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인지혁명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Sapiens), A Brief Hostory of Humankind》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인류 특히 호모 사피엔스 종의 발전 과정과 미래에 대해 분석한 세계적인 인문학 스테디셀러이다.
이 책은 2011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영문판은 2014년에 출판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어판은 2015년 11월에 출시되어 역시 국내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저자는 무명의 역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총, 균, 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역사와 현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책,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마크 저커버그(“수렵채집인이던 인류가 어떻게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를 이루었는지 알려주는 인류 문명화에 대한 거대한 서사!”), 빌 게이츠 등 많은 유명인사들이 추천사에 참여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으로 인해 인류 역사학자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연이어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등을 발간하는 등 계속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역사학자이면서도 단순한 역사 연구가 아닌 생물학과 역사학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구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물론 접근 방식이나 분석의 깊이 차이는 크다고 생각되지만) 인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다룬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어먼드 교수와 종종 비교되는 것 같다(서로 상대방의 책에 대해 추천사를 써주고 있다^^).
2016년에는 국내 언론사 주재로 두 교수가 인류와 동아시아의 미래에 관한 6가지 주제, 1) 미래 인류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 2) 100년, 200년 후 인간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3) 미래에 인공지능(로봇)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4) 수명연장·장기이식 기술이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5) 인류의 미래는 장밋빛일까 6) 동아시아가 미래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 등을 놓고 대담회를 갖기도 했다(https://m.sedaily.com/NewsView/1KV33E46AJ).
2019년에는 재레드 다이아몬드, 닉 보스트롬(스웨덴 철학자, 옥스퍼드 대학 교수), 린다 그랜트(영국 심리학자,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 다니엘 코엔(프랑스 경제학자, 파리 제1대학 교수), 조앤 윌리엄스(캘리포니아 대학 헤이스팅스 로스쿨 교수), 넬 어빈 페인터(미국 역사가, 프린스턴 대학 미국사 명예교수), 윌리엄 페리(전 미국 국방장관) 등의 저명학자 8인과 인류의 미래에 관해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초예측》이라는 책까지 발간되기도 하는 등 저자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학자로서 공고한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처음 이 책을 읽은 건 2017년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농업혁명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표현을 비롯해 호모 사피엔스 종이 다른 인간 종을 몰아내고 지구를 지배한 것이 인지혁명 때문이라는 내용이나 결국 인류는 수렵채집시기보다 더 불행해지고 있다는 등의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분석과 통찰로 인해 전율이 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사실 이 책은 세계적인 고고학자나 미래학자들로부터, 새로운 사실 발견이나 독자적인 연구 이론은 없고 기존의 이론들을 짜깁기를 잘한 책에 불과하며, 일부는 확인되지 않는 내용을 기정사실화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전제로 하여 여러 팩트를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 등 대단히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과연 최근 《총, 균, 쇠》를 읽고 나서 연이어 다시 이 책을 읽어 보니 그때의 느낌과는 상당히 달리, 이 책의 여러 내용들이 다소 팩트와 다르고 직관적이라고 느껴졌던 저자의 통찰이 생각보다 학계의 공감을 많이 얻지 못하고 있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느껴지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차근차근 음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전체적인 깊이나 난이도 관점에서 볼 때 아무래도 대중 교양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와 생물학의 관계는 무엇인가?"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가?" "역사에 하나의 정의란 진정 존재하는가?" "역사의 발전에 방향성이 있는가?" "역사가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정말로 행복해졌는가?"와 같은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본인만의 독특한 관점과 다양한 사례 분석을 통해 잘 정리하고 있어 충분히 그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래서 대중들의 꾸준한 사랑과 공감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제1부 인지혁명
여기서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 종이 지구상에서 다른 인간 종들과 대형동물들을 몰아내고 지구를 지배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인지혁명’이라고 분석하면서 수렵채집 시기까지의 인지혁명을 통해 인류가 발달한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약 40억 년 전 지구라는 행성에 모종의 분자들이 결합해 특별히 크고 복잡한 구조를 만들었다.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생물학이라 부른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는 생명체가 좀 더 정교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그후 인류문화가 발전해온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인류는 역사가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현대 인류와 아주 비슷한 동물은 약 250만 년 전 출현했지만, 수없이 많은 세대 동안 그들은 같은 지역에 서식하는 다른 수많은 동물들보다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들 원시인류는 서로 사랑하고 놀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지위와 권력을 위해 경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침팬지, 개코원숭이, 코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당시에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들 원시인류의 후손이 언젠가 달 위를 걷고 원자를 쪼개고 유전자 코드를 해독하며 역사책을 쓰리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사시대 인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릴라, 반딧불이, 해파리보다 딱히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생물학자들은 생물을 종으로 분류한다. 동물을 같은 종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서로 교배를 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으면 된다. 같은 조상에게서 진화한 각기 다른 종들을 묶어서 ‘속屬, genus’이라 부른다. 사자와 호랑이, 표범과 재규어는 ‘표범 속(Panthera)’에 속하는 각기 다른 종이다.
속의 상위에 있는 것이 ‘과科, family’다. 고양이과(사자, 치타, 집고양이), 개과(늑대, 여우, 자칼), 코끼리과(코끼리, 매머드, 마스토돈) 등이 그런 예다. 같은 과에 속하는 모든 동물은 동일한 선조의 후손이다.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에 속한다. 이 엄연한 사실은 역사에서 가장 은밀히 숨겨진 비밀이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거대 영장류라는 크고 유달리 시끄러운 과의 한 일원이다. 현생종들 중 우리와 가까운 친척으로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이 있고, 가장 가까운 것은 침팬지다. 불과 6백만 년 전 단 한 마리의 암컷 유인원(꼬리 없는 원숭이)이 딸 둘을 낳았다. 이 중 한 마리는 모든 침팬지의 조상이, 다른 한 마리는 우리 종의 할머니가 되었다.
인류가 스스로 숨겨온 비밀
호모 사피엔스는 이보다 훨씬 더 불편한 사실을 계속 비밀로 해왔다. 오늘날 우리에게 문명화되지 않은 사촌들이 많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형제자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1만 년간 우리 종은 지구상의 유일한 인간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유일한 인류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인간(human)’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호모 속에 속하는 동물’이고, 호모 속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여타의 종이 많이 존재했다.
인류는 약 250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우리보다 더 오래된 유인원의 한 속으로서 ‘남쪽의 유인원’이란 뜻이다. 이들은 약 200만 년 전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여러 종들이 생겨났고, 과학자들은 여기에 거창한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
유럽과 서부 아시아의 인류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 골짜기에서 온 사람)’, 흔히 말하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진화했다. 이들은 우리 사피엔스보다 덩치가 크고 근육이 발달한 덕분에 유라시아 서부에서 빙하기의 추운 기후에 잘 적응했다.
아시아의 좀 더 동쪽 지역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이들 ‘똑바로 선 사람’은 그 지역에서 2백만 년 가까이 살아남아, 가장 오래 지속된 인간 종이 되었다. 우리 사피엔스가 이 기록을 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부터 1천 년 후에 존재할지 여부도 의심스러운 마당에 2백만 년은 우리와는 동떨어진 시간이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살았는데, ‘솔로 계곡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이들은 열대지방의 삶에 잘 적응했다. 한편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섬 플로레스에서는 고인류가 왜소화의 과정을 겪었다. 인류가 플로레스 섬에 도착한 것은 해수면이 이례적으로 낮아져서 본토에서 건너가기가 쉬운 때였다.
그러다 해수면이 다시 높아지자 일부 사람들이 자원이 부족한 그 섬에 갇히게 되었다. 식량을 많이 먹어야 하는 덩치 큰 사람들이 먼저 죽었고, 아무래도 작은 사람들이 살아남기가 수월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플로레스 섬 사람들은 점점 난쟁이가 되었다. 과학자들이 ‘플로레스인(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이라 이름 붙인 이 사람들은 최대 신장이 1미터에 체중은 25킬로그램 이하였다.
2010년 우리의 잃어버린 사촌 중 또 하나가 발견되었다. 시베리아의 데니소바 동굴을 발굴하던 과학자들이 손가락뼈 화석 하나를 찾아냈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이 손가락의 주인은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인류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데니소바인(호모 데니소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외에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종들이 생겨 났는데, ‘호모 루돌펜시스(루돌프 호수에서 온 사람)’, ‘호모 에르가스터’(일하는 사람) 등이다.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 종은 덩치가 크기도 했고 작기도 했다. 일부는 무서운 사냥꾼이었고 일부는 온순한 식물 채집인이었다. 하나의 섬에만 사는 종도 있었지만 대륙을 방랑한 종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호모 속에 속해 있었다. 모두가 인간이었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동시에 살았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오늘날에도 불곰, 흑곰, 북극곰 등 수많은 종류의 곰들이 살고 있지 않은가. 한때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생각의 비용
인간의 여러 종은 차이도 많지만 공통점도 많다. 우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뇌가 예외적으로 크다. 무게가 60킬로그램인 포유동물의 뇌는 보통 2백 세제곱센티미터인 데 비해, 250만 년 전 살았던 가장 초기의 인류는 뇌 용적이 6백 세제곱센티미터였고, 현대의 사피엔스는 평균 1,200~1,400세제곱센티미터에 달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이보다 더 컸다.
커다란 뇌는 자원을 고갈시키는 밑 빠진 독이다. 무엇보다 갖고 다니기 어렵다. 커다란 두개골 안에 들어 있으면 더 그렇다. 심지어 연료도 많이 소모한다(휴식상태의 경우 25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인류는 식량을 찾아다니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썼으며, 근육이 퇴화했다. 무엇이 지난 2백만 년간 인간의 엄청난 뇌 용량 증가를 일으켰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직립보행
인간의 또 다른 이례적인 특징은 직립보행이다. 대초원에서 똑바로 서면 사냥감이나 적을 찾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이동에 쓰이지 않게 된 팔은 다른 용도, 예컨대 돌을 던지거나 신호를 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다. 팔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 주인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진화의 압력에 따라 우리는 손바닥과 손가락에 신경이 집중되고 섬세한 근육이 자리 잡게끔 진화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손으로 매우 복잡한 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었다. 특히 복잡한 도구를 만들고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직립보행은 단점이 있다. 지난 수백만 년간 우리 영장류 선조들은 머리가 상대적으로 작고 네 발로 기는 몸을 지탱하는 골격을 진화시켜왔다. 직립자세에 적응하는 것은 상당한 도전이었다. 특히 유달리 커다란 두개골을 골격이 비계처럼 지탱해야 했기에 더 그랬다. 직립자세로 인해 허리와 목에 부담이 가게 되었다.
여성은 더 큰 비용을 치렀다. 똑바로 서서 걸으려면 엉덩이가 좁아야 하므로 아기가 나오는 산도(질)도 좁아지게 됨에 따라 머리가 커진 아기 출산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자연선택적으로 조기 출산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숙한 아이로 태어나다 보니 성숙해지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어른들이 부양하고 지키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 덕이요, 특유의 사회적 문제를 안게 된 것도 이 탓이다.
하지만 인간은 2백만 년 동안 이런 특징을 지녔음에도 계속 연약한 주변부 존재일 뿐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왔으며 지속적으로 대형 포식자에게 사냥을 당해왔다. 인간이 대형 사냥감을 정기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만 년 전부터였고,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중간에서 꼭대기로 단숨에 도약한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익혀 먹는 종족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올라서는 핵심단계는 불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이르면 80만 년 전쯤에 일부 인간 종은 가끔 불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약 30만 년 전이 되면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은 불을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이제 인간은 빛과 온기의 믿을 만한 원천이자 배회하는 사자에 대항할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를 가졌다.
심지어 이후 얼마 뒤부터 인간은 자기 주변에 일부러 불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불을 조심스럽게 잘 지르면 통행이 불가능하던 잡목 숲을 사냥감이 우글거리는 최고의 초원으로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일단 불이 꺼지면 석기시대 사업가는 그 잔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불탄 동물과 견과류, 덩이줄기 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이 하는 최고의 역할은 음식을 익히는 일이다. 조리 덕분에, 인간이 자연 상태 그대로는 소화할 수 없는 밀, 쌀, 감자 등이 인간의 주식이 되었다. 익히는 요리법 덕분에 인간은 식사 시간도 줄이고 다양한 음식도 섭취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에 비해 처음으로 현격한 힘의 차이를 갖게 되었다. 인간은 불을 길들임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형제 살해범
불의 혜택에도 불구하고, 15만 년 전 인간은 변방의 존재였다. 이제는 겁을 주어 사자를 쫓아낼 수 있고, 추운 밤에 몸을 데울 수 있으며, 가끔씩 숲을 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종을 통틀어 보더라도 인간은 인도네시아 군도와 이베리아 반도 사이에 겨우 1백만 명쯤 살았을 것이므로, 생태계를 레이더로 훑는다고 할 때 겨우 삑 하는 소리를 한 번 낼 만한 정도였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세계 무대에 이미 등장하였지만, 당시까지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동물이 언제 어디서 처음 진화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은 15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에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피엔스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약 7만 년 전 동아프리카의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로 퍼져나갔고 거기서부터 유라시아 땅덩어리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했을 당시 대부분의 유라시아 지역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다. 그런데, 약 5만 년 전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약 3만 년 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약 12,000년 전에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 가지 상충하는 이론이 존재한다.
교배이론 vs. 교체이론
‘교배이론’은 그들이 서로 끌려 성관계를 하고 뒤섞였다는 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유라시아인은 순수한 사피엔스가 아니라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합이다. 마찬가지로 사피엔스는 동아시아로 퍼져나가서도 현지의 호모 에렉투스와 교배했다. 그렇다면 중국인과 한국인은 사피엔스와 에렉투스의 혼합이다.
이와 대립되는 견해는 ‘교체이론’이다. 교체이론은 전혀 다른 설명을 들려준다. 그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반감을 보였으며 심지어 인종학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들은 해부학적으로 달랐으며 짝짓기 습관이나 체취까지도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매우 커서, 서로에게 성적인 관심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만일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현대 인류의 조상은 하나같이 7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사피엔스’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 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화석에서 충분한 양의 온전한 네안데르탈인 DNA를 얻어서 그것과 현대인의 DNA를 폭넓게 대조해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최소한 교배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이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고 서서히 모두 죽어갔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사실이었든, 네안데르탈인(그리고 여타의 인간 종들)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만일’의 소재다. 상상해보자. 만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이 호모 사피엔스와 나란히 살아남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현재의 문화와 정치체계와 역사가 그대로일까? 여러 인간 종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구조가 출현했을까?
지난 1만 년간 호모 사피엔스는 유일한 인간 종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가능성을 그려보기 어렵다. 스스로가 창조의 최고 샘플이며, 우리와 나머지 동물계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래서 찰스 다윈이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고 암시하자 사람들은 격분했다. 만일 네안데르탈인이 살아남았다면, 그래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종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인식할까?
어쨌든 사피엔스의 탓이든 아니든, 사피엔스가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토착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덕분이다.
지식의 나무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최초로 마주쳤을 때 승리한 것은 네안데르탈인 쪽이었다. 약 10만 년 전 일부 사피엔스 집단은 네안데르탈인의 영토인 북부의 레반트(지중해 동해안) 지방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는 적대적인 원주민 탓일 수도 있고 혹독한 기후 탓이거나 낯선 토착 기생충 탓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사피엔스는 결국 후퇴했다.
하지만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매우 특별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지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에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인간 종들을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놀랍도록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 배, 기름 등잔, 활과 화살, 바늘을 발명하였고 예술품이나 장신구라고 할 수 있는 물건들도 이 시기에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런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에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저자는 이것을 ‘인지혁명’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이것을 촉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학자들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배선방식을 바꿨다고 믿는다고 한다(저자는 이것을 ‘(성경의 선악과가 열린)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며, 하필 사피엔스의 DNA에 등장한 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언어가 무엇이 특별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우리의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는 점, 즉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무한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세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녹색원숭이도 동료들에게 “조심해! 사자야!”라고 외칠 수 있지만, 현대 여성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강이 굽어지는 곳 부근에서 한 무리의 들소를 쫓는 사자 한 마리를 보았어.” 이어서 그녀는 정확한 위치와 그곳까지 가는 여러 길들까지 묘사할 수 있다. 이 정보를 두고 그녀의 무리는 강에 접근해서 사자를 쫓아버리고 들소를 사냥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도 있다(‘강변에 사자가 있다’ 이론).
두 번째 이론은,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뒷담화’ 이론).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으며, 즉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 뿐이며, 그 덕분에 인간은 단순한 개인의 상상을 넘어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푸조라는 신화
집단 내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불화가 생겨서 일부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 동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1백 마리가 넘는 집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서로 다른 무리들은 거의 협력하지 않으며, 영토와 먹을거리를 두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인지혁명에 뒤이어 뒷담화이론이 등장한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크고 안정된 무리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뒷담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알고 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보통 사람은 거의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현대의 사회제도들이 정확히 그런 기반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의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현대의 사업가와 법률가들은 사실상 강력한 마법사들이다. 이들과 원시 샤먼 간에 주된 차이는 현대 법률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이상하다는 점뿐이다. 푸조의 신화가 좋은 사례다.
오늘날 파리에서 시드니에 이르는 도시의 자동차, 트럭, 오토바이에는 슈타델의 사자 - 남자 비슷한 아이콘이 붙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자동차 회사인 푸조에서 만든, 차들의 후드에 붙어 있는 장식품이다. 푸조는 슈타델에서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발렌티니 마을의 조그만 가족기업으로 시작했다. 오늘날 이 기업은 세계 곳곳에서 20만 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서로 전혀 모른다.
‘푸조 SA(이 회사의 공식 명칭)’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일까? 푸조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변호사들은 이를 ‘법적인 허구’라 부른다. 푸조는 ‘유한(책임)회사’라는 특별한 법적 허구의 산물이다. 이런 회사의 이면에는 인류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으로 꼽히는 개념이 존재한다. 창립자인 아르망 푸조는 1915년 사망했지만, 푸조 사는 아직도 잘만 살아 있다.
인간 아르망 푸조는 정확히 어떻게 회사 푸조를 창조했을까? 그 방식은 역사를 통틀어 사제와 마술사가 신과 악마를 창조해낸 방식과 매우 비슷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일요일마다 교구 성당에서 여전히 성체(예수의 몸, 축성된 빵의 형상을 띤다)를 창조해내는 것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활동들이다.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남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게 어렵다.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이 질문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백만 명에게 신이나 국가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 혹은 유한회사를 믿게 만드는가?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사피엔스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게놈 우회하기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신화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신화를 바꾸면 인간의 협력방식도 바필 수 있다.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신화는 급속하게 바뀐다. 1789년 프랑스인들은 왕권의 신성함이라는 신화를 믿다가 거의 하룻밤 새 국민의 주권이라는 신화로 돌아섰다. 그 결과 인지혁명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의 변화에 발맞춰 행동을 신속하게 바꿀 수 있었다.
다른 사회적 동물들의 행태 변화는 엄청나게 오랜 기간에 걸친 유전적 돌연변이나 환경의 변화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음에 비해 사피엔스는 인지혁명 이래 DNA의 변화 없이도 짧은 기간에 사회구조, 인간관계의 속성, 경제활동 등을 비롯한 수많은 행태들을 바꿀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가톨릭 신부, 불교의 승려, 중국의 환관처럼 아이를 갖지 않는 엘리트가 계속 등장했던 것이다.
이런 엘리트의 존재는 자연선택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에 모순된다.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아이 낳기를 기꺼이 포기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금욕의 원인은 먹을거리가 크게 부족하다든가 잠재적인 짝짓기 상대가 부족하다든가 하는 특수한 환경적 조건이 아니다. 무언가 특이한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도 아니다. 가톨릭 교회가 10여 세기 동안 살아남은 것은 신약과 가톨릭 교회법의 이야기들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피엔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요인이다. 일대일 결투라면 몰라도 수백 명이 맞붙는다면 네안데르탈인에게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유럽 대륙의 중심부의 3만 년 전 사피엔스 유적지에는 가끔씩 지중해나 대서양 연안의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 장거리 교역을 통해 대륙의 내부까지 들어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지에서는 그런 교역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현지에 있는 재료로 자신들이 쓸 도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남태평양에도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뉴기니와 북부 뉴아일랜드 섬에 살던 사피엔스 무리들은 특별히 단단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 때 흑요석을 사용했다. 하지만 뉴아일랜드에는 흑요석의 천연 산지가 없다. 실험실에서 분석한 결과, 이들이 사용한 흑요석은 4백 킬로미터 떨어진 뉴브리튼에 있는 광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섬의 주민들 중 일부는 섬에서 섬으로 장거리 여행을 하며 무역을 하는 숙련된 항해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교역은 매우 실용적인 활동, 허구적 근거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사피엔스 외에는 교역을 하는 동물이 없고, 사피엔스의 교역망은 모두 픽션에 근거를 둔다. 교역은 신뢰 없이 존재할 수 없는데, 모르는 사람을 믿기는 매우 어 렵다. 오늘날 전 지구적 교역망은 화폐, 은행, 기업과 같은 허구의 실체들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대 화폐의 도안에는 통상 종교적 이미지, 존경받는 조상, 공동의 토템이 담겨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입장에서는 전통적 사냥터가 사피엔스가 통제하는 도살장으로 변하는 것이 보기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두 종 간에 폭력이 발생하면, 네안데르탈인은 야생마보다 형편이 썩 더 낫지 않았다. 전통적이고 정적인 패턴으로 협력하는 50명의 네안데르탈인은 융통성이 많고 창의적인 사피엔스 5백 명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설사 사피엔스가 1회전에서 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음번에는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지 빨리 찾아냈다.
역사와 생물학
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 패턴의 다양성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동물이며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능력은 여전히 DNA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네안데르탈인이나 침팬지 사회와 같으며, 감각, 정서. 가족 간 유대 같은 요소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와 다른 유인원 간에 차이가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개인과 가족 차원에서 차이를 찾으려 하는 것은 실수다. 일대일, 십대십으로 보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침팬지와 비슷하다.
심각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개체수 150명이라는 임계치를 초과할 때부터다. 숫자가 1천~2천 명이 되면,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만일 수천 마리의 침팬지를 텐안먼 광장이나 월스트리트, 바티칸, 국회의사당에 몰아넣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아수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장소에 정기적으로 수천 명씩 모인다. 인간은 교역망이나 대중적 축하행사, 정치제도 등의 질서 있는 패턴을 함께 창조한다. 혼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들을 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능력 같은 다른 기술도 필요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도구 제작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고대 수렵채취인에 비해 손 재주가 휠씬 뒤떨어졌다. 하지만 많은 수의 낯선 사람들과 협력하는 우리의 능력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2. 하지만 그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 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우리 종은 존속 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역사와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렵채집인 조상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널리 인정되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현대인의 사회적, 심리적 특성 중 많은 부분이 수렵채집 시기(7만 년 전 인지혁명과 12,000년 전 농업혁명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식습관, 분쟁, 성적 특질 모두, 우리의 수렵채집 마인드가 후기 산업사회의 환경과 그 대도시, 여객기, 전화, 컴퓨터와 상호작용한 결과다.
이런 환경 덕분에 우리는 이전의 어떤 세대와 비교하더라도 물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수명도 길어졌지만, 이 환경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외되고 우울하고 압박받는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알려면 우리를 형성했던 수렵채집 세계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는 아직도 그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풍요사회는 비만이라는 악성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이 병은 개발도상국으로도 빠르게 번져나가는 중이다. 어째서 우리가 가장 달콤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을 이렇게 탐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우리의 수렵채집인 조상이 지녔던 식습관을 알기 전에는 혼란스럽게만 느껴진다.
3만 년 전 전형적인 수렵채집인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달콤한 식품은 오직 하나, 잘 익은 과일뿐이었다. 무화과가 잔뜩 열린 나무를 발견한 석기시대 여성을 떠올려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행동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 지역에 사는 개코원숭이 무리가 모두 따 먹기 전에 말이다. 고칼로리 식품을 탐하는 본능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이 ‘게걸스러운 유전자’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대 수렵채집 사회인의 삶은 그 이후의 농경 및 산업사회의 영향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수렵채집 사회가 살아남은 지역은 주로 기후가 거칠고 땅이 황량하며 농사에 적당치 않은 곳이라 그에 비추어 비옥한 지역의 고대사회를 유추하기에 적절치 않을 수 있으며, 수렵채집 사회 자체도 지역적으로 서로 크게 달랐을 것이기 때문에 고대 수렵채집인의 삶을 정확히 추론하기는 어렵다.
수렵채집인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들은 농경시대 이전 세상의 삶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십 명, 기껏해야 수백 명으로 구성된 작은 무리에 속해 살았으며 무리 속의 개체 모두가 인간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즉 농경사회 전에는 가축화된 동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개다. 약 15,000년 전에 이미 가축화된 개가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또한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매우 잘 알았으며, 평생을 친구와 친척에게 둘러싸인 채 (고독과 프라이버시 없이) 살아갔을 것이고 이웃 무리와의 교류나 사회정치적인 관계는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 45,000년 전 어촌의 형성이라는 영구 정착 외에는 대부분의 사피엔스 무리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며 길 위의 삶을 살았을 것이며, 대부분의 거주지에서 융통성 있게 그때그때 되는대로 먹고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피엔스는 살아남기 위해 지식도 찾아다녔을 것이고 주변 환경에 대해 더 넓고 깊고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기 신체와 감각이라는 내부세계에 대해서도 완벽히 터득했다. 이들은 뱀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풀밭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도 귀 기울여 들었다. 또 과일과 벌집, 새둥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뭇잎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이동했으며 가장 기민한 방식으로 앉고 걷고 달릴 수 있었다.
최초의 풍요 사회
또한 수렵채집인들은 그 후손들(농부, 현대인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이고(주 평균 35-45시간 정도 작업), 수렵채집이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제공했기에 현대인에 비해 오히려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화석뼈에 나타난 증거가 이를 시사하고 있다).
게다가 한 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인다. 수렵채집 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농경 및 산업사회를 휩쓴 대부분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결핵)은 가축이 된 동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농업혁명 이후부터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기르는 가축은 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없었다. 게다가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한 비위생적인 거주지에 영구적으로 살았는데, 이는 질병이 퍼지기 이상적인 온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떠돌며 생활했는데, 무리도 소규모여서 전염병이 널리 퍼질 수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으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정령과의 소통
고대 수렵채집인 사이에서 애니미즘(영혼이나 정신을 뜻하는 라틴어 ‘anima’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앙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애니미즘은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접근법과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공통된 인식("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다른 특정한 부류의 존재를 둘러싸고 돌아가지도 않는다")을 갖고 있는 포괄적 이름이다.
애니미즘의 세계에서는 사물과 생물만 정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형의 실체도 존재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 오늘날 우리가 악마, 요정, 천사라고 부르는 사악하거나 우호적인 존재가 모두 그런 예다. 애니미스트는 인간과 다른 존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말이나 노래, 춤이나 의식을 통해 이들 모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유신론(Theism,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theos’에서 유래했다)이란 우주의 질서가 인간과 신(소수의 천상의 존재로 구성된 집단) 사이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견해다. 현대 이전의 농업종사자들이 대체로 유신론자였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 말만으로는 개개의 상세한 특징을 알 수는 없다.
‘유신론자’라는 표제에는 18세기 폴란드의 유대교 랍비도 들어 있고, 마녀를 화형하는 17세기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도 포함되며, 15세기 멕시코의 아즈텍 사제, 12세기 이란의 수피 신비주의자, 10세기의 바이킹 전사, 2세기의 로마 병사, 1세기의 중국인 관료도 들어 있다. 이들 각각은 다른 이들의 신앙과 관습을 기괴한 이단으로 보았다.
고대 영성의 상세한 특성을 서술하려는 시도는 어느 것이나 매우 사변적이게 마련이다. 길잡이로 삼을 증거가 거의 없는 데다 조금 있는 증거(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의 인공물과 동굴벽화)는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인들의 감정에 대해 안다고 자처하는 학자들의 이론은 석기시대 종교보다 그 주창자의 편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무덤의 유물, 동굴벽화, 뼈로 만든 조각상의 의미를 침소봉대하기보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애니미스트였을 것으로 가정하지만, 이것이 알려주는 정보는 많지 않다. 그들이 어느 정령에게 기도했는지, 어떤 축제를 기념했는지, 어떤 금기를 지켰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지어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일부 유물이나 벽화(라스코 동굴 벽화가 대표적)들만으로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의 종교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고 벽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 아래 두번째 그림에서 새의 머리를 하고 성기를 발기시킨 남자가 들소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밑의 또 한 마리의 새가 있는 그림에 대한 학자들의 추론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단지 학자들의 선입견에 대해 알려주는 로르샤흐 심리테스트 같다.
또한 거의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또 하나의 영역은 수렵채집인의 사회정치적 세계이다. 학자들은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사유재산이 존재했는지, 핵가족이었는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일부 집단은 가장 못된 침팬지 집단처럼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긴장되어 있고 폭력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에 비해 다른 집단들은 보노보 무리처럼 느긋하고 문란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냐 평화냐
마지막으로 아주 까다로운 질문이 남는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전쟁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부 학자들은 고대 수렵채집 사회는 평화로운 천국이었으며 전쟁과 폭력이 시작된 것은 사람들이 사유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농업혁명 이후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고대 수렵채집 사회가 특히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은 모두 공중에 지은 누각에 지나지 않고, 이들을 지상과 연결하는 줄은 가늘다. 빈약한 고고학적 증거와 오늘날의 수렵채집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만 있을 뿐이다.
연구자들이 규모가 크고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조밀한 독립 수렵채집인을 관찰할 수 있었던 기회는 단 두 차례뿐으로, 19세기 북미 북서부와 19~20세기 초반 호주 북부에서였다. 미국과 호주 원주민 문화는 둘 다 무력충돌을 자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무력충돌이 ‘영원히’ 지속된 상황이었는지 유럽 제국주의의 여파인지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한편 고고학 유물은 드물고 불분명하다. 수만 년 전에 발생했던 전쟁에 대해 말해주는 단서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요새와 성벽은 물론 포탄 껍데기도 없었다. 칼이나 방패도 없던 시절이다. 원시적인 창날은 전쟁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사냥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유골 화석이라고 해서 해석하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부러진 뼈는 전쟁에서 다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사고를 당한 탓일 수도 있다.
수렵채집인들의 종교와 사회구조가 매우 다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폭력 사용률 역시 매우 다양하게 분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람들은 평화와 고요를 즐긴 반면 다른 무리들은 격렬한 폭력으로 고통을 당했을지 모른다.
침묵의 커튼
고대 수렵채집인들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어려운 수준이라면, 특정한 사건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다.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살고 있는 계곡에 처음 도착했다고 치자. 그때부터 여러 해에 걸쳐 숨 막히는 역사의 드라마가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접촉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몇 안 되는 뼈 화석과 한 움큼의 석기만 남아, 학자들의 면밀한 심문에도 침묵만 지킬 뿐이다.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침묵의 커튼은 너무 두꺼워서, 이런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학자들은 합리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 가능한 질문만 하는 경향이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조사도구가 발견되지 않는 한, 아마도 우리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 어떤 정치적 드라마를 겪었는지를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인류 역사의 6만 ~ 7만 년을 “그 시기에 살았던 인류는 중요한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일축하고 싶어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요한 일을 많이 행했다. 특히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주변 세계를 크게 바꿔놓았다. 사피엔스의 방랑하는 무리들은 동물계가 이제껏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홍수
인지혁명 이전의 인간 종은 모두가 아프로아시아 육괴(아프리카와 아시아가 합쳐진 고대륙)에서 살았다. 물론 가까운 거리의 섬 몇 곳은 헤엄을 치거나 급조한 뗏목을 타고 건너가서 정착하기도 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소순다 열도의 플로레스 섬은 85만 년 전에 이미 거주지로 개척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큰 바다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었으며, 아무도 아메리카, 호주 혹은 더욱 먼 곳인 마다가스카르, 뉴질랜드, 하와이에는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인지혁명'의 결과 사피엔스는 기술과 조직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 그 덕분에 아프로아시아를 벗어나 약 45,000년 전에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어떤 경로고 건너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거나 아폴로 11호 탐험대가 달에 착륙한 것 못지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선구자들이 그 신세계에서 저지른 짓이다. 최초의 수렵채집인이 호주 해안에 발을 들인 순간은 호모 사피엔스가 먹이사슬의 최상층부로 올라가고 이후 40억 년 동안의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이 된 순간이었다. 그 이후 몇천 년이 지나지 않아 호주에서 몸무게 5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동물은 사실상 모두 사라졌고 작은 동물도 대량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탓이었을까?
당시 호주에는 몸무게 2백 킬로그램에 키 2미터인 캥거루, 대륙에서 몸집이 가장 큰 포식자였던 호랑이만 한 유대류(캥거루처럼 주머니가 있다) 사자 등이 있었고, 몸집이 큰 코알라가 나무 위에 있었고 용 같은 도마뱀과 5미터 길이의 뱀들이 덤불 속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무게 2.5톤에 이르는 디프로토돈도 숲속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기소내용대로 유죄
일부 학자들은 우리 종에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한다. 이런 경우 전형적인 희생양인 기후변화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결백하다고 믿기는 어렵다. 기후변화의 누명을 약화시키고 우리 조상들을 호주의 대형동물 멸종과 연루시키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45,000년 전쯤 호주의 기후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띌 만큼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다. 지난 1백만 년 동안 평균 10만 년마다 빙하기가 있었다. 최후의 빙하기는 75,000년~15,000년 전이었다. 빙하기 치고 특별히 혹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간 중 두 차레의 절정기가 있었는데, 처음은 약 7만 년 전이었고 그다음은 2만 년 전쯤이었다.
대형 디프로토돈은 150만 년도 더 전에 호 주에 등장해 열 차례가 넘는 빙하기에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45,000년 전에 사라졌을까? 물론 디프로도돈이 이 시기에 사라진 유일한 대형동물이었다면 이는 우연이었을 것 이다. 하지만 디프로토돈과 함께 호주 대형동물군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라졌다. 증거는 정황에 불과하지만, 사피엔스가 마침 이들 동물이 추위로 죽어가고 있던 시기에 호주에 도착한 것뿐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둘째, 기후변화가 대량멸종을 초래할 경우 해양 생명체는 육지 생명체 못지않게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45,000년 전 해양 동물의 개체수가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개입이 원인이라고 하면 멸종의 물결이 왜 육상의 대형동물군을 쓸어버리면 서도 인근 바다의 동물상은 내버려두었는지에 대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항해술이 일취월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주로 육상의 위협이었으니까.
셋째, 호주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대량멸종이 그다음 수천 년간 인류가 외부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 정착할 때마다 거듭거듭 벌어졌다. 이런 경우들에서는 사피엔스가 유죄라는 것을 반박하기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약 45,000년 전의 소위 '기후변화'에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던 뉴질랜드의 대형동물군은 인류가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북극해 랭겔 섬(시베리아 연안에서 2백 킬로미터 북쪽)의 매머드도 이와 유사한 운명을 맞았다. 매머드는 지난 수백만 년간 북반구 대부분 지역에서 번성했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에는 유라시아로 다음에는 북미로 퍼져나가자 매머드들은 계속 후퇴했다. 1만 년 전이 되자 랭겔 섬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매머드를 단 한 마리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랭겔 섬의 매머드도 약 4천 년 전 인간이 섬에 처음 도착한 바로 그 시기에 갑자기 사라졌다.
추가 증거가 없는 한, 세 가지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가 맞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나 뉴질랜드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곳에 아직도 유대류의 사자, 디프로토돈, 대형 캥거루가 살고 있었으리라고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약 16,000년 전 인간 종으로서는 최초로 서반구 대륙에 도착하였고 시베리아를 건너 약 14,0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2천 년이 지나지 않아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대형동물들이나 유일무이한 종 역시 대부분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서는 고대 낙타 뼈 화석과 대형 땅나무늘보의 석화된 변 등을 근거로 결정적인 책임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노아의 방주
호주와 미 대륙의 대량멸종,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로아시아에 퍼져나가면서 일어났던 그보다 소규모의 멸종들, 가령 다른 모든 인간 종들의 멸종 그리고 고대 수렵채집인이 쿠바 같은 외딴 섬에 정착했을 때 일어난 멸종들을 다 합하면, 사피엔스의 첫 번째 이주의 물결은 동물계에 닥친 가장 크고 신속한 생태적 재앙이었다는 결론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털복숭이 대형동물들이었다. 인지혁명이 일어날 즈음 지구에는 몸무게 45킬로그램이 넘는 대형동물 약 2백 속이 살고 있었다. 농업혁명이 일어날 즈음 이들 중 남은 것은 약 1백 속에 지나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바퀴, 문자, 금속도구를 발명하기 한참 전부터 지구 대형동물의 절반가량을 멸종으로 몰아갔다 이런 생태적 재앙은 농업혁명 이후에도 규모만 작아졌을 뿐 수없이 재연되었다.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2의 물결이 왔고, 이 사실은 오늘날 산업활동이 일으키고 있는 멸종의 제3의 물결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 만일 좀 더 많은 사람이 멸종의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에 대해 안다면, 스스로가 책임이 있는 제3의 물결에 대해서 덜 초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종을 절멸시켰는지를 안다면, 아직 살아남은 종들을 보호하려는 의욕이 좀 더 생길 것이다.
이것은 특히 바다의 대형동물들에게 유효한 문제다. 바다의 대형동물들은 육지의 대형 동물들에 비해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털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종이 산업공해와 인간의 해양자원 남용 탓에 멸종의 기로에 서 있다. 사태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면, 고래, 상어, 참치, 돌고래는 디프로토돈, 땅늘보, 매머드의 선례를 따라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세상의 대형동물 중 인간이 초래한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직 인간 자신과 노아의 방주에서 노예선의 노잡이들로 노동하는 가축들뿐일 것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