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 앞의 야만인들 (2)

Barbarians at the Gate

by Andy강성
6장
모두가 돈방석에 올라앉는 그날을 꿈꾸며


금요일(10/7) 오후, 걸프스트림 제트기가 애틀랜타 상공의 구름을 뚫고 내려올 때 시어슨(Shearson)의 최고경영자 피터 코언은 주말 일정을 다시 한 번 되짚었다. 다음 날인 10월 8일 아침에 코언은 로스 존슨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비록 그가 여전히 LBO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분명한 의사 표현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LBO와 관련된 자료는 합병 책임자 토밀슨 힐이 지휘하는 팀이 몇 주 동안 고생하면서 충분히 정리한 상태였다.


코언은 키가 작았고,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 그는 작다, 어둡다, 인기 있다, 열정적이다 등 기자들이 자기를 묘사하는 내용을 가지고 농담을 즐겨 했다. 시어슨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샌디 웨일의 오랜 측근으로, ‘사형 집행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를 동물에 비유한다면 오소리였다. 40대로 접어들고 또 시어슨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르면서 그는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피터 코언과 샌디 웨일 출처 구글 이미지]

시어슨의 상황


1980년대 초반에 시어슨은 소규모 거래소들을 거느린, 작긴 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던 ‘와이어하우스’*였다. 하지만 시어슨은 이렇다 할 투자은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83년에 웨일로부터 시어슨을 넘겨받은 지 1년 뒤에 코언은 가장 오래된 동업 회사이며 일류의 냉혈 투자은행이던 그리고 내부 분열로 붕괴해 버린 ‘리먼 브라더스 쿤 로브(Lehman Brothers, Kuhn, Loeb Inc.)’를 인수함으로써 월스트리트를 깜짝 놀라게 했다.

* 본사가 각 지점들과 전기통신망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증권중개회사, 오늘날에는 종합증권회사를 의미한다.

[시어슨의 리먼 브라더스 인수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시어슨과 리먼 브라더스의 결합은 이상했다. 리먼은 믿을 만한 진짜 은제 담배 케이스이고, 신선한 꽃이며,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이고, 저장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오래된 오브리옹이나 페트뤼스 포도주였다. 그에 비하면 시어슨은 빈 피자 박스이고, 먹다 남은 컵라면 용기이며,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컵이었다. 리먼에 오래 몸담았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빈정거렸다.

“시어슨이 리먼을 인수한 건 맥도날드가 고급 레스토랑 ‘21 클럽’을 인수한 거나 마찬가지야.”


1981년에 대주주가 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은 코언은 자기 회사의 자본이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이 없나 여러 해 동안 탐색해 왔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모건 스탠리나 메릴린치 같은 경쟁자들이 LBO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드렉설의 정크 본드와 같은 막강한 무기와 경쟁할 생각으로, 자기네 자금을 이른바 ‘브리지론’이라는 이름의 잠정 인수 자금으로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런 대출금은 보통 나중에 정크 본드의 판매를 통해 돌려 막거나 브리징한다. 이런 흐름을 일반적으로 ‘머천트 뱅킹’이라고 불렀다.


리먼이 시어슨과 합병한 뒤, 리먼에 있던 유능한 직원들은 다른 회사로 가 버렸다. 그러자 코언은 1984년 말에 영국으로 가서 리먼의 런던 지사 책임자인 스티븐 W. 버섀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버섀드가 가지고 온 대답은 LBO였다. 하지만 수없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버섀드는 단 한 차례 그저 그런 규모의 LBO만 성공했다. 그리고 이 거래는 결국 엄청난 악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1986년 6월에 버섀드를 대신해 코언은 문제적인 인물인 대니얼 굿을 고용했지만, 그의 고객들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류 사냥꾼들(예를 들면 5번가의 아버트라저 애셔 에덜먼이나 소매 유통업의 스크루지 허버트 해프트 등)이었다. 굿의 사냥꾼들은 정크 본드를 거의 사지 않았기 때문에 시어슨의 정크 본드 부서는 공치는 일이 많았다. 애셔 에덜먼이 마침내 회사 하나를 낚아챘을 때(외식업체인 ‘폰데로사’) 시어슨의 정크 본드 거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코언은 잔뜩 화가 났다. 굿이 모든 비난을 뒤집어썼다.


이런 상황에서 로스 존슨이 방향을 바꾸어 LBO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 코언은 하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여겼다. 180억 달러 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수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LBO를 시어슨이 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어슨은 초일류 머천트 뱅킹 회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존슨이 제임스 로빈슨과 친하다는 점과, 성공할 경우 시어슨이 받게 될 혜택으로 고무된 코언은 존슨과 직접 만나 LBO를 논의한다는 사실에 몸이 바짝 달았다. 존슨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거래였다. 비행기가 마침내 애틀랜타 공항에 착륙할 때 코언은 모든 것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고 또 믿었다.

[존슨과 로빈슨 출처 구글 이미지]

다음 날인 토요일, 코언은 웨이벌리 호텔에서 토밀슨 힐, 잭 너스바움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시어슨의 수석 변호사이자 코언의 가장 가까운 자문 인력 가은데 한 사람인 너스바움은 고뇌에 찌든 불독을 닮은 얼굴이었지만 상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모로코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이 엄청난 거래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인 목요일에 애틀란타로 날아왔다. 그들은 아침을 먹은 뒤에 회담장인 존슨의 사무실로 갔다.


그 곳에는 호리건과 세이지, 존슨, 헨더슨 그리고 '데이비스 포크 앤드 워드웰(Davis Polk & Wardwell llp)' 소속의 스티븐 골드스톤이 서 있었다. RJR 나비스코의 중역진에 자문해 주는 역할로 존슨이 골드스톤을 선택한 것은 무척 의외였다. 월스트리트의 변호사들은 대부분 인수 합병 관련 자문을 전문으로 하거나 소송 변론을 전문으로 했는데 골드스톤은 둘 다 했다. 그를 고용하자는 안은 해럴드 헨더슨(RJR 나비스코 수석 법률 고문)이 낸 것이었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LBO가 될 게 분명했다.

[로펌 데이비스 포크 뉴욕 사무소 출처 구글 이미지]

'머리에 총 들이대기' 전략


대부분의 LBO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핵심은 이른바 ‘머리에 총 들이대기’라는 전략이다. 이 전략에서는 한 무리의 회사 중역들이 예컨대 시어슨 같은 월스트리트 회사와 손잡고 은밀하게 자금을 모은다. 그리고 일단 자금이 마련되고 인수 대상 기업 주식의 인수 가격에 대한 의견이 모이고 나면, 최고경영자가 이 가격을 이사회에 제안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라고 한다.


힐은 이번 딜에서도 이러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최종 단계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이른바 ‘10주 계획’까지 마련해 두고 있었다.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전체 과정을 비밀에 부치고, 인수 가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공개적으로 시작한다. 이사회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다는 말은 월스트리트의 속어인데, 이사회가 다른 대안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하지만 존슨은 시어슨의 제안 내용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소한 규정 위반을 놓고 이사회가 타일리 윌슨을 가차 없이 내치는 광경을 이미 목격했었다. 이사회의 분노는 지옥의 유황 불길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존슨은 또한 시어슨이 자금 조달과 관련해서 미리 앞질러 어떤 조치를 취하는 데도 미온적이었다. 이런 사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이사들은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이사회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LBO 전략의 정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존슨이 코언과 힐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존슨과 함께 가지 않을 경우 RJR 나비스코 거래는 불가능했다. 만일 이사회가 자기들의 사전 조율 내용을 대외적으로 공표할 경우, 그들의 전술적인 이점은 모두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언이나 힐 혹은 존슨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RJR 나비스코의 덩치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날 힐은 몇 가지 가능성을 정리했다.

• 핸슨 트러스트 PLC
미국 기업을 왕성하게 집어삼키는 영국계 거대 기업. 이 회사의 회장인 핸슨 경은 핵심 담배 기업을 중심에 놓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 아메리칸 브랜즈
코네티컷의 담배 회사로 '폴몰(펠멜)'과 '럭키 스트라이크' 등의 담배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이 회사는 그해에 적대적 인수에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이겼다.

• 포스트먼 리틀
월스트리트에서 두 번째 손가락에 꼽히는 LBO 회사로 수십억 달러를 가 지고 뜨겁게 달구어진 인수전에 언제든 뛰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했다. 하지만 200억 달러 규모의 LBO는 이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힐은 주장했다.


모든 집단이 그저 다크호스일 뿐이었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진짜 경쟁력을 갖춘 상대는 딱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크래비스였다. 전 세계의 거대 기업들이나 투자자들 가운데 오로지 크래비스만이 자기들이 내놓은 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요.”라고 존슨이 자신있게 말했다.

“난 그 사람이 담배에 관심을 가질 거라곤 전혀 생각을 안 합니다.” 앤드루 세이지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협의 아젠다


RJR 나비스코의 인수 가격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다. 힐과 존슨은 주식 한 주당 75달러쯤으로 제시하는 게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선은 비록 높은 가격은 아니라 하더라도, RJR 나비스코 주식이 여태까지 거래되었던 최고가인 71달러보다는 높았다. 한 주에 75달러로 계산하면 전체 인수 가격은 176억 달러였고, 이 규모는 비어트리스의 세 배에 가까웠다.


그날 있었던 가장 중요하고 또 핵심적인 논의 사항은 '회사 운영'과 관련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LBO를 거친 회사에서 경영진의 역할은 명확하게 한정된다. 공개 기업의 경영진으로서 LBO 전문 투자사들로부터 깍듯한 대접을 받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운영상의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해도, KKR와 포스트먼 리틀 같은 회사들이 이사회를 제어하고 모든 비용 지출에 대한 승인권을 행사하며 또 회사의 중역들을 언제든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존슨은 통상적인 원칙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은, 회사의 경영진과 LBO 투자사 사이의 전통적인 역할 관계를 완전히 뒤엎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왜 시어슨이 이사회를 장악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제일 중요한 인물이어야 하지 않나? 누구보다 이 회사를 가장 잘 아는 내가 그리고 경영진이 이 회사를 지배하고 감독하는 게 맞지 않나?’


시어슨 사람들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존슨에게 자금을 조성하는 문제와 관련해 여러 다른 민간 은행들과 접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존슨은 고개를 저으며 시어슨에 단 두 군데 은행만 접촉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것도 이 거래에 필요한 자금이 충분한지 확인하는 예비 논의에 한정해야 한다고 한계를 정했다.


월요일(10/10)은 ‘콜럼버스의 날’(10월 둘째 주 월요일)이었다. 코언은 ‘뱅커스 트러스트’의 회장인 찰스 샌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시티뱅크'의 회장인 존 리드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인 10월 12일 수요일, 제임스 스턴이 이끄는 시어슨 사람들이 뱅커스 트러스트 대표들과 시티뱅크 대표들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이틀 만에 두 회사 모두 거래에 참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간다고 스턴은 생각했다.


뉴욕에 있는 뱅커스 트러스트의 기업 인수 대출 책임자이던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시어슨의 제안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경력에 엄청난 득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제임스 스턴이 이미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 막대한 자금이 시중에 과연 있기나 할까?


전 부서원을 동원하여 검토한 결과, 마침내 오브라이언은 단 한 건의 거래에 쏟아부을 자금으로 전 세계에 210억 달러가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 돈이 모두 다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므로, 전체 210억 달러 가운데 160억 달러는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브라이언은 추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높게 잡은 금액이었다. 시어슨은 155억 달러로 계산했는데, 이것만 해도 전 세계 LBO 자금의 약 4분의 3이나 되는 액수였다.


평생을 파티의 연속으로 보낸 존슨이었지만 이사회가 예정되어 있던 10월 19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신기하게도 그에게서는 들뜬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사회가 열릴 날이 다가오면서 존슨은 LBO 자체에 대해 점차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자기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도 물론 이유로 작용했다.


7인 그룹 가운데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에드워드 A. 호리건이었다. 존슨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호리건은 LBO 결과 엄청난 수익을 안겨 줄 것이라는 생각에 무척 들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7인 그룹에 포함될 사람들 명단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이 7인 그룹에 속한 인물들은 존슨과 호리건 외에 세이지, 헨더슨, 에드워드 로빈슨, 존 마틴, 그리고 부회장이던 제임스 웰치였다).


존슨은 LBO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본다고 믿었다. 우선 주가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주주들이 보유 주식을 75달러에 팔 수 있으니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4, 5년이라는 기간을 언급하며 이 시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 말을 했다.

“회사를 계속 같은 방식으로 운영할 경우 4, 5년 안에는 결코 우리 주식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또 시어슨과 그의 친구 제임스 로빈슨은 눈부신 업적을 쌓은 최고경영자로 기록되고, 존슨과 그의 친구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부를 얻을 터였다.


찰스 휴걸과 특별위원회 구성


10월 13일 목요일, 존슨은 원자력 발전소 문제로 한국에 가 있던 찰스 휴걸까지 수배해서 그가 묵는 호텔로 전화를 했다. 그는 해외 전화를 누군가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면서 일종의 암호를 써서 통화하려고 했다. “우리가 예전에 한 번 논의한 적이 있는 사업을 기억합니까?”


휴걸은 한 달 전쯤 LBO에 대한 생각을 접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일이 시작되고 있어서요. 전에 이야기한 것보다도 남는 파이의 양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이사회에서 꼭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휴걸은 깜짝 놀랐다.


존슨이 계속해서 말했다.

“계속 추진할 생각입니다. 빨리 돌아와서 이번 이사회에는 꼭 참석해야 합니다.”

존슨은 휴걸에게 자기가 낼 제안을 평가할 이사회 직할의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휴걸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의 국제 통화는 끝났다.


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찰스 휴걸은 줄곧 존슨과 통화했던 내용을 생각했다. 비행기가 북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때 그는 볼펜과 종이를 꺼내 들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특별위원회 구성원은 모두 다섯 명으로 정했다.


일요일 밤에 코네티컷의 집에 도착한 휴걸은 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슨은 애틀랜타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누굴 뽑을지 상의했다. 사실상 휴걸이 존슨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셈이었다. 우선 ‘걸프+웨스턴’의 마틴 데이비스를 뽑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다음은 ‘내셔널 캐시 레지스트’의 전 회장이었던 윌리엄 앤더슨이었다. 그는 존슨으로부터 8만 달러의 상담 수수료를 받는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윈스턴살렘 출신이 최소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위원으로 존 메들린을 정했다(본인이 고사해서 나중에 앨버트 버틀러로 교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존 매콤버였다. 예전에 쿠데타 움직임에 동조했던 적이 있어서 존슨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특별위원회 안에 매콤버를 두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존슨과 시어슨의 합의


월요일(10/17), 이사회가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존슨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주가를 점검했다. 반쯤은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주가가 제법 오르기만 하면 시어슨과 준비하던 LBO를 완전히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고, 그럴 마음의 준비는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충격적인 소식은 6시 정각이 되기 불과 몇 분 전에 터졌다. 〈다우존스뉴스서비스〉가 필립 모리스에서 거대 식품 회사인 ‘크래프트’를 110억 달러에 사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존슨의 계획과 완전히 대비되는 선택이었다. 해미시 맥스웰은 자기 제국을 쪼개기보다는 오히려 확장하는 쪽으로 나아가겠다고 선택한 것이었다.

[필립 모리스, 해미시 맥스웰과 크래프트 출처 구글 이미지]

월요일 밤에 존슨이 집에 있는데 앤드루 세이지가 전화를 했다. 세이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낮에 젊은 변호사들이 LBO 이후의 회사 운영과 관련된 합의 사항들을 정리하려고 애썼고, 시어슨에서 방금 합의문 초안을 팩스로 보냈는데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이었다. 세이지의 관점에서 볼 때 시어슨은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에 관해 딴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존슨이 나섰고 그날 밤 코언과 그의 변호사 잭 너스바움 그리고 존슨의 변호사인 조지 베이슨 사이에 정리된 합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존슨의 7인 그룹은 회사 지분의 8.5퍼센트를 가진다.
- 이 지분을 사는 데 필요한 자금은 시어슨이 무과세 대출로 제공한다.
- 존슨이 목표 과제를 모두 달성할 경우 7인 그룹의 몫은 18.5퍼센트까지 높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이 부분의 금액은 최대 25억 달러까지 될 수 있었다.
- 존슨은 자기 몫을 자기 마음대로 분배할 수 있었다.

여태껏 그 어떤 주요 LBO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내용의 합의문이었다.


코언도 나름대로 위안을 얻었다. 만일 인수 주식의 가격이 한 주에 75달러를 초과할 경우, 모든 합의 내용을 재협상할 수 있다는 점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인수 주식의 가격이 75달러라는 선을 넘어설 가능성은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나중에 제임스 스턴은 코언이 이런 합의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펄쩍 뛰었다.“빌어먹을! 그래 좋았어, 딱 75달러야. 1센트만 더 올라가 봐, 협상은 처음부터 다시야!”


RJR 나비스코 본사에서 직원들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어느 날엔가 에드워드 로빈슨이 4000만 달러를 ‘랍비 신탁’에 예치하라고 했을 때 재무 부서의 직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존슨을 비롯한 경영진이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요일(10/19) 아침, 휴걸과 앳킨스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제트기를 타고 애틀랜타로 갔다. 휴걸은 웨이벌리 호텔에 체크인을 한 뒤에 사전 조율을 하기 위해 RJR 나비스코 사옥에서 존슨을 만났다. 이사회를 하기 전에 두 사람은 늘 그렇게 했고,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슨은 평소와 다름없이 유쾌했다. 어쩌면 조금 더 들떠 보였다. 존슨이 마음을 바꾸지 않은 건 분명했다.


존 그리니스의 충격


휴걸이 떠난 뒤에 존슨은 나비스코의 젊은 사장인 존 그리니스를 맞았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리니스는 존슨의 후계자로 낙점받은 인물이었다. 1990년에 존슨이 은퇴하면 마흔다섯 살의 나이에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RJR 나비스코를 덮칠 대변동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존슨은 그리니스를 맞으면서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요, 조니. 난 지금 RJR 나비스코의 LBO를 추진하고 있어!”

그리니스는 의자에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하지만 난 거기에서 빠졌다······. 나는 빠졌다······. 이 사람은 지금 나비스코를 팔아 치우려고 한다······. 나는 쫓겨난다······. 나와 내 사람들을 엿 먹인다······.’


“조니, 이 일은 당신 인생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될 거요. 비록 당신은 새로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요. 당신은 젊잖아요. 앞으로 기회는 무궁무진하다고.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요.”

그리고 존슨은 만일 나비스코를 인수한 새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직을 하고 ‘황금 낙하산’의 두둑한 보상비를 챙길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니스는 한 시간 뒤에 존슨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완전히 파괴된 느낌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웨이벌리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방에서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런 생각이 분주하게 붕붕거리며 떠다녔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 뭔가를 해야 해······. 뭔가를······.’


7장
RJR 나비스코가 일으킨 거대한 소용돌이


LBO 발표


다음 날(10/20) 아침, 존슨은 일찍 일어났다. 수요일 밤에 있었던 이사회의 회의 내용이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했다. 8시엔 본사에서 있을 보상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이어 전체 이사회에 참석해야 했다. LBO를 진행하고 있다는 발표는 9시 30분에 있을 예정이었다. 조간신문을 펼쳐 든 존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애틀랜타컨스티튜션》 경제면 1면에 실린 큼지막한 표제 때문이었다.

애널리스트들은 RJR가 어떤 인수 합병과도 관련이 없을 것이라 전망.

이 기사는 RJR 나비스코가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식품업계의 인수 합병과는 무관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9시 35분, 〈다우존스뉴스서비스〉를 타고 LBO에 대한 발표문이 보도되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발표문이 보도된 직후에 온갖 언론 매체들과 주주들로부터 확인 전화가 폭주했다. 애틀랜타 지역의 여러 방송국들은 곧바로 사옥 바깥에 중계차를 대기시켰고, 헬리콥터도 한 대 사옥 주변을 돌며 내부를 살폈다.


그 날 아침, 제임스 로빈슨은 애틀랜타에 있는 자기 어머니의 집에서 코카콜라 이사회의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성장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한 쉰두 살의 제임스 로빈슨은 미국 기업계의 내무부 장관으로 불렸다. 그가 10년 동안 이끌어 온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다른 사람의 돈 1980억 달러를 감독하고 주무르는 세계 초일류의 금융 기업이었다.


아침 7시에 로빈슨은 피터 코언의 전화를 받았다. 코언은 곧 언론에 RJR 나비스코의 인수 합병 소식이 보도될 것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은 깜짝 놀랐다. 비록 세부 사항들을 꼼꼼하게 다 챙기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진행되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왠지 출발치고는 상서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가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그룹'(The Group)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이 있은 지 1년 뒤,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는 잔뜩 겁먹고 움츠린 상태였다. 실낱같은 희망의 원천은 인수 합병 사업, 특히 머천트 뱅킹에 있었다. 피터 코언만 그랬던 게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모든 최고경영자들이 머천트 뱅킹을 생각했다.


머천트 뱅킹의 선봉에는 인수 합병 사업이 있었다. 거의 모든 투자은행에 인수 합병 부서가 있었고 이 부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시어슨의 토밀슨 힐과 같은 사람들이나 이들의 사촌 격인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들에게는 모든 인수 합병이 다 선하고 옳았다. 왜냐하면 모든 인수 합병에는 수수료가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월스트리트의 인수 합병의 핵심에는 열두서너 명의 핵심 엘리트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들은 10년 이상 친구로 혹은 경쟁자로 늘 얼굴을 맞대고 부대껴 온 사이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저 ‘그룹(The Group)’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수백 건의 인수 합병 경연 속에서 함께 얽혀 성장해 왔다. 대부분 1960년대 후반에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70년대 중반에 인수 합병 분야를 개척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그룹’의 구성원은 토밀슨 힐 외에 우선 브루스 와서스타인과 조지프 퍼렐라가 있는데, 이들은 합병 시대 최초의 슈퍼스타들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 몸담고 있던 회사 ‘퍼스트 보스턴’을 떠나 함께 인수 합병 전문 회사인 ‘와서스타인 퍼렐라 앤드 컴퍼니’를 1988년에 설립했다.


이들 말고도 모건 스탠리의 인수 합병 책임자인 왜소한 체구의 에릭 글리처, 전직 변호사였지만 인수 합병 중심으로 투자하는 회사 ‘레블론 그룹’의 부사장이 된 도널드 드래프킨, 스캐든 압스에 몸담고 있는 두 변호사 마이클 골드버그(그는 1989년 ‘퍼스트 보스턴’에 합류했다)와 모리스 크래머, 와서스타인과 친했으며 와서스타인이 나간 뒤 그를 대신해 퍼스트 보스턴의 인수 합병 책임자가 되었던 제임스 마, 또 하나의 인수 합병 전문 회사 ‘블랙스톤 그룹’의 말 빠른 사장 스티븐 슈워츠먼, 그리고 법률 회사인 ‘크래버스, 스웨인 앤드 무어’의 변호사 앨런 핀컬슨 등이 있다

[로펌 크래버스 뉴욕 오피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룹’의 교구 목사 같은 존재는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인 스캐든 압스의 조지프 플롬(Joseph Harold Flom)이다. ‘그룹’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곁에서 인수 합병 사업을 보고 배웠다. 플롬은 이렇게 말한다.

“집단의 규모가 작아서 가르치고 또 배우기에 좋죠. 소도시의 변호사 협회가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체스를 둘 때처럼 이기려면 한층 더 열심히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또 정직해야 합니다. 집단 규모가 작아 다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으면 배겨 내지 못합니다. 누가 무얼 하는지 다 압니다. 비밀이 없어요.”
[로펌 스캐든 압스의 조지프 플롬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사정은 1980년대 후반에 월스트리트에 만연했던 내부자 거래라는 추악한 범죄가 쉽게 자리를 잡는 데 기여했다. 이 ‘그룹’에게 수사는 몰아치는 매카시즘의 파도와 같았다. 구속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두 이들의 친구이고 동료였다. 내부자 거래 혐의로 처음 거명된 사람은 드렉설 버넘의 한창 잘나가던 투자은행가였던 데니스 레빈(Dennis Levine)이었다.


하지만 레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은 마틴 시걸(Martin A. Siegel)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이었다. 그는 와서스타인을 포함해 ‘그룹’에 속한 여러 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레빈과 달리 말솜씨 좋은 벼락부자였던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하버드 출신이었으며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런 사정과 관련해서 글리처는 이런 농담을 한다. “지금 ‘그룹’에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감옥에 있죠.”

il_570xN.4897850269_1p9s.jpeg
$_57.jpeg
[데니스 레빈과 마틴 시걸 출처 구글 이미지]

물론 이 ‘그룹’ 말고도 월스트리트에는 중요한 집단이나 거물이 많다. ‘라저드 프레어스(Lazard Frères & Co. LLC)’의 보수적 투자은행가인 필릭스 로아틴, ‘러샐스트리트의 지배자’라 불리던 시카고의 아이라 해리스, 드렉설의 ‘미친개’ 제프리 벡, 골드만 삭스의 투자 담당 책임자 제프 보이시 등이 그런 거물들이다. ‘그룹’에 속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RJR 나비스코가 일으키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크래비스의 충격


KKR의 크래비스로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던 한 주였다. 필립 모리스의 크래프트 기습은 이 시카고 기업의 구조 작업에 나설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되었다. 현재 KKR의 연합 세력은 크래프트를 대상으로 LBO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인수 가격으로 130억 달러를 불렀으니 역사상 최대 규모의 LBO인 셈이었다. 크래비스는 또한 필스버리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필스버리는 투자 회사인 ‘그랜드 메트로폴리탄’의 적대적 인수를 방어할 동반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다음 주는 이번 주보다 더 바쁘겠군.’

매번 그랬다. 크래비스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랜드 아미 플라자가 42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비서가 들어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RJR가 한 주에 75달러로 비공개 회사가 되려고 합니다.”


크래비스는 쥐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몇 초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크래비스의 오른팔인 폴 래더가 얼마 뒤에 어슬렁거리며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크래비스는 물었다.

“소식 들었어요? 로스 존슨이 75달러에 RJR를 먹으려고 한대요.”


래더 역시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너무나 충격이 큰 소식이었다.

“그럴 수가······. 75달러면 너무 싸다!"

크래비스는 점점 화를 내더니 결국 고함을 질렀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돼. 아이디어는 우리가 줬는데 우리하고는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잖아!”


그날 아침 크래비스가 받은 처음 몇 통의 전화 가운데는 크래비스의 법률 고문인 맨해튼의 변호사 리처드 비티(Richard I. Beattie, 심슨 대처 소속)가 한 전화도 있었다. 비티는 15년 동안 크래비스의 충실한 사외 법률 고문 역할을 해 왔었다.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티에게 비밀도 아니었다. 벌써 1년 이상 그의 회사는 담배 소송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서 이 소송이 RJR 나비스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왔었다.


“들었습니까?” 비티가 물었다.

“아주 더러운 소식이죠. 아이디어를 준 사람도 바로 난데. 도대체 왜 시어슨과 손잡았을까요? 하고많은 데를 두고 하필 시어슨과 말입니다. 시어슨은 독자적으로 LBO 거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리처드 비티는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고객이 KKR였지만 두 번째로 큰 고객은 바로 시어슨 리먼 허턴이었던 것이다.


모건 스탠리 - 에릭 글리처와 스티븐 워터스


라디오 시티 뮤직 홀 건물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사무실에서 에릭 글리처는 느긋하게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컴퓨터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RJR 나비스코의 소식이 자막으로 모니터 하단부로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글리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전화기 버튼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요!”

[모건 스탠리의 에릭 글리처와 스티븐 워터스 출처 구글 이미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스티븐 워터스가 왔다. 두 사람 다 모니터에 흐르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RJR가? LBO를 해? 우리 모건 스탠리를 빼고서?’ "가격 좀 봐요" 글리처가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75달러면 존슨이 RJR를 날로 먹는 거나 다름없다는 데 동의했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시어슨이 이 거래에 관여한다는 소식이 모니터에 흘렀다. 글리처는 우선 첫 번째 낚시를 던졌다. 대상은 앤드루 세이지였다. 세이지도 전문가였기 때문에 결국 글리처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 뒤 글리처는 제임스 웰치에게 전화를 했다. 웰치는 비록 모호하긴 하지만 어쩌면 모건이 한 다리 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긍정적인 언질을 주었다.


한편 워터스는 자기 사무실에서 존슨의 기획 담당 책임자인 딘 포스바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포스바는 거래는 이미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지금 구체화하는 단계입니다. 다음 주 중반까지는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봅니다.”

‘기회의 창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어. 하지만 열린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아. 서둘러야 해.’


드렉셀 버넘 제프리 벡


드렉설 버넘의 제프리 벡은 스캐든 압스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벡과 많지 않은 인원의 전략가들이 벌써 여러 주째 필스버리를 노리는 그랜드 메트로폴리탄의 적대적 인수를 방어할 궁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 벡과 필스버리의 다른 투자은행 관계자들은 합병 파트너 후보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LBO를 해? 드렉설을 빼고? 나를 빼고?’

[드렉설 버넘의 제프리 벡(왼쪽에서 세번째)과 그에 관한 책 'Rainmaker' 출처 구글 이미지]

벡은 존슨과 얘기를 해야 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존슨을 붙잡고 확인해야 했다. 비서에게 소리쳤다.

“베티, 당장 회의를 중단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따로 이야기 안 해도 알죠? 긴급 따따블이라고 해요, 당장!” 몇 분 뒤에 존슨이 전화를 받았다.“도대체 뭡니까, 예?” 벡의 질문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뭐긴요, 우리 회사를 우리가 사려는 거죠.”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습니까,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벡은 굳이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존슨이 짜증을 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이미 같이 갈 파트너는 다 정해진 상태니까. 끝났다고요.”

미친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시어슨 - 로버트 밀러드


시어슨의 차익 거래 책임자이던 로버트 밀러드는 피터 코언의 전화를 받고 소식을 접하면서 받은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코언은 자기 사무실을 서성이면서 쿼트론의 주가 시세를 바라보는 것으로 아침나절을 다 보냈다. RJR 나비스코의 주식은 마구 뛰어올랐다. 그날 종가는 77.25달러로 무려 21포인트나 오를 터였다.


“이럴 수가······ 죽이네요. 진짜!”

하지만 인수 합병을 좇아 살아온 밀러드는 코언의 전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건 스탠리를 비롯해 이 분야의 노련한 회사들이 하듯 거래를 마무리하고 나서 이런 사실을 일반에 공개했어야 하는데 어째서 시어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굳이 위험에 노출될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데서 75달러보다 높은 가격으로 들이밀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다른 회사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고 코언이 대답했다.

“그럼 KKR는요?” 밀러드가 확인했다.

“KKR는 안 나설 겁니다. 헨리는 우리가 로스 존슨에게 떼어 주는 만큼 양보할 생각이 없을 테니까 말이오.”


“그럴까요?” 밀러드는 최근 몇 달 동안 크래비스가 텍사코나 크로거와 같은 기업들을 공격하면서 단독으로 움직였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경영진을 끼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입찰에 응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입찰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일단 접촉을 한번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코언은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목요일 오후가 되자 존슨 진영에서도 성난 드렉설 버넘이 거래에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며 월스트리트를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도록 놔두는 게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임스 웰치가 벡에게 전화했다.


벡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짐, 이건 미친 짓이오. 가격이 미쳤다고요. 도대체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럼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있나요? 고려해 볼 수 있나요?”

“짐, 우린 이미 다른 쪽에 서 있잖소.”


웰치는 드렉설을 잡으려고 두 번이나 더 벡에게 전화했지만 벡은 존슨이 보여 주었던 냉대를 잊지 않았고, 존슨 진영에서 내미는 손을 끝내 거부했다.


살로먼 브러더스 참전


로어맨해튼에 있는 평범한 빌딩의 17층 사무실, 통통한 몸집의 투자은행가 윌리엄 스트롱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다른 모든 투자은행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존슨의 제안을 바라보면서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목요일 저녁에 그는 RJR 나비스코의 연차 보고서와 증권거래위원회에 보고된 10-K 재무 보고서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꼼꼼히 검토했다. 그리고 존슨이 제안한 75달러가 지나치게 낮다고 확신했다.


금요일(10/21) 아침에 그는 이런 생각을 살로먼의 독재자 '존 굿프렌드(John Gutfreund)' 회장에게 설명했다.“이 회사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젊고 열정적인 부하 직원들의 제안을 늘 냉랭하게만 받아들이던 굿프렌드도 관심을 가지고 스트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살로먼 본사 건물과 존 굿프렌드(오른쪽) 출처 구글 이미지]

10시에 스트롱은 '핸슨 트러스트'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한 뒤에, 담배 사업 부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현금 흐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식품 사업 부문의 브랜드들, 그리고 저평가된 주식 가치 등 RJR 나비스코가 가지고 있는 매력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쪽에서 50억 달러를 대고 우리가 50억 달러를 대서 합동으로 인수하는 겁니다.”

대답은 정각 2시에 돌아왔다. “합시다.”

스트롱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세부적인 살을 붙이기 위한 회의를 월요일 아침으로 잡았다.


스트롱은 이어 주말에 RJR 나비스코의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볼 투자은행가와 애널리스트 열 명으로 구성된 팀을 꾸렸다. RJR 나비스코 인수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다룰 팀치고는 규모가 작았지만, 그래도 스트롱은 말이 밖으로 새 나가는 걸 막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면 첫 번째 행동을 개시할 준비가 갖추어지길 바랐다.


특별위원회


목요일 오후, RJR 나비스코의 중역들이 사용하는 스위트룸에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시어슨의 투자은행가인 토밀슨 힐과 제임스 스턴이 별로 할 일도 없이 서성거렸다. 그리고 이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음료수와 술을 마시면서 들락거렸다.


라저드 프레어스와 딜런 리드에서 온 팀들은 전날 밤 휴걸의 호출을 받고 11시경에 도착했었다. 라저드 프레어스의 필릭스 로아틴이 이들 가운데 있었는데, 그가 말할 때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그의 긴 눈썹이 춤을 추었다. 로아틴 외에 시카고에서 온 아이라 해리스와 정력적인 아르헨티나인 루이스 리날디니도 함께 있었다.


휴걸은 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우선 라저드의 투자은행가들에게 그리고 이어서 딜런의 두 사람에게 각각 그때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라저드와 딜런 모두 특별위원회를 대표할 것과 여기에 대한 보수로 각각 1400만 달러를 받는다는 데 동의했다. 이들이 할 일은 존슨이 제안하는 입찰 내용을 분석하고, 이것이 주주들에게 정당한지 여부를 위원회에 조언하는 것이었다. 또한 비록 가능성이 적지만 다른 주체가 입찰할 경우에도 마찬가지 작업을 해야 했다.


휴걸이 분석 결과를 빠르게 내놓아야 한다고 하자 이들의 촉각이 바짝 곤두섰다. 휴걸이 제시한 시간은 열흘이었다. 로아틴과 해리스는 열흘은 터무니없이 짧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의혹이 두 사람의 뇌리를 스쳤다. ‘빠르게 처리할수록 존슨에게는 유리하다, 그렇다면 휴걸은 이미 존슨의 편에 서 있다는 말인가?’


오후에 있었던 회의들이 모두 끝나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호리건은 이 소식을 담배 사업 부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한다면서 윈스턴살렘으로 날아갔다. 골드스톤과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건물 앞에서 기다리는 기자들을 피해 지하 통로를 통해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휴걸이 이사회를 위해 고용한 변호사 피터 앳킨스와, 이사들인 마틴 데이비스와 존 매콤버와 함께 뉴욕으로 향하는 RJR 나비스코의 제트기를 탔다.


8장
크래비스, 시어슨의 독주에 제동을 걸다


금요일(10/21) 오후, 토밀슨 힐은 맨해튼에 있는 스캐든 압스 사무실에서 또 한 차례의 전략 회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영국의 거대 기업인 그랜드 메트로폴리탄이 필스버리를 상대로 적대적인 주식 공개 매입에 나선 이후로 필스버리는 월스트리트의 인력 반을 고용해서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LBO, 자본 재조정, 포이즌 필, 스핀오프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1491775703406756.jpg
[로펌 스캐든 압스 시카고 사무실과 관련 책 출처 구글 이미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공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힐이 시어슨을 대표했고, 제프리 벡은 드렉설 팀을 지휘했으며, 브루스 와서스타인은 '와서스타인 퍼렐라' 파견단을 지휘했다. '퍼스트 보스턴'에서 나온 투자은행가들 역시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필스버리의 재난이 코앞에 닥쳐 있었지만 힐은 RJR 나비스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한편 시어슨은 경쟁자가 RJR 나비스코 이사회에 또 다른 조건으로 입찰하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존슨의 발표가 나온 지 막 서른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힐은 월스트리트의 모든 투자은행가들이 75달러를 누를 방안을 모색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스버리 전략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힐은 문득 제프리 벡과 브루스 와서스타인이 회의실을 자꾸만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벡이 그날 오전에 RJR에 대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당신들이 정한 가격은 빗나갔습니다. 아마 경쟁자가 있을걸요?”

갑자기 토밀슨 힐은 깨달았다. 두 사람이 허둥지둥 돌아다니는 것이나 벡이 했던 경고가 어떤 의미인지를.

‘크래비스다!’


힐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잠깐 실례한다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전화기로 가서 기억 속에 있던 KKR의 전화번호를 떠올리고 버튼을 눌렀다. 크래비스에게 연결되자 힐은 목소리를 최대한 쾌활하게 꾸몄다.

“거기에서 정말 크래프트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한데,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누가 봐도 핑계에 불과했다. 크래프트 건은 이미 나흘이나 진행되었는데, 인수 합병의 세계에서 나흘이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크래비스는 힐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크래프트 건을 이야기하더군요. 이들 가운데 하나와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아마도 당신네는 아닐 겁니다.”


그 순간 힐은 진실을 깨달았다. 독을 입에 품고 있는 듯한 크래비스의 말투에서 그는 염려했던 최악의 공포가 현실로 나타날 것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헨리 크래비스는 RJR 나비스코를 원한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엄청나게 원한다. 이게 진실이었다.


크래비스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톰, 당신네는 RJR 건과 관련해서 우리를 완전히 엿 먹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로스 존슨에게 그 아이디어를 줬죠.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거래에서 우리에게 함께 자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울 뿐입니다. 이건 우리가 결코 그냥 물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을 그런 건이 아닙니다. 아시죠?”


힐은 크래비스와 통화한 내용에 담긴 심각한 의미를 코언이 알아차리게 해야 했다. 헨리 크래비스는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피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 시간 뒤, 힐은 다시 크래비스에게 전화했다.

“피터와 함께 당신을 만났으면 합니다.”


시어슨과 크래비스의 만남


6시 정각, 가랑비를 헤치고 온 힐이 RJR 나비스코의 뉴욕 사무실과 KKR의 사무실이 함께 입주해 있는 솔로 빌딩 로비로 뛰어들었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제프리 벡과 그의 일행 한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나가는 길이었다. 힐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당신들이 어디 갔다가 오는지 알 것 같네요.”

‘크래비스가 드렉설을 고용했군!’ 이런 생각을 하자 힐은 점차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크래비스의 질문에 코언은 똑같은 말로 대꾸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글쎄요,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은 한 가지를 선택해야겠죠.”

크래비스는 이런 대결이 오리라고 진작 예상했었다. 그는 세 가지 선택 가능한 길이 있다고 말했다.

“우선 경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바라지 않는 길이었다.


입찰 경쟁이 길게 이어지면 주식의 인수 가격은 하늘을 찌르듯 올라갈 것이고, 그럴 경우 결국 그만큼 빚만 더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터였다.

두 번째 선택으로는 시어슨과 KKR가 함께 손잡고 공동으로 인수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크래비스나 코언 모두 자존심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선택은 시어슨이 RJR의 담배 사업 부문을 가지고, 식품 사업 부문은 KKR에 파는 것이라고 했다.


코언은 확실한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KKR와 어떤 식으로든 손잡는 방안을 진지하게 크래비스와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존슨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논의해야 했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방안이 되었든 함께하는 게 옳겠죠. 하지만 그게 앞으로의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이 자리에서 대답할 수 없네요.”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코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쩌면 다음 주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크래비스 진영


크래비스는 피터 코언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 그는 RJR 나비스코에 대한 경쟁 입찰에 자금과 자문을 제공한 투자은행 셋을 불러 모았다. 우선 제프리 벡을 고용하고 있는 드렉설 버넘이었다. 드렉설의 강력한 정크 본드 동원 체계는, 아이번 보스키의 내부자 거래 혐의에 대한 연방 정부 차원의 수사가 2년 동안 진행되고 있던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드렉설의 기소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는 메릴린치를 예비 병력으로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스티븐 워터스와 에릭 글리처가 소속되어 있는 모건 스탠리는 KKR가 필요로 할 방대한 숫자 계산과 자문 작업을 해내기에는 가장 적합한 은행이었다.

[드렉설 버넘과 메를린치 출처 구글 이미지]

크래비스는 여기에 다른 은행을 하나 더 추가시키기로 했다. 한창 뜨던 와서스타인 퍼렐라(Wasserstein Perella & Co.)였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뛰어난 인수 합병 전술가라고 할 수 있는 브루스 와서스타인(Bruce Jay Wasserstein)은 어떤 거래에서든 소중한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크래비스가 바라는 건 그의 조언이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것은 순전히 방어적인 차원이었다.

[브루스 와서스타인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크래비스가 장기 대출 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민간 은행들을 묶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일에 부닥쳤다.목요일에 그는 '뱅크스 트러스트'의 로널드 배디에게 전화를 했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당신과 함께 일해도 좋다는 분명한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말 동안 얘기를 좀 더 해 봐야겠습니다.” 크래비스는 할 말을 잃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시어슨과 존슨이 거래를 빠르게 해치워 버리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인수 합병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나면 이를 깨기란 어렵다는 것을 크래비스는 알고 있었다. 토요일 밤에 크래비스는 브루스 와서스타인과 상담을 했다.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와서스타인은 기습 작전을 제안했다. 와서스타인은 대법관이었던 루이스 D. 브랜다이스가 했던 말인 “햇빛이 최고 좋은 살균제다”를 인용했다. 이때 가장 좋은 햇살은 바로 '즉각적인 공개 매입'이라고 말했다.


KKR, 매니 해니를 잡다


전 세계에는 수천 개의 상업 은행이 있다. 하지만 인수 합병 분야에는 단 세 개뿐이다. 시티뱅크,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 컴퍼니’*, 뱅커스 트러스트가 강력한 삼두 체제를 유지하며,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인수 합병의 동력으로 쓰일 자금 수십억 달러를 흘려 넣어 줄 수도꼭지들을 통제했다. 이 세 거인이 없다면 인수 합병이라는 메커니즘은 멈추어 서고 말 정도였다.

*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Manufacturers Hanover)는 과거에 존재했던 미국 뉴욕 기반의 상업 은행으로 1991년 케미컬 은행(Chemical Bank)과 합병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케미컬 은행은 1996년 체이스 맨해튼 은행(Chase Manhattan Bank)에 인수되었고, 지금은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의 일부가 되었다.


크래비스의 막역한 친구이던 변호사 리처드 비티는 토요일 밤을 맨해튼의 자기 아파트에서 느긋하게 보내고 있다가 마크 솔로의 전화를 받았다. 매뉴팩처러스 하노버의 인수 합병 대출 책임자인 솔로는 빈틈없이 기민한 인물로, 월스트리트의 인수 합병 전문가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


솔로는 시어슨의 피터 살러먼과 연락하려 하는데 잘 안 되어서, 비티가 시어슨과 매우 가까운 조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살러먼의 집 전화를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고 설명했다. 비티는 RJR 나비스코와 관련된 일임을 알아차렸다. 솔로는 크래비스가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고, 또 비티가 시어슨을 상대로 싸우는 크래비스의 대변자인 줄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참 일이 재미있게 됐네요. 헨리 크래비스가 당신과 통화하고 싶어 하던데······, 전화 걸라고 할까요?”

“네, 뭐······.”

비티는 피터 살러먼의 전화번호를 찾지 못하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크래비스에게 전화해서 방금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크래비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솔로에게 연락을 취했다.

“매니 해니(매뉴팩처러스 하노버의 애칭)는 시어슨과 독점적인 관계로 일합니까?”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시어슨뿐 아니라 어떤 곳과도 그렇게 하는 거 없습니다.”


크래비스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KKR가 RJR 나비스코 인수와 관련해 매뉴팩처러스 하노버와 독점 대출 계약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솔로는 깜짝 놀랐다. “우린 여태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번에 해 보면 되겠네요. 수지맞는 장사가 되게 해 드릴게요.”

크래비스로서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다. 매뉴팩처러스 하노버는 피터 코언이 손에 넣지 못한 은행이었고, 이 은행을 자기가 손에 넣은 것이었다.


기밀 문서 제보


바로 그 주말에, RJR 나비스코의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 다음 주에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RJR 나비스코의 재무 자료를 담은 1차분 상자들이 라저드 프레어스와 딜런 리드로 배달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외부 업체들이 작성한 여섯 개의 보고서들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보고서들 가운데 RJR 나비스코의 주식 가격을 80달러 미만으로 평가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90달러에 가깝게 평가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우편물이 코네티컷에 있던 찰스 휴걸에게 배송되었다. 소포를 보낸 사람은 익명이었고, 봉투 안에는 RJR 나비스코의 기획 관련 문서가 들어 있었다. 기획 담당 책임자 딘 포스바가 직원들을 지휘해 작성한 게 분명했다. 제목은 〈기업 전략 업데이트〉였고 ‘기밀문서’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문건 작성 날짜는 존슨이 이사회에서 문제의 역사적인 연설을 하기 3주 전이던 9월 29일이었다.


그런데 휴걸의 관심을 끈 것은 회사의 자산 가치를 평가한 부분이었다. 문서는 RJR 나비스코 주식 한 주의 가격을 최하 82달러에서 최고 111달러까지 각각의 경우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뒤에,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주식 한 주당 111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인수 제안이 들어올 경우 RJR 나비스코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충분한 사유를 댈 수 있다.


존슨의 심복이 회사의 가치가 한 주에 82달러에서 111달러라고 말했다면, 존슨이 제시한 75달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문서를 과연 누가 보냈는지도 궁금했다. 문서에는 아무런 메모도 없었다. 보낸 사람을 추정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기밀문서를 손에 넣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RJR 나비스코의 중역이 로스 존슨을 거꾸러뜨리려고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6시, 운동을 하러 나가던 존슨의 변호사 스티븐 골드스톤은 전화를 받았다. 토밀슨 힐이었다.

“KKR가 공개 매입을 시작했어요.” 힐은 사무적인 말투로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골드스타인이 물었다. “얼마에요?” “한 주에 90달러.”


공개 매입 정보 누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의 월요일 판은 KKR가 RJR 나비스코의 주식을 한 주에 90달러에 공개 매입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리처드 비티는 이 신문들을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게 분명했다. 월스트리트에서 20년 동안 몸담아 오며 처음 경험하는 지독한 뒤통수 때리기였다.


크래비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드렉설 버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제프리 벡이 정보를 누설한 장본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러 해 동안 크래비스는 벡의 말도 안 되는 농담과 신경질과 소란을 참아 왔었다. 이제 이 모든 걸 갚아 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30분 뒤 크래비스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공개 매입 외에 따로 준비했던 모든 대안들은 이젠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정보가 새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도 없이 밀고 나가야 했다. 크래비스는 공개 매입에 나선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8시에 하라고 지시했다.


정보를 발설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놓고 한동안 KKR 내부에서 온갖 설이 난무했다. 제프리 벡은 크래비스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여러 주 동안 KKR의 전략 회의 자리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크래비스가 진짜 밀고자인 브루스 와서스타인에게 이용당했다고 믿으면서 다시 복귀했다. 크래비스의 측근들은 와서스타인이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와의 싸움에 오래 붙잡혀 있게 하려고 일부러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고 분석했다.


크래비스의 발표는 존 굿프렌드에게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래비스가 인수 전쟁에 뛰어든다는 소식으로 RJR 나비스코의 주식 가격은 마구 치솟았다. 그래서 굿프렌드는 RJR 나비스코의 주식 매집 계획을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 11시, 윌리엄 스트롱과 찰스 필립스는 시내에 있는 핸슨의 사옥에서 이 회사 대표자들을 만나 함께하기로 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리고 오후 3시, 핸슨으로부터 없던 일로 하겠다는 통고를 최종적으로 받았다.


로스 존슨의 아파트는 그랜드 아미 플라자 맞은편에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존슨은 아침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크래비스와 글리처와 통화하면서 호기 있게 내세웠던 쾌활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친구들이 예전에 보지 못한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완전히 끝난 게임 같아요.” 존슨이 존 마틴에게 한 말이었다.


9장
포스트먼, LBO 전쟁에 참전하다


시어도어 J. 포스트먼(Theodore J. Forstman)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월스트리트 인사였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미혼 남자이며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공화당 자금 조달자이기도 한 그는 운전기사가 딸린 여러 대의 메르세데스, 신선한 과일과 금박 입힌 욕실 설비를 갖춘 여러 대의 회사 제트기, 그리고 아울러 맨해튼의 교통 체증을 오만하게 내려다볼 수 있으며 술과 텔레비전까지 갖춘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있는 세상에서 살았다.


열심히 일했고 또 운도 따른 덕분에, LBO를 전문으로 하는 10년차 그의 회사 ‘포스트먼 리틀 앤드 컴퍼니’는 매출액을 모두 합하면 80억 달러나 되는 회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포스트먼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평온함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성을 잘 냈고 언제나 분노로 부글부글 끓었다.

[시어도어 포스트먼 출처 구글 이미지]

그날 아침에 포스트먼은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에 대한 자기의 집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뉴욕타임스》를 펼치는 순간, 그의 시선은 경제면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표제, ‘콜버그가 RJR 인수에 곧 나설 듯’에 고정되었다. 포스트먼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기사를 읽었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개새끼, 또 시작했군.’


나비스코 인수를 위한 KKR의 주식 공개 매입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한 주에 90달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격이었다. 90달러라는 가격은 아무 근거도 없이 툭 튀어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쪼다 같은 녀석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크 본드의 가치보다 두 배나 많이 불렀을 거야.’

헨리 크래비스가 얼마 되지 않는 현금과 엄청난 부채를 동원해 거대한 기업 하나를 인수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고 포스트먼은 생각했다.


월스트리트는 카르텔이 점령해 버렸다고 포스트먼은 믿었다. 그 카르텔이 바로 정크 본드였다. 이 카르텔의 최고 스승은 ‘드렉설 버넘 램버트’의 마이클 밀컨이었고, 가장 강력한 인물은 KKR의 헨리 크래비스였다. 이 카르텔이 이제 RJR 나비스코를 먹기 위한 싸움에서 서서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포스트먼은 정크 본드가 LBO 산업을 나쁜 길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월스트리트까지 망쳐 놓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포스트먼은 정크 본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규모 주요 투자은행 가운데 정크 본드를 사용하지 않는 곳은 포스트먼 리틀이 거의 유일했다. 포스트먼이 생각하기에 정크 본드는 하잘것없는 투자 회사도 복용하기만 하면 괴력을 발휘해서 거대한 회사를 이길 수 있는 마약과 같았다.


언젠가는 경제가 곤두박질칠 것이며 또 정크 본드 상습 복용자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빚을 갚지 못하고 두 손 들고 나자빠질 것이라고 포스트먼은 전망했다. 이들은 주머니에 돈 한 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빚을 갚아야 할 날짜가 닥치면 쩔쩔매는 부동산 투기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정크 본드 부채를 사용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미국 경제가 불황의 깊은 늪에 빠지고 말 거라는 게 그가 두렵게 예측하는 전망이었다.


드렉설의 정크 본드 고객들 가운데서 포스트먼에게 가장 밉상인 회사가 바로 포스트먼 리틀의 최대 라이벌 KKR였다. KKR는 다른 어떤 투자 회사보다 정크 본드를 많이 사용했는데, 특히 포스트먼 리틀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LBO 산업에서 그랬다는 사실이 포스트먼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포스트먼이 정크 본드의 폐해와 위험을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분노는 헨리 크래비스에게 더욱 선명하게 초점이 맞추어졌다.


몸무게가 130킬로그램이 훨씬 넘었던 그리고 언제나 폭군처럼 군림했던 독일계 이민자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직물 회사를 차려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그리고 포스트먼의 아버지 줄리어스는 자기 아버지의 회사인 ‘포스트먼 울런스’를 이어받았지만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의 가정은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간절하게 바랐던 소망은 둘째 아들이 로스쿨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스트먼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석 달 뒤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회사에서 나오던 돈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포스트먼 울런스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팔리고 말았다.


작은 법률회사에 대니다가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월스트리트의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식의 매입과 매수에 따르는 주선 업무 및 기타 재무 분야의 잡다한 업무들을 익혔다. 그리고 ‘패허티 앤드 스워트우드’라는 회사에서 그는 오클라호마 출신의 헨리 크래비스라는 청년과 함께 땀을 흘리기도 했다.


우려곡절 끝에 그는 러트버그라는 사업가의 도움을 받고, 브라이언 리틀이라는 전직 투자은행가를 영입해서 1978년에 ‘포스트먼 리틀 앤드 컴퍼니’를 설립했다. 회사의 전체 인원은 두 사람 외에 비서 한 명을 합해 모두 셋이었다. 포스트먼은 1년 동안 단 한 명도 다른 직원을 고용하지 않았다. 포스트먼 리틀은 초기 LBO 회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 연기금들에서 직접 자금을 모집했다.


그때까지 포스트먼 리틀의 수익률은 최상이었다. 회사를 인수하면 보통 3년이나 5년 뒤에 팔았는데, 팔 때는 살 때 가격의 네 배에서 열 배까지 받았다. 1980년대 중반이 되었을 때 이 분야에서 포스트먼 리틀보다 수익률 좋은 회사는 KKR 딱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기업 사냥꾼들은 정크 본드를 통해 자금을 쉽고 또 싸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인수 대상 기업의 가격을 올려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정크 본드로 무장한 사냥꾼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포스트먼이 인수 전쟁에 아예 뛰어들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한때는 경쟁자를 찾아볼 수도 없었던 인수 합병 분야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먼 리틀이 성사시킨 거래 건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포스트먼은 과거에 이처럼 큰 좌절을 느낀 적이 없었다. 정크 본드 시장이 간헐적으로 붕괴하곤 했는데, 포스트먼 리틀은 이런 시기에만 대규모 인수 전쟁에서 경쟁자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1986년 11월에 있었던 아이번 보스키의 내부자 거래를 두고 당국이 수사를 하면서 정크 본드 시장이 일시적으로 고갈된 틈을 타 캘리포니아의 방산업체 ‘리어 시글러’를 인수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거래는 그때까지 성공했던 거래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업 인수 전쟁에서 포스트먼이 크래비스와 정면으로 부닥친 적은 딱 한 차례뿐이었다. 그리고 이때 입은 상처가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RJR 나비스코를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기 여섯 달 전인 1988년 봄이었다. 크래프트가 건전지를 만드는 자회사 ‘듀라셀’을 매각하려고 내놓았다.


포스트먼은 듀라셀의 경영진을 끈질기게 설득해 마침내 이들을 자기편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크래비스는 듀라셀 경영진의 부탁을 거절하고, 막대한 정크 본드를 동원해 포스트먼 리틀이 제안했던 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해서 결국 듀라셀을 인수했다.


1988년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었다. RJR 나비스코 거래가 터지기 불과 몇 주 전에 포스트먼은 마침내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크 본드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칼럼을 실은 것이었다. 10월 25일 화요일에 독자들을 만난 이 칼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금융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능한 보상 수준과 전혀 동떨어진 위험성만 한없이 높아졌다. 거의 한 주에 한 건씩, 미국에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위에 희생되어 도저히 상환될 가망이 없는 무거운 부채를 짊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은 대부분 월스트리트에 있는 투자은행가, 변호사, LBO 회사, 그리고 정크 본드 딜러가 저지르는데, 이 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인수 합병 대상 기업과 이 회사의 직원, 여러 수준의 공동체, 그리고 선량한 투자자들이다.


월요일 아침, 시어도어 포스트먼은 이스트리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나비스코 거래는 단지 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거래는 그가 지난 5년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정크 본드와 KKR라는 회사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자 수행해 왔던 성스러운 전쟁의 최종 결정판이 될 터였다.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백기사가 되고 헨리 크래비스가 흑기사가 되어 싸우는 한판 대결이 될 터였다.


시어슨이 로스 존슨과 함께한다는 사실도 고무적이었다. 그는 토밀슨 힐이 이끄는 팀이 LBO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을 전혀 확보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포스트먼이 확보하고 있는 90억 달러 수준의 자금력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또한 포스트먼은 로스 존슨과 그의 젊은 아내 로리를 알고 있었고 또 이 두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그날 아침 포스트먼이 신문에 난 기사를 뚫어져라 바라볼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잡혀 있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투자은행가는 ‘골드만 삭스 앤드 컴퍼니’의 제프 보이시(Geoffrey Boisi)였다. 보이시는 그때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기 위해 입찰할 제3의 주체가 될 컨소시엄을 골드만 삭스의 최우수 고객들로 구성하려 하고 있었다. 그 고객 속에 포스트먼 리틀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드만 삭스 제프 보이시 출처 구글 이미지]

가슴 깊은 곳에서 자기가 헨리 크래비스를 해치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개새끼들아, 내가 엿 먹여 주마. 이게 KKR의 다음 거래가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포스트먼은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나는 로스 존슨을 알아. 짐 로빈슨도 알아. 헨리 크래비스 그 개자식은 절대로 이 거래를 성공하지 못해. 흐흐흐!’


10장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은 KKR과 시어슨의 동상이몽


월요일 아침, 시어슨은 대혼란으로 어수선했다. 오듀본의 그림들과 초록 식물들과 동양의 섬세한 양탄자로 으리으리한 19층, 놀란 중역들이 모두 모였다. 코언과 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대처하기보다는 크래비스를 성토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크래비스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를 두고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존슨이 시어슨의 이사회 회의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크래비스의 갑작스러운 기습이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코언은 힐 그리고 잭 너스바움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에, 브루스 와서스타인과 월스트리트의 다른 인수 합병 전문 협상가들이 부추겨 그렇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티븐 골드스톤은 지금이 자기 고객인 존슨에게 어떤 사실을 설명해 줄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존슨의 이해관계가 굳이 시어슨의 이해관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존슨으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이 얼마든지 많으며, 필요하다면 시어슨과 잡은 손을 놓고 크래비스와 손잡을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코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골드스톤은 생각했다.


골드스톤은 존슨의 관심을 과거에서 미래로 돌려놓으려고 애썼다. 크래비스의 기습 공격은 주가를 엄청나게 올려놓았다. 만일 크래비스와 싸우려고 나선다면, 한 주에 90달러 이상의 가격을 불러야 했다. 한 주에 90달러로 인수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한 주에 75달러로 인수한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골드스톤은 말했다. 추가로 늘어날 부채 때문에 존슨이 우려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로스, 그래도 이 회사를 기꺼이 운영할 마음이 있는지, 그렇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그럴 의향이 있다면, 그다음에는 시어슨이 결정을 내려야겠지요. 돈을 대는 쪽은 거기니까요.”


리처드 비티


리처드 비티(Richard I. Beattie)는 장차 크래비스의 가장 효과적인 정보 통로가 될 터였다. 온화한 성격의 이 변호사는 여러 해 동안 월스트리트 친구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망을 쌓아 왔다. 특히 그는 시어슨의 의뢰를 받아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 경험은 코언 쪽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차익 거래 부문 책임자인 로버트 밀러드는 최상의 정보 제공자였다. 로버트 밀러드는 비티에게 피터 코언과 직접 통화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크래비스의 입찰은 코언에게 악몽이었고 또 이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로스 존슨과 달리 코언은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격상 그는 항복할 수 있는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크래비스의 입찰과 관련된 정보가 그날 조금씩 전해지자 코언과 힐은 크래비스의 공격이 처음 예상했던 것만큼 엄청난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선 그 입찰은 모두 현금 입찰이 아니었다. 79달러만 현금 입찰이고 나머지는 크래비스가 한 주에 11달러로 평가한 유가 증권으로 메우는 것이었다. 코언과 힐은 이런 사실을 알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한편 이 혼란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사실이 분명하게 대두되었다. 시어슨 혼자 힘만으로는 크래비스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주에 90달러를 넘는 입찰은, 우선 첫 지불액으로 25억 달러 가까운 금액의 주식 지분 투자를 해야만 했다.


그날 오후에 코언은 가까운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살로먼 브라더스의 사장으로 존 굿프렌드 아래의 이인자이며 객장을 굽어보는 곳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던 토머스 스트라우스였다. 두 사람은 자주 서로의 집에 놀러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스트라우스가 살로먼이 시어슨의 거래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코언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그날 오후 4시경, 리처드 비티는 피터 코언과 통화할 수 있었다. 비티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의 회사인 ‘심슨 대처 앤드 바틀릿’은 40년 동안 리먼을 대변했으며, 잭 너스바움의 회사와 함께 시어슨이 의뢰하는 가장 중요한 법률 회사였기 때문이다. 코언에게 너스바움이 가장 믿을 만한 존재이기는 했지만 비티 역시 소중한 조언자였다.

0bb4b5a32a383a070f03d8f6ac3e96b1.jpg
10beattie-chtg-mediumSquareAt3X.jpg
[로펌 심슨 대처 오피스, 핸리 크래비스와 리처드 비티 출처 구글 이미지]

“헨리 크래비스가 대화를 원한다면서 왜 갑작스럽게 공개 매입을 선언했죠? 그럴 필요 없었잖아요. 왜 나한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죠? 나는 전화하려 했고, 또 했는데······.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는 잘 알죠?”

비티는 코언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피터, 어떤 전략적인 이유로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대화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헨리와 대화하십시오. 그래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코언은 비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존슨에게 전화해서 의견을 물었다. 다음은 코언의 전화를 받고 존슨이 코언에게 건넸던 조언이다.

“피터, 이건 재미로 하는 닭싸움이 아닙니다. 진짜 심각하고 진지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헨리라는 인간도 만만찮은 상대입니다. 알잖아요. 그러니 일단 그를 만나, 그가 이 거래에 어느 정도로 무게를 두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코언과 크래비스가 만날 약속이 정해졌다. 화요일 아침이었다.


제임스 로빈슨의 우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 제임스 로빈슨은 월요일 오후에 존슨이 LBO 이후의 회사 경영과 관련해 합의한 문서 사본을 처음 읽고는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쁜 조건이었다. 그를 가장 걱정스럽게 한 것은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보통 ‘거래의 화장발’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합의 내용은 터무니없었다. 이 합의 내용이 결국 일반에 공개될 게 분명한데, 그 순간 이 합의 문건은 탐욕 그 자체로 비칠 게 확실했다.


합의 내용을 바꾸어야 했다. 존슨과 경영진이 받기로 약속되었던 돈은 이제 KKR를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입찰 가격을 제시하는 데 투입해야 했다. 이 메시지를 존슨에게 전달해야 했다. 말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으로는 월스트리트에서 존슨과 가장 친한 친구인 자기 자신뿐이었다.


월요일 밤에 로빈슨은 존슨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존슨이 로빈슨을 바라보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항을 고려할 때, 좀 더 적절한 방식으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새로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합의 내용에 동의할 것 같습니까?” 로빈슨이 물었다.

“여덟 명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열두 명일 수도 있겠죠.”그러고는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늘 수많은 직원들이 동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나는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될수록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로빈슨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좋을 거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이 실질적으로 존슨의 재산을 나누어 가질지 어떨지는 물론 초점의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일반 대중에게 보일 ‘화장발’이었다. 제임스 로빈슨은 코언과 존슨이 합의한 내용을 내팽개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원들과 회의적인 일반 대중에게 이 내용이 일단 노출되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KKR와 시어슨, RJR 인수 전쟁에서 맞붙다.’

화요일 아침 《월스트리트저널》 1면의 표제였다.

크래비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기사를 읽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모두 그가 금요일에 코언과 만났던 사실을 자세히 보도했다. 크래비스는 두 신문 모두 자기를 LBO 분야에 갑자기 나타난 경쟁자를 쳐부수려고 혈안이 된 인물로 묘사한다고 생각했다.


코언과 크래비스 첫 미팅


화요일 아침, 코언과 크래비스는 함께 아침을 먹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냉동육 저장고 안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코언은 전투적이었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크래비스와 싸움을 길게 하면 시어슨이 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랬기에 타협안을 내놓았다.


“헨리, 우린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어요. 모든 지분을 우리가 독식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덩치가 너무 크잖아요. 우리는 합리적으로 말이 되는 거래를 기대합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인 인수 합병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겠죠. 어떻습니까,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나눌까요?” 크래비스가 물었다.

“50 대 50.” 코언이 안을 던졌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KKR의 방식대로라면 여태까지 한 번도 50 대 50의 거래는 해 본 적이 없다고 크래비스가 말했다.


코언은 여태까지 기껏해야 인수 합병 거래를 한두 번밖에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릭 글리처가 그를 ‘어린이 투자은행가 피터 코언’이라 부르곤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크래비스가 보기에, 코언은 자기가 우위에 선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크래비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흠, 기분이 꽤나 좋아 보이는군. RJR 나비스코의 경영진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서 자기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줄로 생각하나 본데······. 하긴 로스 존슨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막아 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흐흠! 하지만 어린이 투자은행가 씨, 당신은 이제 곧 큰코다치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될 거야.’


존슨의 등장


코언과 크래비스가 커피를 마시며 서로를 노려볼 때 존슨은 엉킨 실타래를 자기가 직접 나서서 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존슨은 전화번호부를 훑어 나가다가 스티븐 워터스의 이름을 발견했다. 예전에 시어슨에서 일하다가 모건 스탠리로 들어가 지금은 크래비스를 위해 일하는 워터스야말로 크래비스와 자기 사이에 좋은 대화 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 존슨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 전화를 걸어 제임스 로빈슨을 찾았다. 독단적으로 어떤 일을 벌이기 전에 우선 그와 연락을 취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짐, 헨리를 만나 볼 생각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봐야겠어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로빈슨이 동의하자 존슨은 곧바로 스티븐 워터스에게 전화했고, 크래비스와 존슨의 약속은 그날 오후 4시로 잡혔다.


크래비스는 코언과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비티와 로버츠를 불러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40층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로버츠는 전날 밤에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왔었다. 세 사람은 RJR 나비스코를 손에 넣는 데 유일한 방해자가 피터 코언이라는 데 동의했다. 시어슨이 이 거래에 끼어들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혹시 또 몰라, 10 대 90으로 하자고 제안하면 받아들일지.”

과연 그럴까, 하고 비티는 생각했다. 10퍼센트는 너무 하잘것없는 규모로 들렸다. 어쨌거나 시어슨은 RJR 나비스코의 LBO 거래를 궤도에 올려놓은 주체가 아니던가. 비티가 보기에는 코언이 그런 제안을 받으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크래비스 역시 거기에서 땡전 한 푼 더 주지 않을 것도 분명했다.


존슨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크래비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방을 원한다는 의향은 크래비스와 로버츠보다 존슨이 더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존슨은 LBO 이후에도 자기가 회사 경영권을 상당한 수준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런 구조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그건 안 되지요, 하며 로버츠가 고개를 저었다. KKR의 방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경영진이 계속해서 경영권을 장악하는 거래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당신과 긴밀하게 협조할 것입니다만, 경영권을 확보할 수 없는 거래라면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고 존슨이 물었다.

“우리는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뒤에는 우리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이 있고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경영권을 가져야지요.”


LBO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핵심적인 몇 가지 쟁점들 가운데 하나인 비용 절감 문제로 화제가 옮겨 갔다. 존슨의 말을 들은 로버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존슨이 지출 경비 삭감의 도끼를 휘두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 것이다. 비용 절감이라는 것 자체가 과대평가된 절차라는 게 존슨의 설명이었다.


세 사람의 논의가 한 시간쯤 진행되었을 때 존슨에게 전화가 왔고, 존슨은 전화를 받으러 잠깐 밖으로 나갔다. 금방 다시 돌아온 존슨은 미안하다고 했다.

“지미와 피터네요. 시어도어 포스트먼과 만나야 하는데 늦었네요. 테드와는 친구 사이죠?”

존슨이 씩 웃었다. 그에게 다른 선택권이 있다고 해서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특별히 더 마음 상할 일은 없었다.

“예, 우리 둘 다 테디를 알죠.” 크래비스 역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편했다.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이 거래에 뛰어들 생각을 한단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존슨은 시어슨과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언급했다.

“이야기를 잘 풀어 나가길 기대합니다. 공정하게 해야겠죠, 아주 공정하게.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가져가고 다른 쪽은 겨우 찌꺼기만 얻어걸리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아마 잘될 겁니다.”

존슨은 6시 조금 지나서 나갔고,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이제 움직여야 할 때라고 의견을 모았다.


크래비스의 첫 제안


늦은 오후 시각의 교통 정체보다 유일하게 반갑지 않은 사실은 로빈슨의 휴대폰에 남아 있는 크래비스의 초대장이었다. 로빈슨은 크래비스에게 전화를 했다. 휴대폰의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크래비스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선명했다.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KKR가 RJR 나비스코를 인수한다. 대신 시어슨은 KKR로부터 1억 2500만 달러의 수수료를 받고 아울러 이 회사의 지분 10퍼센트를 살 수 있는 권리를 받는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한 답변을 자정까지 듣고 싶다고 했다.


제임스 로빈슨은 다른 사람의 지갑을 보고 흥분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10퍼센트면 어째 좀 작아 보이는군요.”

로빈슨은 우선 그렇게 대답한 다음에 이따가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존슨과 포스트먼


존슨은 토밀슨 힐을 대동하고 포스트먼 리틀을 찾아갔다. 6시 30분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존슨이 회의실 테이블의 상좌를 차지하고 앉으면서 말했다. “방금 경쟁 회사 사람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뭐라고요?” 포스트먼이 물었다.

“방금 크래비스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요.”

존슨의 말에 포스트먼은 화가 났다. 그리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뭐 하러 그랬습니까?”


크래비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흥분한 포스트먼은 정크 본드의 사악함과 헨리 크래비스가 저지른 갖가지 죄악들, 그리고 포스트먼 리틀이 월스트리트를 구할 방법에 대해 30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 그는 그날 아침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자기 글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강조했다.존슨은 자신이 포스트먼의 세계관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헨리 크래비스는 악마이고 자기는 천사이다, 자기 고객들은 완벽하다, 그리고 수수료에 관심이 없다, 자기는 신을 대신해서 공개 기업을 인수하려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래,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알겠어.’


토밀슨 힐이 전화를 받으려고 방에서 잠깐 나갔다. 코언이었다. 1억 2500만 달러를 수수료로 주겠다는 크래비스의 제안을 전해 주기 위한 전화였다. 수수료만 놓고보면 솔깃한 제안이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힐은 코언에게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 돈을 받으면 앞으로 우리 머천트 뱅킹 사업 부문은 볼장 다 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돈만 챙기면 언제든 물러난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되니까요. 아무리 그럴듯하게 치장해도 선수들끼리는 뻔히 다 알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또 그 친구들이 전화를 했네요.”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힐이 말했다.

“그 친구들이 우리 시어슨에 정말 모욕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포스트먼은 혼란스러웠다. 힐이 ‘그 친구들’이라고 한 건 분명 KKR 진영이었다.

힐 이 친구가 자기 휴대폰으로 직접 크래비스와 협상을 한다는 말인가?


경영진의 결정


존슨은 솔로 빌딩 48층으로 돌아왔다. 코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제임스 로빈슨도 합류했다.로빈슨이 존슨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그 친구들과 함께 가겠다면 우린 말릴 수 없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 자유니까 말입니다.”

코언도 제임스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존슨은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젠장, 그 이야기는 일단 접어 둡시다. 이 문제는 우선 우리 내부에서 먼저 검토해야 하니까.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합시다.”


존슨은 자기 방으로 RJR 나비스코의 경영진을 불러 모았다. 에드워드 호리건, 해럴드 헨더슨, 존 마틴 등이 헐렁한 옷을 걸치고 모였다. 존슨은 우선 크래비스가 했던 제안을 이들에게 설명해 주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 상황이 이렇습니다. 나는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투표로 결정합시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헨리 크래비스와 손잡으면 어떻게 된다는 건 다들 잘 알 겁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어슨과 손잡을 때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존슨이 경고했다.“만일 시어슨과 함께 갈 경우, 어쩌면 우리 모두 개털이 될 수도 있다는 거 다들 잘 알 겁니다.”

시어슨이 크래비스를 꺾을 가능성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만일 시어슨과 손을 잡았다가 크래비스에게 깨지고 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와 혜택을 내놓아야 했다.


경영진 회의가 끝난 뒤 존슨은 코언을 불렀다.

“당신들이 우리가 어떻게 나갈지 걱정하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시어슨은 우리에게 매우 관대한 제안을 했고,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싶습니다.”

코언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포스트먼의 방문


이런 혼란의 와중에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48층에 도착했다. 시어도어 포스트먼은 동생인 닉과 변호사 스티븐 프레이딘, 골드만 삭스의 제프 보이시를 함께 데리고 왔다. 이들 역시 분위기가 무척 혼란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투자은행가들을 상대로 거래하는 일에 익숙하던 보이시는, 코언이나 로빈슨 같은 최고경영자들이 나서서 돌아다니는 걸 보고 당황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가 최종 책임자라는 말이지?’


시어슨 사람들은 곧바로 포스트먼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질문 내용은 제각각이었지만 핵심은 헨리 크래비스와 맞서서 어떻게 싸울 작정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스트먼은 의기투합해서 같은 편으로 손을 잡기 전에는 그런 질문이나 혹은 거기에 대한 답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포스트먼은 그날 적어도 두 번째의 장황한 연설을 쏟아 냈다.


우선 크래비스를 비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크 본드도 브리지론도 안 된다고 했다. 포스트먼은 존슨이 회의실에서 빠져나가는 걸 보고는 점점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적대적인 공개 매입도 안 된다고 했다. 숱한 금기들을 입에 올리며, 이런 모든 미친 짓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얼마 뒤 코언도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포스트먼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난 개수작 같은 거 안 부립니다. 우린 뭐든 ‘얼씨구나’ 하고 덥석 물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일이 그렇습니다. 다들 내 말 이해하겠죠?”

포스트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회의실이 거의 텅 비다시피 한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자기 일행을 제외하고는 세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포스트먼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존슨과 코언, 제임스 로빈스 혹은 토밀슨 힐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제프 보이시가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포스트먼에게 경고했다.“여기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나 본데, 조심해야겠습니다.”


KKR과 시어슨의 협상 결렬


저녁 시간 내내 코언은 크래비스와 연락을 취하려고 애썼다. 또한 리처드 비티에게도 전화해서 크래비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비티는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시각에 크래비스는 사실 인근의 프렌치 레스토랑 ‘라 그르누이’에서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이 만찬은 탤런트 에이전트인 스위프티 러자르가 헨리 키신저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만찬을 마친 뒤에 크래비스는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 코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의 집 서재에서는 솔로 빌딩 48층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12시 15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존슨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원기왕성하지 않았다.

“헨리, 난 정말 실망했습니다. 시어슨에 한 제안은 너무 심하지 않았습니까? 공정하게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알았는데······ 전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옳지 않았습니다.”


크래비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비티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토론할 기분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어쩌겠습니까.” 크래비스는 그렇게만 말했다.


5분 뒤, 존슨은 다시 크래비스에게 전화를 했다.

“헨리, 한 가지 분명하게 하지 않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시어슨과 같이 갈 겁니다. 솔직히 우리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될 수 없다고 당신이 생각하길 원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내 파트너들을 버릴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크래비스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조지 로버츠와 리처드 비티에게 전화해서 의논했다. 제안이 거부당한 것은 좋지 않은 결과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에게는 로스 존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인수 합병 전쟁에서 입찰이 벌어질 경우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수십억 달러의 비용을 피할 수 없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크래비스가 솔로 빌딩에 있는 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1분 뒤에 코언과 연결되었다.

“피터, 우리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는 당신들을 이간질해서 쪼개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시어슨 사람들이 크래비스를 기다리던 존슨의 사무실 안 분위기는 긴장 그 자체였다. 코언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임스 로빈슨과 토밀슨 힐을 포함한 다른 여섯 명도 초조하게 사무실 안을 서성였다. 특히 시어슨의 최고경영자는 헨리 크래비스와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코언은 존슨의 책상 뒤에 서서 시어슨은 지금도 여전히 KKR와 손잡고 파트너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의 말투는 평탄했지만 전투적인 본능이 곧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우리가 주인공인 거래입니다. 뒤로 비실비실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들이나 다른 어떤 회사가 개입하든 거기에 빌붙어서 보조 역할만 하진 않을 겁니다. 로스가 우리 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유리한 건지는 다들 잘 알 겁니다.”


비티 옆자리의 카우치 소파에 앉아 있던 로버츠가 입을 열었다. 그는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는데, 말을 하는 동안 두 손의 위치를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의 발언은 냉정했다.

“피터, 우리는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사업가답게 이 문제를 논의하려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손잡고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 우리도 가능성을 타진하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시어슨의 공격이 끝난 게 아니었다. 토밀슨 힐이 남아 있었다. 냉정하고, 옷을 잘 차려입고, 또 두려움을 모르는 힐이 나쁜 경찰 역할로 싸움에 끼어들었다.

“조금 전에 RJR 나비스코의 경영진은 시어슨 리먼과 끝까지 함께 간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어슨 리먼과 KKR 사이가 지금 이 시각 이후로 어떻게 되든 간에,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한 시간 동안 논의했지만 어느 한 가지 사항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양쪽 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노골적으로 대립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코언, 당신은 이 거래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자금을 모을 겁니다. 거래 전체를 관장할 겁니다.”

그러자 크래비스가 눈알을 굴렸다.

“거래 관장을 우리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시어슨은 지분 파트너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잖아요? 공정한 수수료 몫을 챙기면 되니까 말입니다.”


논의는 그런 식으로 공전을 거듭했다. 양쪽 모두 상대방의 제안을 거부할 것들은 넘치고 또 넘쳤다. 3시 가까이 되면서 어떤 합의도 가능하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제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코언은 비티를 데리고 한쪽으로 갔다.

“당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왜 가만히 있기만 합니까? 너무 늦기 전에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다간 결국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로스 존슨은 자신이 다시 자기 사무실로 돌아올 때쯤에는 크래비스와의 갈등 상황이 종료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크래비스는 가고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존슨은 충격을 받았다. 코언은 사무실 안에서 산만하게 서성이면서 크래비스 욕을 해 댔다.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에요! 그 친구들하고는 절대 함께할 수 없어요!”

존슨은 이런 결과를 모두지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머리만 쏙 내밀었다. 그 순간 존슨의 공상은 깨어졌다. 머리를 내민 사람이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떠나려 한다는 말을 전했던 것이다.

“오 마이 갓! 테디가 아직도 있었단 말이야?” 제임스 로빈슨이었다. 코언을 비롯해 몇몇이 포스트먼을 붙잡으려고 나갔고, 존슨과 로빈슨은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분 뒤에 로스 존슨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러자 포스트먼이 존슨에게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당신이 아직도 크래비스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난 손을 떼겠다는 겁니다.”

마침내 존슨이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과 손잡을 일은 없습니다. 진작 그렇게 결정했어야 하는 일인데, 아무튼 이제는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우린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손을 잡고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11장
진영 내부 암투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평화 회담은 끝났다. 코언의 부대는 전쟁을 치를 준비를 했다. 크래비스가 한 주당 90달러 제안을 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 주당 75달러 제안을 전제로 한 모든 가정은 폐기되어야 했다. 시어슨 사람들은 입찰 가격을 최대한 높이려고 시도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살아남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들처럼 존슨의 장난감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시어슨은 KKR로부터 심각하게 허를 찔렸을 뿐 아니라, KKR와 그 자문 회사인 드렉설과 메릴린치에 비해 자기네가 재정적인 정교함도 한참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시어슨 사람들은 깨달았다. 한 주에 11달러씩 총액으로 거의 25억 달러나 되는 현물지급증권을 입찰에 동원하는 크래비스의 수완은 시어슨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수요일 아침, 살로먼과 손잡는 방안이 가장 좋은 대안으로 떠올랐다. 존슨은 그날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배터리파크시티에 있는 시어슨의 사무실로 달려가 코언과 살로먼의 굿프렌드 및 스트라우스를 만났다. 나중에 코언은 존슨에게 살로먼과 손을 잡자고 요청했다.

“나야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신 의견을 따라야지요. 그런데 살로먼은 파티에 무엇을 가지고 참석하겠답니까?”

“많은 걸 가지고 올 겁니다.”

일단 30억 달러를 가져온다고 했다. 입찰 가격은 시어슨이 안전하게 동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복잡하고 괴로운 존슨의 마음이 풀려 갈 즈음에 RJR 나비스코 사무실에서는 한 차례의 크지 않은 혼돈이 연출되고 있었다. 시어슨과 살로먼의 투자은행가들이 닉 포스트먼, 그리고 제프 보이시가 이끄는 골드만 삭스 사람들을 만났다.


보이시는 힐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보이시는 더 많은 자산을, 그것도 신속히 매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힐이 역정을 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일었다. 닉 포스트먼은 두 사람의 자아가 함께 존재하기에는 너무 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시는 계속해서 힐을 들볶았다. 그리고 힐은 자신이 책임지고 진행하는 거래를 다른 사람이 넘보려 한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꼈다.


살로먼의 스트라우스와 크래비스


목요일 아침, 살로먼의 이인자 토머스 스트라우스 사장은 일인자 존 굿프렌드 회장의 아르데코 디자인 사무실에서 두 명의 투자은행가와 함께 RJR 나비스코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굿프렌드는 전날 밤에 지사 개점 행사에 참석하려고 마드리드에 가면서 RJR 나비스코 거래와 관련된 최고 지휘권을 스트라우스에게 부여했다. 스트라우스에게 인수 합병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굿프렌드의 전화기가 울렸다. “헨리 크래비스입니다.” 비서가 말했다.

크래비스가 단 한마디도 하기 전에 스트라우스는 이미 불쾌한 통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벌써 20년째 아는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그즈음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톰, 난 당신이 이 일에 뛰어들까 어쩔까 생각하는 거 다 이해해요.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고 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우리는 가까운 친구 사이 아닌가요. 당신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정말 좋겠어요, 또 그렇게 믿고 싶고요.”

스트라우스는 크래비스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살로먼으로서는 머천트 뱅킹 부문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는 데서 RJR 나비스코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크래비스는 이 거래를 위해 네 개의 은행을 고용했는데 살로먼은 끼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스트라우스는 워낙 신사여서, 그날 아침에 크래비스에게 한마디 욕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에게 상당히 괜찮은 거래 같아요, 헨리. 우리도 당신처럼 한 다리 못 낄 건 없잖아요.”

스트라우스는 서둘러 이 불쾌한 대화를 끝내려 했다.


크래비스와 윌슨


크래비스는 스트라우스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신경 써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그의 공개 입찰은 다음 날인 금요일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언과 존슨이 새로운 입찰 가격을 제시할 터였다. 이런 일이 진행될 때를 대비해 더 높은 가격을 써낼 준비를 해야 했다. 그전에 존슨의 회사에 대한 정보를 아주 많이 확보해야 했다. 존슨이 자기편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서 싸움을 진행해야 했다. 따라서 크래비스는 RJR 나비스코를 잘 아는 사람, 그것도 현명한 사람이 필요했다.


크래비스는 먼저 윌슨에게 전화를 했다. RJ 레이놀즈 인더스트리스의 전 회장이던 윌슨은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 플로리다의 잭슨빌로 이사를 가서 줄곧 거기에서 살고 있었다.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대화가 되지 않을까요?”

“그거 좋죠.”

윌슨의 대답은 시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스미스 베이글리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뿔뿔이 흩어진 R. J. 레이놀즈 가문의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돋보였던 그는 붙임성이 많았고, 조지타운의 살롱들과 낸터킷의 해변 집들을 오가며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196센티미터의 큰 키였지만 언제나 조금 구부정했고, 그의 머리는 마치 개구쟁이 초등학생처럼 1년 내내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랬던 베이글리가 RJR 나비스코의 LBO 소식에 완전히 돌변했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변했다. R. J. 레이놀즈의 외손자이자 RJR 주식을 100만 주 넘게 가지고 있는 주주로서, 자기 가족이 그토록 힘들게 쌓아올린 회사를 로스 존슨이 훔치는 걸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레이놀즈 가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5퍼센트에서 8퍼센트 정도였다.


베이글리는 자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은퇴한 중역들을 이따금 만나 대화 나누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해마다 한 번씩은 꼭 타일리 윌슨과 점심을 함께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윌슨을 좋아했다. 베이글리는 잭슨빌에 있는 타일리 윌슨에게 전화를 했다.

“회사 매각 건에 깊숙이 관계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변호사를 만나볼 의향이 있습니까?”

“크래비스는 믿을 만한 경영자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경영을 제공할 수 있고, 나는 우리의 레이놀즈 가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존슨을 쳐낼 수 있습니다.”


금요일 아침, 크래비스는 윌슨이 뉴욕에 오기를 기다리면서 《월스트리트저널》을 읽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 KKR가 윌슨을 특별 자문 위원으로 고용한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말이 샜지?”

크래비스가 로버츠에게 물었다. 로버츠 역시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이 알기로는, 윌슨은 이미 북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제트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찰스 휴걸이 전화를 걸어왔다. 크래비스는 스피커폰으로 전환해서 통화를 했다. 휴걸도 방금 그 기사를 보았다고 했다.

“헨리, 만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한 가지만 말해 두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그랬다간 모든 사람이 그만둘 겁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릴 거라는 얘깁니다. 회사 경영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회사 안에 좋은 사람들이 널려 있으니까요. 인재를 찾는 일은 내가 나서서 돕겠소. 하지만 타일리 윌슨을 고용하는 것은 엄청난 실수란 걸 알아야 합니다.”


크래비스는 도움말을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늦은 아침 시각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윌슨을 만나 두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은 회사에 대한 윌슨의 지식이 이미 낡은 것이며 또 윌슨이 존슨에 대한 복수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보를 흘린 것도 윌슨 본인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빌어먹을 짓거리나 하고!’


윌슨이 돌아간 뒤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윌슨과 잡았던 손을 빠르게 그리고 비누로 깨끗이 씻기로 마음먹었다. KKR의 특별 자문 위원이라는 타일리 윌슨의 직함은 시작도 되기 전에 폐기되었다(윌슨은 언론에 그 사실을 흘린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시어슨과 포스트먼의 갈등


목요일 오후, 피터 코언은 리무진에 몸을 싣고 토머스 스트라우스를 태우러 갔다. 함께 시어도어 포스트먼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살로먼은 50 대 50이라는 조건으로 시어슨과 힘을 합치기로 이미 동의했고, 그날 오후에 공식적인 발표가 나갈 예정이었다. 시내로 가던 길에 스트라우스는 크래비스와 했던 통화 내용을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코언에게 이야기했다.


포스트먼의 사무실에는 제프 보이시도 그 자리에 있었다. 토밀슨 힐은 이미 코언에게 골드만 삭스의 이 투자은행가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해 둔 뒤였다. 보이시와 그의 일행은 나비스코 사업 부문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는 데 특히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코언도 지난 화요일 밤 솔로 빌딩 48층에서 처음 봤을 때 보이시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 보이시는 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롱아일랜드의 집을 출발해서 맨해튼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들마다 시어슨이 살로먼을 파트너로 맞음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내용의 기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포스트먼 리틀은 언급되지 않았다. 보이시는 화가 났다.


코언은 집에 있었다. 외투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보이시였다. 보이시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테디가 굳이 힘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일이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빠질 수도 있습니다. 테디가 다른 대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테디에게는 대안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완벽하게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코언은, 그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꼭지가 돌았다’.

“내 말 잘 들어요. 우리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테디도 필요 없고, 우리는 독자적으로 우리 길을 갈 거요. 우리는 모든 자료를 당신네에게 개방했소, 모든 비밀을 다 줬단 말이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이런 행동은 여태까지 당신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과 전혀 다르잖아!”


그날 오후에 보이시를 포함한 포스트먼 일행이 시어슨을 찾아올 때까지 코언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코언이 컴퓨터로 출력한 서류 한 부를 가지고 왔는데, 시어슨과 살로먼 그리고 포스트먼 리틀의 공동 제안 내용 가안을 작성한 것이라면서 포스트먼에게 건넸다.


포스트먼은 그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살폈다. 서류에 적힌 숫자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온통 정크 본드였고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서류 어딘가에 포스트먼 리틀의 30억 달러라는 숫자가 정크 본드 숫자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포스트먼 리틀이 전체 입찰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했다. 시어슨의 제안은 포스트먼 리틀을 견제하는 내용의 온갖 조항들로 가득했다.


포스트먼은 보이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프, 이래 가지고 뭐가 되겠소? 얘기가 통하질 않잖아. 닭 뼈다귀를 아무리 주물럭거린다고 닭고기가 나오는 건 아니잖소. 협상할 건더기가 있어야지. 안 되겠습니다.”

네 사람은 회의를 했다. 그리고 포스트먼이 직접 자기가 원하는 자본 구조를 시어슨에 제안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포스트먼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굿프렌드는 시어슨이 준비한 헬리콥터를 타고 15분 만에 월스트리트에 있는 살로먼 본사에 도착했다. 이곳의 한 회의실에서 그는 자문 역할을 해 주는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오랜 세월 법률 고문을 맡아 온 호리호리한 피터 대로였고, 또 한 사람은 말솜씨 좋은 살로먼의 투자은행가 마이클 짐머먼이었다.

“이건 절대 믿지 못할 겁니다.”

문건 한 부를 내밀면서 짐머먼이 말했다. 굿프렌드는 그 문건을 읽고 깜짝 놀랐다. 코언과 RJR 나비스코의 경영진이 합의한 그 문건은 코언이 언질을 준 것보다 훨씬 더 경영진에 유리했다.


약 30분 뒤, 시어슨에 도착한 굿프렌드는 합의 문건을 코언에게 건넸다.

“나로서는 앞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 같군요. 그리고 한 팀으로 우리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 같고요. 그 합의 내용을 수정해서 왕창 깎지 않으면 말입니다.”

굿프렌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꼴사납고.”

그러자 코언이 대답했다. “존, 내가 약속하지요. 그 문제는 잘 처리될 겁니다.”


시어슨과 살로먼 사람들은 금요일 밤늦게까지 그리고 토요일 하루 종일 작업을 했다. 두 회사 모두 런던과 도쿄에 있는 인력을 총동원해 외국 은행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을 태세를 갖추었다. 제임스 스턴이 이끄는 또 다른 팀은 포스트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자본 구조를 열심히 모색했다.


토요일에 코언은 포스트먼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 한 주 내내 포스트먼은 빨리빨리 서둘라고 코언을 다그쳤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연락이 되지 않다니······. 코언은 포스트먼이 일부러 관심이 없는 척한다고 추측했다.

“그 사람, 지금 열심히 재롱을 부리는 거죠.” 코언이 토머스 스트라우스에게 한 말이다.


존슨측 홍보 담당, 린다 로빈슨


1980년대 말이 되면서 인수 합병 전쟁에 나서는 회사들은 모두 투자은행가나 변호사 외에도 홍보 회사를 따로 고용했다. 여러 해 동안 월스트리트의 이 분야 사업은 ‘켁스트 앤드 컴퍼니’라는 단일 회사 및 이 회사의 창업자인 거숀 켁스트가 지배했다. 켁스트의 대변인들은 대부분의 주요 인수 합병 때 고용되어 통상적인 언론 담당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경쟁자와 관련된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 오랜 세월 동안 지켜졌던 켁스트 원칙이 처음으로 도전을 받았다. 린다 로빈슨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대공포’였다. 그녀는 키가 크고 윤기 흐르는 붉은 금발의 박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선거 운동 때 언론 담당 부특보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나중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던 드루 루이스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제임스 로빈슨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뉴욕에 홍보 회사를 세웠다.

[제임스 로빈슨과 린다 로빈슨 출처 구글 이미지]

로스 존슨은 LBO를 선언한 지 몇 시간 뒤에 린다 로빈슨을 고용했다. 그런데 그녀는 존슨의 홍보 부문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제도 없었고, 감동적인 울림도 없었고, 근거도 없었다. 오랜 친구이던 로스 존슨의 일을 맡은 첫 주에 그녀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적대적인 전화에 대응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존슨 경영진의 수석 대변인으로서 끊임없이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홍보 사항들을 제공했다.


로빈슨 부부가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가운데는 헨리 크래비스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 공개 입찰을 발표한 뒤로 린다 로빈슨은 줄곧 은밀하게 크래비스에게 존슨과 손잡으라고 로비를 했었다. 린다 로빈슨이 크래비스와 나누는 대화 내용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남편인 제임스 로빈슨이나 로스 존슨도 몰랐다. 오로지 스티븐 골드스톤만이 그 가운데 일부를 알았다. 골드스톤은 점점 걱정되었다. 굳이 홍보 책임자이자 대변인을 크래비스와 절친한 사람으로 삼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말을 바꾸는 시어슨


도로에서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시어도어 포스트먼은 그날 오후에 약속했던 시각보다 한 시간 늦게 시어슨에 도착했다. 그의 동생 닉 그리고 스티븐 프레이딘이 포스트먼을 수행했다. 세 사람은 안내를 받아 수많은 투자은행가들 사이를 지나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피터 코언과 존 굿프렌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트먼은 일부러 보이시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전술이었다.


코언이 가장 먼저 발언했다.

“우선 지난밤에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점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조금 혼동하는 바람에······. 이 자리에서 정확히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코언은 시어슨이 생각하는 자본 구조의 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전날 밤에 코언이 제안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우선 포스트먼 리틀은 선순위 채권자가 아니라 후순위 채권자였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포스트먼은 전날 밤에 코언이 의도적으로 자기를 안심시켰다가 이제 와서 뒤통수를 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고의는 아니겠지. 설마 일부러 그렇게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포스트먼측 사람들은 추가로 시어슨에게, 경영진에 돌아가기로 합의한 약 20억 달러, 시어슨과 살로먼의 성공 수수료, 정크본드 수수료, 브리지론 수수료, 은행 수수료, 법률 수수료 등에 대해 모두 확인하고 어이가 없어 했다.


얼마 뒤, 코언과 토밀슨 힐이 전략을 재검토할 때 포스트먼 일행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랐다. 프레이딘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대꾸했다.

“다음 행보? 보이시에게 전화해서 우리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줘야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데요?” “모르겠소, 스티브? 우린 지금 밖으로 나왔잖아요.”


12장
끝내 결렬된 200억 달러짜리 평화협정


입찰 경쟁에 나선 존슨과 코언은 카드를 다 쥐고 있었다. 이들은 회사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분석할 수 있는 경영진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줄일 때 해당 사업 부문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는지, 또 어떤 공장을 가동 중지해도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는지 속속들이 알았다. 정확한 정보는 성공의 열쇠이다. 그런데 크래비스는 그 정보를 바깥에서 들여다보아야 했다.


특별위원회에 부과된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라저드 프레어스’와 ‘딜런 리드’의 투자은행가들은 공정한 경기가 치러질 수 있도록 경기를 조율하는 심판들이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크래비스가 존슨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LBO의 구매자가 대상 기업의 실제를 조사하는 과정, 다시 말해서 팔려고 내놓은 기업에 대한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실사’ 과정을 ‘상당한 주의 의무(due diligence)’라고 부른다. 그런데 크래비스가 경영진의 도움을 받아 이 작업을 할 때 경영진이 제대로 보고해 줄 리가 없었다. 매우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KKR가 LBO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업을 잘했기 때문이다.


실사(Due Diligence) 인터뷰


10월 27일 목요일,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찰스 휴걸을 만나 실사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협조를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존슨 진영 사람들을 포함한 RJR 나비스코의 중역들은 KKR 실사팀으로부터 면접 조사를 받아야 했다. 많은 상장기업들이 그렇듯, RJR는 델라웨어의 법률 아래 설립되었다. 델라웨어의 판례에 따르면, 이사회는 크래비스의 실사에 중역들을 내보내 응하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실사에 응하는 사람들이 협조적이어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다.


특별위원회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10월 31일 월요일 아침부터 이틀 동안 크래비스가 RJR의 중역들을 상대로 면담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마련했다. 존슨은 부른다고 해도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에드워드 호리건은 참석을 거부했다. 크래비스의 팀은 주말 내내 이 면담 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특별위원회가 RJR의 재무 자료를 담은 첫 번째 상자를 월요일 아침에야 보냈고, 그 바람에 질문을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9시 30분에 첫 번째 중역으로 ‘플랜터스’의 사장인 존 폴리크론이 나타났다. 크래비스는 폴리크론과 악수를 나눌 때 폴리크론 뒤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으로 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 존 그리니스와 그의 측근인 빌 맥나이트가 10시에 도착했다. 크래비스는 두 사람이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니스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걸 알아 두세요. 나는 로스 존슨 집단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래더는 잔뜩 기대했다. 하지만 면담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라저드 소속의 젊은 직원이 들어와서 그리니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면담이 끝난 뒤에 길 건너편 솔로 빌딩 48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망가졌다. 래더는 존슨이 보낸 메시지가 그리니스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해럴드 헨더슨은 5시에 면담 조사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크래비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미스터 크래비스?”

두 사람은 비어 있던 스위트룸으로 들어갔고, 비티는 바깥에서 기다렸다. 얼마 뒤 크래비스가 방에서 나왔다. “여태까지 내가 들은 말 가운데 최악이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까놓고 말하더군요. 자기는 로스 편이라고. 이겨도 로스와 함께 이기고 져도 로스와 함께 지겠다고. 우리한테는 입을 열지 않겠대요.”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면서 래더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존슨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쉬운 질문에는 대답했지만 어느 부분의 비용을 깎을 수 있을지와 같은 좀 더 심도 깊은 질문에는 다들 하나같이 생각이 잘 나지 않으니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존슨 사람들의 행렬은 화요일까지 이어졌다. 화요일 오후, 국내 담배 사업 부문의 책임자인 돌프 본 악스와 그가 이끄는 세 명의 간부들이 면담 조사를 받았다. 악스는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면 회사를 떠나겠다는 말을 했고, 이런 내용이 전날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었다. 따라서 크래비스의 입장에서 악스는 별로 효용 가치가 없었다.


델몬트의 리처드 카보넬 같은 사람들은 함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에드워드 로빈슨은 최악이었다. 존슨의 최고재무책임자인 그는 정보의 보고가 될 수도 있었다. 회사의 해외 자금 운용에 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세부적인 정보는 크래비스에게 무한한 가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헛된 바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가 기획 담당 책임자이던 딘 포스바였다. 포스바도 로빈슨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래더는 마치 전범을 상대로 심문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포스바가 적어도 이름과 계급, 군번은 대겠거니 기대했다. 그게 래더의 최고 기대 수준이었다.


포스트먼의 움직임


포스트먼은 월요일 아침에 코언과 굿프렌드에게 전화로 작별을 고한 뒤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해서 유감스러운 건 전혀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시어슨과 협상하는 과정은 평생 경험했던 그 어떤 일보다 실망스러운 경험이었다. 정크 본드를 동원하는 집단들과 일하느니 차라리 손을 털고 싶었다. 그가 유일하게 아쉬워한 점은 유력한 경쟁자가 없는 한, 크래비스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를 성사시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골드만 삭스의 제프 보이시가 전화해서 자기는 RJR 나비스코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보이시에게는 이 거래를 통해 RJR 나비스코의 개별 사업 부문을 인수하려고 안달이 난 고객이 셋 있었다. ‘프록터 앤드 갬블' '랠스턴 퓨리나' '캐슬 앤드 쿡'인데 이들이 RJR 나비스코의 개별 사업 부문을 그토록 강력하게 원하는데, 보이시로서는 이 거래를 원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시어슨과 마찬가지로 골드만 삭스는 막 수십억 달러의 투자 자금을 세상에 공개할 참이었다. 비록 브리지론을 위한 자금으로 설정된 것이긴 했지만, 이 자금으로 이제 골드만이 처음으로, 시어슨이나 메릴린치와 같은 자금이 넘쳐나는 대형 투자 회사와 육탄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자금은 보이시가 탄생시킨 아기였다.


보이시가 생각하고 있던 컨소시엄은 그야말로 드림팀이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성원은 담배 사업 부문을 원하는 존재였다. 시어도어 포스트먼이 바로 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포스트먼은 거의 설득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보이시는 어느 버튼을 어떻게 눌러야 그를 조종할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일 KKR가 이 싸움에서 이기면, 이제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할 겁니다. 이들은 분 피컨스나 칼 아이칸, 그리고 모든 기업 사냥꾼들을 하나로 합친 존재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될 겁니다.”
“회장님은 회장님의 돈이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르십니다. 회장님의 돈이야말로 전체 거래를 성공적으로 풀어 나갈 열쇠입니다.”
"만일 이 거래가 회장님의 기준과 맞아떨어질 때, 회장님이 얼마나 많은 걸 성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정크 본드 녀석들은 최근 3, 4년 동안 살판났다고 설쳐 대지 않았습니까? 이런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포스트먼의 머리에 정크 본드를 앞세운 야만인들이 도시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우리는 이들을 저지할 수 있다. 영원히 물리칠 수 있다. 우리가 이 야만인들을 물리쳐야 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몇 가지 조건은 알고 있겠죠? 정크 본드는 안 됩니다. 그 미친 지랄 같은 종이쪽지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사회 특별위원회가 입찰에 응해 달라고 우리를 초대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존슨쪽의 입찰 준비


입찰 준비와 관련해 존슨 쪽에서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말을 애틀랜타에서 보낸 존슨은 월요일 오후에 뉴욕으로 돌아와 텍사스의 투자자 로버트 배스의 대리인들을 한 시간 동안 만났는데, 이들은 코언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는 여러 고려 대상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에 존슨은 호리건을 비롯한 RJR 나비스코의 중역들과 함께 시어슨과 살로먼 사람들을 만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두 갈래로 가닥이 잡혔다. 굿프렌드와 스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살로먼 팀은 즉각 입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과 RJR 나비스코 이사회에 자기들이 실질적인 입찰자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입찰 가격을 크래비스의 한 주당 90달러를 조금 상회하는 92달러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스티븐 골드스톤과 토밀슨 힐이 이끄는 다른 쪽에서는 그런 방식을 근시안적이라고 판단했다. 크래비스와 입찰 가격 경쟁을 하다 보면 결국 인수 가격은 터무니없이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이들은 공매야말로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크래비스와의 경쟁 상황에 신속하게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크래비스를 찌그러뜨리고 이사회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단 한 방의 예리한 결정타를 날려야 했다.


화요일 아침에 골드스톤은 이사회 의장인 휴걸과 함께 일하는 변호사 피터 앳킨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크래비스가 RJR를 사겠다고 공식적으로 제안한 지 딱 한 주가 되는 날이었으며 크래비스 쪽의 실사가 진행되는 중이던 터라, 존슨 쪽에서 언제 입찰에 나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앳킨스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일단 가격과 조건을 먼저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존슨은 휴걸과 대화를 나눈 끝에 이사회는 경영진 쪽이 KKR 진영과 협상해서 경쟁의 여지를 없애 버리고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인수가 이루어질까 봐 무척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양측이 손잡을 가능성을 아예 차단한다는 방법으로 이사회가 높은 입찰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골드스톤은 추론했다.


하지만 굿프렌드는 회의적이었다. 그렇게 나가다가는 인수 가격이 90달러를 훌쩍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높일 이유가 뭐가 있나요? 돈을 낭비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왜 그래야 되죠? 우리가 그렇게 나갈 때 계약이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가능성은 반반이거나 그 이하입니다.” 골드스톤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인정을 하면서도 내심 당황스러웠다. 이틀 전만 해도 이 사람들은 확실하게 높은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굿프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입찰 전략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크래비스의 고민


화요일 저녁, 실사 과정은 끝났다. 크래비스는 우울한 마음으로 플라자 호텔에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 로버츠와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입찰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싸움의 주도권은 한 주 전에 잡았지만 그 효과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제대로 진행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실사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KKR의 최대 투자자들 가운데 몇몇이 크래비스가 선택한 공격적인 전술을 불편해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신문마다 실렸었다. 연기금이 ‘적대적’ 인수 합병에 관여되었다는 내용이 머리기사로 떠올랐고, 오리건과 미시건 그리고 매사추세츠에서는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크래비스는 토밀슨 힐과 RJR의 경영진이 자기 뒤에서 모종의 협상을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연기금 운용자들은 RJR 나비스코의 중역들로부터 성난 목소리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이 가운데는 해럴드 헨더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윌셔가 고객들과 맺은 계약서에 분명히 적대적 인수 합병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 있지 않느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크래비스가 괴로워했던 모든 고뇌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언론에서 비롯되었다. 언론은 KKR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댔다. 《비즈니스위크》의 표지 기사 제목은 ‘빚으로 흥청망청, 인수 합병 지나치지 않은가?’였다. 《타임》도 ‘대형 인수 합병’이라는 제목으로 한몫 거들었다. 13년 동안 일하면서 두 사람이 인수 합병 문제와 관련해 언론으로부터 그처럼 뜨거운 조명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사 과정은 참혹하게 끝났고, 투자자들이 걱정하는 가운데 언론은 마구 두들겨 대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어쩌면 존슨과 대화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하는 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논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크래비스의 논조는 힘을 합쳐 인수할 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크래비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전화기를 들었다.


린다 로빈슨의 중재


린다 로빈슨은 크래비스의 말을 듣고 무척 좋아했다. 그녀로서도 상대방에게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는 이전투구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던 상황이었다. 크래비스가 이 거래를 시어슨 및 살로먼과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함께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을 린다 로빈슨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크래비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스를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두 사람을 한 배에 태워 줄 테니까요.”

그러자 크래비스가 말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요, 린다. 현재로서는 서로 멀기만 하니까.”

하지만 린다는 강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두 사람이 손잡을 길이 분명 있을 거예요. 로스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당신들 둘이 손을 잡으면 엄청날 거예요. 지금 이런 모습은 말도 안 되고 너무 우습잖아요.”

그 점은 크래비스도 동의했다.


수요일 아침, 린다 로빈슨은 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생각에는 한 번 더 협상을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존슨도 그녀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크래비스와 손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코언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크래비스는 악마가 아니었다. 크래비스와 손잡지 않을 경우 잃는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솔직히, 존슨은 시어슨이 크래비스와 맞붙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입찰 제안을 할 능력이 있는지도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캐럴라인 롬이 플라자 호텔에서 2시에 다음 해 봄을 준비하는 패션쇼를 연다고 말한 뒤 린다는 말했다.

“난 거기에 가서 헨리를 만날 거예요.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할까요?”

“헨리에게 최고위층에서 결단을 내리는 게 옳다고 얘기하세요. 지난번에는 제임스와 내가 빠진 상태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잖아요. 그게 실수였습니다. 제임스와 내가 논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그렇게 하자고 전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해 보자고요. 아 참! 이건 완전히 비밀로 해야 합니다.”


“린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들을 미리 조율해 두지 않고는 만나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아서요.”

“어떤 문제들요?”

크래비스는 회사의 지분을 자기들이 더 많이 가지고 또 이사회 구성도 자기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둘 다 반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곧바로 동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화를 얻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크래비스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채권 발행은 드렉설이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드렉설에 대해서는 살로먼이 매우 민감하게 생각한다는 거 알잖아요.”

드렉설과 살로먼은 채권 거래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로스는 이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어 해요. 로스는 그게 누구든 최고와 함께 가길 원해요. 그러니 드렉설이 하느냐 못 하느냐가 판을 깰 정도로 문제가 될 수는 없어요.” 결국 마지막 쟁점도 합의했다.


존슨은 린다 로빈슨이 크래비스와 대화하고 합의한 내용을 듣고 흡족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합리적인 것 같았다. 한 주 전에는 지분을 90대 10으로 나누지 않을 거라면 협상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5 대 5로 나누자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만나기로 한 시각은 정각 6시였다.


존슨, 시어슨과 KKR의 합의


6시에 존슨은 코언, 로빈슨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30분 뒤에 주요 합의 내용이 나왔다. RJR 나비스코의 이사회는 양쪽 진영에서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회사의 지분 역시 양쪽 진영이 반반씩 가지며, 존슨의 지분은 시어슨 쪽에서 나눈다. 린다 로빈슨이 사전에 비밀리에 의견을 조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코언으로서는 합의가 그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크래비스는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채권 발행은 드렉설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코언이 발끈했다. “왜 드렉설입니까?”

로버츠가 나서서 답변했다.

“2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조성해야 하는데, 만일 브리지론이 확실하지 않으면 어디서 이런 거금을 모으겠습니까?”

“그들이 어떤지는 잘 알잖아요. 드렉설이 한 다리 끼어 들어오면 독식하려 들 거란 말입니다.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할 거요.” 코언이 반박했다.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네가 수수료의 절반을 먹습니다. 당신네는 채권을 단 한 장도 팔지 않고 수수료 절반을 먹는다고요. 그래도 문제 있습니까? 됐죠?” 로버츠의 말에 코언도 더는 자기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한 시간 만에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세 가지 주요 쟁점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변호사들을 합석시켜 세부적인 논의를 하는 일만 남았다.

존슨은 짜릿했다.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시원했다! 이렇게까지 올 수 있었던 데는 린다 로빈슨의 힘이 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싸움에 지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아니, 어쩌면 이긴 것일지도 모르지. 회사를 계속 경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플라자 호텔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솔로 빌딩 48층에서 존슨은 플라자 호텔로 돌아갈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점점 걱정이 되었다. 골드스톤에게는 전화한 상태였다. 굿프렌드와 스트라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동행하기를 바라는 건 분명했다. 존슨은 제임스 로빈슨에게 둘 중 한 사람만 데려가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스트라우스가 선택되었다. 그리고 시어슨 측의 변호사 잭 너스바움까지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살로먼 브라더스의 수석 법률 고문인 피터 대로는 브루클린하이츠의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살로먼의 마이클 짐머먼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략 10시쯤이었다. 대로는 솔로 빌딩을 빠져나가 길을 건너 플라자 호텔로 갔다. 그리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여기가 헨리의 스위트룸이죠?”

“예, 그렇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남자는 고맙게도 문까지 열어 주었다. 대로가 안으로 들어가자 토머스 스트라우스가 보였다. 그는 크래비스, 로버츠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로로서는 당시 전혀 알지 못했지만, 로스 존슨이 조심스럽게 이룩한 200억 달러짜리 평화 협정에 첫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살로먼의 반대


“이건 우리의 자본입니다. 근데 이걸 다른 사람이 주무른다면 우리로서는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트라우스의 목소리는 열정으로 떨렸고, 그의 주장은 명료했다. 살로먼과 시어슨이 채권을 발행해야 한다고 했다. 살로먼은 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럴 의지와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럴 권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걸 드렉설에 넘겨준다는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라고 아니라고 했다.


크래비스는 지친 표정으로 드렉설이 왜 믿음이 가고 또 드렉설에 맡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다.

“드렉설은 우리가 인수 합병 작업을 할 때마다 함께 일했고 그때마다 늘 훌륭하게 처리했습니다. 최고로 말입니다. 비어트리스도 해냈습니다. 다른 어떤 데서도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드렉설은 최곱니다. 그리고 수수료가 싸기도 하고요. 지금 이 거래는 역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만의 하나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일은 그르치고 맙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을 헐렁헐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경영진 쪽과의 합의 사항이었다. 골드스톤이 그 내용이 담긴 사본을 꺼내 크래비스 앞에 흔들었다. “여기에 서명해 주셨으면 하는 게 우리의 바람입니다.”

비티가 크래비스에게 문건을 내밀면서 말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할 겁니다.”

비티는 문건 전체를 빠르게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존슨이 거부권을 가지고 있으며, 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시어슨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익을 존슨에게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헨리, 이런 식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회의는 일단 중단되었다. RJR 나비스코 사무실에서 한 시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골드스톤이나 잭 너스바움 모두 그 문건을 비티에게서 회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나중에 케이시 코거트는 말했다.

“아무도 그 문건을 달라고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었죠 뭐.”


그로부터 여러 달이 지난 뒤에 토머스 스트라우스는 당시 중심적인 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혔다. 그 쟁점은 채권 거래라는 은밀한 세계와 관련된 문제였다. 둘 이상의 은행이 채권 발행에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할 때, 선도적인 한 은행을 선정해 모든 채권 관리를 맡겨야 한다. 이 주관 은행은 《월스트리트저널》이나 기타 금융 관련 출판물에 게재되는 일련의 ‘묘비 광고’에서 맨 앞부분에, 정확히 말하면 맨 왼쪽에 이름을 올린다. 묘비 광고 맨 왼쪽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채권 거래 세상에서는 매우 강력한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결국 이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존슨처럼 회사를 인수하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동안 합의한 내용을 바꿀 만큼 중요한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살로먼은 채권을 파는 회사였다. 따라서 경쟁사인 드렉설의 들러리만 서게 된다면 존슨의 이익에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거래 자체가 성사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수 있었다.


새벽 3시가 다 된 시각, 존슨의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방에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굿프렌드와 마주 앉았다. 크래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가능하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로먼이 이 거래를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굿프렌드가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크래비스도 마찬가지였다. 굿프렌드가 방을 나가자 로버츠는 우울해졌다. 바 옆에 서서 우울한 기분으로 로버츠가 크래비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리처드 비티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티를 보자 로버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정말 미친 짓 아닙니까? 묘비 왼쪽에 누구 이름을 올리느냐 하는 문제로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실질적인 쟁점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간판과 자존심 때문에 치고 받고 난리가 아닙니다.”


비티도 자기 고객들의 실망에 맞장구쳤다.

“논의를 뒤로 미루었던, 경영진이 제시한 합의서 초안도 문제가 많잖아요. 만일 우리가 이걸 유리하게 풀어 가지 못하면, 앞으로 그 어떤 것도 유리하게 풀어 가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로버츠가 말했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잡시다. 이건 미친 짓이니까.”


다음 날 11시가 다 된 시각. 로빈슨과 코언, 너스바움이 마지막으로 KKR 사무실로 내려갈 사절단으로 선정되었다. 세 사람은 크래비스의 사무실로 안내되었고, 로빈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이 협상에 성실하게 임해 준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 양측은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입장을 바꾸지 못하겠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각자 따로 자기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크래비스는 당혹스러웠다.

“아침에 우리가 피터에게 제시한 방안에 대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로빈슨은 철두철미한 외교관이었다. 그래서 별 소용이 없었다는 말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폭탄 하나를 떨어뜨렸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입찰 가격을 제시할 겁니다. 당장 언론에 발표할 겁니다.”


로버츠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투덜댔다.

“빌어먹을! 로스 존슨은 자기가 직접 내려와서 우리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배짱도 없나 보지? 차라리 잘됐어, 저런 인간들하고 엮이지 않게 됐으니까 말이야. 협상해 봐야 나올 것도 없었어.”

코언은 크래비스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KKR의 손님 대기실에서 48층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장 시작합시다.”

그리고 몇 분 뒤 경영진이 RJR 나비스코를 한 주에 92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이 〈다우존스뉴스서비스〉를 타고 보도되었다.


이 소식에 깜짝 놀란 사람은 크래비스만이 아니었다. 존슨은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던 존슨은 회의실에서 진행되는 논쟁이 순전히 관념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골드스톤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짜로 누군가 입찰 제안을 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크래비스와의 협상이 거의 다 끝나 간다고 본 데다, 또 자기가 승인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린다 로빈슨이 48층으로 달려왔고, 정오경에 전화로 크래비스와 통화를 했다. 크래비스는 시퍼렇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좀 더 노력해 볼 수도 있었잖아요!”

크래비스는 몇 분 동안 계속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의 분노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린다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 진영 사람들이 한 행동이 당혹스러웠다. 짜증이 나기도 했다.


존슨은 국면이 그 지경으로 변하자 충격을 받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굿프렌드나 코언을 상대로 얘기할 수도 없었다. 함께 일하자고 부른 사람들이 존슨 자신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200억 달러짜리 입찰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존슨이 침울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골드스톤은 내키지 않지만 피터 앳킨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들이 새로운 입찰을 냈다고 알렸다. 겨우 하루 전에 엄청나게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방안, 즉 ‘블록버스터’를 놓고 함께 얘기를 나눈 뒤 주당 92달러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무척 부끄러웠다. 앳킨스는 그런 낮은 가격에 대한 놀라움을 어떻게 다스릴지 몰라 나름대로 애쓴다는 걸 골드스톤은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앳킨스가 입을 열었다. “네, 잘 들었습니다.”


존슨 쪽 사람들 가운데 92달러 입찰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골드스톤만이 아니었다. 토밀슨 힐도 있었다. 그는 필스버리 이사회 회의를 하다가 잠시 나와서 코언의 전화를 받았는데, 이때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 말은 이것이었다. “실수하신 겁니다.”

이제 자기들은 경매장에 들어섰고, 경매장에서는 경매인이 모든 입찰자를 지배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금요일 오후에 크래비스는 최악의 공격을 받았다. 이날의 《비즈니스위크》 표지 기사는 크래비스를 ‘헨리 국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본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KKR의 크래비스가 설령 RJR 나비스코의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몰락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캐럴라인 롬은 이 기사를 7번가의 자기 사무실에서 보고 몸서리를 쳤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래비스의 손으로 들어갔던 경영진 쪽과의 합의서 내용은 2주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스티븐 골드스톤은 이 수정 작업을 존슨에게 넘겼고,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스는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성인입니다. 로스도 그걸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죠. 그건 본인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경영진과의 합의서 보도


그러다 마침내 금요일 오후, 이 시한폭탄이 터졌다. 린다 로빈슨이 전화를 받았다. 《뉴욕타임스》의 베테랑 기자 제임스 스턴골드였다. 그는 토요일자 신문에 경영진 쪽이 제시한 합의서 내용을 다루는 기사를 실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로 봐서는 경영진에 돌아갈 불로소득 20억 달러며, 여기에 대한 살로먼의 반대까지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았다.


금요일, 시어도어 포스트먼 진영도 수면 위로 나설 준비를 마쳤다. 처음에 휴걸의 특별위원회는 회사의 민감한 재무 관련 정보를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에게 제공하는 것과 관련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휴걸은 존슨과 크래비스가 손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이들이 손잡을 경우, 포스트먼이 대항마로 존재해야 조금이라도 더 인수 가격을 높일 수 있다는 게 휴걸의 판단이었다.


존슨은 애틀랜타의 집에서 토요일 늦게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오전 늦은 시각에 《뉴욕타임스》를 집어 들고 경제면을 훑었다. 곧 그의 시선은 하단의 왼쪽에 난 기사에 고정되었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나비스코 경영진이 인수 합병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합의서 내용이 탐욕의 상징이라고 말들이 많았지만 존슨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기사 제목이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기사는 경영진이 손에 넣을 수익은 20억 달러나 된다고 적었다. 하지만 존슨은 이 수치가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모든 인센티브가 다 충족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주당 인수 가격을 92달러로 제시해 놓은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 게다가 그 합의서 내용이 수정될 것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같은 날 아침, 코네티컷 집에서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은 찰스 휴걸 역시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이사들이었고, 이들은 존슨에게 해명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만일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사진들은 그 내용에 대해 여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셈이었다. 그래서 애틀랜타에 있던 존슨에게 전화했다.

“오, 찰리, 개소리입니다. 한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존슨이 대답했다.

하지만 휴걸은 로스 존슨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경영진이 제시한 합의서에 살로먼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굿프렌드는 토요일에 존슨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살로먼의 중역들 가운데 그 기자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날 저녁, 한 무리의 투자은행가들과 변호사들이 5번가에 있는 코언의 아파트에 모였다. 다음 주에 구사할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다. 코언은 제프 보이시와 시어도어 포스트먼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독자적으로 RJR 나비스코 인수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몇 번씩 다짐해 놓고 결국 말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코언은 반드시 호된 대가를 치르게 할 참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시어도어 포스트먼에게 몇 차례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홍보 분야 자문을 맡고 있는 사외 고문 데이비스 웨인스톡이었다. 그는 기자들의 적대적인 질문 톤으로 볼 때, 시어슨이 포스트먼 리틀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이 뭔가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포스트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영진이 제시한 합의서 초안을 누설했다고 비난하는 게 분명했다.

‘만일 크래비스 개자식이 그게 다 내가 한 짓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 버린다면······?’


마침내 포스트먼은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비밀 사항을 누가 언론에 누출시켰는지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애틀랜타에 있는 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리 존슨이 전화를 받았다. 로리가 포스트먼과 수다를 떠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다른 회선으로 코언 및 골드스톤과 전화 회의를 했다.


두 사람 다 포스트먼이 전화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크래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존슨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두 사람이 우려할 만했다.

“피터, 난 당신 편이오.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우리가 테드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의사를 전달할까요?”

골드스톤이었다. 그는 존슨이 포스트먼을 단호하게 쳐 내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러죠 뭐. 여러분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처리해요”


그로부터 30분 뒤 시어도어 포스트먼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포스트먼은 존슨이 건 전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들었을 때 거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낯설었다. 그 목소리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시어도어 포스트먼임을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데이비스 포크 앤드 워드웰이라는 법률 회사의 조지 베이슨입니다. 우리는 존슨 씨 부부를 대변하며, 우리 고객을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통고를 드리는 바입니다. 당신은 존슨 씨 부부의 집에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존슨 씨에게는 직접 전화를 거실 수 없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반드시 저를 거치셔야 합니다.”


<3편에서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