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3세기 후반, 로마와 기독교
제2부
제1장(서기 260년~270년)
페르시아 왕 샤푸르
아랍 출신이라서 ‘아라부스’(아랍인)라고 불린 로마 황제 필리푸스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Shapur) 1세와 맺은 강화에 따라 로마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잃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철수함으로써 그 바로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에 페르시아 세력이 침투하는 것을 허용한 지 15년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하던 샤푸르 왕이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에서 대군을 편성하고 있다는 정보가 시리아 속주 총독을 통해 수도 로마의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6년 전에 즉위했을 때부터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삼아, 자신은 수도에서 제국 전역을 통치하고 아들에게는 라인강·게르마니아 방벽·도나우강으로 이어지는 북쪽 최전선의 방위를 맡겨 놓았다.
하지만 이제 페르시아군이 제국 동방으로 쳐들어올 태세였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동부 전선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가 동방으로 가고, 아들 갈리에누스는 서방에 남기로 결정했다. 일흔 살이 다 된 고령의 발레리아누스가 먼 오리엔트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고령이었지만 발레리아누스가 총지휘를 맡은 페르시아 전쟁은 아주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것은 발레리아누스가 시리아에 와서도 서방에서 성공한 인재등용책을 채택하여 실력있는 젊은이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등용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교역도시 팔미라의 유력한 시민인 오데나투스(Septimius Odaenathus)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연전연승의 기세로 전쟁을 이끌었다. 안티오키아까지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을 유프라테스강 동쪽으로 격퇴한 것은 물론, 그 큰 강을 건너 더욱 동쪽으로 진격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탈환까지 눈앞에 다가왔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샤푸르 1세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영웅시되는 군주이다. 학문과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기술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 그가 건설한 군데샤푸르(Gundeshapur)를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는 나중에 헬레니즘 그리스와 오리엔트를 종합한 과학과 의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샤푸르는 오리엔트 군주다. 오리엔트 사람들은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줄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승리를 손에 넣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샤푸르 1세 역시 더러운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면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가 된 황제 (260년)
260년 새해 벽두에 뉴스 하나가 전 세계를 휘저었다. 로마 제국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제국 밖에 사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그 정보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페르시아 쪽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로마 제국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7만 병력을 거느리고 우리를 공격해왔다. 그래서 양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발레리아누스를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샤푸르는 이를 선전하기 위해 오늘날 이라크 국경과 가까운 이란 남서부, 대페르시아 시대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바로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나크시 루스탐(Naqsh-i-Rustam) 암벽에 부조를 새겼다. 말을 타고 있는 샤푸르 1세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당시 이미 사망)다.
하지만 로마 황제가 실제로 어떻게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는지, 그 진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에데사와 카라이의 주민들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샤푸르는 이 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로마군 ‘7만 명’은 이 두 도시를 구원하러 가서 페르시아군과 마주쳤다. 전투는 이때 벌어졌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전투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 샤푸르가 쓴 책략의 결과였다는 주장이 고대부터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샤푸르의 정상회담 제의를 곧이들은 발레리아누스가 휘하 병력만 거느리고 약속 장소에 갔다가 일망타진당했다는 것이 샤푸르 책략설을 택하는 역사가들의 ‘해석’이다. 수세에 몰린 샤푸르가 이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 역전승을 거두기 위해 책략을 꾸몄다면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웅 샤푸르 1세에 어울리는 행동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생포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포로 신분인 상태로 죽은 모양이다. 일흔 살이라는 고령인데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원로원의 유력 의원이었던 그에게는 포로 신세가 된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기에 충분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샤푸르 1세도 평생 계몽적인 군주였던 만큼, 야만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벌인 인프라 공사
샤푸르는 늙은 황제와 함께 사로잡힌 로마군 장병들을 단순히 노예로 삼는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은 아니었다. 로마 병사들에게 샤푸르는 페르시아 민족의 본거지로 역사가 오래된 이 지방의 ‘인프라’(사회간접자본) 정비를 맡겼다.
우선 도시 하나를 통째로 건설했다. 샤푸르는 그 도시를 ‘군데샤푸르’(Gundeshapur)라고 명명했다. 페르시아어로 ‘샤푸르의 무기’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 내의 도시처럼 군단기지를 본뜬 사각형이었다.
이 도시가 완성된 뒤에도 샤푸르는 로마 군단병에게, 도로인 경우도 있고 다리인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 공공사업을 일거리를 주었다. 1,7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슈슈타르 근교에 있는3개의 하천에 놓은 댐을 겸한 다리다.
그 가운데 ‘반디 구르가르’(Band-i-Gurgar)와 ‘반디 미얀’(Band-i-Miyan)이라는 다리는 이제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근대까지 기능을 발휘했다는 ‘반디 카이사르’(Band-i-Kaisar)는 세 개의 ‘댐을 겸한 다리’ 가운데 가장 크고, 이름도 ‘황제의 다리’라는 뜻이다.
‘황제의 다리’는 전체 길이가 550m에 이르고, 강바닥의 상태 때문인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형태로 강의 양쪽 연안을 잇고 있다. 가장 경탄스러운 것은 강바닥의 상태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활용한 것, 강바닥을 다지기 위한 기반 공사, 교각 공사의 적확함, 물을 막거나 흘려보내는 체제의 합리성이라고 한다.
갈리에누스 황제 (253년~268년 재위)
로마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로마군 상층부를 이루는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장군들은 하나같이 공동 황제인 갈리에누스(Publius Licinius Gallienus)가 군사를 이끌고 포로 신세가 된 아버지와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여 페르시아와 다시 싸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들도 앞장서서 참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 황제가 페르시아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은 북방 야만족한테도 전해졌다. 이제 게르만족의 내습이 더욱 격렬해질 것은 구태여 예상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다. 동방에 가려면 우선 서방이 안전한 상태여야 한다.
42세가 된 갈리에누스 황제는 아버지를 버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의 주조가 중단되고 모든 공식 기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포로가 된 순간부터 존재 자체가 지워진 셈이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은 260년을 고비로 전례 없는 위기에 돌입했다.
미증유의 국난
이 불상사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 변화를 누구보다 강하게 느낀 것은 전선에서 병사를 이끌고 실제로 제국을 방위하고 있던 총독이나 군단장이었다. 그들은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졌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똘똘 뭉치는 단결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이었다. 로마는 이른바 ‘30인 황제’ 시대에 돌입했다.
북방의 상황은 심각했다. 프랑크족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밀어닥친다. 알레마니족은 라인강과 도나우강 상류가 모이기 때문에 제국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돌파하고 알프스를 넘어서 북이탈리아까지 쳐들어왔다. 그리고 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쏟아져 들어왔다.
제국의 동방은 더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유프라테스강이라는 ‘방위선’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게 되었다. 아울러 로마에는 이제 남아 있는 병력을 결집하여 군사력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지도자가 부족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방어에 나선 군단장들은 방어에 일단 성공하면 당장 황제를 자칭하는 혼란의 상황에 이르렀다.
거기에 261년, 전염병까지 로마 제국을 덮쳤고, 피해가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지진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무너진 집을 버리고, 관개설비가 파괴되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경작지를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게 되었다. 야만족이 침입하여 집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해간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3세기 후반에 로마 제국을 습격한 최대 위협은, 도시로 흘러드는 인구의 급증과 다른 곳의 인구 감소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단독 황제가 된 갈리에누스가 직면해야 했던 것은 로마 제국의 이런 '미증유의 국난' 현상이었다.
갈리에누스 황제의 활동
갈리에누스는 좋든 나쁘든 3세기 후반에 살았던 전형적인 엘리트 로마인이다. 3세기에는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지는 명문이 손꼽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갈리에누스는 그런 명문 출신에다 교양도 높았다. 그리스 문화를 애호한 나머지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으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된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하지만 그런 갈리에누스도 로마인이다. 제국의 최고 책임자인 황제가 된 이상, 그 책무를 소홀히 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 책무를 수행하는 방식이 동시대인과 후세 역사가들 사이에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융성기인 1세기와 안정기인 2세기를 다스린 황제들과 다른 점이었다.
260년의 불상사 이후 치세 8년 동안 갈리에누스는 수도 로마에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저기서 제방이 무너지면 당장 달려가 복구하고, 방금 복구한 제방을 안쪽에서 무너뜨리려 하는 자가 있으면 달려가서 그자를 죽여 제방을 지키는 식으로 제국의 서방 전역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제방에 비유한 ‘방위선’을 안쪽에서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황제에 출마하여 결과적으로 제방 지키는 일을 게을리한 총독이나 군단장들이었다. 그는 제국의 존망이 걸린 이 전대미문의 위기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다. 하지만 그 결과 전선의 장군과 원로원 의원들한테 얻은 것은 악평뿐이었다.
갈리아 제국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왕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서방에 전해진 직후, 명칭만은 거창한 ‘갈리아 제국’(Imperium Galliarum)이 창설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로마 제국에서 갈리아 속주가 독립하게 되었지만, 애초의 시작은 반란도 아니고 독립운동도 아니었다.
라인강 방위선을 맡고 있는 두 장군이 야만족한테서 도로 빼앗은 약탈품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인 것이 애초의 발단이었다. 포스투무스는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바누스는 우선 국고에 넣은 다음 약탈당한 사람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태는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한다.
실바누스가 머물고 있던 쾰른 주민들은 포스투무스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총독 실바누스와 그의 측근들을 붙잡아 포스투무스에게 넘겨주었다. 실바누스는 당장 살해되었다. 그런데 이때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 갈리에누스 황제가 실바누스에게 양육을 맡긴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포스투무스는 나중에야 알았다지만, 어쨌든 황제의 아들을 죽여버린 이상 황제의 부하 노릇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로마 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갈리아 제국’은 이렇게 태어났다.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려고 생각한 갈리아 주민들이 만들어낸 국가는 아니다.
그 증거로 통치 형태부터 모든 것이 ‘미니 로마’다. 황제에 포스투무스가 취임한 것은 당연하다 해도, 해마다 두 명씩 선출되는 집정관이 내정을 담당하고 입법기관으로 원로원도 만들어졌다. 수도는 라인강 지류의 하나인 모젤강변의 트리어(Trier)에 두었다. 로마 시대에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이라고 부른 도시다.
이 ‘갈리아 제국’ 창설을 로마 황제가 방치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우선 무력탈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포스투무스에게는 그가 라인강의 방위를 맡고 있을 때 휘하에 거느렸던 4개 군단이 있다. 결과는 1승 1패. 로마 제국도 갈리아 제국도 결전을 벌일 만한 힘은 없다는 것을 실증했을 뿐이다.
그래서 갈리에누스는 방침을 180도 바꾸기로 했다. 갈리아로 쳐들어오는 프랑크족 격퇴를 포스투무스가 창설한 갈리아 제국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갈리아 제국은 274년에 소멸할 때까지 14년 동안 존속하게 된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저버렸지만, 아들을 잃은 원한도 잊기로 했다.
갈리에누스가 채택한 또 다른 정책은 ‘게르마니아 방벽’ 안쪽에 북방 야만족의 한 부족인 알레마니족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게르마니아 방벽’을 돌파하여 쳐들어오는 이 야만족에게 ‘게르마니아 방벽’ 안쪽에 사는 것을 허락하고, 그 대신 이 ‘방위선’의 방위를 그들에게 맡기자는 것이 갈리에누스의 생각이었다.
이제 갈리에누스는 로마에 남은 군사력을 도나우강 방위에 집중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방위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계속 하려면 소아시아 서부도 방위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동방에서 혼자 페르시아 왕과 적대하고 있는 오데나투스와 어떤 공동투쟁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팔미라
유프라테스강과 지중해의 중간 지점에 있는 팔미라는 시리아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시작되었다. 이 팔미라가 시리아 사막의 진주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은 로마 제국에 편입된 뒤였다. 로마가 사막을 오가는 카라반에게 일상다반사였던 베두인족의 습격을 배제한 것이 팔미라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오데나투스는 팔미라에서 동서교역으로 재산을 모은 유력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등장은 3세기에 접어든 뒤 팔미라의 주변 정세가 변화한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속주 출신이 로마 군단에서 승진한 경우는 많았지만, 오데나투스처럼 처음부터 자기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앞두고 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창이 아니라 활을 무기로 쓰는 페르시아식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출두한 오데나투스를 로마군 정규 사령관에 임명했다. ‘비르 콘술라리스’(vir consularis)라는 칭호를 보면, 단순한 사령관이 아니라 원로원 의원만이 될 수 있는 ‘전직 집정관’(콘술라리스)에 임명한 것이다.
이후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자 페르시아 왕 샤푸르는 황제를 손아귀에 넣었으니 이제 로마 제국은 정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믿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시리아로 쳐들어왔지만, 그가 일찌감치 약탈을 중단하고 유프라테스강 동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데나투스가 이끄는 팔미라군의 공적이다.
이에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데나투스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둑스 오리엔티스’(Dux Orientis)에 임명했다. 직역하면 ‘동방 사령관’이 되지만, 제국 동방의 방위 총책임자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중동 전역이고, 소아시아와 이집트는 들어가지 않는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 황제의 호의와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했을 뿐만 아니라, 260년부터 267년까지 로마 황제에게 늘 공명정대하게 처신하여 로마인들이 최고의 윤리로 생각한 ‘신의’(피데스)를 끝까지 지켰다. 하지만 갈리에누스 황제와 오데나투스의 우호적인 관계는 267년에 갑자기 단절된다.
고트족에게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 석상에서 오데나투스가 조카의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살해된 것은 오데나투스만이 아니었다. 동행한 맏아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 살해사건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인 듯, 그 자리에서 살인자가 살해되는 것으로 끝났다.
오데나투스의 아내 제노비아의 대처도 훌륭했다. 오데나투스의 두 번째 아내인 제노비아는 자기가 낳은 어린 아들을 남편의 후계자로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후견인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Zenobia)가 역사 세계에 등장한 것이다.
삼분된 제국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 황제의 곤경을 이용하는 짓을 하지 않았지만, 제노비아는 달랐다. 북쪽으로는 소아시아 동부의 카파도키아까지 세력을 넓혔고,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손에 넣어버렸다. 이집트 속주는 황제의 개인 영지일 뿐만 아니라 본국에 필요한 밀의 3분의 1을 줄곧 공급해온 로마 제국의 곡창이기도 했다.
제노비아의 이집트 탈취는 갈리에누스 황제의 발판을 더한층 약화시켰을 뿐이다. 260년 이후 갈리에누스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것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여 주위 사람들을 납득시켰지만, 제노비아가 카파도키아와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원로원과 군대를 분리하는 법률
갈리에누스가 입안하여 성립시킨 법률, 다시 말해서 갈리에누스가 고안하고 시행한 정책 가운데 후세의 평가가 한결같이 나쁜 것은 ‘원로원’과 ‘군대’를 완전히 분리하여 원로원 의원을 로마군 장교급에서 완전히 배제한다고 규정한 법률이었다.
의외로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을 군대에서 배제하는 이 법률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리에누스 이후 배출된 군인 출신 황제는 군인들이 아니라 비군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3세기의 특징인 ‘로마인의 비로마화’를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이 법률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방향을 결정해버리는 ‘법’이 되었다.
에드워드 기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법률을 비판한 로마사 연구자들의 의견을 한마디로 종합하면 ‘힘에 관여하지 않게 되면 통치력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실증하듯, 그 후의 로마 제국은 ‘군사도 아는 정치가’와 ‘정치도 아는 군인’을 낳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도 ‘로마의 비로마화’를 보여주는 한 예다.
하지만 비로마화 쪽으로 방향을 꺾은 것은 같아도, 격변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변호해줄 수 있는 법률도 있다. 역시 갈리에누스가 실시한 그 정책은 중무장 보병을 주체로 한 로마의 전통적 군단 구성을 게르만적인 기병 중심 체제로 바꾼 것이었다.
‘방위선’의 역사적 변화
아래 그림은 로마군이 적지로 진격하여 적이 당분간 재기하지 못할 만큼 격파하는 방법으로 로마 제국을 야만족의 침입에서 지키는 방위전략을 채택했던 시대의 국경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격은 최상의 방어’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전략이다. 이 시대에 제국의 ‘방위선’은 철벽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주민의 거주지역이 방어하기 쉬운 고지대에 모여 있지 않고 평지에 분산되어 있다. 또한 목축보다 농경이 산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교통수단이 정비되어 있고 이동할 때 안전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져 주민 공동체가 폐쇄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공동체와 개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전략이 무너진 시대를 나타낸 것이 다음 그림이다. ‘방위선’은 곳곳이 뚫리고, 게다가 별로 간격을 두지 않고 자주 되풀이되었다. 도시는 물론 마을에서도 거주지역 주위에 높은 방벽을 둘러치게 되었다. 군단기지조차 높은 탑과 견고한 성벽을 짓고, 성벽 주위에는 깊은 참호를 파고, 강물을 끌어들인 해자로 둘러싼 성벽 안에 자주 틀어박히게 되었다.
평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이제 안전하지 않을뿐더러 경제적으로도 유리하지 않게 되었다. 농경지가 황폐해진 요인을 쳐들어온 야만족과 맞서 싸우는 로마군의 전쟁터가 된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도로나 운하나 관개시설을 유지 보수할 여유를 잃은 것도 농경지가 황폐해진 요인이다.
군의 구조개혁
이 현상을 타개하려면 평화를 되찾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갈리에누스 황제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무장 보병이 주체를 이루는 로마의 전통적인 군단 시스템을 경무장 기병이 주체인 게르만식 체제로 바꾸어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체제는 40여 년 전에 카라칼라 황제가 손을 댄 뒤 3세기 로마의 특징인 ‘정책의 비지속성’으로 중단되어 있었던 ‘기동부대’ 방식의 부활이다. 다만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는 보병과 기병을 합한 분대였지만, 갈리에누스 황제가 만든 ‘기동부대’는 분명한 기병대라는 점이 달랐다.
로마의 군제는 줄곧 로마의 사회 구성을 반영했기 때문에, 군제의 변화는 사회 구성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중무장 보병인 군단병이 전쟁터의 주역에서 밀려난 것은 도시국가의 다수파였던 시민으로 구성된 시민병이 주역의 자리에서 내려와 사회에서 소수파인 기병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또한 기병대는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단보다 규모가 작다. 대개 1만 명도 되지 않는 규모로 행동하는데, 5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지휘하는 총사령관과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경우는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다. 다재다능한 전문가가 아니라 소규모 집단에서 가장 우수한 전문가 정도로 충분하다.
이런 상황이라 결국 로마군 지휘관의 주력도 군단장에서 기병대장으로 바뀌었다. 갈리에누스가 죽은 뒤 그를 계승한 로마 황제들이 거의 다 군인 출신이고 그것도 기병대장 출신인 것은 이 시기에 누가 실권을 쥐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스태그플레이션
3세기에 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계속 쇠퇴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는 국세 수입이 줄어든 것이었다. 게다가 수입은 줄어드는데 지출은 계속 늘어났다. 군사비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군사 조직이 비대해진 것이 아니라 전쟁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그 ‘적자’를 어떻게 메웠을까. 결국 은화의 순은 함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곤경을 타개하려고 했다. 카라칼라는 순은 함량이 50%까지 떨어진 ‘데나리우스 은화’와 병행하여 함량은 그대로 두고 무게만 5.5g으로 두 배 가까이 늘린 ‘안토니누스 은화’를 새로 등장시켜 은화의 가치 저하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부터 반 세기가 지난 즈음 무게가 3g 안팎이던 ‘데나리우스 은화’는 모습을 감추었다. 통용되는 유일한 은화가 된 ‘안토니누스 은화’는 무게가 5.5g에서 3g으로 줄어들었고 은 함유율은 5%까지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는 은도금한 구리돈일 뿐이었다. 사실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은 시장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3세기 로마 제국, 특히 3세기 후반 로마 사회를 덮친 것은 평가절하로 말미암은 인플레이션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 디플레이션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물산이 시장에 넘쳐나서 일어나는 디플레이션은 아니다.
야만족을 맞아 싸우는 요격 무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경작지가 황폐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떨어졌으니까, 물산이 시장에 넘쳐날 리가 없다. 그보다 경작지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황폐해지고 인구도 줄어들어 농업에 대한 투자 의욕이 떨어진 데 따른 디플레이션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3세기 후반에 금리가 내려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팍스 로마나’가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한 시대에는 연이율 12%가 보통이었는데, 이 시대에는 4%까지 떨어졌다. 이 가설이 옳다면, 3세기 후반의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현상은 경기후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의미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아닐까.
갈리에누스의 죽음
268년 가을, 갈리에누스 황제가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기병대장 아우레올루스가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를 뒤쫓아 밀라노에 온 갈리에누스 황제는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 성채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황제 쪽에 있던 다른 기병대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죽였다. 갈리에누스가 갓 50세가 되었을 때였다.
갈리에누스를 살해한 기병대장들이 황제를 배신하고 동료인 아우레올루스 쪽에 붙은 것은 아니다. 아우레올루스도 그 직후에 살해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기병대장들은 황제로서 갈리에누스에 대한 기대를 버린 것이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최고사령관 갈리에누스의 군사적 능력에 실망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 황제 (268년~270년 재위)
살해된, 다시 말해서 불신임된 갈리에누스에 이어 제위에 오른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였다. ‘고티쿠스’는 ‘고트족’이라는 뜻은 아니라, ‘고트족을 제압한 자’라는 의미로 감사와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른 별명이다.
로마인이 일리리아 지방이라고 부른 곳은 북쪽을 흐르는 도나우강과 남쪽에 펼쳐진 아드리아해 사이에 끼어 있는 곳이다. 이 일리리아 지방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주축이 바뀐 로마군의 지도층을 키우는 온상이 된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이 일리리아 지방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부모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클라우디우스는 30대 중반에 벌써 기병대장에 임명되어 당시 황제 데키우스의 명령을 받고 그리스의 테르모필라이에 급파되었다. 그 후에도 기병대장으로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갈리에누스 황제가 로마군의 주축을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꾸기로 결심한 데에는 클라우디우스의 활약이 영향을 미쳤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상대방은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는 야만족이기 때문에, 기병대 기지는 국경인 방위선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까지 후퇴하고, 거기서 야만족이 침입한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기병대 기지로 밝혀져 있는 곳은 시르미움과 밀라노다.
그래도 시르미움은 방위선인 도나우강까지의 거리가 20km밖에 안 되지만, 밀라노는 본국 이탈리아 안에 있다. 확실한 기병대 기지가 이 두 곳밖에 없는 것은 유격대인 기병대가 기지 안에서 느긋하게 지낼 틈도 없을 만큼 야만족의 침입이 도처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 제국의 방위전략이 '적이 쳐들어오면 맞아 싸우는' 요격 작전으로 정착해버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전투는 국경 안에서만 벌어지게 되어버렸다. 이래서는 기병대가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전쟁터가 된 땅의 황폐화와 인구 감소 현상이 개선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고트족의 내습
황제가 되었지만 수도 로마에 돌아갈 틈도 없었던 클라우디우스가 침입한 야만족을 격퇴하러 나가기 전에 수도의 원로원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남아 있다. 황제라기보다 평생 기병으로 50대 중반에 이른 사나이의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들으라. 그리고 놀라라. 여기에 쓰는 것은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다. 로마 제국 영내에 32만 명이나 되는 무장한 야만족이 침입했고, 그들은 이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까지 접근했다. 이 대군을 격퇴하는 데 실패하면 로마 제국은 비참한 상태에 빠지겠지만, 그들을 맞아 싸울 아군은 기병도 보병도 완전히 피폐했다. 정신만이 아니라 무기와 무장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적에게 사로잡힌 불행 이후 수없이 벌어진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방패도 창도 칼도 오래전에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난 것을 아직도 쓰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오랫동안 제국에 활력을 공급해온 갈리아와 에스파냐는 테트리쿠스(당시 갈리아 제국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로마군 안에서도 활을 잘 쏘는 우수한 궁병은 오리엔트의 여자 제노비아에게 붙어버 렸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현재 실상인데,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편지를 보낸 뒤 출정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북이탈리아의 가르다 호수 부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격전으로 고트족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완패당한 고트족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약탈한 재물도 사람도 모두 버리고 도나우강 너머 북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고트족은 침입로를 바꾸었다. 도나우강 하류를 건너 발칸반도로 우르르 들이닥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도 기병대를 이끌고 달려갔다. 전쟁터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모이시아 속주였다. 여기서도 클라우디우스와 기병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티쿠스’는 더욱 무게있는 존칭이 되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패배한 고트족에 대해 취한 정책은 색달랐다. 패배한 고트족 가운데 젊고 건장한 사내는 로마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사내들에게는 무기를 버리고 모이시아 속주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권했다. 농부 지원자에게는 고향에서 처자식을 불러들이는 것을 허락하고, 경작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이시아 속주는 도나우강 하류에 면한 로마 제국의 '방위선'이다.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을 정착시켜 토지 황폐화와 인구 감소를 막으려고 한 것인데, 놀랍게도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군에 편입된 고트족은 동포들이 쳐들어오면 그들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농민이 된 고트족도 이주한 땅에 순응하여 정착했다.
고티쿠스 황제의 죽음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한테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했지만, 얼마 지나기 전에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야만족도 아니고 쿠데타도 아닌 전염병이었다.
270년 1월, 시르미움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겨우 1년 반의 통치 뒤에 맞은 죽음이었다.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와 달리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신격화를 인정했다. 변경에서 태어난 농민의 아들이 죽어서 ‘신’의 대열에 들어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동생이 하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다음 황제로 승인하고, 아퀼레이아에 있는 그에게 당장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이것이 장병들의 반발을 샀다.
제국의 현재 상태에서 유능한 무장이 아니면 로마군 통수권자이기도 한 황제를 도저히 맡을 수 없다는 장병들의 생각은 옳았다. 원로원은 퀸틸루스에 대한 승인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장병들은 일치단결하여 아우렐리아누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도 이것을 추인했다. 퀸틸루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 이 시기의 황제들은 모두 일리리아 지방이라고 불린 도나우강 일대 출신이다. 출신 계급이 하층에 속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하극상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례로 변했다.
제2장(서기 270년~28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270~275년 재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Lucius Domitius Aurelianus)는 이름만 보면 본국 이탈리아 출신 같지만, 도나우강과 가까운 변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국경과 가까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통틀어 ‘로마화한 야만족’이라고 불렀는데, 아우렐리아누스도 그런 족속에 속했다.
선임자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는 거의 동년배였던 모양이다. 제위에 오른 270년에는 쉰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40대를 남자의 한창 나이로 생각했는데, 그 기준에 따르면 10년이나 늦은 셈이다. 하지만 그는 40대부터 이미 주목받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발탁한 속주 출신 인재였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40대인 아우렐리아누스를 ‘구사했다’는 표현을 쓰고 싶어질 만큼 충분히 활용했다. 군단기지 책임자들에게 보낸 황제 서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더없이 유능한 아우렐리아누스에게 각 기지의 시찰을 위임하고, 그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모든 것을 개선하도록 일임했다.>
사병에서 출발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임무를 맡아 제국의 가장 중요한 방위선인 도나우 방위선 전역을 시찰하면서 방위선 전체에 걸친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황제전』에 기록된 아우렐리아누스의 언행을 보면 그때의 시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시찰에 나선 아우렐리아누스는 1천 명을 지휘하는 대대장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대대장 자리를 유지하고 싶으면, 아니 자신의 전사를 면하고 싶으면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휘하 병사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일개 졸병이라 해도 로마군 병사라면 민간인이 갖고 있는 어떤 물건도 강탈해서는 안 된다. 달걀 한 개도 빼앗으면 안 된다. 올리브기름도 소금도 땔나무조차도 빼앗으면 안 된다. 군대가 지급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병사에게 강탈당하면 민간인의 생활을 뒷받침해주는 물산이 없어져버린다. 로마 병사는 야만족을 격파하고 얻은 전리품으로 유복해져야지, 속주민 눈물로 유복해져서는 안 된다. 무기는 항상 잘 손질하고 칼날은 날카롭게 갈아두고 군화는 찢어진 곳이 없게 수리하고, 무장도 필요하면 항상 새것으로 바꿀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언제 쳐들어올 지 예상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적이다. 봉급은 기지 내 은행에 맡겨두어라. 그리고 낭비는 삼가는 것이 로마 전사다. 다만 전쟁터에서도 금으로 된 목걸이나 팔찌나 반지를 몸에 지니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이 말은 로마 병사니까 금붙이를 몸에 지니고 싸우는 것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심은 금붙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그것을 적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더 용감히 싸우게 된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기병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말 손질을 최우선 사항으로 생각해라. 손질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것은 타고 다니는 말만이 아니라 수송용 말이나 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돌보는 말이나 소의 사료를 밤중에 몰래 빼돌리는 고얀 놈들이 있어 종종 문제가 되는데, 그런 괘씸한 짓을 하다가 들키면 엄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축도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부대 전체의 것으로 생각하여 손질하고 돌봐주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장병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서는 장교와 일반 병사들의 말이나 행동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 내부의 규율을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 장병 개개인의 인격까지 차이가 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장교도 휘하 병사를 노예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고, 어떤 병사도 장교를 하인처럼 섬길 의무는 없다. 장교도 병사도 군대라는 조직의 일원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장병은 지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군단 소속 의사들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금품을 주면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신을 믿든, 점에 의지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군단의 행동이 거기에 좌우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민간인에게는 항상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 외출했을 때 민간인과 싸우기라도 하면 그런 자에게는 박살형(撲殺刑, 때려죽이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엄격하게 처벌을 시행했다. 그런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병사들은 'Aurelianus manu ad ferrum'이라는 별명을 붙여주 었다. ‘항상 칼에 손을 대고 있는 아우렐리아누스'라는 뜻이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키가 크고 단단한 체격이지만, 키에 비해 얼굴이 작고 좁은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어서 기품있고 위풍당당한 풍채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3세기의 로마 황제들 중에서는 드물게 취임 당시부터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황제였다.
웅대한 계획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냉철함도 갖고 있었다. 이런 아우렐리아누스를 두고 동시대 역사가들은 오랜만에 로마인의 혼을 가진 황제가 등장했다고 찬양하게 된다. 어쨌든 제위에 오른 아우렐리아누스는 우선 사항을 명확히 한 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격 개시
최우선 사항이 된 것은 북쪽 방위, 즉 야만족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것은 선제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이미 손을 댔고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거둔 성과를 발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는 매복 작전을 준비했는데, 상대인 반달족이 로마군의 이 매복작전을 어떤 방법으로든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군을 피해 대규모 기병대가 바로 이탈리아 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작전을 강행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서 중부 이탈리아의 리미니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아이밀리아 가도를 진군하는 대규모 기마대에 저항할 수 있는 도시는 없었다.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그리고 아이밀리아 가도의 종착지인 리미니 등 아이밀리아 가도가 지나는 도시들 가운데 약탈과 방화를 면할 수 있었던 곳은 하나도 없었다.
허를 찔린 아우렐리아누스가 야만족을 겨우 따라잡은 것은 야만족이 파노에서 플라미니아 가도로 들어간 직후였다. 메타우로강이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하구 일대를 무대로 양군 기병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승리한 것은 아우렐리아누스 쪽이다.
하지만 야만족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그때까지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원로원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부 이탈리아까지 야만족의 침입을 허용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나온 것이다.
게다가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제 자격으로는 수도에 귀환했을 때, 원로원 의원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정책을 두 가지나 강행했다. 첫째는 통화 개혁이고, 둘째는 수도 로마를 둘러싸는 성벽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을 직시한다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두 가지 정책이 왜 원로원의 신경에 거슬렸을까.
통화 발행권
금화와 은화의 발행권은 황제에게 있고 동화 발행권은 원로원이 갖는다는 것도 로마 제국의 통화제도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함께 결정되었다. 그 후 290년 동안이나 금화와 은화는 갈리아의 리옹에서, 동화는 수도 로마에서 주조되었다.
그런데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사로잡힌 직후 리옹에서 제국 통화를 주조할 수 없게 된 로마는 금화와 은화 조폐소를 수도 로마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260년부터 270년까지 10년 동안 금화와 은화와 동화는 수도 로마에서 주조되었고, 원로원 출신인 집정관이 실질적으로 화폐 주조를 관리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수도 로마에 들어오자마자 조폐 기술자들의 부정을 적발하는 일에 착수했다. 금화의 무게가 줄어들고 은화의 은 함유율이 5%까지 떨어진 것은 조폐 관계자들의 부정에 원인이 있다고 황제는 규탄했다. 조폐 기술자들의 배후에 있을 게 분명한 원로원을 은근히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기술자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파업에 돌입했고,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아벤티노 언덕에 틀어박혀 농성을 벌였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실력 행사로 응수했다. 로마 기병대의 발굽에 희생된 자가 7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행위의 배후에 원로원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은화가 은도금화로 전락해버린 것은 역시 로마 제국의 경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파업을 진압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도 이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통화제도 개혁은 제도를 조금 손질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통화 개혁 문제는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스테르티우스 동화의 앞면에도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뒷면에는 그 황제가 이룩한 기념할 만한 사업이나 행사, 예를 들면 트라야누스 황제가 도나우강에 놓은 다리 따위가 도안되어 새겨진다. 하지만 그 옆에는 S와 C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Senatus _Consulto’의 약자로 ‘원로원 발행’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통화 발행권은 단순한 금융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문제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동화를 완전히 폐지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300년 동안이나 원로원이 가졌던 동화 발행권을 빼앗은 셈이 되었다. S와 C가 새겨진 화폐는 그 후 모습을 감춘다. 원로원 의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법률에 찬성표를 던졌을까.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제국의 다른 도시가 방벽을 둘러치는 시대가 되자, 수도 로마도 예외가 허락되지 않았다. 성벽이 없었던 300년 동안 로마의 시가지는 많이 확대되었다. 성벽도 그렇게 커진 로마 전체를 둘러싸는 규모가 되어야 했다. 271년에 착공하여 6년 뒤에 완공된 성벽은 공공건축물에도 입안자의 이름을 붙이는 로마의 전통에 따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자유롭게 바깥쪽으로 퍼져갔던 로마시의 거주구역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안과 밖으로 나뉘게 되었다. 로마 교외에 흩어져 있던 부자들의 별장도 전처럼 개방적인 구조는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스스로 방위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은 시내로 이사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팍스 로마나’가 과거의 것이 되어가던 로마 제국 전역에서는 교외 인구가 줄어들고 도시가 과밀화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세력 확장의 온상이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현재 상황에 맞는 정책을 실시했을 뿐이라고 생각했고, 원로원에서 들끓는 비판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키아 포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3세기에 로마 제국을 통치한 다른 황제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나라 안팎에서 ‘속공’을 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만족 대책은 국내 정치와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에 대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1) 우선 적극전법으로 쳐들어가 야만족을 호되게 공격한다.
(2) 그런 다음 열세에 빠진 야만족이 강화를 제의해오기를 기다린다.
(3) 강화를 제의해온 부족장들을 어마어마한 무대 장치에서 맞이한다.
(4) 여기에 압도되어 겁에 질린 야만족 대표와 되도록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또 한편으로는 야만족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로마인이 장기로 삼아온 ‘이기고 양보한다’는 정략이다. 이 방식으로 맺은 강화에 따라 로마는 다키아 속주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의 속주가 된 다키아는 165년 만에 로마 제국 영토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가 단순한 철수를 결행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도나우강 하류 모이시아의 일부와 그 왼쪽에 있는 달마티아 지방의 일부, 그리고 모이시아 남쪽에 있는 트라키아 지방의 일부를 합하여 ‘새 다키아’라는 속주를 신설했다. 거기에 다키아에서 철수한 2개 군단을 배치했다.
제국 북부의 도나우 방위선을 확립하는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고, 그래서 아우렐리아누스도 동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27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황제는 벌써 동쪽으로 출발했다. 여전히 ‘속공’이었다.
제노비아 여왕
소아시아를 행군하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따라간 것은 도나우 방위선에서 선발하여 데려온 기병대로 여겨진다. 행군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소아시아에 들어간 뒤에는 지난 10년 동안 팔미라의 지배를 받은 지방을 지나가게 된다.
하지만 로마군은 우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앙키라(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로 갔다. 로마군 앞을 가로막는 팔미라 사람은 없었다. 주민들은 가로막기는커녕 성문을 활짝 열고 로마 황제와 로마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앙카라에서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가르는 타우루스산맥으로 간다. 그런데 산맥을 넘기 전에 티아나라는 도시가 아우렐리아누스 앞에 성문을 닫고 저항할 뜻을 밝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방의 소도시에 불과한 티아나에 팔미라는 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며칠도 지나기 전에 주민들은 후회하고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각오한 승리자의 약탈과 파괴는 일어나지 않았고, 주민들에게는 아무 벌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동방 주민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티아나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금새 제국 동방에 널리 퍼졌다.
제노비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남성적이었다. 말을 타고 사냥에 열중한 것도, 갑옷을 걸치고 전쟁터에 나간 것도, 정치 현장에 참석한 것도, 교사로 초빙한 그리스인을 상대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비극을 논한 것도 남자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제노비아를 뒷받침한 것은 죽은 남편 오데나투스가 키운 팔미라 군대였다.
로마의 항복 제안을 제노비아가 거절함에 따라 전쟁은 결정되었다. 전쟁터도 제노비아의 생각에 따라 안티오키아 바로 북쪽을 흐르는 오론테스강변에 펼쳐진 평원으로 결정되었다. 팔미라 군대의 중무장 기병대에 승부를 건 제노비아는 기병이 활약하기 쉬운 평원을 전쟁터로 택한 것이다. 해가 바뀌어 272년이 되어 있었다.
일차전
아우렐리아누스가 티아나 주민을 관대하게 처우한 것을 안 안티오키아 주민은 지난 10년 동안 자신들이 팔미라의 지배를 허용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페르시아 원군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샤푸르 1세는 이 무렵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에서도 아라비아에서도 약속한 용병이 도착하지 않았다.
양군은 오론테스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로마 기병대는 처음에는 도망치는 듯하다가 그때까지 줄기차게 쫓아온 팔미라 기병대 쪽으로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이제까지 언덕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 보병들이 팔미라 기병대 좌우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느닷없이 삼면을 적에게 포위당하고, 게다가 추격해온 기세와 중무장 때문에 쉽게 방향을 바꿀 수도 없는 팔미라 기병들은 수를 헤아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쓰러져갔다. 살아난 것은 후방에 있던 기병뿐이었다.
제노비아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안티오키아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에메사까지 퇴각했다. 이곳을 전쟁터로 삼아 아우렐리아누스와 이차전을 치를 작정이었다.
일차전의 승리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전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주민들은 12년 만에 돌아온 로마 황제를 환호로 맞이했다. 황제는 지난 12년 동안 안티오키아가 사실상 로마 제국을 배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서 죄를 묻지 않았다.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대표하는 도시로 복귀했다.
잠깐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동안 아우렐리아누스가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는 적지 않았겠지만, 그중 하나가 안티오키아에 사는 기독교도들의 의뢰에 따라 어떤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기독교회에서 로마 주교와 안티오키아 주교 가운데 누가 윗자리에 서야 하느냐가 쟁점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무엇을 판단 기준으로 삼았는지 모르지만, 기독교회에서는 로마 주교가 맨 윗자리에 서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기독교회 내부의 중요한 쟁점이 되지만, 이 판결은 로마 주교가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나 카르타고의 주교보다 윗자리에 선다는 최초의 판결이 되었다.
이차전
이차전은 에메사 교외에서 벌어졌다. 제노비아 진영은 또다시 중무장 기병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진영은 같은 전법을 두 번 쓰지 않고, 이번에는 로마 보병대를 내세워 중무장한 팔미라 기병대와 대결시켰다. 로마군 보병은 이번에는 창과 칼 외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로마군 보병들은 황제가 명령한 대로 적의 기병이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부대장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의 다리를 곤봉으로 힘껏 후려쳤다. 말만 쓰러지면, 사람도 말도 중무장인 만큼 일어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창과 ‘글라디우스’를 쥔 보병들이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기병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때 제노비아의 아들이고 팔미라 왕국의 왕이었던 바발라투스도 전사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로마군의 완승이었다. 완패당한 제노비아에게는 이제 고향 팔미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팔미라를 향해 사막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팔미라 공방전
제노비아는, 로마는 페르시아의 동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팔미라만 농성전을 견뎌내면 로마군도 조만간 포위를 풀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제노비아 생각으로는 팔미라에서 농성전을 벌이면 유리한 조건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팔미라가 사막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포위 공격에 착수하기 전에 벌써 보급기지를 분산해두었다. 팔미라를 중심으로 서남쪽의 다마스쿠스, 서쪽의 에메사, 북쪽의 레사파, 동쪽의 두라 에우로푸스를 향해 로마 가도가 뻗어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팔미라와 같은 교역도시인데, 이 도시들을 동원하여 보급망을 구축한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이 전혀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이에 동요한 것은 팔미라 주민들이었다. 제노비아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이것이 ‘오리엔트의 여왕’을 처음으로 절망에 빠뜨렸다.
어느 날 밤, 제노비아는 중신들만 데리고 낙타를 타고 도망쳤다. 페르시아 왕에게 몸을 의탁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프라테스강에 이르기 훨씬 전에 뒤쫓아온 로마 기병대에 포위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제노비아는 반국가 행위의 책임을 중신들한테 떠넘겼다.
로마는 원래 적국의 군주는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 이때도 사형에 처해진 것은 중신들뿐이었고, 제노비아는 이탈리아로 호송하기로 결정되었다. 재빨리 이집트 통치권도 되찾은 아우렐리아누스는 제국 동방의 방위를 부장인 프로부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떠났다.
갈리아 회복
서쪽으로 가는 아우렐리아누스와 그 군대의 행군 속도는 ‘속공의 아우렐리아누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도나우 방위선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방위선 바깥쪽에 사는 야만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라도 하면 주저없이 군대를 투입했다.
이런 아우렐리아누스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은 갈리아 제국의 황제 테트리쿠스다. 테트리쿠스는 로마 제국에서 분리된 갈리아 제국의 황제지만,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 의석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갈리아 제국의 존재 이유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역시 동쪽으로는 시리아까지, 북쪽으로는 북해에서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까지 아울러야만 비로소 제국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여기는 계급 출신이었다. 게다가 갈리아 제국 자체가 로마에서 분리 독립하고 싶다는 명확한 의지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었다.
273년 가을, 나중에 샹파뉴라고 불리게 된 갈리아 북부의 센강 상류 일대 평원에서 두 군데가 맞섰고, 그날 밤늦게 아우렐리아누스의 막사를 테트리쿠스가 남몰래 찾아갔다. 알려진 것은 갈리아 제국 황제인 테트리쿠스가 로마 제국 황제인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항복했다는 것뿐이다. 14년 동안 존속한 갈리아 제국은 소멸했다.
개선식
274년 봄, 오랜만에 수도 주민을 열광시킨 개선식은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개선행렬에서 군중의 눈길을 모은 사람은 제노비아였다. 금칠한 무개 마차 위에 황금 사슬로 묶인 채 앉아 있었지만, 그녀 소유의 보석 장신구를 모두 몸에 걸치라는 명령 때문에 많은 보석의 무게에 짓눌려 몸의 균형을 유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갈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테트리쿠스는 원래 갖고 있었던 원로원 의석을 그 후에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행정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테트리쿠스는 갈리아 제국에 참여하기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첼리오 언덕의 저택에 살았고, 거기에서 열리는 연회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도 참석했다.
제노비아에게는 로마에서 20km쯤 떨어진 티볼리의 별장이 여생을 보낼 거처로 제공되었다. 아름다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수도 로마와는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고 그리 멀지도 않은 티볼리는 맑은 물이 풍부하고 기후도 온화한 곳이다. 제노비아가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다.
제국 재통합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사로잡힌 260년 이후 갈리에누스 황제가 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2년, 두 황제가 합해서 10년을 노력했는데도 이루지 못한 일을 아우렐리아누스는 4년 만에 해냈다.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제국을 회복한 자’를 뜻하는 ‘Restitutor Orbis’라는 존칭을 주기로 결의한 것도 당연했다.
로마 제국은 좋든 나쁘든 강대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거대한 ‘주민공동체’(res publica)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변경에서 태어나고 야만족의 피가 더 많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로마 제국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 본질을 구체화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 진정한 로마인이었다.
개선식을 거행한 이듬해인 275년, 봄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린 것처럼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수도를 떠났다. 우선 북쪽으로 올라가 도나우 방위선을 시찰하면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간다. 샤푸르 1세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그의 다음 목표였다.
4월, 도나우 방위선 시찰을 마친 아우렐리아누스는 트라키아 지방을 가로질러 마르마라해 앞에 있는 페린투스라는 도시까지 왔다. 여기서 무슨 일로 비서인 에로스를 꾸짖은 모양이다.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겁이 난 비서는 사형에 처할 장교 이름들이 적혀 있는 문서 한 통을 위조해서 그들을 찾아갔다.
비서 에로스의 안내를 받아 황제의 침실에 잠입한 장교들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죽였다. 4년 9개월 동안 제국을 통치한 뒤에 맞은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는 “아우렐리아누스 시대의 제국은 행복했다. 시민들은 그를 사랑하고, 병사들은 그를 존경하고, 적들은 그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
비어 있는 황제 자리
그러나 암살은 곧 들통이 났다. 하인 하나가 그늘 속에서 모두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포된 장교들도 비서 에로스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안 뒤에는 자책감에 시달렸고, 개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에로스는 산 채로 몸이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고, 황제를 직접 죽인 장교들도 사형당했다.
그런데 아우렐리아누스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로마 군단과 원로원은 서로에게 후계자 선정 문제를 넘기는 핑퐁을 계속했고, 그로 인해 다섯 달이나 황제의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5개월 동안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도 흥미롭지만, 병사들이 불만을 폭발시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죽은 지 다섯 달이 지난 9월 25일, 로마 제국도 드디어 황제를 가질 수 있었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75세의 타키투스라는 인물이었다. 속주 경험도 군대 경험도 전혀 없지만, 세련된 교양인이었다.
타키투스는 고령을 이유로 후계자 지명을 일단 사양했지만, 75세나 되어 나름대로 각오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황제 지명을 받아들였다. 원로원도 “원로원은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 타키투스를 황제로 지명하고 승인했다”는 공식 통고를 보냈다. 드디어 로마 역사상 전례없는 다섯 달의 황제 공백 기간이 끝난 것이다.
타키투스 황제(275~276년 재위)
타키투스(Marcus Claudius Tacitus)는 황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할 의지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가진 재산을 전부 팔아서, 수익금은 병사들의 봉급에 보탠다는 조건으로 모두 국고에 기부했다.
이제까지 살고 있던 시내의 저택을 해체하고, 대리석 원기둥을 포함한 건축자재는 모두 그 집터에 짓게 된 공중목욕장의 건축자재로 전용했다. 황제가 입는 보라색 옷도 걸치려 하지 않고, 황제가 되기 전에 입었던 토가와 투니카를 그대로 입었다.
그리고 276년으로 해가 바뀌기를 기다려 전선으로 떠났다. 선제 아우렐리아누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페르시아와 싸우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들 틈에 섞여 행군하는 것은 군대 경험도 전혀 없는데다 75세나 된 노인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말을 타기는커녕 가마에 누워서 행군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6월, 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타살이 아니라 자연사였다.
타키투스 황제 사후
타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원로원은 당장 타키투스의 아우인 플로리아누스(Marcus Annius Florianus)를 다음 황제로 지명했다. 원로원이 플로리아누스를 황제로 지명한 것을 안 장병들은 이번에는 그것을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시리아와 이집트에 주둔하는 군단이 자기네 총사령관인 프로부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다른 지방에 주둔하는 군단들도 그에 보조를 맞추어 프로부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군단의 이런 움직임에 원로원은 당장 동요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이 동요하자 플로리아누스는 발밑이 허물어져가는 두려움에 그만 제정신을 잃었다. 황제의 두려움은 황제의 경호를 맡은 병사들에게 전염되었다. 그들은 원로원의 지지도 잃어버린 플로리아누스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276년부터 282년까지 6년 동안 로마 제국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머물게 되는 프로부스 황제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나 아우렐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도나우강 연안에 있는 판노니아 속주의 시르미움 출신이다. 그리고 젊은 인재로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었다는 점도 두 선배와 비슷했다.
아직 20대 전반이었던 프로부스를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주목했다. 그가 지휘하는 보조부대는 정규병으로 구성된 대대보다 훨씬 큰 전과를 차례로 거두었다.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서른 살도 안 된 프로부스를 정규군 군단장에 임명했다. 그 후 프로부스는 은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제였던 5년 동안, 제10기병군단을 지휘한 프로부스는 황제의 적극적인 전략에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군대와 싸우고 있는 사이에 재빨리 이집트를 되찾은 것도 프로부스였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가 서방으로 돌아갈 때 40세의 프로부스에게 동방 전역의 방위를 맡겼다.
프로부스 황제 (276~282년 재위)
프로부스는 황제가 된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Marcus Aurelius Probus)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통치의 본보기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프로부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그가 병사들을 부추겨 황제로 추대받은 결과가 아니다.
프로부스를 황제에 앉히자는 목소리는 부하 장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목소리가 다른 ‘방위선’의 장병들한테까지 퍼져가서 로마군 전체의 뜻으로 정착한 결과였다. 이것을 원로원이 추인하는 형태로 프로부스의 즉위가 실현된 것이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황제로 추대된 프로부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원로원이 추인했다는 소식도 기다리지 않고 황제의 첫 번째 책무인 제국 방위를 위해 전선으로 직행한다. 황제가 된 뒤 첫 번째 전쟁터는 고트족의 습격을 받고 있던 소아시아 서부였다. 뛰어난 장군만 있으면 로마군은 역시 강하다.
그해 겨울을 보낸 프로부스는 277년 해가 바뀌자마자 도나우 방위선으로 이동했다. 야만족이 갈리아로 대거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받고 격퇴하러 가기 전에 갈리아에 데려갈 군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리아 깊숙이 쳐들어온 야만족은 여느 때처럼 약탈과 방화를 끝내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60개나 되는 도시와 마을에 눌러앉아버렸다. 갈리아의 거의 절반이 전쟁터가 된 야만족 요격전은 로마 기병대가 야만족을 격퇴하고 추격하면 보병대가 뒤처진 패잔병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78년 중엽에는 벌써 갈리아 전역에서 야만족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프로부스는 쉬지 않았다. 라인강에 다리를 놓고 강 건너편까지 쳐들어간 것이다. 적극전법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라인강과 도나우강 상류가 모이는 ‘게르마니아 방벽’ 일대와 도나우강 중류 일대에서도 프로부스는 적극전법을 펼쳤다.
포로가 된 게르만인 남자 1만 6천 명은 노예가 되지 않고 병사로서 로마군에 편입되었다. 다만 그들만의 부대를 따로 편성하면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10명씩 소대로 나누어, 제국의 방위선 곳곳에 분산 배치했다. 이에 따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야만족 동화 정책
280년과 281년에 라인강과 도나우강 전체에 걸쳐 야만족 격퇴전이 벌어졌다. 이때 프로부스는 싸움에 진 야만족이 로마 제국 안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야만족도 침입하여 약탈하고 철수하는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제국 영토 안으로 이주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프로부스는 10만 명이 넘는 야만족을 도나우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시키는 일까지 결행했다.
281년 가을, 프로부스는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수도 로마의 땅을 밟았다. 수도에 머무는 동안 프로부스는 개선식 준비보다는 이집트 장관에게 관개공사에 대한 지시를 내리거나 갈리아 총독들을 모아놓고 하천 활용을 협의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82년으로 해가 바뀌자마자 프로부스는 수도를 떠나 북쪽으로 간다. 고향 시르미움 일대를 다시 생산성 높은 경작지대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병사들에게 칼 대신 괭이를 들라고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지로 쳐들어가는 적극전법을 맛본 병사들에게 이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그해 8월도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프로부스 황제는 공사 진행 상황을 시찰하려고 특별히 시찰용으로 나무를 짜서 만든 높은 망루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의 단검이 프로부스 황제의 숨통을 끊었다. 모두 일반 병사들이 한 짓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황제는 갓 쉰 살이 되어 있었다.
동시대인도 아우렐리아누스에 이어 프로부스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이들 두 황제의 죽음은 제국이 이제 완전히 운명에 휘둘리게 되었다는 증거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죽음과 프로부스 황제의 죽음은 이 시기에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거리가 한도를 넘어 지나치게 단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실력주의는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동격이었던 사람이 오늘부터는 나한테 명령을 내리는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사려 분별이 요구되지만, 그런 합리적 정신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카루스 황제 (282~283년 재위)
프로부스 황제가 죽은 뒤, 군대는 이제 다음 황제에 대해 원로원의 의향을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위 장교들의 회의에서 다음 황제로 결정된 사람은 황제의 오른팔인 근위대장으로 58세인 카루스(Marcus Numerius Carus)였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라인강변의 쾰른에서 신병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카루스는 도나우강변의 시르미움으로 달려와 제위를 받았다.
282년 초가을에 누구를 차기 황제로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시르미움에 모인 고위 장교들은 아마 정책 변경도 의논했을 것이다. 프로부스가 살해되었을 때, 칼 대신 괭이를 드는 데 불만을 품은 병사가 소수나마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고위 장교들은 그 움직임이 로마군 전체에 퍼지는 것을 우려했다. 새 황제 카루스도 동감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2)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기로 결정한 첫 번째 이유는 선제 프로부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치욕을 씻는다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 시기의 페르시아 왕국은 로마군이 겁낼 필요가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샤푸르 황제를 이은 왕들의 역량이 떨어진데다 그들 사이의 내분까지 일어난 상황이라 283년 봄부터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로마군의 연전연승으로 진행되었다. 로마군이 강했다기보다 페르시아의 요격 체제가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승리는 승리다.
크테시폰도 시간과 노력을 별로 들이지 않고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 왕실도 고관들도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군은 석 달도 지나기 전에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공략한 셈이다. 이제 로마군은 페르시아인을 그들의 탄생지인 페르시스, 오늘날의 이란의 남서부 지방으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카루스 황제 부자의 죽음
그런데 그해 늦여름의 어느 날 밤, 야영하고 있는 로마군을 사막의 우레가 덮쳤다. 변고는 그 와중에 일어났다. 황제용 막사는 다른 막사들에 비해 대형이고 높이도 높다. 거기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카루스 황제는 즉사했다.
벼락에 맞아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아들 누메리아누스를 에워싸고 북쪽으로 올라가던 로마군에 또다시 변고가 일어났다. 누메리아누스가 탄 마차가 숙박 예정지에 도착했는데, 누메리아누스가 마차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문을 연 사람들이 목도한 것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새 황제의 시체였다.
당장 범인 찾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의심은 누메리아누스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황제 전용 마차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던 아풀루스에게 쏠렸다. 아풀루스가 새 황제는 병에 걸려 누워 있으니까 마차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 책임자는 디오클레스라는 38세의 부대장이었다. 디오클레스가 칼을 빼어 아풀루스를 단칼에 죽이는 것으로 이 사건은 해결되었다.
284년으로 해가 바뀌어도 로마군끼리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카리누스 황제가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이제 황제를 자칭하는 사람은 디오클레스뿐이었다. 디오클레스는 이때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또다시 도나우강과 가까운 변경 태생의 로마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제3장 로마 제국과 기독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은 것은 33년 무렵으로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공인할 때까지, 즉 기독교가 탄생한 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될 때까지 왜 3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필요로 했는가.
네로 황제의 박해
서기 64년에 수도를 덮친 대화재의 책임을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에게 돌리려 했기 때문에 상당수 기독교도가 순교했다. 이 무렵 수도 로마에는 생전의 예수가 직접 후계자로 지명한 성 베드로도 머물고 있었고, 예수와 면식은 없었지만 초기 기독교회의 기반을 만든 성 바울까지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사람도 이 무렵 수도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뒤에 세워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베드로(이탈리아어로는 피에트로)가 순교한 땅에 세워져, ‘네 위에 교회를’이라는 예수의 말을 실현했다. 예수가 죽은 지 30년도 지나기 전에 팔레스티나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수도 로마에도 수백 명 규모의 기독교도가 있었고, 초기 기독교회의 1인자와 2인자까지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이 무렵의 기세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면 로마 제국은 훨씬 빨리 기독교에 물들지 않았을까. 그런데 실제로는 일이 그런 식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도 박해는 돌발사건이었던 것처럼, 그 후 오랫동안 기독교도를 겨냥한 탄압은 일어나지 않았다.
트리야누스 황제의 판정
로마 역사에 ‘Christianus’(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라는 표현을 처음 등장시킨 사람은 네로 황제의 학살을 서술한 타키투스지만, 그 표현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였다.
111년부터 1년 동안 소아시아 북서부의 비티니아 속주에 총독으로 파견된 소(小)플리니우스가 수도에 있는 황제에게 기독교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으냐고 물었고, 거기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답장에 그 말이 나온다.
이때 트라야누스가 내린 판정이 2세기만이 아니라 3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년 동안 로마 황제들의 판정을 규제하는 ‘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도가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들을 색출해내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식으로 고발되어 자백한 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신앙을 버린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신들을 경배하는 마음을 명확히 보이고, 후회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명확해지면 과거가 어떻든 처벌을 면제해줄 만하다. 또한 익명 고발은 어떤 법적 가치도 없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 우리 시대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은 로마 제국을 사악하고 타락한 사회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런 국가에 의무를 다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나타날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레스 푸블리카’(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테러를 저지르는 따위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로마 제국을 붕괴시키려 하지는 않지만, 공직이나 병역을 피하는 형태로 소극적인 저항은 계속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 전체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운명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역대 황제들이 보기에 이것은 명백한 반국가적 행위다. 기독교도의 ‘죄’는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믿는 행위를 통해 반국가적인 조직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말한 ‘죄인’은 그런 뜻이었다.
트라야누스가 ‘굳이 색출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이 황제가 속주 출신이면서도 로마인의 전통적 종교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의 종교관은, 개인적으로는 무엇을 믿든 자유지만 다민족 국가인 로마를 정신적으로 통합하고 있는 ‘우리의 신들’을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기독교도에 대해서도 ‘정식 고발이 필요하다’고 말한 부분이다. 고발이 들어오면, 그것을 받아서 수사하는 것은 현대의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의 의무로 되어 있다. 입건할 것인지는 그다음 문제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태도는 법체계를 창립한 로마인을 구현하고 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가 내린 이 판정이 무려 200년 동안이나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 제국의 대처법으로 계속 통용된 것이다.
테르톨리아누스의 반론
하지만 트라야누스 시대로부터 100년이 넘게 지난 3세기에 한 기독교 사제가 그것을 물고 늘어졌다.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인 카르타고에서 근무하는 백인대장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에 기독교에 귀의한 테르툴리아누스가 『변명』(변증론, Apologeticum)이라는 저서에서 트라야누스에게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애매함이다. 기독교도 사냥은 하지 말라고 말해놓고, 죄가 명백하면 처벌하라고 말한다. 일부러 찾아다니며 색출하지는 말라고 말해놓고, 한편으로는 박해하라고 말한다. 기독교도의 존재를 무시하라고 권해놓고, 동시에 죽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법인가. 법을 만드는 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잖은가. 기독교도가 반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왜 끝까지 추적해서 잡지 않는가. 자기 이름을 밝힌 고발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수사도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면, 왜 기독교도는 모두 무죄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제국은 범죄 중에서도 특히 중죄인 국가반역죄에 대해서는 속주마다 담당관을 두고, 범인만이 아니라 공범자와 증인까지 모조리 찾아내는 것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도 에 대해서는 담당관이 자발적으로 찾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니까 해서는 안 되지만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명기한 고발장을 제출하면 그것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것은 기독교도를 고발하는 그 누군가의 판단에 죄의 유무를 맡긴다는 뜻이다.>
논리로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옳다. 트라야누스의 말은 논리적으로 애매하다. 하지만 인간 세계는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네모반듯해서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질을 갖는다. 온갖 다양한 인간이 모여 사는 데 필요한 규칙으로 로마인은 법을 만들었다. 종교도 정어리 대가리를 믿든 뭘 믿든 자유지만, 공동의 자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믿는 신을 받들자는 것이니까 '애매하다'고 규탄받아도 별수없다.
하지만 법률은 말하자면 톱니바퀴다. 다소 애매한 법률 적용은 많은 톱니바퀴가 동시에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돕는 윤활유다. 또한 트라야누스를 포함한 오현제 시대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대처가 조금 애매해도 상관없을 만큼 기독교도가 소수파였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라는 문제는 양쪽의 사고 방식 차이, 즉 문명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인 만큼, 고발이나 수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3세기에 기독교도가 증가한 이유
제국과 기독교 사이에 이런 논의가 오가게 된 3세기에는 기독교도의 수가 더욱 늘어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3세기에도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은 그리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또한 황제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그 탄압도 계속성을 잃어서, 일관되고 철저한 탄압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탄압의 비일관성과는 관계없이 신자가 계속 늘어났다면 그 요인은 무엇일까.
탐구는 두 명의 로마사 권위자의 의견을 검토하는 방법으로 진행하겠다. 그 두 사람은 에드워드 기번과 에릭 도즈다.
-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88.
- Eric R. Dodds, Pagan and Christian in an Age of Anxie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계몽주의 시대 사람인 기번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인을 들고 있다.
(1) 단호하게 일신교를 관철한 것.
(2) 영혼불멸로 상징되는 미래의 삶을 보장하는 교리를 세운 것.
(3) 초기 기독교회 지도자들이 일으켰다는 수많은 기적.
(4)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의 순수하고 금욕적인 생활방식.
(5) 규율과 단결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도 공동체가 날이 갈수록 독립된 사회를 구성고, 로마 제국 안에서 국가 속의 국가가 되어간 것.
그로부터 200년 뒤에 같은 주제에 도전한 도즈 교수는 기독교가 대두한 요인으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기독교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배타성. 기독교가 영혼을 구제받는 길로 기독교 이외의 어떤 선택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약점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불안으로 가득 찬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게는 생명력의 원천으로 보였다.
(2) 기독교는 누구한테나 열려 있었다는 점.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사회계층 사이의 차별을 무시했다.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도, 노예도, 추방된 자도, 범죄를 저지른 자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3세기에 들어오면 교회도 조직화하여 성직자 계급이 형성되어가지만, 그래도 그 계급제도 안에서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승진이 결정되었다.
(3)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 3세기의 로마인에게 현세는 매력을 잃었다. 로마인이라는 사실이 갖는 매력은 은 함유율이 계속 떨어지는 은화처럼 평가절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현세에 비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는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로 보였을 것이다.
(4)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현실 생활에서도 이익을 가져다준 점. 기독교도 집단은 다른 종교 집단, 예를 들면 이집트에 기원을 둔 이시스교나 아시아에 서 생겨난 미트라교에 비해 처음부터 말 그대로 '공동체'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 집단 구성원이 함께 한 일은 종교 의식만이 아니다. 사고방식부터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같은 신도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기독교도의 대처
기독교가 대두한 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에 양보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회가 로마 제국에 양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내 가설은 다음 네 가지 사항에 대한 기독교의 대처를 바탕으로 세운 추론이다.
(1) 우상 숭배 : 초기 기독교도들이 살고 있던 세계는 인간의 형체를 갖고 있는 아름답고 건강한 그리스-로마의 신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과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의 승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은, 우상이라고 부르든 말든 성상 숭배를 인정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할례 : 기독교에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한 것은 로마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을 게 분명하다. 로마인은 옛날부터 할례를 혐오했다. 유대 민족에 대한 경멸감의 절반은 바로 할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독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 의식을 생각해낸 사람은 천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3) 제국의 공직과 병역 : 성 바울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몸에도 많은 부분이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하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인 이상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을 잘하는 사람은 행정관, 가르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교사,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설교사를 하면 된다.>
또한 성 바울은 '권위에 대한 의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자는 모두 윗사람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가르침은 신 이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는 신의 지시에 따라 권위가 된 것이다. 그런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현세의 모든 권위 위에 군림하는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도라도 로마 제국 공직에 취임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식이면 로마 제국도 전혀 껄끄러울 일이 없을 것 같다. 로마 제국의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도의 생활방식에 비해 기독교회는 너무나 유연하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병사들이 유대 왕의 병사이면서 기독교도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 답했다.
"왕이 지불하는 봉급에 만족하라. 또한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포학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군대 안에서의 승진도 동료를 중상모략한 결과여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에도 사도행전에도 로마군 병사라는 이유만으로 비난 대상이 된 예는 없다. 그러기는커녕 규율을 지키는 로마군 병사의 생활방식은 칭찬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도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기독교 쪽에서 보아 서기 1세기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로마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안정기로 접어든 2세기에도 제국의 공직과 군단에 기독교 세력이 눈에 띄게 침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회 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성 바울이 준 지침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고, 몬타누스파라고 불린 급진파는 로마 제국의 공직이나 병역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급진파의 세력이 특히 강해진 시기는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였던 시기이다.
하지만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기독교회의 온건파와 급진파의 다툼도 온건파의 결정적인 반격으로 결판이 난 모양이다. 어쩌면 기독교 성직자를 겨냥한 데키우스 황제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탄압으로 급진파 지도자급이 전멸했는지도 모른다.
(4) 회색지대 : 로마와 기독교의 경계가 흑과 백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기독교의 양보로 '회색지대'가 사이에 끼어 있었다는 점이다. '백'에 이어지는 것이 '백'에 한없이 가까운 연회색이고, 그 회색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진해져서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새 '흑' 부분에 들어가 있었다면, 선을 넘을 때 느끼는 저항감도 한없이 약해질 것이다. 3세기의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대(大)플리니우스는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 피라미드는 볼만하지만 파라오 한 사람의 내세를 위해 만들어진 반면, 우리 로마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현세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 시대의 로마인에게 '정체성 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3세기에는 답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답을 찾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으로 달려가도, 그것은 지식인의 자기만족일 뿐 널리 일반인들까지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은 되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직면해 있는 것은 사후나 장래에 대한 불안보다 지금 현재 눈앞에 있는 결핍과 불안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승리한 원인은 실제로는 로마가 삶에 활력을 주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로마의 신들과 기독교의 신의 차이
이탈리아어에 ‘콜포 디 그라치아’(colpo di grazia)라는 표현이 있다. ‘치명적인 타격’이라는 뜻인데,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항쟁에서 치명적인 타격은 로마의 신들과 기독교의 신이 가진 성질의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에게 살아갈 길을 지시하는 신이다. 반면에 로마의 신들은 살아갈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인간을 옆에서 도와주는 존재다. 하지만 이 차이가 자신의 생활방식에 대해 확신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3세기의 로마는 패배할 때가 많아졌고, 승리해도 '적이 쳐들어온 뒤에야 반격하여 이기게' 되어버렸다. 그 결과 번영에도 분명히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온다. 이렇게 되자 로마인들은 신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기독교의 신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모두 신의 뜻이다. 야만족의 살육도, 그들에게 가축처럼 끌려가는 것도, 전염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것도, 가난 때문에 겪는 고통도, 죽음까지도 모두 신이 바라신 일이다. 아니, 신이 인간에게 주는 시련이다. 따라서 고통은 인간을 정화한다고 여겨졌다.
제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황제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도를 탄압했다. 그것은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는 것은 곤 로마 제국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독교도는 로마 제국을 ‘타도’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제국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국 탈취는 착실히 진행된다. 어쨌든 로마 제국이 계속 약해지고 피폐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 주교의 편지
끝으로, 카르타고 주교를 지낼 때 순교하여 성인이 된 키프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친구 데메트리아누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권을 끝내고자 한다.
<자네는 말하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불안에 빠뜨리는 많은 불행은 기독교도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우리 기독교도가 자네들의 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신성한 우리 경전을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래서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자네도 로마는 이제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전에는 대지를 단단히 딛고 서 있던 튼튼한 발도 이제는 늙어서 자신의 몸무게도 지탱하지 못하고 있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것을 명시하지 않았다 해도, 성서가 진실을 증언하지 않았다 해도, 제국의 일몰과 쇠망은 이제 누가 보아도 분명할 걸세. 겨울에도 땅에 뿌린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에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네. 여름이 되어도 태양이 옛날처럼 뜨겁게 내리쬐지 않기 때문에, 밀은 황금빛으로 변하지 않고 수확도 할 수 없네. 봄에도 농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따뜻한 날이 드물어졌네. 가을에도 가지가 휠 정도로 과일이 열리는 나무를 보기가 힘들어졌네.
채석장에서도 옛날처럼 아름다운 대리석이 나오지 않게 되었네. 광맥도 끊어졌는지, 금과 은의 산출량이 줄어들고 있네. 수원지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의 양도 계속 줄어들 뿐일세.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고, 상선이 바다를 오가는 것도 신기한 풍경이 되어버렸네. 군단기지에서는 병사의 모습이 줄어들고, 포룸 건물은 있지만 거기에서 열리는 재판을 방청하러 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따뜻한 분위기도, 뛰어난 예술적 기량도, 평소의 관습을 다스리는 질서도 모두 다 옛날 같지 않게 되어버렸네. 제국은 늙어가고 있네. 제국이 젊고 활력에 넘쳤던 시대와 같은 든든함을 이 늙어가는 제국에 아직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종말이 다가오면 무엇이든 약해지는 법일세. 일몰이 다가오면 햇빛도 약해지고, 아침이 다가오면 달빛도 약해지지.
이것이 세상의 이치일세. 이것이 신의 섭리일세.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것은 죽을 운명일세. 성숙한 뒤에는 노화가, 늙은 뒤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네. 강력했던 국가도 약해지고, 거대했던 것도 작아지네. 약해지고 작아지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것일세.>
친구 데메트리아누스가 이 편지를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어떤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관철하고 죽는다. 노화하는 국가인 로마 제국도 온몸의 피를 기독교라는 새로운 피로 바꿔 넣으면 젊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을까.
<1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