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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Nov 15. 2018

어느 가을의 생일

그 날들의 기억에 대한 짧은 회상

생일이다.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다보니(+깊은 꿀잠을 자다보니) 어느새 오후다. 수많은 날 중에서도 나를 온전히 마주보고, 충만히 채워가는 날이다. 약속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는 지금, 기억에 남는 생일날들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2002.11.15. 9살 생일.


그 날 쌍둥이인 나와 언니는 부모님께 구두를 선물받았다. 몇 달 간 정말 짧게 살았던 집에서, 이사 며칠만에 맞은 생일이었다. 불이 꺼진 방, 초가 타올랐고, 나는 붉은 구두를, 언니는 검은 구두를 선물받았다. 아홉 살의 나는 새신발을 신고 더욱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엄마 아빠는 짧은 편지를 주셨다. 애정과, 사랑과, 당부가 쓰인 편지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내가 다 큰 이성적 어른인 줄로 착각하던 어린아이였던 나는, 내가 충분히 주체적이고 충분히 성숙한 줄 알았다. 그런데 부모님의 편지에는 좀 더 주체적이고 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주체적인데'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쌍둥이 언니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가 없으면 불안에 떠는 꼬마였던 것 같다. 그걸 보고 부모님은 걱정이 되셨을테다. 물론 지금이야 어엿한 독립적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2007.11.15. 14살 생일.


중학교 입학 후 새 친구들을 만났고, 많은 선물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였던 DIY 필통을 비롯갖가지 물건과 편지들이었다. 그러나 새 친구들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잘 지내는 내 모습에 위기를 느낀 옛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선물들을 모두 훔쳤고, 나는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그 친구를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어 곤란했다.


결국 그 친구에게서 선물을 돌려받고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다시 떠올려도 곤란한 기억이기는 하다. 선물이 없어졌다는 사실보다, 가깝던 친구가 그런 짓을 하고 그 친구에게 모진 의심을 하기 힘듦이 더 곤란했다.


2010.11.15. 17살 생일.


저녁, 야간자율학습 전 친구들이 케이크와 함께 축하를 해주었다. 날뛰는 야생마 같은 시기였기에 케이크 크림을 얼굴과 옷에 마구 묻히고 난리도 아니었다. 문제는 크림치즈 케이크였는데, 크림치즈의 향이 너무 강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고 수 일 간 크림치즈 냄새에 질려, 비슷한 향만 맡아도 속이 니글거렸다. 마치 향수를 과하게 뿌린 사람 옆에 오래 있으면 그 향을 다시 맡기만 해도 니글거리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그나마 나는 며칠이었지, 언니는 몇 달 간 고통(?)을 겪었다.

 

2013.11.15. 20살 생일.


대학 입학 후 첫 생일이었다. 그리고 학과에서 1학년들이 진행하는 일일호프 날이었다. 과 인원이 많지 않고 워낙에 학과 행사가 활성화되어 있던 터라, 동기 전원이 참여해서 주점을 만들어가는 날이었다. 행사 자체에 관련해서는 중간에 여러가지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생일로서는 즐거운 날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주점에 와서 값진 축하를 해주었고, 동기 전체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았다. 그 순간이 참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4.11.15. 21살 생일.


동기들과 함께 남이섬으로 당일 여행을 갔다. 겨울이 오기 직전의 추운 가을은 남이섬의 풍경과 정말 잘 맞아 떨어졌다. 그때의 차가운 공기, 낙엽소리, 즐거운 웃음 모두가 좋았다. 엄마가 주신 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낙엽들 위를 밟고, 커다란 나무 사이에 서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8.11.15. 25살 생일.


축하를 받으며 나에게 이런 인간관계가 있음에 감사했다. 자주 만나진 못하더라도 꾸준히 연락을 해주는 친구들, 항상 서로의 안식처가 되는 친구들, 늘 보고싶은 가족들. 교생 실습에서 만난 학생들. 무의식이 나를 허허벌판으로 내몰아 외롭다가도, 의식이 이런 관계와 기억들을 떠올려주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안심이 된다.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행복하라고 했다. 친구의 부탁도 받았으니 행복해야겠다. 잠시 후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매년 반복될 오늘에 앞으로는 어떤 에피소드들이 생길까. 거창하고 크진 않더라도, 어느 날 떠올렸을 때 미소 지을 수 있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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