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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3)

제3부 인류의 통합

by Andy강성
제3부 인류의 통합


여기서는 농업 혁명 이후 급격하게 규모가 커진 인간사회가 어떻게 ‘화폐(돈)’, ‘제국’, ‘종교’를 통해 인류를 통합하려고 하였으며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역사의 화살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으며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듦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는데,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이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불변의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거나 스스로의 내부적 역동성으로 인해 변이를 겪기도 한다. 또한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니며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이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예컨대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기독교와 기사도를 둘 다 믿었다. 아침에는 교회에 가서 성직자가 성인들의 삶에 대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가장 좋은 비단 옷으로 갈아입고 영주의 성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해서 “너의 명예를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 수치는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 너의 적이 네 앞에서 도망치고 그들의 아름다운 딸들이 네 발아래에서 떨고 있는 것보다 인생에서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선언한다.


모순은 결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귀족, 성직자, 평민이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문화는 변화했다. 십자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사들은 자신의 군사적 역량과 종교적 헌신을 단칼에 보여줄 수 있었다. 똑같은 모순이 성당기사단과 간호기사단을 낳았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기사도의 이상 을 더욱더 단단하게 결합시키려 한 조직들이었다.


또 다른 예는 현대의 정치질서다.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니고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으로서 이것을 '인지 부조화'라고 부른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 핵심자산이며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찰위성


인간의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변화는 완전히 무작위적일까, 아니면 뭔가 전체적인 패턴이 있을까? 다시 말해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을까? 대답은 '있다'이다. 수천수만 년에 걸쳐, 작고 단순한 문화들이 점차 봉쳐서 더 크고 복 잡한 문명으로 변했다. 그래서 세계의 메가 문화의 개수는 점점 적어지는 동시에 각각은 점점 더 크고 복잡해졌다.


반면 미시 수준에서 보면,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메가 문화를 이루는 문화집단들이 있듯이, 조각조각 분열되는 메가 문화도 존재하게 마련이다. 몽골 제국은 한껏 팽창해서 아시아의 광활한 지역과 유럽의 일부분까지 지배했지만 결국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 기독교는 한꺼번에 수억 명씩 개종시켰지만 결국 수없이 많은 분파로 갈라졌다. 라틴 어는 서부 및 중부 유럽에 퍼져 나간 뒤 지역별 방언으로 쪼개져, 각각이 결국 각국의 언어가 되었다.


하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불굴의 기세로 진행되는 데 반해 분열은 일시적인 반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방향을 인식하는 일은 ‘시점의 문제’다. 우주에 떠 있는 정찰위성의 시점을, 즉 수백 년이 아니라 수천 년이라는 단위를 스캔하는 시점을 취하는 게 낫다. 이 시각에서 보면 역사가 통일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기독교의 분화와 몽골 제국의 붕괴는 역사라는 고속도로의 과속방지턱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전 10000 년경 우리 행성에 인간 세상의 숫자는 수천 개였다. 기원전 2000년이 되자 숫자는 수백 개, 많아야 2천~ 3천 개 정도로 줄었다. 기원후 1450년이 되자 그 숫자는 더 극적으로 줄었다. 유럽인의 세계 탐사 직전 90퍼센트에 가까운 인류는 아프로아시아 세상이라는 단 하나의 큰 세상에 살았다.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상당 부분 포함)의 대부분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인류는 동일한 지정학 체계(행성 전체가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가들로 나뉘어 있다), 동일한 경제 체제(자본주의 시장의 힘은 지구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미친다), 동일한 법 체계(인권과 국제법은 세계 모든 곳에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효력이 있다), 동일한 과학 체계(원자 구조나 결핵 치료법에 대해 완전히 동일한 견해를 보인다)를 공유하고 있다. 전 지구 문화가 균일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모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여전히 '고유' 문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만, 만일 그 '고유성'이란 것이 독자적으로 발달한 무엇,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의 지역전통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 문화가 하나도 없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모든 문화는 홍수처럼 범람한 지구적 영향들에 의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지구적 비전


이러한 지구적 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제국들이 커지고 무역이 활발해진 지난 몇 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그래서 멕시코의 고추가 인도 음식에 들어가고 스페인의 소가 아르헨티나에서 풀을 뜯게 되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 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을 우리와 그들로 나눠서 생각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란 누구든 내 바로 주위에 있는 집단을 말했다. '그들'이란 그 외의 모든 사람이었다. 사실 어떤 사회적 동물도 자신이 속한 종 전체의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지는 않는다. 침팬지 종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침팬지는 한 마리도 없고, 벌집 입구에 "만국의 일벌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인지혁명을 시발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점에서 점점 더 예외가 되어갔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형제'나 '친구'라고 상상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형제애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건너편 골짜기 어딘가, 혹은 저 산 너머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창조한 모든 상상의 질서는 인류의 상당한 부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는데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의 질서였으며,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처음으로 초월하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시장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고객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누구에 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다. 정복자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 제국이었고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민이었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세계에 진리는 하나뿐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자였다. 지난 3천 년간 사람들은 이런 지구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점점 더 야심찬 시도를 했다.


돈의 향기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일당은 당시까지 인간 세상에서 격리되어 있던 멕시코의 아즈텍인들을 침략했다. 그곳에 살던 아즈텍인들은 후세에 알려진 대로 이방인들이 어떤 노란 금속에 극도의 관심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게까지 금에 열광하는 이유를 아즈텍인들이 묻자 코르테스가 "나와 내 동료들은 금으로만 나을 수 있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테노치티틀란의 함락,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무슬림 왕국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기독교들이 정복 후 찍어낸 사각형 주화('밀라레스(Millares)')에는 유려한 아라비아 문자로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라는 선언이 새겨져 있었지만, 가톨릭의 멜구에일 주교와 아그데 주교조차도 인기 있는 이 무슬림 주화를 충실히 복제해 발행했고, 신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쁘게 사용했다. 이렇게 인간은 화폐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용을 보였다.

[밀라레스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가격이 얼마인가요?


수렵채집인들과 농업혁명 단계까지는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가능했지만, 도시와 왕국이 등장하고 수송 하부구조가 개선되자 전문화라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고, 물물교환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대부분의 사회는 많은 수의 전문가를 연결시키는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냈는데, 바로 돈(화폐)을 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화폐는 순수한 정신적 혁명의 산물이고, 여기에 얽혀 있는 것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상호 주관적 실체다.


화폐는 단순한 주화나 지폐가 아니라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사람들이 기꺼이 사용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하며, 그 목적은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데 있다. 또한 돈은 부의 전환과 저장, 이동을 쉽고 값싸게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복잡한 상거래망과 역동적 시장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화폐가 발달하는 데는 기술적인 돌파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순수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화폐의 유형은 매우 다양했다. 가장 친숙한 것이 주화, 즉 무언가가 새겨진 표준화된 금속 조각이다. 하지만 그 휠씬 전부터 화폐는 사용되었다. 조가비, 가축, 가죽, 소금, 곡식, 구슬, 천, 약속어음.... 별 보배고둥 껍데기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약 4천 년간 화폐로 쓰였다. 20세기 초 영국령 우간다에서는 별보배고둥 껍데기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도 가능했다

복잡한 상업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모종의 화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화폐 경제 하의 제화공은 다양한 종류의 구두에 매겨지는 가격만 알면 족하지, 신발과 사과, 신발과 염소의 교환율을 암기할 필요가 없다. 사과 재배 전문가도 돈만 있으면 사과를 좋아하는 제화공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 돈은 모든 사람이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돈을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상적인 형태의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해줄 뿐 아니라 부를 축적할 수 있게도 해준다. 부를 이용하려면 단순히 저장해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화폐가 없는 세상의 부유한 농부가 먼 지방으로 이주한다고 상상해보자. 그의 부는 집과 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부는 이중 어 느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돈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돈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별보배고둥 껍데기와 달러화의 가치는 우리의 공통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돈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심리적 구조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성공했을까? 사람들이 기꺼이 그런 일을 하려 드는 것은 자신들의 집단적 상상의 산물을 믿기 때문이다. 신뢰는 온갖 유형의 돈을 주조하는 데 쓰이는 원자재이며, 이런 신뢰를 창조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관계의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인 네트워크다.


맨 처음에 화폐의 최초 버전이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이런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화폐'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화폐로 알려진 수메르인의 ‘보리 화폐’가 좋은 사례이다. 이 화폐는 기원 전 3000년경 수메르에서 글쓰기가 등장한 것과 똑같은 시기와 장소에, 또한 똑같은 상황에서 출현했는데, 보리를 생필품이 아니라 돈으로 사용하도록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화폐의 역사에서 진정한 돌파구가 생긴 것은 그 자체로는 내재적 가치가 없는 돈, 그렇지만 저장과 운반이 쉬운 돈을 사람들이 신뢰하게 되었을 때이고, 그런 화폐는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의 중간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했는데, 은으로 된 ‘세겔’(은화 자체가 아니라 은 8.33그램)이었다. 이러한 정해진 무게의 귀금속은 결국 동전, 즉 주화를 탄생시켰다.


역사상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640년경 아나톨리아 서부에 있던 리디아의 왕 알뤼아테스가 만들었으며, 이 주화는 표준화된 무게의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고, 식별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 표식은 해당 주화에 귀금속의 양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려주고, 주화를 발행하고 그 내용물을 보증한 당국이 누군지를 확인해 주었는데, 오늘날 사용되는 거의 모든 주화는 ‘리디아 주화’의 후손들이다.

[세겔과 리디아의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와 본문]

금이라는 복음


중국은 이와 조금 다른 화폐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청동 동전과 표식이 없는 은괴와 금괴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었다. 그렇지만 두 시스템은 공통점이 아주 많아서(특히 금과 은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리디아 사이에는 금전적, 상업적 관계가 밀접하게 구축되었으며, 무슬림 상인과 유럽 상인 그리고 정복자들은 리디아 시스템과 금이라는 복음을 지구의 매우 구석진 곳에까지 퍼뜨렸다.


근대 말에 이르자 전 세계가 단일 화폐권역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금과 은을 기반으로, 나중에는 영국 파운드나 미국 달러처럼 신뢰받는 소수의 통화를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는 단일 화폐권역의 등장은 아프로아시아의 통일을 위한 기초, 결국에는 지구 전체를 단일 경제정치권역으로 통합하는 기초를 놓았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고, 각기 다른 신을 숭배했지만, 모두 금과 은, 금화와 은화를 신뢰했다. 이렇게 다들 금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유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두 지역이 일단 무역으로 연결되면 운송가능한 물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해 평준화되는데, 어느 한쪽이 금을 신봉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쪽 사람들도 결국 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어 그 가격은 고정화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도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지만,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장점이다.


돈의 대가


돈은 두 가지 보편적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 보편적 전환성 : 돈이 있으면 당신은 마치 연금술사처럼 땅을 충성심으로, 사법을 건강으로, 폭력을 지식으로 변환할 수 있다.
2. 보편적 신뢰 : 돈을 매개로 삼으면 임의의 두 사람은 어떤 프로젝트에도 협력할 수 있다.


이런 원리 덕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역과 산업에서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원리에도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변환 가능할 때 돈은 지역 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인간 공동체와 가족들은 늘 명예, 충성심, 도덕, 사랑처럼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삼았다.


돈은 언제나 이런 장벽을 돌파하려고 댐의 틈새에 스며드는 물처럼 기를 써왔다. 부모는 자식 몇 명을 노예로 팔아 나머지 자식들에게 먹일 식량을 사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살인과 도둑질과 사기를 저질렀으며 그렇게 얻은 돈으로 교회에서 면죄부를 샀다. 야망에 찬 기사들은 자신의 충성심을 경매에 붙여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팔았으며 자신을 따르는 시종들의 충성심도 현금 지불로써 확보했다.


더욱 어두운 면은, 돈이 만든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편적인 신뢰를 쌓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신뢰는 인간이나 공동체, 혹은 신성한 가치가 아니라 돈 그 자체 그리고 돈을 뒷받침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투자하게 되고, 돈이 공동체, 신앙, 국가라는 댐을 무너뜨리면, 세상은 하나의 크고 비정한 시장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제국의 비전


하라리는 기원전 134년경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로마인의 켈트족 ‘누만시아인’ 정복 사건(로마의 1년간의 포위 작전으로 누만시아인이 스스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 대부분은 로마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살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꺼낸다.


후일 많은 스페인 예술가들이 이를 칭송하고 누만시아는 나중에 스페인의 독립과 용기의 상징이 되었지만, 결국 이러한 스페인 애국자들 역시 대체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현대 스페인의 법은 로마법에서 유래했으며, 스페인 정치는 로마인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졌듯,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 대부분은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었다.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어디가 되었든 제국의 후예다.

[좌: 누만시아 위치, 우: 누만시아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Numancia’ Alejo Vera작, 출처 구글 이미지]

제국이란 무엇인가?


제국이란 정치질서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는데, 첫째, 그런 명칭으로 불리려면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서로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한 많은 숫자의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민을 지배해야 하고, 둘째, 탄력적인 국경과 잠재적으로 무한한 식욕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 덕분에 제국은 다양한 소수민족과 생태적 지역들을 하나의 정치 체제하에 묶어 낼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인류와 지구에서 점점 더 큰 부분을 하나로 융합했다.


제국은 수많은 작은 문화를 융합해 몇 개의 큰 문화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제국 내에서는 아이디어와 사람, 재화와 기술이 정치적으로 분열된 지역에서보다 더욱 쉽게 퍼져 나갔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그 가운데 제국 자체가 의도적으로 아이디어와 제도, 관습과 규범을 퍼뜨린 일도 빈번했는데, 하나의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편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즉 제국은 스스로의 행동이-도로 건설이 되었든 유혈사태가 되었든-우월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정당화했고, 자기네 문화는 정복자보다 피정복자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런 문화의 용광로가 패자의 문화적 동화 과정을 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문명이 다양한 피정복민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것을 흡수할지언정, 그런 혼성의 결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고, 동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큰 정신적 충격을 동반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이 ‘우리’가 될 때


하지만 몇몇 경우에는 문화적 동화와 동질화 과정에서 신참과 옛 엘리트 사이의 벽이 마침내 무너지기도 했는데, 그 예로 로마의 ‘5현제 치세’(기원후 2세기 로마는 이베리아 출신의 황제들이 연이어 통치했는데, 이 중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5현제의 치세는 제국의 황금시대로 꼽힌다) 이후 로마에서 인종적 댐이 모두 무너진 역사를 들고 있다.

[로마의 5현제 출처 구글 이미지]

이와 유사한 과정이 아랍 제국에서도 일어났고, 중국에서 제국 프로젝트는 더욱 철저히 성공했는데, 처음에는 야만인이라고 불렸던 엄청나게 많은 민족 및 문화 집단이 2천 년에 걸쳐 중국의 제국 문화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어 한족(기원전 206~기원후 220년에 중국을 통치한 한 나라의 이름을 땄다)이 되었다.

역사상의 선인과 악당


역사를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없고,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 없다. 그 예로 독립한 인도 공화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의 애증관계와 인도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긴 타지마할을 들 수 있다.

[영국인이 지은 인도 뭄바이의 차트라파티 쉬바지 기차역, 출처 구글 이미지]
[타지마할 궁전,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00년경 이래로 인간은 대부분 제국에 속해 살았고, 미래에도 대부분 하나의 제국 안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큰데, 이번 제국은 진정으로 세계적일 것이다. 즉,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조각나 있지만, 국가들은 빠른 속도로 독립성을 잃고 있다.


글로벌 마켓의 책략에, 글로벌 회사와 글로벌 NGO의 간섭에, 글로벌 여론의 감독에, 국제 사법제도에 점점 더 문호를 열고 있고, 재정적 행태, 환경 정책, 사법제도에서 글로벌 기준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으며, 매우 강력한 자본, 노동, 정보의 흐름이 세계를 바꾸고 그 모습을 새로이 형성하면서 국가 간의 경계나 국가의 의견은 점점 더 무시되고 있다.


종교의 법칙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지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였으며,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인데,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1. 종교는 인간의 변덕이나 계약의 산물이 아닌 초인적 질서가 있다고 여긴다. 축구와 비교해보면, 수많은 규칙과 의식과 이따금 기묘한 의례가 있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축구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언제라도 골문의 크기를 늘리거나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기할 수 있다.

2. 이런 초인적 질서를 기반으로, 종교는 스스로 구속력이 있다고 여기는 규범과 가치를 설정한다. 오늘날 많은 서구인이 유령이나 요정, 환생을 믿지만, 이런 믿음이 도덕과 행동의 기준의 원천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종교가 아니다.


한편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고,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했는데,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하고,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이는데,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린 것이고, 신의 기원에 대한 지배적 이론은 농부들이 자신의 양 떼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었겠지만 스스로의 통제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이 이 문제에 해답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해졌다.


서구인들은 2천 년 동안 일신교의 세뇌를 받은 탓에 다신교를 무지하고 유치한 우상숭배로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당한 고정관념이고, 다신교의 내부 논리를 이해하려면,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탱하는 중심 사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고, 이 권력에게 전쟁의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보면, 특정 왕국의 승리나 패배, 특정 도시의 번영이나 쇠퇴, 특정인의 회복이나 사망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힌두교도들도 아트만을 위한 사원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우주 최고 권력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이유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다 끌어안고 패배나 가난, 질병, 죽음까지도 끌어안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에서 성자나 고행자로 알려진 일부 신자는 자신의 삶을 아트만과의 합일을 위해 바치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이들은 근본원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고 애쓰며,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평범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은 무의미하며 덧없는 현상임을 인식하려 애쓴다.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쉬운데, 다신교는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며, 다신교도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고,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과 의례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제국의 수호신과 황제의 신성에 경의를 표할 것을 기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면서, 16~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은 특히 악명 높다. 신교도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워낙 크기에 성육신 하여 세상에 화신해 기꺼이 고문과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그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구원하고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믿었다.


이런 신학논쟁은 16~17세기에 매우 격렬해져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수십만 명이나 서로 살해했는데, 그 예로 1572년 8월 24일,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하느님의 인간 사랑을 강조하는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를 공격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이 공격에서 5천~1만 명의 개신교도가 살해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이 소식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기도회를 조직하고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해 바티칸의 방 하나를 대학살에 대한 프레스코로 장식하게 했는데(이 방은 현재 방문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이 하루 동안 살해된 기독교인은 로마 제국의 존속 기간을 통틀어 살해된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많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François Dubois 作) 출처 구글 이미지]

원래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일신교가 기원전 1350년경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파라오 ‘아케나텐’(주: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파라오이며 ‘아멘호텝 4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왕비는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고 하는 ‘네페르티티’였다)은 이전까지 이집트 만신전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하던 아텐신이 사실은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케나텐은 아텐 숭배를 국교로 삼았고 다른 모든 신에 대한 숭배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의 종교혁명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의 사후 아텐 숭배는 사라지고 옛 만신전이 돌아왔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출처 구글 이미지]
[아텐신의 축복을 받는 아케나텐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비약적 돌파구는 기독교와 함께 왔다. 기독교 신앙은 나자렛 예수가 그들이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 했던 비전의 유대교 분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분파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 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바울의 주장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렸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겨냥해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비의적 유대교 분파가 강력한 로마 제국을 접수한 것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사태 전개로 꼽힌다.


이러한 기독교의 성공은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또 다른 일신교의 모델이 되었고, 이슬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구석진 곳의 작은 분파로 시작했지만, 기독교보다 더 이상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는데, 아라비아 사막을 벗어나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제국을 정복하기에 이른 것이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신교 사상은 세계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신론자들은 다신론자들에 비해 훨씬 더 광신적이었고, 전도에 헌신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종교가 다른 신앙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 신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 아니든지, 그들이 신으로부터 우주의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전수받았든지 둘 중 하나였는데, 일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단 한 분밖에 없는 신의 모든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 2천 년간 일신론자들은 모든 경쟁상대를 폭력으로 말살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했으며, 그것은 효과가 있어 기원후 1세기 초반, 세상에는 일신론자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한편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는데,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으며,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고,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며,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신교는 1천 년 이상 번성했는데,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란 이름의 예언자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그의 교리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마침내 가장 중요한 이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되었고, 그 신봉자들은 세상을 선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인 '앙그라 마이뉴' 사이의 우주적 싸움터로 보았다.

[좌: 조로아스터교의 두 신, 우: 이란- 다후테 소레이만 유적인 조로아스터교 성지의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또 하나의 이신교인 마니교는 기원후 3~4세기 동안 중국에서 북아프리카로 퍼졌으며, 잠시나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누르고 지배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었지만 마니교도들은 로마의 영혼을 기독교도들에게 빼앗겼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사산 제국은 일신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무너졌다.

[좌: 중국 남부에서 발견된 14세기 마니교 그림. 창시자 마니가 붓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우: 마니교의 사제들]

이런 모든 종교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모두가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기원전 1000년부터 완전히 새로운 종교가 아프로아시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신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는 신의 의지와 변덕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소산이다.


인도의 자이나교와 불교, 중국의 도교와 유교, 지중해 분지의 스토아철학, 견유철학, 에피쿠로스주의와 같은 신생 종교들의 특징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이고, 대표적 사례가 고대 자연법칙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이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일 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인 반면 불교의 제일 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일신교적 종교와 아주 비슷하게, 불교 같은 근대 이전의 자연법칙 종교 역시 신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풍요나 정치권력 따위가 아니라 번뇌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불교도의 99퍼센트는 열반에 도달하지 못했고, 설령 언젠가 내세에서 열반을 이루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현세의 삶 대부분은 세속적 성취를 추구하는 데 바쳤다.

그래서 이들은 인도의 힌두신, 티베트의 본교의 신, 일본의 신도의 신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을 계속 섬겼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불교 분파들이 부처들과 보살들로 구성된 만신전을 발전시켰다.


지난 3백 년은 흔히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며 세속화가 진행된 시기로 묘사되지만, 사실 근대는 강력한 종교적 열정의 시대, 전대미문의 포교 노력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였으며,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런 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하지만 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유신론적 종교는 신에 대한 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인본주의적 종교는 인간, 좀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를 숭배한다. 인본주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특유의 신성한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다른 모든 동물이나 다른 모든 현상의 성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인본주의자는 그 성질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결정하고, 최고의 선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이고 나머지 모든 존재는 오로지 이 종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이러한 인본주의에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인간성'이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으며,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라고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라고 한다) 등이 있다.

나치와 관련하여 저자는 1942년 독일 생물학 교과서의 '자연과 인간의 법칙' 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든 존재는 무자비한 생존 투쟁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이것이 자연의 최고 법칙이라고 설명하면서, 식물이 어떻게 땅을 두고 싸우고 딱정벌레가 짝을 찾기 위해 어떤 투쟁을 하는지 설명한 다음 이런 결론을 내린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힘들고 가차 없지만,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투쟁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모두 제거하고 생존능력이 있는 것을 선택한다. [...]이 자연법칙은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살아 있는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통해 이 법칙을 보여준다. 이 법칙은 용서가 없다. 여기 대항하는 자들은 싹쓸이를 당할 것이다.

생물학은 우리에게 동식물에 대해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따라야 할 법칙도 보여준다. 이 법칙에 따라 살고 투쟁해야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 준다. 삶의 의미는 투쟁이다. 이 법칙을 어기는 죄를 짓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진저!"

그다음에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인용된 문구가 나온다.
"자연의 강철 논리와 싸우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생명을 부여한 바로 그 원리와 싸우는 것이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다."
[‘나의 투쟁’ 1926-1928년 판본의 겉표지]

세 번째 밀레니엄의 여명기인 지금, 히틀러와의 전쟁이 끝난 후 60년간, 인본주의를 진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금기였고, 생물학적 방법에 의한 호모 사피엔스의 '업그레이드'를 옹호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요즘은 이런 프로젝트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하급 인종이나 열등한 집단을 멸절시키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 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초인간을 만드는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성공의 비결


상업, 제국 그리고 보편 종교는 모든 대륙의 사실상 모든 사피엔스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상으로 끌어들였고, 이런 팽창과 통일 과정이 단선적이었다거나 중단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큰 그림을 보면 다수의 작은 문화에서 몇 개의 큰 문화로, 마지막에는 하나의 전 지구적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사 역학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촌 사회가 필연적이었다고 해서 최종 결과가 지금 우리가 사는 특정한 종류의 지구촌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고, 우리는 분명 다른 결과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진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역사의 핵심적 특징 두 가지를 연구함으로써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사후 깨달음의 오류


역사상 모든 점은 교차로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하나의 갈래였지만, 여기에서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으며, 이 중 일부는 더 넓고 평탄하며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될 가능성도 더 크지만, 때때로 역사는 - 또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 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인다.


4세기가 시작할 무렵 로마 제국 앞에는 다양한 종교적 선택의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내란으로 갈기갈기 찢겼던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서 분명한 교리를 지닌 단일 종교를 믿으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제국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당대에 있었던 수많은 종교 종 하나를 국교로 삼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출처 구글 이미지]

마니교, 미트라교, 이시스교나 키벨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심지어 불교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예수를 선택했을까? 그가 어떤 종교적 경험을 했던 걸까, 아니면 기독교가 빠르게 신도를 늘리고 있으니 거기 편승하는 게 최선이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일까? 역사학자들은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 제국을 접수했는지 서술할 수 있지만, 어째서 이 특정한 가능성이 현실화한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 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 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박해 보였던 가능성이 종종 실현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독교는 비밀스러운 동방의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종교가 곧 로마의 국교가 될 참이라고 누가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다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1913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작은 급진주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벌이 불과 4년 내에 이 나라를 접수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 았을 것이다. 기원후 600년에는 사막에 살던 한 무리의 아랍인이 머지않아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과 트로츠키 출처 구글 이미지]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level two)' 카오스계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나 정치가 그런 예다.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성공의 비결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 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역사의 여신은 장님


우리는 역사가 하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지만, 중요한 점은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펼쳐짐에 따라 인류의 복지가 필연적으로 개선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류에게 이로운 문화가 반드시 성공하고 퍼진다든가 덜 이로운 문화는 사라진다든가 하는 증거도 없다. 기독교가 마니교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든가 아랍 제국이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도 마찬가지로 없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속에 살며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라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유 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담론(discourse)'를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 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사회과학에서도 게임이론의 비호 아래 비슷한 주장이 흔히 이야기된다. 게임이론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어떻게 모두에게 해가 되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뿌리를 내리고 퍼져나가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예가 군비 경쟁이다. 군비 경쟁은 참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수 있었을 수십억 달러가 무기의 구입과 개발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 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연구 - 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역사는 교차로에서 교차로로, 뭔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처음에는 이 경로를 택했다가 다음에는 저 경로로 진입했다가 하면서 나아간다. 1500년경 역사는 가장 중대한 선택을 했다. 인류의 운명뿐 아니라 아마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의 운명까지도 바꿀 선택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혁명은 그때까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던 서유럽에서, 아프로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커다란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역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는 드넓은 지평을 갖고 있으며, 그중 많은 가능성들은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듭하면서 역사가 진행되지만 과학혁명을 비켜가는 흐름도 얼마든지 상상 가능하다. 기독교나 로마 제국, 금화가 없는 역사를 상상하는 게 이상할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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