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혜 Jul 09. 2019

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지난 가을부터 4개월 동안, 퇴근을 하면 넷플릭스를 켜고 좀비가 나오는 드라마를 틀어두었다. 이야기는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그렇듯 비슷하게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살아 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발단과 전개를 거쳐, 등장 인물들이 마음으로 이어져 가족 같은 동료가 되었다. 드라마는 그 다음 단계인 ‘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핵심 멤버 중 한 명을 죽였다. 상실감에 빠진 다른 인물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상황을 극복하며 서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자극적이고 클리셰 범벅인 에피소드들이 시시해서, 나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며 대충 곁눈 짓으로 힐긋거렸다.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에게 적당히 거리를 두며 시청했고, 한동안 그 드라마는 고요한 우리 집의 생활소음 역할을 해 주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드라마를 틀어두기 시작하면서, 처음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이 전개가 빤한 드라마를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보게 되었는지, 시즌 5를 넘어가는 긴 에피소드를 보면서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즌의 중반을 지났을 때, 내가 아끼던 등장인물이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나는 그 후로 시즌 2개가 더 남았지만 그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좀비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정신 없고 시끄러운 어딘가에서 나는 늘 동료를 잃고 울고 있었다. 잠을 깨도 슬픔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이 드라마와 관련된 꿈을 꾸는지,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반복해서 느끼는지 알 길이 없었다.


  꿈이 계속되던 어느 날의 새벽, 추운 공기에 놀라 눈을 떴다. 5년을 쓰던 전기장판이 더는 작동하지 않았다. 한 달 전 이사온 구축 오피스텔 외풍이 심해서 보일러를 틀어도 추웠다. 침대 옆 창문에서는 웅-웅 소리를 내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한기가 들어 깬 시간은 새벽 네 시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말아 몸을 웅크려 새벽의 적막 속에 들리는 보일러 소리를 한참 들었다. 낡은 기계 소리가 덜컥 덜컥 시끄럽게 들렸다. 그러다 문득 얕은 잠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이번 꿈에는 좀비도, 죽어버린 동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둥근 어깨를 말고 어딘지 모를 고요한 곳에 덩그러니 서 있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인은 나를 외면하고 등을 보이며 점이 되어 사라진다. 친구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걸어간다. 가족은 낯선 표정을 하고는 먼발치에 있는 문을 연다. 기다림의 시간이 무한히 남았고, 한 발도 뗄 수 없게 등과 어깨가 무겁다.

배에 힘을 줘 기침을 한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일부로 목 안을 긁으며 켁- 콜록 - 오랜 시간 헛기침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 연인이고 친구이고 가족이었던 사람들은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버려진 외딴 섬처럼, 잘려나가 시든 잎처럼, 물기 없이 말랐고 자꾸 부서졌다.



  동료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만남을 반복하며 뻔하게 진행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인연의 밀물과 썰물에 의연하게 굴었다. 헤어짐이 당연한 종말의 현장을 간접 경험하며 멀어져 가는 것들에 대해 무덤덤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변 사정을 외면하고 먼 도시로 도주하듯 이사와 있었다. 낯선 도시의 주말이면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다시 혼자 남겨졌다. 텅 빈 집의 침대에 누워, 누구라도 좋으니 가까이에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텅 빈 집에서 이마의 주름이 더 짙어진 엄마가 식탁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생각할 때면, 그를 버려두고 온 기분이 들었다. 나의 늙은 강아지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고, 남은 시간은 밖을 그리워하며 빠른 속도로 나이를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멀어진 거리만큼 벌어진 관계의 틈으로 시간이 쌓여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골짜기 사이로 소중한 사람들을 흘려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스스로 떠나온 주제에 언젠가 영원히 헤어질 모든 것들에게 조바심이 났다. 그저 적막한 방의 소리를 채우기 위해 틀어놓은 드라마에서조차 나는 마음을 퍼다 주고는 이내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종말도 없고, 당연히 좀비도 없는 현실에서 나는 스스로 시작한 헤어짐이 두려워 동료를 눈앞에서 잃은 사람처럼 공허하게 울었다. 방은 너무 고요해서 덜컥거리는 보일러 소리와 스산한 바람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마치 좀비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더 이상 틀어놓을 드라마도 없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 현존하는 인류 문명이 붕괴하고 난 뒤를 다루는 세계관, 혹은 그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픽션




6 번째 집 : J 오피스텔 [2년 거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