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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Y Aug 27. 2019

41주. 유도분만에서 결국 제왕절개.

둘에서 셋이 된 이야기 - 미국출산후기

2019년 1월 29일 아침 6시 6분, 나의 아들인 포도가 태어났다. (i.e.포도는 시어머니가 꾼 태몽에서 지은 태명이다.)


인생의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맞아들어 갈때의 희열로 사는 사람인 나는, 

이번 일로 세상에 사람이 계획하고 지휘할 수 있는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 5년차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점점 예뻐지는 달에, 포도가 찾아왔다. 

잠깐의 기쁨과 환희는 또 모든 것을 계획하는 나의 단점으로 변질이 되었다. 


나는 정말로 순산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했다. 

임신 막달까지 만삼천보씩 걸어다니고 37주까지 회사에 출근을 했다. 

요가, 줌바, 걷기.. 매일은 아니었지만 운동을 하면서 몸에 무리가 된적이 없었고 

임신기간동안 약 18키로 정도 몸무게가 늘기는 했지만 순산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친구들에게 난산 스토리란 없었다. 

우리 엄마도 아이 셋을 순풍 낳았고 내 동생도 조카를 3시간 만에 낳았어서 병원의 담당 산부인과 주치의와 midwife 간호사 아주머니는 

너는 good gene을 가졌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었다.  


임신 40주가 넘어가자 엄청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몸은 너무나 무겁고, 배는 수박, 아니 늙은 호박이 들어간 것처럼 나와있고 

숨을 쉬기도 잠을 자기도 힘들어지는데 왜 이 아이는 소식이 없는건지 -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여서 조금 더 기다릴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림이 쉽지 만은 않았다. 

초음파도 자주 봐주지 않는 미국 병원의 시스템에, 42주 까지도 괜찮다는 느긋한 병원을 믿을수가 없어서 

주치의를 졸라서 임신 41주 2일째에 유도분만 스케쥴을 잡고  

그 전날까지 자연스럽게 아기가 나와주기를 바라면서 짐볼타기, 걷기, 바닦닦기 등등.. 모든 운동을 해봤지만

가진통만 있고 어떤 소식도 없었다. 


유도분만 당일 밤 7시,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전화해서 스케쥴을 컨펌하고 8시에 병원데 도착했다. 

나는 C section이 끝난 환자들이 기다리는 대기실에 누워서 cytotec 이라는 유도제를 넣고 한시간 모니터를 시작하고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촉진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9시에서 1시간이 지나고 10시가 되어도 자궁문이 1cm밖에 안열렸다며 차라리 집에가서 편히 잠을 자라고 했다.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집으로 가서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항상 가는 브런치집에서 와플을 먹고 오자며 잠을 청했다. 


새벽 12시 40분, 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생리통같이 싸한 아픔이 찾아왔고 주기를 계산해 보니 약 6분정도 되었다. 

화장실을 가보니 35주부터 그렇게 기다리던 '이슬' 이라는 피비침이 있었다. 

오피스로 전화하고 화장실가니 양수가 줄줄 새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으로 드디어 모든것이 순조롭게 잘 풀린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깨워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가서 단독 분만실을 드디어 배정받고, 새벽 세시 반경부터 긴장된 마음으로 남편과 끝도 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오전 부터 촉진이 오면서 자궁문이 3cm 정도 열려서 본격 진통 주기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분만 후기에서 본 진통의 느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생리통 아픔의 열배의 느낌, 배 위로 트럭이 지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 모두 실감이 났는데 그 와중에 참을 만 했던건 

약 4-5분의 진통 휴식기간. 그 동안은 걸어보고 짐볼도 타보면서 서너시간을 견딜수 있었다. 

우리의 담당 간호사 Lynden은 너가 원하면 언제든 진통제를 넣어줄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진통제를 맞으면 촉진이 느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참아볼 수 있을 때까지는 참아보겠다고 했다. 


드디어 낮 1시경에는 참을수 없는 수준의 진통이 왔다. 

1시 20분경에 Epidural을 맞겠다고 요청하자마자 다행히 마취과 의사 (Last name이 Ahn이어서 한국사람인 줄 알았음. 이분을 그 다음날 새벽 5시에 수술실에 또 만날줄은 몰랐음) 가 찾아와 바로 시술을 했는데, 

정말 역시 수많은 출산 후기에서 보았듯이, 척추에 굵은 바늘이 들어가는 주사인데도 진통이 너무 세서 허리는 전혀 아픈 느낌이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남들이 얘기하던 '무통천국'이 찾아왔고 끝도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 

진통과 추가 무통주사에 계속 의지하면서 지나가는 지루함과 고통의 시간.. 

무통주사를 맞는 순간 부터는, 고통과 자유를 맞바꿔야 한다. 

고통이 없는 대신 나는 시체와 다름 없는 사람이 된다. 걸을수도 없고 약간의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수 없다. 화장실도 스스로 갈수가 없다. 

침대에 소변줄을 꽂고 누워서 자궁문이 다 열려서 아기가 나오기 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후 7시 6cm

오후 10시 9cm

새벽 1시 10cm

  

새벽 1시, 진통과의 외로운 싸움 

그 때의 나는 빨리 아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왜, 무얼 위해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있는지에 대해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진 따위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그냥 빨리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시원한 물 한잔 먹고 싶었다. (바닥에 물과 애플쥬스를 토한것은 정말... )


담당의사와 간호사가 세번째 바뀌고 마지막 간호사인 Megan은 텍사스 출신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멋진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체크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문이 다 열렸는데도 아기가 빨리 내려오지 않는다며 레바논에서 온 Dr.Morin은 한시간만 더 아기에게 시간을 주자고 했다. 

드디어 새벽 2시반이 되자 Megan이 들어왔고 push를 시작하자고 했다. (여기서 push란 진통/수축 그래프에 맞추어서 힘주어서 아기를 내보내는 것)

약 두시간 정도 push 하면서 Megan과 남편과 셋이 짧은 진통 휴식 시간에는 잡담을, 수축이 오면 힘을 주면서 다리를 잡고 아기를 내보내려고 호흡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긴급한 순간에 계속 얘기하면서 push한 것이 재미있음)

Megan은 첫 push때 지금 뭐하는 거냐며, 변비 있을때 힘주는 것처럼 그 부분 알지? 

거기에다가 힘을 주란 말야! 하며 다그치듯 재미있게 얘기했는데 그 와중에 남편과 둘이 웃었던 것 같다.

두시간이 넘게 push를 했는데 아기는 내려오지 않았고 심지어 수축 때는 아기의 심장박동이 떨어져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다녀갔고 모두 표정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새벽 4시반이 되자 다른 옵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Megan은 그 와중에도 너무 잘하고 있다며 끝나기 전까지는 끝이 아니니 계속 push 하자고 

아기를 건강하게 만나야 겠다는 의지보다 그때까지는 나의 노력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무엇보다 내가 그려왔던 아름다운 출산에 대한 이미지와 그 안의 나.. 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옵션은 c-section, 제왕절개 였다. 

펑펑 울다가 남편이 나와 아기 둘다 건강하게 만나는게 먼저 아니냐며 설득했고 결국은 끝까지 울면서 알겠다고 했다. 

Attending인 Dr.Morin이 와서 정말 잘 견뎠다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고 Megan은 수술실에 끝까지 같이 있겠다며 

그 정신 없는 와중에 필요한 일들을 정말 빠르게 진행했다. 

수술실은 분만실과 다르게 많이 밝고 좀 추울거다. 우리가 따뜻한 담요 덮어줄테니 걱정하지 마렴. 하며 오늘이 Samuel 생일이잖아? 

얼마나 기뻐! 하며 계속 이야기 해주었다. 


16시간 전에 왔던 마취과 의사가 다시 한번 Epidural이 잘 드는지 확인하고 주사를 추가해서 넣고 

나는 머리에 수술 샤워캡이 채워진 채로 수술실로 이동되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미친듯이 떨려왔고 남편이 마지막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아서 손을 잡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마취과 레지던트 (이름이 기억안나는)는 계속해서 너무 잘 하고 있다며 머리 맡에서 이야기 해주고 

수술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누르는 느낌이 언제 날건지 등등을 계속 이야기 해주며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온몸의 떨림이 그치지 않고 정신이 혼미해 졌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기 울음 소리가 났고 

남편과 나는 울기 시작했다. 

수술실의 모든 사람들이 Happy Birthday Samuel! 하며 축하해 주었다. 


곧 깨끗하게 닦이고 모자도 씌워진 아기를 Megan이 데려와 남편에게 주고 남편이 우리 애기야- 하며 보여주는데도 나는 너무 어지럽고 몸이 떨려서 제대로 아기를 볼 수가 없었다. 


수술이 잘 마무리되고 모든 사람들이 나가고 나도 처음에 유도분만을 위해 32시간 전에 왔던 대기실로 옮겨졌다. 

이때의 기억은 사실 잘 없다 - 

나는 너무 긴장했고, 이 모든 일이 생각지도 못했고, 계획에 없었고, 

무엇보다 약 28시간 정도 잠을 자지 못했다.


약간 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이 아기를 안고 울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있다가 침대에 아기를 안고 뉘여서 병실로 돌아왔다. 


이렇게 내가 아기를 만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삼일.. 병원에서 겪었던 정말 수많은 감정과 수많은 일들..

내일 드디어 퇴원을 한다. 

포도를 신생아실에 맡겨놓고 난 오늘 밤은 잠시라도 이 글을 꼭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의 출산후기를 보면서 나의 아름다운 출산을 상상해 보고 많은 계획을 했다. 

진통을 기다리면서 맥에 담아간 예능을 보면서 참아보고 생일을 맞는순간 틀어줄 노래들, 순산 후 읽을 책들, 집에 일찍가서 해야 할 것들 - 

지난 일주일은, 아니 10개월, 아니다. 포도를 기다린 4년은 - 정말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는 중에 최근에 읽은 출애굽기 말씀이 계속 생각이 났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그들 가운데 있기위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여호와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리 - 라고 생각하며 왔는데 

결국은 내 생각과 내 계획이 항상 먼저였다. 


아기를 낳기까지 시간들, 

그리고 낳고나서 내일 퇴원까지 병원에서의 4박 5일 시간들은 

우리 부부에게 정말 .. 살아 있는 가족/육아 캠프이자 훈련의 시간이었다. 


내 계획대로 하나 된것이 없지만 정말 하나도 감사하지 못할 것들이 없다. 

아가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아직도 내 배에서 나왔는지 실감은 안난다)

우리를 가장 먼저 생각해주고 돌봐주는 최고의 간호사와 의사들만을 일주일 동안 내내 만났고 

우리는 정말 한 가족으로 더욱 돈독해 졌다. 연애 4년 결혼 6년동안 동생같던 남편이 처음으로 오빠같아졌고 (미안)

이제는 나도 좀 내려놓고 - 조금 불편하고 답답하더라도 남편이 하자는 대로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지쳐서 울었던 날도 있고 내일 퇴원 이후가 더 무섭지만 ..


신기하게도, 

이런 최악의 출산을 겪고도 친구들에게 한 말은 "할만하다" 였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아직도 남산만한 배에 너무 부어있고 정신없고 아픈 나의 모습이 창피하지가 않고 

앞으로도 내가 사람들에서 어떻게 보일 지가 .. 

인생 처음으로 두렵지가 않다. 


이제 우리는 둘에서 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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