족과 반달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같은 고트족이라도 산하에 넣은 부족마다 따로 행동하고 있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


데키우스 황제는 자신이 지휘하는 제1군과 아들 에트루스쿠스가 지휘하는 제2군은 서쪽에서, 트라키아 속주 총독 프리스쿠스가 지휘하는 제3군은 남쪽에서, 모이시아 속주 총독 트레보니아누스가 지휘하는 제4군은 북쪽에서 협공하여, 적을 트라키아 평원으로 몰아넣는 전략을 폈다.

그런데 250년 여름부터 251년 봄까지 벌어진 전투는 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어버렸다. 바꿔 말하면 발빠른 야만족에게 로마군이 계속 휘둘림을 당했다. 결국 1년이 다 되도록 넷으로 나뉜 로마군은 끝내 전쟁의 주도권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러다보면 전체적인 정황은 우세해 보여도 어딘가에서 함정에 빠지게 된다. 네 명의 사령관 가운데 가장 젊고 그래서 경험이 부족한 에트루스쿠스가 이끄는 제2군에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


숲에서 불쑥 나타난 야만족과 격전을 벌이다가 열세에 빠진 제2군은 적에게 밀리면서도 분투했지만, 말을 타고 앞장서서 싸우던 에트루스쿠스가 낙마하여 전사했다. 데키우스 황제는 비탄과 절망에 빠져 제정신을 잃었다.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거기서 발견한 것은 아들을 죽인 적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적을 추격하는 동안 어느새 습지대로 들어가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싸우는 동안, 많은 병사와 함께 데키우스 황제도 전사했다. 시신은 수렁에 깊이 가라앉아버렸는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혼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아들 에트루스쿠스의 시신도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석관


로마 시내에는 미술관이 많은데, 그중 하나인 아르텐푸스 미술관은 그리스-로마 조각품을 전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미술관에서도 가장 넓은 전시실의 왼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최초의 수집가인 루도비시 추기경의 이름을 따서 ‘그란데 루도비시’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관이다.

[그란데 루도비시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부조만 보면 로마 쪽이 이긴 것처럼 보인다. 중앙에서 말을 달리는 에트루스쿠스는 승리자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패배했고, 젊은 황제 에트루스쿠스는 전사했다. 이 거대한 대리석관은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을 슬퍼한 그 어머니가 만들게 했다고 한다.


에트루리아 지방의 명문 출신이었다는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산화한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재료비도 조각비도 엄청나게 들었을 게 분명한 이 석관을 주문했다. 재력도 있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이 석관은 17세기에 로마에서 티볼리로 가는 티부르티나 가도 근처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는 야만족과 싸우다가 죽은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만한 희생을 치렀는데도 고트족과 반달족을 발칸 지방에서 몰아낼 수는 없었다. 야만족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도에 남은 둘째 아들이 벌써 공동 황제로 지명되어 있었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전선에 최고사령관이 부재할 수는 없었다.


트레보니아누스 황제


‘먼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야만족과의 전투에도 참전한 트레보니아누스(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가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야만족 소탕을 위한 전쟁은 그에게 맡겨지게 되었지만, 본국 이탈리아의 페루자 출신으로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그는 전쟁을 계속하지 않고 야만족과 강화를 맺는 쪽을 택했다.

[트레보니아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야만족과의 강화


강화 교섭은 침입한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고트족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로마 쪽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로마 영토를 떠나 도나우강 건너편의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뿐이었다. 그 대신 고트족의 요구는 모두 받아들였다. 약탈한 재물은 모두 가지고 돌아가겠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포로로 잡은 사람들도 모두 데려가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해마다 연공을 바쳐라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을 습격한 것은 북방 야만족만이 아니었다. 전염병도 로마를 덮쳤다. 수도 로마까지 전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데키우스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오스틸리아누스도 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트레보니아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이밀리아누스의 부상(浮上)


도나우강에 면해 있는 ‘먼 모이시아 속주’(오늘날의 불가리아)에 총독으로 부임한 아이밀리아누스북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아 속주(오늘날의 모로코) 출신이었지만, 야만족에 대한 트레보니아누스 황제의 저자세 외교에 분개했다는 점에서는 도나우강 하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과 마찬가지였다.

아이밀리아누스 총독은 트레보니아누스 황제가 고트족과 맺은 강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모이시아 지역은 고트족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었다.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복수에 성공한 모양이다. 적어도 포로가 되어 도나우강 북쪽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되찾았다. 여기에 기분이 좋아진 병사들은 기지로 돌아온 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당신을 황제로 옹립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대답을 보류했다.


[아이밀리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고트족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가 원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은 트레보니아누스를 로마 황제로 생각하고, 따라서 로마는 약하다고 믿었다. 로마 황제에 대한 고트족의 이런 생각은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가 ‘게르마니아 방벽’을 사이에 두고 로마 제국과 맞닿아 있는 알레마니족에도 전염되었다. 그들은 로마 속주 총독에게 연공을 바치라고 요구해왔다.


발레리아누스 총독은 트레보니아누스 황제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은 탓도 있어서, 알레마니족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게르마니아 방벽’ 전역에서 알레마니족이 쳐들어왔다. 1년 전에 발칸 지방에까지 침입하여 로마에 불리한 강화를 맺은 것을 잊지 않은 고트족도 여기에 자극을 받아 다시 로마를 침략하게 되었다.


게르만족, 처음으로 지중해에


252년부터 이듬해인 253년까지 로마 제국은 무려 30만 명에 이르는 야만족의 대거 침입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북방 야만족은 도나우강을 건넌 뒤 육지를 따라 남하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사상 처음으로 바다에까지 진출했다.


야만족은 ‘방위선’을 정면 돌파하지 않고 옆으로 빙 돌아서 ‘리메스’ 뒤쪽을 공격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도나우 방위선을 돌파하지 않고 흑해를 통해 에게해로 나가서 풍요로운 소아시아나 그리스 도시들을 바다 쪽에서 공격하여 약탈하는 전략이었다.  흑해에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선이나 어선을 빼앗고, 선원이나 노잡이들을 위협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다와 인연이 없었던 고트족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니코메디아가 당했다. 그곳과 육지로 이어진 니카이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니크)도 공격을 면치 못했다. 부르사도 당했다.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풍요로운 속주로 알려진 비티니아는 도시도 교외도 빠짐없이 습격당했다. 약탈을 끝낸 고트족을 가득 실은 함대는 헬레스폰투스해협을 지나 에게해로 몰려나갔다.

약탈이 목적인 이상, 야만족도 욕심을 채운 뒤에는 북쪽으로 돌아간다. 약탈한 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고트족은 자기네 땅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육지의 ‘방위선’이 돌파당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의 ‘평화’조차 보장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로마 제국에 사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망연자실했다.


발레리아누스 추대


도나우강 하류의 장병들 뿐만 아니라 ‘게르마니아 방벽’을 지키는 병사들도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알레마니족의 내습을 격퇴한 직후인지라, 수도에 눌러앉아 전선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황제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이시아 속주 병사들이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한 데 동조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아이밀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그것도 북아프리카에서는 변경으로 여겨진 마우리타니아 속주 태생인데다 원주민인 무어인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르마니아 방벽’을 지키는 장병들은 트레보니아누스 황제한테는 불만이지만 그렇다고 피부가 검은 아이밀리아누스를 제위에 앉히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기네 사령관인 발레리아누스에게 눈길을 돌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발레리아누스가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어려운 시국에 로마 제국은 황제가 세 명이나 되는 내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군단 장병들의 의향에 따라 로마 황제가 결정된다는 것은 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실제로 맞붙어 싸우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병사들이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내전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253년의 내전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트레보니아누스와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가 맞섰을 때는 트레보니아누스 쪽 병사들이 아이밀리아누스 쪽에 붙었기 때문에 아이밀리아누스가 이겼다. 이어서 아이밀리아누스와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대결했을 때는 아이밀리아누스 쪽에 붙었던 장병들이 모조리 발레리아누스 쪽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발레리아누스가 유일한 승자가 되었다.


이 방식으로 그해 가을에는 벌써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가 단독 황제에 취임하는 체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253년 6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달을 이 소동으로 낭비해버렸다. 3세기의 로마 제국은 자신이 가진 힘을 낭비한 것이 특징인데, 이것도 그런 사례였다.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년 재위)

[발레리아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취임 당시 이미 63세였기 때문에, 37세가 된 아들 갈리에누스에게도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주어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고, 원로원도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제국은 이제 황제 한 명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발레리아누스가 황제에 취임하자마자 착수한 일은 로마군의 지휘관급을 재편성한 것이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일은 황제가 직접 맡았다. 실력만을 등용 기준으로 삼으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발레리아누스에게 발탁된 젊은 인재들은 대부분 로마 제국의 최전방인 도나우강 바로 남쪽, 즉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지방 출신이었다.


3세기 후반을 특징지은 것은 순수한 군인 황제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제위에까지 오른 이들 군단 출신자는 거의 다 발레리아누스의 로마군 재편성에 따라 군단장급으로 승격한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도 탄압 (2)


데키우스의 기독교도 탄압 정책을 2년 만에 되살린 사람이 발레리아누스 황제다. 이 정책에 따라서 로마 시민권자는 또다시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기한 증명서, ‘리벨루스’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기독교도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나라가 국난을 겪고 있는데 자기들만의 커뮤니티 안에 틀어박힌 채, 공무도 병역도 회피하면서 로마 시민권자의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비난했다.


기독교도는 속주에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 사람들까지 로마 시민과 같은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 3세기의 기독교도 대책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로마인 쪽에서는 이제 너희도 로마 시민인데 왜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기독교도 쪽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대꾸한다.


기독교도는 자기네 교회의 역사를 쓸 때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특필했을 정도니까,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도 탄압은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도를 탄압하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즉위한 지 4년이 지나 최우선으로 삼았던 방위체제 재편성도 마무리된 257년, 첫 번째 잠정조치법이 포고되었다. 이것도 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신도가 아니라 기독교회의 지도자 계급인 성직자를 대상으로 한 법률이었지만, 이 법률은 기독교회의 모든 제의와 기독교도의 집회까지 금지했다.


먼저 수도 로마의 주교였던 스테파누스가 그해 8월 2일 순교했다. 그리고 8월 30일에는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가 속주 총독에게 불려가서 심문을 받았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끌려온 성 라우렌시오 출처 구글 이미지]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이듬해인 258년에 두 번째 잠정조치법을 공포했다. 우선 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의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기독교 성직자는 추방이나 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재확인했지만, 그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기독교도에 대한 대책으로, 교회로 들어가는 돈을 차단하기 위해 재산 몰수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기독교도 탄압은 꽤 철저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도중에 중단되었다. 페르시아 국왕 샤푸르가 다시 공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도의 평온은 그 후 4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03년에 대규모 탄압을 재개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기독교도는 모두 편안히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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