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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의 야만인들 (1)

Barbarians at the gate

by Andy강성

이 책은 1989년에 「월스트리트저널」의 두 기자(記者)인 브라이언 버로(Bryan Burrough)와 존 헬리어(John Helyar)가 그 전 해에 이루어진 'RJR 나비스코(Nabisco)'의 LBO(Leveraged Buyout) 딜에 대해 심층 탐사하여 공동출간한 책이다. 이 LBO 딜은 당시까지 기업 M&A 역사상 최대 규모였는데, 이 책에서는 그 딜의 드라마틱한 전 진행 과정뿐만 아니라 대상 회사들과 KKR 등 주요 참여자들의 히스토리 등에 대해서까지 심도있게 다루고 있어 금새 M&A 업계에서 아주 유명한 필독서가 되었다.


영문 원제인 "Barbarians at the Gate: The Fall of RJR Nabisco"는, 'RJR 나비스코' LBO 딜에서 KKR과 경쟁을 했던 시어도어 J. 포스트만이 KKR의 정크본드 자금을 "가짜 쓰레기 채권"이라고 비난하면서, 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인들이 게르만족 등을 야만인(Barbarians)이라고 부른 것에 빗대어, "우리는 야만인들을 도시 문 앞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한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물론 당사자인 KKR은 이 표현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RJR 나비스코(Nabisco)'는 '오레오', '리츠' 등으로 유명한 미국 1위의 제과회사인 '나비스코'와 윈스턴, 살렘으로 유명한 담배회사 'R.J. 레이놀즈'가 1985년에 합병한 회사로 당시 기준 미국 내 19위 규모의 상장 대기업이었는데, 1987년 미국 주식 시장 붕괴 이후 암울한 주가 실적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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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스코와 RJ 레이놀즈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 상황에서 1988년 10월, RJR 나비스코의 CEO인 F. 로스 존슨(Ross Johnson)은 돌연 주당 40달러를 겨우 넘는 수준의 RJR 나비스코 주식을 주당 75달러(총액 170억 달러)에 모두 인수하여 회사를 비상장화하는 LBO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 앤드 컴퍼니(Kohlberg Kravis Roberts, KKR)가 이 거래 소식을 접하고 공개매수를 선언하며 경쟁에 참여하였고, 결국 1989년 초 이사회와 주주들을 설득하여 주당 109달러(총액으로 당시까지 기업 M&A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인 245억 3천만 달러)라는 제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회사를 장악했다.


당시 KKR의 RJR 나비스코 인수는 세 가지 차원에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십 수 년 동안 어떤 기업 인수 합병(이하 ‘M&A’)도 이 규모를 뛰어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건실한 기업을, 정크본드와 같은 빌린 돈으로 인수하는 이른바 LBO 전략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해당 기업의 근로자를 제외한 경영진 등 나머지 거래 참가자 모두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RJR 나비스코 입찰 선정 직후, 왼쪽부터 리처드 비트, 조지 로버츠, 헨리 크래비스 출처 구글 이미지]

저자들은 LBO 업계 1위 사모펀드 KKR를 필두로 금융계와 기업계 거물들이 대거 참여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던 이 인수 전쟁의 전모를 낱낱이 복원해 내면서 월스트리트의 문화와 생리, 기업 경영과 금융 산업의 극적인 변모 과정을 추적해 간다. 회사 전통보다 거래를 중시하는 새로운 인종의 출현, 기업계와 금융권을 휩쓴 인수 합병 바람, 정크 본드를 동원한 LBO 전성시대로 대변되는 ‘호황의 80년대’에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그 거래였다.


저자 브라이언 버로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는 《베너티페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 세계 비즈니스, 금융, 경제 분야 저널리즘을 대상으로 한 제럴드 로브 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저자 존 헬리어는 《월스트리트저널》 《포천》, ESPN, 블룸버그뉴스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는 투자사의 연구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이 둘은 이 책으로 함께 제럴드 로브 상을 수상했다.

[저자들, 브라이언 버로(좌)와 존 헬리어(우) 출처 구글 이미지]


[주요 등장인물]


프롤로그
로스 존슨, RJR 나비스코의 LBO를 선언하다


벌써 여러 시간째 두 사람은 플로리다 팜비치의 저택 뒤 베란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두 사람 가운데 젊은 쪽이 손님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내려온 스티븐 골드스톤(Steven Goldstone)이라는 변호사였다. 골드스톤은 진토닉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파티오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이 든 남자를 흘낏 보았다.


골드스톤은 로스 존슨이라는 이 사람의 속을 좀 더 많이 알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존슨은 너무 개방적이고, 너무 믿음직하며, 또······(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렇다, 너무 순진해 보였다. 그는 자기가 지금 막 풀어놓으려고 하는 그 힘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나 알고 있을까?


한번은 골드스톤이 물었었다.

“왜 이렇게 하려는 겁니까? 미국 기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잖아요, 돈도 더 필요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걸 한꺼번에 잃을지도 모르는 거래를 하려고 합니까? 사장님이 얼마나 큰 고통과 번뇌를 불러일으킬지 모릅니까? 사장님이 이 일을 시작하는 순간, 이사회의 이사진은 이제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가 될 수 없다고요."
[로스 존슨과 골드스톤(위), 플로리다 팜비치 해안(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존슨이 툭 뱉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거래가 당겨요······. 매력적이야. 기본적인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아요. 정말 내게는 이 한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나는 그동안 어쨌든 회사의 전용 제트기들을 대령해서 그 사람들(이사회 멤버들)을 전 세계로 태워다 줬잖아요, 그리고 온갖 혜택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줬고.”


이윽고 두 사람은 애틀랜타로 향하는 걸프스트림 제트기를 탔다. 이때 골드스톤은 존슨이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았다. 골드스톤은 미국에서 열아홉 번째로 큰 기업인 RJR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직원 14만 명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애틀랜타에서의 이사회 전 날 깜짝 발표


검은색 링컨 타운카들이 웨이벌리 호텔 앞에 멈추어 섰다. 애틀랜타의 10월 저녁 공기는 서늘하고 맑았다. 줄줄이 멈춰 서는 리무진에서 RJR 나비스코의 이사진이 내렸다. 이사들은 모두 RJR 나비스코 제트기를 타고 애틀랜타로 모였다. 회사의 정기 10월 이사회가 열리기 하루 전이었다. 보통 때는 최고경영자인 로스 존슨과 비공식적으로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애틀랜타 웨이벌리 호텔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이날은 분위기가 보통 때와 확연히 달랐다. 존슨은 모든 이사에게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 만찬 모임에 꼭 참석하라고 다짐을 받았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존슨은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RJR 나비스코를 지휘해 왔던 지난 2년의 세월을 회고했다. 수익은 50퍼센트 증가했고, 매출액도 그만큼 증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주가였다. 주식은 70달러대 초반에서 천장을 쳤던 한 해 전부터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한 해 전에 주식 시장이 붕괴한 뒤로 이들은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었다.


여기에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주주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LBO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회의장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LBO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LBO를 진행할 경우, 한 기업의 소규모 이사진은 보통 월스트리트에 있는 투자사들과 손을 잡고 대규모 차입금을 동원해 일반 주주들로부터 그 기업을 사들인다. LBO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주주들로부터 기업을 훔치는 것이며 또한 이 기업은 LBO 과정에서 떠안는 부채 때문에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LBO를 성사시킨 이사진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LBO를 통해 기업이 희생할 경우, 이들이 얻는 이득은 그 기업의 희생을 대가로 한 돈이기 때문에 추악한 돈이 될 수도 있었다. 계속해서 존슨이 말했다. “문 앞에 서성이고 있는 존재는 늑대가 아닙니다.”

존슨은 기업 사냥꾼의 충동질에 넘어가 그러는 게 아니라고 했다.


버넌 조던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시민운동 지도자이자 워싱턴의 변호사였다.

“제가 한 말씀 드리죠. 만일 그렇게 진행될 경우, 사람들은 분명 이 회사를 상대로 장난치려고 달려들 겁니다. 누군가가 나타나 당신이 사려는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이 회사를 살 수 있다 이겁니다. 졸지에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셀라니스’의 회장을 역임했던 존 매콤버였다. 그는 존슨에게 줄곧 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존슨이 대답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권과는 진도를 그다지 많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전 한 푼도 받은 게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제안에 대해 이사회가 승인을 해 주신다면, 일은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0UkJR3g_Wf-UuhPUFgs9klfJ1pI.jpeg [존 매콤버 출처 구글 이미지]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후아니타 크렙스가 발언했다.

“뭐랄까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이 꼴사나운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회사를 날려 버리는 게 말입니다. 저는 다른 회사들에도 이사로 있는데, 거기 이사회에서도 주가 문제로 계속 불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들에서는 시나리오가 달랐습니다."


찰스 휴걸이 회의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는 이사들이 따로 토론하도록 존슨과 골드스톤에게 잠시 밖으로 나가 있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또 경영진과 미리 이야기된 사람이 있습니까?”

존슨이 한 명씩 호명했다. 호리건, 제임스 웰치, 수석 법률 고문인 해럴드 헨더슨, 그리고 사외 이사이자 자문 위원인 앤드루 세이지 2세였다. 휴걸은 이들에게도 회의실 바깥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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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찰스 휴걸, 라파예트 대학의 휴걸 사이언스 센터 출처 구글 이미지]

회의가 속개되자 휴걸은 자신이 부른 법률자문인 피터 A. 앳킨스(스캐든 압스 소속)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법률적인 설명을 부탁했고, 앳킨스는 RJR 나비스코와 수많은 대형 상장 기업들이 등록되어 있는 델라웨어의 법률에 따를 때 이사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이사회에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존슨을 보자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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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은 골드스톤과 함께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이사들을 대표해서 휴걸이 말했다.

“당신 생각대로 계속 밀고 나가도록 해 줄 준비가 되었다는 게 우리 이사들의 강력한 의견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금액이 보잘것없는 수준이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주식 시장에서 최고치를 기록했던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전제될 때, 이사회는 이번 건을 당신에게 맡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계속 진행하고자 한다면, 이사회는 내일 아침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야 합니다.”


존슨이나 그의 파트너들은 RJR 나비스코의 LBO가 언론 공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RJR 나비스코가 워낙 덩치 큰 기업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기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영진의 우호적인 협조 없이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므로 언론에 공개되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회의실 위층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골드스톤과 존슨은 시어슨 리먼에서 온 팀, 즉 냉정한 전략가인 토밀슨 힐과 그의 법률 고문인 잭 너스바움을 찾았다. 존슨은 보도자료에 자기들이 생각하는 입찰 가격을 넣기를 무척 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가가 마구 뛰어오르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어슨 리먼의 '토밀슨 힐'은 예전에 했던 제안을 반복했다. '현금으로는 주당 72달러 추가로 우선주로 주당 3달러.'

[토밀슨 힐과 시어슨 리먼 허튼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존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그걸로는 명함도 못 내밉니다. 너무 낮아 보여서 안 돼요. 현금 75달러는 되어야 합니다.”

존슨의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굳이 따로 계산해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총 170억 달러······.

여태까지 시도된 LBO 역사에서 최대 규모였다. 그간 가장 컸던 거래와 비교해도 무려 세 배나 되는 규모였다.


1장
회사보다 거래가 더 좋은 새로운 인종의 출현


로스 존슨의 철학은 “우리는 파티를 즐길 것이다, 매우 세련되고 복잡한 파티를”이다.
- O. C. 애덤스, RJR 나비스코의 심리 컨설턴트


로스 존슨 이야기


1988년 가을까지 로스 존슨의 삶은 줄곧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는 회사 안에서 권력을 쥐려 했을 뿐만 아니라 낡은 기업 질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포천》 선정 500대 기업은 이른바 ‘컴퍼니맨’들이 좌우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한 회사에 바치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중간 간부들과 기업의 집사 역할을 하는 고위 간부들이 바로 이 ‘컴퍼니맨’이었다.


존슨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비컴퍼니맨’이 되고자 했다. 그는 전통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고 필요 없이 부담만 되는 조직들을 폐기했으며 경영 방침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원숙해지는 ‘비컴퍼니맨’이라는 새로운 인종, 즉 거래와 결과를 좇아 움직이는 유목민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또한 자기 이익도 넉넉하게 챙기는 경향이 있었다.


장차 기업계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오를 존슨은 전통이 뿌리 깊은 곳에서 1931년에 태어났다. 프레더릭 로스 존슨은 대공황 시기에 캐나다 중부 대도시 위니펙에서 성장했다. 그는 중하층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로스’로 불렸다. '프레드'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존슨은 위니펙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캐나다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그는 고만고만한 규모의 캐나다 회사들을 다니면서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이 동안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닌 첫 번째 직장은 몬트리올에 있는 ‘캐나다 제너럴 일렉트릭’인데 거기서 회계원으로 6년 동안 일했다.


카리스마를 빼고 나면 그는, 경쟁에서 앞서가려고 애쓰는 토론토의 수많은 청년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미가 급했다. 그래서 제너럴 일렉트릭의 미국 지사로 발령을 내 달라고 전보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그리고 캐나다의 대형 백화점 체인인 ‘티 이턴’에 중간 관리자로 취직했다. 존슨은 다시 그 회사에서 나와, ‘제너럴 스틸 워크스(GSW)’라는 토론토의 한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스탠더드 브랜즈 장악


1970년대 초, 로스 존슨은 40대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자기의 의지와 방법대로 일할 수 있는 자리에는 올라서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헤드헌터가 그에게 제안을 해 왔고 그는 곧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국 식품 회사인 ‘스탠더드 브랜즈(Standard Brands Ltd.)’의 캐나다 지사장이 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28년에 ‘하우스 오브 모건’(‘J. P. 모건’, '모건 스탠리’, ‘모건 그렌펠’ 등 3개 회사를 아우르는 통칭이다.)이 설립했다.

[1920년대 JP 모건 본사 건물과 스탠다드 브랜즈 로고 출처 구글 이미지]

취임한 첫해에 고위 간부 스물세 명 가운데 스물한 명을 내쫓고 이들이 있던 자리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젊은 사람들로 채웠다. 그중 하나가 피터 로저스라는 영국인이었다. 존슨은 또 마틴 에밋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로저스와 에밋은 존슨의 ‘깡패’ 관리자 집단의 핵심 성원이 되었다.


정통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경영 방식이 좋은 결과를 냈고, 그 바람에 존슨의 이름이 본사 경영진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1973년에는 스탠더드 브랜즈의 국제사업부 책임자로 승진했다. 존슨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당시 존슨의 상사인 헨리 위글은 회사를 스파르타식으로 운영하는 독재자였다. 그가 자랑하는 업적은 1950년대에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이후 20년 연속으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맨해튼 중심가에 본사가 있는 여느 회사들과 달리 스탠더드 브랜즈의 사무실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바닥에는 카펫 대신 리놀륨이 깔려 있었고, 책상도 목제가 철제였다. 최고위층 간부들만 카펫과 나무 책상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전화기도 오후 5시가 되면 모두 잠갔다.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위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얻어터지던 스탠더드 브랜즈의 고위 간부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존슨이라는 이 유쾌한 인물 주변에 몰려들었다. 고위 간부들은 한 달에 한 번은 하루 온종일 위글을 만나야 하는 불쾌하고 힘든 일을 견뎌야 했다. 존슨은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면서 이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이 모임을 존슨은 ‘월요일 밤의 난파자 구제 클럽’이라 불렀다.


스탠더드 브랜즈의 이사회 구성원들도 그를 즐겨 찾았다. 성마른 위글에 비해 존슨은 언제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편안하고 허물이 없었다. 이들은 결국 1974년에 존슨을 이사로 선임함으로써 그에 대한 보답을 했고, 또 다음 해에는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위글은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점점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이사들이나 중역들이 인사 관련 계약을 맺지 못하도록 했다.


1976년 1월, 이사회는 존슨을 최고운영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가 위글의 후계자임이 분명해졌다. 많은 직원들이 곧 다가올 해방의 날을 고대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위글은 캐나다에서 근무하는 두 직원이 보낸 익명의 투서를 받았다. 예산 낭비(예를 들면 마틴 에밋이 회사 소유 자동차 세 대와 운전기사를 전용하고 있는 것)에 관한 불평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위글은 곧바로 감사팀을 캐나다로 보냈다.


5월 중순의 어느 금요일 아침, 이사회가 열렸다. 존슨이 바깥에서 기다리는 동안 위글은 감사팀이 적발한 존슨의 부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계약 기간을 2년 더 연장해 줄 것을 제안하면서 발언을 마무리했다. 존슨은 이사회가 열리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서 발언을 했다. 회계 관련의 소소한 실수와 부정은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위글은 도저히 함께 일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와 더는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사 여러분,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임해야겠다는 것뿐입니다.”


존슨이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위글은 회의실 가운데의 회장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다. 유령 같은 얼굴이었다. 이사 한 명이 존슨에게 말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씀드리겠소. 헨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회장 및 최고경영자 직위를 유지할 것이고, 헨리가 1년 뒤 물러나면 당신은 대표 겸 최고경영자가 될 것입니다.”


존슨이 사업적으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스탠더드 브랜즈가 쓰러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가 1976년에 최고경영자가 되자마자 설탕 가격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스탠더드 브랜즈의 핵심 사업 부문인 옥수수 감미료 시장이 강타를 당했다. 영업 이익은 2년 연속으로 하락했다.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스탠더드 브랜즈의 이사회는 젊은 최고경영자의 판단과 실행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존슨은 위글의 운명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왕처럼 대우했다. 그래서 자기가 데리고 있던 스포츠 스타 군단을 동원해 적절히 이들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하지만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스탠더드 브랜즈의 실적은 여전히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수익은 다시 늘고 있었지만 수익 증가율은 인플레이션률보다 낮았다. 수익률도 업계 평균보다 낮았다. 존슨에게 스탠더드 브랜즈는 어린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5년씩이나 가지고 놀다 보니 싫증이 난 것이었다.


기회는 그가 받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1981년 3월이었다. 식품업계의 거대 기업인 ‘나비스코’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이던 로버트 섀벌(Bob Schaeberle)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존슨에게, 코네티컷에서 일하는 스탠더드 브랜즈 직원이 자기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했었더라고 말했다. 나비스코와 스탠더드 브랜즈의 합병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직원을 모르느냐고 했다. 존슨은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구미가 당겼다. 그는 섀벌을 만났고 한데 어울리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두 사람은 합병에 동의했다. 1981년에 19억 달러어치의 주식을 맞바꿈으로써 두 회사는 ‘나비스코 브랜즈’라는 하나의 회사로 탄생했다. 소비재 기업의 합병으로는 당시 가장 큰 규모로 꼽혔다.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두 회사는 대등한 자격으로 결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듯이 ‘리츠’와 ‘오레오’ 등의 유명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나비스코가 좀 더 힘센 회사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누가 될 것인지도 불을 보듯 뻔히 예상되었다.

[나브스코와 스탠다드 브랜즈 합병 기념 사진, Bob Schaeberle(우)과 로스 존슨 출처 구글 이미지]

나비스코 이야기


나비스코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거인이었다. 나비스코는 원래 ‘내셔널 비스킷 컴퍼니’로, 1898년에 동부 지역의 제빵업자 대부분을 지배하던 기업과 서부 지역의 제빵업자 대부분을 지배하던 기업이 합병하면서 탄생했다. 이 합병으로 그간 진행되었던 두 회사 사이의 경쟁은 끝이 났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당시의 이른바 ‘트러스트 시대’의 산물이던 나비스코는 종종 ‘비스킷 트러스트’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비스코는 비스킷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나비스코를 설립한 사람은 시카고의 변호사 어돌퍼스 그린(Adolphus W. Green)이었다. 나비스코의 초대 회장이었던 그린은 이 회사의 첫 번째 전국적 제품인 팔각형의 소다 크래커를 개발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유니다 비스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니다 비스킷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나비스코의 신제품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왔다.

[어돌퍼스 그린과 NBC 시절 본사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린은 신제품 세 가지를 내놓으며, 이 세 개를 모두 통칭해 ‘트리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셋 가운데 적어도 두 개는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그린은 기대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두 개의 둥근 초콜릿 웨이퍼 사이에 바닐라 맛이 나는 당의를 넣은 이 비스킷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기록을 세운다. 바로 ‘오레오’였다.


그리고 대공황 시기의 한가운데서 나비스코의 제빵사들은 특이한 제품을 우연히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이들은 경쟁 회사들이 판매하는 것과 같은 버터 크래커를 만들려고 연구를 해 왔었다. 그런데 이런 노력 끝에 전혀 엉뚱한 제품이 나왔다. 표면에 코코넛 오일을 얇게 바르고 소금을 뿌린 제품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리츠’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츠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크래커가 되었다.

[오레오 광고와 제품군 출처 구글 이미지]

나비스코는 1960년에 오스트레일리아, 1962년에 영국과 뉴질랜드 등 해외로 진출했고, 다각화를 시도해 냉동 식품 부문에 진출하고, 샤워 커튼, 양탄자 사업과 장난감 사업에도 진출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업들이 실패했다.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당시 CEO 빅모어는 나비스코의 쿠키 및 크래커 부문을 최대한 쥐어짰다. 얼마나 세게 쥐어짰던지 이 부문에 속한 사람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비스코는 정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무도 해고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인 5시가 지나면 아무도 일하지 않았다. 아무도, 심지어 최고경영자로 새로 선임된 섀벌조차도 회사 소유의 자동차나 컨트리클럽 회원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로 이런 시점에 로스 존슨이 나타난 것이다. 스탠더드 브랜즈와 나비스코가 합병한 사실을 두고 어떤 익살꾼은 "지옥의 천사들이 로터리 클럽에 가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로버트 섀벌이 나비스코 브랜즈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로스 존슨은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존슨 아래에 존슨의 ‘유쾌한 친구들’이 성난 얼굴로 포진했다. 존슨은 섀벌의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사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모든 영광을 섀벌에게 돌렸다. 회의를 할 때는 언제나 ‘우리 회장님’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존슨은 섀벌의 회사를 장악해 들어갔다. 경륜 깊은 나비스코의 이사들은 하나씩 사라졌고, 그 자리를 존슨의 부하들이 차지했다. 나비스코의 강력한 최고재무책임자 리처드 오언스의 몰락은 존슨이 벌인 공작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3년 만에 나비스코 브랜즈의 최고 경영진 스물세 명 가운데 스물한 명이 스탠더드 브랜즈 사람으로 채워졌다. 워낙 은밀히 처단되었기 때문에 섀벌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존슨은 회사의 중역진을 재구성하는 한편 사업을 자기 취향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1982년 사사분기에만 존슨은 ‘J. B. 윌리엄스’ 세면용품과 영양제, ‘프리저 퀸’ 냉동 식품, ‘줄리어스 와일’ 포도주 및 음료, ‘하이진 인더스트리스’ 샤워 커튼, 그리고 ‘에벌론 페이브릭스’ 직물을 모두 매각했다. 동시에 그는 ‘체이스 앤드 샌본’과 고과당 시럽 같은 스탠더드 브랜즈의 낡은 사업 부문을 정리했다.


나비스코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쿠키 사업 부문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의 공격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비스코를 향한 진주만 기습 사건이 일어났다. 캔자스시티에서였다. 공격자는 ‘프리토-레이’였다.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 소비재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기업인 신시내티의 ‘프록터 앤드 갬블’‘던컨 하인스’라는 브랜드로 일련의 소프트 쿠키들을 쏟아 냈던 것이다.

[프리토-레이와 던컨 하인스 출처 구글 이미지]

결국 존슨과 나비스코는 캔자스시티를 두고 벌인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선 이겼다. 프록터 앤드 갬블과 프리토-레이는 대량 생산 체제와 전국 배송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비스코가 한 가지 제품을 개발하면, 이 제품은 경쟁사가 미처 따라오기 전에 각 도시마다 교두보를 확보하고 도시 전체로 진격했다. 경쟁사로서는 나비스코의 교두보를 무너뜨릴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1984년에 쿠키 전쟁은 모두 끝났다.


전쟁의 포연이 걷히자 나비스코 안팎에서 존슨이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낸 영웅으로 우뚝 서 있었다. 섀벌에게든 혹은 나비스코의 이사들에게든 존슨은 회사의 영웅이었다. 그해에 섀벌은 존슨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었다. 최고경영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뉴욕에 온 지 불과 10년 만에 존슨은 성공의 정점에 올라섰다.


존슨은 나비스코에 점차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더 이상 미래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쿠키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사실 존슨은 나비스코를 개혁하기 위한 장기 계획을 마련하는 일 따위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리츠’(Ritz)보다는 ‘글리츠(Glitz, 화려함)'에 더 이끌렸다.


1985년 봄, 존슨이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가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존슨은 노스캐롤라이나에 본사를 둔 거대 담배 기업인 ‘RJ 레이놀즈 인더스트리스’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이던 J. 타일리 윌슨의 전화를 받았다. “만나서 점심이나 함께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2장
오레오 쿠키회사와 카멜 담배회사의 기묘한 합병


‘RJ 레이놀즈(Reynols) 타바코 컴퍼니’가 없었더라면 노스캐롤라이나의 윈스턴살렘 시내의 가장 현대적인 고층 건물도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회사는 22층짜리 석조 건물을 본사로 사용했다. 1929년 완공될 당시에 이 건물은 건축계의 보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건물의 디자인을 모방한 거대한 건축물이 뉴욕에 세워졌는데, 바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1929년의 RJ 레이놀즈 본사 건물 출처 구글 이미지]

레이놀즈가 없었다면 인구 14만 명의 윈스턴살렘은 수많은 남부 도시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건물들을 빼고 나면 시내는 전반적으로 추레한 편이다. 기력이 다한 듯한 낡은 상점들과 사람들······. 레이놀즈가 윈스턴살렘을 전혀 다르게 만들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시작된 레이놀즈의 영향력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처럼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


40번 주간(州間)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보먼 그레이(Bowman Gray) 의과대학'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학교의 이름은, 레이놀즈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 학교를 후세에 남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더 가면 '탱글우드'로 빠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탱글우드 R. J. 레이놀즈와 형제인 윌리엄('미스터 윌'로 불린다)이 국가에 기증한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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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Center-aerial-view-6.29.19.jpg [보먼 그레이 의과대학과 탱글우드 출처 구글 이미지]

1874년 스물네 살의 버지니아 청년 리처드 조슈아 레이놀즈(그는 '미스터 RJ'로 불린다)는 전국 최고의 담배 재배지라는 명성에 이끌려 말을 타고 윈스턴살렘에 들어왔다. 모라비아교회로부터 토지 한 구획을 388달러에 사들인 뒤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1875년에 ‘RJ 레이놀즈 타바코’는 여러 경쟁자들의 대열에 합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R. J. 레이놀즈와 첫 공장 기념비 출처 구글 이미지]

‘미스터 RJ’의 사업적인 명민함과 그 지역 모라비아교도의 강인한 노동 윤리가 결합해 장차 수십 년 동안 지속될 레이놀즈의 기업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레이놀즈 타바코는 무척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한 세기 뒤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듯이 탐욕스러운 북부 사람들이 이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군침을 흘릴 정도가 되었다.


1890년대에 제임스 B. ‘벅’ 듀크가 주도하는 미국 담배 트러스트가 나타났다. 이것은 RJ 레이놀즈와 같은 지역 담배 회사들을 집어삼키면서 거대하게 성장했다. 듀크의 기반은 원래 노스캐롤라이나의 더럼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메리칸 타바코 컴퍼니’를 뉴욕으로 옮겼다.

[제임스 벅 듀크 출처 구글 이미지]

R. J. 레이놀즈는 위협을 느꼈다. 그는 1899년 비밀리에 뉴욕으로 가서는 듀크의 트러스트에 레이놀즈 타바코의 주식 3분의 2를 300만 달러에 팔았다. 담배 트러스트의 통제 아래 있으면서 그는 그 지역의 경쟁 담배 회사들을 마구 인수해 마침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가장 큰 담배 회사로 덩치를 키웠다.


거기까지 성장한 R. J. 레이놀즈는 파이프 담배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이프 담배의 비밀 배합 비율 및 방식을 지휘하며 그는 이 담배에 ‘프린스 앨버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웨일스의 인기 있던 왕자이며 나중에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앨버트 왕자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R. J. 레이놀즈의 프린스 앨버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07년에 25만 파운드였던 연간 생산량은 1911년에는 14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프린스 앨버트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1911년에는 이보다 더 큰 소식이 있었다. 벅 듀크가 몰락한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여러 해 동안 담배 산업의 목줄을 쥐고 흔들던 듀크의 트러스트를 깨려 했는데, 이 노력이 마침내 트러스트 금지법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미국의 항소 법원이 레이놀즈 타바코의 독립성을 인정했을 때 윈스턴살렘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들끓었다.


남의 사업에 중뿔나게 나서며 간섭하고 통제하던 손길에서 벗어난 R. J. 레이놀즈는 자기 회사가 ‘뉴욕 패거리’의 손안에 들어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회사 주식을 직원들에게 강제로 안기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은행 대출을 알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이 회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빚지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RJ 레이놀즈 주식 출처 구글 이미지]

미스터 RJ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갔다. ‘클래스 A’라는 주식을 발행했다. 이것은 주식 보유에 따르는 모든 투표권이 공장의 직원에게 귀속되는 주식이었다. 220만 달러를 초과하는 모든 수익의 10퍼센트를 배당금으로 지급할 정도로 이 주식의 배당금은 특별히 높았다. 노동자들은 환호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봉급을 털어 이 주식을 최대한 많이 샀다.


1913년에는 2만 5000명이던 윈스턴살렘 주민 중 4분의 1이 RJ 레이놀즈에서 일했다. 바로 이해에 당시 63세이던 미스터 RJ는 새로운 상품을 놓고 최대의 도박을 벌였다. 그것은 얇은 종이로 가늘게 만 담배인 궐련(cigarette)이었다. 당시 갑에 넣어서 판매하는 궐련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었다. 끽연가들이 대부분 직접 말아 피우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캘리포니아산 담배와 켄터키산 담배, 그리고 터키산 담배 등을 이용해 다양한 배합 실험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들을 이상적으로 배합한 제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터키의 신비로운 동양적인 이미지를 담아 ‘카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바넘 앤드 베일리 서커스단’이 그해에 윈스턴살렘에 왔을 때, 사진사가 이 서커스단에 있던 낙타의 사진을 찍었다. 담배를 포장하는 갑에 들어갈 사진이었다.


카멜은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년 만에 레이놀즈는 한 해에 4억 2500만 갑을 팔았다. 카멜은 10갑들이 한 보루 단위로 팔렸던 최초의 궐련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정부로부터 독점 공급 허가를 받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던 미군에게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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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담배 광고 출처 구글 이미지]

1918년에 미스터 RJ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죽으면서도 그는 자기가 이룬 것에 만족했으며 RJ 레이놀즈가 제대로만 운영된다면 결코 무뢰한(scalawag, 이 단어는 남북전쟁 뒤 북부를 기반으로 한 공화당의 정책을 지지한 남부 백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뜻을 담고 있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길은 내가 닦았다. 당신들은 그저 이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회사 경영은 곧 레이놀즈 가족의 손을 떠났다. 레이놀즈 타바코를 경영하는 무거운 짐은 그 지역에서 성장한 중역들에게 지워졌다. 그들 가운데 여러 명은 미스터 RJ가 죽기 전에 엄선해서 지명한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보먼 그레이를 들 수 있다. 그는 매우 꼼꼼한 사람으로, 회사의 실질적인 성장을 이끌어 낼 역동적인 발상이나 상상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레이놀즈를 안정된 상태로 원활하게 유지했다.

[RJ 레이놀즈의 키맨들과 당시 윈스턴살렘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1930년대 중반, 보먼 그레이가 사망한 뒤에 레이놀즈는 10년 이상을 미적지근한 경영 속에서 보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이런저런 불만들이 팽배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레이놀즈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최대 라이벌이던 아메리칸 타바코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스터 윌의 조카 존 휘터커의 지도력 아래 레이놀즈는 1950년대에 새로운 황금기를 누렸다. 레이놀즈가 최초로 도입했던 궐련 제조 기계를 조작하는 일을 했던 휘터커는, 노동조합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쓰라린 일들이 끝난 뒤에 느슨하게 풀어진 회사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강화했다.


휘터커가 이끌던 1954년에 레이놀즈는 ‘윈스턴’을 선보였다. 주요 브랜드로서는 최초로 필터를 단 담배였다. 윈스턴은 처음 9개월간 무려 65억 갑이 팔렸다. 그리고 이어서 최초의 대량 생산 박하 담배이던 ‘살렘’도 출시되었다. 살렘 역시 수십억 갑이 팔렸다. 1959년에는 이 두 브랜드 덕분에 레이놀즈의 매출액이 아메리칸 타바코의 매출액을 크게 앞질렀다.


1950년대에 레이놀즈는 하나의 거대하고 행복한 가족이었다. 어떤 신제품이 잘 팔릴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서는 공장 노동자 250명으로 구성된 패널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당시 판매 책임자였던 보먼 그레이 주니어가 이렇게 해서 선택된 시제품을 최종적으로 직접 피워 보았다.

“바로 이거야!” 그가 무릎을 쳤고, 그렇게 해서 윈스턴이 탄생했다.


보먼 그레이 주니어는 1959년에 휘터커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보먼 그레이의 아들인 그는 하루에 윈스턴 네 갑을 피웠으며, 열일곱 살 때부터 레이놀즈에서 일했다. 그는 윈스턴의 최종 시제품을 선택한 뒤에 무엇보다 자기의 입맛을 믿었다. “만일 어떤 담배가 내 입에 맞으면 다른 사람들 입에도 맞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평균적인 사람이거든요.” 1960년 《타임》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담배에 대한 예찬은, 외과 의사이던 루서 테리가 흡연과 암의 상관관계를 다룬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던 1964년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여파로 그때까지 해마다 5퍼센트씩 증가하던 담배의 매출액이 그 시점을 정점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증가세는 곧 예전 수준을 회복했다.

e6bca9fe-41e3-45e0-a46b-9da42905ede6.png [1964년 1월 루서 테리 미 공중보건국장이 '담배 보건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레이놀즈는 경고를 예의 주시했다. 그레이는 담배 사업 부문 이외에 속하는 기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식품 기업이었는데, 레이놀즈의 경영진은 자기들이 확보하고 있는 마케팅 경험과 역량으로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이 되면서 레이놀즈가 누렸던 영광의 날들도 저물기 시작했다. 곧 그날들이 끝날 때가 다가왔다.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중역 둘이 사망한 뒤에, 그레이의 뒤를 그의 사촌인 앨릭스 갤러웨이가 이었다. 그는 의지가 약한 재무 담당 책임자였다. 갤러웨이는 재앙을 몰고 올 다각화로 레이놀즈를 이끌었다. 나비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이 다각화는 핵심 사업인 담배 부문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과거 윈스턴살렘에서 기업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인 맬컴 매클레인이 제안한 대로 갤러웨이는 매클레인이 소유하고 있던 선적 회사인 ‘시-랜드’를 매입했다. 레이놀즈의 이사진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매클레인은 이어 ‘아미노일’이라는 소규모 석유 회사를 사자고 제안했다. 갤러웨이는 이 제안 역시 받아들여 다음 해에 아미노일을 매입했다.


최고경영자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있으면서 갤러웨이는 매클레인과 다른 영향력 있는 외부 인사들에게 휘둘렸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J. 폴 스틱트(Paul Sticht)라는 레이놀즈 이사는 갤러웨이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스틱트는 레이놀즈 이사진 가운데 몇 되지 않는 사외 이사였다.


특이한 사실은 스틱트가 피츠버그 외곽에 있던 하숙집에서 성장한 ‘양키’라는 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에서 이민 온 철강 노동자였다. 그는 노동조합을 깨는 전술을 놓고 협의를 하면서 알게 된 부사장 찰리 웨이드의 요청으로 레이놀즈의 이사진에 이미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1972년 스틱트는 갤러웨이가 재무 분야를 전공한 데이비드 피플스라는 인물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못하도록 공작했다. 그리고나서 위원회는 레이놀즈를 이끌고 1970년대 후반을 헤쳐 나갈 인물을 선정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사람은 누가 봐도 놀라운 인물이었다. 바로 위원회 의장이던 폴 스틱트였던 것이다.

nbg_bld_00437.jpg [폴 스틱트(가운데) 출처 구글 이미지]

형식적인 틀로 볼 때 스틱트는 레이놀즈에서 이인자였다. 하지만 스틱트는 상관인 콜린 스토크스를 압도하면서, 장차 회사를 가족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기업에서 더욱 현대적인 거대 기업으로 변모시키게 될 격동의 1970년대를 관통해서 레이놀즈라는 배의 항로를 잡고 이끌었다.


레이놀즈는 1970년대 내내 주된 경쟁자이던 필립 모리스 때문에 점점 더 큰 압박을 느껴 왔었다. 필립 모리스의 말보로 브랜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스틱트는 좀 더 치밀한 마케팅 전문가들이 있어야 이 도전을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회사 역사상 최초로 외부에서 전문가들을 윈스턴살렘으로 데려왔다.


1971년에는 전파를 통한 담배 광고가 금지되었다. 그 바람에 레이놀즈는 “윈스턴의 맛은 담배가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이라는 귀에 쏙 들어오는 시엠송을 폐기해야 했다. 스틱트가 불러들인 새로운 군단은 여러 해 동안 대체 광고 수단을 찾느라 허둥대면서, 인쇄물 광고에 들어갈 문안을 만드는 작업을 했지만 뾰족한 성과가 없었다.


그 사이에 말보로는 생산 현장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1970년대 중반에 필립 모리스와 레이놀즈는 담배 생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 줄 1세대 전자 기계 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레이놀즈의 기술자들 가운데 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 기계의 조작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기술자들 스스로 직접 분해하고 또 조립할 수 있는 좀 더 믿음직한 옛날식 기계 쪽으로 돌아섰다.


타일리 윌슨은 1983년에 최고경영자가 된 뒤 레이놀즈의 면모를 일신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신주류’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윌슨이 그때까지 성장해 온 배경은 소비재 제품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회사의 미래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았다. 아미노일과 시-랜드를 매각한 뒤에 윌슨은, 레이놀즈를 프록터 앤드 갬블과 어깨를 나란히 할 초대형 소비재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원대한 전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인수 합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위 후보는 윌슨이 정한 성적 기준으로 75점을 얻은 ‘펩시콜라’였다. 하지만 이 제안은 '펩시콜라'에 의해 바로 거절되었다. 2위 후보는 76점을 기록한 시리얼 업계의 거인 ‘켈로그’였다. 하지만 이 회사의 주식 반은 기업 합동(트러스트)이 소유하고 있어서, 과연 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결국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이 회사가 기록한 점수는 81점이었다. 전담반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레이놀즈의 가장 이상적인 ‘결혼’ 상대자는 나비스코 브랜즈였다. 두 사람은 전화 통화를 하고 다음 주에 만났다. 장소는 존슨의 맨해튼 사무실이었다.


합병과 타일리 윌슨 몰아내기


윌슨은 자기가 생각하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레이놀즈는 담배 사업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식품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 나비스코가 가장 적당한 대상이라는 설명이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자의 연차 보고서를 교환했다.


하지만 1985년 4월 말에 열린 이사회는 이런 기분 좋은 예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사들이 나비스코와의 합병에 냉담했기 때문이다. 몇몇 이사들은 화부터 냈다. 이것은 레이놀즈 역사상 최대의 거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대한 일을 왜 이사회에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게 분개하는 이사들의 논리였다.


이 논의는 사실상 몇 주 뒤에 다시 불붙었다. 월스트리트의 변호사들과 투자은행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사회가 열렸고, 이사들은 설득당했다. 그래서 레이놀즈가 나비스코를 현금으로 인수하자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하나 남은 까다로운 문제는 주식 가격이었다.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나비스코의 주식이 오르기 시작했다. 합병 이야기가 밖으로 샌 게 틀림없었다. 윌슨은 한 주에 80달러 이상은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존슨이 말했다. “글쎄요, 80달러로는 거래할 수 없을 겁니다.”


주가가 결국 논의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윌슨이 거래 대상에 우선주를 포함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정체되었던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결국 석유 산업 이외 부문에서 이루어진 역대 최대의 합병에서 이 우선주는 한 주에 85달러 혹은 모두 합해 49억 달러에 거래하기로 합의되었다.


얼마 뒤에 합병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때 윌슨은 존슨의 오랜 친구이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 제임스 로빈슨을 만났다. 로빈슨은 애틀랜타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비스코와 레이놀즈를 모두 다 잘 알았다. 로빈슨은 윌슨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남부 억양으로 말했다.

“‘로오스’가 점점 더 마음에 들 겁니다. 아주 좋은 친구거든요.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고 잘 해낼 겁니다.”

[AMEX CEO 제임스 로빈슨 출처 구글 이미지]

레이놀즈가 나비스코를 인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합병 소식은 윈스턴살렘에서 갈채를 받았다. 윈스턴살렘 사람들은 레이놀즈가 북부의 거대 기업을 인수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불만을 품은 사람은 호리건뿐이었다.


하지만 나비스코의 구파들이 볼 때 이것은 결코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비스코의 제빵사들은 스탠더드 브랜즈의 주류 사업 부문 관리자들을 ‘술주정뱅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자기네 회사가 담배 회사와 합치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두 회사의 합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논리와 배경은, 레이놀즈와 나비스코의 거대한 제품군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린 새로운 회사는 원자재 공급업체들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슈퍼마켓에는 더 좋고 더 넓은 판매대를 요구할 수 있으며, 또 도매상들에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타일이 전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업과 관련된 사항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윌슨도 존슨의 빠른 판단력을 높이 사게 되었다. 존슨은 특히, 이미 계획하고 있던 나비스코와 델몬트의 통합을 추진하는 데서 솜씨를 발휘했다. 또한 폴 스틱트와 가깝게 지내던 델몬트의 바나나 업자 새뮤얼 고든을 쳐낸 일로 점수를 많이 땄다.


그래서 윌슨은 존슨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더욱더 이사회 이사들과 존슨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주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스틱트의 생각도 바뀌었다. 존슨을 믿을 수 없는 교활한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존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뒤에는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점심을 함께 먹는 친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 절대로 나쁜 친구가 아니더군.”


존슨은 윌슨의 등 뒤에서 윌슨을 바보로 만들기도 했다. 윌슨을 ‘지거볼스(Jiggerballs)’라고 불렀는데, 아무도 그 뜻을 정확하게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따뜻한 애정이 담긴 별명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존슨은 뉴욕에 갈 때마다 낙담해 있던 친구들에게 윌슨과 비틀거리던 담배 사업 부문에 대한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다.

“근데 말이야, 우리 회사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필립 모리스 개자식들을 패고 있는 것처럼 들리거든. 하지만 왠지 나는 그럴 때마다 불쌍한 권투 선수 생각이 나. 이 권투 선수가 경기를 하다가 실컷 두들겨 맞은 뒤에 공이 울려 자기 코너에 돌아와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짜식, 한 대도 못 때리면서······’ 이랬어. 그러자 코치가 이랬지. ‘심판을 잘 지켜봐. 누군가 널 무지하게 때렸잖아’라고.”


스틱트는 어느 날 아침에 윈스턴살렘 시내의 자기 사무실로 가다가 휘터커 파크 담배 공장 옆에 새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았다. 거기에서 공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안 스틱트가 운전사 헤디에게 물었다.

“저건 뭐지?”

“연기 안 나는 담배 공장입니다.”

“뭐라고?” 스틱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되물었다.


스틱트는 곧바로 윌슨에게 연락했고, 윌슨은 획기적인 신기술로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를 개발하는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이사회에 보고할 계획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틱트는 기가 막혔다. 그런 제품을 개발하는 문제에 대해 이사회에 단 한 번도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암호명 ‘스파 프로젝트’는 사실 혁명적인 제품이었다. 윌슨이 프리미어 개발과 관련해서 승인한 6800만 달러는 이사회에서 정한 승인 한도를 훨씬 초과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두 사람은 이런 내용이 어째서 감사위원회 감사에서 누락되었는지를 물었다. 스틱트도 직접 나서서 윌슨을 공격했다. 타일리 윌슨은 그나마 조금 가지고 있던 이사회의 정치적인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윌슨과 함께 일하면서 1년을 보낸 존슨은 이제 때가 왔음을 감지했다. 그는 여러 이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RJR 나비스코를 떠날 것이며, 영국의 식품 회사인 ‘비첨 PLC’를 맡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갑작스러운 통고였다. 그리고 최고경영자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며, 이사회가 윌슨을 선택한 것은 최상의 결정이라고 짐짓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고 빠르지 않소.” 찰스 휴걸이었다. 그는 존슨이 예상한 대로 반응했다.

“어쩌면 당신이 이 회사를 경영할 수도 있지 않겠소?” 휴걸은 존슨 부부를 뉴햄프셔의 위니퍼소키 호숫가에 있는 자기의 여름 별장으로 초대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타일리 윌슨을 밀어내기로 결정했다.


존슨은 스틱트를 만나러 뉴햄프셔로 따로 여행을 떠났다. 이때는 윌슨의 눈을 피하기 위해 회사 비행기를 쓰지 않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비행기를 빌렸다. 자기를 찾아온 존슨에게 스틱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왜 이제야 우리 앞에 왔는지, 그리고 이제라도 나타나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오.” 스틱트가 매콤버도 합류시켰다. 매콤버는 윌슨을 축출할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 주 회의 때 윌슨은 사임했다. 조용히 처리하는 대가로 윌슨은 상당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최소의 노력으로 로스 존슨은 미국에서 열아홉 번째로 큰 제조 기업인 RJR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었다. 모든 게 끝난 뒤 타일리 윌슨은 투덜거렸다. “흥, 놈들이 나를 해치웠다 이거지······.”

[타일리 윌슨 출처 구글 이미지]
3장
인수합병의 황제 헨리 크래비스의 등장


로스 존슨은 엄청 빠른 속도로 정점까지 올라갔다.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가 된 게 1984년이었고, 레이놀즈와 나비스코가 합병한 게 1985년이었으며, RJR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가 된 게 1986년이었다. 만일 그가 이 자리에서 만족하고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상류 사회 인사로 여생을 살았더라면, 역사는 그의 인생을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뒤흔들어 놓는 데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던 존슨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바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레이놀즈 타바코는 한 해에 현금을 10억 달러씩 끌어들였다. 세계 최대의 무모한 계획들을 세우기에, 그리고 세계 최대의 실수들을 숨기기에 충분히 큰 돈이었다.


1986년 가을에 RJR 나비스코를 접수한 뒤 존슨의 밀월은 너무나 짧게 끝났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담배 부문 사장인 에드워드 A. 호리건 주니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존슨은 호리건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또한 존슨은 호리건에게 그 어떤 아파트보다 사치스러운 아파트를 제공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위에 있는 ‘뮤지엄 타워’ 아파트였다. 그리고 이내 존슨과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museum-tower.jpeg [뉴욕 뮤지엄 타워 출처 구글 이미지]

그다음에 존슨은 레이놀즈의 오래된 뿌리, 이른바 ‘구체제의 친위대’를 해체하는 작업에 나섰다. 레이놀즈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거리로 내몰렸고, 존슨의 나비스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존슨은 회사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면서 점차 작은 시골 도시에 적응한 척하며 살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리 동물원’의 회사 직원들은 윈스턴살렘의 이른바 ‘담배 사람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존슨에게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본사를 옮기는 것이었다. 애틀랜타도 존슨의 마음을 흔들었다. 댈러스와 마찬가지로, 애틀랜타는 최근에 부자가 된 도시이며 뿌리가 없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충분히 넓었다. 최고 수준의 건물이 입주자를 찾지 못해 언제든 입주를 환영한다고 했다. 게다가 정치적인 협상이 충분히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만큼 윈스턴살렘과 가까웠다.


하지만 이사회가 공식적으로 이전을 결정하기 전에 《애틀랜타컨스티튜션》이 이 소식을 터뜨렸다. 이 기사를 계기로 윈스턴살렘에서는 격렬한 반대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존슨은 하룻밤 사이에 윈스턴살렘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존슨 부부에 관한 근거 없는 소문들도 마구 떠돌았다. 예를 들면 ‘컵케이크’가 프로 골프 선수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거나, 프로 테니스 선수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따위의 소문이었다.


1987년 1월 중순에 애틀랜타로의 이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존슨은 윈스턴살렘 주민을 최대한 배려했다. 본사만 이전하는 것이었다. 본사의 수천 명 직원 가운데 일부는 애틀랜타에서 근무하고 또 일부는 담배 사업 부문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RJ 레이놀즈의 1만 2000명 직원은 변함없이 원래 자리를 지켰다. 결국 윈스턴살렘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수백 명밖에 없었다.

[RJ 레이놀즈 애틀란타 빌딩 출처 구글 이미지]

합자회사 에피소드


애틀랜타로 이전하고 몇 주가 지난 뒤 존슨은 RJR 나비스코의 열성파들에게 다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보안 문제를 분석하던 회의에서 레이놀즈 타바코를 주식회사에서 합자회사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거의 지나가는 말투로 했던 것이다. 윈스턴살렘에서는 주주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회사 안에서도 사람들은 눈알을 바쁘게 굴렸다.


이 발표는 기업에 대한 존슨의 관점이 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인수와 합병이 주식회사 미국을 휩쓸 때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가들은 레이놀즈의 막대한 ‘현금 흐름’에 오랫동안 침을 흘렸었다. 제발 자기들 돈을 인수 합병 자금으로 써 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당시 존슨은 하루 평균 마흔 개나 되는 전화 메시지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이 투자은행가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합자회사 아이디어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제프리 벡이라는 월스트리트의 거래 전문가였다. 존슨에게 매달리기로 작심한 벡은 ‘드렉설 버넘 램버트’라는 증권 회사 소속이었다. 이 회사의 마이클 밀컨은 정크 본드의 황제라 불리면서 1980년대 중반에 기업 인수 부문의 사업을 주름잡았다.†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벡을 ‘미친개’라고 불렀다.


존슨은 RJR 나비스코의 주가가 담배 사업 부문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다. 그는 담배 사업의 암울한 미래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투자자들은 나비스코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암호명 ‘알파 프로젝트’이던 벡의 합자회사 아이디어는 투자자들의 이런 인식을 털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존슨은 아이디어맨이었지 세부적인 사항에 밝지는 않았다. 벡의 아이디어와 같은 것들이 많이 쌓이면 이 아이디어들을 비공식적인 자문 그룹에 넘겼다. 이 그룹을 존슨은 ‘재무 문제 연구 개발팀’이라고 불렀다. 존슨은 오랜 친구인 앤드루 세이지가 이끄는 이 조직을 통해 재무 관련 알짜배기 통찰을 찾아냈으며, 이를 통해 적지 않은 재정적인 기회들을 포착했다.


존슨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살피기 위해 세이지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프랭크 베너벤토라는 컨설턴트를 고용했다. 존슨은 베너벤토를 ‘프랜시스 선생’이라 부르곤 했는데, 세이지가 그를 선택한 것은 매우 특이했다. 그는 서른아홉 살 때 월스트리트 경력을 마감했다. 리먼 브라더스에서 4년 동안 일한 뒤였다. 그리고 그전에는 워싱턴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알파 프로젝트는 폐기되었다. 주가가 확실히 오를 것이라고 베너벤토가 확신하지 못한 데다, 늘 관료제를 경계하던 존슨 역시 알파 프로젝트에는 수많은 서류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뒷걸음질 치며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존슨은 이 문제를 더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존슨은 이미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디어 사업을 RJR 나비스코의 세 번째 주력 사업 부문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미식축구 스타 프랭크 기퍼드의 우정과도 관련 있는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의 관심을 끈 일차적 대상은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국 ESPN이었다. 사실 RJR 나비스코는 ESPN의 지분을 이미 20퍼센트 가지고 있었다. 존슨은 ‘캐피털 시티스/ABC’가 소유하고 있는 ESPN의 나머지 지분 80퍼센트를 사야겠다는 생각에 푹 빠졌다.


RJR의 중역들은 왕처럼 살았다. 서른한 명의 최고 경영진이 받는 급여는 총 1420만 달러였다. 한 사람당 평균 45만 8000달러였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웨이벌리 호텔에서 구두닦이 소녀에게 팁으로 100달러 지폐를 줘서 전설이 되기도 했다. 존슨의 가정부 두 사람은 회사로부터 봉급을 받았으며, 존슨의 중역들은 애틀랜타의 주택 시장을 주름잡았다.


한편 멀지 않은 곳에 찰리 브라운 공항이 있었는데, 이 공항은 회사 소유의 비행기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떠들썩하게 끊임없이 새로운 자금을 퍼부어 대는 회사 풍조가 그야말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RJR 나비스코의 비행기들이 점점 늘어나자 존슨은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대형 격납고를 새로 지으라고 지시했다.


기업의 재산을 잘 쓰는 것과 낭비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이 RJR 나비스코에서는 점차 희미해져 갔는데, 이 비행기들이 그러한 경계선의 상징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존슨이 데리고 있던 독일산 셰퍼드 ‘로코’의 경우가 바로 낭비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해 다이나 쇼어 대회에서 로코가 경비원을 무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로코는 회사 비행기로 은밀하게 팜스프링스를 빠져나가 윈스턴살렘에 내렸다. 제트기를 타고 법망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존슨은 이사회를 자기 손안에 확실히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리건은 그렇게 확신하지 않았다. 그는 존슨이 때로 말실수를 할 때, 이사들이 마치 그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호리건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아일랜드 사람의 피를 이어받아 의심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건 당신 개인 소유의 이사회가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린다는 걸 명심해요.”


애틀랜타로 이전한 뒤 1년 동안 존슨은 휴블라인을 매각하고 여러 개의 소규모 회사들을 인수하는 작업을 통해 RJR 나비스코를 다듬고 손질했다. 미스터 RJ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유서 깊은 국민 브랜드 ‘프린스 앨버트’ 파이프 담배를 ‘카터 홀’ ‘애플’ ‘로열 컴포트’ 등의 다른 레이놀즈 파이프 담배 브랜드들과 함께 매각했다. ‘윈체스터’라는 이름의 브랜드도 팔았다. 캐나다에서 에밋이 빠르게 이 사업 단위들을 팔았다. 여섯 개 사업체를 3억 5000만 달러에 팔았다.


존슨과 KKR의 첫번째 만남


그런데 LBO 유행의 선도적 주자이던 사모펀드 KKR가 1986년에 인수한 시카고의 거대 식품 회사 ‘비어트리스(Beatrice)’의 한 사업 단위를 존슨이 샀다는 소문이 계속 돌았다. 사실 존슨은 비어트리스의 ‘헌트 웨슨’이라는 사업 단위에 조심스럽게 이끌렸고, 비어트리스의 최고경영자 도널드 켈리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비어트리스에 매각했고, KKR가 인수한 뒤에는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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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 광고와 제품들 출처 구글 이미지]

‘모건 스탠리 앤드 컴퍼니’의 합병 담당 부서를 지휘하던 투자은행가 에릭 글리처(Eric Gleacher)는 켈리 그리고 KKR의 공동 회장인 헨리 크래비스를 만나 보라며 벌써 몇 달째 존슨에게 끈질기게 권유했다. 존슨은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하지만 글리처가 웨스트 57번가 9번지 솔로 빌딩에 있는 RJR 나비스코의 뉴욕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존슨의 마음은 이미 변해 있었다.

[모건 스탠리 에릭 글리처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자 아이라 해리스가 무대에 나타났다. 해리스는 시카고 투자은행가들 사이에서 최고참으로 통했는데, 존슨 및 켈리 두 사람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해리스는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존슨에게 전화해서 존슨이 잘 가는 골프장 가운데 하나이던 롱아일랜드의 디프데일 클럽에서 골프를 치자고 했다.


경기를 마친 세 사람은 클럽하우스 베란다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이때 켈리가 LBO가 가져다주는 믿을 수 없는 수익, 특히 헨리 크래비스와 손잡고 LBO를 할 때의 엄청난 수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존슨을 재촉했다.


열흘 뒤 존슨은 파크애버뉴에 있는 크래비스의 아파트로 갔다. 거기에는 켈리가 먼저 와서 크래비스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크래비스의 체격은 왜소했다. 머리카락은 은빛이었고, 나이는 마흔 살에 성격은 열정적이었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 LBO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회사가 부채를 가지고 있으면 운영에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고, 경영진은 따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수백만 달러를 그냥 벌어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존슨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난 그런 쓰레기 같은 술책에 속지 않았죠. 누구든 돈을 투자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목줄을 바짝 잡아당길 건 뻔한 얘기잖아요.”

존슨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존슨이 이해하기에 상당히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으로 대화가 이어지자 존슨은 화제를 바꾸어 나머지 시간 대부분 동안 곧 생산에 들어갈 연기 안 나는 담배 ‘프리미어’ 이야기를 했고, 만난 지 90분도 채 되지 않아 크래비스의 집에서 나왔다. 크래비스가 매우 명석하고 끈기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존슨은 자기와 크래비스가 함께 일할 경우는 전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존슨은 RJR 나비스코의 웨스트 57번가 9번지 솔로 빌딩 뉴욕 사무실에서 세이지, 베너벤토와 함께 LBO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존슨은 베너벤토의 분석 과정을 자세히 살폈다. 특히 영업 이익으로 발생하는 현금 흐름과 부채 상환금 사이의 완충 장치인 이자보상배율을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이 수치가 너무 낮았다. 존슨으로서는 최고경영자로서 자기가 누리는 특혜는 말할 것도 없고 회사 전체적인 비용을 줄이려고 열정을 쏟을 생각이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존슨은 창가로 가서 맨해튼 남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월스트리트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우리가 말이죠······, 5년 뒤에도 우리 세 사람이 여전히 회사의 핵심 전략가로 남아 지금처럼 이 자리에서 이런 논의를 하고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아직은 환상의 유혹이 존슨을 사로잡지 못한 것 같았다.


4장
주가폭락이 RJR 나비스코 수장을 괴롭히다


1987년 10월 19일, 주식 시장이 붕괴했다. 금융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존슨은 쿼트론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RJR 나비스코는 일주일 전만 해도 60달러 중반에서 거래되었는데 이날 정오 무렵에 40달러대 중반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 몇 주 동안 계속 그 선에서 맥없는 모습을 보였다.


[1987년 주식대폭락 기사와 주가 그래프 출처 구글 이미지]

존슨이 아무리 애쓰며 회사의 면모를 바꾸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주식을 담배 회사 주식으로만 바라보았다. 전체 매출액 가운데 60퍼센트를 나비스코와 델몬트가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RJR 나비스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만일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 사업 분야가 뜨겁게 달아오른다면 곧바로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대상은 ‘필스버리’였다. 존슨은 이런 생각을 세이지와 베너벤토에게 넘겼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스버리는 겉만 번드르르할 뿐 실속이 없으며 필스버리의 핵심 사업 부문은 빈혈 상태라는 게 두 사람 의견이었다.

[필스버리 광고 출처 구글 이미지]

스팽글러 사건


RJR 나비스코 주식이 실제보다 낮게 평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존슨만이 아니었다. 클레미 딕슨 스팽글러 주니어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총장이었다. 1986년에 총장이 되었는데, 그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의 기업계에서 진정한 실세 거물이었다. 스팽글러는 1987년 10월 이후 RJR 나비스코의 주가가 곤두박질친 뒤로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애를 끓였다. 그리고 모든 잘못이 로스 존슨 때문이라며 화를 냈다. 그는 스틱트를 잘 알고 있는 와코비어 은행의 존 메들린을 통해 스틱트에게 한번 보자고 했다.


만일 스팽글러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고자 한다면, 존슨도 끌어들여야 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간 끝에 스팽글러가 스틱트에게 존슨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스팽글러는 존슨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한 주에 70달러의 LBO 이야기였다. 스팽글러와 스틱트는 이미 시티뱅크의 관계자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시티뱅크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말했다.


존슨과 이사들은 화요일에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일단 시티뱅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결론 내렸다. 만남의 목적은 단 하나, 스팽글러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시티뱅크와의 만남은 오히려 존슨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은행에서는 한 주에 65달러로 해서 LBO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존슨에게는 10퍼센트의 몫을 주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은 건 분명했다.


스팽글러 사건 이후에 존슨은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존슨은 아이라 해리스의 투자은행인 라저드 프레어스의 지도를 받으며 자사주를 매입했다. 존슨은 주식을 매입하는 데 11억 달러 이상을 썼지만 주가는 40달러 중반으로 예전보다 더 떨어졌다.


1988년 봄이 되어도 월스트리트는 지난해 10월의 주식 시장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별 투자자들은 떼를 지어 시장을 빠져나갔다. 거래량도 줄어들었다. 사자는 주문이 지지부진하면서 주식회사 미국은 새 주식 공모에 완전히 관심을 잃었다. 다른 경제 분야에서처럼 월스트리트도 단 하나의 보장된 수입원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인수 합병이었다.


시어슨 리먼 허턴


그해 봄을 휩쓸었던 이 기업 인수 합병 바람의 맨 꼭대기에는 ‘시어슨 리먼 허턴’의 합병 담당 부서가 있었다. 시어슨 리먼 허턴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라는 금융계 거물의 자회사로서,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기업 인수 중개 사업을 하던 회사였다. 시어슨은 그해 겨울에 ‘E. F. 허턴’을 인수했다.


스티븐 워터스는 심지가 굳고 신실하며 대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덕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존슨도 스탠더드 브랜즈 시절부터 알았던 워터스를 좋아했다. 워터스와 비교하면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출신인 J. 토밀슨 힐 3세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던 전투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전사였다.


시어슨의 최고 경영진을 만난 자리에서 워터스는 회사의 보너스 지급 구조를 솔직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시어슨의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특히 회장이던 피터 A. 코언이 화를 낸 게 문제였다. 그는 워터스가 사람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워터스는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고, 코언은 곧바로 그의 사직을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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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워터스와 피터 코언 출처 구글 이미지]

파트너가 떠나자 힐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워터스는 시어슨의 우수 고객들을 많이 유치하고 관리했는데, 이들이 워터스를 따라 시어슨을 떠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객이 RJR 나비스코였다. 로스 존슨은 그 부서의 우수 고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워터스는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진로를 상담했는데 그 중 하나가 로스 존슨이었고, 그의 취직을 도왔던 또 한 사람의 고객이 있었는데, 바로 헨리 크래비스였다. 워터스는 결국 모건 스탠리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합병 부서 책임자 에릭 글리처로부터 모건 스탠리에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출근 이틀째 되던 날 워터스는 글리처의 사무실에서 시어슨의 어떤 고객들을 모건 스탠리로 빼내야 할 것인지 논의했는데, 1순위 대상으로 꼽힌 인물이 존슨이었다.


존슨 설득하기


봄이 다 갈 무렵에 로스 존슨이 큰 거래를 할 준비를 갖추었고 이제 곧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소문이 월스트리트에 파다하게 퍼졌다. 제프리 벡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줄곧 LBO를 하라고 존슨의 옆구리를 찔러온 터였다. 아이라 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힐과 워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각자 어떻게 하면 ‘교황’을 가장 잘 설득할지 나름대로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주가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존슨은 수십 개에 이르는 계획들을 자세히 검토했다. 필스버리와의 논의가 수포로 돌아가자 존슨은 아이라 해리스에게 게토레이 생산 회사인 ‘퀘이커 오츠’에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보게 했다. 스티븐 워터스는 존슨이 시카고의 거대 식품 기업인 ‘크래프트’를 인수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존슨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주가를 끌어올릴 다른 방법들도 있었다. 존슨은 연기 나지 않는 담배 프리미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가을쯤에는 프리미어가 시험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었다. 이미 지난 9월에 많은 공을 들여 뉴욕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기자 회견장에서 일반에 선을 보였었다. 프리미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맛이 없다는 점이었다. 잇단 테스트에서 계속 낙제점을 받았던 것이다.


프리미어가 출시될 가을이 몇 달 남지 않은 6월, 주가의 상승을 기대하는 심리가 크게 뛰었다. 평생 담배를 피우다가 사망한 로즈 시펄로니의 남편 앤서니 시펄로니는 아내의 죽음이 흡연과 관련 있다면서 수많은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뉴저지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RJ 레이놀즈는 피고 명단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기나긴 공방 끝에 마침내 배심원이 평결을 냈는데, 불패의 기록을 이어 왔던 담배 회사의 역사를 뒤집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원고 측의 압도적인 승리도 아니었다. 빠듯한 승리였다. 40만 달러의 배상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존슨은 RJR 나비스코의 주가가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주가는 오르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RJR 나비스코의 중역진에서 존슨의 ‘유쾌한 친구들’은 결성된 지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붕괴하고 있었다. 피터 로저스는 가을에는 물러날 예정이었고, 부회장으로 애틀랜타에서 존슨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로버트 카보넬은 호리건과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결국 마이애미의 델몬트 사장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을 대신해 존 마틴이 수석 부사장으로 존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카보넬처럼 신뢰하던 조언자들을 내친 것은 존슨에게 어떤 불안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포천》은 그해 여름 존슨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으며 ‘미국에서 가장 거친 기업계 인물’이라는 기사를 냈다.

그는 단단하게 잘 짜여 있는 낡은 문화를 가차 없이 공격하고 거칠고 분주한 조직 문화로 대체하는 데 전문가의 솜씨를 발휘한다. 세 개의 기업 조직에서 그는 2650명의 관리직 직원을 강등시키거나 내쫓았다. ······ 존슨은 줄곧 자기 부하들을 미래의 창문 밖으로 거칠게 밀어붙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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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존슨 등장 포천 출처 구글 이미지]

존슨의 친구들은 두 가지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우선, 존슨이 자신에 대한 언론 매체의 평을 믿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언제나 깍듯하게 모시던 존슨이 이제는 이사회 회의를 우습게 알고 이사들 앞에서 오만하게 굴었다. 스탠더드 브랜즈와 나비스코에 있을 때처럼 존슨은 회사를 경영하는 데 점차 관심을 잃어 가는 듯했다.


적대적 인수 대응


7월에 에드워드 로빈슨과 해럴드 헨더슨은 회사의 주가가 계속 너무 낮은 상태로 유지되다가는 적대적 인수의 표적이 되기 쉽다고 걱정하며, 존슨의 승인을 받아 적대적 인수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시어슨 리먼에 접근했다. 적대적인 인수의 기미가 보이는 순간 즉각 방어에 나설 수 있는 대비책들을 믿을 만한 이른바 ‘명문 집단’에 의뢰해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시어슨은 이런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존슨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이사였으며, 시어슨의 최고경영자인 피터 코언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인 제임스 로빈슨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코언과 토밀슨 힐을 포함해 시어슨의 중역 다섯 명만 이 대비책 마련 작업을 알고 있었다. 힐이 암호명을 ‘스트레치 프로젝트’라고 정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존슨은 RJR 나비스코의 이사회를 열어 로빈슨과 헨더슨이 월스트리트의 법률 회사인 ‘데이비스 포크 앤드 워드웰’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일련의 반反적대적 인수 대비책을 승인하게 했다. 이사회는 또한 회사의 상위 10인 경영진 각자에게 ‘황금 낙하산’으로 알려져 있던 고용 계약 해제 보상비도 함께 승인했다. 또한 중역을 위한 낙하산으로 들어갈 자금을 이른바 ‘랍비 신탁'*으로 따로 설정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 랍비 신탁(rabbi trust): 기업의 중역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설정하는 신탁. 회사가 파산하면 채권자가 이 돈을 취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자산이 채권자에게 귀속되지 않는 것은 ‘세속 신탁(secular trust )’이라고 부른다.


주가에 대해 존슨이 걱정하고 이에 대응하여 해법을 찾으려 할 때 그가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인지 분석한 사람들은 누구나 LBO 가능성을 언급했다. 주가가 떨어진 회사라면 어느 회사든 취할 수 있는 표준적인 해법이 LBO였기 때문이다. 물론 LBO는 주가 하락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이 문제의 결말이었다.


한동안 존슨은 LBO를 제외한 모든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그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야심적인 방안이 7월에 갑자기 부상했다. 그전에 몇 달 동안 존슨은 필립 모리스의 국제 사업 부문과 레이놀즈의 국제 사업 부문을 하나로 합치자고 필립 모리스 측을 설득했었다. 필립 모리스는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는 데 관심을 표했고, 존슨은 합작 사업을 하자는 역제안을 했다. 물론 호리건은 이 방안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7월 말에 존슨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필립 모리스의 최고경영자 해미시 맥스웰을 만났다. 일단 두 식품 회사를 합친 뒤엔 RJR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담배 사업은 호리건에게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이상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존슨은 맥스웰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주 멋진 아이디어군요. 하지만 합작 회사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8월 중순에 맥스웰은 답변했다. “미안하지만 필립 모리스는 관심이 없습니다.”


며칠 뒤 존슨은 와이오밍의 자기 목장에 있던 앤드루 세이지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으로 가는 길에 캐슬파인스에 들르라고 했다. 세이지는 LBO가 RJR 나비스코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책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LBO 자체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미국의 위대한 기업들이 건강한 주주들을 모두 쫓아내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모습들이 싫었다.


존슨은 세이지에게 ‘스트레치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시어슨에 전화를 걸어 일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시어슨에서는 힐의 팀이 이미 RJR 나비스코의 자회사들을 대상으로 평가액을 산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존슨은 이런 일이 9월 중순까지는 모두 끝나기를 바랐다. LBO의 가능성을 가능하면 빨리 타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사고와 존슨의 LBO 결심


9월 7일 수요일 존슨의 아들인 스물여섯 살 청년 브루스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존슨은 한동안 방황했지만 로빈슨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일 속으로 뛰어들었다. 존슨은 LBO의 성공 가능성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직접 몸을 푹 담갔다.


마침내 월요일 저녁이 되었을 때 존슨은 분명한 자신감을 느꼈다.

‘인수에 필요한 돈을 끌어모을 역량은 충분해. 게다가 이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할 준비도 모두 끝났어······.’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가면서 존슨은, 아들에게서 놓여날 수 있는 힘을 준 신에게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피터 코언과 토밀슨 힐이 이끄는 시어슨의 대표단이 RJR 나비스코의 뉴욕 사무실이 있는 솔로 빌딩을 찾아왔다. “피터, 당신은 과연 이게 가능할 것이라고 믿소?” 존슨이 물었다.

“그럼요, 우린 해낼 수 있습니다.” 코언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제프리 벡은 당황스러웠다. 존슨이 자기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벡은 앤드루 세이지와도 통화할 수 없었다. 세이지는 존슨으로부터 LBO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로는 아무리 벡이 메시지를 남겨도 전화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세이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벡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메시지를 남길 때마다 제임스 웰치가 대신 전화했다.


9월 12일, 벡은 이런 생각을 헨리 크래비스에게 가서 했다.

“내 생각에는 RJR에 대해 뭔가 작업에 들어가야 할 때 같아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로스가 원하는 걸 당신은 양보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요.”

크래비스가 물었다. "그게 뭐죠?"

“단 한 가지죠. 경영권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놓고 제법 오랜 시간을 토론했지만 존슨과 먼저 이야기를 해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일단 자리를 한번 만들어 봐요. 그러면 그때 가서 얘기할 수 있겠죠.”

벡은 일단 웰치에게 존슨과 크래비스가 만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웰치는 미적거리면서 10월 마지막 주나 11월 첫 주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언질을 했다. 그때 가면 자신의 요구는 이미 물 건너간 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미친개’ 벡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5장 사모펀드 KKR의 성장과 LBO 전성시대


9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바람이 무척 세차게 불던 이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바깥에서는 할리우드의 시상식 오프닝 행사 못지않은 화려함이 펼쳐졌다. 뉴욕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솔 스타인버거 부부,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펀치 설즈버거와 캐럴 설즈버거 부부, 억만장자 사업가인 조너선 티시와 로라 티시 부부, 그리고 100명 가까운 유명 인사들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날 초대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파티의 주인공은 1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그 자리에 선 헨리 크래비스와 그의 아내인 패션 디자이너 캐럴라인 롬(두번째 부인, 1985-1993)이었다. 턱시도를 입은 크래비스의 키는 17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 롬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크래비스보다 적어도 10센티미터는 더 컸다.

[헨리 크래비스와 캐롤라인 롬, Marie-Josée Kravis(세 번째 부인) 출처 구글 이미지]

이날의 파티는 사실 1980년대 신흥 부자들의 사교계인 ‘누벨 소사이어티’에서 새로운 재계 실력자로 떠오른 크래비스와 롬을 위한 비공식적인 대관식이었다. 결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이 부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맨해튼 사교계의 최정상 자리에 등극했다. 르누아르의 작품들과 프랑스 골동품들로 가득한 550만 달러짜리 이들 부부의 파크애버뉴 아파트는 이미 자선 파티의 전설로 자리 잡았다.


그가 월스트리트에서 거둔 성공은, 당시가 아무리 활황의 1980년대였다 하더라도 무척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5년 전만 해도 무명이었던 크래비스와 의문에 싸인 그의 회사는 월스트리트에 불던 LBO 열풍을 타고 1980년대 중반에 단숨에 두각을 나타냈다. 오랜 기간 동안 그에게 스승이었던 제롬 콜버그를 그가 어떻게 따돌렸는지는 이미 세상에 파다하게 알려졌고 쑤군거림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당대에 450억 달러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크래비스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월스트리트에서 인수 합병의 황제였다. 그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다. 그가 동원하는 자금은 다른 경쟁자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파키스탄이나 그리스의 국민총생산보다 규모가 더 컸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났던 1944년 무렵에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모았다가 잃고 다시 또 모았었다. 어린 시절 그의 모습에서는 그가 이처럼 특출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특이한 사항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뒤 부유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헨리 크래비스가 열세 살이 되자 부모는 그의 형 조지가 있는 이글브룩이라는 학교에 넣었다. 코네티컷에 있는 루미스고등학교로 전학한 크래비스는(그때 그에게는 ‘행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인기가 좋았다. 루미스고등학교에선 경제학을 배우면서 기업계로 진로를 정하고, 클레어몬트남자대학에서 재무학을 전공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이 대학은 전교생이 6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1960년대 클레이몬트대학의 조지 러버츠와 헨리 크래비스 출처 구글 이미지]

4학년 때 그는 졸업 후 월스트리트의 핫머니 전문 운용 회사 ‘매디슨 펀드’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스톡 피커(stock picker, 좋은 투자 수익을 남길 주식을 잘 고르는 사람)로서 이름을 떨쳤다. 1967년 가을, 크래비스는 컬럼비아 비즈니스스쿨에 등록했다. 하지만 이내 후회했다. 월스트리트의 활력이 그리웠던 것이다.


월스트리트가 크래비스를 향해 손짓했다. 매디슨 펀드는 ‘케이티 인더스트리스’라는 작은 철도 회사를 샀는데, 머클은 크래비스의 열정에 감동받아 오클라호마 출신의 청년에게 케이티 인더스트리스의 다각화 사업을 맡겼다. 마침내 케이티가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되자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던 크래비스는 다시 새로운 도전 과제를 찾아 나섰다.


일이 없던 그는 외사촌이던 조지 로버츠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크래비스보다 한 살 더 많은 로버츠는 휴스턴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와 크래비스의 어머니는 남매 사이였다. 크래비스의 외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살던 유대인이었는데 1890년대 말 차르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길 대신 미국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었다.


그는 인디애나의 컬버군사학교를 다닌 뒤에 크래비스보다 한 해 먼저 클레어몬트대학교에 입학했다. 조지가 스물한 살 때 레이먼드 크래비스는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이던 ‘베어 스턴스(Bear Sterns)’에서 여름방학 동안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소개했다.

[베어스턴스 본사 건물 출처 구글 이미지]

다른 사람보다 늘 먼저 출근했던 로버츠는 조용히 끈기 있게 열심히 일하면서 이 회사의 기업 대출 부서의 책임자이던 제롬 콜버그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헤이스팅스대학교의 로스쿨을 마친 뒤에 콜버그의 부하 직원으로 취직했다. 로버츠는 콜버그를 위해 일하는 게 좋았다. 콜버그가 회사 내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소용돌이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제롬 콜버그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내 뉴욕이 지겨워졌다. 그는 결혼해서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었다. 콜버그가 베어 스턴스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 자리를 만들어 주자, 콜버그를 위해 계속 일하고자 했던 로버츠는 자기 후임으로 사촌인 헨리 크래비스를 추천했다.


콜버그의 주식 담보 차입 거래(bootstrap deal)


콜버그는 자신의 좁은 영역 안에서 수익성 높은 곁가지 사업을 따로 개발해 두고 있었다. 이른바 ‘주식 담보 차입 거래(bootstrap deal)’라는 것이었다. 주식 담보 차입 거래는 나중에 LBO라는 명칭으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나이 든 사람들을 돕는 수단으로 처음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반쯤 되면서, 가족 소유 기업을 세워 전후 경제 부흥기에 번성을 구가한 많은 사람들이 점차 노인 대열에 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속세를 피하면서도 기업에 대한 지배력은 여전히 가족이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고 모색한 끝에 세 가지 방안을 찾았다. 개인 기업으로 그대로 유지하는 것, 공매 과정을 통해 주식을 일반에 매각하는 것, 그리고 좀 더 규모가 큰 회사에 파는 것이었다.


콜버그는 LBO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보았다. 나이 든 경영주가 ‘케이크를 소유하는 동시에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거래는 1965년 뉴욕의 마운트버넌에 있던 치과 용품 제조 회사인 ‘스턴 메탈스’를 자기가 모은 투자자 집단이 후원하는 명의뿐인 유령 회사를 만들어 950만 달러에 매입하는 것이었다. 매입에 필요한 돈은 대부분 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그리고 스턴 메탈스 사람들은 이 회사에 대한 경영권을 계속 유지했다.


여덟 달 뒤에 콜버그는, 회사가 부채를 갚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식 일부를 일반에 팔았다. 그가 이 주식을 처음 살 때는 한 주에 1.25달러를 주었지만 팔 때는 8달러를 받았다. 이어 이 회사가 캘리포니아의 치과 용품 공급 회사, 오하이오의 엑스레이 회사, 그리고 유럽의 치과 의자 제조 회사를 사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2년 뒤에 원래의 투자자들이 50만 달러를 주고 샀던 이 회사의 주식을 팔고 보니 400만 달러로 늘어나 있었다.


1960년대에 한껏 덩치를 키웠던 기업들이 1970년대 초에 주식 시장이 주춤하면서 자회사들을 팔기 시작하자, 콜버그는 이들 기업이 털어 내는 자회사들을 사기 위해 사업을 확장했다. 주로 차입금을 이용해 회사를 매입했기 때문에, 나중에 차입금 상환 문제로 압박을 받지 않으려면 미래의 수익 및 현금 흐름을 중시하는 태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그에게 대차 대조표는 타로 카드였고 예상 현금 흐름은 수정 구슬이었다.


콜버그는 일단 어떤 회사에 손을 대면 그 회사의 비용 지출을 가능한 한 줄이고 필요 없는 사업 부문을 매각해서 부채를 갚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경영진에 스톡옵션이라는 인센티브를 부여했는데, 이런 조치가 경영진으로 하여금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서 회사를 더욱 효율적으로 경영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따라서 나중에 회사를 팔 때 회사의 가치는 살 때보다 훨씬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LBO는 그때 이후로 이런 기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1973년, 3년 동안 지도와 교육을 받은 덕분에 크래비스는 독자적으로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65년부터 1975년 사이에 콜버그가 성사시킨 열네 건의 기업 인수가 이룬 수익률 그래프는 높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져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주식 가격이 떨어질 때는 콜버그의 수익률도 비참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나중의 기준으로 보면 그랬다는 말이다.


고종사촌 관계이던 로버츠와 크래비스, 그리고 이들의 상관인 콜버그가 회사 매입 활동에 열을 올리는 동안 투자 회사의 기본적인 일상 업무인 기업 대출 활동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일로 베어 스턴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었다. 사장인 샐림 ‘사이’ 루이스도 불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베어 스턴스가 보기에는 하루를 넘겨서 다음 날까지 팔지 않고 기다리는 것조차 장기 투자에 속하니까요.”

‘사이’ 루이스는, 곁가지일 뿐인 데다 말도 안 되는 투자 방식인 기업 매입에 콜버그가 지나치게 힘을 많이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한 건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 한 건이 실현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런 불만은 1976년에 결국 폭발했다. 크래비스가 코네티컷의 하트퍼드에 있는 직접 판매 회사 ‘애드보’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콜버그와 크래비와 로버츠가 베어 스턴스 내에 독립적인 LBO 전문 회사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KKR 창업


콜버그와 로버츠 그리고 크래비스는 함께 회사를 나가는 방안을 놓고 이야기했다. 콜버그의 밑천은 500만 달러 정도 되었고, 회사에 계속 남아 있는다 하더라도 인센티브는 거의 없었다. 독자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아버지에게 철저히 배운 로버츠는 크래비스더러 함께 나가 회사를 차리자고 종용했다.


세 사람이 떠나자마자 루이스는 콜버그가 매입한 모든 회사들에 대한 통제 권한을 베어 스턴스가 가진다고 선언했다. 세 사람의 돈 수백만 달러가 이들 회사에 잠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이들 회사의 이사회를 장악해 버렸다. 이어 루이스는 콜버그의 투자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변호사들이 동원되었고, 길고 힘든 협상 끝에 세 사람은 자신들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5번가에 있는 한 낡은 건물에 입주했다. 콜버그는 자기를 크게 부풀려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무실 문에는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이름도 붙어 있지 않았다. 로버츠는 여전히 샌프란시스코를 무대 삼아 일했다. 세 사람은 여덟 명의 투자자들로부터 각각 5만 달러씩 받아 일반 경비로 나갈 자금을 조성했다.

5년 동안 이들은 콜버그가 세운 지침을 철저히 지켰다. 모든 거래는 우호적이어야 하고, 경영진과 협력해야 하며 늘 조심해야 한다는 지침이었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의 해리 로먼이라는 기업 평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인수 대상 회사들을 포착했다. 아직 LBO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어서 세 사람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자기들이 전체 회사를 사는 데 드는 돈을 어떻게 빌릴 수 있을지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거래가 폭주했다. 1977년에 세 건이었고, 1978년에는 한 건도 없었지만, 1979년에는 다시 세 건이었다. 이 가운데는 주식 시장에 상장된 대형 회사를 최초로 매입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데일 인더스트리스’라는 회사였다. 그리고 1980년도에는 실적이 저조했지만, 1981년에는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었다. 여섯 건의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이 작은 회사를 표지 기사로 실으려는 잡지의 취재 요청이 쇄도했다.


1978년에 3000만 달러로 시작했지만 머지않아 점점 더 큰 규모의 자금 원천들을 마련했고, 1983년에는 무려 10억 달러나 되는 자금을 조성했다. 거래 규모도 점차 커졌다. 이 기간에 있었던 가장 큰 거래는 하와이의 건설 회사 ‘딜링햄 코퍼레이션’을 매입한 것이었고, 이 거래의 규모는 4억 4000만 달러였다.


1983년에 KKR는 연평균 수익률 62.7퍼센트의 성과를 기록했다고 투자자들에게 보고했다.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20퍼센트의 지분은 물론 이들을 거부로 만들었다.

6년 동안 사업은 막힘없이 풀렸고, 세 사람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틈새시장을 소리 없이 장악했다. 그러다가, 월스트리트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눈치 챘다.


1982년 재무장관을 지낸 적이 있는 윌리엄 사이먼의 '깁슨 그리팅스' LBO 인수로 인한 대성공 이후,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LBO의 원리조차 모르면서 LBO를 시도하려고 나섰다. 그리고 또 실제로 시도했다. 매입된 회사의 매입 가격을 모두 합한 금액을 기준으로 할 때, 1979년부터 1983년까지 LBO 현상은 열 배가 커졌다.


수많은 요인들이 한데 결합해 이 광풍을 부채질했다. 미국의 세법은 배당금이 아니라 이자를 세금 부과 가능한 소득에서 공제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런 경향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그 바람에 LBO는 땅을 박차고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LBO에 날개를 달아 준 건 정크 본드였다.


1980년대 중반에 ‘드렉설 버넘 램버트’라는 투자 회사는 조성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보험 회사의 자금 대신 위험도가 매우 높은 이른바 ‘쓰레기’ 본드를 동원했다. 드렉설 안에서 채권의 황제라 불리던 마이클 밀컨은 적대적 인수가 이루어지려 할 때 거대한 자금을 순식간에 동원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LBO에 투입된 밀컨의 정크 본드는 LBO 사업을 ‘딱정벌레’ 폭스바겐 비틀에서 드래그 레이스(drag race)의 연기와 불을 뿜고 달리는 ‘괴물 자동차’로 변모시키는 매우 효율적인 연료가 되었다.

[드렉셀과 마이클 밀컨 출처 구글 이미지]

정크 본드 덕분에, 인수 전쟁에서 경쟁하기엔 동작이 지나치게 굼뜨다고 여겨지던 LBO 매입자들은 그제야 독자적으로 순간적일 정도로 빠르게 거래 제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KKR나 다른 LBO 전문 회사들은 경영의 자율성을 보장해 줄 뿐 아니라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대적 인수를 노리는 기업 사냥꾼의 위협에 직면한 회사의 경영진은 이들에게 ‘백기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이런 요청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유일하게 피해를 보는 쪽은 그 회사의 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 회사의 직원들이었다. 회사가 새로운 빚을 떠안으면서 채권 가격은 떨어지고, 회사가 군살을 빼려고 구조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해고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는 콧노래를 부를 뿐, 이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제롬 콜버그와의 갈등


1983년이 되었을 때 LBO 집단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제롬 콜버그의 눈에는, 본인이 커다란 역할을 해서 생긴 현상이 점차 못마땅하게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나이 지긋한 신사 경영자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 뒤에 추진하는 소규모의 우호적인 거래를 선호했다. 하지만 KKR에는 새로운 거래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투자은행가들이 수도 없이 꾀어들었고, 이들이 LBO 매입자의 새로운 종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LBO라는 게임의 진행 속도가 점차 빨라지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4년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10억 달러 규모의 LBO를 성사시켰고, 기업 인수 기회가 점차 더 많아지자 직원을 더 채용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콜버그는 추가 인력을 고용하는 걸 가로막고 나섰다. 콜버그는 회사 안에서 ‘닥터 노N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83년 말부터 콜버그는 이상한 어지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 뇌에 응혈이 있어 1984년 초에 뉴욕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응혈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당시를 콜버그의 친구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병실로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며 화를 많이 냈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폐에서 또 다른 응혈이 발견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제롬 콜버그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1986년에 KKR의 다섯 번째 파트너로 임명된 폴 래더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생각하면 제리는 아직 회사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제리는 1985년에 회사로 복귀했습니다만, 몸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었죠. 일주일에 스물다섯 시간 정도 일했죠. 그러니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자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일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콜버그와 사촌 형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비어트리스 매입을 놓고 경쟁자들과 싸움을 벌이던 와중에 겉으로 터졌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적대적 인수를 주장했지만 콜버그는 두 사람의 이런 계획에 반대했다. 그동안 참석하지 않았던 회의에 콜버그가 갑자기 자기도 참석해야겠다고 나설 때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진실은 단순한 데 있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에게 이제 예전의 스승이던 콜버그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콜버그가 없는 동안 두 사람은 어렵고 복잡한 그리고 대규모의 수많은 거래들을 성사시켰다. 이 가운데는 24억 달러의 ‘스토어러 커뮤니케이션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콜버그와 크래비스 사이의 간극은 두 사람 생활 방식의 뚜렷한 차이 때문에 더 크게 벌어졌다. 콜버그는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40년 동안 한 여자와 결혼 생활을 꾸려 왔었다. 비록 큰돈을 벌었어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크래비스는 화려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살았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크래비스는 캐럴라인 롬을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어느새 언론 매체의 단골 기사 제공자 중 한 쌍으로 자리를 잡았다.


결국 이들 사이 불화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이고, 또 하나는 권한이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콜버그가 자기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원한다고 보았다. 회사를 설립할 때 세 사람은 콜버그가 수익의 40퍼센트를 가져가고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수익의 30퍼센트씩 가져가기로 합의했었다. 그런데 다른 파트너들이 동참하면서 이들의 몫은 콜버그의 몫에서 떼어졌다.


콜버그가 떠나겠다고 암시했을 때 크래비스나 로버츠 어느 누구도 그의 결심을 말릴 마음이 없었다. 콜버그와 그의 아들은 조지 펙과 함께 독자적인 LBO 회사인 ‘콜버그 앤드 컴퍼니’를 세웠다. 이 회사는 소규모의 우호적인 기업 인수 거래에만 집중했다.


캐럴라인 롬 이야기


월스트리트의 거물이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크래비스는 뉴욕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순전히 오랜 기간 동안 캐럴라인 롬에게 끈질기게 구애하고 다닌 덕분이었다. 패션 디자이너 캐럴라인 롬의 원래 이름은 제인 스미스였다. 그녀는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fmf 졸업하자마자 세계 패션의 수도인 뉴욕 7번가로 진출했다.


그녀는 남자 친구 액슬 롬이 권하는 대로 이름을 캐럴라인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결혼했고, 캐럴라인 롬이 된 그녀는 독일의 다름슈타트로 가서 부유한 결혼 생활을 했다. 하지만 외로운 가정주부의 나날이었다. 결국 그녀는 지겨움을 참지 못하고 1년 만에 눈물을 흘리며 더 라 렌타에게 돌아왔다. 이렇게 첫 번째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더 라 렌타는 그녀에게 저가 제품인 ‘미스 오Miss O’를 맡겼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젊은 이혼녀는 절치부심,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한 해 뒤인 1979년, 그녀는 한 파티장에서 크래비스를 만났다. 처음에는 사랑이 아니었다. 우선 크래비스가 그녀에 비해 너무 작았다. 게다가 그는 월스트리트에 직장을 가진 따분한 사람이었다. 또 비록 크래비스가 9년 동안 함께 살았던 아내와 별거 상태이긴 해도 유부남이었다.


크래비스의 결혼 생활은 벌써 여러 해째 파탄을 향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1970년에 헤디 슐먼과 결혼했었다. 브루클린의 정신과 의사 딸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억만장자가 되는 것은 아직 멀고 먼 꿈이었던 당시에 크래비스는 아내의 헤픈 씀씀이 버릇을 타박하고 나섰다.


크래비스는 경쟁자들을 견제하면서 기업을 사냥할 때처럼 가능한 모든 열정을 담아 롬에게 구애했다.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은 사업적인 동반자였다. 1984년에 크래비스는 롬이 패션 디자인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4년 뒤에 남성 패션 잡지인 《GQ》는 크래비스와 롬의 결혼식을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과 나란히 ‘1980년 이후의 세기적인 결혼식’ 중 하나로 꼽았다.


KKR의 성장


과거 KKR와 몇 안 되는 회사들의 전용 사냥터와 다름없었던 LBO 산업은 1987년이 되면서 점차 붐비기 시작했다. 깁슨 그리팅스와 비어트리스에서 엄청난 수익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낀 수많은 기관 투자자들이 LBO를 하겠다는 투자 회사에 수십억 달러의 돈을 쏟아부었다.


월스트리트의 두 거물 회사인 모건 스탠리와 메릴린치는 LBO를 위해 각각 1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시어슨을 포함해 대부분의 다른 회사들 역시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1986년에 2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는데, 경쟁 회사 가운데 하나이던 ‘포스트먼 리틀 앤드 컴퍼니’가 무려 27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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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먼 리틀 로고와 설립자 테오도르 포스트먼 출처 구글 이미지]

예전에는 크래비스가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매입 협상도 이제는 입찰 경쟁 시대로 바뀌었다. 이미 끝난 거래도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매입자가 나타나면 곧바로 취소되었다. 그 바람에 몇 달을 공들인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크래비스가 이런 경쟁에서 이겼을 때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가격을 불러야 했다.


KKR가 LBO 분야에서 부동의 1위임을 천명하려면 어떻게든 경쟁자들을 압도해야 했다. 유일한 방법은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1987년 초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거대한 규모의 기업 인수 거래를 추진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경쟁자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50억 달러 혹은 100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시도해야 했다.


이들은 이미 몇 차례 거대 규모 LBO를 성사시킴으로써 정지 작업을 했었다. 62억 달러 규모의 비어트리스가 그랬고, 44억 달러 규모의 ‘세이프웨이 스토어스’가 그랬으며, 1987년 21억 달러 규모의 ‘오언스 일리노이’가 그랬다. 이제 그보다 더 큰 규모로 진출함으로써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토를 개척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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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들을 따돌리겠다는 게 거대 기업 인수가 가지는 유일한 매력은 아니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LBO를 할 때 대상 회사의 규모가 크다고 해서 그만큼 노력이 더 많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래 규모와 상관없이 그들이 받는 수수료 비율은 일정했다.


그리하여 1987년 6월에 새로운 펀드 모집을 시작했다. 투자자들의 관심을 좀 더 확실히 끌기 위해서 비어트리스의 성과를 내세우고 자신들의 높은 인지도를 무기로 활용했다. 그리고 1990년 이전에 완료되는 모든 거래에 대한 관리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넉 달 뒤 펀드 모집을 완료했을 때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56억 달러의 투자 자금을 무기로 깔고 앉았다.


이 자금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최대한 받는다고 할 때 이들의 구매력은 무려 450억 달러나 되었다. 이 정도면 《포천》 선정 500대 기업 가운데 ‘허니웰’과 ‘제너럴 밀스’ ‘필스버리’ 등을 포함해서 미니애폴리스에 본사를 둔 회사 열 개를 사고도 남는다고 《포천》은 지적했다. 월스트리트 역사상 이 정도의 대규모 자금이 단일 펀드로 모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가 아는 것은 반밖에 되지 않았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최초로, 투자자들로부터 목표 대상 회사들의 주식을 은밀하게 매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경쟁 환경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대응 방식으로 나타난 이런 전술이 좀 더 새롭고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체 LBO 시장에서도 우호적인 대화보다는 우격다짐으로 팔을 비트는 방식이 곧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


1987년 10월에 주식 시장이 붕괴하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움직이기 시작해서 미국의 여러 주요 회사의 주식들을 은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사들였다. 그런데 곧 드러나고야 말았지만, KKR의 문제는 물어뜯기만 했을 뿐 짖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연기금 투자자들이 돌아설까 봐 두려워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노골적으로 적대적 인수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월스트리트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수많은 사업 단위들을 팔아치웠지만, 비어트리스의 나머지 부분을 매각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사려는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크래비스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 있었다. 로스 존슨에서부터 하인츠까지 모든 식품업체 최고경영자들에게 제발 매입해 달라고 했지만 비어트리스는 팔리지 않았고, 여전히 크래비스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1988년 포천 표지에 등장한 크래비스와 로버츠, 기사 내용 출처 구글 이미지]

제프리 벡이 RJR 나비스코에 접근해 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을 때, 크래비스는 그 아이디어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와 비슷한 탐색을 한 달에 수십 건씩 하던 터였다. 10월 5일, 크래비스는 친하게 지내던 투자은행가 한 명과 아침을 함께 먹었다. 모건 스탠리의 스티븐 워터스였다.

“RJR는 어떻게 되어 가죠?” 크래비스가 물었다. 워터스는 특별히 새로운 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날 워터스는 존슨에게 전화를 했다. 자동응답기가 그의 전화를 받았고, 존슨 대신 제임스 웰치가 메시지를 듣고는 전화를 했다. “헨리가 담배 사업 부문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워터스의 말에 웰치가 대꾸했다.

“그것참 잘됐네요. 로스는 지금 바쁘고······, 아무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회사 재무 상태를 훑어본 뒤에 전화 드리죠.” 워터스의 전화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었지만, 존슨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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