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노력 - 콘스탄티누스 황제
제2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
(서기 306년~337년)
‘사두정치’의 붕괴
서기 306년 7월, 브리타니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북방 야만족을 물리치고 있던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했다. 전사도 암살도 아니고, 오랫동안 병을 앓은 뒤의 병사도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죽은 원인은 분명치 않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황제를 갑자기 덮친 죽음의 원인은 뇌나 심장에 생긴 장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중에 ‘대제’(라틴어로는 Magnus, 영어로는 the Great)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게 되는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가 급사한 306년에 31세가 되어 있었다. 정제의 친아들이고 게다가 맏아들이지만, 당시 그는 아주 미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황녀 테오도라와 재혼하여 부제에 취임한 293년부터는 이혼당한 생모와 함께 오리엔트로 쫓겨난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18세부터 30세까지 충실하게 군대 경험을 쌓았고,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에 그 슬하로 돌아와 전쟁터에서 아버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고 있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젊은 장수의 평판은 계속 높아졌다. 게다가 이 젊은 장수는 키가 크고 잘생긴 대장부여서 신체적으로도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을 안 장병들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젊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눈을 돌린 것은 당연하다. 브리타니아 북부의 군단기지에 모인 장병들은 벌써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부제’가 아니라 ‘정제’다. 정제가 죽었으니까 그 대리도 당연히 정제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의 북서쪽 변경에서 일어난 장병들의 목소리로 인해 ‘사두정치’ 체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사두정치’는 병사들이 황제를 옹립하는 악습이 정국 불안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만든 체제다. 그런데 13년 만에,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된 뒤로는 겨우 1년 만에 한 귀퉁이가 무너져버렸다. 이것은 그 후 18년이나 계속된 혼란과 내란의 시작이었다.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타협책을 통해 ‘사두정치’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공석이 된 제국 서방의 정제에는 부제 세베루스가 승격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부제에 취임한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사두정치’ 유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석 달도 채 가지 않았다.
여섯 황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황제의 친아들 중에서 여전히 제외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막센티우스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친아들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제인 갈레리우스의 사위였지만, 그에 비해 부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아내는 황녀도 아니고, 두 경쟁자의 나이는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306년 10월 28일, 로마에서 막센티우스가 황제 취임을 선언했다. 제위 계승 코스에서 또다시 제외된 막센티우스가 개인적인 불만을 터뜨리는 데 석 달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개인적 불만이 그가 살고 있던 수도 로마와 오랫동안 제국의 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불만과 합류하는 데 석 달이 걸린 것이다.
로마와 원로원의 불만
로마와 이탈리아에는 ‘사두정치’ 체제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불만이 잔뜩 쌓여 있었다. 두뇌에 해당하는 황제는 이제 본거지를 멀리 옮기고, 로마에는 개선식을 거행할 때가 아니면 발걸음도 하지 않는다. 이제 법률은 황제가 멋대로 정하는 칙령 방식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 군무를 맡는 것을 엄금했다. 또한 수도 로마에는 원수정 시대처럼 1만 명은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근위군단병이 주둔해 있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운 병영도 수도 북동쪽에 건재해 있었지만 지금은 이들도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일반 서민들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무관하지 않았다. 역대 황제들이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서민들에게 주었던 일시 하사금이 없어졌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가 열리는 횟수도 줄었을 것이다. 게다가 돌아온 것은 무거운 세금이었다. 이제는 수입이 많든 적든 관계없이 국정에 필요한 액수가 모두 세금으로 부과되었다.
서민들의 두 번째 불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법률에 따라 거주지와 직업을 바꿀 자유를 빼앗긴 것이었다. 게다가 농촌 과소화는 곧 도시 과밀화로 이어졌고, 치안 상태도 계속 나빠졌다. 이들이 막센티우스를 지지한 것은 시대에 뒤처져버린 계급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해도 좋다.
‘사두정치’ 아래 수도 로마에는 세베루스가 임명한 ‘수도 장관’이 있었다. 이 수도 장관과 부하 관료 몇 명을 죽이는 것으로 쿠데타는 간단히 끝났다. 그 직후 원로원은 막센티우스의 요청을 받고 28세의 젊은 황제를 만장일치로 공인한다. 선제 막시미아누스를 무대에 다시 등장시킨 것도 이면공작의 하나였다.
어쨌든 제2차 ‘사두정치’는 1년 만에 ‘육두(六頭)정치’가 되어버렸다. 특히 제국의 서방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황제가 두 명이어야 하는데 네 명이 되어버렸으니까. 이 혼란을 수습하려면 서방의 정제인 세베루스가 직접 막센티우스를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할인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변한 사태로 부제에서 1년 만에 정제로 승격한 세베루스는 아직도 휘하 장병들과 친숙해지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남하하는 세베루스의 군대를 맞아 싸우기 위해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가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막센티우스로부터 공직에 있을 때 입던 보라색 옷을 건네 받아 입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의 실적은 막시미아누스가 제2차 ‘사두정치’의 ‘사두’를 모두 능가했다. 56세의 일개 장수가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세베루스 휘하의 장병들은 과거의 사령관을 본 것만으로도 전의를 잃어버렸다. 휘하 장병들에게 버림받고 포로 신세가 된 정제 세베루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자결을 강요당하는 형태로 살해되었다.
또 다른 정제인 갈레리우스로서는 세베루스가 무참하게 파멸한 것을 알고도 내버려둘 수는 없다. 찬탈자로 낙인찍힌 막센티우스 토벌 작전에 이번에는 갈레리우스가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47세가 될 때까지 이탈리아에도 로마에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런 무지는 갈레리우스에게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도 수도 로마의 주민도 아직 긍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갈레리우스는 마치 제국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족을 대하듯 했다. 갈레리우스는 협력하지 않은 도시를 모조리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완전히 갈레리우스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어쨌든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갔지만 ‘아르스(ars)’가 의미하는 병참을 잊고 있었다. 제국 동방 정제가 도나우 방위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수도 로마는 성벽을 보강하면서 대비 태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갈레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고작 북이탈리아 일대만 휩쓸고 발칸 지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수뇌 회담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308년 가을에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카르눈툼(오늘날 오스트리아의 페트로넬) 군단기지로 초대했다. 우선 58세의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제위 복귀를 강력하게 권했다고 한다. 다시 두 선제가 제위로 돌아가면, 두 사람의 권위로 상황을 쉽게 타개할 수 있다고 주장한 모양이다.
하지만 63세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위 복귀를 완강히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동료 황제인 막시미아누스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몸에 걸치는 보라색 옷을 벗으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자기도 퇴위 약속을 지킬 테니까 당신도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사두정치’를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리키니우스의 등장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마주앉으면 늘 설복당했다. 2년 전부터 몸에 걸치고 있던 황제의 상징인 보라색 옷도 앞으로는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두 선제는 서방의 정제에 리키니우스(Ga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를 발탁하고 싶다는 갈레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갈레리우스가 신뢰하는 친구였다. 이 오랜 친구를 동료 황제로 삼으면, 이탈리아에 갔다가 망신을 당한 갈레리우스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리키니우스도 발칸 지방의 하층계급 출신이었지만, 그가 야심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308년에 시작된 제4차 ‘사두정치’에서는 불만을 품은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제국 동방의 부제였던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부제로서 어려운 임무를 3년 동안 수행한 자신을 제쳐놓고 부제도 지낸 적이 없는 리키니우스가 제국 서방의 정제 자리를 꿰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 불만을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보다 더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은 막센티우스였을 것이다. 카르눈툼에서 로마로 돌아온 아버지와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30세인 그에게는 아직 여유가 있었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는 그가 사실상의 권력자였다. 일단 원수정 시대의 황제들을 본받아 공공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막시미아누스의 최후
제국 서방의 부제가 본거지로 삼고 있는 트리어에 막시미아누스가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를 맞은 콘스탄티누스에게 자기 딸 파우스타와 결혼할 것을 제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아내 미네르비나와는 이혼한 처지였다.
황녀 파우스타와의 결혼식과 그 후 이어진 피로연은 로마 시대에는 아렐라테라고 불린 남프랑스의 아를(Arles, 반 고흐의 작품 배경으로 유명)에서 시민 전원을 초대하여 호화판으로 열렸다.
바로 그 무렵 라인강 동쪽에 사는 야만족이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와 라인 방위선을 책임지던 서방의 부제인 콘스탄티누스가 당장 휘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직속 병력이 모두 나간 것을 안 막시미아누스는 이 기회를 틈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했고, 이 소식은 빠르게 콘스탄티누스에게 전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야만족의 족장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고 휴전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돌아오자 막시미아누스는 그 당시 마실리아라고 불린 마르세유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방어전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마르세유 시가지를 육지 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따라 병력을 배치한 콘스탄티누스는 마르세유 주민들에게 선제의 신병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마르세유 주민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그 직후, 부제 콘스탄티누스는 선제 막시미아누스가 자결했다고 공표했다.
갈레리우스의 죽음
그로부터 1년 뒤인 311년, 제국 동방의 정제였던 갈레리우스가 51세에 죽었다. 불치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사두정치’ 체제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자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줄곧 동방의 정제였다. 서방 정제였던 리키니우스가 수평 이동하는 느낌으로 메웠고, 궁정신하들도 모두 도나우강 근처 시르미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리키니우스는 그때까지 그가 차지하고 있던 서방 정제 자리에 부제인 콘스탄티누스를 승격시키지 않았다. 또한 동방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지위도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때부터 정제 한 사람과 부제 두 사람에다 이제 ‘공적’으로 낙인찍힌 막센티우스까지, 모두 네 사람이 뒤엉켜 싸우는 상황으로 변했다.
정제 리키니우스와 부제 콘스탄티누스의 동맹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어느 쪽이 먼저 제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누이인 콘스탄티아가 리키니우스와 결혼하고,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막센티우스 토벌전을 묵인한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이 끝난 뒤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공적’ 막센티우스
결전의 해가 된 312년에 34세였던 막센티우스는 비록 명군은 아니었지만 기독교도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폭군도 아니었다. 그가 사실상의 황제였던 기간은 6년이다. 그 6년 동안 그는 자신의 세력권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로마 제국 황제로서 다스리려고 했다.
공공사업에는 특히 힘을 기울였다. 이제 그의 이름을 붙인 공공 건축물은 포로 로마노에서도 콜로세움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막센티우스 회당’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공공사업에는 열심이었고, 신축만이 아니라 수리와 복원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
본국 이탈리아는 제국의 다른 지방에 비하면 아직도 경제력이 강했다. 그 이탈리아에다 풍요로운 농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는 이미 예고된 거나 다름없는 콘스탄티누스의 남하에 대비하여 대규모 군사력을 준비했다. 일설에 따르면 보병 17만 명에 기병이 1만 8천 기였다고 한다.
한편 쳐들어가는 콘스탄티누스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보병 9만 명에 기병 8천 기였다. 양적으로는 막센티우스의 절반밖에 안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휘하 장병은 질적으로는 훨씬 뛰어났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동포인 로만인을 상대로 싸우는데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정예병력 4만 명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와 갈리아 사이에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중요한 루트만 해도 4개가 뻗어 있다. 이중 세 번째 루트는 토리노를 떠나 서쪽으로 가서 수사 골짜기를 올라가는 방법으로 알프스를 넘는다.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리옹에 이르고, 서쪽으로 가면 론강변의 발랑스로 나갈 수 있다.
수사 골짜기에만 도착하면 거기서부터는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지르는 포강 주변의 평지를 진군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머릿속에는 수도 로마로 쳐들어가기 전에 우선 북이탈리아 전역을 제압하는 전략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전부터 수사에는 크고 견고한 성채가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그곳에서 알프스를 내려오는 콘스탄티누스 군대를 기다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성채 하나를 공략하는 데 휘하 병력의 대부분을 주저없이 투입했다. 게다가 불화살을 활용했는지, 성채에 틀어박혀 있던 병사들이 밖으로 나와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사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만 가면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Augusta Taurinorum)이라고 불린 토리노다.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린 3세기 이후의 토리노는 장기간의 공방전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농성전을 각오하면 꽤 오랫동안 공격군의 발목을 붙잡아둘 수 있었다.
그런데 토리노의 막센티우스 쪽 지휘관은 콘스탄티누스 군대를 맞아 싸우기 위해 성문 밖으로 병력을 내보냈다. 평원에서의 회전 방식 전투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 경험이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다. 콘스탄티누스 군대는 오랫동안 북방 야만족을 상대로 전투 경험을 쌓은 장병들이었다. 승패는 간단히 결정되었다.
전쟁터는 토리노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적에게 쫓긴 병사들은 토리노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은 데 절망한 시민들은 성문을 닫아건 채 그들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러고도 승자가 어떤 벌을 내릴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승리자 앞에서 성문이 열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군대를 앞세워 토리노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마중 나온 주민 대표에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약탈도 방화도 살육도 전혀 없었다. 이 토리노에서의 태도는 포강이 동쪽의 아드리아해를 향해 흐르듯 순식간에 북이탈리아 전역에 퍼졌고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모두 콘스탄티누스 쪽으로 깃발을 바꾸었다.
하지만 베로나(로미오와 쥴리엣 배경 도시)만은 달랐다. 로마 시대의 아오스타나 토리노가 서부 알프스로 가는 루트의 방어기지로 중요했다면, 로마 시대의 베로나는 북부 알프스를 넘어 도나우강으로 가는 루트의 이탈리아 쪽 방어기지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12년에 베로나 방위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옛날 기질을 가진 폼페이아누스였다. 이 장수는 병사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베로나만은 콘스탄티누스 앞에 성문을 열지 않았다.
폼페이아누스는 비록 질적·양적으로 부족한 병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우수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대등하게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전투가 끝난 뒤 석양을 받은 평원은 막센티우스 쪽 병사들의 주검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들 중에는 온몸이 창에 찔린 폼페이아누스의 주검도 있었다. 베로나도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북이탈리아 전체가 베로나의 운명을 생각하고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주민 대표들한테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물론 격전 후에 일어나기 쉬운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행도 전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언제든 그가 원할 때 로마로 진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312년 여름도 끝나려 하고 있었다.
역사를 창조한 전투
312년 10월, 공격하는 콘스탄티누스는 37세. 수비하는 막센티우스는 34세. 나이는 같은 세대지만 총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베테랑과 신병만큼 차이가 났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우려한 것은 막센티우스가 35년 전에 완성된 견고한 로마 성벽에서 철저히 수비만 하는 것이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수도로 접근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척후병을 내보냈다. 그리고 막센티우스를 앞세운 대군이 수도를 떠나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이겼구나 하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싸움은 312년 10월 27일에 벌어졌다.
막센티우스 군대는 지금도 ‘플라미니아 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을 나온 뒤, ‘플라미니아 가도’를 3킬로미터쯤 북상하여 테베레강에 걸려 있는 ‘밀비우스 다리’를 건넌다. 거기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북쪽으로 곧장 10킬로미터쯤 올라간 곳에 펼쳐져 있는 평원이 전쟁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휘하 장병들에게 적병을 죽이기보다 테베레강 쪽으로 몰아넣으라고 명령한 게 아닌가 싶다. 전쟁터가 넓으면 대군이 유리하지만, 전쟁터가 좁으면 대군이 오히려 불리해진다. 이곳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니까 테베레강도 하안 공사까지 되어 있지는 않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 양쪽 기슭은 갈대가 무성한 습지여서 발이 빠지기 쉽고, 그 좁은 곳으로 쫓겨 들어간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은 완전히 침착성을 잃어버렸다.
도망칠 곳은 남쪽밖에 없었다. 남쪽에 보이는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3킬로미터만 달리면 플라미니아 문에 다다를 수 있다. 그 문만 지나면 로마를 지키는 견고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막센티우스는 후방에 진을 치고 거기에서 훈령을 내보냈다. 그래서 침착성을 잃고 도망치기 시작한 병사들의 무리에 휩쓸리고 말았다.
8미터 너비의 밀비우스 다리에 패주병의 태반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다리를 건너다가 뒤에서 몰려든 병사들이 석조 난간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압사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말이 강바닥의 진창에 발이 빠진데다 무거운 갑옷에 망토까지 걸쳤으니 익사할 수밖에 없다. 막센티우스도 그렇게 해서 34년의 생애를 마쳤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빛나는 십자가로, 거기에는 ‘엔 투토이 니카(Εν Τούτῳ Νίκα)’라는 그리스어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In Hoc Signo Vinces(이 증표 안에서 승리하리라)”는 라틴어로 더 알려져 있다.
그날 밤, 막사 속에서 잠자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꾸었다.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유일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일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리스어로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와 P를 합친 표시를 병사들이 가진 방패에 그리게 하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지시에 충실히 따랐고, 그래서 승리했다고 한다.
그는 정복자로서 수도에 입성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센 티우스를 지지했던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무릎을 끓었다. 원로원은 정복자가 명령하지 않은 것까지도 솔선하여 시행했다 우선 콘스탄티누스를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시키기로 의결했고, 개선문을 세워 승리자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기로 결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사실상의 배상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특별세를 부과했다. 600명이 정원인 원로원 의원을 재산 정도에 따라 네 등급으로 나고, 등급별로 내야 할 금액도 정했다. 로마의 건국 이래 1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사회에서 항상 제1계급이었던 원로원이 4세기 당시에는 이런 꼴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친 뒤에는 콘스탄티누스는 당장 로마를 떠나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는 이제 명실 공히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본거지이다. 열살 위인 정제 리키니우스를 회담을 위해 자신의 본거지인 밀라노로 오게 한 것이다. 그는 이제 37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 제국 서방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패치워크’의 개선문
로마의 콜로세움 바로 옆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서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아르코 디 콘스탄티노'(Arco di Constantino)지만 고대 로마인의 언어였던 라틴어로는 '아르쿠스 콘스탄티니'(Arcus Constantini)라고 불렸다. 312년에 원로원이 승자인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기로 결의하여 세워진 개선문이다.
원로원이 이 개선문을 짓기로 결의한 것은 312년 늦가을이다. 다만 콘스탄티누스가 재위 10년을 맞이하여 로마에서 축하식을 거행할 315년까지는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개선문 하나 짓는 데 2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에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 이제는 부족해졌다.
위치
지금도 로마의 명소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어느 것보다도 안이하게 지어겼다는 사실만큼 4세기의 수도 로마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없다. 우선 그 개선문을 지어서 바치는 것으로 6년 동안이나 막센티우스를 지지한 죄를 용서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최고로 좋은 위치에 지어야 한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도심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사이를 콜로세움 쪽으로 나아가면 부뒷치는 지점이 개선문 건설 부지로 결정되었다. 과학적인 조사 결과 이곳에는 이미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개선문이 있었다고 하고, 기본형에 사용된 석재는 2세기 전반의 것으로 밝혀졌다.
패치워크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는 '아르쿠스'를 그곳에 짓기로 결정했을 때, 기존의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완전히 부수고 그 자리에 신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목적에서 벗어나는 장식은 제거하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는 헌사와 그 황제가 이탈리아에서 치른 전투를 묘사한 장면처럼 목적에 맞는 부조를 새겨서 그 자리를 메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다른 공공 건조물에서 장식을 떼어다가 덧붙였다. 그 결과 로마 제국 최후의 걸작 건축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4세기 초에 건조되었지만, 본체와 장식이 모두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을 가져다 붙인 '패치워크'(patchwork)가 되어버렸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조각, 히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부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부조들이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조각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부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부조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부조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는 ‘아르쿠스’인 이상, 여기저기에서 떼어온 것만 붙이면 실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나타내는 부조도 추가했는데, 중앙과 좌우의 아치형 입구 위쪽에 새겨진 부분이 바로 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베로나 공방전 때 말을 몰고 진격하는 콘스탄티누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하는 장면. 순종의 뜻을 표하는 로마 시민들을 관용하는 태도로 대하는 콘스탄티누스. 물론 적을 공격하는 콘스탄티누스 휘하 병사들도 묘사되어 있다. 이 부조들만 이때 새로 제작된 것이다.
이 ‘개선문’에도 그것을 세워서 기증한 쪽이 새긴 헌정사가 남아 있다. 정면 상단, 트라야누스 황제의 포룸에서 떼어온 두 명의 다키아인 포로 사이에 새겨져 있는 것이 바로 그 헌정사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승리에 대한 축하로 이 문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막시무스(위대한) 피우스(자비로운) 펠릭스(행복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친다. 그리고 이 황제가 신과도 같은 뛰어난 감각과 위대한 의지력으로 이끈 군대의 정의로운 전쟁으로 폭군을 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한다.”
패배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어제까지의 ‘황제’가 단숨에 ‘폭군’으로 바뀌었으니.
기독교 공인
306년에는 여섯 명이나 되었던 ‘황제’가 7년 뒤인 313년에는 3명으로 줄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동쪽을 지키는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로마 제국은 이들 세 사람이 삼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콘스탄티누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막센티우스를 거꾸러뜨린 기세로 리키니우스까지 공격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아직 상책이 아니었다.
우선, 리키니우스의 휘하 병력은 로마군에서도 최강인 도나우 방위선을 지키는 병사들이고,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중심으로 굳게 결속해 있었다. 또한 이때 리키니우스를 공격하면 전부터 사사건건 서로 반발하고 있는 제국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오히려 결속시켜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키니우스 vs. 막시미누스
한편 313년에 밀라노에서 거행된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아의 결혼으로 초조해진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눈을 돌린 것은, 2년 전에 죽은 갈레리우스 황제의 아내 갈레리아 발레리아(Galeria Valeria)였다. 무엇보다도 발레리아는 ‘사두정치’ 체제를 시작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외동딸이었다. 그녀와 결혼하면 리키니우스나 콘스탄티누스와 대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청혼을 거절했다.
화가 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당장 군대를 보내 선제의 미망인만이 아니라 마침 그때 딸을 찾아와 있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 프리스카까지 붙잡아 감옥에 넣어버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아내와 딸이 당한 일에 항의하고, 두 여자를 인수하겠다고 말했지만 부제는 두 여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오리엔트로 추방해버렸다. 이제 늙은이가 된 과거의 최고 권력자에게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황녀와 결혼하자마자 리키니우스가 서둘러 밀라노를 떠난 것은,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접근에 초조해진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병력을 이끌고 리키니우스의 세력권인 소아시아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급히 밀라노를 떠난 리키니우스가 소집해둔 휘하 병력과 합류하면서 소아시아에 들어간 것은 313년 3월 말이었다고 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이끄는 병력은 7만, 리키니우스의 병력은 3만이었다.
하지만 승리는 리키니우스에게 돌아갔다. 사령관의 재능 차이가 아니라 발칸 출신 병사와 오리엔트 태생 병사의 전투력 차이였다. 패배당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소아시아 남동쪽에 있는 타르수스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죽었다. 자결했는지 부하에게 암살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제국의 동방이 정제 리키니우스 밑에 통합되자,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쫓겨나 유랑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던 발레리아와 그 어머니 프리스카는 제국의 동방이 정제 리키니우스 치하로 통합되었으니까 자신들의 운명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키니우스는 잘 아는 사이인 두 여자를 만나주려고도 하지 않고 쫓아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모녀가 그리스의 테살로니키까지 왔을 때 두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형집행 영장과 함께 리키니우스가 보낸 병사들이었다.
이렇듯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권력은 모두 사라졌다. 기독교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가 박해와 탄압을 강행한 첫해부터 헤아려도 겨우 10년 뒤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13년 몇 월 며칠에 죽었는지는 전문가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313년 6월 15일에 공표되었다는 ‘밀라노 칙령’을 모르고 죽었는지 알고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313년에 공표된 ‘밀라노 칙령’은 그가 실시한 정책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 일격과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서기 313년 6월에 공표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 전문이다.
<전부터 우리(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 서방에서는 이미 기독교도에 대해서도 신앙을 인정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데 필요한 제의를 거행하는 자유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묵인 상태가 실제로 법률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우리의 이런 생각도 실제로는 사문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정제 리키니우스는 제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과제를 의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난 이 기회에 모든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도 각자가 원하는 신을 믿을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 신이 무엇이든, 통치자인 황제와 그 신하인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면 인정해야 마땅하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신하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의 정책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칙령은 여기서부터 지령으로 바뀐다. 칙령이라는 형태의 국가 정책을 각 지방에서 실제로 집행하는 행정관들에게 구체적으로 지령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결단을 내린 이상, 지금까지 발령된 기독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기독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훼손당하는 일이 많았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특히 몰수당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이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대받게 된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것을 공표한 칙령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래도 ‘밀라노 칙령’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질 이유는 충분히 있다. 그것은 로마인이 1천 년 이상 간직해온 전통적인 종교관을 서기 313년에 공표된 이 칙령이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로마는 로마라는 ‘공동체’(Res Publica)에 속하는 주민들에게, 각자가 믿는 신이 무엇이든 ‘공동체’ 전체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전통적인 신들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밀라노 칙령’에는 그 구절이 없다. 그래서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완벽하게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vs. 리키니우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에 함께 서명했지만, 그 직후에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싸움에서 패하고 죽은 뒤 두 황제의 동맹관계는 당장 위기에 직면한다. 불상사를 저지르고 리키니우스에게 달아난 친족을 넘겨달라고 콘스탄티누스가 요구했을 때 리키니우스가 거절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어쨌든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에게 리키니우스를 공격할 대의명분을 주었다.
315년의 이 내전은 콘스탄티누스가 담당한 라인 방위선을 지키는 갈리아 병사와 리키니우스가 담당한 도나우 방위선을 지키는 발칸 병사가 정면으로 격돌한 전쟁이 되었다. 갈리아 병사와 발칸 병사는 로마군에서 수위를 다투는 정예였다. 전투가 한 번으로 결말이 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315년 초가을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는 도나우강과 가까운 판노니아 지방의 키발라에라는 도시에서 벌어졌다. 판노니아는 리키니우스의 지배 아래 있고, 리키니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3만 5천인 반면 콘스탄티누스가 데려갈 수 있는 병력은 2만 명밖에 안되었지만, 그래도 콘스탄티누스가 시종일관 우세한 형세를 유지한 것은 지휘관의 재능 차이였을 것이다. 그날 밤 사이에 리키니우스와 그의 군대는 숙영지를 떠나 동쪽으로 달아났다.
두 번째 전투는 트라키아와 그 남쪽의 마케도니아를 가르는 산악지대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첫 번째 전투보다 더욱 치열한 격전이었다지만 리키니우스는 두 번째 전투에도 패배했다. 여기서 2년 전에 리키니우스와 결혼한 콘스탄티아가 당시 여자로서는 보기 드문 의지와 배짱으로 오빠와 남편을 화해시키려고 애썼고, 그 노력으로 그해 12월에 두 황제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리키니우스가 소아시아에서 동쪽으로 물러가는 것이 조건이었다.
리키니우스가 소아시아 동쪽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도나우 방위선을 지켜야 할 책임에서도 벗어난다는 뜻이다.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도나우 방위선을 지키는 병력의 지휘권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휘하에는 라인 방위군만이 아니라 로마군 전체에서 가장 강한 도나우 방위군까지 편입되었다. 반대로 궁지에 몰렸다가 강화를 맺고 한시름 놓은 리키니우스 휘하에는 연약하다고 경멸당하는 오리엔트 출신 병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06년에 권력 투쟁의 무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라인강으로 흘러드는 모젤강 상류, 오늘날의 독일 서쪽 끝에 있는 트리어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무찌르고 본거지를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긴다. 그리고 315년에 이번에는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로마 제국 후기에 도나우 방위선의 요충이었던 시르미움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일단 강화를 맺은 뒤, 316년부터 322년까지 7년 동안은 북방 야만족을 물리치는 데 보냈다. 라인강 동쪽에서는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 도나우강 북쪽에서는 고트족이 오랜만에 로마 방위선을 돌파하여 쳐들어왔다는 사정도 있었다. 로마 황제의 첫 번째 책무는 제국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크리스푸스의 활약
유격전이 시작된 것은 317년에 접어든 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라인 방위선은 아들인 크리스푸스에게 맡기고 도나우 방위선은 자신이 맡기로 했다.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가 황녀 파우스타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 첫 아내한테서 얻은 맏아들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전처의 아들 크리스푸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그의 나이가 20세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황녀 파우스타가 낳은 아이는 맏아들이 한 살이고 둘째아들은 갓난아기였다.
20대에 갓 접어든 젊은 나이인데도 5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싸우는 모습이 아버지를 닮았다. 다만 아버지와는 달리 겉과 속이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전쟁터에 나가면 사자로 돌변했다. 속공을 장기로 삼으면서도 전략을 짜서 효율적으로 싸움을 진행하는 군사적 재능은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났는지도 모른다. 프랑크족도 알레마니족도 크리스푸스의 공격을 받고 당장 궁지에 몰렸다.
크리스푸스가 적대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야만족을 라인강 동쪽으로 깊숙이 쫓아내고, 유린당한 갈리아 전역에 평화를 회복하는 데 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5년 동안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지원이 필요해지는 사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 장수의 첫 출전은 완전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도나우강 평정
322년 여름까지 도나우강 남안에서 야만족을 격퇴하는 전쟁을 우세하게 진행한 콘스탄티누스 군대는 전투에 불리한 계절인 11월을 앞두고 도나우강 북쪽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는 200여 년 전 트라야누스 황제가 도나우강에 놓은 다리를 보수하여 다시 건널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길이가 1킬로미터가 넘는 이 ‘트라야누스 다리’는, 20개에 이르는 교각은 견고한 석조지만 그 상부는 목조로 되어 있었다.
도나우강 북쪽으로 쳐들어가는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격파당한 고트족은 강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고트족 남자 4만 명을 로마군에 편입시키는 조건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는 322년까지 7년 동안 싸운 끝에 북방 야만족이라는 성가신 적으로부터 일단 해방되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이것은 마지막 층계참에서 꼭대기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이번에는 단숨에 뛰어올라갈 기회가 찾아온 것을 의미했다.
리키니우스와의 최종 결전
언젠가는 이때가 오리라는 것을 리키니우스도 예상하고 있었다.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북방 야만족 소탕전에 전념하고 있을 때 대규모 병력을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리키니우스의 지상군은 보병 15만에 기병 1만 5천. 여기에 이집트에서 130척, 키프로스섬과 시리아·팔레스티나에서 각각 110척씩 합계 350척의 3단 갤리선이 해상 전력으로 가세한다.
여기에 맞서는 콘스탄티누스 진영의 전력은 기병과 보병을 합하여 12만이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얼마 전까지 야만족을 상대로 싸운 병사들이다. 병사는 어제까지 전쟁터에 있었던 사람이 가장 강하다. 이 지상군 전력에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소집된 합계 200척의 3단 갤리선이 가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상전의 총지휘는 자신이 맡기로 하고, 해상전의 총지휘는 아들 크리스푸스에게 맡겼다. 324년 7월 3일 아침, 양군은 오늘날에도 터키의 주요 도시인 트라키아 지방의 하드리아노폴리스(현 튀르키예 에디르네) 근처에서 맞섰다. 이 도시 근처에서 첫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세력권으로 쳐들어온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있는 사이,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의 항구도시 테살로니키에 육군과 해군이 집결할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 집결하여 콘스탄티누스의 훈령을 받은 병력 가운데 육군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하드리아노폴리스로 가고, 에게해를 북상해온 해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마르마라해로 향했다.
넓은 평원에 적군과 아군이 맞서는 형태로 포진은 끝났지만, 각각 16만 5천 명과 12만 명의 대군을 투입한 전투쯤 되면 포진을 끝내자마자 싸움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 며칠 동안은 양쪽이 소수의 병사를 내보내 탐색전을 벌인다. 이때 탐색전을 끝내고 결전을 벌이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더 빨랐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는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진하여 적진을 무너뜨리는 분쇄전법을 택한다. 넓적다리에 적의 화살이 명중했지만 기가 꺾이지 않았다. 장병들도 전쟁터 한복판에서 분투하는 총사령관을 보고 더욱 사기가 올랐다. 해질녘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리키니우스 쪽이 3만 4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콘스탄티누스 쪽이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리키니우스의 전략전술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도망쳐서 틀어박힌 비잔티움을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격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두 번째 전투의 주역은 해전에서의 '크리스푸스'였다. 350척과 200척이 맞붙은 해전의 결과에 따라 비잔티움을 양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바다의 제해권을 누가 쥐느냐가 결정된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순풍을 돛에 가득 받고 전력으로 노를 젓는 크리스푸스 함대의 돌파력은 역풍 때문에 돛을 내리고 노만으로 움직이는 적군의 갑절이 넘었다. 정면에서 돌파당한 적선은 눈앞에서 차례로 격침되니, 그 수가 무려 130척을 넘었다. 제해권은 완전히 콘스탄티누스의 손에 넘어왔다.
유일한 최고 권력자
콘스탄티누스와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후 아내를 동반한 리키니우스는 제위의 상징인 보라색 망토를 벗고 콘스탄티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뒤, 누이동생과 약속한 화해 조건을 말했다. 그것은 리키니우스가 공식적으로 퇴위하여 일개 야인으로서 은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생은 1년도 채 계속되지 않았다. 이듬해에 에게해가 바라다보이는 테살로니키의 은거지에 느닷없이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리키니우스가 고트족과 몰래 연락을 취하여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이 죄상이었다. 그는 재판도 없이 그대로 사형에 처해졌다. 아직 소년이었던 아들도 살해되었다. 아내인 콘스탄티아는 그 후에도 오빠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로마사 서술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때부터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공화정과 제정 시대를 통해 로마적이라고 여겨진 많은 ‘특질’들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서기 324년은 18년에 걸친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승리자 콘스탄티누스가 13년에 걸친 전제정치를 시작한 첫해가 된다. 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해부터 헤아리면 무려 40년 만에 로마 제국은 단독 황제가 통치하는 상태로 돌아갔다.
새로운 수도 건설
그리스사에서도 로마사에서도 주요 도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을 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도읍으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후세에도 가장 추측하기 쉬운 것이 지리적 조건이었다. 확실히 천연의 요해지이기는 하다. 세모꼴의 한 변은 마르마라해에 면해 있고, 또 한 변은 나중에 ‘골든혼(황금뿔)만’이라고 불리게 된 후미에 면해 있고, 나머지 한 변만 육지와 이어져 있다. 공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이 시대에 대규모 군사력이 공격하기 어려운 바다에 두 변이 면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었다.
지리적 이유 이외에 콘스탄티누스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점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라는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한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은 그리스어권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비잔티움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처럼 완전히 동방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다. 비잔티움은 고대인의 머릿속에 있었던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생각하는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로는 안성맞춤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새 수도가 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 공사는 324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제거하기 직전이나 직후가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새 수도를 건설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져 있었을 것이다. 공사도 돌관 작업으로 강행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완공식은 330년 5월 11일에 거행되었으니까, 불과 6년 만에 수도를 새로 지어버린 셈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새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라고 이름지은 것이 여실히 보여주듯, 로마가 로마인의 도읍이었던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읍이었다.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맨 처음 지어진 건물이 황궁이었다.
시내는 로마처럼 14개 행정구로 나뉘었다. 원로원도 있고, 회랑을 빙 두른 포룸이라는 광장도 있다. 테르마이라는 말로 통하는 공중목욕장도 있다. 일용품을 거래하는 대규모 시장도 물론 있었다. 로마에는 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없는 건물은 우선 신전이고, 둘째로는 콜로세움식 원형투기장과 직사각형 경기장. 다음은 반원형극장일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원로원
이 시기에 원로원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인 입법기관 역할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의 생각은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칙령이라는 형태로 곧장 국가 정책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 혼자서 국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법안은 황제 마음대로 폐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 가운데 자기 치하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대로 답습했는데, 원로원 대책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 수도로 건설한 뒤에도 로마를 계속 수도로 남겨놓았듯이, 로마의 원로원과 별도로 새 수도에서도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고 그들을 위해 ‘쿠리아’라고 불리는 회의장도 지었지만 로마에 있는 ‘쿠리아’도 파괴하지는 않았다.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도 명칭은 ‘원로원’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임명하는 의원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일 뿐이었다. 이 ‘원로원’만큼 후기에 들어선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것도 없다. 로마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시작되어 콘스탄티누스 때 결정적이 된 이후의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로마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군대와 행정
국경선을 지키는 군사력과 황제 직속 군사력의 비율이 완전히 역전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였다. ‘방위선’이라고 불린 국경선을 지키는 일은 이제 완전히 농사꾼의 ‘파트타임’ 일이 되었다. 이제 안전보장의 최고 책임자인 황제가 제국 국경선에서 외적의 침입을 반드시 저지하는 안전보장 체제를 포기하고, 국경선이 뚫려도 황제가 이끄는 유격대가 쳐들어온 적을 무찌르는 쪽으로 안전보장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른 제국 방위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황제 자신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군대 조직을 갖춘 그의 직속부대의 전투 능력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을 타고난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도 적은 국경선을 뚫고 들어와 분탕질을 하여 대부분 농민인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뒤에야 비로소 격파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행한 개혁 중에서도 행정과 세제에 관한 개혁은 콘스탄티누스가 거의 그대로 답습한 듯하다. 행정 개혁은 절대군주정에 적합했기 때문이고, 과세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국가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액수를 과세한다는 사고방식은 전제군주였던 콘스탄티누스에게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빈부 격차
콘스탄티누스는 통화에 관해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완전히 결별했다. 은화의 가치 저하가 멈출 줄 모르고 진행되는 상황이어서, 무언가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면에서 콘스탄티누스는 혁명을 강행했다 해도 좋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은본위제를 금본위제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이래 3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은 데나리우스 은화를 기축 통화로 삼는 은본위제를 유지했다. 제국의 모든 물산이나 용역이 ‘데나리우스 은화’나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를 단위로 표시된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유통 화폐인데도 시장에 나오지 않고 저축되는 현상은 로마인이 자국의 화폐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데나리우스 은화’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카라칼라 황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 100년 동안 모조리 실패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보고, 은화에 집착하는 한 강력한 기축 통화의 부흥 시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전통이었던 ‘은본위제’를 버리고 ‘금본위제’로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화폐가 아니어서 금 함유율을 100%로 유지할 수 있었던 금화를 제국 통화제도의 기축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새 금화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의미하는 ‘아우레우스’(aureus)라고 불리지 않고 ‘솔리두스’(solidus)로 이름 지어졌다. 솔리두스는 견실이나 안정을 의미했다.
콘스탄티누스의 통화 개혁은 ‘데나리우스 은화’가 강한 통화였던 시대에 차지하고 있던 지위에 ‘솔리두스 금화’를 앉혔다는 데 특색이 있다. 과거의 은화가 금화로 바뀌면서, 통화제도 안정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강한 기축 통화를 부흥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만 금화라도 널리 유통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 ‘통화’인 이상 액면 가치가 너무 높으면 화폐 구실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소형화하는 것은 당연했다.
표에도 나와 있듯이 금화의 무게는 4.5그램으로 줄어들었다. 이것도 나중에는 4그램 가까이까지 떨어진다. ‘솔리두스 금화’는 ‘아우레우스 금화’의 절반 무게로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금 함유율도 100%를 계속 유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불순물을 조금 넣는 편이 물리적으로는 오히려 강화된다. 무엇보다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화였다.
그러나 4세기의 로마 제국에서는 금본위제로 바뀐 것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깊고 큰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강한 통화로서 금화의 가치를 확립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은화나 동화는 ‘가치변동제’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봉급을 금화로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이 생필품을 살 경우에는 금화를 은화나 동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물건을 팔거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은화나 동화를 받는다고 하자. 세금은 금화로 내도록 규정되어 있으니까, 그들이 세금을 낼 때는 환전상을 찾아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화나 동화를 금화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메커니즘이 전자와 후자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무원이 아닌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졌다. 장병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고 군수품 생산업자도 아닌 일반 업자나 민간인이 혜택받지 못한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들이 받는 은화나 동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기 때문이다.
농지는 방치되거나 대규모 농장에 흡수되고, 상점은 문을 닫고, 수공업자는 차례로 군수산업으로 전업해간다. 이제 야만족에게 습격당하고 약탈당할 필요도 없었다. 금본위제가 야만족 대신 그들을 습격하여 약탈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공동체’의 이념은 과거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솔리두스 금화’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인민 대다수가 피폐한 가운데 황제 혼자 눈부시게 빛나고 있듯이.
가정의 비극
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듯이 보인 콘스탄티누스는 무엇 때문인지 가정 내 유혈 사태와 관계가 깊었다. 우선 310년에는 아내의 아버지였던 선제 막시미아누스를 죽였다. 2년 뒤인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325년에는 이복누이와 결혼시킨 정제 리키니우스를 전투에서 무찌른 뒤, 야만족과 반란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다.
326년에 갑자기 ‘부제’ 크리스푸스가 체포되어, 아드리아해 안쪽에 불쑥 튀어나온 이스트라 반도 끝에 있는 풀라의 감옥으로 극비리에 호송되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과 심문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피고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죄상은 황후 파우스타(Flavia Maxima Fausta)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크리스푸스가 체포되어 풀라의 옥중에서 고문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황궁에 있는 황후의 일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감옥으로 끌려가지도 않았고, 황궁 안에서 격리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풀라의 옥중에서 크리스푸스가 무죄를 외치면서 29세의 생애를 마쳤을 때, 황후에 대한 처우도 결정되었다.
황후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욕조가 어느덧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열탕으로 변하고, 그 수증기가 욕실 안에 자욱해질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변을 눈치채고 황후는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아내 파우스타는 목욕하다가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직후에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10세인 맏이와 9세인 둘째가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세 아들 가운데 맏이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겨우 열 살인데도 갈리아 전역을 담당하는 총사령관에도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새 왕조가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미지 작전
콘스탄티누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30대로 접어든 직후였고 죽은 것은 60대 중반이었는데, 후세에 남겨진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은 기껏해야 3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로는 황제들이 모두 턱수염을 길렀는데, 콘스탄티누스에 이르러 갑자기 하드리아누스 이전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수염을 깨끗이 깎는 습관을 부활시켰다. 참고로 남자는 수염을 깨끗이 밀면 훨씬 젊어 보인다.
그가 3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만 남긴 것은 턱수염을 기른 장년의 얼굴로만 알려져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자신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4세기의 로마인들이 20년 전까지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비교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젊음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면 콘스탄티누스의 이미지 작전은 성공이었다.
제3부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콘스탄티누스가 세계사에서도 위인으로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가 기독교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대제’라는 뜻의 ‘마그누스’(Magnus)를 붙여 부르는 역사상 인물은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세 사람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샤를마뉴(샤를 대제)다. 이들 중 서기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와 9세기 초의 샤를마뉴는 기독교와 관계가 깊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회에 그렇게 큰 공헌을 하지 않았다면 기독교가 그 후 그만큼 융성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적지 않은 수의 역사가는 교회 내부의 끝없는 교리 논쟁으로 피폐해진 끝에 결국 지역 종교의 하나로 몰락했을 거라고 대답할 정도다.
단독 황제가 되기까지
콘스탄티누스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실제로는 아무도 모른다. 발칸 지방의 빈농 출신으로 수많은 백인대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시절의 콘스탄티우스와 선술집 딸 헬레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콘스탄티우스 주니어’라는 의미도 있는 ‘콘스탄티누스’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비롯한 모든 황제의 생년월일이 불확실했다.
출생지는 오늘날에는 불가리아와의 국경과 가깝지만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속하는 ‘니시’로 되어 있다. 로마 시대에는 ‘나이수스’라고 불렸고, 도나우강과 가까운 시르미움에서 싱기두눔(오늘날 베오그라드)과 세르디카(오늘날 소피아), 하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 에디르네)를 지나고 비잔티움을 거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로마 가도 연변에 발달한 도시였다.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장수였던 콘스탄티우스의 근무지도 이때부터 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 서방으로 정착된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본거지는 라인강 방위선으로 직행할 수 있는 트리어에 있었으니까, 황제 휘하의 장수들도 처자식을 그곳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 살 이후의 콘스탄티누스는 모젤강 상류, 오늘날 독일 서쪽 끝에서 군마가 울고 병사들이 오가는 가운데 소년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사두정치‘가 출범한 서기 293년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황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 과정에서 ‘부제’로 취임한 308년과 ‘정제’로 취임한 312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혈통을 더듬어 올라가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와 연결된다고 공언하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믿은 것으로 알려진 태양신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밝혔다.
이 시기의 콘스탄티누스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 것이나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태양신 신앙을 부흥시킨 것은 부하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4세기 로마군의 주력은 발칸 출신이었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아우렐리아누스는 발칸 출신의 군인 황제들 중에서도 걸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
‘밀라노 칙령’을 보면, 콘스탄티누스의 본심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탄압으로 몰수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한 칙령의 마지막 부분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 문면은 다음과 같다.
<몰수된 뒤 경매에 부쳐진 교회 재산을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요컨대 기독교회의 재산은 교회 활동을 좌우하는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해 단순히 반환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상을 약속했다. 그런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도들의 마음이 기운 것은 당연했다.
‘밀라노 칙령’은 어디까지나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의 연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획기적인 이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한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은 그가 리키니우스보다 훨씬 철저하게 칙령을 실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세력권인 제국 서방에는 기독교 세력이 별로 침투하지 않아서 국가가 보상해야 할 금액이 적었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4세기 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세력의 침투도는 동방이 훨씬 높고 서방은 낮았다. 서방에서 가장 침투도가 높은 곳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일대였고, 콘스탄티누스의 국가 보상도 이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독교 진흥책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자마자 기독교와 관련된 정책 제2탄을 내놓았다. 이것도 로마 제국의 기독교 세력 진흥에 중대한 진전을 가져오는 시책이 된다. 그것은 황제의 사유재산을 기독교회에 기증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황제 재산을 기독교회에 기부한 행위는 ‘밀라노 칙령’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황제라는 공인으로서도 잘못된 처신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다. 그가 겉으로 내세운 원칙과 다른 행동을 해도, 4세기의 비기독교도에게는 그것을 지적할 힘도 없고 기개도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중세에 오랫동안 유럽의 왕과 제후를 속박하게 된다. 이 문서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유럽 전체를 로마 교황에게 기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440년에 그것이 가짜 문서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리하여 세속의 군주들도 중세 1천 년 동안 그들을 속박해온 구속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 이 가짜 문서의 원문은 지금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직자 계급의 공무 면제
또 한 가지 중대한 시책이 남아 있다. 여기서 중대하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직자 계급의 독립을 황제가 강력하게 지원하는 시책이었다.
이것도 칙령 형태로 실시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의 신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국가의 공직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관리와 군무에 이르기까지 어떤 공무도 맡지 않을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성직자’는 앞으로 성스러운 직무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성직자 계급의 독립도 로마 황제라는 최고 권력자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직자의 공무를 면제해준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책이 4세기의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대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성직자는 번거롭게 다른 임무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성스러운 임무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에 헤아릴 수 없이 큰 이바지가 된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주교들에게 둘러싸여 중앙에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만큼 중세가 시작된 것을 보여주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상징은 없었다.” 로마 제국 후기의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한 영국인 학자는 그렇게 썼다. 소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니케아에 주교들을 모아서 공의회를 연 것은 서기 325년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로마 황제의 공식 초청으로 열린 최초의 공의회다.
그런데 왜 콘스탄티누스는 전례없는 그런 일을 단행했을까.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에 주교들을 초빙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7~8년 전에 불을 뿜은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 논쟁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심복인 호시우스 주교를 파견하여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공의회는 역사상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것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독교가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이상 세계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된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형태’의 기독교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로 돌아가면, 콘스탄티누스가 공의회를 개최하여 수습에 나서야 할 만큼 복잡해진 논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과 그의 아들 예수는 ‘동위’(同位)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가 신과 예수는 동위가 아니라는 설을 주장한 것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신은 철학에서 말하는 ‘모나드’에 해당하고, 실재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심적·물적 요소니까 불가지(不可知)한 존재지만, 그렇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동위는 아니지만 신과도 동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때까지 기독교회가 가르친 ‘삼위일체’설, 즉 신과 그 아들 예수와 성령은 동위이기 때문에 일체이기도 하다는 설에서 보면 이단이 된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상사이자 삼위일체파인 아타나시우스 주교에게 파문당하고, 소속되어 있던 알렉산드리아 주교구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런데 쫓겨난 아리우스가 가는 곳마다 그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요 도시인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나중에 『교회사』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저술했고 곧 삼위일체파로 전향했지만, 애초에는 아리우스의 지지자였다. 하지만 가장 정평있는 지지자는 당시 신자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니코메디아(현 튀르키예 이즈미트)의 주교 유세비우스였을 것이다. 당시 제국 동방의 주교구 중에서 유력했던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그리고 이 니코메디아였다.
알렉산드리아 주교와 니코메디아 주교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제국 동방의 기독교 세력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로 양분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가 분열할 위기에 이르렀다. 이 두 파를 니케아에 초빙하여 교리의 해석 차이에서 생긴 대립을 해소하려고 애쓰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소아시아의 도시 니케아에 모인 주교는 거의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제국 서방에서 온 주교는 열 명도 채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동방에 교구를 둔 주교들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제국 서방과 동방의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고, 또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의 태반이 그리스계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토론은 분규에 분규를 거듭하여 좀처럼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일찍이 로마인을 질리게 했을 만큼 토론을 좋아한다.
결국 의장 역할을 맡은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보증을 약속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황제의 권력을 발동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공동 코뮈니케’를 공표하는 단계까지는 끌고 갔다. 하지만 그것은 ‘삼위일체’설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독교회의 정통적 사고방식으로 여겨진 ‘삼위일체’설을 물리치면 대지진처럼 기독교도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게 뻔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무엇보다 기독교회 조직의 통일을 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공동 코뮈니케에 서명을 거부한 것이 아리우스와 그에게 동조한 두 명의 성직자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세 사람을 오리엔트에서 멀리 떨어진 라인강변으로 추방했다. 하지만 몇 년 뒤에는 추방령을 해제했다. 특히 아리우스파는 나중에 북방 야만족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는 데에도 성공했기 때문에, 두 교리의 싸움은 몇 세기 동안이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누가 한 말인지는 잊었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로마인은 세 번 세계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군단으로, 다음에는 법률로, 마지막에는 기독교로.”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왜 이렇게까지 기독교회 진흥에 열심이었을까. 연구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남긴 문서나 편지를 글자 하나까지 면밀히 검토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집안은 아버지 시대부터 기독교를 관용했고,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편향 정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친기독교적 행위를 당당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로마 황제로 처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화폐 앞면에는 그의 옆얼굴을 새겼지만, 뒷면에는 역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신들을 새겼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간단히 단정할 수 없다.
성녀 헬레나
어쨌든 콘스탄티누스의 생모 헬레나가 기독교에 깊이 귀의한 것은 유명했다. 아들이 황제로서 지위를 확립하고 ‘밀라노 칙령’을 공표한 뒤에야 비로소 표면에 나오게 되었다. 특히 324년부터 모후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헬레나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까지 했다(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를 찾았다고도 한다).
헬레나는 선술집 딸이었기 때문에, 부제가 되려면 정제의 딸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규정한 ‘사두정치’ 체제에 따라 남편한테 이혼당한 여자였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특히 불행을 맛본 어머니를 동정했다. 그 애정과 동정이 어머니가 믿는 종교에 대한 호의로 변해간 것은 아들의 심정으로서는 당연하지 않을까.
‘인스트루멘툼 레그니’(Instrumentum regni), 요컨대 ‘지배의 도구’
현실 세계, 즉 속세를 통치하거나 지배할 권리를 군주에게 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사고방식의 유효성을 깨달았으니, 콘스탄티누스의 정치 감각은 경탄할 만큼 뛰어나다. 권력을 위임하든, 반대로 권력을 리콜하든, 그것을 결정할 권리는 ‘가지’한 인간이 아니라 ‘불가지’한 유일신에게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또한 신의 뜻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진 누군가가 그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뜻이 성직자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것도 일상적으로 신자와 접촉하는 사제나 고독한 환경에서 신앙을 추구하는 수도사보다는 교리 해석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공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있는 주교가 더 권위있는 전달 코스다.
그러면 이 주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책을 썼을까. 조직의 우두머리는 반드시 자기가 정상에 앉아 있는 조직의 확립과 존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주교에게 그것은 자기가 관할하는 교구에서 벌어지는 각종 종교 활동을 비롯하여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사람과 돈을 확보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보장하고 더 늘려주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우대책에 덧붙여 교구 안에서의 사법권까지 주교에게 인정했다. 로마 제국은 이제 더는 법치 국가가 아니었다. 사법의 세계에서도 기독교도라는 사실이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주교는 무거운 세금을 못 견디는 납세자가 황제의 징세관에게 세금을 감면받기 위해 중재를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337년 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사두정치’ 시대에 강화를 맺었던 페르시아 왕국이 40년 만에 로마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벌써 62세가 되어 있었지만, 상대가 페르시아 왕국이라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다. 세 아들은 아직 21세와 20세와 17세로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을 맡기기에는 너무 젊었다.
하지만 60대 초반의 콘스탄티누스는 노쇠한데다, 제위를 획득할 때까지 경쟁자들과 싸우고 그 후 전제정치를 계속하면서 30년 동안 권력 쟁취와 유지에 기력과 체력을 쏟아부은 피로가 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니코메디아까지 왔을 때 그만 병석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채 5월 22일 죽음을 맞았다. 향년 62세였다.
시신은 역대 로마 황제처럼 화장되지 않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구되어, 생전에 그가 건설한 ‘성 12사도 교회’에 매장되었다. 역대 황제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로마는 이제 그 역할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
죽기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원래는 삼위일체설에 반대하는 아리우스파였던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기독교 쪽 사료는 전하고 있다. 다만 이것을 전한 사람은 황제에게 세례를 준 당사자로서 최고의 현장 증인인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가 아니라, 이름은 같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카이사레아 주교 유세비우스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음을 앞두고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1964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출판된 『The Later Roman Empire』의 저자로 로마 제국 후기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 A.H.M. 존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단지 성실한 기독교도들의 본보기를 따랐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보면 대죄가 될 게 뻔한 나쁜 행위도 현세에서는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독교도가 되기 위한 세례를 미룬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로마 제국이 되살아났다고 보는 연구자는 많다. 이들 두 황제는 로마 제국을 완전히 다른 제국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로마 제국을 일으켜 세워두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제국을 일단 일으켜 세워둘 수 있었던 기간은 100년도 채 안되었다. ‘팍스 로마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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