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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2)

제2부 농업혁명

by Andy강성
제2부 농업혁명


여기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농업혁명으로 인해 과연 수렵채집 시기보다 기대했던 풍요로운 보상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그 이후 어떻게 숫자와 문자 체계 및 상상의 질서를 만들고 이를 고도화해 갔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역사상 최대의 사기


인간이 250만 년간 먹고살기 위해 사냥했던 동물과 채집했던 식물은 스스로 자라고 번식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개입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대략 1만 년 전 달라졌다. 이때부터 사피엔스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인간이 생활하는 방식의 혁명, 즉 농업혁명이었다.


농업의 시작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 8500년경 터키 남동부, 서부 이란, 에게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 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기원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맛 좋은 송로버섯을 캐거나 털이 부숭부숭한 매머드를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재배하거나 가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섯의 곰팡이는 형체가 너무 불분명했고 야수는 너무 사나웠다.

농업혁명의 결과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이미 채집하는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수렵채집인들은 농부들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도 적었으며, 잉여 식량으로 인해 오히려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을 뿐이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또한 이렇게 만든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밀 vs 호모사피엔스


밀은 1만 년 전에 수많은 잡초 중 하나였고,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던 풀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밀 재배지 출처 구글 이미지]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온종일 잡초를 뽑아야 했으며 해충과 토끼 등을 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밀 밭에 물을 끌어다 대는 등 많은 노동력과 신체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밀은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했을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농부들은 지켜야 할 재산이 더 많아졌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다.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반면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사치라는 덫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사람들은 3~ 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약 1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가고 온난화 시기가 도래했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비가 많이 내렸다. 새로운 기후는 중동의 밀을 비롯한 곡물에 이상적이었고, 이들은 증식하고 퍼져나갔다. 밀 낟알은 작고 숫자가 아주 많기 때문에, 야영지로 오는 동안 일부는 떨어트리고 잃어버리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오솔길과 야영장 주위에 점점 더 많은 밀이 자라게 되었다.


사람들이 숲과 덤불을 불태우는 것은 밀에게 도움이 되었다. 불은 크고 작은 나무들을 제거해서 밀과 여타 풀들이 햇빛과 물, 영양소를 독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차츰 방랑하는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정착했다. 밀이 특히 풍부하고 사냥감과 여타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에 계절별로 혹은 아예 영구히 캠프를 차린 것이다.


영구 정착촌의 등장


그런 정착촌의 증거는 중동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레반트 지역이 대표적인데 기원전 12500 ~ 9500년에 이곳에서 나투프(Natuf) 문화가 번성했다. 나투프인들은 영구 정착촌에 살면서 야생곡물을 집약적으로 채취하고 가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 8500년이 되자 중동에는 ‘여리고’(Jericho) 같은 영구 정착촌이 여럿 나타났다. 이곳의 거주민은 재배용 작물을 경작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나투프 주거지역 상상도와 발굴 작업 출처 구글 이미지]

영구 정착촌에 살면서 식량공급이 증가하자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방랑하는 삶을 포기하자 여성은 매년 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기는 젖을 일찍 뗐다. 죽 같은 이유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밭에는 추가 일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먹을 입이 늘면서 여분의 식량은 재빠르게 고갈되었고, 따라서 경작지를 더욱 늘릴 필요가 있었다.


질병이 들끓는 정착지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모유를 덜 먹고 곡물을 더 많이 먹게 되면서, 아이들이 죽을 더 먹으려 형제자매들과 경쟁하게 되면서, 어린이 사망률은 급격히 치솟았다. 시간이 흐르자 ‘밀 거래’의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아이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어른들은 땀에 젖은 빵을 먹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기 농부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유를 덜 먹이고 죽을 더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영구 정착촌이 전염병의 온상이 되리란 사실이었다. 그들은 또한 단일 식량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가뭄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또한 풍년에 넘쳐나는 창고는 도둑과 적을 유혹할 것이며 이를 방비하려면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서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미 너무 급격하고 빠르게 늘어난 인구로 인해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고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이로 인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결국 점점 더 농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사치품의 함정’, 역사에서 항상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


신성한 개입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편안한 삶을 추구하다 보니 전환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피엔스에게 다른 열망이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삶을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문자 발생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동기가 경제적 필요가 아니라 신앙이었음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드문 경우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는 끌로 반쯤 깎다가 만 무게 50톤의 기둥이 발견되었다. 모두 합쳐서 열 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작은 이삭에 밀이 한 알씩 달린다)은 여기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혁명의 희생자들


인간과 곡물 간의 파우스트적 거래가 우리 종의 유일한 거래가 아니었으며 양, 염소, 돼지, 닭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야생 양을 뒤쫓아 유랑하던 무리는 자신들이 잡아먹는 양 집단의 구성을 점차 변화시켰다. 이 과정은 아마도 선별적 사냥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 큰 양이나 늙고 병든 양만을 사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양 떼가 장기적인 활력을 유지하도록 임신 가능한 암컷과 어린 것들은 잡지 않았다.

[가축화된 양과 염소의 전파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가장 공격적이고 통제가 어려운 양을 제일 먼저 도축함으로써 세대가 지날수록 결국 양들은 가축화되고 순종적인 한 떼의 양이 생겼으며 이런 식으로 동물의 가축화가 널리 퍼졌다. 가축화된 닭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가금류다. 지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대형 포유류를 순서대로 꼽으면 사람이 첫째이고 2, 3, 4위가 가축화된 소, 돼지, 양이다.


불행하게도 진화적 관점은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축이 된 닭이나 소는 아마도 진화적 성공의 사례이겠지만,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인 것도 사실이다. 동물의 가축화는 일련의 야만적 관행을 기반으로 이뤄졌고, 관행은 수백 수천 년이 흐르면서 더욱 잔인해졌다.

낙농산업은 동물을 자기들 뜻대로 휘두르기 위한 수단들을 보유하고 있다. 암소, 염소, 양은 새끼를 낳은 다음, 그리고 새끼가 젖을 빠는 동안만 젖을 생산한다. 그러니 동물 젖을 계속 얻으려면 젖을 빨 새끼가 있어야 하고, 이들 새끼가 젖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출생 직후 새끼를 도살하고 어미의 젖을 가능한 한 오래 짜낸 뒤 다시 임신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수단의 누에르족(수단 남부 나일강변에서 목축을 주로 하는 부족)은 친숙하고 생생한 냄새가 나도록 어미의 소변을 박제 송아지에게 묻히기까지 했다. 이 부족의 또 다른 기법은 송아지의 입가에 가시로 만든 띠를 두르는 것인데, 가시에 찔린 어미는 새끼가 젖을 빠는 것을 막게 된다. 사하라 사막에서 낙타를 키우는 투아레그족은 새끼의 코에 구멍을 내거나 코 일부를 잘라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면 새끼는 코가 아파서 젖을 많이 먹지 못하게 된다.


모든 농경사회가 이처럼 키우는 가축에게 잔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축이 된 일부 동물의 삶은 매우 안락하였다. 털을 얻기 위한 양, 애완용 개와 고양이, 군마, 경주마는 편안한 삶을 누리는 일이 많았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는 총애하던 말 인키타투스에게 집정관직을 내리려고 했다고도 전한다. 역사를 통틀어 양치기와 농부는 자신의 동물에게 애정을 보였으며 매우 잘 돌보았다.


하지만 양치기가 아닌 양 떼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다수의 가축화된 동물에게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처음 '농업 혁명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표현을 접했을 때는 굉장히 신박하게 느껴졌는데 이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라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논리학에 ‘인과 전도의 오류’가 있는데 이는 인과관계를 서로 뒤바꾸어 원인을 결과로 보고, 결과를 원인으로 보는 데서 생기는 오류이다. 즉 “어떤 사람이 미국 주요 도시의 범죄 발생 건수와 경찰관 수를 조사하였는데 두 변수 사이에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찰관 수가 많을수록 범죄 발생 건수가 늘어난다."(당연히 범죄가 많으니까 경찰관이 많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라고 결론을 내리는 오류를 말한다.

또한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가 있는데 이는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이를 너무 단순화시켜 버리는 오류, 예를 들어 “TV에서 한 모델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까 바나나를 즐겨 먹어서 날씬한 몸매가 되었다고 밝혔어. 그러므로 나도 바나나를 많이 먹기만 하면 날씬해질 수 있을 거야”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말한다.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열악해졌기 때문에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이고, 인간이 온갖 고생을 하면서 밀 생산량이 늘었기 때문에 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이다라는 식으로 단정을 내리는 저자의 논리에는, 물론 농업과 가축화로 인한 예기치 못했던 부작용을 강조하려고 한 측면은 이해하지만, 인과관계를 전도하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너무 단순화시켜 잘못된 결론을 내린 오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라미드 건설하기


농경 덕분에 인구가 너무나 급격하고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수렵과 채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농경사회는 하나도 없었다. 농업으로의 이행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10000년경 지구에는 5백만~8백만 명의 방랑하는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후 1세기가 되자 수렵채집인은 1백만~2백만 명밖에 남지 않았으나(주로 호주, 미 대륙, 아프리카에 있었다), 같은 시기 농부들의 숫자는 2억 5천만 명으로 수렵채집인을 압도했다.


농부 대다수는 영구 정착지에 살고 있었고, 방랑하는 양치기 부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곳에 정착을 하면서 사람들의 세력권은 대부분 극적으로 좁아졌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수십, 수백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영토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에게 ‘본거지’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하는 땅 전체를 말했다.


하지만 농부는 농경을 위해 작은 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하고 가정생활은 ‘집’에서 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농부는 이 구조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꼈는데, 이 집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다. 경작에 적합한 지표면의 2퍼센트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몰려 살면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축적되어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집과 목초지와 곡창지대를 포기하지 못하고 한 장소에 매이게 되었다.


미래의 도래


그 반면에 농경시대에 시간은 확장되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데다 먹을거리나 소유물을 저장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수렵채집인들은 그 덕분에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자기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을 걱정해봐야 무의미했다.


농업혁명 덕에 미래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농부들은 언제나 미래를 의식하고 그에 맞춰서 일해야 했다. 농업경제의 생산 사이클은 계절을 기반으로 했다. 몇 개월에 걸쳐 경작을 하고 나면 짧고 뚜렷한 수확기가 뒤따랐다. 풍성한 수확을 모두 끝마친 날 밤 농부들은 마음껏 축하를 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한두 주일 이내에 다시 새벽에 일어나 들판에서 온종일 일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또한 농업 자체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해 항상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부들은 힘들여 일할 수밖에 없었지만,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연하면서 잉여식량은 그들이 가져가고 농부들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만 남겨줌으로써 결국 농부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왕궁과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등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상상 속의 질서


한편 농부들이 생산한 잉여식량이 새로운 수송 기술과 합쳐지면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큰 마을, 도시를 이룰 수 있게 되면서 결국 새로운 왕국과 상업망이 이 모두를 하나로 묶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결속을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거대한 협력의 네트워크인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나갔다.


기원전 8500년경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정착지는 여리고 같은 마을로, 주민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기원전 7000년 소아시아의 읍邑인 차탈휘유크의 주민은 5천~1만 명이었다.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지 모른다. 기원전 5000 ~4000년 사이에 나일강 유역 초승달 지역에는 인구 수만 명의 도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원전 3100년에는 하부 나일강 유역 전체가 통합되면서 최초의 이집트 왕국이 생겼다.


기원전 2250년경 사르곤(Sargon) 대제는 최초의 제국인 아카드를 건설했는데, 1백만 명이 넘는 신민과 5,400명의 상비군을 지닌 제국이었다.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 중동에서 최초의 거대 제국들이 등장했다.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이들은 수백만 명의 신민을 다스렸고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다.


[아카드제국 영토와 사르곤 대제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21년 진秦 제국이 중국을 통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후 1년 로마는 지중해 분지를 통일했다. 진이 4천만 명의 백성에게서 걷은 세금은 수십만 명의 상비군과 10만 명이 넘는 관료를 유지하는 데 쓰였다. 로마 제국 최전성기에는 최대 1억 명의 백성에게서 세금을 걷었고, 그 수입으로 25만~50만 명의 상비군과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쓰이는 도로망, 대형 행사가 열리는 극장과 원형극장을 만들고 유지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진 제국과 로마 제국에 이르는 모든 협력망은 ‘상상 속의 질서’였다. 이들을 지탱해주는 사회적 규범은 타고난 본능이나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신화를 통해 제국 전체를 지탱할 수 있었던 예로, 기원전 1776년경의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과 ‘평등과 인권’을 옹호한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을 들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776년 바빌론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였다. 1백만 명이 넘는 국민을 거느린 바빌로니아 제국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을 것이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다스렸는데 오늘날 이라크의 대부분과 시리아, 이란의 일부가 포함된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바빌론의 왕은 함무라비다. 그의 명성은 그의 이름을 딴 함무라비 법전에서 기인한다.

[좌: 함무라비 법전을 새긴 석주, 우: 원형 비석 하단부에 282개의 법조문이 3500줄에 달하는 문장으로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만신전 중에서도 주신인 아누, 엔릴, 마르두크 신이 함무라비에게 "정의가 지상에서 널리 퍼지고, 사악하고 나쁜 것을 폐지하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 임무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다음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 그 판결은 이러이러하다"는 상투적 문구와 함께 약 3백 건의 판결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판결 196~199번과 209~214번은 다음과 같다.

196.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눈을 멀게 한다면 그의 눈도 멀게 만들라.
197.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뼈를 부러뜨린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198. 만일 그가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다면 그는 은 60세겔을 저울에 달아 피해자에게 주어야 한다.
199. 그가 만일 귀족 소유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다면 노예의 가치의 절반을 은으로 저울에 달아 지불해야 한다.

209. 만일 귀족 남자가 귀족 여성을 때려서 그녀의 아기가 유산되었다면 태아에 대한 보상으로 은 10세겔을 저울에 달아 지불해야 한다.
210. 만일 맞은 여성이 사망한다면 그 남자의 딸을 죽여야 한다.
211. 만일 그가 임신 중인 평민 여성을 때려서 유산시킨다면 은 5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212. 만일 그 여성이 사망한다면 그는 은 30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213. 만일 그가 귀족 여성의 노예를 때려서 그 태아를 유산시킨다면 그는 은 2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214. 만일 그 여성 노예가 죽는다면 그는 은 20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판결을 열거한 뒤 함무라비는 다시 한번 선언한다.
"이것이 유능한 왕 함무라비가 내린 공정한 판결이다. 함무라비는 여기에 따라서 자신의 영토를 진리의 길에 따라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인도했다,.... 나는 함무라비, 고귀한 왕이다. 나는 엔릴 신이 내게 보살피라고 맡긴 백성, 마루두크 신이 내게 이끌 책임을 맡긴 백성을 부주의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노라."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의 사회적 질서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원칙은 신들이 읊어준 것이라고 단언한다. 계급제도의 중요성은 엄청나다. 법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성별과 세 개의 계급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 사람은 성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닌다. 평민 여성의 목숨 값은 은 30세겔이고, 노예 여성은 20세겔이다. 이에 비해 평민 남성의 눈은 은 60세겔의 가치가 있다.


이 법전은 또한 가족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어떤 귀족이 다른 귀족의 딸을 죽이면 그 벌로 살해자의 딸이 처형당한다. 이 법전은 만일 왕의 신민 모두가 위계질서상의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행동하면 제국에 사는 수백만 명 모두가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문


함무라비가 사망한 지 약 3,500년 후 북미에 있는 영국 식민지 열 세 곳의 주민들은 영국 왕이 자신들을 불공정하게 대한다고 느꼈다. 이들의 대표는 필라델피아 시에 모여, 1776년 7월 4일 자신들은 더 이상 영국 왕의 신민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들의 독립선언은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칙을 선언했는데, 이 원칙은 함무라비의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영감을 내려주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 신이 불러준 가장 중요한 정의는 바빌론의 신들이 불러준 내용과는 상당히 달랐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 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함무라비 법전과 마찬가지로 미국 독립선언문은 사람들이 그 문서 의 신성한 원칙을 따라 행동한다면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동할 수 있을 것이며 공정하고 번영한 사회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두 문서는 우리에게 명백한 딜레마를 제시한다.


둘 다 스스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리를 약속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인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반면 바빌론인들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옳고 바빌론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함무라비는 당연히 자신이 옳고 미국인들이 틀렸다고 받아칠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틀렸다.


함무라비나 미국 건 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 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 상 또한 신화다.


진정한 신자들


만일 인권이 오직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리면, 사회가 붕괴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 함무라비는 자신의 위계질서 원리에 대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고, 토머스 제퍼슨 역시 인권에 대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권리가 없다. 공동체가 만들어낸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결국 사회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상의 질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교도소의 담장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들려면,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하며 이를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 예로 오늘날 서구인이 신봉하는 개인주의를 들면서, 현대의 건축으로 만들어진 개인 공간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런 개인주의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반면, 중세에는 그 반대로 중세 성의 공유 공간에서의 생활로 인해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적 위계질서와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즉 모든 사람은 기존의 상상의 질서 속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지배적인 신화에 의해 욕망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하며, 현대인들이 신봉하는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예로 들면서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사실은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즉 상상의 질서는 나만의 관념이 아니라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백만명의 낯선 사람에게 나와 협력하도록 설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푸조라는 회사, 달러화, 인권, 미국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상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다른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푸조를 해체하려면 프랑스 법률체계처럼 그보다 더 강력한 뭔가를 상상해야 하고, 프랑스 법률체계를 해체하거나 국가마저 해체하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한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메모리 과부하


인간은 단순히 자기 DNA를 복사하고 이를 후손에 전해주는 것만으로는 사회운영에 필요한 핵심정보를 보존할 수 없다. 사피엔스의 사회질서는 가상의 것이라서 법과 관습, 절차와 예절을 지탱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회질서는 빠르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 사회는 그러한 가상의 사회질서를 열심히 후손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나아가 인간사회가 제국 단계로 발전하면서 법률뿐 아니라 거래와 세금, 군수품과 상선의 목록, 축제와 승전기념일을 넣은 달력 등을 기록해야 하는 등 제국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이 정보를 저장해온 장소는 단 하나, 자신의 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간의 뇌는 제국 규모의 데이터베이스를 저장하는 장치로서는 훌륭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는 용량이 부족하고 인간이 죽으면 뇌도 같이 죽는다. 뇌에 축적된 모든 정보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특정한 유형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데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살아남으려면 수천 종의 식물과 동물의 형태와 속성, 행동 패턴을 기억해야만 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은 무리의 구성원 수십 명의 의견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농업혁명에 뒤이어 유달리 복잡한 사회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중요해졌다. 바로 숫자다. 커다란 왕국을 유지하려면 수학적 데이터가 핵심적이었다. 특히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인 '숫자'가 중요해졌는데 그런 문제를 처음 극복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살던 고대 수메르인들이었으며, 그들은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인 ‘쓰기’라는 데이터 처리시스템을 개발했다.


쿠심이 서명했다


수메르인들은 점토판에 눌러쓴 두 종류의 기호를 이용했는데 기호의 한 유형은 숫자를 나타냈고 각각 1, 10, 60, 600, 3,600, 36,000을 나타내는 기호를 만들어 냈고(이는 6진법과 10진법의 혼합이고, 수메르인의 6진법은 하루 24시간, 360°의 분할 형태로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다), 또 다른 유형의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는데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더욱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점토판]

초기 단계의 쓰기는 사실과 숫자에 한정되었다. 만일 위대한 수메르 소설이 존재했더라도, 점토판에 쓰이지는 않았다. 쓰기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기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장부 기록 이외의 일에 활용할 이유가 없었다. 조상들이 남긴 가장 초기의 메시지는 가령 이랬을 것이다. ‘보리 29,086자루 37개월, 쿠심.’ 이 문장의 의미는 아마도 ‘37개월에 걸쳐 보리 29,086자루를 받았다. 서명자 쿠심’일 것이다.


수메르 초기의 문자는 완전한 문자체계(스크립트)가 되지 못한 부분적인 것이었다. 완전한 문자체계란 구어를 어느 정도 완벽하게 표현하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시를 포함해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체계 말이다. 불완전한 문자체계는 인간 행동의 제한된 영역에 속하는 특정 유형의 정보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관료주의의 불가사의


마침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단조로운 수학 데이터 이외의 것을 쓰고 싶어졌다. 기원전 30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문자체계에 점점 더 많은 기호가 추가되어 오늘날 쐐기문자라고 불리는 완전한 문자체계로 점차 바뀌었다. 기원전 2500년이 되면서 왕이 포고령을 내릴 때, 사제들이 신탁을 기록할 때, 시민들이 편지를 쓸 때 이 문자를 사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도 상형문자를 사용했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에, 중미에서는 기원전 1000~500년 경에 또 다른 완전한 문자체계가 발달했다. 이들 문자체계는 발원지에서 널리 퍼져나가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임무를 띠게 되었다. 사람들은 시와 역사책, 로맨스, 예언, 요리책을 썼다. 그래도 쓰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여전히 대량의 수학적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있었고, 이 임무는 불완전한 문자체계의 면면한 특권이었다.

한편 저장된 데이터의 양이 방대해지면서 그러한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목록화하고 인출하는 방법을 발명해야 했는데 이는 문자를 발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문자 체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수메르와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 제국이 달랐던 점은 문자기록을 보관하고 목록을 만들고 검색하는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 이들은 또한 필경사와 서기, 사서와 회계원을 양성하는 학교에도 투자했다.


나는 학교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선생이 내 점토판을 읽고 "빠뜨린 게 있잖아"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책임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어째서 내 허락도 없이 입을 벌렸느냐?"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규율을 담당한 선생이 말했다. "왜 내 허락도 없이 일어섰느냐?"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내 허락도 없이 어딜 나가느냐?"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맥주 항아리 관리자가 말했다. "어째서 내 허락도 없이 마셨지"?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수메르어 선생이 말했다. "어째서 아카드 말*(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지방을 포함하는 동부 지방의 셈어)을 썼지?"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담임선생이 말했다. "너는 글씨가 악필이야!" 그는 나를 회초리로 때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글쓰기 연습에 관한 기록 해석)


관료제에서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주택담보대출을 위한 서랍이 하나, 결혼증서를 위한 서랍이 하나, 세금 기록용 서랍이 하나, 소송용 서랍이 하나, 이런 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뭔가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나 이상의 서랍에 속하는 것, 예컨대 바그너의 악극(이것을 ‘음악’ 또는 ‘연극’이란 범주로 분류할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야 할까?) 같은 것은 골칫거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랍을 추가하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일을 영원히 계속한다. 그런 서랍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기를 중단하고 서기나 회계사로서 사고체계를 다시 장착해야 한다.


숫자라는 언어


관료주의적 방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에서 더욱더 멀어졌고, 더욱더 중요해졌다. 그 결정적인 단계는 9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수학적 데이터를 전에 없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불완전한 문자체계 하나가 새로 발명되었는데 이 것이 바로 0에서 9에 이르는 열 개의 기호로 이뤄진 체계였고 나중에 여기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등의 부호가 추가되면서 현대 수학적 표기법의 기반이 출현하게 되면서 결국 세계의 지배언어가 되었다.


정부나 기구, 회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사람은 숫자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전문가들은 심지어 ‘빈곤’ ‘행복’ ‘정직’ 같은 개념도 숫자로 번역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빈곤선’ ‘주관적 웰빙 수준’ ‘신용등급’). 물리학이나 공학의 경우 해당 지식 분야 전체가 인간의 말과의 접촉을 거의 잃어버리고 오로지 수학적 문자체계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다.


나아가 최근에 수학적 문자체계는 더더욱 혁명적인 쓰기 체계를 출현시켰는데(컴퓨터화된 2진법 문자체계를 가리킨다), 결국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고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농업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고, 그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는데,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눴고 상류층이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는 동안, 하류층은 차별과 압제로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선언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유민과 노예,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별이라는 또 다른 위계질서가 확립되고 자유 역시 오늘날과는 함의가 크게 달랐다. 1776년에 이 단어는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흑인이나 원주민은 해당되지 않았으며 여성은 더더욱 아니었다)이 권력을 얻고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러한 모든 차별은 허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모든 상상의 질서는 스스로가 허구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고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 역사의 철칙이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위계질서가 자연스럽고 올바르다고 보았는데, 이들은 노예제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에게는 ‘맹종하는 본성’이 있고 자유민에게는 ‘자유로운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불행하게도 복잡한 인간사회에는 상상의 위계질서와 불공정한 차별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위계질서의 도덕성이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욱 심한 차별로 고통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계질서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도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모든 사회는 상상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위계질서가 반드시 동일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각 사회가 다르게 즉 인도의 전통 사회는 카스트에 따라, 오토만 사회는 종교에 따라, 미국 사회는 인종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나누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위계질서는 일련의 우연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저마다 이해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영속성을 얻고 세련되어졌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많은 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 년 전 인도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였다.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윗자리(사제와 전사)를 차지하고 현지인은 하인과 노예로 삼았다.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구별은 단순히 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화와 관습의 고유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배자들은 카스트 제도가 우연한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적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결과 불결의 개념은 힌두교의 핵심요소로서, 사회적 피라미드를 지탱하는 데 이용되었다. 경건한 힌두교도는 다른 카스트 사람들과 접촉하면 개인적으로 오염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그런 행위는 혐오해야 한다고 배웠다.


인도아리아인의 침략이 잊힌 지 오랜 뒤에도 인도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를 계속 믿었고, 카스트를 뒤섞는 데서 오는 오염을 혐오했다. 현대 인도에서도 결혼과 직업은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인도의 민주정부가 그런 차별을 철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카스트를 섞어도 오염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힌두교도들을 설득해왔지만 모두 허사였다.


미국의 인종 분리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 정복자들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노예를 미국으로 수입해 광산과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수입원은 유럽이나 동아시아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미국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들은 유럽계 백인이라는 지배 카스트와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종속 카스트로 나뉠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 인종이나 출신을 노예로 쓰는 이유가 오로지 경제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 사람들이나 미 대륙의 유럽계 백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정의로우며 객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과학적 신화가 동원되었다.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아의 아들인 햄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햄은 그 아버지로부터 “네 자손들은 노예가 되리라”는 저주를 받았다. 생물학자들은 흑인들은 불결한 상태로 살며 병을 퍼뜨린다고, 다시 말해 오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화들은 미국 문화와 서구 문화 전반에 잘 공명했고, 노예제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사라진 지 오랜 뒤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노예제는 1865년 미국 헌법의 제13차 개정으로 이미 불법이 되었고, 제14차 개정에서는 인종을 근거로 시민권과 법에 의한 동등한 보호를 부인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2백 년간 지속된 노예제의 결과, 대부분의 흑인 가정은 대부분의 백인 가정에 비해 훨씬 더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았다. 따라서 1865년 앨라배마에서 태어난 흑인은 이웃의 백인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고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을 가질 기회가 훨씬 적었다.


1865년이 되자 백인들뿐 아니라 많은 흑인들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객관적으로 지능이 낮고 폭력성이 높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게으르며 개인적 청결에 관심이 적다고 말이다. 따라서 흑인은 폭력, 절도, 강간, 질병 — 다시 말해 오염 — 의 원인이었다. 편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굳어졌다. 좋은 직업은 모조리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믿기가 더 쉬워졌다.


이런 악순환은 수세기 수천 년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질서에 불과한 상상의 위계질서를 지속시킬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므로,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회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와 그녀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하는데 이게 바로 '성별'이고, 사람들은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이러한 남녀 간의 문화적, 법적, 정치적 차이 중 일부는 성별에 따른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한 것이지만, 모든 사회는 이런 보편적인 핵심 사실 주변에 생물학과 거의 관련 없는 문화적 개념과 규범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남녀의 차별에 관한 많은 주장들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소위 '남자다운' 속성과 '여자다운' 속성의 내용은 상호 주관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가령 현대 아테네와 고대 아테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속성은 행동과 욕망, 의상, 심지어 자세까지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부터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였고, 가부장제는 거의 모든 농경 및 산업 사회에서 표준이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남자가 근력이 더 세거나 공격성이 있어서라는 주장도 있고 남녀가 각기 다른 생존 및 번식 전략을 발전시켰다는 등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모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 어쩌면 일반적인 가정들이 틀린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의 수컷들은 신체적 힘이나 공격성, 경쟁성이 특징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 우월하고 협력을 잘하는 것이 특징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면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젠더의 역할은 커다란 혁명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회가 남녀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 경제적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젠더와 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런 극적인 변화들 때문에 젠더의 역사가 그토록 혼란스러운 것이다. 만일 오늘날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듯이 가부장제가 생물학적 사실보다 근거 없는 신화들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 제도가 이토록 보편적이고 안정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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