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세기에 시작하여 기원후 5세기에 끝나는 것이 로마사라는 역사관에서 보면, 로마의 전체 역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왕정 -> 공화정 -> 제정 초기·중기(원수정) -> 제정 후기(절대군주정) -> 말기
로마인 이야기 제13권 『최후의 노력』에서 다루는 것은 역사상으로는 ‘제정 후기’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시기, 서기 28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시작한, 원수정에서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한 시기의 로마 제국이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했는가.
그 실태는 어떤 것이었는가.
어떤 점이 원수정과 다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
제1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
(서기 284년~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출처 나무위키] 혼미에서 탈출
이 인물이 서기 284년에 황제가 되어 로마식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라고 이름을 바꾼 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전에 ‘디오클레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변사한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대장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밖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태어난 곳은 245년 무렵에 아드리아해 동쪽 연안,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인 스플리트 부근이라고 한다. 부모 이름도 알 수 없고, 농장에서 일하던 해방노예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게다가 한 번도 전쟁에서 뚜렷한 공을 세운 형적이 보이지 않는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선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평소에는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사령관이나 지휘관에게 눈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번에 황제가 변사한 비상사태에 병사들이 선택한 것은 후방을 담당하는 관료인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평소 그의 수완이 병사들 사이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284년에 로마 황제가 시급히 대처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안전보장. 둘째는 제국의 구조개혁.
제국의 상황
우선 동방의 대국 페르시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카루스 황제가 죽기 전에 로마군이 이미 페르시아군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도 쉽사리 반격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도 당분간은 이 문제를 보류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절대로 미룰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리메스) 너머에 사는 야만족이다. 북유럽의 여러 야만족들은 로마군의 주력이 동방에 집결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방비가 허술해진 제국 서방을 침범할 기회라고 판단하고, 그 판단을 재빨리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제국의 남쪽 변방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일대에서도 사막 민족의 습격에 진지하게 대처할 필요가 생겼다. 남쪽의 사막 민족들은 아직 이 시대에는 로마 영토로 쳐들어와서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정착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상례가 되면 그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된다. 겁에 질린 주민은 안전한 도시로 흘러든다. 지방 인구는 줄어들고 도시 인구는 늘어나는 지방 과소화와 도시 과밀화의 시작이다.
게다가 3세기 말의 로마 제국은 제국 내부에 횡행하는 ‘도적’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할 필요도 있었다. 특히 갈리아 속주에서는 도적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멋대로 날뛰었고, 도버 해협을 경비하는 군용 선단을 빼앗아 브리타니아 속주까지 폭력 행위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양두 정치’ (286년~292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황제가 되기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하나 있었다. 도나우강 근처의 시르미움(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차)에서 태어났다니까, 이 사람도 3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의 제위를 독차지한 발칸 지방 출신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다른 황제들처럼 사회적으로는 하층계급 출신이고, 군단에서 잔다리를 밟아 출세했다는 점에서도 그도 황제가 될 자격은 충분했다. 이름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나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다섯 살쯤 아래였던 모양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마음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반면, 막시미아누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드러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그의 군사적 재능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 강하다. 즉 싸우면 이긴다. 따라서 병사들에게도 절대적인 인기가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흔 살이 될까말까 한 나이에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앉았다. 보통사람이라면 갓 손에 넣은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을 재빨리 남에게 나누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렇게 했다. 같은 해 가을에 벌써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에 임명한 것이다. ‘양두정치’(兩頭政治, diarchia)의 시작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원한 것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아니라 황제인 자신의 오른팔을 맡아줄 인재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섯 살 아래인 친구에게 준 것은 황제와 거의 대등한 권력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고 제국 서방이 직면해 있는 문제의 해결을 일임했다. 그리고 자신은 동방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여기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286년 4월 1일,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즉 ‘황제’로 승격시킨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지 2년도 지나지 않았다. 막시미아누스의 황제 승격은 병사들이 추대한 결과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혼자서 결정한 일이다.
막시미아누스의 활약
우선 막시미아누스가 담당한 서방을 살펴보면, 전쟁터에서 더욱 생기를 띠는 인물인 만큼 전선은 바뀌어도 전술은 계속 적극전법으로 일관했다. 라인강을 건너 서쪽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와 있던 프랑크족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라인강 동쪽까지 쳐들어가서 이 북방 야만족 중에서도 유력한 부족의 본거지를 파괴하고 불태웠다. 이리하여 배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상황이 되자, 갈리아 전역을 휩쓸고 다니던 도적떼를 소탕했다.
겨우 갈리아를 도적 집단에서 해방시킨 막시미아누스는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이동한다. 도적단의 일부는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도망쳤지만, 브리타니아의 질서 회복보다 북아프리카의 질서 회복이 선결 문제였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는 제국 중심부와 가까웠지만 브리타니아는 멀었다.
제국의 중요한 지역인데도 북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카르타고가 패배한 뒤 무려 450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군단을 이끌고 행동하는 황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시미아누스가 군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간 것은 오랫동안 1개 군단만으로 방위해온 북아프리카에도 황제가 직접 나설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역시 시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역시 로마군이 황제를 앞세워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다. 사막 민족을 사막 저편으로 쫓아보내는 전투는 갈리아 전역에서 도적떼를 완전히 소탕한 것보다 짧은 기간에 끝난 모양이다. 로마 제국 서방을 담당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일단 임무를 완수했다.
[베두인족 전사들 출처 구글 이미지] 동방의 평정
동방에서도 도나우 방위선을 돌파하여 쳐들어오는 야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어느 전선에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쟁터에 나가 전투를 진두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자신은 후방에 있고, 실제 지휘는 휘하의 장수들에게 맡겼을 것이다. 도나우강은 방위선 자체가 길다. 그 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대거 남하해오는 북방 야만족을 도나우강 북쪽으로 쫓아내는 데 2년은 걸린 모양이다.
이 문제를 처리하자마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으로 간다. 수비에 필요한 병력만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이끌고 갔다. 목적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끼여 있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린 넓은 지방의 북부를 페르시아 왕에게 양도받는 것이었다.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인강과 도나우강과 더불어 로마의 가장 중요한 방위선인 유프라테스강 방위선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것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페르시아 왕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로마에 양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지방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위에 친로마파인 티리다테스 3세를 앉히는 데에도 성공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 방면의 방위선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288년이었다.
수도 로마의 원로원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페르시아를 제압한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persicus maximus’라는 존칭을 주기로 결의했다. 전투는 전혀 치르지 않고 거둔 성공이지만, 아직 로마 원로원에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기회에도 수도를 방문하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그는 한 번도 로마에 가지 않았다.
290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군대는 다시 동방으로 이동한다. 이번 동방행의 목적은 로마 제국 영토인 시리아에 출몰하기 시작한 사라센 도적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사라센 소탕작전은 곧 끝났는지, 이듬해인 291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다. 관광도 아니고 시찰여행도 아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습격해오는 원주민을 로마 정규군을 동원하여 격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도 짧은 기간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이듬해인 292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나우 방위선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도나우강을 건너 남하해온 북방 야만족인 사르마티아족을 격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286년부터 292년까지 7년 동안 두 황제는 이런 식으로 전쟁터를 전전했다. 이 7년 동안 두 황제는 289년에서 29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에서 단 한 번 며칠을 같이 보냈을 뿐이었다.
이 7년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헤아리면 8년 동안, 당면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 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두 황제가 분담 통치하는 ‘양두정치’ 체제의 효용성을 실증한 셈이다. 하지만 47세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사두 정치’의 시작 (293년)
293년 5월 1일,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소아시아 서부의 니코메디아와 막시미아누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역사에서 ‘사두정치’(四頭政治, tetrarchia)라고 불리는 사분(四分) 통치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각자 ‘카이사르’를 한 명씩 임명한다. 제국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가 임명한 ‘카이사르’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였다. 이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제국 동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임명한 ‘카이사르’는 갈레리우스(Galerius)였다. 이 사람은 260년 무렵에 태어났다니까,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우선 네 사람이 모두 로마 군단에서 경력을 쌓은 ‘군인’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이 모두 도나우강에서 아드리아해 사이, 후세에 발칸이라고 불린 지방 출신이다. 발칸 지방은 당시에는 정예 군인의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모두 농민의 자식이라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사두정치’가 실시된 해인 293년에 네 사람의 나이는 기록이 불확실해서 ‘안팎’이라는 단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대충 다음과 같았다.
- 제국 동방을 담당하는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48세 / ‘부제’ 갈레리우스33세.
- 제국 서방을 담당하는 ‘정제’ 막시미아누스43세 /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43세
‘사두정치’ 체제로 이행한 뒤에도 ‘시니어’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우세한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제국을 넷으로 분할한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각자 담당 구역의 방위를 책임지는 것이니까, 네 사람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다. 계급은 확실해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니오르(senior) 아우구스투스’로 가장 높고, 그 밑에 ‘유니오르(junior) 아우구스투스’가 있고, 그 밑에 두 ‘부제’(카이사르)가 있는 형태가 된다.
네 황제가 모두 제국의 방위선에 가깝거나 가깝지는 않더라도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수도를 두었다. 이것은 ‘사두정치’가 제국의 방위를 가장 큰 목적으로 안출된 체제임을 증명한다. 네 사람이 각자 책임 구역을 명확히 하여 넷이 함께 로마 제국을 방위한다는 생각이다. 군사는 네 사람이 분담하지만,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정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혼자 결정한다고 해석해도 좋다. 아니,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사두정치와 로마 제국 방위체제의 변화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와 제국이 반드시 동의어는 아니다. 정체 체제와 관계없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할 때 ‘제국’이라고 부른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도 대국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지중해를 ‘우리 바다’나 ‘내해’라고 부른 기원전 2세기부터는 자기네 나라를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 기원전 2세기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를 실시한 서기 4세기 초까지 로마의 방위체제 변화를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왜 이렇게까지 방위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속주의 하층계급 출신이라도 제위에 오른 뒤에는 로마의 역대 황제들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우두머리인 황제의 가장 큰 책무는 제국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장할 수 없는 국가는 이미 국가가 아니고, 황제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다.
‘사두정치'는 당시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본원적인 명제를 염두에 두고 고안해 낸 체제였다. 그리고 이 과제 해결에서는 '사두정치'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다. 황제는 네 명 모두 전방인 방위선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적을 엄중히 감시했다. 이것이 '사두' 체제의 특징이었고, 이 전략의 효과는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3세기의 로마인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야만족이 대규모로 국내 깊숙이 쳐들어온 데에서 비롯된 참상이었지만, 이제 그런 참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역사 연구자들 중에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부활하고 부흥”했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콘스탄티우스의 활약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를 담당한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역시 수도로 정한 트리어에 느긋하게 앉아 있지 않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본나’(오늘날의 본)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모곤티아쿰’(오늘날의 마인츠)에 이른다. 남동쪽으로 가면 ‘아르젠토라테’(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에 이르고, 서쪽으로도 로마 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랭스와 아미앵을 지나 도버 해협에 다다를 수 있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처 구글 이미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이 거리를 자주 왕래했다. 게다가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까지 야만족이나 도적떼를 소탕하러 가야 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부제가 된 뒤 북쪽과 동쪽과 서쪽으로 뛰어다니는 동안 12년이 지나가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그가 이처럼 바쁘게 뛰어다녔기 때문에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도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종횡무진 활약 덕분에 제국 서방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는 비교적 평온하게 지냈다.
갈레리우스
제국 동방의 부제인 갈레리우스는 네 황제 가운데 가장 젊었던 만큼 제국 방위의 생명선이자 가장 지키기 어려운 도나우 방위선을 맡고 있었다. 그는 부제에 취임한 뒤 2년을 여기에 소비했다. 그런데 겨우 2년 만에 그 길고 어려운 방위선인 도나우강으로 야만족이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갈레리우스의 군사적 능력은 대단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부제의 활약을 모른 체하고 니코메디아의 황궁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리아에도 가고 이집트에도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구조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이 일을 할 권리는 그 혼자만 갖고 있었다. 걱정거리는 되도록 빨리 줄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언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페르시아 전쟁
296년, 왕이 몸소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북상하여 로마 제국 영토인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 왕위에서 친로마파인 왕 티리다테스(3세)를 몰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로마 제국 동방오늘날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방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방위 책임을 지고 있다. 그 지방에 적이 쳐들어오면 그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작전본부를 전진시켜놓고, 도나우 방위선을 담당하는 갈레리우스를 불러들여 지휘를 맡겼다.
첫번째 전투에서의 패배 (296년)
그런데 여기서 30대 후반에 접어든 젊은 나이가 기대를 배반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다리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갈레리우스는 치밀한 준비도 하지 않고 근처에 주둔해 있던 병력만 이끌고 재빨리 출정했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뒤에도 행군 속도를 늦추지 않고, 페르시아군이 침공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직행했다. 그리고 거기서 페르시아 왕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부제 갈레리우스는 얼마 전에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티리다테스왕과 합류하여 로마군의 전통적 방식인 다국적군을 편성하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전쟁터 선택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페르시아 왕과 싸우는데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펼쳐져 있는 사막지대를 전쟁터로 고른 것이다.
그래도 첫 번째 전투와 두 번째 전투는 승부가 나지 않은 상태로 끝났다. 세 번째 전투에서 갈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전쟁터가 유프라테스강과 가까웠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페르시아 기병에 포위된 티리다테스는 말에 탄 채 강물에 뛰어들어 강을 건넌 뒤, 그 길로 안티오키아까지 내달렸다. 갈레리우스는 이런 위험을 겪지는 않았지만, 전투에 패배하고 후퇴하는 군대의 장수가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전투에서의 설욕 (297년)
하지만 51세의 정제는 36세의 부제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설욕할 기회는 이듬해인 297년 봄으로 결정되었다. 이번만은 갈레리우스도 신중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나우 방위선에서 지휘한 3개 군단을 불러들였다. 게다가 야만족을 무찌른 뒤 부하로 삼은 고트족 기병대까지 불러들였다.
또한 전략도 바꾸었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뒤에도 계속 동쪽으로 직행하여 사막지대를 전쟁터로 삼지 않고, 유프라테스강을 더 상류에서 건넌 다음 산지를 따라 적에게 접근하는 우회로를 택하기로 했다. 갈레리우스는 또 다른 전법도 겸용할 작정이었다. 해가 진 뒤에는 싸우지 않는 습관을 가진 페르시아군을 밤중에 습격하는 것이다. 로마군에는 야습에 익숙한 고트족 기병대가 있다.
불타는 횃불이 둥글게 늘어선 가운데 병사들에게 끌려나온 여자들과 아이들 앞에서 갈레리우스는 600년 전 페르시아 왕에게 승리했을 때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갈레리우스는 포로 신세가 된 페르시아 왕비를 비롯한 여자들과 왕자와 왕녀들한테 신변 안전과 신분에 어울리는 대우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갈레리우스는 우선 안티오키아에서 기다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승리를 보고한 뒤, 정제가 직접 나서달라고 청할 수 있는 상태를 회복했으니까 니시비스(현 튀르키예의 누사이빈(Nusaybin))까지 와달라고 청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니시비스에 도착하여 페르시아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현 튀르키예 누사이빈 출처 구글 이미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4중 방위선
물론 페르시아 왕이 쫓아낸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3세)의 왕위 복귀도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1) 니시비스와 그 남쪽의 싱가라를 최전선으로 하고 거기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페르시아가 로마에 정식으로 양도한다.
(2) 티그리스강 동쪽에 있는 5개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로마에 양도한다.
페르시아 왕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포로 신세가 되었던 왕비와 후궁들과 왕녀들은 반지 하나 빼앗기지 않고 왕에게 돌아갔다.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 3세 출처 구글 이미지] 297년의 이 강화조약으로 이루어진 두 강대국의 평화는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깨지지 않고 4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로마가 새로 얻은 지역이 방위 전략상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승리에 들떠 우쭐대지 않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 지역의 방위체제를 강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싱가라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1차 방위선, 니시비스에서의 2차 방위선, 사모사타에서 카라이에 이르는 3차 방위선, 제우그마에서의 4차 방위선을 합하여 4중의 방위선으로 지켜지게 되었다. 제국 동방의 요충인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공격하려면 적은 이 4개의 방위선을 모두 돌파해야 했다.
또한 제국 동방에서 실시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방위체제 재편성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은 줄곤 로마 제국 영토여서 로마 가도망이 깔려 있었는데, 이 가도망에서 페르시아가 있는 동쪽으로 가는 가도를 모두 방위선으로 만들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견고하게 바뀌었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가도 연변에는 요새와 감시탑과 보루가 염주처럼 늘어셨다.
하지만 로마 제국 동방의 주민도 페르시아인도 동서교역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기 때문에 요새와 감시탑의 역할은 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상인의 왕래는 허용하면서 적의 내습을 재빨리 탐지하여 후방의 군단 기지에 알리는 것이었다. 라틴어에서 도로를 의미하는 낱말은 그때까지는 '비아'(via)뿐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유프라테스강으로 가는 도로가 '비아 하드리아나'에서 '스트라타 디오클레티아나'로 명칭이 바뀐다.
이제 페르시아군이나 북방 야만족이 로마 깊숙이 쳐들어와 멋대로 날뛰는 일이나 황제가 차례로 살해되면서 정세가 불안해지는 상황은 없어졌다. 에드워드 기번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질 게 분명하다.
“무능한 지도자와 야만족의 침략으로 곤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국을 구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리리아 지방 출신 농민들이 그 일을 해냈다.”
병력 증강과 문제점
정확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시기에 네 황제가 항상 8만 명 안팎의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고, 로마 제국의 전체 병력이 30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나 있었다고 한다.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친 30만 명은 방위선에 붙박이로 배치되어 있었다. 제국의 국경이기도 한 방위선에 새로운 병력이 투입되어 방위력이 증강되었다는 사료는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만 명은 네 황제의 직속 부대가 된 게 아닐까.
네 곳이 모두 전선기지라 해도 좋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7~8만 명의 병사가 항상 대기하고 있을 이유는 충분했을 것이다. 과거의 비상사태는 이제 정상 상태가 되었다. 북방 야만족의 대규모 침입도 없어지고, 동쪽의 대국 페르시아까지 억누르게 되었을 만큼 로마 제국이 방위력을 회복한 것은 무엇보다도 병력 증강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기 로마군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많은 연구자가 이 시대 이후의 로마 제국을 평가할 때 ‘로마군의 야만족화’나 ‘로마 제국의 야만족화’라는 표현을 쓴다. 당시 로마군이 기병을 주전력으로 삼게 되어 야만족화됐고, 로마 제국도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이 분리되어 야만족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실정을 잘못 볼 위험이 있다.
진짜 문제는 야만족이 로마화할 의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로마 제국 자체도 로마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패배자 동화 노선을 착실히 추진하여 융성했지만, 300년이 지난 3세기 말, 그 노선은 오히려 쇠퇴의 요인이 된다. 이제 패배자는 로마에 동화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아무리 높아도 기병만으로 성립할 수 없는 조직이다. 그리고 로마 제국 후기에도 잃은 땅을 되찾는 것은 기병만으로 할 수 있었지만 그 땅을 계속 유지하려면 보병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다면 우수한 보병은 어디에서 조달할까. 그것은 뻔하다. 방위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군단 기지밖에 없다. 역대 황제들은 이 보병들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네 황제가 군단 기지에서 정예 병력을 빼낼 때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로마 군단병은 17세부터 45세까지가 현역이었다. 네 황제가 빼낸 것은 30대를 중심으로 한 건장한 병사였고, 모두 우수한 정예 병력이었을 게 분명하다. 로마군 병사는 30만 명에서 갑절인 6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국경인 ‘방위선’을 지키는 전력의 약체화라는 희생을 수반한 ‘증강’이었다.
게다가 이 흐름은 또 다른 요인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것은 경쟁 관계에서 생겨나는 각 황제의 세력권 의식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맡긴 것이 오히려 예외였다. ‘사두정치’가 기능을 발휘한 12년 동안 두 황제가 힘을 합쳐 싸운 예는 이 페르시아 전쟁뿐이다. 자기 관할 구역에 다른 황제가 개입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남의 관할 구역에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라도 존재했나 싶을 정도다.
‘사두정치’가 초래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네 사람의 관할 구역 사이에 벽이라도 세운 것처럼 이 유동성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서로 융통해주는 체제가 없어지면 자기 휘하의 군사력을 증강할 수밖에 없다. 300년 동안이나 거의 바뀌지 않은 로마군 병사의 수가 겨우 10년 사이에 갑절로 늘어난 것은 책임 분할로 일어난 ‘관료체제화’에도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 개조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는 것으로 시작된 로마 제정을 역사에서는 ‘원수정’이라고 불러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절대군주정’과 구별한다. 라틴어의 ‘프린켑스’(Princeps)를 ‘원수’라고 번역했지만, 원래의 뜻은 ‘로마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일 뿐 국가 로마의 주권자라는 의미는 없다. ‘S.P.Q.R.’는 로마를 나타내는 약어인데, 이것은 ‘로마 원로원 및 시민’이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바로 국가 로마의 주권자다.
왕도 집정관도 황제도 오늘날의 국회와 비슷한 ‘로마 원로원’(Senatus Romanus)과 오늘날의 국민에 해당하는 ‘로마 시민’(Civis Romanus)이라는 주권자에게서 통치를 위임받은 존재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대관식은 여전히 없었지만, 보석을 아로새긴 ‘디아데마’라는 호화로운 관이 황제의 머리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로마에서는 이것을 오리엔트 전제군주의 것으로 생각하여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을 맨 처음 머리 위에 쓴 사람은 디오클레티아누스라고 한다.
[디아데마를 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출처 구글 이미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가 될 마음이 없었고, 그러지 않는 편이 정치 안정에 이바지한다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로마군에서 청년기를 보냈는데, 그때는 군단 출신 황제가 연달아 배출된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였다. 그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 황제는 적극 전법을 구사하여 제국을 붕괴에서 구해낸 공로자들이다.
그런데도 아우렐리아누스는 5년, 프로부스는 6년밖에 다스리지 못하고 둘 다 정말 하찮은 이유로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불상사를 30세에서 37세까지 두 번이나 경험했다. 39세에 제위에 오른 그가 이 사건을 잊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3세기 후반에 살았던 이 사람은 제국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통치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병사들이 황제를 자기와 같은 시민으로 생각지 않고, 자기와는 전혀 다른 높이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고자 했다. 시민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이 노선의 기본 방침이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즉위한 뒤 무려 19년 동안이나 수도 로마를 방문하지 않았다.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바빴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밀라노에는 갔으면서 아이밀리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로마에는 행차하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이제 명색뿐인 주권자지만 로마 제국의 전통적 주권자인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둘 다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03년 11월 20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새로운 땅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 브리타니아, 라인강, 도나우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등의 방위선을 굳게 지킨 것을 축하하는 개선식이다. 이것이 수도 로마를 무대로 한 마지막 개선식이 되었다. 그 후로는 로마 황제들이 승리에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이 흐름과 보조를 맞추듯 로마도 제국의 수도 역할에서 멀어져간다.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즉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에서는 본국과 속주가 구별되어 있었지만,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그 차별이 철폐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3세기 초에 ‘카라칼라 칙령’으로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이 주어진 뒤로는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차별이 철폐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미 기정사실이 된 이 상태를 국법으로 정하여 공식화했다.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의 구별도 사라졌다. 그런데 원수정 시대에 문무의 경력 사이에 작용한 이런 유동성도 3세기 후반부터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갈리에누스 황제가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원로원 의원이 취임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제 군사 전문가이기만 하면 방위선을 지키는 ‘황제 속주’의 총독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방위선’이 무너지고 적이 제국 깊숙이 쳐들어오는 일이 잦았던 3세기 후반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원수정 시대에는 안전하고 쾌적한 임지로 여겨진 ‘원로원 속주’도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즉 ‘원로원 속주’를 방위하는 책임도 군사 전문가에게 맡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위기의 3세기를 경험함으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행한 제국 재편성의 밑바탕은 벌써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관료 대국
‘사두정치’라 해도 제국을 넷으로 분할할 의도는 없으니까 네 황제 사이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그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각 황제가 본거지로 삼은 수도의 위치를 보면 ‘사두정치’가 무엇보다도 제국의 방위를 최우선 목적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행정에만 종사할 사람이 따로 필요해진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각 황제의 담당 구역을 다시 ‘디오케시’(diocesi: 관구)로 나누고, 황제 대리를 의미하는 ‘비카리우스’(vicarius)가 각각의 관구를 다스리도록 행정조직을 개편했다. 하지만 앞의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인구가 적었던 1,700년 전이라 해도 ‘황제 대리’가 맡는 지역이 너무 넓다. 그래서 ‘디오케시’를 다시 ‘프로빙키아’로 세분했다.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과 ‘사두정치’ 이후 시대의 로마 제국을 조직면에서 비교하면 아래 그림들과 같다. 얼핏 보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편성한 후기의 로마 제국이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원수정 로마보다 조직체로서 더욱 질서정연하고, 따라서 합리적인 것처 럼 보인다. 그렇다면 기능도 당연히 향상되었어야 한다.
[출처 본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편한 4세기 이후의 로마 제국이 조직체로서는 더 진화한 것이 분명한데, 왜 150년 뒤에 찾아올 멸망을 피하지 못했을까. 분할하고 세분화한 데 따른 기능성 향상이 밝은 면이라면, 어두운 면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첫째, 분할하고 세분화하면 오히려 각 분야마다 필요한 인원과 비용이 늘어난다. 이 시기부터는 제국의 국경인 방위선에 설치된 군단기지를 지키는 병사를 ‘리미타네이’(limitanei)라고 부르게 되었다. 방위선을 지키는 병사라는 뜻이거나 아니면 방위선을 지키는 것만으로 임무가 한정된 병사라는 뜻일 것이다. 원수정 시대에는 로마군의 주전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군단병’이 4세기에는 이런 꼴이 되었다.
한편 황제를 따라 적이 쳐들어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임무인 황제 직속 병사는 ‘팔라티니’(palatini)라고 불리게 된다. 황제가 가는 곳이면 반드시 수행하는 병사니까 ‘황궁병’이라는 뜻일 것이다. 원수정 시대라면 ‘근위군단병’이 할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종군해도 1만 명밖에 안된다. 그런데 ‘사두정치’ 시대에는 ‘황궁병’이 황제 1인당 7만 명이 넘었다. 황제가 네 명이니까 약 30만 명이다.
또한 각 황제가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수도’라고 불리게 된 곳도 네 곳으로 늘어났다. 트리어도 밀라노도 시르미움도 니코메디아도 모두 그 전부터 중요한 도시이기는 했다. 따라서 가도와 시내 도로, 교외 도로와 상하수도는 물론 로마인이 도시의 필수조건으로 생각한 공공광장과 공회당, 경기장, 원형투기장, 반원형극장, 공중목욕장 같은 설비도 이미 정비되어 있었다. 없는 것은 황궁뿐이었을 것이다.
네 황제는 네 도시를 수도화하는 작업에 저마다 열심히 매달렸지만, 그 비용은 ‘사두정치’가 완전히 기능을 발휘한 293년부터 305년까지로 시기를 한정한다 해도 제국의 재정을 압박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자’를 만드는 비용은 대단치 않아도, 그 ‘상자’에 들어갈 사람에게 드는 비용이 문제였다.
우선 중앙정부라고 할 수 있는 황궁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나 총리의 관저에 근무하는 사람이다. ‘사두정치’니까 이런 사람의 수와 비용도 네 배가 된다. 게다가 황제는 담당 구역의 안전보장 이외에 그 지방 전역의 행정도 맡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정기구에서 일하는 모든 ‘관료’들의 임명권도 황제가 장악했다.
게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을 말단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분리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써 거대화한 군대 기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한 관료 기구가 탄생했다.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이 분리되어 있으니까 두 기구 사이에는 인적 유동성이 없다. 원수정 시대처럼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을 번갈아 거치면서 제국을 짊어질 지도자로 성장해가는 엘리트상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세금 대국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 개조가 실시된 것은 3세기와 4세기에 걸친 10년도 채 안되는 기간이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을 덮친 전례없는 위기를 의미하는 ‘3세기의 위기’를 겪은 직후였다. 제국의 기축 통화인 데나리우스(은화)의 은 함유율이 5%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경제가 절망적인 피폐 상태에 빠졌을 때 제국 개조가 단행된 것이다. 재편성의 결과로 급증한 지출을 계속 줄어드는 수입으로 충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뒤 역대 황제들이 300년 동안 계승한 원수정 시대의 세금 철학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개조를 단행한 4세기 이후의 세금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야말로 180도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변혁이었다.
아우구스투스 - 세제납세자가 우선이다. 국가는 세입이 허용하는 범위의 것에만 손을 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 세제국가가 우선이다. 국가에 필요한 경비가 세금으로 납세자에게 부과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새로운 세제는 다음과 같은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1) 나라가 필요로 하는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 번씩 결정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된다.
(2) 세무는 모두 통합되고, 중앙정부가 그것을 관할한다.
(3) 세금은 생산 기반인 농경지에 부과되는 ‘토지세’(jugatio)와 생산 수단인 인간에게 부과되는 ‘인두세’(capitatio)로 양분되었고, 액수는 5년에 한 번씩 사정(査定)을 통해 결정된다.
생산 수단인 노동력에 매기는 세금은 14세부터 65세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65세는 평균수명을 넘어선 나이니까, 결국 죽을 때까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자도 인두세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시리아에서는 남녀가 평등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여자를 배제했고, 소아시아에서는 여자의 인두세가 남자의 절반으로 되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통화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화 개혁은 한마디로 말하면 300년 동안이나 로마 제국의 기축 통화였던 데나리우스 은화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지금은 은 함유율이 5%까지 떨어져버린 은화의 소재 가치를 네로 황제가 통화 유통량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단행한 개혁 당시로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네로의 통화 개혁 당시에는 1리브라(327그램)의 은으로 96개의 데나리우스 은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반면에 4세기 초의 시장에 넘쳐흐르던 데나리우스는 1리브라의 은으로 6천 개나 주조할 수 있는 ‘악화’였다.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기축 통화인 데나리우스 은화 가치를 되살리려면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첫째, 데나리우스 은화의 중량을 네로 황제의 개혁 이후의 정량 3.4그램으로 되돌린다.
둘째, 아우구스투스 황제 당시의 100% 순은으로 만든 데나리우스 은화를 다시 발행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렇게 대담한 데나리우스 부활안을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실행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좋은 은화를 ‘아르겐테우스’(Argenteus)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것이다. 액면 가치와 소재 가치가 일치하는 이 은화가 시장에 유통되면 로마 제국의 기축 통화인 은화가 신용을 회복하고, 그 신용이 떨어졌기 때문에 생긴 인플레이션도 진정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르겐테우스 은화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하여 은 함유율 5%의 데나리우스 은화는 폐지되고, 은 함유율은 그대로 5%지만 무게가 3배 가까이 늘어난 ‘폴리스’(Follis) 동화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새 은화는 발행되자마자 순식간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옛 은화와 새 동화는 계속 가치가 떨어졌다. 새 은화를 손에 넣은 사람은 그것을 내놓지 않는 반면에 옛 은화를 가진 사람은 되도록 빨리 새 은화로 바꾸려 했기 때문에 옛 은화의 가치가 더욱 떨어지게 된 것이다.
[지름 27밀리미터의 폴리스 동화 출처 구글 이미지] 통제 국가
전혀 진정되지 않는 인플레이션에 절망했는지, 통화 개혁을 단행한 지 6년이 지난 301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가격 통제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로마 제국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모든 물산과 용역의 상한가를 정하고, 그 이상의 액수로 거래한 자는 엄벌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시장이나 일상적인 상거래에서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는 현상이 풍년이 든 해에도 전혀 진정되지 않는 것은 돈벌이밖에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탐욕에 원인이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은 그다음에 열거되는 방대한 수의 직능별 통제 가격과 함께 오늘날에도 내용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칙령은 제국 전역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로마 제국 각지에서 발굴되는 대리석이나 동판에 새겨진 부분을 모으면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엄정하고 강경한 통제 경제가 왜 어느 시대에나 실패로 끝나는지는 전문가의 해설을 들을 수밖에 없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칙령이 로마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가장 큰 목적이었던 인플레이션 억제가 완전한 실패로 끝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1) 경제 활동이 지하화됐다.
(2) 물물교환형 경제가 무려 500년 만에 부활했다.
(3) 모든 분야에 걸쳐 노동의 질이 떨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농민의 이농으로 경작지가 황폐해지고 상점이나 공장에서 젊은이가 사라지는 현상이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문제에서도 역시 강경책을 취했다. 거의 모든 직업에 세습제가 시행되었다. 무슨 직업이든 아버지의 직업은 아들이 이어받아야 하고,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지방에 아들도 계속 살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방위선에 근무하는 병사는 농사를 지으면서 국경을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 그런 병사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원수정 시대에 만기 제대하는 병사는 현금이나 그에 상응하는 땅으로 퇴직금을 받았지만, 디오클레티 아누스 시대에는 농사일을 돕는 노동력인 아내와 자식에게 부과되는 인두세를 면제해주는 것으로 퇴직금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래서는 병사의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방위선을 지킬 사람이 줄어드는 것도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직업과 땅에 묶어두는 정책에서 병사만 예외로 취급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각 황제의 직속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병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계승해야 했 다. 이리하여 400년 동안 계속된 로마군의 지원제는 사실상 징병제로 바뀌었다.
상인의 아들도 수공업자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황제는 이들이 '콜레기움'(colleg ium)이라고 불리는 직능별 조합을 결성하도록 장려했지만, 목적으로 내세운 조합원의 상호부조는 명색일 뿐이고 본심은 세습제를 정착시키는 데 있었다. 이것은 중세 사회의 기둥이 된 길드 제도의 시초이기도 했다.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은 계급 사회였지만 그래도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지 이전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 간의 유동성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의 완전 분리로 그 유동성이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사라지고, 거주지를 옮길 자유마저 사라졌다. 어떤 연구자는 현대의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기독교
중앙정부와 그 중앙정부의 정점에 서 있는 황제에게 이렇게 권력이 집중되면 권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려면 절대적인 권위가 그것을 인정한 것으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기가 만들어낸 절대군주정이 배경으로 삼을 수 있는 권위를 신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 이전의 ‘양두정치’ 시절에 유피테르와 같은 의미의 요비우스를 자신의 별칭으로 삼고, 동료 황제인 막시미아누스에게는 반신인 헤르쿨레스를 별칭으로 삼게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로마의 신들도 절대 권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만 성공하면 된다. 장애물은 물론 로마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도였다.
이리하여 지속적이고 집요하며 조직적인, 그런 의미에서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기독교도 탄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도에게는 40년 동안 평온한 시절을 지낸 뒤에 느닷없이 찾아온 수난의 시기였다. 박해의 첫 물결이 된 칙령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제위 19년째인 303년에 공포되었다. 기독교도들이 ‘대탄압’이라고 부르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탄압은 그 해 2월 24일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공포된 칙령으로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담당하고 있는 동방에서는 기독교의 저항이 격렬했던 모양이다. 원래 서방보다 동방에 기독교가 많이 보급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수도로 삼은 니코메디아에서는 한 기독교도가 거리에 나붙은 칙령을 찢어버리고, 그리스도는 이긴다고 외치면서 광장을 뛰어다닌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남자는 당장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칙령이 나온 뒤 최초의 순교자였다.
일단 결단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얼마 지나기도 전에 두 번째 칙령을 공포했다. 다만 그것은 첫 번째 칙령처럼 시민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각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에게 내리는 훈령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 기독교 교회는 모두 토대부터 파괴한다. 교회로 쓰인 곳이 개인 주택의 일부라 해도 이 조치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2) 어떤 이유로도 신도들의 모임은 엄금된다. 미사에도 세례식에도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이 금령은 적용된다.
(3) 성서나 그와 비슷한 서적, 미사에 쓰이는 기구, 십자가, 그리스도상 등은 몰수하여 소각한다.
(4) 기독교도 중에서도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자는 심문을 받을 때 고문을 면제 받는 것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특전을 박탈당한다.
(5) 기독교도로 인정된 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비롯하여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는다.
(6) 신도의 기부 등을 통해 축적된 교회 재산은 몰수하여 경매에 부치고, 매상금은 교회 재산이 있었던 지방자치단체나 기독교도와는 무관한 직능 조합에 분배한다.
(7) 기독교도로 인정된 자는 모두 공직에서 추방한다.
두 번째 칙령이 겨냥한 것은 기독교회 조직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주교·사제·부제라는 성직자 계급이다.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은 이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투옥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곧이어 쐐기를 박듯 세 번째 칙령이 공포되었다. 역시 각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에게 보내는 훈령 형태를 취한 이 칙령에 따라 감옥에 갇혀 있는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적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강요당했다. 이것을 받아들인 자는 즉각 석방하고 거부하는 자는 즉각 사형에 처하라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명령했다.
303년 말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것도 역시 각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에게 내리는 훈령이었는데, 네 개의 칙령 중에서 가장 비로마적이고 가장 가혹한 내용이었다. 이제는 고발이 없어도 누가 기독교도인 것 같다는 소문만 나면 그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 고문하게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강요당했고, 거부하는 자는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해졌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단행한 '대박해'의 실상은 다음과 같은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첫째, 사형당한 사람은 소수이고, 성직자를 포함하여 그 이외에는 대부분 옥살이를 하거나 광산이나 건설공사 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둘째, 적지 않은 기독교도가 신앙을 버렸다
디오클레타니아누스 목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재위 20년과 개선식 거행을 기념하여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 거대한 공중목욕장 유적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활용한 것이 국립 테르메 미술관이다. 따라서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의 이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Thermae Diocletianae)이었다.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은 295년에 착공되어 305년에 완성되었다. 로마 시대의 건설 공사가 10년이나 걸린 것은 아주 드문 예지만, 워낙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목욕장이 건설될 때까지 최대 규모였던 카라칼라 목욕장은 수용 인원이 1,600명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은 3천 명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복원 모형 출처 구글 이미지] 황제가 지어서 시민 사회에 기증한 대규모 공중목욕장은 305년에 완성된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4세기 초까지만 해도 로마에는 재력과 기술력과 조직력이 여전히 건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겨우 100년 뒤에 재력도 기술력도 조직력도 갖지 않은 야만족이 이 로마를 습격하여 멋대로 약탈을 자행했다.
절대군주정을 수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는 일반 시민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알몸으로 서민과 어울리는 것은 논할 거리도 못 된다. 또한 303년에 개선식을 끝내자마자 니코메디아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붙인 목욕장이 완성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은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목욕장 준공식에 입회하기는커녕 목욕장이 완성된 305년에는 재빨리 은퇴해버렸다.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동료 황제인 막시미아누스까지 끌어들여 함께 퇴위한 것은 로마 제국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었다.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는 305년에는, 정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전처 자식이기는 하지만 친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30세, 이제 선제의 아들이 된 막센티우스도 27세에 이르러 있었다.
제2차 ‘사두정치’를 떠받칠 인사도 ‘사두정치’ 체제의 창시자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한 뒤, 동방과 서방의 부제가 정제로 승격한다. 문제는 새로 부제가 될 사람을 선정하는 것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의 부제로는 세베루스(Severus), 동방의 부제로는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를 선정했다.
제2차 ‘사두정치’에 부제로 임명된 두 사람 가운데 세베루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부제였을 때 그 밑에서 활약한 무장이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휘하의 장수로서 황제가 서방에 가 있는 동안에도 동방을 잘 지켜낸 공로자였다.
이 인선을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람을 고를 때 군사적 능력과 경험을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탁된 사람의 나이는 로마 시대에 국가 요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 연령이었던 30세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제의 친아들 콘스탄티누스와 선제의 친아들 막센티우스는 제위 경쟁 코스에서 제외되었다. 나이와 군사적인 실적에서 아직 적임이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2차 ‘사두정치’는 제1차보다 더욱 무리한 상태로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2차도 제1차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20년 동안은 제국에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주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물러날 때 처신은 깨끗했다. 니코메디아의 황궁에서 나와 여생을 보낼 곳으로 정해둔 고향 스플리트에 틀어박혔다. 305년 봄의 일이다.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복원도 출처 구글 이미지]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