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암브로시우스 주교
‘배교자’ 율리아누스
(Julianus Apostata)
'배교자' 율리아누스
역사상 율리아누스는 ‘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Julianus Apostata)라는 통칭으로 알려져 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번역된다. 기독교 세력이 강해진 제국 후기부터 사용된 ‘아포스타타’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라틴어로 ‘신앙을 버린 자’라는 뜻이다. ‘배교자’로 탄핵당하게 된 율리아누스의 반기독교적 정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로마 제국 국민의 종교를 ‘밀라노 칙령’ 상태로 되돌린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로마의 신들도,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도, 시리아에서 기원한 미트라 신도, 유대의 신도, 기독교 내부에서 싸워온 아타나시오스파도, 거기에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도, 다른 종파들도 모두 좋다고 인정한 것이다.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상, ‘이교도’라는 말도 ‘이단’으로 배척하는 마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면적 관용(totalis tolerantia)’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된 율리아누스 황제의 칙령이었다.
‘관용’을 뜻하는 라틴어 ‘tolerantia’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율리아누스는 그런 관용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다 못해 ‘전면적 관용’을 발령한 것이다. 그 증거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이 파괴한 그리스·로마 신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300년 전에 로마 제국이 파괴한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전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지난 50년 동안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가화는 점점 빨라지고 격렬해졌지만, 30세의 율리아누스는 그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기본적으로 믿는 것보다 의문을 품는 것에 익숙한 철학도였고 세습의 정통성을 위해 ‘신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주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50년 동안 계속된 기독교회 우대정책을 완전히 폐지하는 일도 주저 없이 철저하게 단행할 수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선전포고
지금까지는 국고로 교회를 지어서 기증했고 교회 활동비의 재원이 되는 교회 자산(농노가 딸린 농경지, 직공이 딸린 수공업 공장, 점원이 딸린 상점 등등)을 기부했지만, 율리아누스는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기독교회 성직자의 사유재산이나 교회 자산만 비과세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예외 없이 전면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국고로 건설된 교회를 몰수하거나 면세된 세금을 추징하기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기독교회나 교회 관계자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완전히 폐지하여 앞으로 그들의 세력 확대를 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쓴 『기독교회사』에도 나와 있듯이, 4세기의 로마 제국에는 사리사욕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다.
율리아누스의 본심은 이교의 부흥,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회가 ‘이교’로 단정한 그리스·로마의 종교를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황제가 공포하는 법률인 칙령은 로마 제국 후기에는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아도 바로 성립하여 실시되는 정책이 되었다. 문제는 그 정책이 과연 제대로 실시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가 반포한 법률은 그 점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신전을 재건하려 해도 기둥이나 석재는 대부분 사람들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산에서 새로 돌을 잘라낼 필요가 있었다. 신들을 믿지 않으니까 신전 주변의 토지를 농경지나 묘지로 전용할 때에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제의를 거행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지되었고, 이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으로 처벌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부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제 업무를 겸하던 시민들의 수도 많이 줄어 있었다.
율리아누스의 성급함
율리아누스는 철학도였을 때부터 좋게 말하면 정열적으로 열심히 말하는 젊은이였고, 나쁘게 말하면 말이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황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쉽게 성급해지거나 자기 확신에 빠져 즉흥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자기가 지금 하지 않으면 시대의 방향이 결정되어버린다는 사명감에 쫓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걱정은 사실이었지만.
이런 성급함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 율리아누스의 법률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도를 믿는 교사의 교직 추방령‘이다. 기독교도를 믿는 교사는 모두 교단에서 떠나라는 법률이다. 누가 생각해도 너무 무모하고 비합리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추방령에 대해 율리아누스가 제시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교사의 임무는 학생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때 사용되는 교과서는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쓰인 작품들이다. 그 저자인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자기네 신들을 경애하고 숭배했다. 그들의 저작은 그 정신의 결정체다. 한편 기독교는 이런 신들을 악마라고 단정한다. 그렇게 믿고 있는 기독교도에게 신들이 없으면 작품을 창조할 수 없는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정신의 진수를 어떻게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기독교를 믿는 교사는 교회에 가서 가르치면 된다. 그들이 믿고 있는 성서를 교재로 사용해서.”
하지만 이 법률은 오히려 이교도 교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교육에 열성적인 기독교도들 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까 우려때문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이교도들이 제기한 그런 반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독교도를 부모로 둔 아이들도 세상에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만이 아니라 다른 사고방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반기독교적 법률들은 율리아누스 사후에 모두 폐지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 세력의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차례로 실시한 여러 법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의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법률. 국비로 교회를 짓는 것을 금지하거나 교회 재산과 성직자 사유재산에 대한 비과세를 철폐한 것 등이다. 둘째,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정책화한 법률.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에서 언급한 ‘기독교 교사의 교직 추방령’이었던 것이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전문 사제 계급을 두지 않은 것이 그리스·로마 종교가 열세에 빠진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세력을 확대한 요인은 주교관구마다 주교를 우두머리로 하여 사제와 부제로 이어지는 엄밀한 계급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제인 율리아누스는 최고제사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국의 도시마다 전문 제사장을 임명하고 그 밑에는 전문 사제를 두었다. 이런 조직으로 같은 전업직인 기독교회 조직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신교 사회에서는 그 속성상 교회와 같은 전문 사제계급이 존재하기 어렵다. 또한 현실적으로 측면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면세를 철폐한 마당에 새로운 전문 사제 계급에게만 비과세를 적용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이 국비로 밥을 먹는 이상 기독교 수도사 못지않게 세간과 단절된 일상생활을 하도록 의무화하다 보니 널리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율리아누스의 전문 사제 계급 형성안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키아와의 악연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후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가 1년도 지나기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동쪽으로 간 것은 확실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페르시아와 다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은 야만족의 침입도 없고 국내의 반란도 없어서, 로마 황제가 해묵은 문제 해결에 몸소 나설 수 있는 조건이 확실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먼저 안티오키아로 들어갔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는데, 도시 규모는 로마보다는 작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훨씬 컸다. 이 도시는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제국을 분할한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던 셀레우코스가 세웠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였다. 그런 안티오키아가 그 왕조를 멸망시킨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뒤에도 계속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과의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밀 매점 사건
율리아누스의 안티오키아 체류는 처음부터 불행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해에 주변 지역의 밀 수확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흉년이 든 것이 알려지자마자 시장에서 밀이 자취를 감춘 이면에 투기꾼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확실했다. 그래서 율리아누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까지 특사를 보내 밀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리고 이 밀을 한꺼번에 시장에 풀어놓았다. 게다가 상한가를 정해놓은 통제가격으로.
그래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긴급 수입한 밀은 안티오키아 외항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로 옮겨지기 전에 상인들에게 매점당했기 때문이다. 자금이 풍부한 그들은 안티오키아 원로원에 의석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했다. 격분한 31세의 황제는 원로원 의원 200명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고, 상인들이 매점한 밀을 시장에 내놓게 된 것은 이 강경책 때문이었다. 안티오키아 상류층 사람들은 이 일을 계기로 적개심과 반감을 품게 되었다.
다프네 신전 사건
그리고 율리아누스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 이번에는 중견층과 하층계급 사람들의 적개심과 반감까지도 얻게 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프네(Daphne)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도시가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이고 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는 다프네는 옛날부터 웅장하고 화려한 아폴론 신전으로 유명했다. 사건은 율리아누스가 이 다프네를 참배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본 다프네의 아폴론 신전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고, 사제는 황제가 참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밭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다프네의 아폴론 신전에서는 오래전부터 신탁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율리아누스는 알게 되었다. 그것도 참배객의 발길이 끊긴 이유의 하나인데, 다프네 숲의 한 귀퉁이에 기독교 순교자가 매장된 뒤부터 신탁이 끊겼다는 것이다.
자기도 신탁을 받을 작정이었던 율리아누스는 이때도 분노를 폭발시켰다. 성난 황제는 기독교 순교자의 무덤을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아폴론 신전의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명령하고, 당장 공사를 시작하게 했다. 순교자의 유해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이장을 마쳤다. 하지만 다프네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복구공사도 끝나고 내일부터 일반 참배객은 물론 황제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날 밤, 화재가 일어나 다프네의 아폴론 신전이 다 타버렸다. 같은 무렵, 모든 종교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율리아누스의 명령으로 재건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던 유대교도의 성지 예루살렘의 신전도 한밤중에 불이 나서 타버렸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불상사의 범인이 기독교도라고 믿은 모양이다. 그래서 우선 대표적인 대도시에서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안티오키아의 기독교회를 모조리 폐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황제를 체격도 빈약하고 머리에 든 것도 빈약한 동물의 대표로 여겨지는 산양에 비유하여 조롱했다. 어쨌든 안티오키아로 거처를 옮긴 이후 율리아누스와 주민 사이는 계속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율리아누스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갈릴리 사람들(기독교도)이 믿는 것이 이 지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황제로서 실증해보고 싶네. 그들이 말하는 칭찬할 만한 가르침, 그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한테만 허용하고 게다가 천국에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그 미덕과 행복은 현세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제위에 있는 동안 정착시키고자 하는 공정한 통치를 통해, 그리고 종교와는 관계없는 복지사업을 통해 달성하고 싶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네. 따라서 이 진로를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내 반격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각오해야 하네. 그래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법에 따른 처벌이 내려지겠지. 따라서 그자들은 재산 몰수나 추방만이 아니라 쇠와 불로 처벌받는 것까지도 각오해야 하네.>
율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동안 많은 편지와 저작을 남겼다. 그 가운데 현대식 책자로 인쇄하면 40쪽도 채 안 되는 소품이지만 『미소포곤』(Misopogon)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https://misopogon.com/). 이 작품은 율리아누스가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분노를 터뜨린 내용인데, 직접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안티오키아 주민이다. 『미소포곤』은 결국 마음에 걸리는 문장으로 끝난다.
<지금까지 나는 생각을 모조리 토해냈다. 결국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였지만. 내 결점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물론 나한테 책임이 있다. 너희에 대한 너그러운 정책은 내가 결정해서 실시한 것이고, 거기에 대해 고맙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 해도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나에 대한 비난이나 악평은 내 생각이 부족한 탓이라고 체념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 너희가 나에게 ‘경의’를 표한 데 대해서는 신들이 대신 보상해줄 테니까.>
율리아누스는 『미소포곤』을 책으로 간행하여 널리 공표한 뒤, 책에도 쓰여 있듯이 “이제 두 번 다시 안티오키아의 흙을 밟지 않을” 각오로 이 대도시를 떠나 페르시아와 싸우러 갔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 중동 지방의 핵심인 안티오키아가 하나로 똘똘 뭉쳐서 페르시아 전쟁에 협력해주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서기 363년 3월 5일, 31세의 율리아누스는 후방기지인 안티오키아를 떠났다. 목적지는 동쪽,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중부 메소포타미아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전쟁을 후세에 사는 우리가 상당히 자세하게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안티오키아 태생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해서 기록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출정식은 이렇게 표면상으로는 아무 일 없이 끝났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유력자들도, 멀리서 지켜보던 안티오키아 주민들도 모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눈에 익었던 ‘X+P‘를 표시한 군기가 사라지고, 끝에서 은독수리가 빛나는 군단기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간다는 율리아누스의 의사표시였다.
안티오키아를 떠난 로마군은 동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베로에아에 우선 입성했다. 알레포에서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히에라폴리스로 간다.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히에라폴리스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넌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뒤에는 바투나에와 카레로 행군한다.
로마군은 카레에서 둘로 나뉘었다. 율리아누스와 네비타가 이끄는 제1군은 카레에서 남하하여 유프라테스강에 이른 뒤, 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키르케시움을 거쳐 중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적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간다. 총병력은 약 3만 5천 명.
3만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제2군은 카레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여 우선 성곽도시인 니시비스로 간 다음 아르메니아 군대와 합류하여 크테시폰에서 합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율리아누스의 친족인 프로코피우스와 이집트에 오랫동안 근무하여 오리엔트 사정에 밝은 역전의 용장 세바스티아누스가 그 지휘를 맡았다
규모도 준비도 대국 페르시아를 공격하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아르메니아 왕은 보병 2만 명에 기병 4천을 이끌고 참전하기로 약속했다. 이 병력을 합하면 이번 전쟁에 참가하는 총병력은 8만 9천 명이 된다. 페르시아 전쟁에 자신의 운명을 건 율리아누스의 기개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성패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제1군과 북쪽에서 티그리스강을 따라 내려가는 제2군의 합류에 달려 있는 것은 분명했다.
지상군과 선단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내려가 페르시아 영토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키르케시움에 도착한 것은 4월 7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벌써 몇 가지나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아르메니아 왕과의 사전 교섭이랄까, 그에 대한 회유 작전이 불충분했다. 둘째, 병참을 배에만 의존한 것. 셋째, 페르시아의 망명 왕자를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은 콘스탄티우스 황제 시절 입은 은혜에 감사해서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까지 한 사람이라서 콘스탄티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든데다가 '배교자'인 율리아누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병참을 육로와 병행하지 않고 1,500척의 선단만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은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또한 페르시아의 망명 왕자는 오히려 적국에게 반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여기에 마지막 잘못은 충신인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를 동행하지 않은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인사권을 가진 황제가 되자마자 살루스티우스에게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 서방의 통치를 맡겼다. 그는 제국 서방에 가려 해도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결국 완전히 신뢰할 수 있고 군사와 정치에 뛰어난 능력이 있으며 황제 앞에서도 제 의견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가까이에 둘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도 크테시폰
율리아누스가 이끄는 제2군의 페르시아 전쟁은 5월에 접어든 뒤에도 여전히 맞설 적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도시들은 대부분 성벽을 둘러친 구조였지만, 일부는 금방 투항했고, 투항하지 않은 도시들 중에도 끈질기게 저항한 곳은 거의 없었다. 페르시아 왕이 방위를 위해 병력을 보내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내려온 배에 실려 있는 무거운 공성병기를 수도 공략에 사용하려면 티그리스강 앞에 있는 수도에 최대한 가까운 지점까지 선단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고 있던 율리아누스에게 군단에 딸린 토목기사가 말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원정할 때 파놓은 운하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손보면 선단이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율리아누스의 선단은 공병으로 탈바꿈한 병사들이 정비하여 다시 물이 흐르게 된 트라야누스 운하를 지나 수도 근처에 공성병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수도 크테시폰을 앞두고 5월 27일에 로마군과 페르시아군의 본격적인 첫 전투가 벌어졌다. 공격하는 로마군의 총지휘는 31세의 율리아누스가 맡았다. 그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샤푸르 2세는 로마군과 맞서는 페르시아군을 후방에서 지켜보았다. 3만 5천 명의 로마군과 10만 명의 페르시아군의 대결이다.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격전이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우세하게 싸움을 이끈 것은 로마군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을 공략하지는 못했고 이날의 대승이 율리아누스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로마군 작전회의에서 아르메니아군과 함께 남하하기로 되어 있는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 비로소 화제가 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카레에서 갈라진 뒤 벌써 50일이 지났다. 50일 동안이나 율리아누스는 크테시폰 근처에서 합류하겠다는 약속만 믿고 있었을까.
제1군 병력 3만 5천 명으로는 크테시폰 공성전을 벌일 수 없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장기전을 각오하고 회전을 진행하면서 제2군의 행방도 찾고, 제2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는 생각을 입 밖에 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날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항은, 무엇보다 먼저 제2군과 합류하는 것이 선결문제니까, 제1군 병력 3만 5천 명과 함께 크테시폰에서 일단 후퇴하여 제2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자. 그렇게 결정하자 이제 운하를 통해 티그리스 강에 정박해 있는 1천 척이 넘는 선단이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배다리용 작은 배 30척만 남겨두고 나머지 배는 모조리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배에 실린 짐도 거의 그대로 태워버린다. 엄청난 양의 군량과 무기와 공성병기를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최대한 많은 양의 짐이 분배된 뒤, 배에 불을 질렀다. 1천 척에 이르는 대규모 선단이 불타는 것이다.
티그리스 북상
불타는 선단을 등지고 티그리스강의 동쪽 연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 로마군의 동정을 페르시아 왕은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로마군 병사들은 적을 격퇴하면서 행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샤푸르는 신하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참패를 맛본 크테시폰 전투를 설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크테시폰 앞에서 벌어진 그때의 회전과 마찬가지로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고 많은 왕족이 참전하고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 부대까지 참가한 본격적인 회전으로 도전해왔다.
전투는 6월 16일에 벌어졌다. 회전 방식의 전투에서는 역시 로마군이 강했다. 격투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페르시아 쪽이 다시 한번 엄청난 수의 전사자를 전쟁터에 남겨두고 후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쟁터를 가득 메운 페르시아군 전사자 중에는 왕을 대신해서 진두지휘를 맡았던 사령관과 샤푸르의 두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터 여기저기에 작은 산처럼 보인 것은 인도코끼리의 주검이었다.
과연 샤푸르도 두 번의 패배는 아팠는지, 그 후에는 다시 파상 공격을 되풀이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되돌아간다. 로마 병사들에게는 그것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행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면 로마 영토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유프라테스강은커녕 티그리스강도 건너지 않았다.
요절
서기 363년 6월 26일, 그날도 티그리스강을 서쪽으로 바라보면서 북상을 계속하는 로마군을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도 페르시아군은 이제 일상적인 행사가 된 코끼리 떼를 앞세운 공격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막사 안에 있던 율리아누스에게 적이 뜻밖에 후위를 기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황제는 흉갑도 대지 않은 채 기병용인 둥근 방패와 장검만 들고 말에 뛰어올라 행렬의 맨 뒤로 달려갔다. 그 뒤를 따른 것은 항상 황제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임무인 호위대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최고사령관을 겸한 황제다. 그런 사람이 흉갑도 대지 않은 채 뛰쳐나갔다는 것이 암미아누스의 기술이지만, 아무리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적의 기습으로 침착성을 잃고 도망치려던 후위도 급히 달려온 율리아누스의 질타와 격려로 안정을 되찾아, 습격해온 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전투가 끝날 무렵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말에 탄 율리아누스의 배에 깊숙이 꽂혔다. 율리아누스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하얀 투니카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주치의 올리바시우스가 율리아누스를 진찰했고, 그때 비로소 상처가 내장에까지 이른 것을 알았다. 이 우수한 그리스인 의사도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율리아누스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그날 전투의 최종 보고를 들었다. 밤이 되어 율리아누스는 이제 대부분의 고관에게 둘러싸여 침대에 누운 채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인생에 작별을 고할 때가 온 것 같소. 나는 항상 나에게 생명을 준 위대한 자연에 보답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철학에서는 삶은 고통이고 죽음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니까 즐거움이라고 가르치고 있소. 또한 철학은 현세에서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신들이 주는 마지막 포상이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소.
나는 지금까지 해온 일을 하나도 후회하지 않소. 남을 살해하지도 않고 비열한 짓도 하지않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세간에서 격리되어 있었던 시기에도, 그 후 권력을 혼자 독점한 시기에도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내 생각을 배신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마찬가지였소. 그것은 신들이 바라는 대로 살려고 애써왔기 때문이오. 정치에서는 선정을 베풀려고 항상 명심했고, 전쟁을 시작할 때도 심사숙고한 끝에 다른 방책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소.
그 결과가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결과가 좋으면 신들이 도와준 덕이고 결과가 나쁘면 인간의 잘못으로 돌리는 게 보통이오. 그래도 나는 제국이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데 그 존재의의가 있다고 믿고 행동해왔소.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의 내 정책도 모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소. 이것만은 주저 없이 단언할 수 있소.“
여기서 율리아누스는 가느다란 숨을 길게 토해낸 뒤 말을 이었다.
"이제 말을 계속할 수가 없소. 힘이 사라져가는 것을 나 자신도 알 수 있소. 이제 죽음 이 바로 저기까지 와 있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남겨두어야겠소 그것은 다음 황제에 대한 이야기요. 이름은 말하지 않겠소. 내 선택이 사려분별을 잃은 결과가 될지도 모르고, 장병들이 지지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치명적인 피해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선택은 당신들한테 맡기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로마 제국에 사는 사람들이 내 후임자의 치하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오.”
율리아누스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찬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하인이 가져온 연보라색 유리그릇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31년 7개월의 생애. 황제가 된 뒤 1년 7개월,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한 뒤 3개월 20일, 선단을 불태우고 철수하기 시작한 지 25일 뒤의 죽음이었다.
율리아누스 이후
다음 황제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장군과 고관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선제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승진한 사람들과 율리아누스 시대에 발탁된 사람들로 나뉜 것이다. 전자는 대부분 기독교도였고, 후자에는 이교도가 많았다. 두 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교도지만 기독교도한테도 평판이 좋은 살루티우스로 후보가 좁혀졌다. 하지만 온건하고 풍부한 양식을 갖춘 이 관료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도 능력은 떨어지지만 해를 끼칠 염려도 적은 인물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체격은 좋았지만 병사들의 소문에도 올라본 적이 없는 요비아누스(Flavius Claudius Jovianus)가 율리아누스의 후임 황제로 선출된 것이다. 이튿날인 27일, 요비아누스는 병사들에게 소개되었다. 장군들의 훈령이 병사들에게 침투해 있었는지, 병사들은 칼로 방패를 두드려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요비아누스는 기독교도였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이 무렵에야 제2군 3만 명이 남하해왔다. 율리아누스한테서 제2군을 맡은 프로코피우스와 세바스티아누스는 아르메니아 왕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늦었다고 이유를 댔지만, 석 달 동안이나 소식불통이었던 것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잘못이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왕은 결국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으니까, 그들은 석 달을 허송세월한 것밖에 안 된다.
강화 체결
요비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지 나흘 뒤, 새 황제와 장군과 고관들이 모두 참석한 작전회의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에게 강화 사절을 보낼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황제 특사에는 살루티우스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7월 1일, 샤푸르가 보내온 페르시아 쪽 특사와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실상은 교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왕이 제시한 조건을 로마 쪽이 모조리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강화가 체결된 후 요비아누스 황제는 초가을에는 이미 안티오키아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율리아누스를 싫어했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아닌 주민들도 율리아누스의 죽음을 반가운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새 황제를 도시 전체가 열렬히 환영했다.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동안 요비아누스 황제는 정력적으로 연달아 법령을 공포했다. 그 법률들은 모두 율리아누스가 결정하고 실시한 정책을 무효로 돌리는 것들뿐이었다. 율리아누스가 이미 실행에 옮긴 법률 중에서도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남을 만큼 문제가 없는 법률은 남겨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행정과 관련된 법률이었고, 기독교 세력 확대에 제동을 걸기 위해 만든 법률은 모조리 폐기되었다.
이런 일을 모두 마친 요비아누스가 안티오키아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한 것은 서기 363년 말이었던 것 같다. 도중에 소아시아 남해안에서 364년 새해를 맞았다. 그 후에도 역시 율리아누스 이전처럼 호화로운 행렬을 거느리고 느긋한 여행을 계속했지만, 2월 17일 아침에 숙소로 삼고 있었던 그 지방 유력자의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전날 밤의 과음과 과식 때문이라고만 발표되었다.
후임 황제를 결정하는 회의에는 요비아누스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고 있던 고관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번에는 새 황제가 빨리 결정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였다. 도나우강 방위군에서 경력을 쌓은 순수한 무인이고, 순수한 북방 야만족 출신으로 게르만인 황제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새로 제위에 오른 이 게르만족 출신 황제는 율리아누스 시대에 특별히 총애를 받지 못했다. 율리아누스 반대파가 그를 자기파로 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없이 북방 야만족에 가까운’ 로마 황제의 11년에 걸친 치세가 시작되었다. 19개월에 걸친 율리아누스의 치세는 환상이었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싶어 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그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삶과 죽음
후세가 믿고 있는 것처럼 4세기의 로마 제국이 기독교 일색은 아니었다.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제국 동방에서도 이교도는 아직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율리아누스의 즉위를 계기로 각지에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이교도의 반격이 자주 일어난 것이 그것을 실증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시대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치세가 19개월이 아니라 19년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19년 동안 그가 던지는 돌멩이의 수도 늘어났을 것이고, 결국에는 흐름을 바꾸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로마인들도 기독교도라는 것이 현세에서 이익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현세의 이익과는 무관하고, 개개인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종교가 현세까지 지배하는 데 반대한 율리아누스는 고대에는 유일하게 일신교의 폐해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대의 유식자들은 다른 신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를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신교의 폐해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까지도 율리아누스에게 던져지는 ‘배교자’라는 경멸은 깊은 의미가 담긴 통칭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것은 31세에 요절한 이 반역자에게 바쳐진 가장 빛나는 시호인지도 모른다.
제3부 암브로시우스 주교
(서기 374년~397년)
율리아누스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가 7개월 뒤에 주검으로 발견된 뒤 제위에 오른 발렌티니아누스의 치세도 서기 374년에는 10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상태로 1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노쇠했고 43세에 제위에 오른 발렌티니아누스가 무장으로서는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족 출신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게르만족 혈통이지만, 태어나서 자란 곳은 로마 영토인 판노니아였다. 서기 321년 무렵에 오늘날의 헝가리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해당하는 도나우강 연안에서 태어났다. 황제가 된 지 한 달 뒤에 친동생 발렌스(Flavius Julius Valens)를 부제가 아니라 자신과 대등한 격을 가진 공동 황제에 임명했다.
형제는 위의 지도처럼 제국을 양분했다. 형은 서방, 동생은 동방을 맡았다. 형이 서방을 맡은 것은 이 시기에는 문제가 제국 서방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에게 ‘문제’는 무엇보다도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방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왕 샤푸르는 서기 379년에 죽지만, 그것은 속이 텅 빈 거목이 조용히 쓰러지는 것과 비슷했다. 70년이나 나라를 다스린 훌륭한 군주의 뒤를 잇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 이후 페르시아 왕국에서는 왕위가 안정되지 않았고, 로마 제국에는 그것도 다행이었다.
동방의 적인 페르시아와는 달리 서방의 적인 북방 야만족은 아무리 격파해도, 또는 반대로 아무리 자기편으로 끌어들여도, 그 수가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났다. 먹고살 수 없는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곳으로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다.
이렇게 야만족은 제국 서방 전역에 걸쳐 침입을 되풀이했지만, 그래도 발렌티니아누스는 그들을 격파하여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한곳에 오래 앉아 있을 틈도 없이 각 전선을 뛰어다니며 계속 진두지휘를 맡았다. 유능한 인재는 출신 민족을 문제 삼지 않고 발탁하여, 혼자서는 다 소화할 수 없는 지방의 전투를 맡겼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싫어했다. 이 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교도’였다. 그리고 이들의 메카는 로마 원로원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오랜 명문 집안 출신인 이 원로원 의원들에게 황제에 대한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물리적으로 말살했다. 로마 원로원 의원의 수가 3분의 2로 줄어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야만족 출신도 일단 황제가 되면 자기 핏줄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죽은 아내와의 사이에 그라티아누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 맏아들에게 일찌감치(여덟 살 되던 해에) ‘황제’의 칭호를 주었다. 또한 정통 황제라는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유복녀 콘스탄티아와 혼인시켰다.
발렌티니아누스에게는 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또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황제가 된 뒤에 태어난 이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받아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라고 한다. 아버지의 치세가 10년째를 맞은 서기 374년에는 겨우 세 살이었다.
하지만 11년째에 들어와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375년 11월 17일,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54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해에도 북방 야만족을 상대로 우세하게 전투를 치르고, 겨울철 휴전기에 접어들어 야만족 대표들을 접견하고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가 쓰러져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47세가 된 발렌스 황제는 그대로 계속 제국 동방을 통치한다. 제국 서방은 이미 ‘황제’ 칭호를 가진 16세의 새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그대로 물려받아도 좋았지만, 그는 네 살밖에 안 된 이복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황제’(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주고, 이탈리아를 떼어 주었다. 그리고 후견인 자격으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로 이제 막 과부가 된 어머니 유스티나가 황제와 함께 본거지인 밀라노에서 살게 했다.
훈족 등장
모든 것은 훈족의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을 모태로 삼는 훈족은 지금까지 로마 제국이 알고 있는 어떤 북방 야만족과도 달랐다. 이들에 대한 기술은 앞으로 100년 동안의 로마사에 자주 나오지만, 그 시작은 4세기를 4분의 1쯤 남겨둔 이 무렵이다. 이 훈족에게 습격당한 동고트족이 남서쪽으로 도망쳤다.
물론 동고트족은 평화롭게 도망쳐온 것이 아니라 무기를 손에 들고 쳐들어왔다. 그들에게 살 곳을 빼앗겨버린 것은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유역에 살고 있던 서고트족이었다. 서고트족은 로마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영토인 도나우강 남쪽에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 무장을 해제하고, 군무에 적합한 남자들은 로마군에 들어가 병사가 되며, 나머지 남자들과 여자들은 주어진 땅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서고트족의 제안은 동방을 맡고 있던 발렌스 황제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첫째, 도나우강을 지키는 로마군의 군사력이 증강된다.
둘째, 야만족의 습격이나 그밖의 요인으로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던 국경 지대가 다시 풍요로운 농경지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발렌스 황제는 당시 머물고 있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트라키아를 담당하는 행정장관에게 서고트족의 로마 영내 이주를 인정하는 공문서를 보냈다. 야만족의 이주지를 도나우강 남쪽에 펼쳐진 트라키아 관구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트라키아 관구에 정착한 서고트족의 무장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로마 제국에 기대했던 생활 보장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겨울로 접어들어 처자식의 고생이 더욱 심해진 것을 본 남자들은 무기를 버리기를 거부했다. 이주해온 고트족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었고, 그와 함께 그들은 야만족 정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야만족 정신이란 고생을 참고 견디기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생계를 꾸리는 것을 좋게 보는 사고방식이다. 야만족의 이 회귀 현상은 우선 주변 촌락을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약탈의 물결은 트라키아에서 서쪽의 다키아와 남쪽의 마케도니아까지 미치게 된다. 이미 로마 제국 영내에 들어와 있는 적이 서쪽과 남쪽으로 약탈과 폭행의 물결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 물결은 트라키아 지방의 주요 도시인 마르키아노폴리스를 덮쳤을 때 그것을 맞아 싸운 로마 방위대를 격파한 뒤에는 기세가 더욱 강해지고 속도도 더 빨라진 모양이다. 로마 황제로서는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참패
이듬해인 서기 378년 봄을 기다려 발렌스 황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로마 제국 동방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5월 말에 도착했다. 적을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하려면 제국 서방을 담당하고 있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발렌스의 조카인 그라티아누스는 19세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해오는 야만족과 싸워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라티아누스는 당장 숙부에게 편지를 써서 전령 편에 보냈다. 편지에는 알레마니족을 격퇴하자마자 달려갈 테니까 그때까지 싸우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써 있었다.
하지만 발렌스는 적이 1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조카를 기다리지 않고 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378년 8월 9일 이른 아침에 하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 터키의 에디르네) 성문을 나선 발렌스와 그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적을 찾아 북서쪽으로 향했다. 햇빛이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적을 발견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우익·중앙·좌익·기병대라는 전통적 진형을 갖춘 회전 방식을 택한 반면, 상대인 고트족은 부족마다 개별적으로 공격해오는 분산형으로 응수했다. 발렌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각 부문을 기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이 부족했다.
결국 해가 지기도 전에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로마군은 고관 2명, 대대장 35명, 그리고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수의 병사를 잃었다. 발렌스 황제는 소수의 신하와 함께 도망치다가 오두막에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죽었다. 제위에 오른 지 14년째, 50세에 맞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완패한 것은 로마 제국에 사는 많은 로마인에게 강한 타격을 주었다. 안티오키아 태생의 그리스인이었지만 기독교도는 아니었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군단에서 반평생을 보낸 뒤 나머지 반평생을 바쳐서 쓴 네르바 황제 이후의 로마사를 하드리아노폴리스 패전으로 마무리했다. 로마 제국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로마 제국에 대해 쓸 것이 없다는 듯.
그리고 율리아누스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철학자 리바니우스는 하드리아노폴리스 패전을 알고 이런 글을 썼다.
<우리 장병들에 대해 겁쟁이였다느니 의지가 박약했다느니 게으름뱅이였다느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만두자. 또한 야만족이 병사로서 더 우수하다는 주장도 듣고 싶지 않다. 적은 이제 사기에서도 전술에서도 꼼꼼함에서도 우리 장병들과 완전히 대등한 수준에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보다 더 명예를 중시하고, 영광을 얻고 싶어 하고, 더위도 굶주림도 갈증도 견뎌내고, 창이 내려와도 불길이 살을 태워도 계속 싸운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전쟁터에서 달아나는 것보다 휠씬 감미롭다는 듯이. 이런 적이 우리를 앞지르는 것은 언제일까. 그들의 멈추지 않는 기세를 보면, 우리의 전통적인 신들 가운데 계속 소외되고 배제당하는 누군가가 우리한테 화가 나서 야만족 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등장 (379년)
제국의 동방은 발렌스의 죽음으로 제위가 비었다. 게다가 발렌스 황제가 통치하던 지역의 서부에 해당하는 발칸 지방은 고트족을 중심으로 한 북방 야만족이 점거하고 있어서, 로마 황제는 손을 댈 수도 없는 무정부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정치와 군사의 최전선에 서야 할 황제는 19세의 그라티아누스 이외에는 이제 갓 일곱 살이 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뿐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에스파냐로 몰래 사람을 보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를 데려오게 했다. 그해에 31세였던 테오도시우스의 부친은 그라티아누스의 아버지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많이 세운 무장이었다. 군대 안에서는 최고사령관인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인 ‘기병장관’에까지 승진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불만스럽게 생각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있을 때,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곳 행정장관의 모략에 빠지고 말았다. 젊은 새 황제는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않고 제국의 공로자였던 이 역전의 용장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북아프리카 행정부는 당장 그를 처형했다. 서기 376년의 일이다. 그런데 2년 뒤 아버지의 사형 선고에 서명한 장본인이 그를 불렀다. 물론 그라티아누스도 2년 전의 일을 잊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러낸 그라티아누스도 재미있지만, 부름을 받고 찾아온 31세의 테오도시우스에게 19세의 황제가 꺼낸 이야기가 또 재미있었다. 2년 전의 일은 물에 흘려버리자고 말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대등한 격을 가진 황제에 임명하여 죽은 발렌스 황제가 통치하고 있던 제국 동방을 모두 맡길 테니까,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당한 참패로 충격을 받은 제국을 재건하는 데 협력해달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역시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니, 조건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당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이다. 그라티아누스는 쾌히 승낙하고, 당장 그것을 공표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치세도 당시 도나우 방위선에서 가장 중요한 기지였던 시르미움에서 로마군 장병들에게 소개된 날부터 시작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자기에게 맡겨진 제국 동방에 포고령을 내려 현역 병사나 퇴역한 병사의 아들들을 신병으로 모집했다.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이어받는 직업 세습제가 법제화된 지 오래였지만, 좀처럼 말단에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제의 이름으로 병사의 아들들을 강제 입대시켰다. 징집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모은 병사들이라 규율을 지키게 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었다. 최고사령관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소속 부대장에게 복종하는 마음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군단 안팎에서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문제를 훈련으로 해소하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종래의 관례를 깨는 강경책을 취했다. 제국 동방에서 모집한 병사는 서쪽으로, 서방에서 모집한 병사는 동방으로 보내는 완전 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서기 379년에 테오도시우스와 그 군대의 눈부신 활약은 고트족이 눌러앉아 있던 트라키아와 다키아의 도나우강 하류 남쪽 지방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는 관할 구역에서 벗어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고트족이 도망친 일리리아 지방까지 추격해 들어갔다. 그대로 가면 고트족을 도나우강 북쪽으로 완전히 몰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야만족의 이주를 공인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결단을 내렸다. 고트족을 도나우강 북쪽으로 몰아내지 않고 도나우강 남쪽에 정착지를 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라티아누스 황제도 동의했기 때문에, 이 결정은 두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서고트족에게 주어진 지방은 트라키아 북부, 도나우강 하류에 접해 있는 일대였다. 이곳은 오늘날의 불가리아에 해당한다.
나중에 이주 대열에 합류했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서고트족과 함께 싸운 동고트족에게는 도나우강 중류 유역에 있는 판노니아주의 동부 일대가 주어졌다. 이곳은 오늘날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해당한다.
로마를 계속 적대시한 페르시아 왕은 죽고, 야만족도 담장 안으로 끌어들인 효과인지, 로마 제국은 동방도 서방도 소강상태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유가 생겼는지,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율리아누스의 출현으로 중단되었던 친기독교·반이교 노선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동방을 담당하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그라티아누스의 노선을 따른다. 게다가 두 황제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한 인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친기독교 노선의 부활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La Scala) 극장의 시즌 개막일은 12월 7일로 정해져 있다. 그날이 밀라노의 수호성인인 성 암브로시오의 축일이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것이고, 원어인 라틴어로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다.
이탈리아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 가운데 ‘우오모 디 투테 레 스타조니’(Uomo di tutte le stagioni)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모든 계절에 적합한 남자’인데, 어느 시대나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속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암브로시우스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이 인물의 이름은 성 암브로시우스가 된다. 태어난 해는 서기 330년. 나이로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같은 세대였다. 로마의 명문 집안 출신이고, 그래서 조상 대대로 원로원 의석을 가진 신분이었다. 아버지는 각 지방의 장관을 지낸 뒤 ‘수도장관’(praefectus urbi) 자리에까지 올랐고,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운명의 전기는 암브로시우스가 43세가 된 해에 찾아온다. 그해에 그는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리구리아주(프로빙키아)와 아이밀리아주의 ‘장관’을 맡고 있었다. 밀라노도 그의 관할이었는데, 그 밀라노에서 아리우스파와 거기에 적대하는 삼위일체파 사이에 물리적인 실력 행사를 동반한 항쟁이 일어났다.
아리우스파 주교 밑에서 오랫동안 냉대를 받아온 삼위일체파가 주교의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쌓인 원한을 폭발시킨 만큼 그들의 반격은 격렬했고, 그래서 밀라노 중심부는 동란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주지사라 해도 좋은 암브로시우스에게는 당연히 관내의 소란을 수습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열심히 수습에 나섰는데, 그런 암브로시우스가 삼위일체파 신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자기들을 지켜줄 사람은 두뇌가 명석하고 설득력이 뛰어나고 실행력도 갖춘 이 사람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서, 아리우스파가 가로채기 전에 먼저 손을 쓰려고 했는지, 재빨리 신도 집회를 열어 이 ‘주지사’를 주교로 선출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처음에는 놀라서 자기는 기독교도가 아니라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또다시 아리우스파 주교가 취임하는 날에는 자신들이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걱정한 삼위일체파는, 기독교도가 아니라서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면 된다고 설득했다.
암브로시우스는 43세가 되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교 자리를 제공받자마자 기독교로 개종했다. 주교 취임식은 서기 374년 12월 7일, 북부에 있는 밀라노에서는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날이었다.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시즌 개막일이 12월 7일인 것도 암브로시우스의 주교 취임을 축하하는 데에서 유래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교관을 머리에 쓴 직후에 전 재산을 기독교회에 기부하겠다고 공표했다. 게다가 금화 한 닢도 빼놓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 밀라노의 기독교도들이 아리우스파도 삼위일체파도 없이 암브로시우스 밑에서 한 덩어리로 뭉친 것도 당연했다.
이 시기에 강력한 주교구는 신자 수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재력으로는 로마가 으뜸이었다. 그렇지만 황제에 대한 영향력은 밀라노주교구가 가장 강력했다. 그것은 밀라노 주교가 황제와 가깝게 접촉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라노는 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한 절대조건은 아니었다. 암브로시우스가 절대조건으로 만든 것이다.
암브로시우스와 황제의 관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황제가 된 첫해에 야만족을 상대로 지나치게 분투했는지 겨울로 접어들자 중병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다. 그해 겨울은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 머물렀는데, 생사의 경계를 헤매고 있을 때 찾아간 테살로니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즉 ‘양치기’인 주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한 마리 양’이 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세례를 받고 나서 신의 뜻인지 아니면 자연 치유인지, 뜻밖에도 중병이 간단히 치유되었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는 이듬해부터 다시 정력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을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야만족 3대째인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황제라면 반드시 기독교도여야 하는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어릴 적부터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며, 특히 황제가 된 뒤에는 삼위일체파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의 두 최고 권력자가 주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 해도, 암브로시우스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했다면 두 황제에게 그가 행사한 영향력도 그리 대단치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20년 동안이나 고위 관료를 지낸 경험으로 권력자의 어디를 찌르면 그들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자가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를 찾아내어 교묘하게 그것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주교라 해도 하층계급 출신에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해서 교양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암브로시우스는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 높은 교양과 명석한 두뇌, 세련된 말을 구사한 설득력 때문이다. 당시에는 황제들도 율리아누스를 제외하면 서기의 도움이 없이는 문장 하나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이었다.
모젤강변의 트리어는 라인 방위선의 후방 기지로 역사가 오래된 도시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트리어로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찾아가고, 도나우 방위선의 후방 기지인 시르미움으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찾아가고, 두 황제 가운데 누군가가 밀라노에 들르면 반드시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황제들이 부탁하면 외교사절까지 맡았다. 이것이 두 황제와 밀라노 주교의 관계였다.
기독교의 승리로 가는 길
서기 380년부터 395년까지 15년은 기독교의 승리로 가는 길의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이 15년은 ‘이교’와 ‘이단’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포고로 시작되었다. 선전포고의 배후에 있는 인물은 암브로시우스였고, 앞에 나선 것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였다.
서방에서 두각을 나타낸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삼위일체파 쪽에 선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둘 다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세 사람이 배제해야 할 ‘이단’은 어느 종파보다도 먼저 아리우스파였다.
테오도시우스의 ‘이단’ 배격
‘이단’ 배격은 원래 아리우스파 세력이 강했지만 이제 가톨릭교도인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다스리게 된 제국 동방에서 폭발했다. 발화점은 아리우스파가 독점해온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자리였다. 황제는 아리우스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삼위일체파로 전향하라고 강요했고, 주교가 거부하자 그를 추방했다.
문제는 그 뒤를 이을 적당한 삼위일체파의 성직자가 동방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 한 사람이 급히 세례를 받고, 암브로시우스처럼 기독교회의 성직계급을 밑에서 위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가 주교 자리에 앉았다. 이는 아리우스파가 계속 우세했던 제국 동방에 가톨릭파의 강력한 발판이 마련된 것을 의미했다.
동방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서기 380년부터 395년까지 15년 동안 ‘이단’ 배척을 목적으로 한 칙령만 열다섯 가지나 공포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단’은 기독교회의 단결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결의는 철저하고 확고했다.
우선 이단자에게는 개심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정통 가톨릭파로 개종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개심하는 사람이 별로 없자 테오도시우스는 계속 칙령을 공포하고, 위반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려야 했다. 거의 중세를 연상시키는 정도의 내용으로, 당시 칙령으로 금지된 것은 다음 ‘죄’였다.
- 이단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것.
- 그 가르침을 듣는 것.
- 동지를 꾀어서 그 가르침을 집단으로 듣는 것.
- 신자들이 이단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것.
- 사법 관계자가 이단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는 것.
‘이단’이든 ‘이교’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거기에 관련된 미사와 제의는 모두 금지되었고, 이 금지령을 어긴 사람은 전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넣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칙령은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구별 없이 몇 번이나 위반을 거듭한 자는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었다. 기독교도인데도 같은 기독교도한테 박해당하고, 잘못하면 순교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칙령에도 굴하지 않는 확신범은 사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무도 그 사람과 교섭을 가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집단 따돌림’을 하는 것인데, 중세에 맹위를 떨치게 되는 ‘파문’이 이렇게 지평선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또 하나는 ‘이단자’를 찾아내어 고발하고 재판하기 위한 특별 기관이 설립된 것이다. ‘성스러운 관청’이라고 불린 이 기관도 역시 중세의 이단 심문이나 마녀 재판의 전조였다. 다만 재판관만은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라티아누스의 '이교' 배척
서방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동방과 다르게 이미 삼위일체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바로 ‘이교’를 배척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최고제사장’에 취임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곧이어 로마 건국 당시부터 계속되어온 여사제 제도를 없애는 작업에도 착수한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마지막 시책은 옛날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회의장 정면에 안치되어 있었던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한 것이다. 이 여신상을 철거하자는 말을 맨 처음 꺼낸 사람은 콘스탄티우스 황제였지만, 실행되지 않은 채 30년이 지났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이 여신상은 둥글고 커다란 지구 위에 날개를 좌우로 펼친 여신이 왼손에는 홀을 들고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날에는 이 여신상 앞에 향이 피워지고, 의원들은 거기에 예배를 드린 뒤에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500년 이상 내려온 전통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이러한 급진적인 이교 배척 정책으로 인해 로마군 내 다신교 신봉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급기야 서기 383년, 다신교 신봉자들이 많은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갈리아로 침입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맞서 군대를 소집해 파리 인근에서 반란군과 맞붙었다.
그런데 베르베르인 기병대가 뜻밖에도 그를 배신하고 막시무스에게 돌아섰고, 그라티아누스는 300여 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리옹으로 도주했다. 리옹의 총독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했지만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들과 협상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라티아누스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결국 그라티아누스는 383년 8월 25일 리옹에서 암살당했다. 겨우 24세의 나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국 서방의 황제가 공석이 되었다. 그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직 열두 살의 어린애였다. 결국 36세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방과 서방을 합친 로마 제국을 사실상 혼자서 다스리게 된다. 그것은 동방과 서방을 합친 로마 제국 전체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생각대로 기독교 국가가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렌티아누스 2세의 죽음
서방을 담당하고 있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살해된 서기 383년, 동방을 담당하고 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6세였다. 당시 12세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형식적으로는 그라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국 서방을 담당하는 황제가 되었지만, 이 소년 황제는 시종일관 무력해서 결국에는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테오도시우스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그리스의 테살로니키까지 도망친다.
하지만 그곳에서 가신과 말다툼 끝에 살해되었다. 격렬하게 말다툼을 한 뒤 침실로 들어간 황제는 이튿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서기 392년, 21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이름뿐인 황제이기는 했지만 네 살 때부터 제위에 앉아 있었던 그에게 계속 영향을 미친 모후 유스티나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열심히 믿고 있던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탄압과 박해를 받는 것을 한탄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승리의 여신상 논전 (384년)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Quintus Aurelius Symmachus)는 서기 340년에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은 출생도, 받은 교육도, 공직 경력도 열 살 위인 암브로시우스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 이름과 가문 이름과 가족 이름이 모두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암브로시우스와 달리 그가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도중에 기독교회에 스카우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와 다른 점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암브로시우스가 수도 로마의 명문 집안 출신이지만 제국의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의 부임지인 트리어에서 태어난 반면, 심마쿠스는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근본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갈리아 출신의 로마 제국 고위 관료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점이다. 로마인이 말하는 ‘갈리아계 로마인’ 집안이었다.
수도장관 심마쿠스와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사이에 논전이 벌어졌다는 말은 두 사람이 테오도시우스 황제 면전에서 말다툼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원로원 회의장에서 철거된 승리의 여신상을 원래대로 복원해달라는 심마쿠스의 청원에 대해 암브로시우스가 반대하는 편지를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성립된 논전이다.
수도장관 심마쿠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
<우리(로마 원로원)는 폐하께 거듭 청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국에 오랫동안 영광을 준 요인 가운 데 하나인 종교에 대한 대응을 신중히 배려해주실 것을 간청하고자 합니다. 역대 황제들은 각자의 종교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옛날 황제들은 그 이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신들을 경배했고, 요즘 황제들도 경배는 하지 않을망정 배척은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옛날의 예를 답습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해도, 최근의 예를 존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승리의 여신으로 구현되는 사상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야만족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자신은 여신상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 여신상이 오랫동안 받아온 경의를 고려하시어 우리에게 여신상을 돌려주고, 그것이 옛날부터 놓여 있던 곳에 돌려놓을 수 있도록 조처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폐하께 간청하는 것은 단순히 여신상의 철거를 철회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배운 것을 우리도 자식한테 가르칠 수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홀륭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전통에 대한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명예가 영원하기를 우리도 바라고 있는 이상, 폐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결정에 대해서는 우리도 큰 소리로 시정을 요구하는 것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여신상이 없는 회의장에서 어떻게 국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으로 충성하는 자를 무슨 권위로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가 제멋대로 독자적인 권위를 휘두르게 되면, 권위 자체가 붕괴하고 세상은 거짓 선서로 넘쳐나게 됩니다. 승리의 여신상은 이런 권위의 무정부 상태를 구해주었습니다. 상징을 잃은 원로원 회의장은 조만간 허위와 부정의 소굴로 변할 것입니다. …(중략)
인간에게는 각자 다양한 생활 습관이 있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신앙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도시도 제각기 수호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각자의 정신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각 민족에게는 제각기 '혼'(게니우스)이 있어서 그 민족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정신과 각 민족의 혼을 통합하여 지고의 신들과 맺어주는 역할을 맡기 위해 국가의 종교가 있습니다.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벌충하는 데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장래의 번영을 쌓아울리는 데에도 이미 번영을 이룩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과거는 우리 조상들이 경의를 바쳐온 신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전통 종교는 제국 전체의 통합에 도움이 되었고, 그 종교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희생이 한니발을 로마의 성벽에서 물리치고, 캄피돌리오에서 갈리아인을 몰아냈습니다. 그렇게 배우면서 자란 제가 왜 나이를 먹은 이제 와서 자신들의 과거를 부인해야 합니까. 아무리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되어버렸다 해도, 저 같은 인간은 개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무엇보다도 자존심 상하는 행위입니다. …(중략)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하늘에서 사제들의 눈물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일찍이 대제가 선언한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 정신'에 어긋난다고 모욕감을 느끼시지는 않을까요.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하자는 이야기를 맨 처음 꺼낸 것으로 알려진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그 여신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측근의 진언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받아들인 게 분명합니다. 시민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선례라 해도 바로잡는 것이 황제의 책무이고 우리 제국의 훌륭한 전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54세가 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고명한 로마의 장관이 폐하께 영원한 도시가 올리는 탄원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낡은 종교의 존속을 호소한 것을 알고, 이렇게 펜을 들 마음이 났습니다. 저는 먼저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떤 신의 조화가 한니발의 공격에서 로마를 지켜주었고, 쳐들어와서 눌러앉아 있던 갈리아인을 캄피돌리오에서 몰아냈는지 또한 그는 자기가 좋게 생각하는 종교의 유효성을 늘어놓았지만, 그 약점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런 신들이 한니발과 싸웠다 해도, 그렇다면 왜 그 신들은 한니발이 수도 로마의 성벽에까지 다가오도록 허락했는지. 갈리아인들이 캄피돌리오 공략을 체념한 것은 거위가 우는 것을 듣고 그들의 공격을 로마인이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그동안 그들의 유피테르 신은 어디에 있었는지. 거위로 변신한 유피테르 신이 울음소리를 내어 로마를 지켜주었다고 말하고 싶은지. 한 걸음 양보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그들의 신앙이 로마 군단을 뒷받침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한니발도 그런 신들 가운데 하나를 믿고 있었습니다. 신들은 로마도 한니발도 평등하게 지켜줄 의무가 있었는데, 왜 로마가 이기고 카르타고가 지는 결과로 끝났을까요.
또한 그는 민중의 눈물 어린 탄원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것도 근거가 박약합니다. 이제 민중은 그와는 다른 언어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 민중은 말합니다. 왜 축제일마다 효력도 없는 제의를 거행하기 위해 귀중한 가축을 제물로 바쳐야 하느냐고. 승리는 제물로 바쳐진 가축의 내장에는 숨어 있지 않습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적과 싸우는 병사들의 전투력입니다. 신들에게 의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의지가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캄피돌리오까지 공략하려 하던 갈리아인을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은, 그리고 이미 캄피돌리오 언덕에 펄럭이던 그들의 깃발을 끌어내린 것은, 신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아니라 당시 로마인의 용기였습니다. 한니발을 이긴 것도 신들에게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니발의 고국으로 쳐들어간 당시 로마인의 대담성과 과단성 덕분입니다.
그리고 왜 심마쿠스는 옛 로마의 위대함만 이야기했을까요. 저는 네로 황제가 믿은 것과 같은 신들을 믿을 생각은 없습니다 야만족의 침입도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은 아닙니다. 야만족 침입에 시달린 황제들은 전통적인 신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요. 그중 한 사람인 발레리아누스는 적국 페르시아에서 포로 신세가 되었고, 갈리에누스 황제는 제국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그 불행한 시절에 원로원 회의장에 있던 승리의 여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조상들이 저지른 이런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잘못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는 데 너무 늦은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는 있습니다. 늙은 뒤에는 더 이상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르는 희생은 제단 위에서 가축을 죽여 그 피를 뿌리는 것뿐입니다. 제물로 바쳐진 가축만이 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은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에게 맡겨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한 인간에게 그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심마쿠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비밀에 다가가는 데 하나의 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일지 몰라도, 우리 기독교도에게는 신의 목소리로 해명되어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들이 탐구하려고 애쓰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의 예지와 진리를 통해 벌써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중략)
우리 기독교도를 비난하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파멸의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태양이 암흑을 몰아내줄 테니까요. 기독교회에서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은 기쁨으로 가득 찬 희망입니다. 그것은 성자들이 봄을 구가하는 시대의 시작이고, 이 기쁨은 언젠가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 사이로 퍼져갈 게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무지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법률이 진실을 보여주었다고 믿어온 문명이 붕괴한 자리에,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 위에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 ‘논쟁’의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승리의 여신상은 로마 원로원 회의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승리(이교에 대하여)
원로원 회의장에서 승리의 여신상이 철거된 것은 이교 로마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제방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는 공식 제의만 금지했지만 그 후로는 사적인 제의도 금지하게 되었다. 이교 배척이라는 이름 아래 차례로 공포된 칙령으로 금지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 제단 앞에 등불을 켜놓는 것.
- 향을 피우는 것.
- 벽면을 꽃장식으로 장식하는 것.
- 신이나 조상에게 술을 바치는 것.
꽃장식이란 로마인이 특히 좋아한 장식인데, 나뭇잎과 꽃을 엮어서 길쭉한 타원형 화환을 만든다. 하얀 대리석이나 회반죽을 바른 벽에 초록색과 가지각색의 꽃으로 만든 꽃장식은 잘 어울려서 한층 돋보인다. 로마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곳을 꽃장식으로 꾸미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제의에만 쓰이는 장식은 아니었지만, 그리스 시대부터 제의에는 반드시 수반되는 장식이었던 것도 확실하다. 이런 금지령을 어긴 자는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
나아가 테오도시우스는 모든 신전을 교회로 바꾸라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모든 신전이 교회로 바뀌자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급 과잉’이었다. 신전의 수만큼 많은 교회에 수용할 만한 신자가 없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수요가 없는 신전을 파괴하도록 허락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온 모든 신전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황폐한 유적으로 바뀌었다. 이집트나 시리아의 신들을 모시던 신전들도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세운 신전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행히 살아남은 것은 기독교 교회로 바뀐 신전이다. 그 좋은 예가 로마의 판테온이다.
신전의 운명이 이렇다면, 신상의 운명도 그와 비슷할 수밖에 없다. 4세기 말인 이 시대보다 겨우 60년 전인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는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신앙의 대상은 아니더라도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는 아직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테오도시우스 시대부터 완전히 바뀐다. 신상은 당시 기독교회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우상숭배를 구현한 것이고, 사교의 상징이며, 무엇보다도 ‘무법자’의 구상화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회는 나체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은 대부분 전나체나 반나체였다. 그것을 모두 배제하려 하니까 양적으로도 엄청난 작업이었다. 코를 깎아내는 것은 그래도 온건한 배제 방법이었다. 머리를 잘라내고 팔도 잘라버리고 사지를 토막낸다. 아니면 절벽에서 떨어뜨리거나 강물에 내던졌다.
공공장소에 자신의 조각상이 놓이는 것만큼 로마 남자에게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암브로시우스가 말하는 ‘바로잡아야 할 과거’에 속했고, 따라서 기독교화한 로마 제국이 배제하고 파괴하고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술적 가치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어진다.
로마의 종착역(테르미니) 근처에 ‘팔라초 마시모’라는 국립 로마 미술관이 있다. 거기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프락시텔레스의 원작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모작한 아폴론 상이다. 1891년에 테베레강바닥에서 인양된 이 신상은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강바닥의 개흙(뻘)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조각상은 팔이 없거나 다리도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후세에 덧붙인 경우가 많은데, 깨진 금도 보이지 않고 얼룩도 없는 온전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남은 것도 존재한다. 로마의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카피톨리노의 비너스’라는 입상이 그 좋은 예다.
기독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다
서기 388년, 이해는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는 로마군 사령관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5년 만에 테오도시우스가 겨우 반란을 진압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방만이 아니라 서방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41세가 된 테오도시우스는 반란군을 제압하고 주모자인 막시무스를 처형한 공적을 등에 업고 처음으로 수도 로마를 방문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콘스탄티우스 황제와는 달리 로마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는 데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곧장 원로원으로 가서 의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마인의 종교로서 그대들은 유피테르가 좋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좋다고 보는가.”
토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로원의 토의를 자세히 기록하여 공표한 원수정 시대의 ‘원로원 의사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쨌든 의원들은 아무리 토론을 거듭해도 결국 테오도시우스가 원하는 회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은 압도적인 다수결로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이날의 원로원 회의에서는 희생자가 한 명 나왔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원로원 의장 같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인데, 자결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자결한 것이 표결 전인지 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표결 전이라면 항의하는 죽음이고 표결 뒤라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죽음이니까 자결의 의미도 달라지지만, 그 점이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자결한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결국 신앙 대상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서기 393년에는 로마 원로원의 유피테르 유죄 판결 못지않게 상징적인 법률이 공포되었다. 그것은 올림피아 경기대회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정한 법률이다. 이 경기대회가 제우스 신에게 바쳐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역사에서는 서기 393년이라는 이해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의 승리(황제에 대하여)
만사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순한 양처럼 암브로시우스라는 양치기가 이끄는 대로 황제니까 가능한 입법을 통해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신과 황제의 관계를 기독교도들 앞에서 명확히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즉 황제의 권력에 대한 기독교회의 우위를 확실히 해두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밀라노라는 주교구의 교구장에 불과한 암브로시우스는 교구장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유대교 회당 사건
이단 배척에 열심히 몰두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보고 기세가 오른 가톨릭파 기독교도가 제국 동방의 시리아 북동부에서 유대교 회당을 습격하여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그곳 행정관에게 범인을 엄중히 처벌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그곳 주교에게 교구 비용으로 유대교 회당을 재건하여 유대교도에게 기증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을 안 밀라노 주교는 당장 황제에게 엄중한 항의문을 보냈다. 하지만 자기가 내린 결정이 공정하다고 확신한 테오도시우스는 그 항의를 무시했다. 그런데 얼마 후 황제는 밀라노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밀라노 주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밀라노 주교는 테오도시우스가 귀빈석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교회를 가득 메운 신자들 앞에서 유대교를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에게 받은 은혜를 잊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네가 누구 덕분에 제위에 앉아 있느냐’는 뜻이다.
테오도시우스는 유대교 회당을 습격한 범인을 엄하게 처벌하고 유대교 회당을 기독교회 비용으로 재건하라는 명령을 철회했다. 하지만 철회를 알리는 칙령서에는 밀라노 주교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항목도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앞으로 비기독교도에 대해서는 로마 제국의 법에 따른 보호가 제한된다는 항목이다.
테살로니카 사건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일어난 사건이 암브로시우스가 다시 한번 황제에게 힘을 과시할 기회를 주었다. 민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던 전차경주 선수가 사소한 일로 감옥에 갇힌 것이 발단이었다. 팬들의 요구를 경찰이 무시하자, 군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테살로니키의 장관을 비롯한 많은 행정관이 살해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민중 폭동으로 단정하고, 군대로 실력 행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때도 군대의 진압이 한도를 넘어 지나치게 잔혹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많이 살해되었으니까 강경 진압을 명령한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엄중한 항의문을 보냈다. 게다가 황제는 죄를 씻기 위해 공식적으로 속죄의 뜻을 보여줄 필요가 있고, 그때까지는 신의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요컨대 공식적으로 속죄하지 않으면 신의 집인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여덟 달 동안 저항했지만 마침내 먼저 화해를 제의했다.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보여주는 모든 것-옷에 수놓은 문장, 머리에 쓰는 왕관, 보석을 아로새긴 장검 등-을 제거한 소박한 차림으로 교회 앞에 서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빈다. 한동안 기다리게 한 뒤, 겨우 눈앞의 문이 좌우로 열리고 주교가 모습을 나타낸다. 죄인은 겸손한 말투로 참회의 뜻을 고백한다. 그리고 비로소 교회에 들어가 제단 앞에서 주교로부터 성체를 받는다.
암브로시우스는 기독교와 세속 권력의 관계를 참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황제가 그 지위에 앉는 것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신이 인정했기 때문이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 주교로 되어 있는 이상, 아무리 황제라 해도 주교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양자 관계의 진실이다라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기 395년에 48세의 나이로 병사했을 때, 그보다 17세 연상이었던 암브로시우스는 진심 어린 조문을 보냈다.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회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상찬한 내용이다. 4세기 말에 기독교회 제일의 실력자였던 밀라노 주교가 그렇게 보증해준 덕분에, 기독교회도 콘스탄티누스 대제한테만 인정했던 ‘대제’라는 존칭을 테오도시우스에게 주기로 결정하였다. 암브로시우스가 바친 조문은 ‘신원증명서’의 걸작이기도 했다.
암브로시우스의 업적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지 2년 뒤에 6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년이 넘도록 본거지로 삼았던 밀라노에서 눈물짓는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히 눈을 감았다. 44세에 주교로 발탁된 이후, 당시 어느 주교보다도 긴 23년 동안 기독교회에 군림한 뒤에 맞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보기 드문 실무가이기도 했던 그는 황제들에게 영향력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23년을 보내지는 않았다. 나중에 기독교회의 기반이 된 것은 대부분 그가 조직한 것이었다. 기존의 것이라도 그가 손을 대면 완전히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1) 이단, 또는 이단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논쟁하거나 투쟁하는 방법론 확립.
(2) 성직자 계급의 윤리 향상을 목적으로 한 방법론 확립.
(3) 수도사나 은자들을 교회 조직에 편입시키기 위한 제도 확립.
(4) 민중을 대상으로 한 종교 교육의 방법론 확립.
(5) 교회에서 거행하는 각종 의식의 재편성.
(6) 무직자나 고아에 대한 자선사업의 재편성.
(7) 순교자에 대한 신앙의 이론적 확립.
하지만 가장 독창적이고 기독교 보급에 도움이 된 것은 암브로시우스가 창안한 성인 신앙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사람들이 뭔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자신의 수호자를 갖고 싶어한다. 그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건전한 이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방책을 생각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가 생각해낸 것이 성인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인으로 승격하려면 교회의 허가가 필요하고, 기독교도가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을 성인 인정 기준으로 삼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러한 성인은 '수호신'이 아니라 '수호성인'이 된다.
성인은 계속 늘어나 1년 365일을 모두 성인들에게 축일로 할당해도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축일을 할당받지 못한 성인들을 위해 1년 가운데 하루를 그들의 축제일로 정했다. 11월 1일 만성절이 바로 그날이다.
동서 분할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나누어준 뒤 서기 395년에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인 18세의 아르카디우스에게는 동로마 제국을, 아직 10세밖에 안 된 둘째아들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 제국을 남겼다.
지금까지는 황제들이 통치를 분담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할이 아니라 분담이었고, 로마 제국은 하나였다. 그래서 나도 ‘제국 동방의 황제’나 ‘제국 서방 담당’이라고 일일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번의 로마 제국의 분할은 결정적이었다.
서기 395년 이후에는 황제의 지위가 달라진다. ‘동로마 황제’나 ‘서로마 황제’라고만 쓰면 된다. 그리고 동서로 분열한 이 형태 그대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세기인 서기 5세기로 접어든다.
<14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