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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여행자 Jan 14. 2019

키 166, 나는 꼬맹이여행자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

스무살 적의 일이다. 무더운 땅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마침내 여름 휴가 기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바쁜 날들을 보내다가 달콤한 휴식 기간이 다가오면 일상적인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바다를 보고 오면 지쳐가는 직장 생활에 기분 전환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 혼자 해외여행을 가보는 거야!’


먼 곳은 무리고 동남아시아가 좋을 것 같았다. 아직 신입인지라 휴가일수가 많이 없어 주말을 합쳐도 가능한 기간은 4박5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후보지로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이 떠올랐다. 그 중 왠지 모르게 필리핀이 끌렸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말을 익히 들어서일까. 



처음으로 항공권과 적당한 가격의 호텔을 예약했다. 필리핀의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그 이후였다. ‘여자 혼자 필리핀 여행’을 검색해보니 총기사고 발생이 빈번한 곳이라 위험하다는 글만 가득했다. 무서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패기가 조금 더 앞섰던 것 같다. 만약 여행을 떠나서 죽을 운명이라면 출근을 하다가도 재수가 좋지 않아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엄마가 걱정할까봐 친구랑 간다는 선의 
의 거짓말까지 해놓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라탔다.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조차 몰라서 허둥지둥거렸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호텔에 도착해있었다. 


낯선 언어, 건물, 음식.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여행에 빠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 곳에서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얼마나 좋은 회사를 다니는지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단지 혼자 여행을 온 스무살짜리 꼬맹이를 신기해하며 한국에서 온 ‘꼬맹이여행자’라고 불렀다. 건망고를 좋아하고 산미구엘 맥주를 들이키며 시원한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서.


여태껏 많은 사람들은 나를 겉으로 보이는 위치로만 판단했다. 회사 안에서는 고졸이라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회사 밖에서는 좋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라며 동경의 눈길을 받았다. 내가 어떤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만 가치가 판단된다는 것이 서글펐다. 오히려 낯선 나라에 오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달까.


‘시간이 더 흐르고 진짜 어른이 되어도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싶었던 스무살 꼬맹이를 잊지 말아야지.’



필리핀에서 돌아온 뒤 여행에서 느낀 감정들을 기록하기 위한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다. 블로그명을 지으라는 말에 멋진 말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꼬맹이여행자, 세상에 흔적을 남기다’라는 글을 입력했다. 이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꼬맹이라고 하기에는 꽤 큰 키의 소유자는 ‘꼬맹이여행자’라는 별명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신년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다이어리에 버킷리스트로 세계일주를 적으면서.




* 2019년 1월 17일, 퇴사 후 428일간의 세계일주 이야기를 담은 꼬맹이여행자의 여행 에세이 <삶의 쉼표가 필요할 때>가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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