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moon society Aug 08. 2019

이문의 결, 그리고 여기에 남은 것은

하나의 공간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원고지 위 작가의 펜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쓰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공간의 결을 이룬다.


한 동네를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새롭다. 동네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동네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획일적인 주거 양식이 이미 만연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 공간의 결을 가지고 있는 동네들이 남아있다.


이문이 그런 동네이다. 처음 이문을 보았을 때 오래된 한지의 결이 떠올랐다. 투박한 모습들이 서로 포개어져 거친 결을 가지고 있는 듯해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고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한지. 대도시인 서울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머물수록 정이 가는 동네, 나에게 이문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이문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재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는 이문의 새 출발이라며 기뻐했고 누구는 보다 멀끔해질 동네의 모습을 기대하며 좋아했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이문이 가진 결이 지워질 것이라 생각하니 베어지는 고목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 이문은 더 깔끔해 질 것이고 더 편리해질 것이다. 바뀐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이문의 새로운 결을 만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오랜 시간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만들어지기는 힘들지만 지워지기는 쉬우며, 한번 지워지면 세월이 무색하게 스러져버린다. 결국, 재개발로 이문의 한지 같던 결은 사라져갈 것이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이문에는 수많은 소리와 온기가 여전히 남아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파도가 밀려간 뒤 바닷가의 모래가 머금은 아쉬운 물기처럼.
빈 집을 보다 문득 느껴지는 공허함에 놀라 어떤 온기를 생각했을 때,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그리움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 그리움이 짙어졌다 아득해질 때쯤엔 하나의 추억이 영글어있었다.

이문의 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추억을 입에 물고 잠이 든다.
오늘 밤도, 그리고 앞으로도.

작가의 이전글 22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빵과 피자 굽는 냄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