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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권 (1)

콘스탄티우스 황제와 율리아누스 황제

by Andy강성

로마인 이야기 제14권 『그리스도의 승리』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이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즉위한 서기 337년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395년까지의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제목과 같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두 황제, 즉 선제에 이어 그리스도교를 더욱 장려한 콘스탄티우스 황제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대정책을 철회해서 ‘배교자(Apostata)라고까지 불렸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아가 결국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고 교회의 힘이 황제의 권력을 사실상 누르는 것을 보여준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편의 머리글에서는 4세기의 로마 제국에 사는 귀족 가문 출신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빙의하여 바라본 당시 사회상의 단면이 나온다.

그가 변경을 지키는 데 헌신할 의지가 있다 해도, 원로원 의원에게는 군대에 들어갈 길이 막혀 있었다. 황제 밑에서 고위 관료가 되는 길도 막혀 있다. 로마 황제는 이제 동방의 전제군주와 같은 색깔을 띠게 되었고, 서방의 로마식으로 교양을 쌓은 원로원 계급 출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4세기에도 그처럼 지력(知力)과 행동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활약할 수 있는 길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회의 성직자가 되는 길이었다. 세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직자가 된 뒤에 세례를 받은 사람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사회의 상류층 출신이고 지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하급 성직부터 출발하지 않고 단번에 주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시대의 전환기에 살게 된 사람에게도 선택의 자유는 있다.

흐름을 탈 것이냐.

흐름을 거스를 것이냐.

흐름에서 발을 뺄 것이냐.

제14권에서는 이 가운데 어딘가에 속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1부 콘스탄티우스 황제 시대
(서기 337년~361년)

방해가 되는 자는 죽여라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라는 이유로 후세가 ‘대제’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것은 서기 337년 5월 22일이었다.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부터 헤아리면 13년을 야망 달성에 충분히 활용한 끝에 찾아온 자연사였다. 음모나 독살에 대한 의심은 뜬소문으로도 제기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중요한 임무는 후계자를 정하는 것과 그 후계자에 대한 업무 인계가 원활하도록 길을 정비해두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임무도 잊지 않았다. 죽기 2년 전에 이미 광대한 로마 제국을 다섯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방위와 통치 책임자를 정하고, 공표까지 해두었다.


콘스탄티누스와 황후 파우스타 사이에 낳은 아들은 위부터 차례대로 콘스탄티누스 2세(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였다. 아버지가 죽은 해에 이들의 나이는 각각 20세, 19세, 17세였다. 세 아들은 이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 아들 셋에게만 제국을 물려주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친아버지와 계모 테오도라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복동생이 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해에 이복동생 두 명(플라비우스 달라티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은 건재했고, 둘 다 아들을 두 명씩 두고 있었다. 그 네 명을 나이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갈루스, 율리아누스다.


제국 오등분


위의 둘은 콘스탄티누스의 친아들 세 명보다 조금 연상이었지만, 아래 둘은 갈루스가 12세, 율리아누스는 6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5년에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주고, 향후 권력 다툼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친아들 세 명에 조카 두 명을 합친 다섯 명을 제국의 방위와 통치를 분담하는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대제의 장례는 6월로 접어들자마자 기독교식으로 거행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달려온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Flavius Iulius Constantius)를 제외한 나머지 두 아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그리고 어려서 제위에 오르지 못한 조카인 갈루스, 율리아누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참석했다.


7월의 숙청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7월 무렵에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을 피로 물들인 숙청이 일어났다. 살해된 사람은 콘스탄티우스를 제외하고 대제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육친이었다. 대제의 육친 중에서 살해되지 않은 것은 12세인 갈루스와 6세인 율리아누스뿐이었다.


대제의 충실한 측근이었던 사람들도 숙청에 희생되었다. 관직명은 근위군단 장관이지만 서기 4세기의 로마 제국에서는 국무총리 역할을 맡아서 황제 다음으로 권력자 서열 2위에 있었던 아블라비우스도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사람 밑에 있었던 고위 관리들도 대부분 살해되었다.


19세의 젊은이 콘스탄티우스는 간단한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자신은 당시 황궁 안에 있었지만 이 사건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살해자들은 로마 제국의 제위는 죽은 황제의 친아들 세 명이 차지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공표되지 않았고 처벌받은 사람도 없었다.


제국 삼분


9월에 접어들기 전에 콘스탄티우스는 제국의 수도를 떠나 친동생 콘스탄스가 기다리는 판노니아 속주로 갔다. 도나우강 중류에 면해 있는 그곳에는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도 갈리아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회합에서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가 담당하고 있던 지역의 분할이 결정되었다.

이 새로운 분할에 삼형제가 동의한 뒤에야 비로소 아직까지는 ‘카이사르’인 세 사람이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는 문서를 지참한 파발꾼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했다. 두 수도의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사람의 퇴장


삼분할에 합의하고 갈리아로 돌아온 맏이인 콘스탄티누스 2세의 머리에서는 두 동생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게 되었다. 둘째인 콘스탄티우스는 한니발리아누스의 담당 지역과 달마티우스의 담당 지역인 트라키아까지 손에 넣었다. 막내 콘스탄스도 달마티우스가 맡았던 지역의 절반이 넘는 다키아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손에 넣었지만 맏이인 자기만 전과 똑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 출처 구글 이미지]

맏이는 막내에게 북아프리카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막내는 싫다고 거부했다. 형제 싸움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둘째 콘스탄티우스는 멀리 떨어진 동방에 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전투는 간단히 끝났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출처 구글 이미지]

콘스탄티누스 2세는 패전의 결과로 죽었다기보다, 휘하 장병들이 모두 도망치고 혼자 고립되어 일개 병졸처럼 사로잡히자마자 살해되었다. 그의 주검은 근처를 흐르는 강물에 던져졌다.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맏아들은 이렇게 무대에서 일찍 퇴장한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번에는 죽은 맏형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의 행방을 결정하기 위한 형제의 회담조차도 열리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방위와 통치를 담당했던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는 당연하다는 듯 막내 콘스탄스의 담당 지역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막내의 이 독단적인 행위에 대해 항의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3분의 2는 동생 콘스탄스, 나머지 3분의 1은 형 콘스탄티우스가 담당한 상태에서 서기 340년부터 350년까지 10년이 지나간다. 콘스탄스에게는 20세부터 30세까지의 10년이었다. 서방을 담당한 콘스탄스에게는 질리지도 않고 침략을 되풀이하는 북방 야만족을 격퇴하는 데에만 전념하면서 보낸 10년이었다.


또 한 사람의 퇴장


콘스탄스는 이 10년의 전과를 자신의 군사적 재능 덕분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만족한 나머지, 내정을 모두 남에게 맡겨놓고 있는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10년을 보냈다. 그가 내정을 맡긴 ‘남’이란 바로 그리스어로 ‘에우누코스’(eunouchos)라고 불리는 환관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도 황제의 이미지가 오리엔트풍으로 바뀌기 시작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 황궁 안에서 ‘에우누코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부터 좀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황제에게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권력의 아성인 황궁 내부에 ‘에우누코스’의 네트워크가 넓고 깊게 쳐진 것이다.


이러한 환관들의 네트워크로 인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쪽은 계속 살찌고 세금을 내는 쪽은 계속 여위어가는 것이 콘스탄스가 최고 책임자로서 통치하고 있는 지방의 실정이었다. 아니 지방이라기보다 로마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지역의 실정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황제에 대한 장병들의 불만이 언제 어떻게 무르익어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콘스탄스 휘하의 야만족 출신 장수로서 이 음모의 주역이기도 했던 마그넨티우스(Flavius Magnus Magnentius)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이미 병사들의 지지를 확보해두었다고 한다.


마그넨티우스는 야만족 출신인 자기가 그 자리에 앉으면 자극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탈리아 태생으로 콘스탄스 황제 밑에서 고위 행정관료의 지위에 오른 마르켈리누스를 내세우기로 했다. 이 인물은 조상 대대로 ‘로마 시민’이었던 모양이다.


서기 350년에는 리옹에서 파리로 가는 가도를 3분의 1쯤 북상한 곳에 있는 오툉 시내에서 숙영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스를 폐위시키고 그 대신 마르켈리누스를 옹립하기로 결정된 것은 그날 밤의 파티 석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스는 연회장에서 식사 시중을 들다가 몰래 빠져나온 소년 노예의 보고를 받고 사정을 알았다.

[프랑스 오툉 출처 구글 이미지]

콘스탄스는 그대로 달아났다. 하지만 피레네산맥 기슭까지 도망쳐왔을 때 추격해온 기병대에 따라잡혔다. 기병대장이 받은 명령이 ‘죽이라’는 것뿐이었는지, 황제는 따라잡히자마자 살해당했다. 시체는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되었다. 이것이 10년 동안이나 광대한 로마 제국의 3분의 2를 다스린 황제의 최후였다.


콘스탄티우스


이제 형제 중에 혼자 남게 된 32세의 콘스탄티우스(Flavius Julius Constantius)도 적어도 처음에는 혼자서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중책을 맡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중동과 유럽 양쪽에 적을 가질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와는 휴전하고 야만족 출신 장수인 마그넨티우스가 실권을 장악한 서방에 대한 대책을 우선하기로 했다.


법통을 이은 황제인 콘스탄스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은 자는 로마법에서는 국가반역죄를 지은 중죄인이라는 점이다. 황제는 그 반역자를 처벌할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다. 서쪽으로 행군하는 콘스탄티우스는 로마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일리리아 지방에 주둔하면서 도나우강 중류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로마군이 야만족 출신 장수가 황제를 자칭한 것을 알고 반발하여, ‘베트라니오’라는 이름의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살해된 콘스탄스가 혼자 맡고 있던 지역에 ‘황제’가 둘이나 양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초조해진 마그넨티우스는 서쪽으로 군대를 돌린 콘스탄티우스에게 말로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자기를 ‘카이사르’(부제)에 임명하고, 갈리아·브리타니아·히스파니아의 통치와 방위를 일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신 자기는 알프스 동쪽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이튿날 아침에 중신들을 소집해놓고, 간밤에 꾼 꿈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제의를 거부하는 이유를 말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든 뒤 꿈을 꾸었는데……” 32세의 황제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나타나셨다. 대제는 살해된 내 동생 콘스탄스를 두 팔에 안고, 우리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그 목소리로 나에게 아들을 죽인 자에게 복수해달라고 요구하고, 누구한테도 제국을 할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콘스탄티우스한테서 거부하는 회답을 받고 이제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마그넨티우스의 명령에 따라, 그의 휘하에 있는 정예 병력은 이듬해인 351년 봄에 알프스를 넘어 동쪽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베트라니오에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제의했다. 회담 장소는 로마 시대에 세르디카라고 불린 오늘날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였다. 노장은 기병 2만을 포함해 모두 4만 명이 넘는 병력을 거느리고 소피아에 나타났다. 은밀하게 이루어진 무대 뒤의 정상 회담에서 꿈에 나타난 대제의 계시를 언급했는지, 노장은 은퇴한 뒤의 안전한 생활만 보장받고 자기가 거느리고 온 병력을 콘스탄티우스에게 순순히 돌려주었다.

[불가리아 소피아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형국에서 마그넨티우스는 아예 작정을 했는지, 동생 데켄티우스를 ‘카이사르’(부제)에 임명하고 자신은 ‘아우구스투스’(정제)라고 자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제의 딸인 콘스탄티나가 이 야만족 출신 찬탈자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르메니아 왕위를 약속받고 있었던 남편 한니발리아누스를 13년 전의 학살사건으로 잃고 과부 생활을 하면서, 아르메니아 왕비의 지위까지 빼앗은 오빠를 줄곧 증오하고 있었다.


부제 갈루스


하지만 이 시기의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끝까지 휴전협정을 지켜준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마그넨티우스는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와의 대결이 언제 매듭지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결국 안티오키아에 상주하면서 페르시아군의 동향을 감시하는 한편, 제국 동방의 방위와 통치에 전념해 줄 ‘카이사르(부제)’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서기 351년 3월, ‘황제’ 콘스탄티우스한테서 ‘부제’로 임명된 갈루스는 제국 동방의 최대 도시인 안티오키아에서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해된 해에 12세 소년이었던 그도 이제 26세가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로 임명되는 동시에 황제의 누이동생과 결혼도 했다.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였다가 남편을 여의고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하여 오빠를 초조하게 만든 콘스탄티나다.


적장 마그넨티우스


서기 351년에 발칸 지방에서 콘스탄티우스 군대와 대결한 마그넨티우스 군대는, ‘역전의 용사’라고 평할 수밖에 없는 노련한 정예 집단이었다. 전쟁터로는 오늘날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경계에 있는 평원이 선택되었다. 드라우강이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이다. 그곳에서 싸우게 된 것은 총사령관 콘스탄티우스가 고집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아버지인 대제가 24년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경쟁자인 리키니우스를 격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그넨티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프랑크족 출신 기병대장 실바누스는 상관인 마그넨티우스를 버리고 휘하 기병과 함께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쪽으로 돌아섰다. 이리하여 마그넨티우스가 이끄는 병력은 3만 6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콘스탄티우스 진영은 8만 명을 훨씬 웃도는 규모가 되었다.


무르사 대회전


351년 9월 28일에 벌어진 회전은 키발라에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무르사(현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의 평원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마그넨티우스 군대는 드라우강을 왼쪽으로 바라보는 곳에 진을 쳤고, 콘스탄티우스 군대는 강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곳에 넓게 진을 쳤다.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출처 구글 이미지]

4세기에 이르면 회전 방식도 로마식이 아니라 야만족의 전법과 비슷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니까, 무르사 회전에서는 해가 떨어진 뒤에도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콘스탄티우스 쪽 기병이 마그넨티우스 쪽 보병을 궤멸시켰을 때 회전의 향방은 결정되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이긴 것이다. 기독교 주교와 함께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33세의 총사령관에게 최초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격돌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전사자가 엄청난 수에 이르렀다. 마그넨티우스 쪽에서는 3만 6천 명 가운데 무려 2만 4천 명이 전사했고, 승리한 콘스탄티우스 쪽에서도 8만 5천 명 가운데 3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전쟁터에 쓰러졌다. 양쪽을 합해서 5만 4천 명의 전사자를 낸 것이다. 내란에 불과한 이 무르사 회전이 끝난 뒤 로마 제국의 군사력이 결정적으로 약해졌다는 말을 듣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마그넨티우스는 병력의 3분의 2를 잃고도 나머지 3분의 1을 이끌고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드라우강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도망쳐서, 로마 시대에도 현대에도 ‘율리우스의 알프스’(Alpes Juliae)라고 불리는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로 들어간 다음 이탈리아반도 북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아퀼레이아까지 도망쳤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마그넨티우스가 기다리는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가지 않고, 적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던 지역 가운데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를 탈환하는 것을 우선했다. 에스파냐까지 적의 수중에 떨어져버리면, 피레네산맥까지 적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북이탈리아에서 콘스탄티우스를 맞아 싸울 작정이었던 마그넨티우스도 자신의 세력 기반인 갈리아가 위험에 빠지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리아에서 그의 본거지는 리옹으로 정해졌다.


루그두눔(Lugdunum)이라고 불린 리옹(Lyon)의 로마 시대 지도를 얼핏 보기만 해도, 로마인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리옹은 손강과 론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고, 파리의 센강에 떠 있는 섬보다 넓은 섬까지 있어서, ‘방위와 발전’이라는 목적을 둘 다 충족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인이 좋아할 만한 입지조건이다. 로마 제국이 이 리옹을 속주 리옹의 주도만이 아니라 갈리아 전체의 수도로 보고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갈리아의 도시들은 일단 마그넨티우스를 따르기는 했지만, 풍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무관심할 리가 없었다. 마그넨티우스가 공동 황제로 삼은 데켄티우스에게 우선 트리어가 성문을 닫았다. 다른 도시들도 그 뒤를 따랐다. 마그넨티우스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갈리아로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353년 8월 11일, 악화된 사태에 절망한 마그넨티우스는 리옹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데켄티우스도 이튿날 아침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35세의 나이에 마침내 아버지처럼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두 적장의 자결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그넨티우스 편으로 지목된 사람은 모두 재판도 받지 못하고 학살당했다. 그것은 무자비하고 철저한 처형이었다. 서기 351년의 무르사 회전과 353년의 대숙청으로 라인강과 북해에서 쳐들어오는 북방 야만족에 맞서서 갈리아를 지키고 있었던 로마군의 상급과 중급 장교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아버지보다 더 고지식하게 지킨 사람이었고, 신하들과 거리를 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식도 아버지보다 더 철저히 실천했다. 그런 콘스탄티우스와 신하들 사이를 연결해준 사람이 환관인 에우세비우스였다. 그것은 곧 콘스탄티우스에게 올라오는 정보의 대부분이 이 환관을 통해 전달된다는 뜻이었다.


형과 아우


갈루스가 ‘카이사르’(부제)에 취임한 것은 서기 351년 3월 15일이니까,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카이사르에 임명한 것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국 동방을 지킬 필요성이 절박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14년 전의 일이라고는 해도 자기가 죽이게 한 사람의 아들을 자기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부제’에 발탁한 것이다. 그래도 갈루스에게는 자신의 역량을 보일 좋은 기회였지만 야심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숙청된 지 14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에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 갈루스의 이복동생 율리아누스였다. 대제가 죽은 직후에 벌어진 숙청에서 12세와 6세의 형제는 목숨을 건졌지만, 큰아버지도 숙청되고 그 아들인 두 사촌형도 살해당했다. 고아가 되어버린 형제의 보호자는 아버지를 죽게 한 콘스탄티우스가 되었다.


니코메디아에 살고 있을 때는 엄격한 아리우스파 성직자들만 형제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율리아누스의 어머니를 어릴 적부터 가정교사로서 가르친 마르도니우스라는 이름의 스키타이인 거세 노예가 훨씬 가까이에서 형제의 교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늙은 노예는 어린 형제에게 그리스의 고전 철학과 문학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한 것은 동생인 율리아누스 쪽이었다.


이런 환경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형 갈루스가 18세나 19세, 동생 율리아누스가 12세나 13세쯤 되었을 무렵으로 여겨진다. 형제가 보내진 곳은 카파도키아의 마켈룸이었다. 주위의 산야도 황무지였지만, 머무는 사람이 끊긴 지 오래인 성채 자체도 황폐해져 있었을 것이다. 십대의 형제가 보내진 곳은 이런 곳이었다. 형 갈루스는 18세부터 25세까지, 동생 율리아누스는 12세부터 19세까지 7년 동안 일생에서 가장 민감한 시기를 이런 환경에서 보낸 것이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가 구원받은 것은 마르도니우스의 안내로 들어간 그리스 철학과 문학의 세계에서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 갈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늙은 노예가 정성껏 가르치던 시기에도 학문이나 문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갈루스는 환경이 일변하여 가혹한 현실 속에 내던져졌을 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힐 때마다 상처를 입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갈루스는 아직 26세였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휴전협정을 깨고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했다면, 페르시아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은 제국 동방의 로마군 통수권을 부여받은 갈루스였다. 부제에 취임하여 또다시 격변한 생활환경이 대도시 안티오키아의 호화로운 황궁이 아니라 야영지의 천막이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상처도 아물었을 테고 파탄 상태에 빠진 성격도 균형을 되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은 로마 황제와 맺은 휴전협정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카파도키아 고성에서 안티오키아 황궁으로 거처가 바뀌었어도, 갈루스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가뜩이나 의심이 많은 성질인데, 갈루스는 자신이 죽이게 한 사람의 아들이다. 갈루스를 부제에 임명하기는 했지만, 부제와 장병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온갖 수단으로 저지했다.


형이 부제가 되어 안티오키아로 떠나자마자 동생 율리아누스의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가 된 그에게 공적 지위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 서해안은 과거에는 이오니아라고 불린 지방인데, 이 지방에는 에페소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가 많다. 율리아누스는 거기에 머물면서 일개 철학도로 사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가 다른 곳에서 따로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부제의 처형


야만족 출신 찬탈자인 마그넨티우스를 타도하기 위해 제국 서방에 가 있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동방의 안티오키아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부제 갈루스와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황궁의 고관들은 사이가 아주 나빠서, 갈루스는 사사건건 그들과 충돌했다. 고관들은 부제에게 조언했을 뿐이라지만, 갈루스에게는 그것이 콘스탄티우스의 권위를 빌린 경고로 들렸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출처 구글 이미지]

황궁 생활이 견디기 어려워질수록 갈루스의 잔인한 성질이 고개를 쳐들었다. 유대교도가 모여 사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한 도시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란을 일으킨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갈루스가 지휘하는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러 출동했다. 반란은 간단히 진압되었지만, 그 후에 이어진 처벌이 도를 넘어섰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 도시는 시체만 겹겹이 쌓인 묘지로 변하고 말았다.


안티오키아 황궁 생활도 3년째를 맞을 무렵, 부제 갈루스의 증오심은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미워한 두 고관 가운데 하나는 콘스탄티우스가 파견한 사람이었다. 갈루스는 군대를 보내 이들 두 사람을 체포하여 안티오키아의 도심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죽이고, 도시 한쪽을 흐르는 오론테스강에 시체를 던져버렸다. 도저히 불상사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마그넨티우스 문제를 해결한 콘스탄티우스는 서방에서의 본거지를 북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정해놓고 있었다. 354년 당시 로마 제국의 정제는 밀라노로 부제 갈루스를 불러 들였다. 이제 갈루스도 그 초청이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소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제의 여동생인 아내 콘스탄티나를 먼저 밀라노로 보냈다. 오빠한테 남편을 변호해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리아에서부터 먼 길을 가는 도중에 병으로 쓰러져 곧 죽고 말았다.


앞서 보낸 아내를 뒤쫓듯이 안티오키아를 떠난 갈루스가 소아시아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를 들러 하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 터키의 에디르네)에 도착하자 황제의 명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영 우편마차 열 대에 나누어 타고 밀라노로 오라는 것이 부제에게 내린 정제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호송되는 곳도 어느새 밀라노가 아니라 아드리아해 안쪽 이스트라 반도의 풀라 요새로 바뀌어 있었다.


부제 갈루스는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부제의 인장을 빼앗기고 망토도 벗겨지고 투니카만 남겨졌다. 그가 끌려간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아니라 정제의 환관인 에우세비우스였다. 고문을 받고 갈루스는 정제 콘스탄티우스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 갈루스는 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이 잘렸다. 서기 354년 12월, 그의 나이 29세였다.


율리아누스 호출


이듬해인 355년에 접어들자마자 갈루스의 동생 율리아누스에게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호출장이 날아들었다. 일개 철학도로 살아온 율리아누스는 이제 23세가 되어 있었다. 형에게 일어난 일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가 밀라노로 오라고 호출한 것이다. 23세의 젊은이가 어떤 기분으로 호출장을 받았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제는 율리아누스를 호출해놓고도, 긴 여행 끝에 겨우 밀라노에 도착한 율리아누스를 두 달이 넘도록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황궁 안에 방치된 율리아누스를 만나러 오는 것은 황제의 신뢰가 두텁기로 평판이 나 있는 환관 에우세비우스였다.


그런 율리아누스를 구해준 것이 황후인 에우세비아(Flavia Eusebia)였다. 그리스의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젊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황후는 황제가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자식을 낳지는 못했지만, 황제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상대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드디어 율리아누스는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율리아누스는 정력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고 한다. 자기는 학문 이외에 다른 야심은 전혀 없다고.


[에우세비아 황후 출처 구글 이미지]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 후에도 율리아누스를 친하게 만나주지는 않았지만, 그리스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철학의 메카인 아테네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봄부터 가을까지 반년뿐이었다. 그해 가을도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율리아누스에게 황제의 호출장이 날아왔다.


율리아누스, 부제가 되다


서기 355년 11월 6일, 24세 생일에 율리아누스는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소집을 받고 모인 로마군 장병들에게 ‘부제’로 소개되었다. 율리아누스는 부제에 취임하는 동시에 결혼도 했다. 아내가 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딸이자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누이동생인 헬레나였다. 헬레나는 율리아누스보다 상당히 연상이었던 모양이다. 율리아누스는 부제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30일 눈 내리는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갔다.


율리아누스가 부제에 취임하고 그러자마자 최전선에 파견된 것은 황후 에우세비아가 뒤에서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소설가들은 말한다. 율리아누스의 생애가 극적이어서인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 많다. 미국 작가 고어 비달(Gore Vidal)이 쓴 『줄리안』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이런 소설들의 공통점이 황후 에우세비아가 율리아누스를 깊이 동정했고 그에게 정신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어 비달과 ‘Julian’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사랑하는 황후가 추천하지 않았다 해도, 콘스탄티우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율리아누스를 불러내어 부제에 임명하고 갈리아로 보내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율리아누스에게 도나우강이 아니라 라인강을 맡긴 것은 콘스탄티우스다웠다. 난이도가 더 높은 지역으로 부제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율리아누스는 군사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때까지 전쟁터는 가본 적도 없었고, 책상 위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병사들과 가깝게 접촉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24세의 젊은 나이에 갈리아 방면을 담당하는 로마군 사령관에 취임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성공을 기대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콘스탄티우스와 기독교


콘스탄티우스는 군사적 재능에서는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공헌도에서는 꽤 볼 만한 두 번째 주자였다. 대제가 깔아놓은 노선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것을 더욱 보강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우스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은 것도 그렇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아버지를 흉내낼 때가 많았다. 어느 연구자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배턴을 넘겨받은 뒤에는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2대에 걸쳐 실시한 기독교 진흥책을 시대순으로 구분하면 다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 : 기독교를 공인하여 다른 모든 종교와 동등한 지위에 놓는다.
제2단계 : 기독교만 우대하는 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튼다.
제3단계 : 배격하는 표적을 로마의 전래 종교로 명확하게 좁힌다.

제1단계와 제2단계의 본질적인 부분까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제2단계의 나머지와 제3단계까지는 콘스탄티우스가 맡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서기 346년, 제위에 오른 지 9년이 지난 콘스탄티우스는 면세의 테두리를 더욱 넓힌다. 아버지 시대에는 면세 대상자가 주교·사제·부제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콘스탄티우스는 교회의 고용인이나 교회 소유의 농지나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납세자 명단’이라 해도 좋은 ‘인구조사’(census)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성직자가 된 뒤에도 사유재산을 계속 소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는 말을 들을 만큼,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 우대정책은 다른 종교 중에서도 특히 로마의 전래 종교를 배척하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 우선 밤중에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로마의 전래 신들에게 바치는 공식 제의는 낮에 거행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것도 곧 금지되었고, 공식 제의에서 산 제물을 바치는 희생 의식도 금지되었다.


나아가 같은 시기에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법률도 공포되었다. 이어진 것은 신전 폐쇄 명령이었다. 이 금지령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만이 아니었다. 시리아의 태양신전과 이집트의 이시스신전도 폐쇄되었다. 다만 4세기 중엽에는, 우상 숭배는 금지했지만 아직 우상 파괴까지는 가지 않았다.


마침 이 시기에 은둔 현자로 유명했던 안토니우스가 시나이반도의 수도원에서 100세가 넘는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 중부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기독교 수도원제도의 창시자다. 천연 동굴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막지대는 외부와 완전히 접촉을 끊고 기도와 명상에만 전념하는 생활에 적합한지, 이집트와 시리아에 ‘수도원주의’라고 불리는 신앙 방식이 생겨났다.

[‘사막의 현자’로 불린 성 안토니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도 이 사막의 은자가 입에서 불을 뿜는 것은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를 공격할 때가 아니라 기독교회 내부의 ‘이단’을 비난할 때였다. 일부러 사막을 떠나 알렉산드리아까지 가서, 그 대도시의 주교관구를 지배하고 있던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을 맞대놓고, 너희는 최후의 이단자이고 적(敵)그리스도의 첫 전조라고 규탄했다.


아리우스파도 지지 않고 삼위일체설의 아타나시오스파의 교회나 수도원을 습격하여 파괴한다. 교리 해석의 차이가 감정 대립을 낳고, 급기야는 증오에 사로잡혀 폭력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문제는 아리우스파도 아타나시오스파도 자기네 해석이 옳고 상대편 해석은 틀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데 있었다.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시대에도 자주 공의회를 소집하여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런 공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을 자세히 추적하면, 남의 생각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배타성에서는 신의 뜻을 전할 자격이 있다는 주교들과 그런 자격이 없는 일반 신자들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밀라노 칙령’이 공포된 뒤 반세기 동안 기독교회의 실태였다. 율리아누스가 등장한 것은 이 시대였다.


갈리아의 율리아누스


밀라노에 머물고 있는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이 젊은 사촌동생을 부제에 임명한 것은 서기 355년 11월 6일이었다. 그런데 11월 30일에 벌써 율리아누스는 밀라노를 떠났다. 게다가 아내도 동반하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부제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출발한 것은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의향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제 갓 24세가 된 부제를 수행한 것은 호위병 360명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젊었다. 제국의 동방밖에 몰랐던 그에게 알프스 넘기로 시작된 이 갈리아행이 제국 서방의 실태를 눈으로 직접 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젊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갈리아 전역을 맡은 부제가 부임하는 곳부터가 리옹이 아니라 비엔(Vienne)이라는 사실이 당시 갈리아의 상태를 무엇보다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서기 355년도 거의 저물어갈 무렵, 부제 율리아누스는 비엔에 도착했다. 로마 시대에는 비엔나(Vienna)라고 불린 이 도시는 그르노블에서 리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도시로서 발전했기 때문에, 리옹을 대신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율리아누스가 도착한 곳도 이름뿐인 황궁이었다.

[프랑스 비엔느 출처 구글 이미지]

비엔에서 부제를 맞이한 사람들도 대부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환관 네트워크는 갈리아에도 쳐져 있었다. 무르사에서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콘스탄티우스 쪽으로 돌아섰던 실바누스의 불행한 최후가 좋은 예였다. 갈리아 담당 ‘기병단장’을 맡고 있던 실바누스가 반역의 모함에 걸려 처형된 것은 율리아누스가 비엔에 들어가기 석 달 전이었다. 이것으로 전선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또 하나 사라지게 되었다.


율리아누스의 갈리아 생활은 감시의 눈에 둘러싸인 느낌으로 시작되었지만, 소수나마 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갈리아에 온 뒤 율리아누스는 모든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좋은 의논 상대를 만났다. 그 사람은 갈리아의 군무장관인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였다.


부제로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지역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였다. 안전보장 면에서 말하면,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의 안전은 갈리아의 안전을 회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힘을 집중 투입하는 지역도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흘러드는 라인강 양쪽으로 한정된다.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 들어온 355년 말에는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야만족이 침입할 위험에 직접 노출되는 정도가 아니라 벌써 집 안까지 침입한 야만족에게 집을 점거당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350년에 일어난 콘스탄스 황제 암살과 그 주모자인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에 원인이 있었다. 갈리아의 방위 전력이 3분의 1로 줄어버렸고, 라인강을 건너오는 야만족의 침입이 이때부터 갑자기 늘어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율리아누스 부제가 파견된 곳은 이런 상태의 갈리아였다. 게다가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갈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야만족을 격퇴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병력도 보내주지 않았다. 병력 증강을 위한 자금도 필요한 액수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만 허가해주었다.


적극전법


서기 356년은 율리아누스가 부제로서 맞은 첫해다. 그런 그에게 들어온 첫 번째 보고는 로마 시대에는 아우구스토두눔이라고 불리던 오툉시가 야만족의 공격으로 위태로웠지만 근처에 이주해 있던 퇴역병들이 다시 무기를 들고 응원하러 달려온 덕분에 재난을 면했다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 휘하에는 활을 쏘는 궁병대와 중무장 기병대가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병사들만 거느리고 오툉으로 떠난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오툉에 머물면서 적을 기다리지 않고, 적을 뒤쫓아 더욱 북상하는 쪽을 택했다. 프로방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로마군 패잔병, 흩어져 있다기보다 야만족을 피해 숨어 있는 모든 로마군 병사에게 랭스로 집결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랭스로 갔다. 랭스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7개나 되는 간선도로가 모이는 도시로, 북부 갈리아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요지였다.

[랭스 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는 라인강 상류 서쪽에 펼쳐져 있는 이 일대에서 제멋대로 설치고 있는 알레마니족을 소탕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정했다. 율리아누스는 야만족을 피해 갈리아 전역에 숨어 있던 로마의 패잔병들을 소집했다. 랭스에는 2만 명 안팎의 병사가 모인 모양이다. 율리아누스는 이 병력으로 게르만족 중에서도 강대한 병력을 자랑하는 알레마니족에게 싸움을 걸기로 결심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모하지만, 젊음은 무모함을 유망함으로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젊기 때문에 기분이 동요하기도 쉽다. 어제까지의 자신감도 오늘은 불안감으로 바뀐다. 그럴 때 율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외치면서 스스로 자신을 격려했다고 한다.

“오오, 플라톤, 플라톤. 일개 철학도에 불과한데,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당시 알레마니족이 정착해 있던 곳은 나중에 프랑스와 독일의 분쟁 지역이 된 지금의 알자스-로렌 지방이었다. 알레마니(Allemagne, ‘모든 사람’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독일을 의미하지만, 프랑스인의 조상처럼 여겨지는 프랑크족도 독일인의 동포로 여겨지는 알레마니족도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게르만족에 속하는 부족이었다.

[알자스-로렌 지방과 알자스의 중심 도시 스트라스부르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는 고대에 루테티아라고 불린 파리를 지나는 선을 경계로 갈리아를 동서로 양분하고, 그 선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갈리아 동부를 야만족 격퇴의 전쟁터로 삼겠다고 전략을 세웠다. 그래서 24세의 부제는 랭스에 집결한 병력을 이끌고 용감하게 적을 찾아 동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중하지 못하게 적지가 아니라 자기편 땅을 가듯이 가늘고 긴 대형으로 행군한 것이다. 게다가 비구름이 낮게 깔린 언덕을 누비면서.


행렬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던 율리아누스는 행렬 후미에 있던 병사들이 소리도 없이 공격해온 개미떼의 먹이가 되듯 차례로 살해되고 있는 것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행렬 후반부에 있던 병사 대부분이 알레마니족의 화살과 창에 희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뼈아픈 타격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수비보다 공격으로 나간 것은 훌륭했다.


율리아누스와 그의 군대가 안전한 랭스로 돌아가지 않고 더욱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자, 서전의 승리로 기분이 좋아진 알레마니족이 이번에는 정면에서 그들을 습격해왔다. 이번만은 로마군도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식 회전 방식으로 싸울 수 있었다. 결과는 로마군의 우세로 끝났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파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로마군은 라인강으로 돌아갔다. 아마 6년 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어둡게 서 있는 쾰른의 폐허를 말없이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로마 시민인 주민들만이 아니라 쾰른을 파괴하고 불태운 야만족까지도 폐허가 된 쾰른 시내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 쾰른이 폐허로 변했다는 것은 라인강이 이제 ‘방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독일 쾰른 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는 병사들에게 서쪽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상스라는 도시에서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상스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병사들을 상스에서 겨울철 숙영지로 보내자마자 알레마니족이 쳐들어왔다. 겨울철 숙영지에 있을 터인 기병장관에게 급히 구원하러 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무엇 때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율리아누스는 곁에 있는 병력과 주민의 협력에만 의지한 채 절망적인 방어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야만족이 30일 뒤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틀어박힐 곳도 없는 평야에 천막을 치고 한겨울에 포위전을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이 30일 동안의 공방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인내를 보여준 율리아누스에 대한 경애심을 부하 장병들 마음속에 심어준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누스는 겨울철 숙영지를 선택하는 것도 전략의 하나라는 것을 배웠을 게 분명하다.


게르만족


서기 357년 봄과 함께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보내는 두 번째 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율리아누스도 25세가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행군을 명령하기 전에 중요한 일을 마쳤다. 그것은 ‘기병장관’(magister equitum) 마르켈루스를 해임하고, 일개 병졸 출신이지만 용맹하고 적극전법으로 알려진 세베루스를 그 자리에 대신 앉힌 것이다. 마르켈루스를 해임한 이유는 명령 불복종이었다.


율리아누스는 갈루스와 달리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총사령관으로서 기병장관을 해임하여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방식을 취했다.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는 오히려 당당하게 정면 돌파하는 편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실제로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가 그렇게 요청해도 보내주지 않은 지원군을 파견해주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오게 되었다.


이제 1만 3천 명의 병력을 거느린 로마 제국의 부제 율리아누스를 알레마니족의 족장 크노도마르는 3만 5천 명의 병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357년의 전투에서는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파견할 원군과의 합동작전이 실현될 것 같았다. 바르바티우스 장군이 이끄는 3만 병력이 밀라노를 떠나 계속 북상하고 있었다.


합동작전은 율리아누스가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스를 떠나 알레마니족이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동쪽의 스트라스부르로 진격한다. 한편 바르바티우스가 이끄는 3만 병력은 밀라노를 떠난 뒤 알프스산맥의 험한 산길을 지나, 바젤(Basel)로 가서 라인강을 건너 진격한다는 것이다. 합동작전의 목표는 이렇게 남쪽과 서쪽 양쪽에서 공격하여, 라인강을 건너온 알레마니족을 본거지와 함께 완전히 궤멸하는 것이었다.

[스위스 바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스트라스부르로 행군하고 있던 율리아누스는 바르바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알레마니족의 본거지 근처까지 진격하고도 거기서 행군을 멈추고 며칠 동안 대기하다가 밀라노로 돌아가버렸다는 소식을 받았다. 게다가 대기하고 있을 때 알레마니족 분견대와 마주치고도 공격하기는커녕 어떤 군사행동도 하지 않고, 눈앞을 지나가는 적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남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노릇인지를 율리아누스에게 깨우쳐주는 효과는 있었다. 25세의 부제는 1만 3천 명의 병력으로 3만 5천 명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각오를 굳힐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승리


당시 아르겐토라툼으로 불리던 스트라스부르는 야만족이든 누구든 전진기지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런데 늙었지만 전의에 불타는 족장 크노도마르(Chnodomar)가 성 밖으로 나가서 회전을 벌이자고 주장하자, 병력 수에 자신이 있는 알레마니족은 모두 찬성했다. 이것은 율리아누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그 견고하고 넓은 병영을 1만 3천의 병력으로 포위공격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처 구글 이미지]

기다리고 있는 알레마니족 대군을 향해 로마군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가 세 배나 많은 알레마니족 군대의 진형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우익은 언덕 너머 숲에 숨어 있었다(아래 그림 오른쪽). 반대로 로마군은 좁게 뭉친 형태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군의 전통인 ‘좌익·중앙·우익’의 진형은 갖추고 있었다. 좌익은 세베루스가 지휘한다. 중앙은 보조전력을 모아놓은 전위와 주전력을 모아놓은 후위로 나누고, 율리아누스는 그가 이끄는 200명의 친위대와 함께 전위와 후위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아래 그림 왼쪽).

[양군의 포진, 좌(율리아누스), 우(알레마니) 출처 유튜브]

야만족의 전술은 4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단순해서, 기병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보병을 한꺼번에 대거 투입하여 이기는 전법이다. ‘스트라스부르 전투’도 그렇게 진행되었고, 거의 성공할 것 같았다. 기병대끼리의 격돌은 야만족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반격을 당한 로마군 기병대는 힘껏 버텼지만, 곧 힘이 달려 아군 쪽으로 도망쳐왔다. 그러자 적의 본대가 로마군의 전위를 공격하여, 전위의 진형 한복판을 돌파했다.


율리아누스는 진두지휘를 하면서 스스로 싸우는 총사령관으로 일변한다. 율리아누스와 그 뒤를 따르는 친위대 200명은 무너진 기병대를 질타하고 무너지려는 전위를 격려하여, 패배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흐름을 막아냈다. 그리고 주전력인 후위가 다가오는 적의 대군 앞에서 꿈쩍하지 않았던 것도 다행이었다.

[전투 전개 상황 출처 유튜브]

생각보다 로마군이 오래 버텨내자 언덕 너머에 숨어 있던 적의 우익은 전황의 전개에 불안을 느끼고 결국 모습을 나타냈다가, 기다리고 있던 세베루스의 좌익에 격파당해 다시 숲속으로 도망쳤다.

[적의 기병을 물리치는 세베루스 출처 유튜브]

이렇게 되자 주도권은 완전히 로마 쪽으로 넘어갔다. 로마군의 병력 1만 3천 명이 전선 곳곳에서 공세로 나가자, 그보다 병력이 세 배나 많은 알레마니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후퇴가 아니라 패주였다. 그날 알레마니족 사망자는 전쟁터에 버려진 시체만으로도 6천 명이 넘었고, 강을 헤엄쳐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족장 크노도마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 로마군 전사자는 병사 243명에 불과했다.

[율리아누스의 대승 출처 유튜브]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율리아누스에게 그때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힘을 주었다. 부하 장병들에게 그는 이제 영웅이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것을 활용한다. 아직 계절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의 여세를 몰아 라인강을 건너 적지로 쳐들어간 것이다. 적지라 해도 100년 전까지는 로마 제국 영토였던 ‘게르마니아 방벽’ 안쪽이다.


알레마니족의 본거지를 야만족도 무색할 만큼 거칠게 휩쓸고 다닌 율리아누스와 로마군은 가을이 찾아오자 다시 라인강을 건너 서쪽으로 돌아온다. 서기 357년부터 358년에 걸친 겨울을 동계 숙영지로 결정한 루테티아(오늘날의 파리)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 사이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도나우강변에서 외적을 격퇴하여 제국을 방위하는 로마 황제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쪽의 적은 원수정 시대부터 로마의 국경을 위협해온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휘하의 병력은 10만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부하 장군들에게 전투 지휘를 맡길 수도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밀라노에 거의 줄곧 머물러 있었다.


도나우 전선의 결과도 뻔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357년 봄에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다. 공표된 방문 목적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아버지를 본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밀라노에서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일단 아드리아해로 빠져나간 뒤, 거기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에 도착한다. 로마에 입성한 것은 4월 28일, 39세의 콘스탄티우스는 영원의 도시(urbis aeternae) 로마를 난생처음 보았다.


로마에서 거행된 마지막 개선식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로마인이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 330년이 일단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율리아누스와 동년배가 된다. 암미아누스의 『연대기』(Rerum Gestarum, 31권)도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앞부분 13권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갈루스 부제 시대인 서기 353년부터 378년의 하드리아노폴리스 참패까지 25년에 대한 기술은 남았다.

[암미아누스의 연대기 출처 구글 이미지]


제국의 수도 로마에 사는 사람들이 황제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무려 45년 만이었다. 서기 312년에 거행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식 이후 처음이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로마 체류기는 현장 증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한 무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술로 대신하고자 한다.

<서방에서도 동방에서도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을 것처럼, 적은 모두 격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로마를 방문하여 개선식을 거행할 마음이 들었다. 개선이라 해도 그것은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같은 로마인의 피를 흘린 결과일 뿐이니까, 로마의 전통에 바탕을 둔다면 그가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은 없다. 그는 자기 힘으로 외적을 이긴 것도 아니고, 이겼다 해도 그것은 휘하 장수들의 공적 덕분이다. 위험한 전쟁터에서 진두지휘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개선식은 거행하고 싶었다. ..(중략)

개선식 준비에는 많은 사람과 많은 돈이 투입되었다. 북쪽에서 로마로 가는 행렬은 로마 성벽까지 130킬로미터나 남아 있는 지점부터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전투 대형을 짜고, 무장한 병사들이 길을 가득 메우며 끝없이 이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오랜만에 보는 이 구경거리를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고, 그들의 눈이 전차에 탄 황제에게 쏠린 것도 당연했다. 수도의 성문은 아직 멀었는데,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 귀족들이 모두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옛날의 영광이 남긴 빛을 질질 끌고 있을 뿐이지만, 콘스탄티우스는 그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고 지극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중략)

황제는 황금에 새겨넣은 수많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전차를 타고 그 군중 속을 나아갔다. 그 전차의 앞뒤에는 보라색 바탕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황제기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받아 로마에서 거행된 마지막 개선식 뱀처럼 구불거리며 이어진다. 전차의 양옆에는 2열 종대를 이룬 병 사들이 오늘을 위해 번쩍번쩍 윤이 나게 닦은 투구와 흉갑과 방패를 번득이며 행진한다. 기병대는 페르시아 기병처럼 온몸을 쇠갑옷으로 덮은 모습이다. 인간이라기보다 프락시텔레스(고대 그리스의 조각가)가 만든 동상 같다. 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나아가는 콘스탄티우스는 군중이 요란하게 환성을 지르는데도 전차 위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신하를 앞에 둔 군주의 모습을 허물어뜨리지 않았다.

전차가 너무 높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키가 작은 그도 문을 지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로마인은 가도에도 아치문을 만들어 장식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길을 가는 동안 그런 아치 아래를 몇 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콘스탄티우스가 한 유일한 동작이었다. 어쨌든 행렬이 나아가는 동안, 전차 위의 황제는 시선을 줄곧 앞으로 향한 채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돌리지 않았다. 목이 움직이지 않는 병이라도 앓고 있는 듯했고, 저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동상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면 모두 믿었을 것이다 전차 바퀴 하나가 갑자기 기울어졌을 때에도 콘스탄티우스는 자세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표정조차도 변하지 않았다. ...(중략)

마침내 행렬이 로마에 입성했다. 인간의 모든 역량을 쏟은 제국의 성지 로마에 들어간 것이다. 도심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 행렬은 포로 로마노로 들어갔다. 콘스탄티우스도 과거의 로마가 구가했던 압도적인 힘과 영광의 기념비로 가득 메워진 포룸을 보고는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이 포로 로마노에서는 로마 역사를 장식해온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는 건물과 부딪치게 된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업적이 이루어진 시대를 회고하며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39세의 콘스탄티우스도 개선식을 거행한 이상 로마 시민들에게 공고건물 등을 지어 기증하던 황제들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곰곰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 오벨리스크(고대 이집트 태양 신앙의 거대한 돌기둥)를 기증하여 대경기장에 세우자는 것이었다. 오벨리스크는 아버지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우려고 이집트 구석에서 끌어냈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로마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검투사 경기와 더불어 로마인이 열광한 전차경주를 위해 세워진 대경기장이기 때문에, 트랙 중앙에는 ‘등뼈’라고 불린 띠 모양의 공간이 옆으로 길게 놓여 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기증할 오벨리스크는 띠 모양의 공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오벨리스크와 한 쌍을 이루도록 세우기로 했다. 지금은 로마의 4대 교회 가운데 하나인 성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앞 광장에 서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 오벨리스크 출처 구글 이미지]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로마에 한 달쯤 머문 뒤,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도나우 방위선이 또다시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지금 야만족의 대거 침입을 허락하면, 막 거행한 개선식이 무색해진다. 그래도 겨울은 밀라노로 돌아가서 지낼 수 있었다. 휘하 장수들이 적의 침입을 막는 데 성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파리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율리아누스는 이듬해인 358년에는 라인강 하류로 전선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중류에서 상류에 걸쳐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알레마니족에게 356년과 357년에 2년 연속으로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프랑크족으로 공격 목표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율리아누스는 장병들의 신뢰를 얻어 비로소 갈리아의 통치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갈리아의 부흥


율리아누스가 맨 처음 한 일은 야만족에게 파괴된 갈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리옹, 오툉, 스트라스부르, 마인츠, 본, 쾰른, 그리고 노이스와 크산텐. 처음 두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는 모두 라인강을 따라 건설된 군단기지에 기원을 둔 도시들이니까, 이 도시들의 재건은 곧 ‘방위선’ 강화로 연결된다. 이 주요 도시들 외에도 10여 개에 이르는 성채와 요새가 재건되어 로마군 병사들이 다시 상주하게 되었다.

다음은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욕을 주민들에게서 끌어내야 한다. 율리아누스는 공정한 법집행과 공정한 과세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특히 세금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율리아누스에게 관료가 가져온 증세 방안도 여느 때처럼 특별세를 거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정책을 당장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첫째, 쓸데없는 지출을 없애고 비용을 절약할 것.
둘째,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할 것.
셋째, 특별세 신설로 세금을 늘리기는커녕 기존 세금도 줄일 것. 율리아누스의 감세정책은 ‘인두세’라고 불린 세금에서 당장 실행에 옮겨져, 그때까지는 25솔리두스였던 인두세가 7솔리두스까지 인하되었다고 한다.


이 대담한 감세정책과 병행하여, 율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갈리아 동부의 농경지를 정비하는 작업도 시작되었다. 농업용 수로와 홍수를 막는 제방 따위가 정비되어야만 비로소 생산 기반이 된다. 야만족의 침입과 내란으로 황폐해진 5년 동안, 이런 인프라가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배 600척을 새로 만들게 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병사들이 타는 군용선으로, 해적을 소탕하는 데 쓰였다. 나머지 절반은 수송선으로 하여, 브리타니아의 물산을 갈리아로 다시 운송할 수 있게 했다. 갈리아를 횡단하는 육로에 이어 북해에서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까지 다시 열리자, 브리타니아와 라인강변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물자 유통이 원활해졌다.


생활이 안정되면 민심도 안정된다. 민심이 안정된다는 것은 군사력을 이용한 방위가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아울러 안전보장 체제가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로마의 전통인 종합안전보장의 철학이기도 했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적어도 갈리아에서는 150년 만에 그 체제가 재현된 것이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는 콘스탄티우스도 부제의 공적을 인정했는지, 2천 리브라(6,560킬로그램)의 은을 원조금으로 보내왔다. 율리아누스는 병사들의 밀린 봉급을 주는 데 이것을 사용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콘스탄티우스는 특별세를 거부하는 등 내정에 참견하게 된 율리아누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회 있을 때마다 밀라노의 정제에게 고자질하는 갈리아 고관들의 의견도 받아들였다.


군사와 내정에서 율리아누스의 귀중한 의논 상대였던 살루스티우스를 장관에서 해임하고 밀라노로 전임을 명령한 것이다. 환관이 하는 일은 항상 이렇게 음습했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콘스탄티우스는 자기 혼자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율리아누스는 그런 데까지 두루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루스티우스라는 한 팔을 잘렸지만, 서기 358년과 이듬해인 359년에 율리아누스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도 1년 전의 1만 3천 명에서 2만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전투에서 이기면 병사들도 모여드는 법이다.


라인강 하류에서 침입하여 갈리아 북부를 휩쓸고 다니던 프랑크족도 율리아누스의 과감한 공격에 격파당하고 갈리아에서 쫓겨났다. 그뿐만 아니라 라인강 동쪽에 있었던 프랑크족의 본거지까지도 율리아누스가 진두지휘하는 로마군의 맹공에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이후에도 율리아누스는 자주 ‘방위선’을 넘어 적지로 쳐들어가서 적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전법을 썼기 때문에 라인강은 계속 ‘방위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로써 젊은 부제는 장병들만이 아니라 민중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갈리아에서는 출산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것도 알프스 서쪽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통해 동쪽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일은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 부임한 지 5년째에 해당하는 서기 360년에 일어난다. 24세에 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도 어느덧 29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2부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
(서기 361년~363년)


사산조 페르시아


4세기 중엽에 한정해서 말하면,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정세는 로마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것은 서기 297년에 당시의 부제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 왕을 이기고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결정된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시비스와 그 동남쪽의 싱가라를 최전선으로 하고, 거기에서 서쪽의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 그리고 티그리스강 동쪽에 있는 다섯 지방에 대한 지배권도 로마에 양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강화조약에 따른 두 대국 사이의 휴전 상태는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말기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이나 한 번도 깨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방위 전략상 로마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승리에 자만하지 않고 방위선을 철저히 강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이듬해에 벌써 샤푸르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니시비스로 초점을 좁혀 공격해왔다. 6년 뒤인 서기 344년, 샤푸르가 이번에는 싱가라 공략에 군대를 투입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샤푸르는 다시 니시비스를 공격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매번 로마군이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그리고 4년 뒤인 350년, 인도에서 온 코끼리 부대까지 참전한 세 번째 니시비스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즈음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를 탈취한 마그넨티우스를 토벌해야 하는 난제에 부딪혀 있었고, 페르시아도 동쪽에서 아시아의 야만족이 대거 침입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350년에 휴전협정이 성립된 것은 둘 다 국내에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두 나라의 직접 대결이 재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시기는 359년에 찾아온다. 아미다 공방전이 그 시작이었다.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는 아미다(Amida)는, 오늘날에는 터키어로 디야르바키르(Diyarbakir)라고 불리는 것이 보여주듯, 고대에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지금은 정제인 콘스탄티우스가 부제 시절인 십대 소년이었을 때 심혈을 기울여 요새화한 도시다. 도시 이름도 종래의 아미다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붙일 작정이었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이 아미다를 함락시키면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에게 통렬한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아미다는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지 73일 뒤에 함락되었다. 아미다에 틀어박혀 싸운 2만 명은 영웅적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만큼 용감하게 싸웠지만 패배했다. 함락당할 때 시내에 남아 있던 사람의 절반은 샤푸르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중부로 끌려가 수사시의 재건공사에서 노역을 했다.

[아미다(현 튀르키예 디야르바키르) 출처 구글 이미지]

율리아누스, 일어나다


아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콘스탄티우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원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우선 적이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인 10만 명과 맞먹는 대군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적의 수도가 있는 중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목표로 삼는 이상, 적지에서 싸울 때 반드시 필요한 보급로 확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게다가 유럽에서 온 병사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환경인 중동의 사막에서 싸워야 하는 불리함도 있었다.


사정이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서기 359년 겨울에 갈리아에 내려진 황제의 명령은 부제 율리아누스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 로마와 용병계약을 맺고 부족별로 편성되어 로마 쪽에서 군무에 종사하고 있는 야만족 부대인 ‘아욱실리아 팔라티나’(auxilia palatina) 4개 부대.

(2) 다른 부대에서도 부대마다 300명씩 선발.

(3) 부제에게 딸린 근위 기마대인 ‘스콜라이’(scholae) 2개 부대에서도 선발.

이들을 모두 동방으로 보내라는 것이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그래도 율리아누스는 사촌형이 보내온 명령에 따를 작정이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당시 그의 처지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방으로 파견될 당사자인 병사들은 따를 마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야만족 병사 4개 부대가 강경하게 반대했다. 로마군과 맺은 계약에 따르면 자신들은 알프스산맥 서쪽에서만 군무에 종사한다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병사들의 희망을 받아들이면 명령 불복종이 된다. 그렇다고 콘스탄티우스의 명령에 따르면 야만족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난처한 율리아누스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야만족 병사들은 무리를 지어 율리아누스가 사는 황궁 앞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율리아누스는 몇 번이나 황궁을 나와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을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율리아누스와 병사들의 단체교섭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그렇게 한 달을 허비해버린 서기 360년 2월, 사소한 일로 정황이 일변한다. 여느 때처럼 병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율리아누스를 한 무리의 병사가 별안간 안아 올려 방패 위로 밀어올리고 소리쳤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병사들은 율리아누스를 태운 방패를 전후좌우에서 둘러메고는 시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외치면서.


이 때 병사 한 명이 목에 걸고 있던 금목걸이를 풀어, 방패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율리아누스의 머리 위에 제관처럼 올려놓았다. 그 순간 ‘정제 율리아누스’를 외치는 목소리는 로마 시대에 세콰나(Sequana)강이라고 불린 센강 건너편까지 들릴 만큼 요란한 함성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율리아누스는 야만족의 방식으로 황제에 옹립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율리아누스는 그저 깜짝 놀랐을 뿐, 방패 위에서 해방되자마자 황궁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이튿날에도 병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율리아누스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심사숙고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또 다른 정제가 반역죄로 이 사건을 문제삼을 게 뻔했다. 환관 에우세비우스가 피둥피둥한 얼굴에 파묻힐 것 같은 가느다란 눈에 음습한 기쁨을 띠고 콘스탄티우스에게 속닥거리는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에우세비우스가 쏘는 독화살을 방패가 되어 막아주었던 황후 에우세비아도 얼마 전에 죽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의 누이동생인 율리아누스의 아내 헬레나도 아이를 두 번 사산한 뒤 건강을 잃고 갈리아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는 마침내 결심했다. 병사들 앞에 나타난 그는 ‘아우구스투스’(정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서기 360년 2월의 일이다. 24세까지는 일개 철학도에 불과했던 율리아누스도 이제 28세가 되어 있었다. 관례에 따라 제위 취임을 기념하여 나누어주는 돈도 얼마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로마식으로도 황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날부터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변명하고 타협의 길을 찾는 편지 교섭을 시작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하고, 황제 추대를 받아들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변명하고, 자신을 콘스탄티우스가 제국 서방의 ‘정제’로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편지 끝에는 항상 ‘카이사르’(부제)라고 서명했다. ‘항상’이라고 말한 것은 이 편지 교섭이 그 후 1년 동안이나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편지를 통한 탄원이 실패로 끝난 것은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에게 대답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를 토벌하러 서쪽으로 가려면 우선 페르시아 왕 샤푸르와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에게 지난 1년은 그 휴전협정을 맺기 위한 기간이었다. 이리하여 서기 361년 봄을 기해 콘스탄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돌아갈 준비를 갖추었다.


내전을 무릅쓰고


이 소식을 들은 율리아누스는 다시 결단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제위를 지키느냐 마느냐였고, 제위를 지킨다면 내전에 호소해서라도 지킬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다음과 같이 판단한 것 같다.


콘스탄티우스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서라도 속공을 우선하는 성질이 아니니까, 나를 토벌하기 위해 오리엔트에 집결해 있는 10만 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오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대군을 데려올 게 분명하다. 그 병력과 도나우강을 지키고 있는 병력이 합류하면 갈리아의 2만 3천 명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합류하기 전에 도나우 방위군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내가 택할 수 있는 방책은 속공밖에 없다.


양군 모두 집결 예정지는 도나우강 중류에 있는 시르미움이었다. 제국 후기에 중요한 도시였던 시르미움은 베오그라드에서 서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미트로비차다. 시간 승부에서는 율리아누스가 이겼다. 시르미움 앞에 도착한 1만 3천 병력을 보고, 수에서는 그보다 많았을 게 분명한 도나우 방위군은 율리아누스 쪽에 설 것을 승낙했다. 내전은커녕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율리아누스와 그의 군대가 벌써 시르미움을 떠나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간선도로를 행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율리아누스의 목적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동쪽 수도를 손에 넣을 작정인 것은 분명했다. 콘스탄티우스가 24년 동안이나 차지했던 제위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쓰러졌다. 주치의들은 상태가 절망적인 것을 당장 알아냈다. 아버지 대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우스도 죽음을 앞두고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죽음을 맞은 것은 서기 361년 11월 3일이었다. 그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싫어도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태어날 자기 자식을 맡긴다는 이유도 있었다.


서기 361년 12월 11일, 정통 황제이고 로마 제국 유일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율리아누스는 연도에서 그를 맞이하는 민중의 환호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며칠 뒤, 선제 콘스탄티우스도 고인이 되어 수도로 귀환했다. 그것을 맞이한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방식에 따라 몸소 장례식을 주최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매장되어 있는 12사도 교회에 그 아들 콘스탄티우스도 매장했다.


구조조정 대작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한 율리아누스는 먼저 황궁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자마자 황궁을 개혁한 것은 참으로 상징적인 일화를 발단으로 삼고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머리를 자르고 싶어서 황궁에 근무하는 이발사를 불러오라고 명령했을 때의 일이다.


율리아누스 앞에 나타난 것은 지체 높은 고관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율리아누스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면서, 필요한 것은 이발사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와서 자기가 이발사라고 대답했다. 율리아누스가 그러면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기한테 딸린 조수들이라고.

[콘스탄티노플 대궁전 출처 구글 이미지]

이처럼 황궁에서는 이발사만이 아니라 분야별로 제각기 계급 조직을 형성하여 거기에 또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로마 제국 후기의 황궁 실태가 거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직무가 무엇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매사에 참견하는 환관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환관 집단은 모두 해임되어 황궁에서 쫓겨났다. 또한 황궁 직무의 모든 분야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으로 축소되었다.


로마 제국 황제의 직무 수행 기지라 해도 좋은 황궁이 이렇게 복잡해지고 비대해진 것은 지배자인 황제와 피지배자인 국민 사이에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부터였다. 오리엔트화의 역사는 햇수로 77년에 이른다. 그렇다면 기득권층은 무려 77년 동안이나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기득권층이 호락호락 물러날 리는 없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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