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교리, 산업의 바퀴,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자본주의의 교리
이 장에서는 먼저 돈, 즉 화폐를 통한 근대 경제 시스템, 특히 자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어떻게 서유럽에서 제국주의가 발전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본과 정치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와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했던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들을 근거로 제기되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인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돈은 제국 건설과 과학 진흥에 필수적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군대건 대학 연구실이건 은행 없이는 유지 자체가 안 된다. 근대사에서 경제의 진정한 역할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근대 경제사를 이해하기 위해 정말로 이해가 필요한 단어는 ‘성장’이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경제는 1인당 생산을 기준으로 대체로 같은 규모를 유지해 왔지만 모든 것은 근대에 와서 바뀌었다.
1500년 재화와 용역의 지구 총생산은 약 2,500억 달러였는데, 오늘날 이 수치는 60조 달러까지 증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500년 연간 1인당 총생산은 550달러였지만 오늘날 모든 남녀와 어린이가 1인당 연평균 8,800달러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인구 팽창과 정착지의 확대 외에 이런 어머어마한 성장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처럼 근대에 들어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요한 요인은, 인류사회가 우리의 미래 자원이 현재 자원보다 훨씬 더 풍부할 것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사람들을 '신용'이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돈이 상상 속의 재화를 대표하게 하는데 동의하도록 했고, 신용은 미래를 비용으로 삼아 현재를 건설할 수 있게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전의 돈의 역할
돈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대표할 수 있고 무엇이든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존재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이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돈이 대표하고 전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성장에 심각한 제약을 가했다. 새로운 사업에 돈을 조달하기가 극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경제는 얼어붙어 있었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다. 미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한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옛 시대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물론 특정 빵집의 이익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옆 빵집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네치아가 번영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직 제노바를 가난하게 만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영국 왕이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프랑스 왕의 것을 훔치는 것밖에 없었다. 파이를 자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어느 방법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신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규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신규 사업이 힘들었기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성장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외상 주는 것을 경계했다. 불황에 대한 기대는 자기 실현적이었다.
커지는 파이
그때 과학혁명과 진보라는 개념이 도래했다.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이 아이디어는 곧 경제용어로 번역되어 진보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리적 발견, 기술적 발명, 조직의 발전이 인간의 생산, 무역, 부의 총량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5백 년간 진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점점 더 신뢰하게 만들었고,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으며,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고,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함으로써 더 많은 신용을 향한 길을 여는 식의 선순환 고리를 열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경제는 풍선이라기보다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오르락내리락거림이 평탄해지면서 전반적인 방향은 오해의 여지가 없이 분명해졌다. 지구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는 믿음은 결국 혁명이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문일 《국부론》을 썼는데, 제1권 제8장에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폈다.
지주나 직공이나 구두공이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면 그는 남는 돈으로 조수를 더 많이 고용해 이윤을 더욱 늘리려 한다. 수익이 늘어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조수를 채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 기업인의 수익 증대는 공동체의 부와 번영을 늘리는 기초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스미스의 주장- 개인적인 수익을 늘리려는 이기적 인간의 욕구는 공동체 부의 기반이다.- 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에 속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관점에서는 더더욱 혁명이다. 스미스는 사실상 탐욕이 선한 것이며, 내가 부자가 되면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이기주의가 곧 이타주의라고”).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하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 수익이 늘면 스쿠르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부분은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었는데, 이 윤리에 따르면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 재투자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생산을 위해 투자되어서 더 많은 이윤을 낳으며, 이 과정은 무한정 되풀이 된다.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개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파라오나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기술(記述)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이론에서 출발하였는데, 이제 자본주의에는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심지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일러주는 가르침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 최소한 그 대용품은 된다는 것이다(왜냐하면 정의와 자유, 심지어 행복까지도 경제성장에 좌우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역사는 과학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영원히 계속될거라는 경제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자의 믿음은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지식에 위배된다. 그럼에도 인류의 경제는 근현대 기간 내내 어찌해서든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왔는데, 이것은 오로지 과학자들이 몇 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발견이나 장치를 들고 나온 덕분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은행과 정부는 미친 듯이 돈을 찍어냈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경제성장을 멈추게 할지 모른다고 모든 사람이 겁에 질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난데없이 조 단위의 달러와 유로와 엔을 만들어서 값싼 신용을 시스템에 펌프질해 넣고 있다. 그러면서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가 어찌해서든 뭔가 정말 큰 건수를 올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만일 거품이 터지기 전에 연구실들이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콜럼버스가 투자자를 찾는다
자본주의는 근대 과학의 발흥뿐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애초에 자본주의의 신용시스템을 만들어낸 것도 유럽 제국주의였다. 근대 초기의 비유럽 제국들을 세운 누르하치, 나디르 샤 같은 위대한 정복자들, 혹은 청과 오토만 제국의 경우처럼 관료 엘리트와 군사 엘리트들은 세금이나 약탈(둘 사이에 엄밀한 구분은 없었다)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 신용체계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유럽에서는 왕과 장군들이 점차 상인의 사고방식을 따르기 시작했고, 결국 상인과 은행가가 지배 엘리트가 되었으며, 유럽의 세계 정복 자금이 세금보다는 신용대부로 조달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투자를 통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고자 하는 자본가들이 일을 지휘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다. 이들의 주된 야망은 투자를 통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었다.
148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을 찾아가, 동아시아를 향한 새 무역로를 개척할 테니 선단을 구성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런 탐사는 위험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배를 건조하고 보급품을 사고 선원과 군인 들의 급여를 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투자가 수익을 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포르투갈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처럼,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 그는 새로 통일된 스페인의 통치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운을 시험해보았다. 그는 숙달된 로비스트들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금광과 은광을 개발했으며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할 대형 농장을 건설하여 스페인의 왕, 은행가, 상인을 상상도 하지 못한 만큼 부자가 되게 만들어주었다.
1백 년 뒤의 왕자들과 은행가들은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에게 전보다 훨씬 많은 신용대출을 기꺼이 해주고 싶어 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서 거둔 수확 덕분에 과거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왕자들과 은행가들이 탐사의 잠재력에 대해 더 큰 신뢰를 갖고 있었으며 기꺼이 자신들의 돈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마법의 순환이었다.
하지만 탐사는 원래 불확실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신용시장은 계속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유럽인들은 잠재적 투자자의 숫자를 늘리고 자신들이 발생시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합자회사에 의지했다. 한 명의 투자자가 삐그덕거리는 배 한 대에 돈을 몽땅 투자하는 대신, 합자회사는 많은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았다. 투자자 개개인은 자기 자본에서 아주 작은 몫만 위험 부담을 지는 방식이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유럽에서는 복잡한 금융 시스템이 발달했다.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액수의 신용대출을 받아서 이를 민간기업이나 정부에 맡기는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왕국이나 제국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으로 탐사원정이나 정복사업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새로 발견된 신용의 힘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격렬한 싸움에서 잘 드러났다.
네덜란드의 부상
16세기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광대한 세계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바람이 많이 부는 늪지대로, 면적이 좁고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는 작은 지방이었다. 하지만 1568년 개신교인 네덜란드인들이 무모해 보이는 반란을 일으킨 이래 80년이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과 그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강력한 스페인 제국보다 더욱 쉽게 군사 원정대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급성장하는 유럽 금융제도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당시 스페인 왕은 자신에 대한 금융제도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다. 프랑스, 영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빌린 뒤 제대로 갚지 않고 오히려 투자자를 협박하여 더 많은 자금을 내놓도록 강요함으로써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정확히 어떻게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었을까? 첫째, 이들은 기일에 맞춰 전액을 반드시 갚았다. 그래서 대부업자들에게 신용을 얻었다. 둘째, 사법제도가 독립되어 있는 데다 사적 권리, 그중에서도 사유재산권을 보호했다. 자본은 민간인들의 재산을 보호해주지 않는 독재국가에서 새어나와 법치와 사유재산권이 있는 국가로 흘러들어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주식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1602년 설립 인가를 받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03년으로 당시 이들에게는 상업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회사는 인도네시아를 2백 년 가까이 통치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1800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떠맡아 국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 체제는 150년간 지속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양에서 활약한 반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대서양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허드슨 강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이 중요했기 때문에, 회사는 이를 장악하기 위해 강 입구 섬에 뉴암스테르담이란 정착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영국인의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1664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영국은 이름을 뉴욕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성벽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즉 월스트리트가 되었다.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John Law)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에 발행되었는데, 1719년 8월부터 폭등하기 시작해서 그해 12월 2일이 되자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이후 1720년 초에 거품이 꺼지면서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주가를 방어하기 위해 주식을 매수하다보니 결국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1789년 그는 마지못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삼부회(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를 소집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대영제국의 팽창
프랑스의 해외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대영제국은 급속히 팽창했다. 대영제국은 대체로 민간 주식회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 회사는 런던 주식거래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는 런던 사, 플라이마우스 사, 도체스터 사, 매사추세츠 사 같은 17세기 초 주식회사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인도 아대륙을 정복한 것도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었다. 이 회사의 실적은 심지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넘어섰다.
런던 레든홀 스트리트에 있는 본부를 기반으로 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막강한 인도 제국을 약 1백 년 동안 지배했다. 영국 왕은 1858년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국유화했고, 동인도회사의 민영 군대도 이때 국유화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가게 주인들의 나라라며 비웃었지만, 결국 그 가게 주인들에게 패배했다. 가게 주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자본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은 홍콩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한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였다.
또한 이집트도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영국의 자유주의자 및 낭만주의자 무리에게 큰 공감을 불렀다. 시인 바이런 경은 반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인들은 여기서 돈벌이 기회를 보았다. 이들은 반군 지도자들에게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 이자를 포함해 채권을 갚기로 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전투에서 오토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나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 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오늘날 단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보다,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가진 나라가 신용등급을 더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자의 지옥
자본과 정치는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열렬한 자본주의자는 자본이 정치에 자유로이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지만 정치가 자본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현명치 못한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경제성장이 느려진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시장 교리는 자본주의 교리의 가장 흔하고 영향력 있는 변종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산타클로스가 존재한다는 믿음만큼이나 순진한 것이다.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우리가 1719년 미시시피 버블에서 배운 교훈이 이것이었다. 혹시 잊은 사람이 있었다면 2007년 미국의 주택시장 버블과 그 결과로 일어난 신용 붕괴와 불황이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위험한 데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하는데, 왕이나 사제가 감독하지 않는 완전 자유시장에서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독점을 할 수도 있고, 노동자를 탄압하기로 서로 공모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빚을 갚기 위한 노역이나 노예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다. 그렇기는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지만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고,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 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는데,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훨씬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고 한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 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고,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 기대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 -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인구가 지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하지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산업의 바퀴
이 장에서는 현재 자본주의 경제가 에너지 전환과 원자재 개발 및 대량 생산 시스템을 통해 생산성이 폭발하였고 이를 소화하기 위해 소비지상주의를 퍼뜨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제성장에는 에너지와 원자재가 필요한데,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의 에너지와 원자재 사용량은 급격히 늘었지만 과학적, 기술적 연구에 투자가 흘러 들어가면서 기존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에너지와 원자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용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의 양도 늘어났다.
에너지의 경우, 인류는 열이 운동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화약, 직조기, 증기기관 등을 발명하면서 이때부터 사람들은 기계와 엔진이 한 유형의 에너지를 다른 유형의 에너지로 바꾸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혔다. 또한 내연기관을 발명하면서 불과 한 세대 남짓에 인간의 운송 수단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석유를 액체 정치권력으로 바꿔놓았다.
전기의 행적은 이보다 더욱 놀랄 만하다. 2세기 전에 전력은 경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신비로운 과학실험이나 값싼 마술 기교에 사용되었을 뿐인데 일련의 발명이 이어지자 전력은 도처에 존재하는 램프 속의 거인이 되었고 이제는 전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에너지의 바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산업혁명은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무지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불과 몇십 년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발견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계속 늘었다. 그런데도 에너지 고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산업혁명 이전에 인류의 에너지 시장은 거의 전적으로 식물에 의존했다. 사람은 연간 3천 엑사줄을 저장하는 녹색 에너지 저장소 옆에 살았으며, 여기에서 최대한 많은 에너지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다. 산업혁명 기간에 우리는 우리가 사실 엑사줄의 수십억 배의 수십억 배 에너지를 품은 거대한 에너지의 바다 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더 나은 펌프를 발명하는 것뿐이었다.
원자재와 관련해서는, 인류는 대량의 에너지를 값싸게 생산하려 노력하는 와중에 과거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원자재 광상(예컨대 시베리아 황무지의 철광석 채굴)을 개발할 수 있었고, 혹은 점점 더 먼 곳에서 원자재를 실어 올 수 있었으며(예컨대 호주산 양모를 영국의 직조기에 공급했다), 더불어 여러 과학적 혁신이 일어나 인류는 플라스틱 같은 완전히 새로운 원자재를 발명하거나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규소나 알루미늄 같은 천연자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봉쇄를 당해 심각한 원자재 난을 겪었다. 특히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초석 산지는 칠레와 인도에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사실 초석은 암모니아로 대체할 수 있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1908년 말 그대로 공기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발견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하버의 발견을 이용해 화약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원자재는 공기였다. 하버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1918년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버는 이 발견으로 191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화학상이었지 평화상은 아니었다(하버는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분야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의 삶
산업혁명은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값싸고 풍부한 원자재라는 전대미문의 조합을 내놓고 그 결과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성장은 농업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보통 도시의 연기 나는 굴뚝을 생각하거나 지구의 내장 속에서 땀에 절은 채 착취당하는 석탄 광부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무엇보다 제2차 농업혁명이었다.
이것은 농업에 적용된 산업적 생산기법과 저장 및 운송 기법의 발달을 말하며 심지어 동식물까지 기계화되었다. 즉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중심 종교에 의해 신성한 지위로 격상될 무렵, 농장 동물들은 더 이상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았고 기계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농장에서 기계화된 조립 라인의 일부로 키워지는 가축의 숫자는 모두 수백억 마리에 이르며, 해마다 이 중 약 500억 마리가 도축된다.
기계화된 농작물 재배법과 산업적 가축사육법은 현대의 사회경제 질서의 기반이다. 농업이 산업화되기 전에 들판과 농장에서 생산된 식량의 대부분은 농부와 가축을 먹이느라 ‘낭비’되었고, 생산량 중 아주 낮은 비율만이 장인과 교사, 사제와 관료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농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90퍼센트를 넘었다. 하지만 농업이 산업화되자, 적은 수의 농부로도 많은 사무원과 공장 노동자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농업으로 먹고사는 인구는 2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2퍼센트가 미국 인구 전체를 먹이고 남은 것은 수출할 만큼 생산하고 있다. 농업의 산업화가 없었더라면 도시의 산업혁명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사무실은 농업에서 풀려난 수십억 명의 손과 두뇌를 흡수해서 전대미문의 생산물을 봇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쇼핑의 시대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하는데,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누군가 제품을 사주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며,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소비지상주의는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데, 사람들이 제자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실컷 먹게 하고, 자신을 망치고, 나아가 스스로 죽이게끔 하며, 검약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고 말한다. 이는 식품 시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폐해는 가난한 사람이(햄버거와 피자를 잔뜩 먹는다) 부자들보다(유기농 샐러드와 과일 스무디를 먹는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입는다.
또한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사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빛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사는데,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라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다른 면에서도 혁명적인데, 이전 시기의 윤리 체계들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거래를 제시했던, 즉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려면 동정심과 관용을 키우고, 탐욕과 분노를 극복하며, 이기심을 억제해야 만 한다는 조건이 붙었던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소비지상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윤리가 천국을 약속하는 대신 내놓은 조건은 부자는 계속 탐욕스러움을 유지한 채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시간을 소비할 것, 그리고 대중은 갈망과 열정의 고삐를 풀어놓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구매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 신자들이 요청받은 그대로를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다.
끝없는 혁명
산업혁명은 에너지를 전환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그 덕분에 인류는 주변 생태환경에 예속된 상태에서 대체로 해방되었지만, 세상이 호모 사피엔스의 필요에 맞게 변형되면서, 서식지는 파괴되고 가축을 제외한 야생종들은 멸종의 길을 걸었다. 하라리는 이러한 생태계 파괴는 자원 희소성과 같은 문제가 아니고, 이러한 생태적 혼란은 호모 사피엔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현대의 시간
사피엔스는 자연의 변덕으로 인한 영향은 점점 더 적게 받게 되었지만 현대 산업과 정부의 명령에 점점 더 많이 복종하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사회공학적 실험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상과 인간 심리 면에서 예기치 못했던 변화는 더 길게 이어졌다. 많은 변화 중 한 예는 전통농업의 리듬이 산업의 획일적이고 정밀한 스케줄로 대체된 것이다.
전통 농업은 자연의 시간과 유기적 성장의 주기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사회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이 없었으며 그런 측정을 하는 데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 현대 산업은 태양이나 계절을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정밀성과 획일성을 신성시한다. 산업혁명은 시간표와 조립 라인을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의 틀로 변화시켰다.
시간표 체계가 확산된 결정적 고리는 대중교통이었다. 노동자들이 오전 8시에 근무를 시작해야 한다면 기차나 버스는 공장 문 앞에 7시 55분까지 도착해야만 한다. 작업이 몇 분만 늦어져도 생산성은 떨어지고 심지어 불운하게 지각한 사람은 해고될 위험까지 있다. 1784년 영국에서 운행시간표를 붙인 마차 서비스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시간표에 명시된 것은 출발시각뿐이었다. 도착 시각은 없었다.
최초의 상업용 기차가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서 운행을 시작한 1830년으로부터 10년 뒤에 최초의 기차 시간표가 나왔다. 기차는 마차보다 훨씬 더 빨랐으므로, 현지 시각의 변덕스러운 차이가 심각한 불편을 초래했다. 1847년 영국의 열차 회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제부터 모든 열차 시간표를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에 맞추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기관들이 열차 회사들의 모범을 따르기 시작했다.
방송매체는 세상에 등장하면서 — 라디오를 시작으로 TV가 나타났다 — 시간표의 세상을 열었고, 시간표의 주된 강요자이자 복음전도사가 되었다. 라디오 방송국이 처음으로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시보時報 방송이었다. “삐삐 삐 —” 소리는 멀리 떨어진 주거지나 바다의 선박에서 시간을 맞출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라디오 방송국들은 매시간 뉴스를 방송하는 것을 관례화했다.
시간표 네트워크를 운영하기 위해서, 값싸고 정교한 휴대용 시계가 어디에나 널려 있게 되었다. 오늘날 여느 부잣집 한 곳에 있는 시계 종류를 다 합치면 대개 중세 한 나라가 보유했던 것보다 수가 많다. 손목시계, 휴대전화, 침대 머리맡의 자명종, 부엌 벽의 붙박이 시계, 전자오븐이나 TV, DVD, 컴퓨터 스크린의 작업표시줄이 모두 시간을 표시한다.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 알고 싶지 않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산업혁명은 인류사회에 수십 가지의 커다란 격변을 불러왔는데, 또 다른 두드러진 예로는 도시화, 농민의 소멸,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힘, 민주화, 청년문화, 가부장제의 해체 등을 들 수 있지만 이런 격변들조차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게 닥친 가장 중요한 사회혁명, 즉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 사건에 비하면 시시한 것들이다.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지난 2세기에 걸쳐, 산업혁명은 시장에 막대한 새 힘을 주었고, 국가에는 새로운 통신 및 수송 수단을 제공했으며, 정부로 하여금 사무원과 교사, 경찰과 사회복지사의 군단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국가는 가족 간 피의 복수를 경찰을 보내 막았고 법원의 판결로 대체했고, 시장은 지역의 오랜 전통을 장사꾼을 보내 일소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행위 관습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개인이 되어라. 누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 부모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네게 맞는 직업을 택하라. 그 때문에 공동체의 연장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어디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곳에서 살아라. 그 때문에 가족 만찬에 매주 참석할 수 없게 되더라도, 당신은 더 이상 가족이나 공동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 즉 국가와 시장이 당신을 돌볼 것이다. 식량과 주거, 교육과 의료, 복지와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연금과 보험을 제공하고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족과 공동체의 전통적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개인의 해방에는 대가가 따른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강력한 가족과 공동체를 상실한 데 대해 슬퍼하며, 인간미가 없는 국가와 시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소외되고 위협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외된 개인으로 구성된 국가와 시장은 강력한 가족과 공동체로 구성된 국가와 시장에 비해 그 구성원들에게 훨씬 더 쉽게 개입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이어온 인류의 사회계약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지만, 불과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이보다 더 잘 증언하는 사례는 없다.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다.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 (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비용은 비싸다.
국가 역시 가족관계를 예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정부의 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국가의 저지를 당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국가는 심지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위탁할 수도 있다.
오늘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했다. 젊은이들은 연장자의 말을 따를 의무가 점점 줄고 있고, 이에 비해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서 무엇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난을 받는다. 부모들은 스탈린 치하의 여론조작용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처럼, 프로이트의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상상의 공동체
핵가족도 그렇지만 공동체 역시 아무런 정서적 대체물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데, 오늘날 시장과 국가는 과거에 부족민 사이에 느끼던 유대감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상상의 공동체'를 육성함으로써 그 일을 해낸다.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을 포함하는 이 공동체는 국가적, 상업적 필요에 맞게끔 만들어졌다. 모든 상상의 공동체는 실제로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서로 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상상의 공동체가 부상한 사례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국민과 소비 공동체, 즉 민족주의와 소비지상주의다. 둘 다 상상의 공동체임에 분명한 까닭은 시장의 모든 고객이나 한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과거 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알던 것만큼 실제로 잘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비지상주의와 민족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수백만 명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모두가 공통의 과거, 공통의 관심사, 공통의 미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상상일 뿐이다. 돈이나 유한회사, 인권과 마찬가지로, 국민과 소비 공동체는 상호 주관적 실체다. 하지만 그 힘은 막강하다.
국가는 상상의 존재라는 자신의 속성을 숨기려 최선을 다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신이 자연적이며 영원한 실체라고, 어떤 시원적 시기에 모국의 흙과 사람들의 피가 섞여서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보통 과장된 것이다. 오랜 옛날에도 민족은 존재했지만 그 중요성은 오늘날보다 훨씬 적었다. 국가의 중요성이 오늘날보다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인류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다툼에서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라는 부족과 경쟁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서로 직접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비 습관과 관심이 동일하면, 종종 스스로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 그들은 주로 구매 패턴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장보다는 슈퍼마켓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슈퍼마켓 안에서만큼은 소비자 부족이 종종 국가보다도 강하다.
끝없는 운동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단단하고 고정된 무엇이었다.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다. 급격한 사회혁명은 예외였고, 대부분의 사회 변화는 수많은 작은 단계가 축적된 결과였다. 하지만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질서를 바뀔 수 있는 무엇, 우리가 마음대로 가공하고 개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현대 이전 지배자들의 주된 약속은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겠다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모종의 황금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정치에서는 구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것을 건설, 즉 사회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팍스 아토미카*
*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 핵 평화)는 냉전 기간 미국과 소련 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부재했던 긴장의 시기를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종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 시대 전체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1945년 이래 국가 내의 폭력이 줄었느냐 늘었느냐 하는 문제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국가 간의 폭력이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는 점이고, 가장 명백한 사례는 유럽 제국의 붕괴이다. 제국의 소멸 이후 등장한 독립국가들은 전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져 더 이상 국가는 정복과 병탄을 위해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국제 정치에서는 "인접한 두 정치체 사이에는 1년 내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만한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철칙이었고, 이런 정글의 법칙은 19세기말 유럽, 중세 유럽, 고대 중국, 고전 시대 그리스를 지배했지만, 오늘날 인류는 이런 정글의 법칙을 무너뜨렸고 드디어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 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고,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해졌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엘리트들은- 예컨대 훈 족장, 바이킹 귀족, 아즈텍 사제- 전쟁을 긍정적인 선으로 보거나 필요악으로 여겼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반면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즉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 모두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보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은 시기 선택의 문제이고, 아직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으며,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저자는 지난 5백 년은 깜짝 놀랄 만한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시기였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 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고,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항상 그전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또한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고,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행복 계산하기
지금껏 우리는 행복이 주로 건강이나 식사, 부와 같은 물질적 요인의 산물인 것처럼 이야기해왔다. 사람들이 더 부유하고 건강해지면 더 행복할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잠깐, 그게 정말 그렇게 명백한 일일까? 철학자, 사제, 시인 들이 행복의 본질을 수천 년간 곰곰이 생각해온 결과, 그들은 우리의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들도 물질적 조건만큼이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다.
어쩌면 현대의 풍요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소외와 무의미 때문에 크게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보다 잘살지 못했던 선조들이 공동체, 종교, 자연과의 결합 속에서 커다란 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근 몇십 년간 심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무엇이 실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도전에 나섰다. 그것은 돈일까, 가족일까, 유전일까 아니면 덕성일까?
과제의 첫 단계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그것이 내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어떻게 외부에서 측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행복감을 평가하려는 심리학자와 생물학자는 설문지를 나눠주고 그 결과를 계산한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전형적 설문지는 인터뷰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동의하는 정도를 0에서 10 사이의 척도로 평가하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모습이라는 데 만족한다.” “삶은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래를 낙관한다.” “삶은 좋은 것이다.”
이러한 설문 조사에서 확인된 내용은 돈, 질병은 어느정도 행복에 영향을 미치고, 가족과 공동체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아가 행복은 이런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고,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노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추론의 오류에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추측하고 상상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그들의 상황에 대입해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넣기 때문이다.
화학적 행복
한편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데,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주로’ 신경, 뉴런, 시냅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화학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이 감각의 크기와 지속기간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하다(마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조시스템처럼). 사람들은 이런저런 정치 혁명이나 사회 개혁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체의 생화학은 거듭해서 이들을 속인다.
실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대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즉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미국 대공황의 절정기인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 속에서,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며 향정신성 약물이 경찰과 투표 대신 정치의 기반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은 날마다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는데, 생산성과 효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합성 마약이다. 헉슬리의 미래상은 조지 오웰의 《1984》 보다 훨씬 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헉슬리가 그려내는 세상을 괴물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삶의 의미
헉슬리가 그려낸 당황스러운 세계는 행복과 쾌감이 동일하다는 생물학적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쾌락적인 신체적 감각을 느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은 이 감각의 크기와 지속기간을 제한한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행복을 일정 기간 이상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이런 정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그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혹은 싫었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카너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시각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무엇이 정말 자신에게 좋은지를 모른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 행복의 정의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즉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하며, 행복의 관건은 자기기만, 즉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와 같은 견해들은 행복이 모종의 주관적인 쾌감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고 이것은 근대 자유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과 아름다움, 당위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했고,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선호는 신뢰하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진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글귀는 "너 자신을 알라!(라틴어 'NOSCE TE IPSVM')"인데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보통 사람은 진정한 자신에 대해 모르며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물었다면, 여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이 기도보다는 성관계를 더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관계가 행복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존재이며 쉽게 사탄의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뿐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로인 중독자와 어느 정도 비슷한 상태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마약 사용자들의 행복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고 상상해보자. 중독자들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 하나같이 마약을 하고 있을 때만 행복하다는 답이 나왔다고 하자. 이 심리학자는 헤로인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단언하는 논문을 출간할 것인가?
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의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설사 그 선택이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특히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의 경우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는데,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으며, 명상을 통해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저자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고,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고,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호모 사피엔스는 21세기에 들어 이제 생물학적인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고,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지난 2000년에 예술가 ‘에두아르도 카츠’의 요청에 따라 해파리 형광 유전자를 토끼에게 결합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녹색 형광 토끼 '알바'가 그 시대의 새벽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적설계의 방법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 생명공학(생물학의 수준에서 인간이 계획적으로 개입하는 것), 둘째 사이보그 공학(유기물과 무기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셋째 비유기물 공학(독립적인 진화를 겪을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컴퓨터 바이러스 등)이다.
생명공학과 관련해서는, 유전공학자들이 거둔 여러 가지 놀라운 성과들(벌레의 수명을 여섯 배 늘리고 기억과 학습능력이 크게 개선된 천재 생쥐를 만드는 데도 성공) 외에도 그들이 암수가 평생 일부일처 관계를 맺는 밭쥐의 해당 유전자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런 유전자를 인간에게 삽입함으로써 인간의 행태와 사회구조까지 유전적으로 조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유전학자들은 멸종 동물을 복원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 영화 <쥐라기 공원>의 공룡뿐만 아니라 매머드 등도 복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 처치 교수는 이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으니 복원한 DNA를 사피엔스의 난자에 이식할 대리모를 구하고 있으며, 그러면 지난 3만 년 이래 처음으로 네안데르탈인 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주: 나중에 이 주장은 조지 처치 교수가 사실무근이라고 확인했다는 기사도 있다. https://v.daum.net/v/20130122153806389)
앞으로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생리기능, 면역계, 수명뿐 아니라 지적, 정서적 능력까지 크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공학이 천재 생쥐를 만들 수 있다면 천재 인간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일부일처제 밭쥐를 창조할 수 있다면 평생 배우자에게 충실하도록 유전적으로 타고난 인간을 왜 못 만들겠는가?
주된 장애는 윤리적, 정치적 반대이다. 인간에 대한 연구 속도가 느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적 주장이 아무리 그럴싸하다 해도, 그것으로 다음 단계의 발전을 오랫동안 지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발전에 인간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하고, 불치병을 정복하며, 우리의 인지적 정서적 능력을 향상시킬 성패가 달려 있다면 특히 그렇다.
생명공학이 네안데르탈인을 정말 부활시킬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막을 내리게 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린다고 해서 반드시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은 있다.
생체공학적 생명체
생명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이 있다. 사이보그 공학이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존재로, 생체공학적 의수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거의 모두가 생체공학적 존재다. 타고난 감각과 기능을 안경, 심장박동기, 의료보장구 그리고 컴퓨터와 휴대전화(우리의 뇌가 지고 있는 자료 저장 및 처리의 부담 일부를 맡아준다)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사이보그가 되려는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데 이 선을 넘으면 우리는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으며 우리의 능력, 욕구, 성격, 정체성이 달라지게 하는 무기물적 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의 군사 연구기관인 국방고등연구기획청(DARPA)은 곤충 사이보그를 개발 중이다. 파리나 바퀴벌레의 몸에 전자칩, 탐지기, 연산장치를 심는다는 아이디어다. 그러면 멀리 있는 인간이나 인공지능이 해당 곤충의 움직임을 조절해 정보를 수집, 전송하게 만들 수 있다.
사피엔스 역시 사이보그로 변하는 중이다.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라고도 불린다. 귀에 이식된 이 장치는 귀의 바깥에 장치된 마이크로폰을 통해 소리를 흡수한다. 장치는 소리를 걸러서 인간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번역한다. 신호는 중추 청각신경으로, 다시 뇌로 전달된다. 미 정부가 후원하는 독일 회사인 ‘망막 임플란트(Retina Implant)’는 시각장애인이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도록 망막에 삽입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환자의 눈에 작은 마이크로칩을 삽입하는 게 핵심이다.
미국의 전기기술자인 제시 설리반은 2001년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완전히 잃었다. 오늘날 그는 ‘시카고 재활연구소(Rehabilitation Institute of Chicago)’의 도움 덕분에 두 개의 생체공학 팔을 사용한다. 새 팔의 특징은 생각만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제시의 뇌에서 나온 신경신호는 초소형 컴퓨터에 의해 전기적 명령으로 해석되고, 이 명령이 팔을 움직인다. 이와 유사한 생체공학 팔이 오토바이 사고로 팔을 잃은 미국 군인인 클로디아 미첼에게 최근 적용되었다.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에 가장 혁명적인 것은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려는 시도다. 컴퓨터가 인간 뇌의 전기 신호를 읽어내는 동시에 뇌가 읽을 수 있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 목표다. 만일 뇌가 집단적인 기억은행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기억, 의식,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되면 가령 한 사이보그가 다른 사이보그의 기억을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기억하게 된다.
또 다른 삶
비유기물 공학과 관련해서는,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Blue Brain Project,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컴퓨터 내의 전자회로가 뇌의 신경망을 고스란히 모방하게끔 하는 것)를 언급한다.
"자금 모금이 적절히 이루어질 경우 10-20년 내에 우리는 인간과 흡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인공두뇌를 컴퓨터 내부에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주: 스위스 로잔공대의 헨리 마크람(Henry Markram) 교수로 보인다)의 말과 2013년 유럽연합은 이 프로 젝트에 10억 유로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주: 아직까지 이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기사는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우리는 이제 외부 세계는 물론 우리의 신체와 마음까지 조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이 능력은 위험한 속도로 발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영역(법률, 의료, 공공정책, 노동시장 등)의 활동이 전통적인 방식에 안주하지 못하고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예언
1818년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했다. 우월한 존재를 창조하려 시도한 과학자가 결국 괴물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이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되풀이되어, 새로운 과학적 신화의 골자가 되었다. 얼핏 보기에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경고 같다. 우리가 신의 행세를 하려 들고 생명을 조작하면 심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경고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종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핵 재앙이나 생태적 재앙이 우리를 먼저 파괴해 버리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기술이 발달한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 존재는 체격뿐 아니라 인지나 감정 면에서 우리와 매우 다를 것이다.
우리가 과학자들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보다 진실로 우월한 존재를,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바라보듯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바라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로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하라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후기 - 신이 된 동물
저자가 이 책을 관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저자의 '후기'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는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넘나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을 하나의 생물학적 ‘종’으로서 분석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이고, 여기에 경제적,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정치적 등 여러 관점을 통합하여 색다르고 종합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다른 역사가들이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과 달리, 객관적인 자료나 숫자에만 얽매이거나 단순히 문제 제기나 의문만으로 끝내지 않고 책 전체를 관통하면서 항상 ‘과연 인류는 행복한가’라는 큰 담론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미션('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과 고민을 던져주었기에, 이 책이 그렇게 일반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방대한 내용과 매우 난해한 주제를 짧고 매끄럽게 정리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 책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이 책이 쉽게 읽힌다고 해서 결코 주제가 쉽지는 않으며 이 책을 단순히 한 두 번 빠르게 읽고 나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생각이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또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이나 팩트를 다시 인터넷과 다른 책을 통해 검증하지 않은 채 저자의 논리나 추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이 책의 내용만을 맹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정리하는 거의 2주 정도의 기간 동안 업무 시간 외에는 내내 저자가 던진 묵직한 화두에 대해 고민해 보는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나로서는 아직 그에 대한 정답을 알 수는 없겠지만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