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barians at the gate
13장
이사회가 전면에 나서고 언론은 집중포화를 퍼붓다
11월 7일 월요일 아침, RJR 나비스코의 이사들이 스캐든 압스에 모였다. 이들은 모두 언짢았다. 경영진 쪽의 합의서 초안 내용이 드러나자 이사들은 대부분 경악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서 이사회 내부에서 반反존슨 정서가 빠르게 형성되었다. 스티븐 골드스톤이 옳았다. 이사들은 이제 더 이상 존슨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존슨의 편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을 대중적인 분노의 표적으로 만든 존슨에게 악감정까지 품게 되었다.
존슨을 때리는 신문 기사들이 줄지어 나왔다. "5250만 달러의 ‘황금 낙하산’, 우호적인 RJR 중역들에게 나누어 준 5000만 달러 가치의 ‘양도제한조건부주식’ 52만 6000주, 존슨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손해 보지 않도록 설정한 상황 등"이 그런 내용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언론은, 이사 각각이 모두 1500주씩 받은 양도제한조건부주식과, 컨설팅 계약을 통해 이사들이 받기로 되어 있는 두둑한 컨설팅 수수료 등 존슨이 이사회에 부여한 온갖 혜택까지 포착했다.
사실 RJR 나비스코의 LBO 이야기가 처음 나올 때부터, 존슨에 반대하고 LBO에 반대하는 우편물들이 휴걸 앞으로 쇄도했었다. 담배 사업 부문의 중견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내부자’ 거래의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이 내부자 집단에 RJR 나비스코 회사의 향후 경영이 위탁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우리는 거짓말을 들어야 하고, 속임을 당해야 하고, 또 이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우리를 속이고 이용하는 주체는 자기들의 이익만을 좇는 소규모의 내부자 집단입니다. 내가 보기에 로스 존슨이 하는 일은 무장 강도 행위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존슨을 쫓아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들은 스미스 베이글리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레이놀즈 가문의 성난 상속인은 ‘이사회의 몇몇 이사들과 존슨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때 과연 이사회 산하의 특별위원회가 진정으로 주주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회사의 인수 합병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심판 역할을 할 특별위원단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베이글리의 주장은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존슨과 이사회에 대한 압력을 한 단계 더 높이는 역할을 했다.
파장은 전국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RJR 나비스코를 둘러싼 싸움은 'LBO로 인해 기업이 떠안게 될 부채의 위험성'을 주제로 하는 새로운 논쟁을 촉발했다.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로 유명한 마틴 립턴*은 고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눈을 감은 채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튤립 버블이나 사우스 시 버블 혹은 피라미드 투자 신탁이나 과거 모든 금융 부문의 광포함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엔 추락이라는 참담한 결말을 맞을 것입니다.
* 왁텔, 립턴, 로젠 & 카츠(Wachtell, Lipton, Rosen & Katz) 로펌의 창립 파트너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도 LBO 대출이 경기 후퇴기에 어떻게 될지 은행들이 심각하게 재고하도록 하라고 의회에 촉구했다. 11월 중순, 업계의 주요 보험 회사인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과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ph)의 하트퍼드 보험이 하루 차이로 연이어 RJR 나비스코를 고소했다. 두 회사가 가지고 있던 RJR 채권이 주가가 오르면서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그리고 ITT의 회장 랜드 애러스코그(Rand Araskog)도 LBO가 일반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했는데, 그는 자기 회사의 연금 관리자들에게 LBO 펀드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특별위원회의 분위기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다섯 명 가운데 존슨에 대한 평가의 편차가 가장 컸던 사람은 아마도 휴걸일 것이다. 애초부터 존슨의 동기를 알지 못했던 휴걸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존슨을 의심하게 되었다. 또한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 가운데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브룩스 브라더스’ 브랜드 옷을 입던 존 매콤버는, 매니토바에서 공부를 하고 ‘카시니’를 입는 존슨을 오랫동안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는 존슨이 자기들에게 어떤 사실을 숨기거나 혹은 갑자기 알리는 따위의 행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존슨이 한 해 전에 이사진에 넣었던 ‘걸프+웨스턴’의 최고경영자 마틴 데이비스도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그는 기업을 평가하는 법을 알았고, RJR 나비스코의 주식이 한 주에 75달러라고 하는 것은 이 회사를 모욕하거나 잘못 평가하거나 혹은 둘 다라고 생각했다. ‘내셔널 캐시 레지스트’의 회장 윌리엄 앤더슨은 정크 본드니 기업 사냥꾼이니, 혹은 기업 활동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현대적인 모든 개념과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이사 가운데 앨버트 버틀러는 인수 합병의 열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꼈다. 윈스턴살렘에 있던 집에서, 이사회가 마을과 마을 노동자를 팔아 버렸다고 느끼는 존슨 반대파들의 보고를 받음으로써 최신 정보들을 확보했다. 한번은 와코비어의 존 메들린과 시내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폴 스틱트를 만났다. 스틱트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존슨이 그런 짓을 하도록 이사회가 어떻게 가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월요일에 특별위원회가 회의를 할 때쯤에는, 일의 진행이 위원회의 통제권 밖으로 이미 벗어났다는 점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입찰과 관련된 일련의 형식적인 지침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모든 규정은 참가자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며, 입찰에 참여하는 측은 며칠 안으로 이러한 사항에 대해 동의의 뜻을 전달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마감 시한이었는데, 11월 18일 금요일 오후 5시로 정해졌다. 열하루 뒤였다.
크래비스의 고민
LBO를 반대하는 여론이 점차 고조되자 크래비스로서는 회사의 명성이 타격을 입지 않을까 점점 더 걱정스러웠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거숀 켁스트와 마틴 립턴이라는 오랜 친구들에게 이런 여론의 역풍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 봐야 언론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밖에 더 하겠어? 이거야 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계속 당하고 있는 거니까.”
크래비스는 언론만 걱정한 게 아니었다. RJR 나비스코의 실상을 깊이 파악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입찰 마감까지는 열하루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크래비스는 폴 스틱트라는 이름을 들었다. 크래비스와 전화 통화를 하며 스틱트는 윈스턴살렘의 맹렬한 반 존슨 정서 덕분에(심지어 스틱트의 이발사조차 크래비스를 지지했다!) 크래비스를 돕는 게 옳은 일이라고 설득당했다.
스틱트와 크래비스는 월요일 오후 4시에 리처드 비티의 법률 회사인 ‘심슨 대처 앤드 바틀릿’에서 만났다. 스틱트는 진정으로 회사와 회사에 속한 직원들을 염려했다. 하지만 새로 생긴 RJR 나비스코와는 그간 완전히 소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5년 전의 낡은 정보였다. 그러나 크래비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스틱트가 전부라는 진리였다. 크래비스와 스틱트는 악수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폴 스틱트는 KKR 진영으로 들어갔다.
존슨측 진영 분위기
경영진 내부에서도 점차 긴장이 고조되었다. 여태까지의 일 처리가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비난과 분란은 불을 보듯 뻔했다. ‘줄줄이 소시지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살로먼의 투자은행가들은 시어슨의 토밀슨 힐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살로먼 사람들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시지들은 힐이 전화 메시지를 받고도 전화를 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심지어 힐은 살로먼의 투자은행가 마이클 짐머먼을 (어느 은행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휴대용 도우미’로 다루었다.
한편 존슨은 갈수록 낙담이 깊어졌다. 이른바 ‘위대한 모험’의 진행 상황 가운데서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크래비스의 매복과 기습, 실패한 평화 협상, 경영진 합의서를 비난하는 들끓는 여론, 델몬트의 기밀 자료 누출, 날마다 들볶아 대는 언론 등······.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시어슨이 거래의 지휘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싸움은 도무지 재미있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리니스와 KKR
존슨을 마지막으로 만난 뒤에 그리니스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니스는 LBO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LBO 움직임 그 자체에 화가 났다. 또한 동시에 자신이 7인 그룹에 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똑같은 정도로 화가 났다. 그리니스는 LBO가 발표된 다음 날 뉴저지의 나비스코 본사로 날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비밀 문건을 만들어 찰스 휴걸에게 우송했다. 우편물의 겉면에는 ‘기밀-긴급’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니스는 나비스코의 최고재무책임자인 래리 클라인버그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여 나비스코를 해체해서 더욱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 구조로 재편하자고 말했다. 비용을 어떻게 절감하고 또 현금 흐름을 어떻게 강화할지 보여 줌으로써 나비스코를 보기 좋게 꾸며 대형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들자고 했다. 만일 다른 입찰자들이 나비스코의 진정한 잠재적 가치를 파악하면 존슨의 시도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KKR 진영의 여러 설계안을 정리하는 작업은 KKR의 유한 책임 파트너인 스콧 스튜어트가 맡았다. 그는 특별위원회를 통해 얻은 RJR 나비스코 재무 자료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 수치들은 존슨에게서 직접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그게 의심스러웠다. 스튜어트의 분석에는 커다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들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찾아내지 못한 숫자들도 문제였지만, 확보한 숫자들도 스튜어트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한 가지 항목의 숫자가 가리키는 내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RJR 나비스코로부터 얻은 항목 가운데 ‘기타 용도 현금’이라는 게 있었다. 이 항목은 10년째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해마다 3억 달러에서 5억 달러 규모로 집행되었다. 스튜어트는 이 항목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월요일에 스튜어트는 딜런 리드의 파트너인 블레어 에프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혹시 존 그리니스를 만나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존 그리니스의 이야기는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그가 한 이야기는 래더가 10년 동안 LBO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그 어떤 것보다 놀라웠다. 단 한 방에 나비스코의 전략과 비밀, 약점 등이 모두 까발려졌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나비스코에 돈을 많이 벌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비스코는 필요하다면 단 한 해 만에 영업 이익을 40퍼센트로 높일 수 있다고, 그리니스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익률도 현재의 11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올릴 수 있고, 현금 흐름도 현재의 8억 1600만 달러에서 한 해 만에 11억 달러로 올릴 수 있다고 했다.
크래비스나 래더에게는 거의 2주 만에 찾아온 좋은 소식이었다. 래더는 곧바로 그리니스의 제보 내용을 입찰 가격 산정 모델에 반영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결과가 나왔다. 그리니스가 말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KKR는 입찰 가격을 주당 90달러대 초반에서 100달러선까지 올릴 수도 있었다.
포스트먼의 고민
시어도어 포스트먼의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가 냉혹한 사실을 전했다. 한 주에 85달러면 포스트먼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RJR 나비스코에 입찰할 수 있었다. 자금은 포스트먼 리틀의 방식대로 정크 본드 없이 현금으로만 조달할 수 있었다. 90달러여도 수익율은 줄겠지만 가능했다. 하지만 인수 가격이 한 주에 90달러보다 높다면 투자자들에게 기껏해야 20퍼센트의 수익밖에 주지 못할 터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가격에도 수익률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골드만 삭스가 정크 본드로 마련한 자금을 브리지론으로 받는다면 가능했다. 하지만 포스트먼은 그러기가 싫었다. 골드만 삭스가 채권을 제대로 팔지 못하면 부채에 대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이고, 포스트먼 리틀은 그 부채를 모두 떠안아야 했다.
끊임없이 논의를 하고 또 했지만 언제나 그 자리였다. 한번은 보이시가 항복했다는 동작으로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도대체 회장님은 수도승입니까? 정크 본드에 대해 혹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보이시의 도발적인 질문에 포스트먼은 자기 생각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제프, 이건 원칙의 문젭니다. 내가 비록 싸움꾼이긴 해도 이건 할 수가 없어요.”
그는 자기가 쓴 기사가 실린 《월스트리트저널》을 보이시에게 흔들며 말했다.
“나는 이걸 정말 믿는 사람입니다. 이 일은 여기서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군.”
그는 이 소식을 보이시와 컨소시엄에 참가한 다른 파트너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렸을 당시의 격한 감정이 가라앉은 뒤에, 포스트먼 리틀이 이 거래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장황한 보도 자료를 작성했다. 그는 이것을 다음 날 아침에 발표할 작정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피터 앳킨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발표할 보도 자료를 읽어 주었다.
앳킨스는 포스트먼이 이 보도 자료를 발표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보도 자료가 LBO 부채와 LBO 금지 법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은행권과 정크 본드 구매자들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급해진 앳킨스는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휴걸을 불러냈다. “보도를 막아야 합니다. 보도가 나가면 정말 최악입니다.”
휴걸은 직접 나서서 포스트먼과 머리를 맞대고 싸웠다.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
“우리가 따로 보도 자료를 내면 어떡할 겁니까? 당신네가 적대적이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다고.”
“그렇게는 못 할걸요?”
“두고 보면 압니다. 내일 신문에 분명히 그렇게 납니다.”
다음 날 아침, 포스트먼 리틀 앤드 컴퍼니는 한 문장의 간결한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RJR 나비스코에 입찰에서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따로 한마디 설명도 없었다.
14장
임박한 마감 시한과 절정으로 치닫는 혼란과 긴박감
월요일 아침, 스캐든 압스의 회의실에서 피터 앳킨스는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특별위원회를 이끌고 있었다. 애초에 설정했던 대로 공매 형식으로 일은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포스트먼의 포기 발표가 아직 나오기 전이었던 터라) 세 진영의 투자 집단은 마감 시한인 금요일을 코앞에 두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편지 한 통이 회의실로 전달되었고, 그 편지가 앳킨스 앞에 놓였다. 그는 ‘퍼스트 보스턴’의 로고가 찍힌 편지지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편지가 담고 있는 제안이 무모하고 게다가 또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의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모호함’과 ‘덧없음’이었다. 편지를 내려놓은 앳킨스가 좌중의 이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논의하고 처리해야 할 게 하나 더 생겼습니다.”
퍼스트 보스턴 이야기
미국 최대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합병하며 1980년대 내내 월스트리트를 자극하는 과정에서, 월스트리트의 한 회사가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많은 대규모 인수 합병을 주도했고 또 전술적인 혁신 방안들을 수없이 개발했다. ‘퍼스트 보스턴’이었다. 1934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1970년대 말까지는 이류 증권회사였지만, 브루스 와서스타인과 조지프 퍼렐라의 두뇌와 뻔뻔스러움에 크게 힘입어 주요 투자은행으로 급부상했다.
1988년, 성촉절이던 2월 2일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와서스타인과 퍼렐라는 몇 개월에 걸쳐 비밀 공작을 한 다음, 이날 퍼스트 보스턴의 최고경영자 사무실로 들어가 변호사들이 준비해 준 성명서를 읽고는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와서스타인이 직접 뽑은 핵심 역량이라 할 수 있는 스무 명이 넘는 퍼스트 보스턴의 딜메이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와서스타인 퍼렐라 앤드 컴퍼니’에 합류했다.
와서스타인이 밑에 있던 제임스 마(James maher)도 권유를 받고 사직서를 낼까 말짜 고민하는데 피터 뷰캐넌이 전화를 했다. 그러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와서스타인 대신 인수 합병을 포함한 기업 투자 부분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마는 고민했지만, 뷰캐넌은 마의 충성심에 호소하고 길 잃은 동료들을 두고 떠날 수 없지 않느냐며 책임감에 호소하는 등 마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 이후 서른여덟 살의 제임스 마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여덟 달의 기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와서스타인이 떠난 뒤, 퍼스트 보스턴의 기업 투자 및 인수 합병 부서의 공동 책임자로서 사태를 수습하는 일이 그의 책임으로 떨어졌다. 경쟁자들이 마를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의 선장에 비유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신규 사업을 개발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던 서른일곱 살의 페너브레스크는 마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었다. 로스 존슨이 한 주당 75달러 가격에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이 자기 책상 위의 모니터에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페너브레스크는 잠시 이 보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각, 게리 스웬슨이 페너브레스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스웬슨은 퍼스트 보스턴에 20년 동안 몸담아 온 베테랑이었고, 롱아일랜드 출신의 페너브레스크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중서부 지역 특유의 냉정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다들 한 다리씩 걸치는데 우리만 빠졌어요. 우리만 쏙 빠졌다고. 난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아요. 투자자들을 모아서 우리끼리 하자고. 통째로 다 사 버리는 거요. 지금 필요한 건 바로 이거요.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어.”
좋은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마에게 마침내 그다음 주에 그런 소식이 날아들었다. 필립 모리스에 대한 끈질긴 시도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여전히 크래프트를 인수하기 위한 싸움에 매여 있던 필립 모리스가 RJR 나비스코 입찰 가능성을 분석해 달라고 퍼스트 보스턴을 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컨소시엄을 구성할 주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마는 필립 모리스가 곧 크래프트와의 계약을 매듭짓고 RJR 나비스코 건은 손을 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에게는 아직 남은 카드가 있었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특히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금요일 오후에 브라이언 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핀의 두 쪽짜리 보고서가 마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마는 아직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다. 핀이 아침에 보냈던 문건이었다. 그 문건 속에 담긴 전략은 복잡하고, 불완전하고, 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모했다.
핀이 제시하는 전략은, 앞으로 두 달 뒤인 12월 31일에 보완될 세법의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핀의 계획으로 보자면, 첫 번째 단계에서는 퍼스트 보스턴이 분할불입어음으로 RJR 나비스코의 식품 사업 부문을 인수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이 어음을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꾼다. 그런데 이 발상의 최고 강점은, 어음에 대한 세금은 10년 혹은 20년 동안 연기될 수 있다는 법의 맹점을 이용함으로써 40억 달러에 가까운 세금을 일단 내지 않고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당시 이 법의 유예기간이 그해 12월 31일까지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공매 과정을 거쳐 나비스코를 팔아치움으로써 수익의 80퍼센트를 RJR의 주주들에게 주고 나머지를 챙긴다. RJR의 이사회도 수십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이 초과 소득을 무과세로 주주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 그리고 퍼스트 보스턴은 RJR의 나머지 담배 사업 부문을 기존의 LBO 방식대로 150억 달러에 인수한다.
마는 핀의 제안에 회의적이었다. RJR 나비스코 인수 합병이라는 대형 거래를 하기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분할불입어음은 그 정도의 대규모 거래에서는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핀이 제시한 초안 상태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려면 수백 가지의 의문점들을 해소해야 했다. 그 점은 핀도 인정했다.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긴 합니다.” “그렇다면, 해결해 봐요.”
핀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 따로 파트너가 필요한지 여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단독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마는 그렇게 해도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떤 존경받는 회사가 파트너로 참가할 경우, 어쩌면 퍼스트 보스턴으로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르는 합법성과 정통성이 좀 더 많이 담보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에 이 제안에 제이 프리츠커(Jay Arthur Pritzker)가 관심을 가졌다. 1881년 키예프에서 시카고로 이민 온 러시아 출신 약사의 손자인 프리츠커는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거대한 기업 제국을 건설했다. 핵심 사업 부문은 하얏트 호텔 체인과 마먼 그룹이었다. 마먼 그룹은 레미콘 사업에서부터 ‘티켓마스터’까지 무려 60개가 넘는 사업 부문으로 구성된 비밀스러운 공룡 기업이었다.
힐과 살로먼의 ‘줄줄이 소시지들’은 제이 프리츠커가 RJR 나비스코에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나선 배경에는 아이라 해리스가 있다고 감지했다. 현재 이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해리스는 프리츠커와 워낙 가까운 사이라서 힐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 ‘피를 나눈 형제’라고까지 불렀다. 프리츠커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힐은 판단했다. 특별위원회로서는 포스트먼 리틀이 빠진 상황에서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 줄 위장 입찰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해리스가 나서서 프리츠커를 끌어들였을 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입찰 마감을 나흘 앞두고 나온 마의 제안은 그야말로 모험을 건, 어쩌면 승산이 거의 없는 시도였다. 다른 제안자들에 비해 퍼스트 보스턴은 아직 은행권에는 이야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퍼스트 보스턴에도 한몫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기 부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는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실패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마감 직전 상황
이제 이틀이 남았다. 마감 기한이 다가오자 존슨의 마음속에서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의 공격이 이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점점 걱정스러웠다. 마감 기한인 금요일 며칠 전부터 존슨은 저녁마다 제임스 로빈슨 부부의 아파트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며 가격 책정 전략을 다듬었다.
11월 16일 수요일, 개정된 합의서 내용이 피터 코언의 사무실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존슨은 경영진의 몫을 2퍼센트 낮춘 6.5퍼센트로 하고 인센티브 보너스를 대폭 삭감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RJR 나비스코의 1만 5000명 직원에게 주식을 나누어 주는 것과 관련된 세부 조항도 마련되었다.
한편 금요일 아침, 크래비스가 자기 사무실에 사람들을 소집했다.
“맙소사! 우리가 도대체 이 회사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되지?” 조지 로버츠였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인수 전쟁의 마지막 결판을 내야 하는데 정작 RJR 나비스코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연차 보고서와 정부에서 작성한 문건, 그리고 이제는 믿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 컴퓨터 분석 자료들이 전부였다.
각자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은 점점 더 비관적이 되었다. 애초에 크래비스와 래더가 가장 낙관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97달러나 98달러 선의 입찰이 괜찮다고 보았다. 하지만 로버츠는 소극적이었다. 93달러가 넘어가면 불안하다고 보았다.
입찰 접수
“숫자요, 제발 빨리 좀······, 네?”
RJR 나비스오의 법률 고문 조지 베이슨이 애원하듯 말했다. 스티븐 골드스톤은 그의 말에서 조바심을 읽을 수 있었다. 벌써 2시가 지났지만 아직 시어슨 진영은 최종 제안 가격을 결정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통해서 애원하는 베이슨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빨리 가격을 결정하지 않으면 입찰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조지 베이슨은 3시가 넘어선 직후에 최종 입찰 가격을 받았다. 맨해튼 전역에 있는 여섯 개 은행들, 법률 회사들, 그리고 회계 회사들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이자율과 기타 핵심적인 여러 비율들, 지불 일정 등을 계산했다. 3시 45분에 변호사들은 은행 관련 숫자들이 모두 채워지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55번가에 있는 스캐든 압스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3인치 두께의 바인더에 빽빽하게 들어갈 입찰 서류들을 모두 제시간에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4시에 베이슨은 살로먼의 수석 법률 고문인 피터 대로, 데이비스 포크의 직원인 스물여섯 살의 리처드 트루스델과 두 명의 다른 변호사더러 함께 택시를 타고 가라고 일렀다. 시티뱅크와 뱅커스 트러스트에 각각 소속된 변호사들은 대출 관련 최종 서류들을 가지고 스캐든 압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트루스델은 접수장으로 안내되어 피터 앳킨스에게 입찰 서류 꾸러미를 건넸다. 그런데 은행 쪽 서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45분 뒤에야 도착할 터였다. 대로는 자기 시계를 보았다. 5시 1분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개 입찰에 지각을 한 것이었다.
한편 케이시 코거트가 KKR의 입찰 서류 꾸러미를 겨드랑이에 낀 채 취재진에 들키지 않고 스캐든 압스의 로비로 들어선 시각은 5시 5분 전이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서는 보안 요원의 제지를 살짝 피해 통과한 뒤 앳킨스에게 전화를 걸어 몇 분만 시간을 내 달라고 부탁했다. 앳킨스가 왔을 때, 코거트는 복도 바닥에 앉아 마지막으로 수정된 내용을 서류에 기입하고 있었다. 얼마 뒤 코거트는 앳킨스에게 입찰 서류 꾸러미를 넘겨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접수 마감 시각이 두 시간이 지난 7시, 퍼스트 보스턴은 아직도 입찰서를 내지 않았다. 마는 시카고의 제이 프리츠커에게 입찰서 초안을 팩스로 전송했었다. 프리츠커와 그의 변호사들은 여전히 세부적인 몇몇 사항들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감 시간을 넘기자 중압감이 오히려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기자들이 철수한 지 이미 오래된 시각, 퍼스트 보스턴의 투자은행가 브라이언 핀과 스콧 린제이가 스캐든 압스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9시 30분이었다. 날씨도 무척 추웠다. 두 사람은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입찰서 접수대가 있는 곳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핀은 앳킨스의 비서에게 입찰서를 건넸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남긴 뒤에 두 사람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15장
퍼스트 보스턴의 입찰 참여로 전황은 요동치고
크래비스 진영과 존슨 진영이 각각 제시한 입찰 가격을 확인한 스캐든 압스의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제 됐다는 안도감이 퍼졌다. 양측의 가격 차이는 결코 근소하지 않았다. 크래비스가 제시한 가격은 한 주당 94달러였고 총액으로 따지면 216억 2000만 달러였다. 하지만 존슨은 한 주당 100달러라는 가격으로 크래비스를 압도했다. 총액으로 따지면 230억 달러였다. 쉽게 끝날 것 같았다. 9시 정각에 앳킨스는 투자은행가들과 이사들을 보내며 일요일 아침에 만나 존슨이 승자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퍼스트 보스턴 제안서 검토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서는 나중에야 앳킨스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제안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가 보기에 마의 제안은 아직 아이디어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완성이었다. 하지만 퍼스트 보스턴은 브라이언 핀의 분할불입어음 전략을 활용한 구조 조정 작업을 전제로 할 때 한 주당 105달러에서 118달러 사이에 RJR 나비스코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의 핵심은 세금 문제였다. 이 계획을 검토하는 동안 앳킨스와 열 명이 넘는 그의 스캐든 압스 동료들은 회의실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마가 제시한 이상한 발상에 대해 논의했다. 11시쯤에 스캐든 압스의 서른여섯 살의 세금 문제 전문가 매슈 로즌이 합류했다. 변호사 미첼은 로즌에게 퍼스트 보스턴의 입찰서를 건넸다.
로즌은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서를 읽으면서 그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했다. 세금 납부 유예를 포함한 핵심 내용들이 사실은 자기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퍼스트 보스턴의 브라이언 핀도 이 방법을 동원해 최소한 네 건의 인수 합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핀이 주로 자문을 구하던 세금 관련 전문 변호사가 매슈 로즌이었다.
45분쯤 지난 뒤에 앳킨스가 로즌 앞에 나타났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이건 별나거나 엉뚱한 게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늘 생각하고 다루던 내용이니까요.” 로즌은 그 분야의 일이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제기하는 대여섯 개의 문제들이 순조롭게 해결된다면, 이 제안은 합법적으로 성사 가능할까요?”
로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밤이 깊어 가는 시각에 로즌은 일급 법정 변호사인 미첼을 포함한 스캐든 압스의 동료 변호사들에게 준엄한 반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각자 이 문제와 관련된 로즌의 결함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와 로즌이 문제가 많은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를 집요하게 찾았다. 하지만 로즌은 자기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이 실행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KKR 제안 과정의 문제 발생
금요일 저녁에 크래비스는 자기 진영이 다음 날 아침 스캐든 압스로 호출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했다. 토요일 아침 7시, 투자은행가와 변호사 모두 합해서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KKR의 사무실에 모였다. 그리고 두 시간 뒤에 크래비스는 이들을 이끌고 스캐든 압스로 갔다.
KKR 사람들은 대형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투자은행가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저드 프레어스의 로버트 러브조이와 딜런 리드의 존 멀린이었다. 회의실에서 자기를 맞은 두 사람이 2군임을 와서스타인의 조수인 맥 로소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크래비스 역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크래비스는 존슨 진영을 상대로 하는 회의가 다른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점점 초조해졌다.
그런데 스콧 스튜어트가 KKR의 설계안을 설명하는 중에 러브조이가 “잠깐만요!” 하면서 말을 막았다. 스튜어트가 읽고 있던 수치 자료가 러브조이가 가지고 있는 문건의 수치 자료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별위원회가 관련 자료를 배포한 이상 모든 수치는 일치해야 했다. “그쪽 자료는 가장 최근 자료가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말하는 러브조이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스튜어트는 특별위원회가 어떤 자료를 쓰느냐고 물었고, 두 사람은 두 자료의 수치를 놓고 비교했다. 전혀 달랐다. 두 사람 다 혼란스러웠다.
크래비스와 로버츠와 비티는 로비에 잠시 멈추어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만일 KKR 측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면, 공개 입찰 과정이 정당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더 멀리 가기 전에 모든 과정을 중단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 비티는 그랜드센트럴 역 건너편의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 짧은 편지를 구술한 뒤에 곧바로 피터 앳킨스에게 보냈다.
토요일 아침, 제임스 마는 잠자리에 일어나며 퍼스트 보스턴이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이 채택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 내내 그는 자기 아파트 안에서 서성이면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11시쯤 전화가 왔다. 피터 앳킨스였다.
“지미,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제안에 대해 물어볼 게 무척 많습니다. 몇몇 문제들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어서요.”
핀은 퍼스트 보스턴에는 매슈 로즌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핀은 로즌이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할뿐더러 자신이 제안한 내용의 기본적인 전략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핀은 로즌에게 전화를 해서 앳킨스의 편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실사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가 없어.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핀은 한 시간 넘게 이 말을 반복하며 로즌에게 그 사실을 주입시켰다.
“이봐, 우리는 서로를 잘 알잖아. 우리가 해내지도 못할 걸 내세워서 괜히 신문에 이름이나 내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거 잘 알잖아. 제발 우리가 일단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게 좀 해 줘. 그래야 돼. 실사를 해 봐야 우리 제안이 진짜 실행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 거 아니냐고.”
2차 공매 결정
휴걸이 일요일 아침 10시 15분에 특별위원회를 소집했을 때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다. 세금과 관련해서 매슈 로즌이 내놓은 의견은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또 이 제안이 약속하는 주식 인수 가격은 한 주당 최대 118달러나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마 진영이 구체적인 안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주려면 2차 공매를 실시한다고 결정해야 했다.
존슨 진영을 승리 일보 직전까지 데리고 갔던 한 주당 100달러라는 제안을 포함한 모든 제안을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비티의 성난 편지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지렛대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까딱하다간 크래비스 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2차 공매 결정을 내림으로써 스캐든 압스의 변호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휴걸은 2차 공매를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은 불확실한 의문투성이였고, 존슨이 크래비스와 손잡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자 마틴 데이비스가 날카로운 반박을 했다. 공매 과정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는 게 위원회로서는 가장 유리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입찰자들이 진땀을 빼게 만들고 경쟁을 치열하게 만들면서 이사회가 구조 조정 방안을 마련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에 마는 한 차례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앳킨스의 목소리로 보건대 퍼스트 보스턴이 일단 문 안으로 발은 집어넣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앳킨스는 이사회가 퍼스트 보스턴에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마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렇게 해서 마감 시한은 다시 11월 29일 화요일 오후 5시가 되었다.
존슨과 로빈슨은 RJR 나비스코의 경영진과 합류했다. 그들은 잭 너스바움의 법률 회사 ‘윌키 파 앤드 갤러거(Willkie Farr & Gallagher LLP)’에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살로먼의 ‘소시지들’도 화가 나서 씨근거리며 있었다. 살로먼의 투자은행가들은 아이라 해리스가 퍼스트 보스턴-프리츠커 진영을 끌어들여 자기들이 따놓은 승리의 월계관을 빼앗았다며 예전 동료이던 해리스를 성토했다.
“다들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최대 가격을 알아 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안다, 이 말입니다. 게다가
어떤 조건에서도 경영진이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존슨은 상황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우리에게는 입찰을 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너무 정직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웃음거리가 된 겁니다. 그냥 손 털어요. 그들더러 주주들에게 모두 설명하라고 두고.”
존 굿프렌드가 존슨에게 물었다.
“이사회가 정말 당신을 반대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럼요. 관계가 너무 멀어져 버렸습니다.
소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까지 내팽개치는 게 현실이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거지요. 이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솔로 빌딩에서 크래비스는 땅을 쳐야 할지 아니면 만세를 불러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자기네는 패자가 되는 게 마땅했다. 존슨과 코언의 연합군에 깨끗이 졌었다. 크래비스는 상대방이 한 주당 100달러를 제시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퍼스트 보스턴의 가격 제안이 너무나 무모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오히려 그의 분노는 빠르게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에 크래비스와 로버츠, 비티가 크래비스의 사무실에 모여 다음 행보를 논의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가장 불리한 입장이라는 데는 다들 의견이 같았다.
“하지만, 잠깐.” 로버츠가 입을 열었다. 로버츠는 자기들이 처한 어려운 상태를 놓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삼등이라는 위치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죽은 척 납작 엎드리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말을 퍼뜨리는 거야. 뭐, 그게 사실이잖아. 이 입찰에 계속 나설 생각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단 말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다음에는 그 자리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자는 거야.”
일요일 저녁에 KKR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는 제공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다음 단계에 대한 판단은 그때 가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단계를 밟는다면 말입니다.”
16장
크래비스의 연막전술과 퍼스트 보스턴의 악전고투
입찰자들이 죽었다 살아나서 새로 월요일 아침을 맞을 때 월스트리트 전역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금융 시장은 조용했다. 투자은행가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고 느렸다. 월스트리트의 거대한 인수 합병 기계는 비밀리에 멈춰 섰다. 이유는 단순했다. RJR 나비스코 공매의 최종 승리자에게 150억 달러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공하게 될(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상업 은행들이 모두 전투 준비를 하느라 RJR 이외의 다른 인수 합병은 손을 놓았던 것이다.
퍼스트 보스턴과 프리츠커
월요일 아침, 월스트리트는 정적에 싸여 있었지만 퍼스트 보스턴은 예외였다. 마의 병사들은 단순히 열광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이들은 엄청난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또 가장 규모가 큰 인수 합병을 위한 입찰 기한은 여드레밖에 남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가라앉자 마는 일 이야기로 들어가 각 팀의 책임자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할당했다.
재치 있는 말솜씨를 가진 마의 오른팔 킴 페너브레스크가 나비스코를 매각할 경우 퍼스트 보스턴이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평가하기 위해 나비스코의 자산 분석 작업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브라이언 핀은 단독으로 책임지는 팀을 맡지 않고 각 팀들을 모두 자문하는 일을 맡았다. 그레그 맬컴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맡았다. 자금 모집팀을 지휘하는 일이었다.
측근들과 회의를 마친 마는 44층의 회의실로 갔다. 여기에서 제이 프리츠커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크래비스가 입찰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차 때 제시한 94달러는 경쟁자들이 제시한 가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농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래비스가 이전투구의 추한 싸움과 이번 거래의 정치적인 측면, 그리고 세간의 이목 등을 부담스러워하는지도 모른다고 정리했다.
그러자 프리츠커의 친구인 투자자 멜빈 N. 클라인은 크래비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자기는 크래비스를 만나 손을 잡을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프리츠커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마도 동의했다. 잘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프리츠커가 원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기 이름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이후로는 ‘퍼스트 보스턴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면 좋겠다고 했다.
존슨측 상황
월요일, 존슨은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휴걸에게 불평을 했다.
“찰리, 우리가 속았어요. 누가 봐도 뻔한데 말이오.”
“로스, 나도 정말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잠정적인 수치이긴 하지만 한 주에 110달러라는 높은 가격을 제안했는데 떨어뜨릴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존슨측에서 2라운드 준비로 챙겨야 할 건 별로 없었다. 100달러도 충분히 높은 가격이었고, 더 높은 가격이 가능한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존슨은 제임스 로빈슨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처음 생각했던 수준보다 별로 높아질 방도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현금 부분을 어떻게 손봐서 입찰 가격을 조금 더 올리고 싶겠지만, 지금보다 그다지 많이 올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로버트 비티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자 첩보 활동이 시작되었다. 월요일 아침, 로버트 비티는 시어슨의 로버트 밀러드에게 전화했다. 이날 아침 비티의 목소리는 전에 한 번도 볼 수 없었을 만큼 풀이 죽어 있었다.
“축하해. 그쪽 사람들이 제일 높은 가격을 불렀더군.”
화제는 곧바로 퍼스트 보스턴의 ‘기적적인’ 제안으로 옮겨 갔다. 비티가 말했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은 완전히 협잡이야. 우리가 자세히 살펴봤는데, 도저히 불가능하더라고. 말도 안 되는 거야.” 밀러드는 KKR에서는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비티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KKR이 포기한 듯이 자기들이 시어슨측에게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에 대해 설명도 해 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날 오후, 코언은 비티가 자기에게 전화했다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비티에게 전화를 했다.
“피터, 그쪽이 이겼네요, 축하합니다. 설마 100달러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돌았죠. 그건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분석을 좀 해 봤거든요. 될 수가 없습니다. 올해 안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장담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우리도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근데 그쪽은 어떡할 작정입니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풀이 죽어서 말이죠······. 2차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으로선 모르겠습니다.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다들 휴가를 떠날 생각입니다. 조지(로버츠)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고, 헨리는 스키를 타러 가지 않을까 싶네요.”
전화를 끊은 뒤에 비티는 전화기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자기는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코언이 잘못 판단하도록 유도한 게 아니었다. 크래비스가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로버트 비티는 이 통화가 피터 코언과 오랜 기간 나누어 왔던 정중한 대화의 마지막이 될 줄은 아직 알지 못했다.
특별위원회
이사회 자문 위원들에게 퍼스트 보스턴의 입찰은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퍼스트 보스턴이 여드레라는 짧은 기간 안에 구체적인 제안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특히 염려되는 부분은 크래비스 진영의 낮은 입찰 가격이었다. 이들이 제시한 94달러에 다들 곤혹스러워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일부러 지려고 그렇게 낮은 가격을 제시했던 것일까? 게다가 2차 입찰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 이들의 일요일 발언은 불길한 전조로까지 비쳤다.
이런 사실이 특별위원회를 위해 일하는 투자은행가들의 수장 격인 필릭스 로아틴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딜런 및 스캐든과 함께 로아틴은 두 가지 행동 방안을 마련했다. 하나는 KKR 진영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KKR이 의욕을 가지도록 그들에게 자료와 조언을 듬뿍 제공해야 했다. 또 하나는 자본 재조정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존슨이 단독으로 입찰했을 때를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대출과 자산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주주들에게 일시에 대규모 금액을 지불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크래비스와 프리츠커의 회동
크래비스는 제이 프리츠커, 멜빈 클라인, 제리 세슬로와 함께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클라인은 벌써 며칠째 두 진영이 손을 잡으면 얼마나 멋지겠느냐면서 한번 만나는 자리를 갖자고 졸라 댔었다. 크래비스는 두 편이 손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 측의 움직임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만날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클라인은 이 전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프리츠커가 헨리 크래비스와 손잡는 것이라고 했다.
“퍼스트 보스턴은 어떻게 하고요?” 크래비스가 물었다. “그쪽도 반길 겁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몇 대 몇으로 생각을 합니까?” “우리는 동반자니까, 5 대 5.” 크래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만, 그쪽은 25퍼센트 이하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쪽은 우리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일을 진행하고 결정을 내리는 건 모두 우리가 알아서 하고 말입니다.”
“그건 아니죠.” 프리츠커가 나섰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우리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손잡을 여지가 없는 건 분명했다. 크래비스는 프리츠커가 자기와 손잡기를 바란다는 사실로부터 이들이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크래비스는 리처드 비티에게 전화해서 방금 있었던 프리츠커와의 회동 내용을 전하며 웃었다. “그쪽 동네는 아무것도 아니야.”
《타임》지와 인터뷰
수요일 오후, 존 마틴의 조수 빌 리스가 RJR 나비스코와 거래하는 광고 대행사의 한 미디어 바이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회사는 《타임》과 거래하는 주요 광고 대행사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바이어는 《타임》과 통화하면서, 이 잡지가 ‘월스트리트의 탐욕’이라는 제목으로 표지 기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표지에 실을 인물이 바로 로스 존슨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입찰 기한이 앞으로 일주일도 남지 않았던 터라 어떻게 하든 이 기사를 막아야 했다. 로빈슨과 마틴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존슨뿐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주요 언론사치고 존슨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 군데도 수락을 받은 곳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리스에게 존슨의 독점 인터뷰를 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타임》과 협상해 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존슨은 주피터 힐튼에서 담당 기자인 프레더릭 언지히어를 만났다. 언지히어와 마주 앉은 존슨은 평소와 다름없이 쾌활했다. 기사는 이틀 뒤인 월요일에 가판대에 깔릴 예정이어서 인터뷰가 끝난 뒤 언지히어는 원고를 쓰기 위해 서둘러 떠났고, 린다 로빈슨은 존슨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땠느냐고 물었다.
“젠장! 내가 알기로는 말입니다, 기자는 기잡니다. 이 친구들은 자기가 끄집어내고 싶은 건 뭐든 다 끄집어내니까요.”
퍼스트 보스턴의 상황
마는 휴일을 가족과 함께 보낸 뒤 금요일 아침에 퍼스트 보스턴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비스코 담당 팀에서는 일이 착착 진척되고 있었다. 사흘 전에 존 그리니스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타일리 윌슨도 퍼스트 보스턴 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마의 걱정은 여전히 깊었다. 다른 준비를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그레그 맬컴의 은행 담당 팀이 핀의 전략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자금을 계획대로 조성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맬컴이 맡은 일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많은 은행들을 접촉했지만 어떤 은행도 핀의 전략에 돈을 대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오후에 희망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레그 맬컴의 전화 목소리는 흥분해 있었다. ‘체이스 맨해튼 은행’이 제안서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나 말투로 보면 확실히 승산이 있습니다!”
마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행운을 빌었다.
제임스 마의 팀은 화요일이라는 마감 시한을 바라보면서 주말 내내 열심히 뛰었다. 이들이 모은 잡다한 투자자들 가운데는 영국의 설탕 회사 ‘S&W 베리스퍼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가 이 회사의 지분을 11퍼센트 가지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제리 세슬로에게 금융 컨설팅을 받고 있기도 했다.
세슬로는 이 영국 회사가 퍼스트 보스턴이 증권으로 필요로 하는 12억 달러 가운데 1억 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일단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에 세금 관련 변호사들이 나비스코를 인수하는 데 드는 2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증권 가운데 최소한 반은 프리츠커 그룹이나 퍼스트 보스턴의 자회사가 아닌 제3 집단에서 나와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세슬로는 곧바로 베리스퍼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페너브레스크의 프리젠테이션 후 20분 만에 베리스퍼드는 1억 2500만 달러 추자를 확약했다.
'탐욕의 게임'
월요일, 《타임》이 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결과는 린다 로빈슨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로스 존슨이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진 위쪽으로 ‘탐욕의 게임’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힌 표지였다. 그 제목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남자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인수를 통해 1억 달러를 자기 호주머니에 챙겨넣을 수도 있다. 인수 합병의 광풍이 지나친 것 아닐까?
표지 자체도 최악이었지만, 기사 본문의 내용은 더 심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건 존슨이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경영진 쪽과의 합의서 내용이 너무 후한 것 아닙니까? “내 사람들을 최대한 챙기는 일은 협상을 통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죠.” 최고경영자가 이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일종의 모노폴리 게임의 돈과 같은 거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 특히 애틀랜타의 사람들은 다들 전문직 종사자들입니다. 회계사, 변호사, 비서······. 난 이 사람들을 무료 급식소로 내모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고용 계약 해지와 관련해서 훌륭한 약정을 이미 해 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특별위원회는 입찰자들에게 직원을 보호하는 내용을 인수 합병 동의서에 포함시키길 바랐는데, 존슨 진영에서는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기 근속자들이 직원 보호를 주장하며 강력하게 로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위원회 총무인 워드 밀러는 오랜 기간 존슨의 수석 법률 책임자였다. ‘걱정의 부사장’이라 불리던 그도 이제 존슨에게 맞설 참이었다. 밀러는 이사들 각각을 상대로 여러 가지 사항들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슨 진영은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밀러는 이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크래비스와 시어슨
화요일 오전 11시, 로버츠와 크래비스는 자기 회사의 투자은행가들을 소집해서 그날 있을 입찰에 자기들이 참여할지 말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자은행가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조금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 이 잘못된 정보를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바깥으로 흘려 피터 코언의 귀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퍼스트 보스턴을 경계하지 않았다. 크래비스는 은행권과 접촉하면서 마가 자금을 제대로 조성하지 못해 애먹는다는 걸 알았다. 멜빈 클라인도 계속 자기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퍼스트 보스턴이 KKR에 빌붙어 아주 작은 지분이라도 확보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크래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버츠가 말했다.
“만일 가겠다면, 안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논의했던 것보다 현금을 훨씬 더 줄여야 합니다. 이사회에서는 현금 3, 4달러 더 받는 건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면 높은 입찰 가격을 기대할 겁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근접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그리고 로버츠는 몇 시간째 재무 구조를 정교하게 가다듬고, 현물지급증권 부분을 늘림으로써 안정성을 강화하고, 또 주주들에게 실제로 지급될 현금을 축소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화요일 오후, 피터 코언도 시어슨에서 존슨 진영 사람들을 소집했다. 다들 입찰 가격을 얼마나 해야 할지 나름대로 안을 가지고 있었다. 존슨의 심복인 베너벤토와 세이지는 한 주당 110달러를 이야기했지만, 늘 그랬듯이 두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코언과 존 굿프렌드가 낸 안들만 놓고 논의를 했다.
입찰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까지 노력한 이사회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가격을 올려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타임》에 실린 존슨의 인터뷰도 있고 한데 이사회를 더 자극해서 이사회와 등질 이유는 없었다. 결국 코언과 굿프렌드는 한 주당 101달러라는 가격을 제시하기로 합의했다.
코언이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크래비스가 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을까? 코언의 변호사이던 잭 너스바움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가 감쪽같이 속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전혀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너스바움에 따르면, 리처드 비티가 코언에게 전화를 걸어 했던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잭 너스바움이 나중에 한 말이다.
2차 입찰 접수
퍼스트 보스턴에서 페너브레스크는 오후 내내 시티뱅크 사람들과 씨름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핀의 아이디어가 실행 가능하다는 확인서였다. 페너브레스크는 분만실에 아내를 들여보낸 남편의 심정이 바로 자기의 심정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티뱅크의 책임자가 식당에서 나온 건 4시 30분이 지나서였다. 페너브레스크는 바깥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다가 그가 건네는 확인서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페너브레스크는 그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확인서가 첨부된 입찰 서류는 곧바로 스캐든 압스로 향했다. 결과에 대해 마는 이제 초연한 상태였다. 최종 입찰 내용은 애초에 자신이 하려던 것과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자금 조성 계획도 처음에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마는 용감하게 싸우고 노력했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실 이미 아흐레 전에 이미 졌다고 생각했다.
5시가 되기 몇 분 전, 조지 로버츠는 KKR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숙였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투자은행가 10여 명이 KKR가 과연 얼마에 입찰했는지 궁금하다는 듯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로버츠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러고는 크래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헨리, 우리가 얼마를 제시했지? 100에다가 6을 더 붙였던가? 106달러?”
크래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랬던 것 같지?”
투자은행가들이 ‘와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한쪽 구석에 서서 이런 열광적인 모습을 지켜보았던 리처드 비티는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사람들 눈에서 에스에 작대기 두 개를 그은 달러화 부호가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대단했죠.”
그리고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7장
승패는 갈렸지만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어슨 쪽에서도 사기는 높았다. 크래비스 진영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퍼스트 보스턴만이 문제였다. 만일 이사회가 제임스 마의 기괴한 인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퍼스트 보스턴이 이기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도 마가 약속하는 수익과 경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차 입찰 결과
9시가 되자 코언과 너스바움은 골드스톤에게 전화했다. 골드스톤은 살로먼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시내의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만일 크래비스가 참가하지 않았고 퍼스트 보스턴이 헛방망이질을 했다면 지금쯤은 연락이 와야 했다. 그런데 아무 연락도 없었다. 불안했다.
KKR 사무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도 기다리는 건 고역이었다. 그런데 9시가 조금 못 된 시각에 리처드 비티가 전화를 받았다. 피터 앳킨스였다.
“당신과 당신 쪽 사람들 몇이 이쪽으로 와 주었으면 합니다.”
비티는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간신히 참으면서 물었다.
“우리만 부르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쪽도 함께 부르는 겁니까?”
“그 질문에는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여섯 주 만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승리의 문 앞에 섰다. 이제 남은 건 두 가지 사항에 대한 협상뿐이었다. 크래비스 측의 변호사 로버트 스패트가 합병 관련 사항을 협상하기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운이 좋으면 이 두 가지 협상이 몇 시간 안에 끝날 것이라고 크래비스는 전망했다. 위원회는 다음 날 최종적으로 추천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앳킨스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자기가 없는 동안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은 제임스 마였다. 퍼스트 보스턴의 제안은 질풍노도처럼 달렸지만 가장 먼저 탈락했다. 12월 31일까지라는 짧은 기간을 포함해 이 제안이 담고 있는 거의 모든 핵심적인 문제점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자금 조성을 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을 은행권으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시티은행의 확인서란 것도 심지어 제대로 된 양식으로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9시 30분이 되자 골드스톤은 그 긴장을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알아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앳킨스가 제임스 마와 통화를 끝내고 골드스톤에게 전화를 했다. 골드스톤이 말했다.
“피터, 내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결정을 내릴 겁니까? 우리가 계속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밤에 당신들이 기다릴 이유는 없습니다. 내일 연락을 줄 겁니다.”
앳킨스의 그 말이 골드스톤의 얼굴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뿌려졌다.
골드스톤이 윌키 파에 전화해서 이런 사실을 알렸다. 윌키 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충격에 싸였다. 몇 분 뒤,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기자 하나가 너스바움에게 전화해서 KKR 측이 방금 스캐든 압스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너스바움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것도 신속하게. ‘그래, 편지다.’
많은 변호사들이 누군가를 원망할 때 그러듯, 너스바움은 자신들의 분노를 편지로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코언과 투자은행가들이 주변에서 길길이 뛰고 욕할 때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크래비스가 스캐든 압스에 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골드스톤은 곧바로 앳킨스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골드스톤은 자기네가 사기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미치광이 같은 퍼스트 보스턴의 입찰 때문에 자신들의 제안이 뒤집히고, 결국 승리를 도둑맞은 거라고 했다.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 전체 입찰 과정이 공정해지기 위해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찰해야 한다고 골드스톤은 주장했다.
“우린 아직 진 게 아닙니다! 피터, 우리는 더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시작해 놓고선 한 시간 만에 끝내 버리는 이따위 엉터리 공매가 어디 있느냐고요! 이 공매 절차에는 규칙도 없잖아요! 우리는 입찰서를 제시하면서 더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끝내 버린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요!”
윌키 파에서 스피커폰을 켠 채 골드스톤은 앳킨스에게 자기주장을 계속 밀어붙였다. 하지만 앳킨스는 공매 과정을 더 이상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네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 가격을 결정해요. 그리고 그 가격을 내놔요, 지금 당장. 그런 다음 위원회에서 부르길 기다려요. 거기까지입니다. 그게 끝입니다. 말은 필요 없습니다. 행동으로 보여 줘요. 편지 따위는 보내지 말고, 최고의 입찰 가격을 제시하란 말입니다, 지금 당장!”
“잠깐만요!” 굿프렌드가 나섰다.
“우리는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다른 쪽에서 얼마를 썼는지도 모르는데, 우리한테 불리한 상황에서 가격을 새로 제시할 순 없습니다.”
그는 한동안 크래비스 측이 105달러나 106달러를 썼다는 존슨이 파악한 정보를 믿지 않았다.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살로먼의 회장은 무려 여섯 주 동안이나 위원회가 무엇을 바라는지 간파하지 못하는 골드스톤의 무능력 때문에 속을 끓였었다. 그리고 존슨이 과연 그가 입 밖으로 낸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3시가 되자 윌키 파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굿프렌드가 코언에게 다가갔다.
“피터,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굉장한 팀플레이였습니다. 즐거웠고······ 많이 배우기도 했죠. 다음을 노려 봐요.”
코언도 화답했다. “다음번에는 우리가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네 구역 떨어진 곳에 있는 스캐든 압스의 사무실에서는 새벽까지 협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변호사들과 투자은행가들이 세부 사항들을 마지막으로 손질하는 동안 크래비스와 로버츠, 래더는 회의실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래는 이제 다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자꾸 흘러가면서 세 사람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3차 입찰 통보
그런데 자정이 막 지난 시각, 브루스 와서스타인이 도쿄에 가 있던 그의 파트너 조 퍼렐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퍼렐라는 KKR의 입찰과 관련된 좋지 않은 뉴스 속보를 본 뒤에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와서스타인이 수화기를 크래비스에게 넘겼다. 퍼렐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래비스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그리고 몇 분 뒤 팩스가 한 장 날아들었다. 팩스 내용은 다음 날 아침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릴 기사였다. 기사는 존슨의 경영진 그룹의 입찰 가격이 101달러였고 KKR 진영의 입찰 가격은 103달러 혹은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는데, 존슨 진영이 재입찰을 할 것이라고 했다.
크래비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서는 이사회 측 투자은행가들이 KKR 측 제안 중 유가 증권과 관련해 부족한 부분을 두고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도대체 뭡니까!”
로버츠가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돌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우릴 가지고 놀자는 겁니까?”
비티와 코거트는 라저드의 로버트 러브조이와 딜런의 프리츠 홉스의 안내를 받아 앳킨스를 만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앳킨스는 두 사람에게 골드스톤이 전의를 불태우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는 것과 골드스톤의 주장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는 아래층으로 가서 크래비스와 로버츠를 만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티는 앳킨스의 사무실 앞에 있을 때, 이사회 총무인 워드 밀러가 이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7시 30분 특별위원회 회의나 11시 정각의 이사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야 할 테니 알고 있으라고 전하던 통화 내용을 엿들었었다. 이번에는 래더가 나섰다.
“7시 30분? 빌어먹을, 엿 먹으라고 해요!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내자고요, 지금 당장! 자, 이 자리에서 서명하고 끝내자고요.”
하지만 앳킨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다들 자고 있습니다.”
시어슨이 반격할지 모른다는 위험은 실제 상황이라고 크래비스 진영은 판단했다. 코언이 입찰 가격을 새로 제시하는 걸 막을 길은 없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최종 판단의 시한을 정함으로써 이사회로 하여금 될 수 있으면 빠르게 결정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시각을 다음 날 아침 이사회 회의가 시작된 지 두 시간 뒤인 오후 1시로 정했다.
그 다음날 아침 코언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뼈와 근육은 RJR 나비스코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우성치며 전의에 불탔다. 코언은 앤드리아 패러스에게 전화했다. 패러스는 코언이 지시했던 것들, 즉 유가 증권 부분을 늘리고 현금을 줄임으로써 실제로 지불해야 할 금액을 실질적으로 올리지 않고도 입찰 가격을 상당한 수준으로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코언은 살로먼의 토머스 스트라우스와 협의한 뒤에 살로먼 역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그는 너스바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우리가 새로 입찰 가격을 제시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18장
112달러 대 109달러, 끝장 승부의 최종 결과는?
피터 앳킨스가 발언을 시작했다.
“오늘 이사회는 과거의 그 어떤 날보다도 명쾌하고 사려 깊은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11월 30일 수요일 아침, 7시 45분이었다. 이사들이 스캐든 압스로 모여들자 앳킨스는 이들을 35층 회의실로 인도했다. 앳킨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주주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두고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입찰에 참가한 측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 앳킨스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사들에게 보고했다. 잭 너스바움이 보낸 편지를 낭독하고, 골드스톤이 미친 듯 고함을 지르며 했던 주장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퍼스트 보스턴 측 제안은 일찌감치 떨어뜨렸다는 것도 설명했다. KKR 측의 유가 증권 관련 협상과 함께 〈다우존스뉴스서비스〉에서 비롯된 KKR 측의 강력한 항의와 불만도 설명했다.
“아울러 KKR 측은 우리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오후 1시까지 최종 추천을 받지 못하면 자신들의 제안을 철회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사들과 자문 위원들은 세 시간에 걸쳐 지난 열흘 동안 있었던 일들을 검토했다. 11시가 거의 다 되어 갈 무렵에 휴걸이 동료 이사들에게 몇 가지 소식을 알렸다. 잠시 휴회한 뒤에 헨리 크래비스와 조지 로버츠를 이사회에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참, 존슨도요.”
9시경에 존슨은 자기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곧바로 코언이 전화를 했다.
“우린 지금 입찰 가격을 새로 제시하려고 합니다. 가격을 올려서 제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서 코언은 유가 증권 부분은 늘리고 현금 부분은 낮추는 방안을 설명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이면 충분합니다. 어떻습니까, 찬성합니까?”
존슨은 이미 오래전에 코언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존슨은 전혀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96달러나 94달러만 해도 충분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무튼 지금은 현금을 덜 쓰게 될 거니까 장기적으로 볼 땐 별문제가 없습니다.”
존슨은 짧은 순간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서 올리고 싶으면 올려요.”
입찰은 이제 자기 손을 떠났다. 그리고 시어슨이 주인공으로 나선 게임이었다.
11시 12분,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래더와 비티를 대동하고 이사회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이날 아침 9시 45분에 스캐든 압스에 도착했다. 인수 합병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RJR 나비스코를 사들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신문들은 존슨 진영이 완전히 손을 든 게 아니라고 보도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존슨 진영에서 새로운 입찰을 포기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이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걱정스러웠다.
KKR가 최후통첩 시한으로 정한 시각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비티는 크래비스와 로버츠를 비어 있던 방에 들여보낸 뒤 이사회의 최종 투표 결과를 기다리라고 했다. 정오가 다 되어 가던 시각에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변호사들이 마치 개미들처럼 회의장 안을 부지런하게 들락거렸다. 비티가 이들 중 한 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왜 그럽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로스와 너스바움이 왔다네요.”
비티의 입에서는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화가 났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앳킨스와 이사들은 열두 시간 넘게 두 사람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존슨이 새로운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비티는 로버츠와 크래비스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작은 방 안으로 돌아갔다. 로버츠는 펄펄 뛰었다.
“빌어먹을, 뭐 하자는 거야, 도대체! 우린 어젯밤 9시 30분에 여기 왔단 말이야, 지금이 몇 시야? 이것들이 우릴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시어슨의 코언 사무실은 벌집처럼 부산했다. 토밀슨 힐과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무실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코언은 자기 책상 옆에 서서 시가를 입에 문 채 새로운 입찰 가격을 산출해 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지켜보고 있었다. 코언은 살로먼의 아르데코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굿프렌드와 스트라우스에게 이 가격을 확인했다. 이제 존슨의 승인을 받는 일과, 만약 이 싸움에서 이길 경우 경영진과 합의한 내용을 추가로 손보겠다는 약속을 받는 일만 남았다.
10분 뒤, 코언이 다시 너스바움에게 전화를 했다. “이 가격을 넣어요.”
그러면서 현금, 증권 등과 관련된 일련의 숫자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로 제시할 입찰 가격을 불러 주었다. 너스바움은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다. “오케이!”
입찰 가격은 한 주당 108달러, 이 가운데 현금은 84달러, 우선주는 20달러, 그리고 전환무담보채권은 4달러.
총 인수 금액 250억 달러였다.
1시 20분 전,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기다리고 있던 작은 방으로 앳킨스가 들어왔다.
“우리는 새로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정한 최종 시한인 1시를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세요.”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크래비스가 앳킨스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죠. 우리 입찰 가격을 다 까발려 놓은 다음에 다른 쪽에서 또 다른 제안을 받고 우리에게 시간을 더 달라니. 단 1분도 시간을 더 줄 수 없습니다.”
12시 50분, 〈다우존스뉴스서비스〉의 자막이 흘렀다. 미국 전역의 거래소 객장에서 주식 중개인들과 투자자들이 놀란 눈으로 그 자막을 바라보았다.
“RJR의 경영진이 한 주당 108달러를 제시.”
승리가 바로 코앞이었는데, 20분을 남겨 두고 모든 게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정말 끝났다. RJR 나비스코는 자기들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들이 일등 자리에서 밀려났다. 108달러 대 106달러로 밀린 것이었다.
시어슨의 최종안
잭 너스바움은 1시 조금 지나서 앳킨스의 전화를 받았다.
한 주당 108달러를 제시하면서 너스바움은 이 가격은 얼마든지 다시 협상할 수 있다고 강조했었다. 그런데 앳킨스가 전화를 해서 최종적으로 그 내용을 매듭짓자고 나섰다.
“당신네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안을 원합니다. 가능하면 15분 안에 제시해 주길 바랍니다.”
코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숫자들을 확인한 뒤 스캐든 압스에 있는 너스바움에게 새로운 입찰 가격을 전했다. 그는 이 내용을 앳킨스에게 전했다. 로스 존슨, 시어슨 리먼, 그리고 살로먼 브라더스가 입찰 가격을 한 주당 112달러로 올린다고 전했다. 골드스톤은 따로 계산해 볼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전체 인수 금액이 257억 6000만 달러가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1시 24분에 앳킨스는 이 소식을 이사회에 전했다.
2시가 되기 직전에 앳킨스는 크래비스와 로버츠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비티가 다시 물었다. “〈다우존스뉴스서비스〉에 경영진 쪽에서 108달러를 제시했다고 나온 걸 봤습니다. 맞습니까?”
비티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앳킨스는 비티가 진실에서 많이 비켜나 있었지만 코언이 112달러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앳킨스가 대답했다.
“뭐든 확실하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 겁니다.”
크래비스는 2시 5분에 앳킨스를 불러 말했다.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앳킨스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다른 반응은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네 제안에 수정을 가할 생각이 있습니까?” “있죠.”
크래비스는 입찰 가격을 106달러에서 108달러로 올린다는 말과 함께 2달러를 어떻게 조달할지 설명했다.
이사회는 곤혹스러웠다. 세 시간 전만 하더라도 RJR 나비스코는 거의 KKR 진영의 손안에 들어갔었다. 설령 존슨이 112달러를 제시했어도 회의장의 이사들은 크래비스의 손을 들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이런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입찰 가격의 차이였다. 112달러와 108달러, 무려 4달러나 차이가 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이클 미첼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쪽에서 112달러라고 하니, 자세히 검토하고 평가를 하기 전까지는 비록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108달러의 손을 들어 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경영진 쪽의 제안을 놓고 과연 이게 정말 112달러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는 6시 10분에 속개되었다. 루이스 리날디니는 자신들의 논의 내용을 가지고 경영진 쪽과 협의했다. 경영진 측은 이사회가 바라는 사항을 대부분 수용했지만 중요한 문제 하나는 예외였다. 코언과 굿프렌드는 자기들의 유가 증권에 리셋 조항을 설정하는 것에는 한사코 반대했다.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필릭스 로아틴은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사회에 보고했다.
“리셋이 불가능한 110달러 플러스 알파와 가능한 108달러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리셋이 가능하지 않은 110달러는 진짜 110달러 가치가 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얼마를 빼야 합니다. 경영진 쪽의 제안이 유리하다고는 라저드나 딜런 어느 회사도 선뜻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KKR의 마지막 제안
이제 KKR와 협상할 시간이었다.
시어슨 측의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앳킨스는, 여섯 시간 전 너스바움에게 그랬던 것처럼 크래비스에게도 마지막으로 입찰 가격을 새로 제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앳킨스는, 원한다면 KKR에 마지막으로 새로운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이사회가 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네가 아직도 최고 수준의 가격을 아껴 두고 있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비티와 코거트도 당혹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지막 기회? 최고 수준의 가격? 그걸 우리는 이미 다섯 시간 전에 제시했는데?’
30분 뒤, 비티와 코거트가 수조가 있는 방을 나와서 앳킨스를 찾았다. KKR 측이 마지막 제안을 내놓기 전에 두 개의 조건을 달겠다고 비티는 말했다.
첫 번째 조건은 합병 합의서를 작성해 KKR 측 제안의 일부로 이사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운을 뗀 뒤, 만일 자기들이 가격을 제시할 경우 존슨은 물론이고 경영진 쪽의 어느 누구도 마지막 이사회 회의장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 이번에는 얼마로 써야 하죠?”
이번에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제안할 가격에 이 거래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어느 한순간 이들은 발을 멈추었고, 한 번 더 가격을 올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이런 결정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만장일치 같았다. 크래비스도 동의했다. 이렇게 최종 의견인 1달러 인상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30분을 마감 시한으로 제시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사회의 최종 결정
최종 입찰안을 손에 든 로아틴과 투자은행가들은 회의장에 딸린 작은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비전문가들이 보기에는 112달러를 제시한 존슨 진영이 109달러를 제시한 KKR 진영을 누르고 이길 게 뻔했다. 하지만 몇 분 뒤 로아틴이 이사회 회의장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양측이 제시한 가격은 108달러에서 109달러 사이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고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가 증권을 놓고 보면, 나의 전문적인 소견으로 판단할 때 양측이 제시한 가격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재무적인 관점에서도 양측 모두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들이 결정을 내리는 일을 돕기 위해 로아틴은 양측이 제시한 제안의 여섯 가지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사들이 줄곧 요구했듯이 KKR는 주식의 25퍼센트를 주주의 몫으로 남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시어슨은 이사회의 투자은행가들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15퍼센트밖에 남기지 않았다.
크래비스는 나비스코의 일부분만 매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시어슨은 모두 팔아 치우겠다고 했다. 시어슨은 리셋 조항을 거부함으로써 채권의 안정적인 수익성을 보장하지 않았다. 또한 부서 이동에 따른 보상금 지급 등과 같은 직원 혜택 부분을 보장하는 문제에서도 경영진 쪽의 유연성이 떨어졌다. 결국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KKR를 결정했다.
앳킨스는 한 무리의 이사회 자문 위원들을 이끌고 KKR 진영이 기다리는 방으로 갔다. 그의 손에는 합병 합의서 사본이 들려 있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앳킨스는 합의서 사본을 펼치며 승인이 필요한 세부 조항을 가리켰다.
비티가 고개를 숙여 바뀐 부분을 검토했다. RJR 나비스코 중역들을 위한 퇴직금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비티는 흔쾌히 대답했다. “예, 동의합니다.”
앳킨스는 필요한 사항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다음, 크래비스에게 합의서를 건넸다.
“여기, 당신이 서명한 합의서입니다. 이제 이 회사는 당신네 소유입니다.”
앳킨스 일행은 크래비스 측 사람들에게 이사회 결과를 알려 준 뒤 세 층 아래에 있는 시어슨 사람들에게 갔다.
“미안합니다. 이사회는 KKR와 합병 합의서를 작성하고 서명했습니다. 양측이 제시한 가격으로만 보면 무승부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이사회는 KKR 측의 손을 들었습니다.”
존슨은 ‘스카를라티’ 레스토랑 카운터에서 골드스톤의 전화를 받았다. 골드스톤의 목소리만 듣고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쾌활함은 어느 틈엔가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무척 피곤했다.
“KKR가 이겼단 말이죠.”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솔로 빌딩에서 보도록 하죠.”
존슨측의 마지막
패장이었지만 존슨은 부하들에게 인자했다. 솔로 빌딩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를 여는 것이었다. 그는 스카치 병을 손에 든 채 중역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들의 등을 두드려 위로하고 또 멋지게 싸운 걸 축하했다.
하지만 존슨처럼 모든 사람들이 패배를 선선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에드워드 호리건의 심정은 점차 비통함으로 바뀌었다. 오랜 세월 여러 회사와 직업을 전전했던 존슨과 달리 호리건은 처음부터 ‘레이놀즈맨’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속았습니다.” 호리건이 존슨에게 불평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골드스톤과 로빈슨 부부 그리고 존슨 부부만 남았다. 다섯 사람은 벽면이 유리로 된 회의실의 원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존슨이 골드스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그때 기억나요? 단둘이 앉아서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하던 때.”
골드스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골드스톤은 베란다에 앉아 플로리다의 낙조를 바라보던 그날을 떠올렸다. 존슨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하지만 난 그때 내가 당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지금도 할 수 있어요. 나로서는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고 생각해요. 주주들을 위해서는 최상의 방법이었죠. 당연히 해야 했던 옳은 일이었어요.”
에필로그
LBO의 쇠퇴와 함께 한 시대가 저물고
다음 날 아침, 로스 존슨은 애틀랜타행 비행기를 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언론에 배포하는 보도 자료를 구술하며, ‘최상의 입찰안’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을 특히 강조해서 넣었다. 린다 로빈슨이 이 보도 자료 초안을 피터 코언에게 보냈다. 코언은 벌컥 화를 냈다. 그러고는 스티븐 골드스톤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게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 우리를 죽일 셈입니까?”
코언과 힐, 시어슨의 다른 딜메이커들은 그 뒤로도 며칠 동안 크래비스를 거꾸러뜨릴 방법을 찾았다.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모색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닷새 뒤 크래비스는 승자의 월계관을 썼고, 시어슨 리먼 허턴은 성명서를 통해 RJR 나비스코 인수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비록 떨어졌지만 RJR 나비스코 인수 전쟁 경험은 마의 부서에 좋은 약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퍼스트 보스턴은 끝났다고 말했지만, 1989년 상반기에는 월스트리트의 다른 어떤 은행보다 많은 인수 합병 거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퍼스트 보스턴은 주로 프리츠커와 손잡고 일했으며, 특히 1989년에 퍼스트 보스턴과 프리츠커가 손잡고 ‘아메리칸 메디컬 인터내셔널’을 16억 달러에 인수한 일은 압권이었다. 1990년 9월에 마는 퍼스트 보스턴의 부회장이 되었다.
1989년 2월 9일 오전 8시, 크래비스는 엄청난 돈이 쏟아져 나오는 수문(水門)을 열었다. 이날 아침 드렉설 버넘 램버트는 50억 달러의 수표를 건넸다. KKR에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던 브리지론이었다. KKR는 20억 달러를 자기네 은행 계좌에서 RJR 나비스코로 이체시켰다.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 컴퍼니’는 전 세계의 은행권에서 119억 달러를 조성한 뒤, 이 돈을 KKR를 위한 에스크로 계정에 넣었다.
존슨은 이날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그리고 5300만 달러로 평가되는 ‘황금 낙하산’도 받았다. 존슨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가 지난 10월에 시작했던 과정은 회사의 주주들에게 이익을 안겨 주었으며 또한 우리의 다양한 사업 부문들이 가지고 있는 금융적인 힘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RJR의 주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윈스턴살렘은 엄청난 돈이 흘러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호리건은 KKR의 요청으로 담배 산업 분야를 맡았다가 이인자 노릇은 그만하고 최고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2월에 회사를 떠났다. 물론 비서가 딸린 호화로운 사무실과 그가 살고 있는 팜비치 외곽의 집을 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4570만 달러어치의 '황금 낙하산'도 받았다.
폴 스틱트는 RJR의 회장으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스틱트는 물론 과도기의 허울뿐인 최고경영자였다. 크래비스는 스틱트 주변에 KKR의 유한 책임 파트너들을 포진시켰으며, RJR 중역들에게 스틱트가 해악을 끼치지 않게 통제하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최고경영자 자리를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3월 9일 화요일 저녁, 제임스 로빈슨은 아파트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오랜 세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그의 이인자로 있던 루이스 거스트너였다. 이날 거스트너는 RJR 나비스코의 차기 회장이 될 거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날 아침 로빈슨이 리무진을 타고 출근하던 길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크래비스였다. 크래비스는 거스트너를 빼 가게 되어 미안하다면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곤란하게 만들 의도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한편 RJR의 최고경영자가 된 거스트너는 신속하게 존슨의 제국을 허무는 일에 착수했다. 거스트너는 리처드 비티를 법률 고문으로 두고 제트기 여덟 대 가운데 일곱 대를 매각했으며, 열 채가 넘는 회사 소유의 아파트와 저택을 매각했다. 존슨이 자랑하던 격납고는 팔 수가 없었다. 구매자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킨지 앤드 컴퍼니’의 컨설턴트들이 애틀랜타의 본사로 떼 지어 몰려가서 모든 것을 대상으로 자산 평가 작업을 실시했고, 이 가운데 많은 것들을 매각했다. 직원들은 마치 점령군의 군화에 짓밟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4월에 크래비스는 본사를 뉴욕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는데, 관리자급 직원 가운데 겨우 10퍼센트만 뉴욕으로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1990년에는 RJR 나비스코가 최초로 심각한 도전을 맞는 상황이 빚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이 도전은 월스트리트에서 비롯되었다. 존슨 진영을 상대로 한 입찰 전쟁 막바지의 필사적인 싸움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기능했던 ‘리셋’ 조항 때문에, 1991년 4월까지 40억 달러가 넘는 채권을 이자율을 인상해 원래의 액면가대로 되돌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채권들은 대폭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었고, ‘리셋’을 온전히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수십억 달러가 될 수도 있었다. 회사를 파산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로버츠는 ‘문 앞의 야만인들’이 까딱하다간 ‘쫓겨 도망치는 훈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비유법을 구사했다.
하지만 KKR는 이름에 걸맞게 그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1990년 6월, 69억 달러의 자금을 마련해 채권을 환매하고 부담이 적은 채권으로 대체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자 KKR 입장에서는 RJR 인수가 엄청난 이익을 안겨 준 것도 아니며 또한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준 것도 아님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1990년이 되었을 때 월스트리트의 파티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대규모 인수 합병이나 LBO의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퇴색했다. RJR 나비스코 이후 LBO 활동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1989년 가을까지 KKR나 포스트먼 리틀은 단 한 건의 대규모 인수 합병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를 얼어붙게 만든 건 채권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1989년 1월부터 8월까지 여덟 달 동안 발생한 정크 본드 채무 불이행 및 지불 유예의 규모는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드렉설 버넘을 압박하자, 밀컨 사건으로 6억 5000만 달러의 벌금 때문에 비틀거리던 정크 본드 시대의 총아이던 이 회사는 법정 관리를 신청하며 청산 절차를 밟는다고 발표했다. 드렉설이 몰락하고 금융계의 거물이던 아이번 보스키와 마이클 밀컨이 내부자 거래로 유죄가 인정되자 월스트리트와 1980년대의 광적인 탐욕을 바라보는 여론은 싸늘하게 변했다. 이런 역풍은 금융 기반의 악화와 맞물려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은 과거 월스트리트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도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역설은 1990년에 일어났다. 헨리 크래비스가 RJR 나비스코를 근근이 꾸려 나갈 때, 포스트먼은 다시 LBO 작업을 왕성하게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수 합병 사례가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 LBO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했다. 정크 본드의 열풍이 사라지고 난 뒤에 포스트먼의 ‘진짜 돈’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 여러 해 만에 시어도어 포스트먼은 월스트리트라는 동네에서 각광받는 최고 멋쟁이가 되었다.
RJR 나비스코가 당시에 그런 계기를 제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전쟁 이전 마지막 10년 동안 이 회사는 거대한 기업이라기보다는 꿈을 생산하는 거대한 기계였다. 담배 사업 부문이 엄청나게 벌어들이던 돈 때문에 사람들은 미쳐 날뛸 수 있었고 모든 환상을 실제 현실로 바꿀 수 있었다. 폴 스틱트는 왕들과 함께 걸었고, 에드워드 호리건은 왕처럼 살 수 있었고, 또 이사들은 왕처럼 대우를 받았다.
경매대에 오른 이 회사는 하나의 거대한 프리즘이었다. 이 프리즘을 통해 월스트리트에 발을 디디고 있던 무리들은 자신들의 영광이 투영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마는 퍼스트 보스턴의 위대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어도어 포스트먼은 마지막 성전을 치를 수 있었다. 피터 코언은 행정가라는 꼬리표를 떼고 머천트 뱅킹의 왕자가 될 수 있었다. 헨리 크래비스는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후기
20년 후 야만인들과 그들이 만든 세상
RJR 나비스코의 LBO 거래가 이루어진 뒤로 이 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쓰라린 고통만 당했다.
- 스티븐 골드스톤, RJR 나비스코 최고경영자(1995~2000년)
존슨은 1995년에 플로리다로 이사했다. 그가 새로 지은 집은 20년 전 스티븐 골드스톤이 찾아와서 LBO를 말렸던 주피터 콘도에서 2,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존슨은 은퇴 생활에 잘 적응했다. 퇴직 수당 5300만 달러로 애틀랜타에서 ‘JRM 파트너스’라는 소규모 투자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주요 투자 수단으로 남아 있는 이 회사는 아들 닐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존슨은 ‘유쾌한 친구들’을 새로 만들었다. 몇몇은 이 모임에 새로 들어왔다. 예를 들면 전직 코카콜라 회장이었으며 영업의 귀재이던 돈 커 같은 사람이 그랬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 가운데 대부분은 기존 구성원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일명 ‘엘 수프리모’로 불리던 로버트 카보넬은 JRM이 지배권을 행사하던 몬트리올의 공기청정기 회사 ‘바이오네어’의 사장으로 존슨이 채용했다.
그런데 존슨은 RJR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몇몇 동료들과는 오랫동안 소원했다. 에드워드 호리건의 근황을 묻자 아는 게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 어디선가 세상을 원망하고 있겠죠.”
실제로 호리건은 작은 담배 회사인 ‘리게트 그룹’의 최고경영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
헨리 크래비스는 예전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솔로 빌딩 42층에 있는 KKR 사무실에서 크래비스를 만났다. 회사 복도는 크래비스의 세 번째 아내인 프랑스계 캐나다인 경제학자 마리‐조세가 직접 고른 현대 미술품과 짙은 색깔의 목재로 장식되어 있다. 헨리 크래비스와 캐럴라인 롬은 1994년에 이혼했다.
KKR라는 회사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거래가 끝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이 회사는 여전히 월스트리트의 거인으로 남아 있다. 2007년에는 텍사스에 있는 전력 공급 회사인 ‘TXU’를 다른 회사들과 함께 450억 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역대 최대 규모의 인수 합병 기록을 세웠다.
내부에서 계속 공격을 받았던 그리니스는 1997년에 물러났고, ‘크래프트’에 있던 킬츠가 그리니스의 뒤를 이었다. 그리니스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대장염 때문에 활력을 잃었고, 무엇보다 출장을 다니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사임이 순전히 자발적이었다고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또 일어났다. 한때 존슨의 변호사였던 스티븐 골드스톤이 1995년에 RJR 나비스코의 새로운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골드스톤은 나비스코나 그리니스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복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가 바로 로스 존슨이었다.
“로스는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 즉 한 주당 92달러로 해서 매각할 경우 결코 이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말이 맞았습니다.”
1995년에 KKR는 백기를 들고 RJR 나비스코 주식을 회사가 지배하던 다른 회사인 ‘보든’의 주식과 맞바꾸었다. KKR가 얻은 수익은 지극히 적었다. 크래비스와 로버츠는 RJR 나비스코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기꺼이 무대를 떠났다. 그 문제들을 누구에게 남겼을까? 남기긴 했지만 그 문제들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던 스티븐 골드스톤이 침몰하는 배를 구조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담배소송 과정에서의 우여곡절 끝에, 1999년 3월 9일, 골드스톤은 마지막 단계로 RJR의 해외 담배 사업부를 80억 달러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헨리 크래비스와 조지 로버츠가 막대한 빚을 끌어다가 성사시킨 인수 합병이 마무리된 지 꼬박 11년이 지난 후, 골드스톤이 그 빚을 모두 없애 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RJR 나비스코는 RJR와 나비스코라는 두 개의 독립된 회사로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골드스톤의 일은 끝났다.
골드스톤은 고인이 된 RJR의 전 회장 보먼 그레이가 예전에 사유지로 가지고 있던 땅에 위치한 ‘그레이린 컨퍼런스 센터’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레이놀즈가 독립했음을 선언했다. 이날 밤 행사의 절정은 골드스톤이 R. J. 레이놀즈의 유화 초상화를 가지고 와서 최고경영자인 앤드루 신들러에게 전해 주는 장면이었다. 그 초상화는 그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뉴욕 본사에 걸려 있었다. 드디어 ‘미스터 알제이RJ’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신들러는 이렇게 외쳤다.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20년 전, RJR 나비스코를 놓고 벌어진 싸움에 참가했던 월스트리트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월스트리트에 남아 있다. 무대에서 사라진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드렉설 버넘의 ‘미친개’ 제프 벡도 끼어 있다. 그는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다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뒤 1995년 1월에 사망했다. 제이 프리츠커는 1999년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일흔여섯 살이었다. 짧은 기간 크래비스에게 도움을 주었던 RJR 레이놀즈의 전 최고경영자 폴 스틱트는 2007년 3월, 여든아홉 살에 사망했다.
피터 코언은 1990년에 시어슨에서 쫓겨났다. 현재 그는 소규모 자산 운용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제임스 로빈슨은 제약 회사 ‘브리스톨 마이어스’의 비상임 회장으로 있으며, 자기 개인 돈을 투자하고 있다. 린다는 여전히 자기 소유의 홍보 회사 회장으로 남아 있다.
제임스 마, 브라이언 핀, 에릭 글리처, 토밀슨 힐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분 거래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피터 앳킨스나 잭 너스바움 같은 변호사들은 여전히 대형 인수 합병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이 다룬 내용은 단지 RJR 나비스코라는 한 회사가 몰락하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장차 미국 기업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되는 ‘나도 한몫 챙겨야지’ 풍조가 바야흐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한때 착실하던 회계 법인들의 회계사들조차 스스로를 회계 감사인이 아니라 도박판의 딜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죽어 가던 회계 법인 ‘아서 앤더슨’의 회장 폴 볼커는, 자기 회사 직원들이 ‘엔론’의 공범이 되었던 이유는 그런 회사들과 그 직원들이 누리는 엄청난 부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변했다. KKR와 같은 LBO 전문 회사도 이제는 스스로를 ‘사모펀드 회사’라고 부른다. 2007년에 헨리 크래비스는 사모펀드의 황금기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블랙스톤 그룹의 최고경영자 스티븐 슈워츠먼이 월스트리트를 휘젓는 무절제한 정복자의 상징적인 자리를 크래비스에게서 빼앗았다. 그해 6월에 블랙스톤 그룹을 주식 시장에 상장해 개인적으로 6억 8400만 달러를 챙겼다.
슈워츠먼의 행보가 대세였다. 2주 뒤에 KKR도 주식을 공개하겠다는 신청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직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동성 흐름이 막히기 시작하자, 이들은 우선 2003년부터 새롭게 등장한, LBO에 들어가던 부채담보부증권 발행을 중단했다. 이렇게 해서 사모펀드의 황금기는 끝이 났다. 2007년 하반기의 LBO 거래는 상반기에 비해 63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KKR의 주식 공개는 보류되었다.
KKR가 LBO 거래에 집착하는 동안 블랙스톤 그룹은 부동산이나 헤지펀드 분야로 확장함으로써 KKR를 훌쩍 추월해 사모펀드계의 제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KKR도 이제는 공개된 주식이라는 자신의 통화를 가지게 되었다. 이 무기를 가지고 자산 관리나 인프라 투자 등 새로운 분야로 다각화를 해야 했다.
과연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RJR 나비스코의 거래를 통해 무언가 소중한 교훈을 얻기나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콜린 블레이던은 힘주어 말한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장으로 떼 지어 달려갈 때, 금융 시장은 늘 과열됩니다. RJR 나비스코와 비슷한 거품들은 여기저기 숱하게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야만인들은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자기들이 입은 상처를 닦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때가 오기를, 한 번 더 문을 박차고 들어갈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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