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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 이야기 (5)

권력, 사랑, 믿음

by Andy강성 Mar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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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사회와 종교의 틀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진 후 이 틀 안에서 중세 문화가 난만하게 발전했다. 중세 사람들은 사랑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신성함을 추구했다. 왕과 왕비, 수도사와 기사, 시인과 예술가들의 곡진한 삶의 이야기가 날줄과 씨줄이 되어 역사를 수놓았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남성들만의 독무대가 아니다. 뛰어난 여성들의 파란만장한 활약 또한 눈부시다. 알리에노르의 극적인 삶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왕비였고, 두 국왕의 어머니였으며, 십자군전쟁에 참전하고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끈 여전사이면서 또한 새로운 기풍의 사랑의 문화를 개척한 여인이었다.

이와는 달리 잉글랜드의 헨리 2세처럼 제국 수준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가열차게 투쟁하고 때로 교회와 정면층돌했으나, 그 못지않게 야심이 넘치는 아들들과 분란에 싸여 비참한 최후를 맞는 극적인 사례도 있다. 다른 한편 현대인은 거의 이해하기 힘든 성인의 경지에 이른 지극한 신앙심으로 통치하고, 더 나아가서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직접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다가 결국 아프리카에서 목숨을 잃은 루이 9세 같은 비범한 인물들도 만나게 된다.

1,000년 전 사람들의 삶은 우리의 사고와 느낌을 초월하는 요소들이 있다. 이 시대는 또한 '성당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온 사회가 협력하여 하느님의 집을 정성껏 지은 시대이기도 하다. 고딕 성당의 효시가 되는 생드니 성당, 생트샤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성가 교회 등은 모두 그 자체로 찬란한 중세의 역사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왕국 건설과 궁정풍 사랑을 열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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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알리에노르(Aliénor d’Aquitaine, 1122~1204)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 또 있을까. 1137년,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 중 사망하자 두 딸 중 맏이인 15세의 알리에노르가 계승자가 되었다. 당시 아키텐 지방은 오늘날의 가스코뉴, 푸아투, 리무쟁 지역을 포괄하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로서, 보르도가 중심지이다.


알리에노르와 결혼하는 사람에게 프랑스의 4분의 1이나 되는 땅이 귀속되니, 그녀의 결혼은 당대 초미의 관심사였다. 임종이 가깝던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재위 1108~1137)가 선수를 쳐서 알리에노르를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며칠 뒤 사망했다. 새신랑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재위 1137~1180)가 되었고 알리에노르는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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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7세 출처 구글 이미지]

1147년 국왕이 2차 십자군전쟁에 참가했을 때 놀랍게도 왕비가 동행했다. 다마스쿠스 함락을 목표로 했던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는데, 사람들은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알리에노르를 거론했다. 국왕이 왕비를 데리고 오자 다른 귀족들도 부인을 동반했고 시녀들도 많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순결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십자군 전사들의 정신 자세가 흔들렸고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귀국하면서 루이 7세는 알리에노르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1152년 두 사람은 갈라섰고, 28세의 알리에노르는 또다시 뭇 왕족과 귀족들이 선망하는 ‘돌싱’이 되었다. 그녀를 문자 그대로 납치해서 강제 결혼을 시도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푸아티에(Poitiers)에 위치한 자신의 성으로 여행하는 도중 두 차례나 대귀족들의 공격을 당한 것이다. 당시 시대상이 그렇게 험했다.


알리에노르는 차라리 자신이 배우자를 직접 고르기로 했다. 노르망디 공작이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 후보자인 헨리에게 자신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 처지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헨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곧 결혼식을 치렀다.


2년 후인 1154년 두 번째 남편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로 즉위하자, 알리에노르는 프랑스 왕비에 이어 이번에는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합으로 잉글랜드는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 내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국으로 커졌다. 오베르뉴에서 동부 아일랜드까지, 피레네산맥에서 스코틀랜드 변방까지 포괄한 당시 잉글랜드를 두고 역사가들은 ‘앙주제국’ 또는 ‘플랜태저넷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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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초기에 두 사람은 아주 잘 지냈고, 왕비는 국왕을 완벽하게 보조했다. 국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전투에 임하면 알리에노르는 국왕의 재가 없이 왕령을 발했고, 재정 지출을 명했으며, 국민들의 탄원을 수리하여 결정했다. 헨리 2세는 알리에노르에게서 5남 3녀의 자손을 보았을 뿐 아니라, 여러 연인들 사이에서 숱한 사생아를 낳았다.


이 일로 부부 사이에 틈이 생겼다. 국왕이 병이 들어 곧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처럼 유서를 썼다가 무효화하고 다시 권력을 틀어쥐자 실망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녀 역시 아들들 편에 섰다. 더 안 좋은 일은 하필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탁했다는 점이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알리에노르는 남장을 하고 전 남편 있는 곳으로 도주하려다가 잡혀서 솔즈베리성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남편 헨리 2세가 죽은 1189년까지 15년이나 갇혀 있다가 겨우 자유를 되찾았다. 왕위는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 재위 1189~1199)가 물려받았다. 알리에노르가 67세 때의 일이다. 이번 국왕도 십자군 열기에 싸여 1190년 성지로 떠났고, 알리에노르는 다시 정치에 간여했다.


국왕의 동생 존은 형이 없는 틈을 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와 내통하여 왕권을 노렸고, 알리에노르는 이에 맞서 아들 리처드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 그런데 리처드가 십자군전쟁에서 돌아오는 도중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알리에노르는 아들을 구하는 데 필요한 신속금身贖金 10만 마르크를 국민들에게서 쥐어짜냈다. 은 20톤에 해당하는 이 금액은 잉글랜드의 2년 치 재정과 맞먹는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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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년 리처드가 포로 상태에서 풀려나 귀국하자 알리에노르는 리처드와 존 두 형제를 화해시킨 다음 퐁트브로(Fontevraud) 수도원으로 물러나 경건한 노후를 보냈다. 그러나 5년 뒤인 1199년 이번에는 리처드가 프랑스 중부의 샬뤼Châlus성을 포위하다가 화살을 맞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국왕은 병상에서 어머니를 찾았고, 알리에노르는 곧 현장으로 달려갔다. 결국 리처드는 어머니의 품에서 죽었다.


알리에노르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는데, 그중 삼남 리처드를 무척 사랑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불렀지만 리처드만은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라 지칭했으며, 종종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리처드 역시 그녀를 하느님 다음으로 신뢰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알리에노르가 남편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채우지 못한 애정을 리처드에게 쏟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추정한다.

로빈 후드를 다루는 작품 중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헨리 2세 시대로 설정하는 작품에서는 로빈 후드를 사면해주고 아들 리처드 1세와 연결해주는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리처드 1세 ~ 존 왕 시대로 늦춰 잡는 작품들에서는 잠시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75세의 나이에 알리에노르는 다시 왕위 계승 문제에 간여했다. 이번에는 아들 존과 손자 브르타뉴의 아서(Arthur de Bretagne) 사이의 다툼에 끼어 아들 존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년의 모후는 군을 진두지휘하여 아서 측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고, 끝내 존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패배한 아서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1204년, 알리에노르는 8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시신은 남편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 사자심왕이 이미 묻혀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했다. 이해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가 잉글랜드로부터 노르망디와 앙주Anjou를 빼앗음으로써 ‘플랜태저넷제국’은 사실상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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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궁정]

알리에노르가 1168년부터 1173년까지 푸아티에에 머무는 동안 기사도와 음유시인 문화를 진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12세기 후반의 문헌 작가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궁정 사랑의 기술>에서는 알리에노르가 루이 7세와 자신의 딸 마리, 나르본 자작부인 에르멩가르드, 플란데런 백작부인 이자벨 및 여러 여성과 함께 연인들의 다툼을 듣고 낭만적인 사랑의 행위를 중심으로 한 법정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 21건의 사례를 기록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결혼 생활에서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성들에게 제기된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다만 이 시대에 새로운 문학과 새로운 문화, 무엇보다 새로운 유형의 사랑이 태동한 것은 분명하다. 내 마음에 끌리는 상대를 내가 고르는 "사랑은 언제나 존재했던 게 아니라 12세기에 발명된 것"이라고 한 역사가는 말한다. 배우자에 대한 의무, 가족 간의 연대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소중한 내밀한 사랑이 꽃피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상류층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이지만, 이런 사랑은 개인의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여성이 억압적인 착취의 대상, 아이 낳는 육체 이상의 의미를 띠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가 알리에노르라는 한 개인의 이름을 차용하여 중세 유럽의 한켠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최강 국왕 헨리 2세와
플랜태저넷제국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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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재위 1154~1189)는 '제국'에 준하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뛰어난 왕이었다. 프랑스 앙주 출신의 이 인물이 잉글랜드 왕이 되기까지에는 실로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 1120년경 당시 국왕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두 지역의 통치를 위해 영불해협을 자주 건너다녀야 했다.


이해 11월, 왕자 두 명과 귀족 300명이 탄 블랑슈-네프Blanche- Nef호가 암초를 들이받고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졸지에 왕위 계승자인 두 아들을 잃은 것이다. 남은 자식은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온 딸 마틸다 Matilda밖에 없었다. 헨리 1세는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략적인 고려를 한 끝에 마틸다를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과 재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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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정해진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았 다.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한다는 선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후보들이 여럿 나타났다. 선왕의 조카인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런던 시민과 일부 귀족을 설득하고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기름 부음 의식'을 받아 왕관을 썼다. 선왕이 임종할 때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지명했노라는 허위 사실까지 유포 했다.


이제 잉글랜드는 마틸다파와 스티븐파 사이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20년 가까이 무법천지가 이어지자 사람들은 정당한 국왕의 올바른 통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내전을 벌이던 양측도 오랜 투쟁에 지처 타협에 들어가 1153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다.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계승자로 지정하고 국정에 미리 참여하도록 했다. 다음 해 스티븐이 죽자 헨리 2세는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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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여러 차례 운 좋게 영토를 늘려갔다. 1151년 부친의 사망으로 앙주와 멘Maine 백작이 되었고, 다음 해 아키텐의 알리에노르와 결혼하여 그녀가 유산으로 받은 프랑스 중서부 영토도 차지했다. 이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오베르뉴에서 동부 아일랜드까지, 피레네산맥에서 스코틀랜드 변방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플랜태저넷제국(혹은 앙주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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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로 꼽혔다. 그 자신도 제국 통치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잉글랜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이었다.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으며, 영어는 알아듣기는 하나 말은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알리에노르 역시 프랑스어가 모국어이고 영어를 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오히려 국내 사정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사법권을 확실하게 장악해서 그동안 지방 영주 법정에서 다루던 많은 사건들을 국왕 순회 법정으로 넘기도록 조치했다. 전국에 동일한 법률이 적용되면서 점차 관습법common Law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헨리 2세가 '영국 관습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그의 치세 중 일어난 중요 사건으로 1170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살해 사건이 있다. 국왕은 즉위 직후 수도사 출신인 베켓을 천거받았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베켓은 치세 초기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거의 친구처럼 잘 지내던 두 사람은 이후 원수 관계로 돌변했다.


정치와 종교 간 갈등은 재판권 관할 문제로 폭발했다. 원래 교회 법정은 종교 문제만 담당해야 하지만 베켓은 점차 더 많은 재판을 자기 관할 아래 두려 했다. 그러다가 헨리 2세의 힘에 밀린 베켓은 프랑스로 도주해서는 교황에게 탄원하여 국왕을 파문에 이르게 했다. 별 수 없이 국왕은 베켓을 찾아가 타협해야 했다. 힘을 되찾은 베켓은 곧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그동안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던 주교들을 파면하려 했다.


프랑스에서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는 '내가 한낱 수도사의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신하들 중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자가 없다'며 탄식했다. 이럴 때 과잉 총성하는 자들이 꼭 문제를 일으키는 법. 네 명의 기사가 아무 말 없이 잉글랜드로 가서 캔터베리 대 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헨리 2세는 전 유럽에 걸쳐 악마 소리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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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이번에는 집안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헨리는 자신의 사후에 영토를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히려 부모 자식들 사이, 형제들 사이에 분란을 가져왔다. 아들 리처드 편을 드는 왕비 알리에노르는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을 끌어들여 남편과 전투를 벌였다. 막판에는 부왕이 산 속 오솔길로 도주하는데 그 뒤를 아들이 추격하는 사태까지 벌어 졌다.


중병에 걸려 시농(Chinon)성에 누워 있을 때 신하가 새로운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왔다. 맨 위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막내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존도 아버지의 힘이 약해지자 반역에 나선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이 세상일을 생각할 기력도 없노라" 하는 말을 마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얼마 후 별세했다.


국왕의 최후 모습도 비참하기 그지없다. 발뒤꿈치에서 시작된 병세가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결국 온몸이 불타는 듯했다. 국왕은 고통에 신음하며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왕자 리처드는 왕위를 빨리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늙은이가 코미디를 벌이고 있다"고 떠들고 다녔 다. 그즈음이면 신하들이 거의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침내 왕을 피를 토한 뒤 죽었다(이로 인해 리처드가 헨리 2세를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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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심왕 리처드]

사자심왕(獅子心王, Lionheart, Cœur de Lion) 리처드는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에서 출생했다(아직 이 도시에 대학이 없던 시절이다). 당시 부왕 헨리 2세가 24세, 어머니 알리에노르는 35세, 손위 형 헨리가 두 살이었다. 이후 동생 제프리와 존이 태어나서 4형제가 되었다(첫 아들 윌리엄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리처드는 자기 집안이 악마의 후손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곤 했는데, 이 가족들 간에 일어난 일을 보면 그 말에 동의하고 싶어진다. 리처드가 17세였을 때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어머니의 지지를 받고 아버지와 전투를 벌였다. 18개월이나 전투가 지속된 끝에 겨우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헨리와 제프리는 이번에는 리처드가 공작으로 통치하고 있던 아키텐으로 쳐들어왔고, 덩달아 이 지역 귀족들도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다(1183). 그렇지만 이때쯤이면 리처드는 강력한 전사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침략자와 반역자들을 진압하고 포로들을 남김없이 살해했다.

그런데 이해에 형 헨리가 이질로 사망하여 차남인 리처드가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국왕 헨리 2세는 리처드가 왕위를 받는 대신 아키텐 지방을 막내 존에게 양보하라고 지시했지만, 리처드는 거부했다. 더 나아가서 어머니의 전 남편인 루이 7세의 아들 필리프(프랑스 왕 필리프 오귀스트)와 동맹을 맺어 세력을 강화했다.

1189년 둘이 힘을 합쳐 부왕 헨리의 군대를 격파했다. 부왕 헨리 2세는 리처드를 왕위 계승자로 정식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 바로 이틀 뒤 헨리 2세가 사망해서, 리처드는 곧바로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의 지위를 차지했다. [출처: 나무위키]


신성하지만 가혹했던
성왕 루이 9세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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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9세(재위 1226~1270)보다 신심 깊은 왕이 또 있을까? 그는 십자군전쟁에 두 차례나 직접 참전하여 이슬람 세력과 싸우다가 끝내 북아프리카에서 죽었고, 교황청은 이를 기려 그를 성인聖人으로 시성했다. 국왕이자 성인인 루이 9세는 성왕(聖王, 생루이Saint Louis)으로 불린다. 성스러운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어떠했을까? 지상천국이 도래했을까?


1226년 부왕 루이 8세가 사망했을 당시 루이는 고작 열두 살.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Blanche of Castile가 섭정을 맡았다. 루이에게 한량없이 깊은 신앙심을 불어넣은 분이 바로 어머니다. ‘네가 죄를 짓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 발밑에 쓰러져 죽는 걸 보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고,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위협에 늘 대비하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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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또한 프란체스코 성인의 감화를 받아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옷과 음식을 최대한 검소하게 하는 한편, 궁정에 빈민들을 데려와 몸소 세족식을 하고 함께 식사를 했다. 나병 환자와 맹인을 돕는 시설과 매춘부를 교정하는 시설도 지었다. 다른 한편 신앙의 적은 철저히 억압했다. 예컨대 신성모독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혀와 입술을 잘라냈다.


루이 9세가 30대 중반에 십자군전쟁 참전을 결정한 것은 죽음 직전까지 간 경험과 관련이 있다. 1244년 겨울, 그는 괴질에 걸려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몇 주 후 기적같이 완쾌했다. 하느님의 뜻으로 생명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국왕은 감사의 표시로 십자군원정을 결정했다. 당장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떠나지 못했지만, 4년 후인 1248년, 2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이곳의 이슬람 세력을 무찌른 후 성지로 행군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무모한 군사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신앙의 적을 무찌르기는커녕 오히려 포로로 잡혀 4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내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 후 4년 가까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분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던 중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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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두 번째로 십자군원정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그렇지만 국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자금 사정도 안 좋고, 이미 십자군 열기가 많이 사그라져서 동맹을 구하는 일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미 50대에 들어선 국왕 자신의 건강 상태도 문제였다.


1267년 아들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 국왕은 이미 이질에 걸린 상태였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였다. 고대 카르타고 유적지 부근에 캠프를 차리고 국왕의 동생 샤를 당주Charles d’Anjou가 지휘하는 응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 속에 이질에 걸린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왕자 장 트리스탕이 쓰러졌고, 곧이어 국왕 자신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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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사망한 후 프랑스 전역에서 성인 추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결국 30년도 안 지난 1297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국왕 자신은 성스러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종교 갈등과 전쟁, 인종 갈등으로 얼룩진 그의 치세는 선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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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샤펠]

성왕 루이가 후대에 남긴 중요한 유산으로 파리 시테섬에 있는 생트샤펠(Sainte Chapelle)이 있다. 이곳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이마에 둘러 있던 가시관을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소성당이다. 원래 이 가시관은 비잔티움제국의 국보였다. 이 성물이 파리에 온 계기는 말썽 많은 4차 십자군전쟁이다. 1204년, 비잔티움제국을 돕겠다며 떠난 십자군이 오히려 이 나라를 일부 정복하고 소위 라틴제국을 세워 50년 넘게 통치했다(1204~1261).

그러던 중 라틴제국 황제 보두앵 2세가 재정이 악화되자 베네치아의 은행가에게 거액을 빌리면서 가시관을 담보로 내놓았다. 이 소식을 접한 성왕 루이는 13만 5,000리브르라는 엄청난 돈을 갚아주고 이 성물을 파리로 가져왔다. 이로써 파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임을 천명하게 됐다.

가시관뿐 아니라 십자가 일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예수의 입에 물렸던 해면海綿 등을 함께 확보한 성왕 루이는 이 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 예배당인 생트샤펠을 지었다. 이 건물은 13세기 고딕 건축의 보석으로서, 특히 벽면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구약의 첫 부분부터 신약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1,100장면을 표현한 후, 마지막 부분에 성 유물을 파리로 모셔 오는 루이 국왕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가시관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보존하며 특별 미사 때 신자들에게 공개했다. 2019년 노트르담 성당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소방관들은 매뉴얼에 따라 가장 먼저 가시관을 구해 가지고 나왔다.


고딕 성당,
국왕이 인도하는 신성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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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성당(Basilique royale de Saint-Denis)의 역사는 영험한 성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250년경, 드니(Denis)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파리에 초대 주교로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드니는 이교를 신봉하던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로마제국 관리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되었다. 그가 순교한 몽스 마르티스Mons Martis(‘순교자 언덕’)는 후일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된다.


이때 드니 성인은 천사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부여받아,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받쳐 들고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적을 선보였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다. 잘린 머리의 입에서는 계속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몽마르트르 언덕을 넘어 파리 북쪽 외곽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 쓰러진 곳이 현재의 생드니 성당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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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후, 파리의 수호 성녀 주느비에브(Geneviève)가 이 근처의 땅을 얻어 수도원 성당을 지었고, 7세기에는 메로빙거왕조의 다고베르트 1세(605?~639)의 명령으로 드니 성인의 유물들을 안치하여 이곳이 순례 장소로 각광받았다. 다고베르트 1세 자신이 사후에 이곳에 묻힌 것을 계기로 이 성당은 프랑스 왕실의 묘소가 되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나 인구가 크게 늘면서 기존 성당이 너무 협소해지자 더 큰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로 인해 각지에 성당 재건축 붐이 일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성당들이 지어졌다. 생드니 성당이 바로 이 고딕 양식 건축의 효시에 해당한다. 고딕Gothic이라는 용어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Goth에서 유래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낸 이 말은 원래 중세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엄하고도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은 당시 사람들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르Suger 수도원장이다. 그는 1122년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후 1151년에 죽을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 직을 수행했으며, 동시에 루이 6세와 루이 7세 두 국왕을 위해 고문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에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가 정색을 하고 비판을 가했다. 수도자와 신자는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생드니에서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렸지만, 신의 것을 신에게 돌리지는 않았노라.”


베르나르와 쉬제르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생드니 성당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쉬제르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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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은 종교의 힘을 끌어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구자들은 고딕 성당 건축의 첫 번째 흐름이 1135~1225년에 파리 주변에서 일었다가, 그 후 이차적으로 스트라스부르, 리옹, 알비 등 더 먼 지역으로 퍼져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왕 권력의 확산과 고딕 성당의 건립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국왕 42명, 왕비 32명, 대귀족 63명, 충신 10명이 잠들어 있는 생드니 성당은 왕실이 주도한 고딕 혁명의 선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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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파괴]

생드니 성당은 프랑스 왕실과 연관된 핵심 장소라는 이유로 프랑스혁명 당시 공격을 당했다. 혁명이 정점에 이른 1793년, 국민공회(1792~1795년 존립했던 혁명 의회)는 지난 시대 ‘왕들의 끔찍한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언한 마당에 지난 왕정을 상기시키는 기념물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르트랑 바레르 의원의 발의로 ‘혁명적 파괴’ 운동이 시작되었다.

생드니 성당 건물 자체도 끔찍한 파괴를 겪었다. 한동안 성당 건물은 ‘이성의 전당’이라는 인위적 혁명종교의 숭배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곧 폐허로 변했다. 생드니 성당 건물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 다시 손을 보아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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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800년 된 돌집이 만들어내는 황홀한 빛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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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섬은 종교적으로 늘 중요한 성지였다. 켈트 시대에 이곳은 드루이드 사제가 처녀를 희생으로 바치던 곳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와 주피터 신을 기리는 신전을 지었지만 켈트 신들도 함께 모셨다. 기독교화 이후에는 생테티엔Saint-Etienne(스테판 성인) 성당이 자리 잡았다. 이 성당이 너무 협소해지자 12세기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대성당을 증축한 것이다.


파리에 성모를 기리는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한 국왕은 루이 7세다. 그는 왕국의 수도에 걸맞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국고에서 거액을 지원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왔다. 이슈트반 1세(재위 1000~1038)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헝가리는 아예 나라 전체가 마리아의 봉토封土라고 선언했고, 파리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건축한다고 하자 기꺼이 헌금을 보내왔다.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축성과 함께 기공식을 한 이후 200년에 걸쳐 건축을 해나갔다. 돌을 다듬어 벽, 기둥, 아치를 쌓아 올리고 성모·성부·성인·구약시대 족장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붙이는 일은 그야말로 돌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작업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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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이 성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재위 1610~1643)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는 서원을 했다. 마침내 장래에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는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의 상, 반대쪽에는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하는 루이 14세의 상을 세웠다.


이 성당에서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고, 1909년 잔 다르크를 시성諡聖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이 노트르담으로 옮겨온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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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대화재로 큰 손상을 입기 전, 노트르담 대성당은 분명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였다. 노트르담 성당 건축은 서양 음악의 새로운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특히 1403년 이후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노트르담 성당의 ‘대오르간 담당자titulaires des grands orgues’는 올리비에 라트리Olivier Latry 같은 세계 최정상급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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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레토의 산타 카사,
자유와 해방을 지켜주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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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안코나(Ancona)에서 2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로레토 지방에는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이탈리아어로 바실리카 델라 산타 카사Basilica della Santa Casa(영어로는 Basilica of the Holy House)라 하는데, 우리말로는 ‘성가聖家 교회’ 정도로 부르면 될 듯싶다.


이 집은 성모 마리아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했으며(수태고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집이다. 예수의 승천 이후에는 교회가 되어 사도들이 내부에 제단을 설치하고(‘사도의 제단Altar of the Apostles’이라고 부른다), 특히 예수의 부활 이후에 베드로가 이 제단에서 최초의 성체성사Eucharist를 올렸으니, 말하자면 최초로 미사를 드린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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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에 의하면 1291년 이슬람군이 십자군 세력에 반격을 가하여 나사렛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험에 처하자, 천사들이 집 전체를 들어 올려 달마티아(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 지역)로 옮겨다 놓았다. 테르사토Tersatto(현재 크로아티아의 트르사트Trsat) 지방의 언덕 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으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도둑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커지자, 1294년에 천사들이 다시 이 집을 들어 올려 이번에는 아드리아해를 넘어 이탈리아의 안코나 인근 지역으로 옮겨놓았다. 이후 몇 번의 수난 이후 이번에는 집 스스로 날아서 현재의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전승에 없지만 후대 사람들은 1296년으로 이야기한다.


로레토 성당은 여러 의미에서 가톨릭 유럽을 호위하는 요새 역할을 맡아 왔다. 1453년 이슬람 세력(오스만튀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잔티움제국 몰락이 큰 충격을 안겨주던 시기에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로레토 성당은 튀르크 세력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보루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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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이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 중 하나로 치는 것이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인데, 가톨릭 신도들은 이 승리 또한 로레토의 마리아 덕분이라고 해석했다. 튀르크 배에서 노 젓는 죄수로 살다가 가까스로 해방된 사람들 4,000명이 족쇄와 수갑을 바친 일이 있는데, 이것을 녹여 성당의 철문(그릴)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로레토의 성모는 자유와 해방을 지켜주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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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레토의 성모]

지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겪은 가장 큰 압박 중 하나는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불임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 또한 로레토 성당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수많은 여성이 이곳에 찾아와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고, 이왕이면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다. 특히 왕실에서는 왕자의 탄생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므로 더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와 왕비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일 것이다. 이 부부는 결혼하고 23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애를 태웠다. 1630년부터 왕비는 로레토 성당의 마리아에게 정성을 들였다. 드디어 임신이 되자 더욱 조바심을 냈다. 태어날 아이가 반드시 아들이어서 왕위를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욱 로레토 성당에 의탁했다. 진정 성모의 은덕일까. 장래 루이 14세가 될 아들이 탄생했다.

국왕 부부는 보답으로 엄청난 선물을 했다. 조각가 자크 사라젱(Jacques Sarrazin)에게 주문하여 은으로 된 거대한 천사가 금으로 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을 만들어 1643년 3월에 로레토 성당에 전달했다. 이 조각상은 검은 성모상 앞에 세워졌다. 프랑스 왕실의 엄청난 선물은 감사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프랑스의 위엄을 과시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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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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