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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14. 2024

로마인 이야기 6권 (3)

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후기

제3장 통치 후기
기원전 5년~기원전 19년(58세~44세)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5년, 58세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아무래도 초조했는지 모른다. 그해에 첫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성년식을 올릴 나이인 15세가 되었다. ‘징검다리’가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갓 성년식을 올린 가이우스가 5년 뒤에는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도록, 그를 예정 집정관으로 승인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했다. 이는 누가 보아도 세습제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행보였다.


둘째 손자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도 15세가 되자마자 ‘예정 집정관’에 앉히고, 원로원에 의석을 마련해주고, 제사장으로 임명했지만, 이 두 소년의 존재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총재’로 하는 소년단(유벤투스) 창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도화한 ‘유벤투스’는, 신체단련과 협동정신 습득을 목표로 내건, 9~17세 소년들로 구성된 단체 이름이었다.


2년이 지났다. 황제인 할아버지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전국적인 민간 조직인 ‘소년단(유벤투스)’ 전체의 총재와 부총재 자리에 앉혀 대중에 대한 지명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사이, 그들도 어느덧 17세와 14세가 되었다. ‘소년단’ 제도는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조직력을 보여주듯 계속 활발하게 보급되었다. 그런데 60대에 접어든 아우구스투스를 괴롭힌 문제는 그와 가장 가까운 혈육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것도 아우구스투스의 ‘자업자득’이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출처 구글 이미지]

딸 율리아의 추문


율리아는 기원전 39년에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와 스크리보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크리보니아는 폼페이우스가 남긴 아들의 장인의 누이였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은 한창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던 그 당시 폼페이우스파와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한테 이혼당한 어머니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리비아한테 아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가 14세가 되자마자 누나 옥타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마르켈루스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18세 소년과 14세 소녀의 결혼생활은 소꿉장난 같은 것이었는지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고, 마르켈루스는 2년 뒤에 죽어버렸다.


16세에 과부가 된 율리아는, 2년 뒤 아그리파가 오리엔트에서 귀국하자, 아버지의 ‘오른팔’인 그와 재혼했다. 42세와 18세에 시작된 결혼생활이었다. 9년에 걸친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은 3남 2녀를 낳아 아우구스투스를 기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결혼도 아그리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나버렸다.


율리아의 세 번째 남편은 계모 리비아가 데리고 온 아들 티베리우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친딸 율리아의 남편으로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 중에는 리비아가 강력하게 요구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친아들을 재혼한 남편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리아와 아우구스투스 가계도 출처 구글 이미지]

31세의 남편과 28세의 아내는 나이에서는 잘 어울렸지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가 강요로 이혼한 전처 빕사니아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귀족적인 티베리우스는 품성에 결함이 있는 율리아의 행동거지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불만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보였다면 그래도 낫지만, 티베리우스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율리아에게 유일한 말벗이 될 수 있었을 고모 옥타비아는 율리아가 두 번째 남편 아그리파를 잃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혼도 하지 않은 채 남편에게 버림받은 율리아는, 리비아가 관장하는 집안에서도, 세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쏠리는 집 밖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도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율리아에게는 그런 자제력이 부족했다.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의 행실이 언제부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율리아가 37세였던 기원전 2년에는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이 문제를 확실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딸을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외딴섬 판다탈리아(오늘날의 벤토테네)에 종신 유배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도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벤토테네 섬 출처 구글 이미지]

판다탈리아섬은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외딴섬으로 남아 있다. 면적이 1.3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섬은 전체가 황무지여서 경작지로 가꿀 수도 없었던 탓인지, 시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몇 년 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율리아의 유배지는 판다탈리아섬에서 레조로 옮겨졌다. 레조는 장화 모양을 한 이탈리아반도의 발부리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어디까지나 국법에 충실한 아우구스투스는 레조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장에서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는 것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서기 14년, 아버지보다 몇 달 뒤에 율리아도 죽었다. 판다탈리아섬과 레조를 합하여 16년에 걸친 유배생활 끝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유배 중인 율리아 아우구스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국가의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한동안 원로원에도 출석하지 않고 대중 앞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친딸의 행실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남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은 황제가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의지할 사람도 없이 국사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사람이 딸의 행실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남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있다. 전국에서 황제에 대한 동정심이 높아졌다.


시민운동에 떠밀린 것처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간청했다. 거기에 응하여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우스 메살라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 전체를 대표하여 말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여, 우리는 당신과 당신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국가와 수도 로마의 평화를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원로원은 국민의 합의를 얻어, 여기서 당신에게 ‘국가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립한 원로원 의원들이 일제히 “국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하고 합창했다. 61세의 황제는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얻은 영예 가운데 아우구스투스가 아직 얻지 못한 것은 ‘국부’의 영예뿐이었다.


외손주들의 죽음


하지만 모든 로마 시민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는 가정의 불행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서기2년에 18세의 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마르세유에서 날아 들었다. 17세를 맞이한 지난해 군무 경험을 쌓기 위해 에스파냐로 파견되었지만,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마르세유에서 장기간 머물다가 병에 걸려 18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64세를 맞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심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방을 외교적으로 평정하라고 보낸 큰 손자 가이우스 카르사르 역시 아르메니아 폭동 진압에 실패하여 아르메니아에서 도망친 뒤에 소아시아 각지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서기 4년 2월 20일에 소아시아 남서부의 리치아에서 죽었다. 칼에 찔린 상처가 악화하여 병사했다고 한다. 23세도 채 되기 전의 죽음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66세에 자기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 후보를 모두 잃어버렸다.


티베리우스의 복귀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장례를 끝내자마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가 양자로 승격한 것을 안 세상 사람들은 자기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를 모두 잃은 아우구스투스가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 피가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선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66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아마 안심하고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안을 느꼈다면, 티베리우스에게 양자 자리와 ‘호민관 특권’과 ‘내각’의 상임위원 자리를 거의 동시에 안겨줄 리가 없다. 한 가지를 주고 나서 상황을 보고, 잠시 후에 또 한 가지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마치 결정은 끝났다는 듯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것은 누구의 억측도 허용치 않는 과감한 조치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동시에, 동생 드루수스가 남긴 아들을 양자로 맞아들였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당시 18세의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낳은 딸 안토니아의 아들이므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딸의 아들로 손자뻘이 된다.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인 티베리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45세가 되어 전선에 복귀한 티베리우스의 원숙함은 게르마니아 전쟁을 추진하는 방식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티베리우스 진영에는 18세의 게르마니쿠스도 참가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결정한 청년이다. 이 젊은이의 본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게르마니쿠스’라는 통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애초에 게르마니아 원정을 맡은 드루수스가 요절한 뒤에 이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을 그 아들이 물려받았다.


게르마니아 전선은 사실상 1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을 제압하려면 라인강이라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의 최종 목표는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대로 라인강에서 엘베 강까지의 게르마니아 전역을 제압하고, 로마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강에서 엘베 강으로 옮기는 데 있었다.


원정 첫해


게르마니아에는 큰 강이 네 개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열거하면 라인강, 엠스강, 베저강, 엘베강이다. 네 강이 모두 북해로 흘러든다. 다시 시작된 게르마니아 원정 첫해인 서기 4년, 티베리우스는 전군을 둘로 나누었다.


60세가 넘었지만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부장 사투르니누스에게는 라인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동쪽으로 쳐들어가는 길을 맡긴다. 네 강의 상류를 모두 제압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제1군은 하류에서 라인강을 건넌 다음, 전투를 계속하면서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했다.


서기 4년의 전쟁은 12월까지 걸리긴 했지만,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다. 엘베 강을 빼고는 게르마니아 땅을 흐르는 중요한 하천이 모두 로마군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티베리우스는 이 승전보를 가지고 수도로 돌아왔다.

원정 2년째


원정 2년째인 서기 5년의 전쟁은 지난해보다 훨씬 화려한 전과로 끝났다. 로마군은 다시 14년 만에 엘베 강에 도달했다.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해군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는 육군의 공동투쟁 전선이 티베리우스가 바란 대로의 성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종군한 파테르쿨루스의 붓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로마군이 발자국을 찍지 않은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로마 진영에 투항한 부족들 중에는 지금까지 로마군과 싸워본 적도 없는 엘베 강 동쪽의 랑고바르드족까지 끼어 있었다. 로마 군단과 은독수리 깃발은 라인강에서 동쪽으로 400마일(로마마일, 약 600킬로미터)이나 떨어진 엘베 강까지 포함한 게르마니아 전역을 제패했다.”


마르코마니족


하지만 게르만족이 모두 투항한 것은 아니다. 한 번 싸워서 패배한 뒤 다른 방법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은 부족도 있었다. 바로 마르코마니(Marcomanni)족이었다. 이 부족의 지도자인 마로보두스는 소년 시절에 로마의 인질이 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친척집에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게르만족 중에서는 드물게 로마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질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로마와 싸우기보다는 다른 땅으로 이주하여 자기 부족을 존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땅에서 남쪽에 도나우강이 흐르는 보헤미아 땅으로 이주했다. 부족 전체를 이끌고 이주한 시기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가 엘베 강에 도달한 기원전 9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후 14년 동안 달성한 마로보두스의 업적은 눈부실 정도였다. 보병 7만 명과 기병 4천 명은 모두 로마 군단식으로 조직되어, 로마식 전법을 습득했다. 마로보두스는 왕을 자칭하며, 로마의 중앙 정부와 외교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로마와 정면 충돌은 피한다는 방침을 고수한 모양이다.

[마르보두스와 보헤미아의 부족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로마가 이 게르만족의 한 부족을 방치해두는 위험을 깨닫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또한 그들 세력권의 남쪽 경계와 이탈리아의 거리는 35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서기 6년, 게르마니아 제패는 끝났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투스는 이 마르코마니 부족을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서기 6년 봄을 기다려 북쪽으로 진격하려 할 때, 그 배후인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반란


이곳은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섬으로 은퇴하기 전에 제패한 뒤, 로마화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던 지방이다. 로마식 가도망을 건설하고, 요지에 개발의 ‘핵’이 될 식민도시를 세워 퇴역병들을 이주시켰다. 로마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지방의 로마화에 대단한 열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지형으로 유명한 이 지방은 그때까지 한 번도 문명을 누린 적이 없었고, 말을 타고 산야를 달리거나 말에 짐을 싣고 운반하는 수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고속도로망의 효율성을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군제개혁에 따라, 명칭은 ‘보조병’이지만 ‘군단병’과 거의 같은 수의 현지인 병사도 상비군으로 편성되어 로마 시민병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제까지의 적에게 무기를 들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위험은 항상 내재했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의 수는 8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보병이 20만 명, 기병이 9천 명이다. 대부분 로마군 '보조부대' 출신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 두 지방의 지도자들은 보헤미아의 마르코마니족과 공동투쟁전선을 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란군은 우선 그 땅에 사는 로마인을 피의 제물로 바치고, 이어서 로마군 주둔지를 습격했다. 로마식 전략까지 익힌 지휘관은 반란군을 삼분하여, 1군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땅을 확보하고, 2군은 남쪽의 마케도니아를 침공하고, 3군은 이탈리아 북동부로 침입하여 전선을 확산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 달려가, 적이 수도에서 열흘 거리에 있다고 말하면서 긴급대책을 호소했다. 원로원도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사의 긴급 모집과 그를 위한 자금 염출을 결의한 원로원은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는 로마군 최고 책임자로 티베리우스를 임명하라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요구했다.


48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손에 쥔 ‘절대지휘권’을 활용한다. 공격 대상이었던 마르코마니족의 왕 마로보두스에게 밀사를 급파하여 우호조약을 맺어버렸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의 반란군이 기대하고 있던 마르코마니족과의 공동투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어버렸다.


북쪽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티베리우스는 휘하의 5개 군단을 모두 반란군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티베리우스에게 강력한 원군이 나타났다. 도나우강 하류 일대를 영토로 삼고 있는 트라키아 왕이 몸소 기병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다. 트라키아 기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부터 유명하다.


로마인은 싸움을 걸어오는 것 자체는 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로마의 패권을 일단 받아들여놓고, 그 협약을 깨고 반기를 든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반란군도 이것은 잘 알고 있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필사적인 반란군의 분투로 말미암아 점점 더 처참하고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싸우기 어려운 지형에서 필사적으로 맞서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부하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전사자는 한 사람도 방치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로마식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에 반해 티베리우스 자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말을 타고 다녔다. 휴식도 희생한 셈이다.


반란 첫해인 서기 7년과 서기 8년은 전역으로 확산된 수많은 전선에서 20만 명의 반란군과 6만 명의 로마군이 격투를 벌이는 가운데 숨가쁘게 지나갔다. 그렇긴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참(영어 Logistic, 라틴어 Logista) 면에서의 우열이 효과를 나타내는 것도 분명했다. 그 무렵 또다시 집안에서 일어난 불상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족의 불상사


70세를 맞이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외동딸 율리아가 낳은 직계 손자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다.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이 외손자도 양자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양자로 삼았다는 것은 후계자 대열에 포함시켰다는 뜻이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삼은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서열과 그들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1순위:티베리우스(45세), 2순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15세), 3순위: 게르마니쿠스(18세)”

게르마니쿠스가 나이는 두 번째지만 후계자 서열에서는 세 번째로 되어 있는 것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고,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양자였기 때문이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율리아의 유배


당연한 일이지만, 반란 진압 첫해인 서기 7년에 18세가 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옛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손자를 전선에 보내지 않았다. 아니, 보낼 수가 없었다.


황손의 난폭한 행동을 아무도 감당할 수 없게 된 서기 7년, 외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가 이 손자를 유배 보낸 곳은 판노니아 전선이 아니라 훗날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해진 엘바섬에서 남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프라네시아(오늘날의 피아노사)섬이었다.

[피아노사섬 출처 구글 이미지]

이듬해인 서기 8년에는 외손녀 율리아도 섬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유배당한 이유는 어머니 율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남자관계였다. 혈육의 법률 위반을 방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강한 책임감 때문에 육친의 불상사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섬으로 유배되었을 당시 서른 살도 안 되었던 외손녀 율리아는 로마의 명문 귀족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무리 행실이 나쁘다 해도, 그 자식들한테서 떼어내어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니, 70세가 넘은 황제의 분노와 수치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체념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직계 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자란 아그리피나를 게르마니쿠스에게 시집보냈다. 두 사람은 육촌 남매 사이다. 이 결혼에서는 3남 3녀가 태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이고,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은 제5대 황제인 네로를 낳는다.

[아우구스투스 가계도 출처 구글 이미지]

시인 오비디우스


서기 8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가 받은 유배형은 시인 오비디우스의 유배형이라는 부산물을 낳음으로써 라틴 문학사상 큰 사건이 되었다. 쉰 살이 넘은 시인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떨어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부근에 있는 토미(오늘날 루마니아의 콘스탄차)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와 ‘변신 이야기’ 출처 구글 이미지]

공식적으로 제시된 죄목은 『사랑의 기술』(아르스 아마토리아)이라는 시집을 펴낸 것이었다. 언론 통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로마에서 문인이 추방된 것은 오비디우스가 처음이었다. 진상은 두 당사자가 말이나 글로 밝히지 않았고, 고대의 어느 누구도 확실한 사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기술』 제1권과 제2권은 어떻게 행동하면 여자를 정복할 수 있는가를 남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제3권은 어떻게 하면 남자를 정복할 수 있는가를 여자들에게 가르쳐준 작품이다. 세 권 모두 실례를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쓰여 있다. 하지만 절대로 포르노그라피는 아니다.


판노니아-달마티아 평정


한편 판노니아-달마티아 전선에서는, 서기 9년 여름에는 이미 판노니아 전역이 로마군에 굴복했다.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고 군복도 누더기로 변한 반란군은 주모자 두 사람을 앞세워 항복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달마티아 지방도 강화를 요구해왔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완전히 평정했다는 소식은 당장 수도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전해졌다. 로마는 평화가 돌아온 것을 환영했고, 71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지난 1~2년 동안 일어난 집안의 불상사도 잊어버릴 만큼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며칠 지나지 않아 게르마니아 땅에서 참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


티베리우스가 엘베 강에 도착하여 게르마니아 정복을 끝낸 서기 6년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군사력으로 제패하는 시기는 끝났고 정치력으로 로마화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주 통치 경험이 풍부한 퀸틸리우스 바루스에게 그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문제는 바루스가, 로마의 직접 통치를 시행하기 전에 얼마 동안 중간 단계를 두는 카이사르 방식이 아니라 군사력으로 제패한 바로 이듬해부터 아우구스투스 방식의 직접 통치를 실시한 것이었다. 군인이라서 정치적 감각은 별로 없었던 파테르쿨루스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루스는 미개지에 파견된 군단 사령관이라기보다 문명도가 높은 도시를 다스리도록 파견된 관선 지사처럼 행동했다.”

[바루스 자료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인물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 게르만 부족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군사력 앞에 굴복한 굴욕감에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통치 방식에 따라 그때까지 누려온 권력마저 빼앗긴 불만이 겹친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 무렵 게르만족 지도자들의 이런 감정에 불을 붙이려고 생각한 인물이 게르마니아에 출현했다.


아르미니우스는 기원전 16년에 게르만의 한 부족인 케루스키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니까, 서기 9년에는 2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서기 4년부터 시작된 티베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침공기에 케루스키족도 로마에 굴복했고, 스무 살의 아르미니우스도 로마 치하에 들어간 다른 부족의 지도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의 ‘보조부대’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당장 두각을 나타낸 듯, '보조부대'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위에까지 출세한다. ‘보조부대’라도 지휘관에게는 복무하는 동안 시민권을 주었다. 아르미니우스도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되었다. 이 게르만 젊은이는 곧 ‘기사 계급’으로 승격했다.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가 뒤에서 공작을 꾸미고 있다는 다른 부족장들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이 게르만 젊은이를 신뢰했다. 서기 9년 겨울이 가까워질 무렵 카티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바루스는 안전한 길을 버리고 삼림지대로 들어가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아르미니우스를 따라 가는 바루스 출처 구글 이미지]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라고 게르만족은 호언한다. 2천 년 전의 게르마니아 땅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갈리아의 삼림과는 달리 낮에도 어두운 깊은 숲이다. 그 속으로, 게다가 아르미니우스가 지휘하는 게르만 병사들이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는 숲속으로 3만 5천 명이 들어가버렸고, 정예부대인 3개 군단, 기병 3개 중대, 보조병 6개 대대로 이루어진 퀸틸리우스 바루스 휘하의 군대가 전멸한 것이다.


참극이 벌어진 곳은 오스나브뤼크 북쪽에 펼쳐진 토이토부르크숲이었다고 한다. 숲을 빠져나가 라인강 연안의 기지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바루스를 비롯한 지휘관 대다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여 자결을 택했다. 아르미니우스는 포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후 로마의 우려와는 달리 게르마니아 전체가 떨쳐일어나 로마에 맞서서 공동전선을 결성하자는 아르미니우스의 호소는 실패로 끝났다. 마르코마니족 족장인 마로보두스 역시 호응하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는 용감하고 대담하고 교활한 자이긴 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라인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카이사르의 생각에 거역하면서까지 게르마니아 땅에 군대를 진주시킨 71세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통렬한 타격이었다.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는 것은 이제 2개 군단밖에 없다. 판노니아-달마티아 전쟁을 방금 끝낸 티베리우스는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라인강으로 달려갔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노고에는 감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게르마니아 문제에 대한 최종 결단은 내리지 않았다. 로마군 최고 통수권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망설이고 있으면, 전선에 있는 티베리우스도 서기 12년까지 10년 동안 결정적인 행동은 취할 수 없다.


서기 13년부터 게르마니아 전선은 로마로 돌아온 티베리우스 대신 27세의 게르마니쿠스가 맡게 되었다. 게르마니쿠스는 4년 동안 그 임무를 수행했다. 서기 16년, 2년 전에 죽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마침내 게르마니아 땅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게르마니쿠스(소) 출처 구글 이미지

이 결정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방어선은 공식적으로도 엘베 강과 도나우강에서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라인강 동쪽과 도나우강 북쪽에 사는 게르만족은 영국인 학자들이 이따금 심술궂게 말하는 ‘제국 밖의 야만인’으로 남게 되었다.


서기 17년, 아르미니우스에게 패한 마로보두스는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무렵에는 이미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을 완전 철수시킨 뒤였다. 그래서 군사 원조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의 협약을 끝까지 지킨 게르만 부족장의 신의에 보답했다. 라벤나의 저택을 제공하고, 생활비를 보장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이나 같은 게르만족의 다른 부족을 상대로 싸우면서 파란만장한 8년을 보낸 뒤, 어느 부족과 싸우다 입은 상처가 악화하여 서기 21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19세기 이후, 독일인들은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만족의 자유와 독립을 지킨 사람이라 하여 영웅시하고 있다. 게르만어로는 헤르만(Herman)이고, 헤르만은 전사(戰士)라는 뜻이라고 한다.

[토이토부르크 숲과 아르미니우스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서기 14년 여름,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를 떠나 가마에 흔들리면서 아피아 가도를 천천히 남하하고 있었다. 나폴리에서 열리는 체전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전후를 바닷가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77세를 눈앞에 둔 늙은 황제의 여름 휴가에는 71세의 아내 리비아도 동행했다.


그후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재편성하기 위해 아피아 가도를 지나 브린디시로 배를 타러 가는 티베리우스를 중간쯤에 있는 베네벤토에서 배웅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나폴리로 향했다. 그해 여름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던 티베리우스가 급히 불려왔다.

티베리우스와 단둘이서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이었다. 서기 14년 8월 19일, 77세 생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연설을 한 사람은 당시 26세인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였다. 게르마니쿠스가 있었다면 그가 했겠지만, 28세의 게르마니쿠스는 아직 게르마니아 땅에서 싸우고 있었다.


며칠 뒤, 여제사장에게 맡겨져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이 원로원에서 개봉되었다. 상속인 가운데 맨 위에 적혀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였다. 그에게는 유산의 3분의 2를 주고, 아내 리비아에게는 나머지 3분의 1을 주었다. 상속서열 제2위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원로원과 민회는 반세기 전에 카이사르를 신격화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신격화하기로 결의했다.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한, 로마인이 그를 부를 때의 명칭은 ‘신격(神格)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로마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랭크 애드콕(F. E. Adcock) 교수는  『케임브리지판(版) 고대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한 사람이 통치하는 국가 형태는 그 시기의 로마에는 정치적 필요가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 같은 압도적 두뇌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세계는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프랭크 애드콕과 그의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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