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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샘 Jun 26. 2016

연애세포

모든 일에 치이는 당신, 당신의 연애세포는 안녕하십니까?



<연애세포>

[모두의 마블]
다크 초선 출시 기념 S카드 선물! 게임하러 가기!

-헉, 선생님. 죄송.

카톡, 하고 울려서 핸드폰을 보니 게임 문자와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와 있었다. 프로필은 낯선 남자의 상반신 사진. 선생님이라는 호칭. 누구인지 머리를 굴려봤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해 할 시간도 없었다.

“유경씨! 얼른 번역본 올려. 한두 페이지 번역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려? ”

슬슬 아저씨처럼 배가 튀어나오는 김 과장이 독촉했다. 분명 결혼하기 전에는 저렇게까지 살쪘던 것 같지는 않은데. 날씬했던 사람이라 살이 찌는 게 더 티가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 과장이 김 대리였던 그 시절, 한때 속으로나마 좋아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다 옛날 얘기다.

벌써 3년차 짬밥이지만, 이놈의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줄어들거나 능숙해지는 기미를 안 보인다. 새벽반 학원에서 생존을 위한 영어 수업을 듣고 출근해 커피 한잔 마시고 오전 근무를 정신없이 하다보면 훅하니 점심시간이다. 일은 제때 끝나는 법이 없다. 오늘도 9시나 10시쯤이나 집에 갈 수 있는 견적이다.

주변 친구들이니 직장 동료들은 비슷한 상황에서도 연애도 잘하고 결혼도 하던데, 나는 도무지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썸남이니 썸녀니 하는 요즘 애들 말도 그냥 웃기다. 바빠 죽겠고, 피곤해 죽겠는데 남녀 관계에서도 피곤을 자처하는 30대는 거의 없다.

직장에서 서서히 호감을 가지면서 하는 연애나 소개팅에서 첫 눈에 반하는 연애. 시간 없는 30대에게는 그 두 선택지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김 과장이 1년 전 결혼하면서 1번은 이미 산산조각 났고, 2번은, 글쎄 가능하기는 한 이야기인가?

-브렉시트 찬반 논란, 과연 어느 것이 이득인가?
두 페이지 빼곡히 써진 머리 아픈 경제 이슈를 번역한다. 요즘 난리인 브렉시트 이야기다. 물론, 나에게는 딴 세상이야기. 하, 엄마가 어학연수 보내준다고 할 때 돈 좀 많이 들어도 영국으로 간다고 떼 좀 써볼걸 그랬다. 영국식 영어가, 아무래도 더 폼 나는데.

-선생님 바빠요?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던 카톡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다시 떴다. 분명 누구세요, 라고 물었는데 바빠요라니.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다.

-죄송한데 누구세요?
빨간색 광역버스에는 나처럼 불쌍한 야근족이 가득했다. 다들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나라고 다를쏘냐. 나만의 일방통행인 웹툰이나 보고 연예인 기사나 읽고 있는데 진짜 오랜만에, 사람으로 인정 해주는 듯 한 메신저가 울렸다는 것 자체로, 약간 설레었다.

-사진
잉, 웬 사진이지라고 열어 본 메신저 창에는 멀끔하고 깨끗하게 잘 생긴 청년의 사진이 하나 와 있었다. 역시,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얼굴이다.

-사진
사진이 하나 더 왔다. 이번에는 소년의 사진이다. 초등학생을 갓 벗어난……. 중학생의 얼굴. 뭐, 이때도 역시 잘 생겼다.

-이래도 몰라요?

나름 영문과라고 영어 과외를 여러 개 했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나이 대는 다양했다. 지금 보내 온 이 소년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스물한 살 때 얻을 것이다. 과외는 사실 동네 과외가 최고다. 가까우면 괜한 교통비 지출도 막을 수 있고 왔다 갔다 하면서 쓰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 녀석은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꼴통이었던 것 같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오후의 긴 수다를 나누던 우리 엄마는 명문대 영문과 다니는 우리 딸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났고, 꼴통 아들을 둔 아주머니는 내 기나긴 공부와의 투쟁을 듣고 이거다 싶었던 거다. 게다가 엄마는 3개월 만에 ‘알파벳은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공약을 내 걸었다.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과외경험 두어 번. 나도 숙달된 교사는 아니었지만 첫 만남부터 말은 바르게 하지만 다리를 삐딱하게 꼬아 앉은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그 녀석. 하, 중학교 2학년이나 된 녀석이 알파벳을 바르게 쓰는 법도 모른다. P를 쓰랬더니 기둥이 아닌 동그란 부분부터 쓰고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이 나이대의 아이는 처음이라 당황했다.

“선생님, 좀 놀아요. 아 힘들어 죽겠네 진짜.”
본색은 어떻게 숨길 수 없다고 했나, 두 번째 수업부터 녀석은 본격적인 농땡이를 부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아 진짜, 스마트폰 꺼내요? 예고했어요?”
“엄마 부르기 전에 집어넣어라.”
“아 하루 만에 알파벳 바르게 다 썼잖아요.”
앗, 그러고 보니 꼴통한테 하루에 너무 많은 진도를 나가려고 했나? 그래, 조금만 져주자. 열 다섯짜리 꼬맹이한테. 알파벳도 하루 만에 다 잘 쓰고.

“그래, 그럼 조금 쉬어.”
“땡큐, 쌤.”
그러더니 냉큼 이어폰을 꺼내서 음악을 들었다.

“뭐하냐.”
“세상이 나에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요.”
“미치겠다. 혼자 듣냐?”
“그냥 틀어놓으면 엄마도 다 들을 것 아니에요.”
“나도 심심하다.”
“선생님도 들어보시던가, 그럼.”
그 녀석이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정신없는 랩이었다.

“이런 게 좋냐?”
“쌤 뭘 모르네, 진짜.”
아무튼 추억 회상은 이쯤하고, 나는 그 녀석에게 답장을 보냈다.

-잘 컸네. 신의인. 잘 지내?
-감사. 센세는요?
-팍팍한 직장인이다.
-더 팍팍한 군인임다.
-와, 벌써? 신기하네. 근데 군인이 폰 어떻게 써? 공익이야?
-공익 아니에여 유격하고 왔어요.
-응? 그게 뭐야. 공익이 아니라고?
-육군 상근 예비역 55사단 188연대 병장 신의인.
-병장? 곧 제대하겠네.
-아, 선생님 타이밍 기가 막히시네. 일주일 남았다고요, 제대.
-축하.
-밥 사줘요.
-잉?
-불쌍한 군인 제대기념으로 밥 사줘요.
어이가 없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과외 할 때도 자기가 요구하고 싶은게 있으면 바로 어필하고는 했지. 그 성격 어디 가나.

-그래. 불쌍한 군인.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예약입니다.
-알겠다. 동네 맛 집이나 찾아 놔라. 비싼데 말고.


“센세 여기에요!”
의인이 손을 흔들었다. 동네 주택가 주변에 조그마한 맛 집과 찻집들이 생긴다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 떠들썩한 체인점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오랜만에 본 녀석은 어릴 때 얼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열다섯 살일 때도 변성기도 오지 않은 꼬마였으니. 그 뒤 사춘기에 얼마나 변했을까. 키는 180정도 되는데다가 골격이 커져 성인 남자 티가 확 났다. 뭐, 상근 예비역이라지만 군대도 다녀왔으니 진짜 남자가 되었겠지.

맛있게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했다. 얘가 어릴 땐 나이 차이가 엄청나 보였는데, 다 크고 나니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쌤, 기억나요? 나 때린 것.”
당연한 이야기지만 꼴통과의 수업은 순탄치 않았다. 파닉스로 넘어가서는 글자 하나 쓰는 것, 발음 한 번 따라하는 것을 어찌나 지겨워하던지 하루에 알파벳 2개 소리 배우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3개월밖에 없으니 어떻게 하겠나.

나는 생전 들어 본적 없는 매를 들었다. 숙제를 7번인가 안 해 온 날이었지 아마. 과외하면서 얘 말고는 누굴 때려본 적이 없어서 기억난다. 어느 정도로 세기를 조절해야 할지 몰라 처음에는 살살 때렸는데, 이놈이 숙제 또 안 해와야지, 라고 약을 올리는 바람에 두 번째는 강도조절에 실패, 너무 세게 때렸다. 눈물까지 맺혔었는데.

“그때 쌤이 나 엄청 아프게 때려서 나 충격 먹었는데.”
“미안하다 그 땐.”
“아 근데 쌤이 다르게 보이긴 하더라. 순한 줄만 알았는데.”
“너도 다르게 보이긴 하더라.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서는. 센 척만 해서 센 줄 알았잖아. 막 무서운 랩 같은 것 듣고.”
“무서운 랩?”
“들려줬던 것, 기억 안나?”
“아, 그랬나. 쌤, 오랜만에 랩 한 번 안 들어 볼래요?”
“어. 싫은데.”
“아 그러지 말고.”
의인이 들려준 랩은 독특하면서도 비트와 발음이 인상적이었다.

“괜찮네. 누구 거야?”
“이 사람 일주일 뒤에 공연하거든요. 보러 갈래요? 나랑 아는 사이라 표 공짜인데.”
“나 랩 잘 모르는데.”
“팔 들어봐요.”
의인은 팔을 들고 바운스랄까, 리듬을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왕년의 제자한테 가르침을 받다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기분이 묘한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인은 좀, 지나칠 정도로 잘생겼다.

“담주에 봐요, 쌤. 아, 클럽 갈거니까 좀 짧은 옷 입고 와요.”
클럽? 공부하랴 취업하랴 일하랴 치여서 사실 몇 번 가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애랑. 근데 설레기엔 난 너무 나이를 먹었고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남자애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의인이 다시 연락을 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빈말이겠지.


목요일이 되었는데도 녀석은 연락하지 않았다. 제대했으니 얼마나 바쁘겠어. 역시 빈말이었군. 야근을 하고 있는 나를 김 과장이 불러냈다. 우리 팀은 다 퇴근하고 과장과 나 둘 뿐이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좀 농땡이도 치면서 같이 놀고는 했는데, 김 과장이 결혼하고 나서는 통 단 둘만 야근하는 날이 없었던 것 같다. 뭐, 유부남이니 그런 쪽에도 신경을 썼겠지.

“유경아.”
사석이니만큼 편한 호칭이다. 예전엔 늘 이렇게 불렀는데. 나야 선배니까 꼬박꼬박 호칭 붙여가며 불렀지만.

“너 몇 살이지?”
아저씨 회사원들의 단골대사를 김 과장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우리가 뜸하긴 했었나보다.

“서른이요.”
내가 대답했다.

“아, 난 너 처음 들어 올 때만 생각하니까, 항상 이십대 같다 야.”
또 시작하는 남자들이 던지는 빈말. 뭐 부탁할게 있나보다, 하고 나는 김 과장이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결혼 괜히 한 것 같다.”
하지만 김 과장이 던진 말은 일을 부탁한다느니 하는 사소한 말이 아닌, 묵직한 펀치였다.

“아 왜요? 엉뚱한 소리하고 있네 이 양반이.”
“진짜 사랑하던 여자랑 결혼을 못해서 그래.”
대번에 그가 아내가 아닌 누군가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밤의 어둠을 핑계 삼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약간 우수에 찬 듯 한 눈빛, 나 아니고 다른 여직원한테는 농 한 번 던진적 없는 성격. 지금은 배 나온 아저씨지만 한 때 나를 자극했던 그의 모습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입이 말랐다.

“그게 누군데요?”
“하, 비밀이야.”
김 과장은 괜히 내 머리칼을 휘저어 엉망으로 만든 다음, 먼저 휙 하니 들어가 버렸다. 와이프랑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김 과장이 어련히 힘든 일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고. 난데없이 결혼하고 1년 만에 불러 내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뭐하러 결혼은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계산적이고, 복잡하며 엉망이기까지도 한 이런 어른의 사랑은 괜히 사람을 지치게만 만든다.

사무실로 들어와 혹시나 김 과장이 뭐라도 한 마디 더 얘기 할까, 기다렸지만 그는 들어왔냐는 말도 없고 메신저로 말도 걸지 않은 채 자기 일만 후딱 끝내고 나 혼자 사무실에 남겨놓고 퇴근해 버렸다. 하, 사람 마음은 다 헤집어 놓고 나름 집에 있는 와이프한테 죄책감을 느끼나보다. 어쨌든 잠이 오지 않아 나는 밤새 뒤척였다.

“과장님 와이프 임신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금요일 점심시간 구내식당. 지나가던 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어, 어. 고마워.”
김 과장이 대답을 했다. 휴, 겨우 아빠가 되는게 무서워서 그 헛소리를 지껄인거냐. 기뻐해야 하는게 먼저 아닌가. 하긴, 그 책임감이 얼마나 무겁겠어. 나는 별 말 없이 밥을 깨작이며 김 과장을 쳐다보았다. 과장은 괜히 내 눈빛을 피했다.

-쌤! 연락이 늦었죠. 오늘 밤 괜찮아요?
의인이었다. 내가 핸드폰을 들자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지 김 과장이 물었다.

“유경씨 남친 생겼어요? 점심시간에 통 카톡 오는 걸 못 봤던 것 같은데.”
“하하, 아니에요.”
“유경씨가 올 해 몇 살이었더라?”
어제와 똑같은 질문. 나는 갑자기 입에 쓴 맛을 느꼈다. 이 인간은 나한테 관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어제도 그저 슬쩍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바보같이 미끼에 걸려들어 실컷 망상하고 고민했구나. 내 스스로가 어이없게 느껴졌다.

“서른이요.”
“유경씨도 얼른 시집가서 애 낳아야지.”
구역질나는 발언이었다. 결혼한 것 후회한다며? 왜 남한테는 강요하는데? 하하. 나는 입으로만 웃고 식판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 회사 앞 벤치에서 의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일찍 말했어야지. 나 완전 오피스룩이야.
-아, 깜빡했네, 팍팍한 직장인인 것. 근데 어차피 공연은 새벽 1시부터라 집에 가서 옷 갈아 입고 가면 되요.
-1시?
-왜요 너무 늦어요?
응, 이라고 보내려다가 맘을 고쳐먹었다. 김 과장 그 새끼 때문이 영 뒷맛이 씁쓸했다. 공연이나 보면서 실컷 즐기면 좀 잊게 되겠지.

-아니, 재밌겠다.
-그럼 12시에 근린공원 앞에서 봐요. 이쁘게 하고 와요.
-어 그래.
어제 실컷 야근하고 잠까지 설친지라 오늘은 좀 빨리 퇴근할 수 있었다. 몸매선이 드러나는달라 붙는 블랙 미니 원피스를 입고, 공들인 화장을 하고 근린공원 앞으로 나갔다. 녀석은 전처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쌤, 여기요.”
타이포그래피로 장식된 흰 티셔츠에 심플한 바지차림. 별로 차려입은 것 같지도 않은데 워낙 마스크랑 몸이 좋아서 그런지 멋져보였다.

“야, 너 왜 이렇게 멋지냐?”
“응? 쌤도 이쁜데요? 와, 이런 모습 처음 본다.”
의인은 빈말이 아닌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굴에서 시작해 그의 시선이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한참 어린애가, 싶다가도 멋진 애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은근히 기분 좋았다. 숨기거나 느물거리거나 하지 않는 직선적인 표현이 차라리 맘이 편했다.

클럽 입구에 도착해 의인이 안내 하는 대로 어두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클럽은 시끄러운 음악이 쿵쿵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니까 팔 좀 잡아요!”
의인이 소리쳤다. 클럽 내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가득 찬 사람들을 헤치고 무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의인이 워낙 커서 그런지 몇 번 팔을 놓쳤지만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남자다운 팔이었다.

랩 공연은 흥미로웠다. 아니, 아주 재미있었다. 잘 모르는 나의 눈을 맞춰가며 의인이 팔을 드는 부분이나 따라할 수 있는 훅을 알려줬고, 그 덕에 나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게스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의인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자애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닥터휴인가, 아무튼 인디씬에서 나름 유명한 랩퍼인 듯 했다. 의인이 몇 소절 랩을 했는데, 나는 곧 그게 의인이 지난주에 들어보라며 꽂아줬던 그 이어폰 속의 목소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재밌었어요?”
“응, 너 언제 그렇게 영어 잘하게 됐어?”
“다 선생님 덕이죠 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냥 어린애로 보였던 의인이 좀 다르게 보였다.

“휴 오빠 아니에요?”
예쁘장한 여자애 셋이 말을 걸었다.

“어, 맞는데.”
“꺄! 오빠 싸인 해주세요. 오빠 완전 팬이에요. 오빠 얼마 전에 제대 하셨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의인이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뒤로 물러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뭘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쟨 어린애고, 나는 늙은이다. 그의 곁에 있는 어린 여자애들 특유의 생기와 독특한 화장법과 빛나는 피부를 보고 있자니, 야근에 찌든 나의 몸뚱이가 새삼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느껴졌다. 좀 서글픈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애들 셋이었는데, 사인을 받고 그러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생겼는지, 의인의 주변에는 대여섯의 여자애들이 몰렸다. 같이 가긴 틀렸다.

“먼저 간다.”
나는 의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집 방향으로 향했다.

“아, 혼자 가면 어떡해요. 어차피 지하철 끊겨서 택시타고 가야된다고요. 같은 동네 살아서 좋은 게 뭐야. 택시 값 아껴야지.”
의인이 여자애들을 뒤로 하고 나를 쫒아왔다.

“뭘 집에 가. 쟤들이랑 술이나 좀 마시면서 밤새서 놀지.”
내가 말하자 의인이 웃었다.

“쟤들이랑 놀아서 뭐하게요. 다 어린애들인데.”
“그러는 넌?”
난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난 어른이죠.”
“아, 그러셔요.”
“쌤, 아시겠지만 제가 좀 꼴통이잖아요. 그쵸?”
“뭐 안 본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좀 바뀌었겠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저 영어 가사 좀 봐주세요. 아 쓰면서도 이게 맞는 말인지 조마조마해서 말이지.”
결국 네가 바라던 바가 이거였구나. 그래, 늙은 선생님이랑 그 댓가로 잘 놀아줘서 참 고맙다. 오래 질질 끌지 않고 착각하지 않게 해줘서 고맙고.

“잘 하던데 왜.”
“감수만 좀 해줘요. 페이도 지불할게요.”
“왕년의 선생님으로 무료봉사할게. 어린애한테 무슨 페이야 페이는.”
“쌤 남자친구 없죠?”
“어. 그래. 눈치 한번 빠삭하네.”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세 시간 어때요? 페이로.”
의인이 다시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냉정한 것 같기도 하고, 활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한 눈동자.

“좋아.”
나이 서른에 이십대 초반 넘은 제자를 데리고 과연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답했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요?”
의인이 은근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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