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과학혁명
제4부 과학혁명
여기서는 근대 인류가 어떻게 과학혁명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서유럽의 제국주의와 결합하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어떻게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앞으로 인류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지의 발견
기원후 1000년 어느 스페인 농부가 잠이 들어 5백 년 후에 깨어난다고 하자. 그는 콜럼버스가 이끄는 니냐 호, 핀타 호, 산타마리아 호의 선원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깼다. 그렇지만 그가 깨어난 세상은 매우 친숙해 보일 것이다. 기술과 풍습과 정치적 경계선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중세의 이 ‘립 밴 윙클’(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지은 소설 속 주인공 이름. ‘세상의 변화에 놀라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다)은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한 명이 같은 식으로 잠에 빠졌다가 21세기 아이폰 벨소리에 잠을 깬다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여기는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지난 5백 년간 인간의 힘은 경이적으로, 유례없이 커졌다. 16세기 이전에는 지구를 일주한 인간이 아무도 없었지만 상황은 1522년에 마젤란의 배가 72,000킬로미터를 항행한 끝에 스페인으로 돌아오면서 바뀌었으며, 또한 1500년에 인류는 지표면에 묶여 있었지만 1969년 7월 20일 인류는 달에 착륙한 것은 역사적 위업 정도가 아니라 진화적, 심지어 우주적 업적이었다.
인간의 눈이 미생물을 처음 본 것은 1674년이 되어서였고, 지난 5백 년간 가장 눈에 띄는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은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였는데, 정확히 그때, 미국 과학자들은 앨러머고도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고,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약 1500년 이전까지 전 세계 인류는 자신에게 새로운 의학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얻을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한 반면 지난 5세기 동안, 인류는 과학연구에 투자하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점차 믿게 되었고,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반복해서 증명된 사실이었으며, 증거가 쌓일수록, 부자와 정부는 과학에 더 많은 자원을 기꺼이 투입하였다.
우리는 모른다(Ignoramus)
적어도 인지혁명이 일어난 이후부터 인류는 우주를 이해하려 애썼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신들, 혹은 전능한 유일신, 혹은 과거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가 있었고, 그것을 문자와 구전 전통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에 우주의 핵심 비밀이 빠져 있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고대의 전통 지식은 오로지 두 종류의 무지만을 인정했다. 첫째, 한 개인이 뭔가 중요한 것에 대해 무지할 수는 있었다. 그가 필요한 지식을 얻으려면, 자신보다 현명한 누군가에게 묻기만 하면 되었다. 둘째, 하나의 전통 전체가 뭔가 중요치 않은 것에 대해 무지할 수는 있었다. 위대한 신들이나 과거의 현자들이 우리에게 애써 말해주지 않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정의상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거미 연구를 금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미학자는 — 중세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말이지만 —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부수적이라는 점과 자신의 연구결과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학자가 거미나 나비나 갈라파고스핀치에 대해 무엇을 발견하든 그 지식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고, 사회나 정치, 경제의 근본적 진리와 무관했다.
오늘날의 과학은 지식의 전통으로서는 독특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집단적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이 그렇다. 다윈은 스스로 ‘생물학자의 대표’를 자처하거나 생명의 수수께끼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생물학자들은 아직 뇌가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 내는 지에 관해 좋은 설명을 얻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물리학자들도 무엇이 빅뱅을 일으켰는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과학혁명은 우리의 선조 대부분이 대처할 필요가 없었던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며 지금의 지식도 잠정적인 것이라는 가정이 우리가 공유하는 신화에까지 적용되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 국가, 국제 시스템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정치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키려는 현대의 모든 노력은 다음의 두 가지 비과학적 방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1. 하나의 과학이론을 택해서 통상의 과학적 관례와는 반대로 그것이 궁극적인 절대진리라고 선포하는 것. 나치당원과 공산주의자들이 사용. 나치당원들은 자기네 인종정책이 생물학적 사실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진리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이며 여기에는 결코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 과학은 내버려 두고 과학과 무관한 절대진리에 따라 사는 것.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전략.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권리에 대한 도그마적인 신조를 토대로 건설된 이념인데, 그 신조는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
과학의 도그마
현대 과학에는 도그마가 없다. 하지만 연구기법에는 공통적인 핵심이 있는데, 늘 경험적 관찰들을 모은 뒤 수학적 도구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찰이란 적어도 우리의 감각기관 중 하나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무게중심은 옛 전통을 연구하기보다는 새로운 관찰과 실험을 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더 많은 관찰이 곧 더 많은 지식은 아니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관찰들을 연결하여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과거의 전통에서는 보통 이야기를 써서 이론을 꾸며냈지만, 현대 과학에서는 수학을 사용한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 유교의 경전에는 방정식, 그래프, 계산이 거의 없다. 전통적 신화와 서적이 보편 법칙을 서술할 때는 수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과학자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1687년 아이작 뉴턴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틀림없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를 출간했다. 뉴턴은 운동과 변화의 일반이론을 제시했다. 뉴턴 이론의 위대한 점은 세 개의 매우 단순한 수학 법칙으로 떨어지는 사과에서부터 별똥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자연이라는 책이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부 챕터(예컨대 물리학)는 결국 깔끔한 방정식들로 귀결된다. 하지만 생물학, 경제학, 심리학을 깔끔한 뉴턴 방정식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했던 학자들은 실패했다. 이런 분야는 그런 야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드는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수학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2백 년 사이에 실재의 보다 복잡한 측면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수학 분과가 개발되었다.
확률과 통계
1744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인 알렉산더 웹스터와 로버트 월리스는 생명보험기금을 만들어 사망한 목사의 배우자와 고아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목사들이 얼마를 내야 기금에 돈이 충분히 모여서 약속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 알려면, 매년 얼마나 많은 목사가 죽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배우자와 고아가 남을 것이며 배우자는 남편보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운 좋게도 그들에게는 즉각 사용할 수 있는, 이미 만들어진 자료가 있었다. 특히 50년 전에 에드먼드 핼리가 출간한 생명표가 유용했다. 핼리는 독일 브레슬라우 시에서 얻은 1,238건의 출생기록과 1,174건의 사망기록을 분석해두었다. 핼리의 표가 있으면, 예컨대 그 해에 20세인 사람이 사망할 확률은 1백 분의 1이지만 50세인 사람의 사망확률은 39분의 1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1765년에는 ‘사망한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들의 배우자와 자녀를 위한 대비 기금’의 자본은 총 58,348파운드가 될 것이었다. 이 계산은 놀랄 만큼 정확하였다. 실제로 그해가 되었을 때 기금의 자본은 예측보다 단 1파운드 적은 액수 58,347파운드였다! 하박국(구약에 나오는 기원전 7세기의 소 선지자), 예레미야(기원전 6~7세기의 대 예언자), 사도 요한의 예언보다 훨씬 더 정확한 예측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두 목사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확률 계산은 연금과 보험산업의 핵심이 되는 보험통계학뿐 아니라 인구통계학(역시 성직자였던 로버트 맬서스가 기초를 쌓았다)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인구통계학은 결국 찰스 다윈이 세운 진화론의 초석이 되었다. 특정한 조건들 아래서 어떤 종류의 생명체가 진화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방정식은 없지만, 유전학자들은 확률 계산을 통해 주어진 개체군 내에서 특정 돌연변이가 퍼져나갈 가능성을 계산한다.
이와 유사한 확률 모델은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을 비롯한 다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핵심이 되었다. 심지어 물리학도 결국 뉴턴의 고전 방정식을 양자역학의 확률 구름으로 보충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의 분야였던 인간 언어의 연구(언어학)나 인간 심리의 연구(심리학)조차 점점 더 수학에 의존하며 스스로를 정밀과학이라고 소개하려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대 과학을 소화하기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과학은 막대한 특권을 누리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때문이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The New Instrument)’이라는 과학 선언문을 출간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주장했는데, '지식'의 진정한 시금석은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의 여부다.
여러 세기에 걸쳐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구를 많이 제공했다. 일부는 사망률과 경제성장률을 예측하는 데 쓰인 것 같은 정신적 도구였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술적 도구다. 과학과 기술 사이에 구축된 연결관계는 매우 강력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양자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과학 연구 없이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신기술을 낳지 않는다면 연구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실제로는 과학과 기술이 관련을 맺은 것은 매우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1500년 이전에 과학과 기술은 완전히 별개의 분야였다. 17세기 초반 베이컨이 양자를 연결시킨 것은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17~18세기 동안 둘의 연결은 강화되었지만, 매듭이 지어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800년에도 강한 군대를 원하는 지배자나 성공적인 사업을 원하는 사업계 거물의 대부분은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에 자금을 대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체코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유럽 연합군을 무찌른(1805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갖춘 무기는 루이 16세가 사용하던 것과 거의 동일했다. 나폴레옹은 포병이었음에도 신무기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비행기계, 잠수함, 로켓을 개발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그를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진보라는 이상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인류문화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황금시대는 과거에 있었고, 세상은 퇴화하지는 않더라도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지혜를 엄격히 추종한다면 좋았던 옛 시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고 인간의 창의성으로 일상생활의 이런저런 측면을 개선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지식으로 세상의 근본 문제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번개다. 많은 문화권에서 번개는 분노한 신이 죄인을 처벌하기 위해서 때리는 망치로 여겨졌다. 18세기 중반, 과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 하나가 시행 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번개는 단지 전류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실험하기 위해서 번개를 동반한 폭풍 속에서 연을 띄운 것이다. 프랭클린은 경험적 관찰과 전기 에너지의 속성에 대한 지식을 결합하여 피뢰침을 발명하고 신들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었다.
가난도 또 하나의 적절한 사례다. 많은 문화권은 가난이 이 불완전한 세상의 피할 수 없는 일부라고 보았다. 가난은 개입을 통해 처리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라고 보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작물학, 경제학, 의학, 사회학의 최신 발견을 기초로 한 정책을 펴면 가난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세상에는 최악의 헐벗음에서 벗어난 지역이 많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발밑에는 안전망이 쳐져 있다. 보험,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보장, 아주 많은 지역적 국제적 NGO들이 사람들을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한 지역 전체에 재난이 닥치면 범세계적인 구호 노력이 이어지고,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모와 모욕, 가난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선 굶어 죽지는 않는다.
길가메시 프로젝트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종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 죽음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근대 후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이를 당연시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신앙은 죽음을 삶에 의미를 주는 원천으로 바꿔놓았다.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고대 신화, 즉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가 다루는 주제도 이것이다.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패배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심근경색이나 암, 감염 같은 다양한 기술적 실패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답이 있게 마련이다.
인정하건대, 현재 우리가 모든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대신 질병과 노화의 원인이 되는 생리적, 호르몬적, 유전적 시스템을 연구하느라 바쁘다. 그들은 신약, 혁명적 치료법, 인공장기를 개발 중이며 언젠가는 죽음의 신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과학자든 누구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정복해? 무슨 헛소리야! 우리는 그저 암, 결핵,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야"라고 우겼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이슈를 피했다. 목표 달성이 지나치게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과학혁명의 선도적 프로젝트는 인류에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그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수많은 일상의 통증과 가벼운 병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40세가 채 안 되던 평균 기대 수명은 약 67세로 성큼 뛰었고, 선진국에선 약 80세가 되었다. 어린이와 유아 사망률이 특히 낮아졌다. 20세기가 되기 전에는 농경사회 어린이 중 3분의 1이나 4분의 1이 성인이 되 기 전에 사망했는데, 대부분 디프테리아, 홍역, 천연두에 희생되었다.
이런 수치가 주는 충격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하려면, 숫자를 가리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영국 왕 에드워드 1세(1237~1307)와 그의 왕비 엘리노어(1241~1290)가 좋은 사례였다. 그들의 자녀는 중세 유럽에서 제공받을 수 있는 최고의 환경과 양육 여건을 누렸다. 왕궁에 살면서 음식을 마음껏 먹었고, 따스한 옷을 입었다. 가장 깨끗한 물, 수많은 시종, 최고의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왕비가 낳은 열여섯 명의 아이에 대해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 1255년에 태어난 이름 없는 딸은 출생 시 사망했다.
2. 딸 캐서린은 한 살 혹은 세 살에 사망했다.
3. 딸 조앤은 생후 6개월에 사망했다.
4. 아들 존은 5세에 사망했다.
5. 아들 헨리는 6세에 사망했다.
6. 딸 엘리노어는 29세에 사망했다.
7. 이름 없는 딸은 생후 5개월에 사망했다.
8. 딸 조앤은 35세에 사망했다.
9. 아들 알폰소는 10세에 사망했다.
10. 딸 마거릿은 58세에 사망했다.
11. 딸 베렌게리아는 2세에 사망했다.
12. 이름 없는 딸은 출생 직후 사망했다.
13. 딸 메리는 53세에 사망했다.
14. 이름 없는 아들은 출생 직후 사망했다.
15. 딸 엘리자베스는 34세에 사망했다.
16. 아들 에드워드. 에드워드 2세가 된다.
불멸을 추구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달성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까? 1900년에 우리가 인체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었던지 그리고 한 세기 만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축적했는지 돌이켜보면 낙관할 만하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불멸은 아니다. 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외상을 당하지 않는 한 생명이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 전망한다.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근대 후기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대부분이 죽음과 사후세계를 방정식 바깥으로 이미 제쳐놓았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는 죽음과 사후의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종교와 자유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의 이데올로기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과학의 물주
우리는 기술 시대를 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 속에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은 여타 인간활동보다 상위에 있는 고도의 도덕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업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과학에는 돈이 매우 많이 든다.
다시 말해, 지난 5백 년간 현대 과학이 놀라운 업적을 성취한 것은 주로 정부와 기업, 재단, 민간 기부자들이 과학 연구에 기꺼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연구에 자금이 지원되는 이유는 그 연구가 모종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누군가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16세기의 왕과 은행가 들은 세계를 누비는 지리적 탐험대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지만, 아동심리학 연구에는 한 푼도 대지 않았다. 새로운 지리적 지식이 자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무역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짐작한 데 비해 아동심리는 이해해보았자 아무런 이익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 미국과 소련 정부가 수중고고학이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것은 핵물리학을 연구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지만 수중고고학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과학자들 자신이 돈의 흐름을 통제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행동한다. 하지만 과학적 의제가 과학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제한된 자원을 끌어오려면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좋은가?"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다. 과학은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할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상 과학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해야 마땅한지를 안다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뿐이다.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능력도 없다. 순수한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가령 늘어난 유전학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다. 결국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특히 두 가지 힘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하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다. 과학과 제국과 자본 사이의 되먹임 고리는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아마 지난 5백 년간 역사의 가장 주요한 엔진이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과학과 제국이라는 쌍둥이 터빈이 어떻게 서로 맞물렸는지를 알아보고, 그다음에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돈 퍼내는 펌프에 장착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과학과 제국의 결혼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근대 초기의 많은 천문학자가 강한 흥미를 느꼈던 문제다. 금성은 몇 년에 한 번씩 지구와 태양 사이를 직접 가로지른다. 이때 태양의 일부가 금성에 가려지는 ‘금성의 식蝕’ 현상이 생긴다. ‘식’의 지속 시간은 지구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 관측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동일한 ‘식’을 각기 다른 대륙에서 관찰하면, 단순한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태양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다음 번 금성의 식이 1761년과 1769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고, 가능한 한 서로 먼 거리에서 식을 관찰하기 위해서 탐험대를 세계의 구석 네 지점으로 파견했다. 1761년 과학자들은 시베리아, 북미,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에서 식을 관찰했다. 그리고 1769년의 식이 다가오자, 유럽의 과학공동체는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멀리 북구 캐나다와 캘리포니아(당시는 황무지였다)에까지 과학자들을 파견했다.
‘자연지식의 개선을 위한 런던 왕립협회’는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정확한 답을 얻으려면 머나먼 남서 태평양까지 천문학자를 한 명 보내는 것이 필수였다. 왕립협회는 저명한 천문학자인 찰스 그린을 타히티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돈도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탐사 기회를 단 한 차례의 천문 관측에만 이용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그린에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과학자 여덟 명으로 구성된 팀이 동행했으며,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와 대니얼 솔랜더가 팀을 이끌었다. 과학자들이 마주칠 것이 분명한 신천지, 동식물, 사람을 스케치하는 임무를 띤 화가 한 사람도 포함되었다. 뱅크스와 왕립협회는 구입할 수 있는 최신의 과학장비를 갖췄고, 탐험대는 경험 많은 뱃사람인 동시에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민족지誌 학자인 제임스 쿡 선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 탐험대는 1768년 영국을 출발해 이듬해 타히티에서 금성의 식을 관측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 들렀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막대한 양의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 자료를 싣고 귀국했다. 탐험대가 찾아낸 것들은 많은 학문분과에 크게 기여했으며, 남태평양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한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다음 세대의 박물학자와 천문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쿡의 탐험에 혜택을 받은 분야 중 하나는 의학이었다. 당시 먼 곳의 해안을 향해 돛을 올리는 선박들은 선원의 절반 이상이 항해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괴혈병으로 사망한 선원은 약 2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어떤 치료법도 소용이 없어, 선원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1747년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린드가 이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대조 실험을 시행한 것이다. 그는 이들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다. 한 집단에는 괴혈병에 흔히 쓰이는 민간요법인 감귤류를 먹으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러자 이 집단에 속한 환자들이 급속히 회복되었다. 린드는 감귤에 선원들의 몸에 부족한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비타민 C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국 해군은 린드의 실험 결과를 믿지 않았지만, 제임스 쿡은 믿었다. 그는 이 의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배에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대량으로 실었으며, 탐험대가 육지에 상륙할 때마다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지시했다. 쿡은 괴혈병으로 한 명의 선원도 잃지 않았다. 그다음 몇십 년간 세계의 모든 해군은 쿡의 해양 식단을 따랐으며, 수없이 많은 선원과 승객이 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또한 쿡은 자신이 ‘발견한’ 수많은 섬과 육지에 대해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호주였다. 쿡의 탐사대는 영국이 남서 태평양을 점령하고, 호주, 태즈메이니아, 뉴질랜드를 정복하고,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하며, 그곳의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대부분을 박멸할 기초를 닦아주었다. 쿡의 탐사 다음 세기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가장 비옥한 땅을 유럽 정착민들에게 빼앗겼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거의 몰살당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역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최후의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에 보내져 서구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나 대부분 이를 거부하고 그 중 트루가니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쿡의 배는 군대의 보호를 받은 과학탐사대였을까, 아니면 소수의 과학자가 따라붙은 군사원정대였을까? 이것은 연료통이 반쯤 찼는지 반쯤 비었는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 다에 해당한다.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제임스 쿡 선장과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과 제국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불행한 트루가니니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유럽인가
쿡의 탐험이 있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도와 서유럽 전반은 지중해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일어난 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도 대부분의 부를 북아프리카, 발칸, 중동 지방에서 얻었다. 로마에게 서유럽은 초라하고 황량한 서부에 지나지 않았고, 광물과 노예를 제외하면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서유럽은 세를 얻고 '외부 세계' - 남미와 북미의 두 대륙과 대양을 의미한다 - 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때도 유럽은 아시아 강대국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 퍼센트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 난쟁이였다.
세계의 권력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이르러서다. 이 때 유럽인들은 일련의 전쟁에서 아시아 강대국들에게 모욕을 안기고, 그 영토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다. 1900년이 되자 유럽은 세계 경제와 대부분의 땅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1950년 서유럽과 미국을 합친 생산량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 넘었고, 중국이 차지하는 몫은 5퍼센트로 축소되었다.
어떻게 유라시아 변방에 있던 이들은 그 오지에서 뛰쳐나와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보통은 그 공의 큰 부분을 유럽 과학자들에게 돌린다. 물론 1850년 이래 유럽의 세계 지배가 군사-산업-과학 복합체와 기술의 묘기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 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군사-산업-과학 복합체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서 꽃피었을까? 영국이 약진 했을 때 어째서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따라가고 중국은 뒤처졌을까?
1900년 이후 서유럽이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단지 1차 산업혁명만의 힘만이 아니다. 당시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으며,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복의 사고방식
근대 과학이 고전시대 그리스, 중국, 인도, 이슬람 등의 고대 과학 전통에 큰 빛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독특한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초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과정은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 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나란히 일어났다. 근대 초기 동안 중국인, 인도인, 무슬림, 아메리카 원주민, 폴리네시아인은 계속해서 과학혁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이런 방대한 과학적 발견을 수집, 분석하고 그를 통해 과학적 학문을 창조한 것은 세계적 유럽 제국을 지배하는 지적 엘리트들이었다. 극동과 이슬람 세계에도 유럽 못지않게 지적이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15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이들은 뉴턴 물리학이나 다윈 생물학에 비슷하기라도 한 것조차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무엇이 현대 과학과 유럽 제국주의 사이의 연대를 구축했을까? 핵심요인은 식물을 찾는 식물학자와 식민지를 찾는 해군장교가 비슷한 사고방식, 즉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고,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렇게 얻은 새로운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둘 다 희망했다는 점에 있었다.
유럽 제국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들과 완전히 달랐는데, 과거의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정복은 단지 '그들의' 세계관을 활용하고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던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안고 먼 곳의 해변을 향해 떠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의 정복과 영토의 정복은 점점 더 긴밀하게 합쳐졌다. 18~1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주요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165명의 학자를 데려갔다. 이들은 많은 일을 해냈지만, 무엇보다도 이집트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학문을 구축했고, 종교, 언어, 식물 연구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1831년 대영제국 해군은 측량선 비글호를 보내 남아메리카 해안과 갈라파고스 제도의 지도를 작성하게 했다. 남미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런 지식이 필요했다. 선장은 탐험 도중 만나게 될 지형을 연구하기 위해서 지리학자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전문 지리학자 여러 명이 초청을 거부하자, 선장은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22세의 찰스 다윈에게 이 업무를 제안했고, 다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 이후는 알다시피 역사가 되었다.
비어있는 지도
'탐험하고 정복한다'는 근대의 사고방식은 세계지도의 발전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이전에도 수많은 문화권에서 세계지도를 그렸다. 단언하건대, 그중 어느 것도 세계 전체를 정말로 알고 그린 것은 없었다. 낯선 지역은 그냥 빼버리거나 상상 속의 괴물이나 불가사의로 멋대로 채워놓았다. 이런 지도에는 빈 공간이 없었다. 이런 지도들은 세 계 전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15~16세기에 유럽인들은 빈 공간이 많은 세계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럽인의 제국주의 욕구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빈 지도는 심리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약적인 진전이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세계의 많 은 부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중대한 전환점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동아시아를 향한 새 항로를 찾기 위해서 스페인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한 1492년에 왔다. 콜럼버스는 여전히 과거의 '완전한' 세계지도를 믿고 있었다. 1492년 10월 12일 오전 2시쯤 콜럼버스 탐험대는 미지의 대륙과 맞닥뜨렸다. 핀타호의 돗대에서 관측하던 후안 로드리게스 베르메호는 섬을 하나 발견하고는 외쳤다. "육지다! 육지다!" 오늘날 우리가 바하마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동아시아 연 안의 작은 섬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인도 제도에 - 오늘날 우리가 동인도 제도 혹은 인도네시아 군도라고 부르는 곳이다 - 상륙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견한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콜럼버스는 평생 그렇게 오해했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콜럼버스는 여전히 중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계 전체를 안다고 확신했으며, 심지어 스스로 이룬 기념비적인 발견도 그 확신을 흔들지 못했다.
최초의 근대인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는데,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저자 베스푸치).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으로,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증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이제 유럽의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인들은 마치 자석처럼 지도에서 비어 있는 곳들로 이끌렸고 공백을 신속하게 채워 넣기 시작했다. 15~16세기 동안 유럽 탐험대는 아프리카를 일주하고, 아메리카를 답사했 으며, 태평양과 인도양을 횡단하고, 세계 전역에 그물처럼 기지와 식민지를 건설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국지적 분쟁과 이웃과의 불화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먼 곳의 땅을 탐사하고 정복한다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로마인이 에트루리아를 정복한 것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기원전 350~300년경). 이어 이들은 포 평원을 방어하기 위해 프로방스를(기원전 200년경), 프로방스를 지키기 위해 갈리아를 (기원전 50년경),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브리튼 섬(기원후 50년경)을 정복했다. 로마에서 런던까지 넓혀가는 데 4백 년이 걸렸던 것이다. 기원전 350년에 배를 타고 곧바로 브리 튼 섬으로 가서 점령할 생각을 한 로마인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 명 왕조의 정화 제독이 벌인 대항해가 유럽인들의 발견의 항해를 예고했으며 그 못지않은 성취였다고 주장한다. 정화 제독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함대를 이끌고 중국에서 인도양의 먼 곳까지 항해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함대는 3백 척에 가까운 배에 3만 명 가까운 인원이 탑승했다.
함대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 만, 홍해, 동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중국 배들은 헤자즈(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홍해 연안 지방)의 주요 항구인 제다와 케냐 연안의 말린디 항구에까지 닻을 내렸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선단 - 세 척의 작은 배에 120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 은 정화의 용 떼에 비하면 모기 세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했다.
정화 제독은 대양을 탐험하고 각국으로 하여금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방문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정화의 원정은 중국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린 것이 아니었다. 1430년대 베이징의 지배 파벌이 바뀌자 새로 등장한 거물들은 갑자기 작전을 중단시켰다. 대함대는 해체되었고, 중요한 기술적, 지리학적 지식은 단절되었다.
근대 유럽인들이 이례적인 점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는 데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근대 초기 유럽인들이 걸린 열병이었다. 그 열병은 그들로 하여금 낮선 문화가 가득한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항해하여, 그 해변에 한 발 디딘 뒤, 즉각 이렇게 선언하게끔 만들었다. "이 땅은 모두 우리 왕의 것이다!'
외계로부터의 침공
1517년경 카리브 제도에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멕시코 본토 중심부 어딘가에 강력한 제국이 있다는 막연한 소문을 들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에 아즈텍의 수도는 젯더미가 되었고, 아즈텍 제국은 무너졌으며,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에 건설된 광대하고도 새로운 스페인 제국을 통치했다. 스페인인들은 여기서 멈추고 자축하거나 숨을 고르지 않았다. 이들은 즉각 사방으로 탐험 겸 정복 작전을 벌였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첫 항해(1492년)와 코르테스의 멕시코 상륙(1519년) 사이 시기에 스페인인들은 카리브 제도의 섬 대부분을 정복해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복당한 원주민들에게 식민지는 지상의 지옥이 었다.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들을 노예로 삼아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카리브 원주민 대부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정복자의 범선에 무임승차해온 질병 바이러스 탓이었다.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이런 인종청소는 아즈텍 제국의 바로 코앞에서 일어났지만, 1519년 코르테스가 제국의 동부 연안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인들은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우주에서 침공해온 외계인 같았다.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이 오늘날의 베라크루스 항구에 해당하는 화창한 해변에 상륙한 사건은 아즈텍인들이 완전히 미지의 사람들과 조우하는 첫 사례였다.
아즈텍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들이 아는 모든 인간과 달리 이들 외계인은 피부가 희고 얼굴에는 털이 많았다. 태양빛 머리칼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악취가 났다(원주민들은 향로를 든 원주민을 배정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게 했다. 스페인인들은 그것을 신성한 영예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주민의 자료를 통해 알게 된 바 그것은 원주민들이 새로 나타난 인간들의 악취를 견딜 수 없어서였다).
외계인의 물질문화는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이들이 타고 온 거대한 배는 보기는커녕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이들이 타고 다니는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동물(말을 가리킨다)은 바람처럼 빨랐다. 이들은 또 번쩍이는 금속 막대로 번개와 천둥을 만들 능력이 있었다. 빛나는 긴 칼과 뚫을 수 없는 갑옷이 있었는데, 이에 맞서면 원주민의 나무칼이나 부섯돌 촉을 단 창은 무용지물이었다.
이들을 신이라고 믿는 아즈텍인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악마나 죽은 자의 유령, 강력한 마법사라고 주장했다. 아즈텍인들은 모든 역량을 집결해 스페인인을 쏠어버리는 대신에 심사숙고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협상을 벌였다. 이들에게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코르테스에게는 스페인인이 550명밖에 없었다. 550명이 수백만 명이 사는 제국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인들에 대해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와 그의 부하들은 미지의 땅을 침공해서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경험 많은 족속은 없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1519년 7월 그 화창한 해안에 닻을 내렸을 때 주저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마치 우주선에서 내린 과학소설 속 외계인처럼, 그는 자신들에게 경외심을 품은 현지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목적으로 왔다. 너희 지도자에게 우리를 안내 하라."
코르테스는 자신을 위대한 스페인 왕의 평화사절이라고 소개하고, 아즈텍의 지배자 몬테주마 2세에게 외교 접견을 요청했다(이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스페인 왕은 코르테스에 대해서도 아즈텍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아즈텍 인들은 그 지도자를 공손하게 몬테주마 2세에게 인도했다. 접견 도중 코르테스가 신호를 보내자, 강철무기를 지닌 스페인인들이 몬테 주마 2세의 경비병을 학살했다(이들의 무기는 나무 곤봉과 돌칼밖에 없었다).
코르테스는 몬테주마 2세를 궁전 안에 감금해두고서, 마치 왕은 포로로 잡히지 않았으며 '스페인 대사'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 척 가장했다. 아즈텍 제국의 통치조직은 극도로 중앙집권적이었으며, 이런 전대미문의 사태는 이 조직을 마비시켰다. 몬테주마 2세는 자신이 여전히 제국을 지배하는 척 행동했으며, 아즈텍의 엘리트들은 계속해서 그의 명을 따랐다. 즉 코르테스의 명을 따른 셈이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달 계속되었다.
아즈텍 엘리트들은 결국 코르테스와 몬테주마 2세에게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선출한 뒤, 테노치티틀란에서 스페인인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이제 제국의 조직에는 수많은 균열이 생겼다. 코르테스는 그동안 얻은 지식을 이용해 그 균열을 더욱 크게 벌리고, 제국이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는 제국의 많은 피지배 민족들을 설득해, 그의 편에 서서 아즈텍의 엘리트 지배층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피지배 민족들은 심각한 착오를 저질렀다.
반란에 가담한 민족들은 코르테스에게 수십만 명의 현지인 군대를 제공했으며, 그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하고 정복했다. 이 단계에서 점점 더 많은 스페인 군인들과 정착자들이 멕시코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쿠바에서, 나머지는 스페인에서 들어왔다. 현지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이후 생존자들은 아즈텍보다 휠씬 극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인종차별적인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지 10년 후, 피사로는 잉카 제국 연안에 도착했다. 그가 데려간 군대는 코르테스보다 휠씬 더 적어 원정대원의 숫자는 168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사로는 지난 침략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큰 이점을 누렸다. 그에 비해 잉카는 아즈텍의 운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를 모방했다. 그는 스스로 스페인 왕의 평화 사절이라고 선언하고, 잉카의 지배자 아타후알파를 초대했다. 그러고는 외교 접견 자리에서 그를 납치했다. 피사로는 마비된 제국을 현지 동맹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복해나갔다. 만일 잉카 제국의 피지배 민족들이 멕시코 주민들의 운명을 알았더라면, 침략자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협소한 시각의 대가
협소한 시각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른 민족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아시아의 대제국 - 오토만, 사파위, 무굴, 중국 - 은 유럽인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매우 신속하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발견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세상이 여전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아메리카나 대서양, 태평양의 새로운 원양 항로의 지배권을 놓고 유럽인들과 경쟁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랜드나 덴마크 같은 작은 왕국조차 아메리카에 몇몇 탐험 겸 정복 원정대를 보냈지만, 이슬람 세계나 인도나 중국에서 보낸 원정대는 하나도 없었다. 아메리카에 군사원정대를 보내려 했던 최초의 비유럽 국가는 일본이었다. 1942년 6월 일본 원정대는 알래스카 해안에 있는 작은 섬인 키스카와 아투를 정복하여, 미국 군인 열 명과 개 한 마리를 포획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본토로 그 이상 더 들어가진 않았다.
유럽인들은 3백 년 동안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경쟁자가 없는 지배권을 누렸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한 분쟁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었다. 유럽인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와 자원 덕분에 아시아도 침공하고, 그 제국들을 패배 시키고, 자기들끼리 나눠 가질 수 있었다. 터키, 페르시아, 인도, 중국인들이 깨어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비유럽 문화권들이 진정 세계적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유럽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서 알제리 게릴라들은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경제적 우위를 점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알제리인들이 승리한 것은 전 세계 미디어를 동원해 전 지구적인 반식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들은 또한 프랑스 자체 내의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줄 알았다.
작은 북베트남이 미국이란 거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이와 유사한 전략을 기반으로 한 덕분이었다. 만일 국지적 전투가 전 지구적 대의명분의 대상이 된다면 초강대국이라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 게릴라군은 보여주었다. 만일 몬테주마 2세가 스페인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스페인의 라이벌인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혹은 오토만 제국에게 지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희귀 거미와 잊힌 문자
근대 과학과 근대 제국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뭔가 중요한 것이, 자신들이 탐사해서 정복 하면 좋을 것 같은 무언가가 지평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들썩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과학과 제국의 연계는 훨씬 더 깊은 수준까지 나아갔다. 제국 건설자들의 동기뿐 아니라 관행도 과학자들의 그것과 얽혀 있었던 것이다.
근대 유럽인에게 제국 건설은 과학적 프로젝트였고, 과학이란 분과를 건설하는 것은 제국의 프로젝트였다. 무슬림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 이들은 인도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고고학자, 문화를 연구할 인류학자, 땅을 연구할 지리학자, 동물상을 연구할 동물학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면서 이 모두를 데리고 왔다.
1802년 4월 10일 인도 대측량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60년간 지속되었다. 영국은 인도 전체의 지도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국경선을 표시하고 거리를 측정했으며 심지어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봉우리들의 정확한 높이를 최초로 측량하기까지 했다. 영국은 인도 각지의 군사적 자원을 탐사하고 금광의 위치를 조사 했지만, 그뿐 아니라 희귀 인도 거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화려한 나비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사멸한 고대 인도 언어들의 기원을 추적하고, 잊힌 유적지를 발굴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모헨조다로는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 번성했다가 기원전 1900년경 파괴되었다. 영국 이전에 인도를 지배했던 어떤 왕조도 그 유적지에 관심을 가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 고고학 조사단은 1922년에 주의를 기울였다. 영국 조사단은 그곳을 발굴해, 최초의 위대한 인도 문명을 발견했다. 인도인 누구도 모르고 있던 문명을 말이다.
설형문자와 헨리 롤린슨
영국의 과학적 호기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례는 설형쐐기 문자로 된 문서의 해독이다. 그 문자는 3천 년 가깝게 중동 전역에서 사용되던 주요 문자였지만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은 기원후 첫 천 년 초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설형문자가 유럽인의 관심을 끈 것은 1618년이었다. 페르시아 주재 스페인 대사가 고대 페르세폴리스의 유적지로 관광을 갔다가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았는데, 아무도 그 내용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1830년대에, ‘헨리 롤린슨’이라는 영국인 장교는 그곳의 샤(국왕)가 군대를 유럽식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돕는 임무를 띠고 페르시아로 파견되었다. 롤린슨은 여가 시간에 페르시아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어느 날 현지 안내인이 그를 자그레스 산맥의 절벽으로 이끌어서 거대한 베히스툰(이란 서부의 마을) 비문을 보여주었다.
높이 15미터, 폭 24미터에 이르는 비문은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 왕의 지시에 따라 절벽 수직면 높은 곳에 새겨진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의 세 언어를 설형문자로 써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읽을 수는 없었다.
롤린슨은 만일 자신이 이 글을 해독할 수 있다면 당시 중동 전역에서 발견되던 수많은 명문과 문서를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되면 잊힌 고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열리는 것이었다. 이들 문자를 해독하는 첫 단계는 유럽으로 가져갈 수 있는 정확한 사본을 만드는 것이었다. 롤린슨은 이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이상한 문자를 복사하기 위해 가파른 벼랑을 오른 것이었다.
그는 현지인을 여럿 고용해 자신을 돕게 했는데, 그중 한 쿠르드족 소년은 절벽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냈다. 이 프로젝트는 1847년 완료되었고, 완벽하고 정확한 사본이 유럽으로 보내졌다. 그는 이런저런 방법을 차례대로 써보다가 결국에는 비문의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롤린슨이 잘 알던 근대 페르시아어와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을 이해하자, 그는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부분을 판독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장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고대의 생생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수메르 시장의 부산함, 아시리아 왕들의 포고문, 바빌로니아 관료들의 논쟁... 롤린슨 같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고대 중동 제국들의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와 윌리엄 존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제국주의 학자는 윌리엄 존스였다. 그는 1783년 9월 벵골 최고법원의 판사로 봉직하기 위해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는 부임 6개월 만에 '아시아 협회Asiatic Society'를 세웠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인도의 문화, 역사, 사회를 연구하는 단체였다.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산스크리트어The Sanskrit Language>를 출간했다. 이것은 비교언어학의 출범을 알리는 기념비적 서적이었다.
여러 저서에서 존스는 고대 인도어로서 힌두교 의례에 쓰이는 신성한 언어가 된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그뿐 아니라 이들 언어가 고트어, 켈트어, 고대 페르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도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존스는 이 모든 언어는 기원이 같았을 것이며 지금은 잊힌 고대의 한 조상 언어로부터 발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인도유럽어족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제국들은 언어학자들을 열성적으로 지원했다.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피지배자들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윌리엄 존스나 헨리 롤린슨 같은 사람들의 업적 덕분에 유럽 정복자들은 자신의 제국을 매우 잘 알았다. 그 이전의 어느 정복자보다도, 심지어 원주민들보다도 훨씬 더 깊이.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우스울 정도로 적은 숫자였던 영국인이 수억 명의 인도인을 2세 기에 걸쳐 지배, 억압, 착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정당성
이런 실질적 이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과학이 제국에게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유럽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게 되었다. 제국에서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덕분에, 제국에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이란 이미지가 붙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지리학, 고고학, 식물학과 같은 과학의 역사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라도 유럽 제국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제국에 의해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하고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의료와 교육을 제공하고, 철로와 운하를 건설하며, 정의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제국이 거대한 착 취 사업이 아니라 비유럽 인종을 위해 시행된 이타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이를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런 신화가 거짓임은 종종 폭로되었다. 1764년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뱅골 지방을 정복했다. 새 지배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부유해지는 데만 쏠려 있었다. 이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경제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벵골 대기근을 낳았다. 기근은 1769년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파국적인 수준에 도달해 17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재앙으로 벵골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인종우월주의
제국주의자들은 과학을 좀 더 사악한 목적에도 사용했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언어학자들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 윌리엄 존스가 모든 인도-유럽어는 고대의 단일 언어의 후예라고 주장한 이래, 학자들은 그 언어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3천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침공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리아(Arya)’라고 불렸다는 데 주목했다.
그다음 영국, 프랑스, 독일의 학자들은 근면한 아리아인들에 대한 언어학적 이론을 다윈의 자연선택이론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아리아인이 단순한 언어 집단이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인종)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더구나 그저 그런 인종이 아니라 지배인종,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밝은 색이며, 눈이 파랑고, 근면하며, 지극히 이성적이고, 온 세상에 문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북방의 안개 속에서 출현한 인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아리아인들은 현지 원주민과 결혼을 해서 순수성을 잃고 쇠퇴한 반면 유럽에선 아리아인이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했다.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이들이 지배에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종주의 이론은 여러 세대 동안 명성과 존경을 얻었고 서구의 세계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러다 20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이 무너지듯 과학자와 정치인 모두에게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주의적 논쟁
그러나 서구가 우월하다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형태로 변했을 뿐이다. 인종주의가 이제는 '문화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보다는 문화 간의 역사적 차이라는 측면에서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건 그들이 타고난 속성이야"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건 그들의 문화 탓이야"라고 말한다.
무슬림의 유럽 이민에 반대하는 유럽 우파 정당은 인종차별적 용어를 피하는 대신 유럽 서구 문화의 특징은 민주적 가치, 관용, 양성 평등인 데 반해 중동에서 발전한 이슬람 문화는 계급제 정치와 광기와 여성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두 문화는 매우 다르고, 많은 무슬림 이민자들은 서구적 가치를 따르기를 원치 않으므로 그들이 내분을 조장하고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부식시키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입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이런 기여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정보와 보호를 제공하고, 온갖 종류의 이상하고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지구 구석구석에 과학적 사고방식을 퍼뜨림으로써 보답했다. 제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근대 과학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